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상세보기
가나가와현내선협회 (神奈川縣內鮮協會(神奈川縣) )
활동기간 1926년 2월 ~ 1939년
활동 지역 : 가나가와현(神奈川縣)
내용
  1920년대 중반 가나가와현(神奈川縣) 당국이 결성한 내선융화단체. 간토(關東)대지진 이후 치안 유지, 재일조선인 통제를 위한 정책 정비,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1926년 2월 25일 결성했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오사카부내선협화회(大阪府內鮮協和會,1924년 5월 설립), 효고현내선협회(兵庫縣內鮮協會,1925년 10월 설립)와 마찬가지로 현(縣) 간부들이 단체의 주요 간부를 맡은 관제단체였다. 가나가와현에서는 간토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도 불구하고 지진 후의 복구공사와 게이힌(京濱)공업지대의 조성을 위해 조선인 노동자가 급증하는 상황이었다. 현 당국은 치안 유지와 재일조선인 통제를 위해 정책 정비와 함께 가나가와현청 사회과에 가나가와현내선협회를 설립했다. 설립 취지를 보면, 재일조선인들이 “언어, 풍속, 습관, 교육 등의 차이로 쉽게 내지 사정에 적응하기 어렵고 구직 및 거주 등에서 심히 곤란과 불편을 느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생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비참한 경우에 있으므로 이를 방임하는 것은 사회 공존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전제하고, “공동 숙박소, 직업소개소, 야학교를 설치해 복리를 증진하고 내선융화의 실을 거두고자 한다”고 명시했다. 규약 1조에 따르면 단체의 목적은 “내선인의 친목을 도모, 재현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설(施設)’이고 규약 2조에는 ‘내선융화에 관한 조사 연구, 숙박소 설치, 직업 소개 및 수산, 곤궁자 보호 구제, 야학교 강습회 개최, 내선융화에 관한 강연회 개최, 내선융화에 관한 잡지 발행, 내선융화에 관한 표창” 등의 사업이 제시되었다. 가나가와현내선협회는 1926년 9월, 현에서 7,500엔을 받고 재단법인화했다. 내선협회 회장은 가나가와현 지사가 맡았고, 현내의 조선인 특히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직 대상으로 삼아 이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부회장은 학무부장이며, 고문 6명, 상무이사 1명(현사회과장 겸임), 이사 2명, 평의원 17명, 직원 5명을 두었다. 주요 간부는 다음과 같다. 이사 다키타 다쓰젠(滝田達禪, 종교가)외 기타 1명, 고문 요코하마(横浜) 시장 조역(市長助役), 현경찰부장 등 6명, 평의원 엔도 시도(遠藤至道) (일본적십자사[日本赤十字社]요코하마[橫濱]지부 주사) 등 17명이다. 간부는 일본인 중심이었지만 이사 중 1명, 평의원 중 3명, 직원 중 3명은 조선인으로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현 당국자가 아닌 민간인으로서 내선협회의 간부가 된 일본인들은 대부분 항만 하역업자, 토건(土建) 하청업자 등 조선인 고용주, 종교가, 교육자들이었다. 조선인 간부인 최병림(崔柄琳), 강인빈(姜璘彬), 윤회근(尹晦根), 최귀석(崔貴錫), 이성칠(李誠七), 신쾌선(辛快善) 등은 경제적·사회적으로 일반 재일조선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던 유력자들이었다. 강인빈은 1921년 6월에 친목 목적으로 결성된 선인동지회구락부(鮮人同志會俱樂部)에서도 활동했다. 선인동지회구락부는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난 후 구제활동을 했으며 무료숙박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강인빈은 또 1930년 8월에 설립된 내선융화단체 신진회(新進會) 회장이 되었다. 신진회는 회원 수가 1931년 100명, 1932년 500명, 1933년 60명인 단체였다. 이성칠은 1924년 4월 31명의 토공들로 조직된 선인노동조합(鮮人勞動組合)의 주간이었고, 같은 해 11월 ‘조선인 교양과 선도’를 위해 애호회(愛護會)를 설립하기도 했다. 선인노동조합은 ‘내선연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곧 유명무실화되었고 애호회는 당국의 원조를 받아 요코하마시(橫濱市)에서 결성된 단체였다. 초기에는 직업 소개, 간이숙박소 경영, 내선융화에 대한 계몽활동 등을 벌였다. 그러나 곧 조선인들이 민족운동이 활성화됨에 따라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1927년 간이숙박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회관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뇌물 사건은 민족 운동세력의 주된 공격 소재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2일,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노동농민당 가나가와(神奈川)지부 연합회 주최로 요코하마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총독 정치비판연설회'에서, 김한경(金漢卿)과 김천해는 내선협회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제한다는 가면을 쓰고 내무성과 민간에 이만일천여 원 기부받아 횡령한 사실’을 폭로하며 ‘이런 단체(내선협회)는 해산시킴이 마땅하다’고 공격했다. 내선협회는 또 토목사업 하청을 통해 조선인의 노동과 임금을 착취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처럼 조선인 운동세력과 대립하는 형국이 되고 재정 압박의 요인도 겹쳐 조선인들의 생활상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하면서 가나가와현내선협회의 사업은 1930년대 중반까지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했다. 가나가와현 조선인들의 동향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존속했을 뿐이었다. 1926년 11월 현내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내선융화’라는 작문을 현상 모집해 내선융화 현상작문집󰡕을 간행했고 1927년 요코하마(横浜)의 네기시정(根岸町)에 조선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을 건설했다. 1928년 내선협회 간부인 무라야마 다이센(村山大仙)이 천황 즉위식을 기념해 사회사업 공로자로 훈장을 받았다. 이때 협회 간부인 최병림은 무라야마의 ‘내선융화에 대한 공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황실에서는 메이지(明治)대제 이래 전통적으로 진정한 조선인 애무(愛撫)의 성려(聖慮)를 보여주시어, 우리는 오로지 감읍(感泣)할 수밖에 없다. (중략) 대사(무라야마 다이센을 말함)의 광영(光榮)은 바로 우리 2.000만 동포의 기쁨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실로 일한합방의 진정한 정신, 진정한 의의를 올바로 체득해 실현했기 때문이다.” 조직이 다시 정비되고 회원 수가 늘어난 것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시체제에 들어서면서였다. 현 특고과와 사회과가 지부 설치를 주도하면서 현내 각지에 내선협회 지부와 분회가 설치되었다. 1937년에는 8개 지부 16개 분회, 1938년 5개 지부 2개 분회, 1939년 2개 지부 1개 분회가 생겼다. 1939년이 되면 총 15개 지부 19개 분회에 약 4,0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리는 큰 조직이 되었다. 1930년대 말 각 현별로 조선인을 망라, 통제하는 협화회가 설립됨에 따라 가나가와현내선협회는 1939년경 가나가와현협화회로 자연스럽게 이행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내선협회 주최로 ‘가나가와현 재주조선출신자 지도자강습회’를 개최했다. 약 5일간에 걸쳐 윤리, 종교, 국가, 위생, 사회에 관해 강습했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신을 주입하고 황민화와 내선융화를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강습회를 수료한 사람들은 이후 경찰과 긴밀히 연락하며 활동했고, 당국에서는 일정 기간 후에 그들의 활동상황을 청취했다. 강습회 수료자들을 중심으로 내선협회 지부나 지회를 건설하기도 했다. 1936년 3월에는 요코하마, 가와사키(川崎), 요코스카(橫須賀)등 3개 도시의 직업소개소 관계자 4명, 조선인을 상시 5명 이상 고용하는 사업주 6명을 불러 조선인 취직 문제에 관한 좌담회를 개최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우량선인’ 29명을 소집해 조선인의 주택, 위생, 직업 기타 문제에 관한 좌담회를 열었다. 1938년 1월, 조선인 지원병제 실시가 발표되자 내선협회의 조선인 간부인 최병림, 신쾌선은 공개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나타냈다. 지원병 실시를 통해 “과거에 일본의 은혜만 입고 있던 조선인이 당당하게 국민의 중대한 사명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요지였다. 같은 해 4월 8일 내선협회 요코하마(橫濱) 지부에서는 총회를 개최하고 결의와 선언을 채택했다. 결의사항은 “국체 관념의 명징으로 황운을 부익해 받들 것’, ‘협조·협화 정신의 실천궁행(躬行)’, ‘사회 생활에 대한 적극적 참가 및 봉사 생활의 철저” 등이었다. 내선협회 요코하마지부 등 4개 지부는 1939년 2월의 기원절 행진에 참가했고, 같은 해 4월 15일에 열린 일본군 전사자들의 합동 장례식 행사에서 내선협회 오다하라(小田原) 지부(지부 이사는 최병림)는 회원 25명을 동원해 노력 봉사를 주도했다. 1939년 말 가나가와현협화회로 개조되었다.
참고문헌
• 特高月報 1936.3,11,12, 1939.2
•  在留朝鮮人主要團體現勢一覽表 각년도.
•  內務省社會局第一部, 「朝鮮人勞動者に關する狀況(1924)」[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第一卷, 三一書房,1975]
•  朝鮮日報 1927.8.11
•  横浜貿易新報 1928.12.27, 1938.1.20,4.9, 1939.4.18
•  朴慶植, 「日帝時期における'協和会'について-在日朝鮮人支配の内務・厚生省外郭団体」, 季刊現代史 5, 現代史の会, 1974
문헌별 참조 내용
朴慶植 「日帝時期における'協和会'について-在日朝鮮人支配の内務・厚生省外郭団体」 『季刊現代史』 5, 1974, 137-8쪽. : 설립취지 : 언어, 풍속, 습관, 교육 등 상위 때문에 용이하게 내지 사정에 적응하기 어렵고 그 구직 및 거주 등은 심히 곤란과 불편을 느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생활상 행복을 향수할 수 없는 비참한 경우에 있으므로 방임하는 것은 사회 공존의 이상에 어긋남. 현청사회과 내에 내선협회 설립, 공동숙박소, 직업소개소, 야학교 설치, 동포의 복리 증진, 내선융화의 실 거둠. 규약 1조: 본회는 내선인의 친목을 도모, 재현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설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조 : 사업내용 1. 내선융화에 관한 조사연구, 2. 숙박소 설치, 3. 직업소개 및 수산, 4. 곤궁자 보호구제, 5. 야학교 강습회 개최, 6. 내선융화에 관한 강연회 개최, 7. 내선융화에 관한 잡지 발행, 8. 내선융화에 관한 표창, 9. 각호 외에 제1조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사항. 역원 : 회장 현지사, 부회장 현학무부장과 회장 위촉 1명. 상임이사는 현사회과장, 이사는 滝田達禪(종교가), 기타 1명, 고문은 횡빈시장조역, 현경찰부장 등 6명. 평의원 遠藤至道(일적 횡빈지부주사) 등 17명, 직원 재등맹, 고천정명 등 5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