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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호 褡護 Da-po, Man's coat

성별
시대
연령
성인
신분
태그
괘자[褂子],배자(褙子),반비(半臂),답호(褡護),전복(戰服)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남자의 반소매 포
Man’s coat with half sleeves or no sleeves worn during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고려 후기부터 조선 후기까지 관리들이 상복(常服) 안에 입거나 사대부의 겉옷 위에 덧입던 옷이다. 또한 조선 중기까지는 직령과 같되, 소매만 반수의(半袖衣)이지만 17세기를 지나면서 소매가 없어진다. 답호는 중국 원대에 등장한 의복으로 징기스칸(成吉思汗, 1162-1227) 역사서인『집사(集史)』(1300~1304)의 미니어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 기록에는 고려시대『원간노걸대(原刊老乞大)』에 ‘대답호(大搭胡), 답호(褡護), 답호(搭胡), 답홀(搭忽)’로 표기되어 있으며 더그레로 언해되어있다. 고려시대 답호 유물로는 문수사의 답호(1346)와 해인사의 답호(1350-1362)가 있다. 곧은 깃에 반소매가 팔꿈치에 이르며, 옷길이는 발목까지 오고 옆선에는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 고정된 다중주름의 무가 달렸으며 옆트임이 있다. 조선시대 답호는 조선 중기까지 왕의 상복(常服)과 관리들의 단령(團領) 안 받침옷이나 철릭[帖裏], 직령(直領) 등 포위에 덧입는 옷이었다. 형태는 반수의(半袖衣)로 곧은 깃 교임형에 옆선에 무가 달렸고 옆 트임이 있다. 기본 형태는 직령과 같되, 소매 길이가 짧은 것이 다르다. 답호에는 광다회 등의 실띠를 둘렀는데 , 당상관 이상은 붉은 색을 사용하였고 그 이하는 청색 계통의 것을 사용하였다. 직령과 유사한 형태의 답호는 임란 직후부터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답호’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도 간편한 덧옷용 포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어 그대로 유지되면서 옷의 형태상 변화가 나타난다. 즉, 소매와 직사각형 무가 사라지게 된다. 이때의 답호 형태에 대해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무수창의(無袖氅衣)’라고 하였는데, 말 그대로 ‘소매가 없는 창의’라는 옷이다. 창의는 뒤트임이 특징인데 소매가 없고 뒤가 트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의 탐릉군(耽陵君, 1636-1731) 묘에서 출토된 답호 유물에서 확인된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의하면 답호가 영조의 수의로 사용되었으며 이를 ‘소매 없는 반비(半臂)’라고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갈수록 답호는 전복(戰), 괘자(掛子)가 혼동되기도 하였다. 영조 재궁의대에 전복과 답호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형태가 다른 의복이었으나 순조 재궁의대에는 쾌자만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순조 이후 답호는 괘자와 같은 형태로 괘자로 집약되었고, 고종 25년(1888) 직강 김영선(金榮善)이 “답호와 전복은 그 제도가 달랐는데 답호령을 내리고 전복을 입으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전복은 깃 없는 대금형의 긴 옷으로 허리 아래로 뒤트임이 있고 짧은 옆트임이 있는 옷이다. 괘자는 전복 형태에 깃머리가 둥근 방령에 동정이 달린 옷이다. 당시 답호도 뒤트임이 있고 소매가 없는 덧옷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직령과 같은 형태의 답호 유물은 강대호(姜大虎, 1541-1642)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늦은 시기의 유물이며 무수창의(無袖氅衣) 형태의 답호 유물은 탐릉군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