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상세보기
간사이조선인연맹 (關西朝鮮人聯盟(關西) )
활동기간 1922년 12월 ~ 1920년대 중반
활동 지역 : 간사이(關西)
내용
  오사카(大阪)에 결성된 조선인 차별철폐 운동단체. 1922년 12월 6일 조선인협회 회장 이선홍(李善洪)과 아나키스트활동가인 최선명(崔善鳴)이 일본 수평사(水平社)계열의 활동가들의 지원을 얻어 설립했다. 간사이조선인연맹의 설립이 12월 3일 오사카 지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 오사카 조선노동동맹회 설립 직후에 이루어진 점은 의미심장하다.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는 사회주의자(볼세비키계) 중심으로 일본노동총동맹의 지원을 받았으며 오사카 지역 유지였던 이선홍 등을 배제하는 형태로 설립됐다. 반면 간사이조선인연맹은 아나키즘쪽에 가까웠고 ‘수평사의 자매단체’로 여겨졌다. 저명한 부락 해방 운동가 기모토 쇼타네(木本正胤, 기모토 본진〔木本凡人〕), 요네다 도미(米田富), 이즈미노 리키조(泉野利喜藏) 등이 이선홍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간사이조선인연맹의 설립에 관여했다. 요네다는 선언·강령·결의 작성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간사이조선인연맹의 강령은 ‘스스로의 행동으로 해방을 쟁취할 것, 경제와 직업의 자유를 요구할 것, 차별하는 자를 철저히 규탄할 것’ 등으로 수평사의 강령을 대부분 답습했다. 선언 중에 ‘우리는 조선인이 지금 독립한다고 해도 우리 조선의 무산민으로서 행복을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쓰디쓴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하고, 강령에서 ‘우리는 조선독립운동과 교섭이 없고 전념으로 인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맹진한다’고 해 정치투쟁을 부정하고, 착취제도가 온존된 독립국가 수립은 목표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는 독립운동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차별 없는 세상’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보이지만, ‘내선융화’를 거부감 없이 수용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1923년 4월 기관지로 일간 신선일보(新鮮日報)󰡕 발간을 기획했다. 기관지 책임자는 조선인협회 총무인 김동혁(金東赫)이였고 일본인 수평운동가들도 제작에 참가했다. 4월 23일 제1호로 1만 5천부를 냈으나 ‘질서를 문란시키는’ 발간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발매금지를 당했다. 김동혁과 이선홍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관지는 다시 속간되지 못했다. 1924년 3월 전국수평사 제3회 대회에 간사이조선인연맹 이사 최선명이 참석했다. 조선의 형평운동과 연락한다는 대회결의에 따라 최선명은 수평사와 형평사의 교섭을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또 이 대회 직전에 일어난 경찰의 이선홍 구타사건 항의를 위해 도쿄에서 고위당국자들을 만나고 돌아와 간사이조선인연맹 협의회에서 경과를 보고했다. 최선명은 5월에 대지진피학살조선인의 추도를 겸해 도쿄 교섭에 관한 보고연설회를 열고 ‘(1) 정부는 조선인 학살 진상을 발표할 것, (2) 조선인 노동자의 구제 정책을 확립할 것, (3) 경관의 조선인에 대한 모멸적 취급을 철저히 없앨 것’ 등을 요구하고자 했으나 실제로 연설회를 개최하지는 못한 듯하다. 1924년 4월 9일 최선명이 중심이 돼 간사이(關西)조선인연맹과 수평사의 지원을 받아 제주도민대회를 오사카 시민관에서 개최했다. 이 대회는 제주도 사람들을 모멸하는 상애회에 대한 비판의 성격도 가졌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회에서 일본을 배척하는 이민법을 심의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일본에서는 항의 운동이 들끓었다. 수평사는 미국의 차별에 분노할 뿐 아니라 일본 내부 부락차별과 조선인 차별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자 4월 27일 임시대회를 개최했다. 간사이조선인연맹은 이 대회에 다음과 같은 축사를 보냈다.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제국의 모멸을 받고 있다. 일본인이 유색 인종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배척을 받는 것은 단지 일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全)아세아 민족에 대한 모멸이다. 궐기하라!” 이후 최선명이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결성하는 등 활동의 중심을 옮기면서 간사이 조선인연맹은 자연스럽게 해소된 듯 하다. 1926년 1월 3일 이선홍이 선우회(善友會)라는 내선융화단체를 조직하고자 발회식을 열었을 때 간사이조선인연맹의 고제균(高濟均), 윤혁제(尹革濟) 등이 ‘일선융화’라는 취지에 반대하며 결성을 반대한 것으로 볼 때 이미 간사이조선인연맹 등 아나키스트세력은 이선홍과 결별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 朝鮮日報 1926.1.7
•  塚崎昌之, 「1920年代、大阪における'內鮮融和'時代の開始と內容の再檢討」, 在日朝鮮人史研究 37, 在日朝鮮人運動史硏究會, 2007
•  塚崎昌之, 「水平社·衡平社との交流を進めた在阪朝鮮人ーアナ系の人々の活動を中心に」, 水平社博物館硏究紀要9, 2007
문헌별 참조 내용
塚崎昌之, 「水平社·衡平社との交流を進めた在阪朝鮮人ーアナ系の人々の活動を中心に」, 『水平社博物館硏究紀要』9, 2007 : 1922년 12월 6일 조선인협회 회장 이선홍(李善洪)과 아나키스트활동가인 최선명(崔善鳴)이 일본 수평사(水平社)계열의 활동가들의 지원을 얻어 설립. 간사이조선인연맹은 아나키즘쪽에 가까웠고 ‘수평사의 자매단체’로 여겨졌다.
『조선일보』1926.01.07 : 1926년 1월 3일 이선홍이 선우회(善友會)라는 내선융화단체를 조직하고자 발회식을 열었을 때 간사이조선인연맹의 고제균(高濟均), 윤혁제(尹革濟) 등이 ‘일선융화’라는 취지에 반대하며 결성을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