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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자 褂子·掛子 Gwe-ja, Sleeveless c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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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가 없고 뒷솔기가 허리까지 트인 덧입는 옷
Man's sleeveless coat; one type of jeonbok
괘자는 쾌자(快子)라고도 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 따르면 쾌자는 괘자의 중국음이 잘못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1828년 무자년 『진작의궤(進爵儀軌)』에는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형의 옷이 괘자(掛子)로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유일한 경우이다. 1829년 기축년 『진찬의궤』 이후 대부분의 자료에는 소매가 없고 둥근 깃이 달린 대금형(對衿形)의 긴 옷[長褙子]을 괘자라고 하였다. 전복(戰服)이라고 하는 옷과 형태가 거의 같은데 깃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신경유(申景裕, 1581-1633) 묘나 경기도박물관의 의원군 이혁(李爀, 1661-1722) 묘, 심익창(沈益昌, 1652-1725) 묘에서 출토된 소매 없는 방령(方領)의 장배자형 상의를 괘자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후대로 가면서 네모난 방령은 둥근 깃으로 변하였다. 괘자는 조선 후기 무관이 협수(狹袖) 위에 입는 군복(軍服)의 하나이지만 왕 이하 사대부의 평상복으로 입혀지기도 하였다. 또한 진연이나 진찬에서 검기무(劍器舞)를 추는 여령(女伶)들도 이를 착용하였다. 괘자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宣祖實錄)』 권92 선조 30년(1597) 9월 계사(癸巳) 기사에 처음 보인다. 선조가 융복으로 입고 있는 옷이 중국에서 괘자(掛子)라고 하는 옷이다. 이 옷은 본래 잡역(雜役)들이 입는 옷인데 왕이 입으니 미안스럽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 이후의 기록에서도 왕이 괘자를 착용하였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적지 않다. 1800년 정조(正祖)의 재궁(梓宮) 의대(衣襨) 중에 답호(褡護)와 쾌자가 기록되어 있고 1834년 순조(純祖) 재궁의대에도 쾌자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86년 5세로 사망한 문효세자의 『빈궁혼궁도감의궤(殯殿魂殿都監儀軌)』에도 쾌자 기록이 확인된다. 자적향직 석류문단, 심록운문단, 초록운문단 등으로 만든 옷이 왕세자의 염습의로 사용되었다. 한편 1808년의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총융청(摠戎廳)의 군기(軍器)로 마련되는 ‘목면홍괘자’ 등의 기록이 보인다. 19세기 이후의 궁중 『발기』에서도 괘자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괘자는 왕 이하 사대부, 동자(童子)는 물론이고 서민 하급 군속에 이르기까지 모두 착용하였다. 19세기 말에는 괘자와 전복, 답호가 하나의 옷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1884년(고종 21) 갑신의복개혁 이후 두루마기[周衣] 위에 답호(전복)을 입게 되면서 사대부의 통상예복이 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3월 경자일에 사적인 예복에서 답호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사대부의 초상화에서 두루마기 위에 괘자를 착용한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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