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 단체 상세보기
가나가와현조선노동조합 (神奈川縣朝鮮勞動組合(神奈川縣) )
활동기간 1927년 ~ 1930년
활동 지역 : 가나가와현(神奈川縣)
내용
  1920년대 후반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조선인 노동조합. 1920년대 중반에 조직된 노동운동단체 가나가와현 조선합동노동회가 조직을 확대하는 형태로 1927년에 결성됐다. 이후 1930년경까지 3·1만세 운동, 경술국치일(8월 29일), 간토(關東)대지진(9월 1일), 6·10만세 운동 등 기념일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가나가와현 각지의 노동쟁의를 지원했다. 경찰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30년대에는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다. 1927년 8월 2일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임시대회 개최시 집행위원장은 김천해(金天海)였다. 집행위원은 권일선·최상달(崔相達)·이청룡·김창한·이경희·조종규·김태규, 주낙천·문재봉·최한주·김인수·김종숙·신쾌선, 상임집행위원은 서무부 서종문·이봉석, 조직선전부 김천해·김정희, 정치교육부 윤영탁(尹永鐸)·이동재(李東宰), 조사쟁의부 이승렬(李陞烈)·이복조, 재정부 이동재·정용귀·서진문(徐鎭文), 회계감사 최남수·이상운 등이었다. 이 임시대회에서는 ‘규약 수정, 악질 청부업자 퇴치, 조선공산당사건공판 변호사 파견’ 등을 결의하고, 같은 장소에서 ‘조선총독 정치 비판 연설회’를 개최했다. 연설회에서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하 재일노총)의 정남국이 조선의 최근 정세를 보고하고 김한경(金漢卿)과 김천해는 친일 융화단체인 가나가와현 내선협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비판했다. 같은 해 9월 3일에는 요코하마시(橫濱市) 중화화친극장(中華和親劇場)에서 ‘간토대지진 기념 추도회’를 주최했다. 신간회와 재일노총 등에서도 ‘진재(震災) 당시 횡사한 우리 동포’ 라는 추도문을 보냈다. 이동재가 사회를 맡고 김천해가 연설하는 등 성황리에 진행된 추도회는 경찰의 중지 명령을 받고 해산됐다. 9월 25일에는 가나가와현내의 조선 노동자 대회를 열고 공산당 공판에 대한 비판 연설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공판에 대한 계엄적 경계를 해체하고 공판을 공개하라”는 것과 피고에 대한 무죄 주장이 요점이었다. 12월 3일에는 위안 음악회와 조선인 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서는 재도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소속된 조중곤(趙重滾)의 비분강개한 연설이 제지당하고 4명의 검속자가 생겼다. 조합 측은 검속자 석방을 교섭했고 천여 명의 청중과 2천여 명의 경관들 사이에 난투가 일어나 100여 명이 다시 검속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검속자들은 유치장 안에서 검속자 대회를 열고 ‘불법 감금’에 항의했다. 이들은 조중곤, 이동재, 김금도(金今道), 최상달, 금홍(琴鴻). 서진문 등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해 내각 총리 대신과 현지사, 경찰 부장에 대해 항의를 시도했다. 수십 명이 구류 처분을 받은 데 분개한 조합 측은 위원장 정남국과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가 요코스카(橫須賀)경찰서를 방문하고 규탄 연설회도 준비했다. 1928년의 활동에 관해서는 기록이 별로 없으나 간부들의 구속 등 탄압에 맞서 각종 노동쟁의에 직·간접적 지원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가나가와현의 노동쟁의는 요코스카시(橫須賀市) 해군 매립 공사장 쟁의(1927.5), 다카쓰(高津村) 가나가와 자갈 채취 회사 쟁의(1927.5~6), 요코하마시 나카구(中區) ‘토공(土工)’ 해고 반대 쟁의(1928.2), 히라쓰카시(平塚市) 하나미즈가와(花水川) 제방 공사장 쟁의(1928.3), 실업구제를 요구하며 시청에 진정(1928.4), 나카군(中郡) 오타(太田村)·하다노(秦野)·사무카와(寒川) 도로 공사 현장 쟁의(1928.8), 쓰루미(鶴見) 아사노(淺野)조선소 사카모토구미(坂本組)쟁의(1928.9) 등을 들 수 있다. 1928년 12월 가나가와현조선노동조합은 대표자회의를 열고 본부상임위원을 보선해 윤영탁, 김환명(金煥明), 박고암(朴高岩) 등 3명을 선거하고 ‘중외일보’ 정간처분에 관한 대응에 관해 토의했다. 1929년에 일어난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는 5월에 일어난 가나가와현조선노동조합 가와사키(川崎)지부와 친일 어용단체인 상애회 게이힌(京濱)지부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난투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상애회 측이 일본강관(鋼管)회사 주변에 있는 조선인부락에서 강압적으로 회원 모집을 한 데서 비롯됐다. 5월 14일 상애회 간사 김임제(金任濟) 등이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소속 최성구(崔聖九)에게 입회를 강권해 난투가 벌어졌고, 조선인 토공 등 노동조합 자위단과 상애회원의 충돌로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상애회 측은 가와사키시지부 사무소를 습격해 홍덕산(洪德山, 당시 38세) 등을 구타했으며, 고덕찬(高德贊, 22세), 김일백(金一白, 22세) 등 재일노총 간부 3명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일본강관회사 앞에서 상애회측 150여명, 재일노총 측 200여 명이 대치하는 집단난투극으로 발전했다. 양측은 흉기를 들고 상대방 사무소를 습격, 파괴해 부상자 백 수십 명이 발생했다. 검속자 50여명 중에는 상애회측에 납치됐다가 탈출한 김일백 등이 포함됐고 경찰은 쓰루미(鶴見)지부장 최귀석(崔貴錫), 상임위원 박은평(朴恩平), 가와사키 지부장 최기준(崔基準), 가나가와현조선노동조합 본부위원 이복조(李福祚) 등 90여 명을 검속해 재일노총에 대한 탄압의 빌미로 삼았다. 뒤이어 5월 22일 재일노총은 상애회 박멸 대책을 결의했다. 그러나 도쿄 경시청이 돌연 재일노총 상임위원 김시용(金始容)과 도쿄조합 미나미(南)지부 위원 김웅(金雄) 이하 13명을 체포하는 등 탄압을 가함에 따라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한편 가와사키지부는 1929년 9월 20일에 임시대회를 열고 이어 시국비판 대연설회를 열었다. 대회의장 정웅(鄭雄), 서기 김광제(金光濟)를 선출했으며, 미조직 노동자 조직, 민족적 임금차별 철폐, 최저임금제, 실업 반대, 반동단체(상애회) 박멸, 도일 노동자 저지 반대, 도쿄 조선 노동자 송환 계획 반대 등을 토의했다. 신임 임원으로는 지부장 임치규(林致奎), 위원 윤영보(尹永普), 양환섭(梁環燮), 허해룡(許海龍), 박성규(朴成圭) 외 8명이 선출됐다. 1929년 11월 19일에는 요코하마 시내에서 ‘노동자를 대표해 맹렬히 싸운 투사 고(故) 서진문 추도회’를 열었다. 약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정웅이 등단해 개회했고, 이성렬(李成烈)이 약력 보고와 추도문 낭독이 이어졌다. 경찰은 서진문의 동생 서진화(徐鎭華), 이성백(李成百), 김윤삼(金潤三), 이성완(李性完), 이승렬(李陞烈) 등 수십 명을 검속했다. 1929년 12월 요코하마지방법원에서 ‘가와사키 소요 사건’ 공판이 열리면서 재판장 안팎에서 반상애회 투쟁이 이어졌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미우라(三浦) 등의 변호사가 노동조합 측을 위해 변호했으며 노동조합과 상애회는 물리적 충돌을 벌였다. 검사는 이를 ‘계획적 폭동’으로 간주하고 노동조합 측 조선인 200여 명을 검속했다. 조합원 수는 1927년 4월 현재 3,032명이었고, 1930년 10월 현재 3,400명으로 증가했다. 1929년 말 재일노총이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이하 전협)로 흡수될 것을 결정함에 따라 산하의 각 지역 조합들은 전협의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조직되고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은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가나가와지부로 흡수됐다.
참고문헌
• 内務省警保局, 社會運動の状況, 1931
•  東亞日報 1929.5.16
•  朝鮮日報 1927.8.11,9.8,9.14,10.2,12.5,12.9,12.11, 1928.12.25, 1929.5.17,5.23,5.30,6.20,8.12,11.28,12.10
•  大阪朝日新聞 1929.5.16
•  讀賣新聞 1929.5.15,5.16
•  橫浜貿易新報 1929.5.16,5.17,5.19
•  朝鮮新聞 1929.12.6
•  朴慶植, 在日朝鮮人運動史ー8・15解放前, 三一書房, 1979
•  梶村秀樹, 在日朝鮮人論, 明石書店, 1993
문헌별 참조 내용
『特高月報』 1936.3,11,12 : 1927년 8월 2일 가나가와현 조선노동조합 임시대회 개최시 집행위원장은 김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