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남녀 편복포의 일종
Man and woman’s coat for everyday use
장의는 글자 뜻으로 말하자면 ‘긴 옷’이라는 뜻이다. 모든 ‘긴 옷’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로도 해석할 수 있고 흔히 여자의 ‘장옷’이라고 하는 목판깃 장의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장의는 조선 초기에는 남자 옷이었으나 여자도 함께 입다가 점차 여자들만 입게 된 옷이라고 알고 있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여자들이 입기도 하였지만 주로 머리에 써서 얼굴을 가리는 내외용 쓰개가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장의가 남자 옷이었다는 주장하는 근거는 『세조실록(世祖實錄)』권3 세조 2년(1456) 3월 28일(정유) 기사에 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는데 장의를 상의와 치마 사이에 입어 3층을 이루고 점점 본 따서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이것이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것이 어찌 경사스러운 징조라고 하겠습니까?”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상의와 치마 사이에 긴 옷을 입는 새로운 착장법인 레이어드 룩이 유행하여 그것이 문제였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여자는 저고리[上衣]와 치마[下裳]를 입는 것이 옛 법인데 남자처럼 긴 옷을 입게 되었으니 그것이 또 다른 문제였을 것이다. 장의(장옷)의 형태는 좌우 들여 달린 곧은 목판깃에 겉길 자락과 안길 자락이 좌우 동형(同形)이다. 그리고 겨드랑이에 작은 이색(異色) 무가 있다. 소매 끝에는 흰색의 거들지가 넓게 달려있으며 흔히 접어서 착용하였다. 질 좋은 고급 비단류나 명주, 모시, 무명 등, 다양한 옷감을 사용하였으며 구성법도 홑, 겹은 물론, 솜과 누비로 다양하였다. 당시 남자 포는 대부분 이중깃이나 칼깃인 것에 반하여 장의만큼은 목판깃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좌우 동형의 넓은 섶은 역시 같은 시기의 남자 포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안섶이 겉섶만큼 넓다는 것은 치마 위에 착용하기 편하도록 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목판깃 장의가 여성복이었을 가능성을 짙게 해준다. 또한 유몽인(柳夢寅, 1564-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수의가 없어 부인의 장의를 입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 역시 장의가 남자의 옷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출토 유물에서 보이는 16세기의 목판깃 장의는 여자 옷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모두 크기 때문에 또한 혼란스럽다. 수례지의(襚禮之衣)와 같은 장속(葬俗) 때문에 남자의 묘에서 여자 장의가 출토될 수도 있다. 즉 남녀 옷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남자 옷인지 여자 옷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임란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는 16세기에 비해 장의가 날렵해지면서 여자 옷임이 분명해진다. 장옷이 여자의 외출복으로 전용된 이후에도 남자의 복식 명칭에서 그 기록이 확인되기도 한다. 이 역시 목판깃 장의와 같은 형태의 옷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조의 소렴과 대렴의 기록에 초록 장의와 보라향직 장의, 두록, 옥색 장의의 기록이 있고, 그 외에도 1786년(정조 10)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염의(斂衣)에도 다양한 장의 기록이 있다. 또 정조의 재궁의대, 소렴, 순조의 대렴의대, 『면암선생문집(勉菴先生文集)』(1879)과『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개인 문집에서도 장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자 복식으로의 장의 기록은 일반적인 장옷이 아니고 길이가 긴 남성용 포(袍) 종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