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식사전 DB 구축연구 상세보기

익선관 翼善冠 Ik-seon-gwan, King’s and Prince’s crown

성별
시대
연령
성인,청소년
신분
태그
관모(冠帽),상복(常服),복두(幞頭),곤룡포(袞龍袍),익선관(翼善冠)
조선시대에 왕, 세자가 상복(常服)인 곤룡포(袞龍袍)와 함께 착용하던 관모
Crown for the king and crown prince worn with the everyday robe, gonryongpo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관의 모부(帽部)가 이층으로 앞은 낮고 뒤는 높으며, 관 뒤에 부착된 두 각은 모정(帽頂)보다 약간 높게 위로 뻗쳐 있다. 광무 원년(1897)의 제도도 동일하나 세부 형태는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중기 이후는 모부가 대단히 높아지고 양각의 폭도 넓어지게 되며, 말기에는 모체가 다시 낮아지게 된다. 각의 형상이 매미 날개의 형상과 유사하다 하여 ‘익선관(翼蟬冠)’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당(唐) 정관(貞觀) 8년(634) 태종이 복두를 개조하여 상복(常服)에 익선관을 만들어 착용하였다고 하며 현종 개원(開元) 17년(729) 폐지되었다고 하나, 송에서는 다시 이에 상응하는 제도의 관모를 ‘오사절상건’, 명(明)에서는 홍무 3년(1370) ‘오사절각향상건’이라 하였으며 영락 3년(1405)에는 이를 황제․황태자․친왕이 모두 착용하면서 ‘익선관’이라 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총서에, 태종이 세자인 충령에게 친히 익선관을 씌우고 국왕의 의장을 갖춰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이 익선관을 머리에 쓰고 있음을 보고 모두 땅에 엎드리었다는 기록에서 보면, 익선관은 국왕의 관으로서 조선 초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으로부터의 수수(收受)는 세종 26년(1444) 3월에 면복(冕服)과 상복(常服)을 받은 내용 중에 “향조추사익선관(香皂皺紗翼善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첫 기록이며, 왕의 상복용 관모로 곤룡포와 함께 국말까지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唐書』
             『明史』
             『宋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