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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건 宕巾 Tang-geon, Man’s inner c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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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網巾),탕건(宕巾),감투[坎頭],정자관(程子冠)
사대부 계층에서 망건(網巾)의 덮개 및 관모(冠帽)의 밑받침으로 착용한 쓰개
Nobleman’s inner cap worn over manggeon and under the hat
말총으로 엮어 만들며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턱이 진 모습이다. 『아언각비(雅言覺非)』 권 2에는 ‘당건(唐巾)이 탕건(宕巾)으로 잘못 번역된 것’이라 하였고,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고금관건제도변증설(古今冠巾制度辨證說)에도 당건(唐巾)은 시속(時俗)에서 말하는 탕건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당건(唐巾)은 2단으로 턱이 진 모체(帽體)의 뒤에 2개의 각(角)이 드리워져 있는 것이며, 이를 당(唐)나라 사람들이 썼다는 데에서 원(元), 명(明)인이 당건(唐巾)이라 한 것으로, 말총으로 만들고 각(角)이 없는 조선시대 탕건과는 차이가 있다. 다만 조선 후기의 초상화나 풍속도 중에는 각이 없는 당건의 착용 예를 볼 수 있어 형태상으로 보면 각 없는 당건이 탕건으로 연계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이때의 재료가 말총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말총으로 엮어 만든 탕건은 쉽게 접을 수도 있어 목침(木枕)에 서랍을 만들어 보관할 정도로 늘 몸 가까이에 두고 사용하기도 했는데, 『연행록선집(燕行錄選集)』무오연행록의 기록에 사모(紗帽)와 탕건이 함께 기록되어 있고 초상화나 전세품 중에는 정자관(程子冠) 안에 사용된 예도 있어 다른 관모의 받침용으로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탕건을 단독으로 착용한 예는 18세기 말 혜원, 단원의 풍속화에서 중인이나 평민층에서 보이기 시작하며, 조선말에는 가장 서민적인 편복 관모의 하나로써 탕건이 널리 애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 개화기까지도 갖추어 입은 남자들의 나들이 차림에는 흑립 착용이 일반적이었으므로 탕건은 집안에서 쓰는 편복 관모로 정식 예장 차림의 관모는 아니었다고 본다. 망건보다 늦게까지 사용되어 왔으며, 1960년대까지도 제주시 동쪽의 화북, 삼양, 조천 일대는 탕건의 고장으로 이름 나 있었다. 오늘날도 제주도 지역의 탕건 전수자에 의하여 제작되고 있는데, 총모자는 말총을 정상에서부터 아래로 결어가며 상협하관(上狹下寬)의 원통형을 만드는 데 반하여 탕건은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위쪽으로 결어나가면서 모체의 전면을 두 층으로 잘룩하게 맵씨를 부려서 꾸미고 정상에서 마무리 하는 말총모자의 하나이다. 제작 방법에 따라 홑탕건과 겹탕건, 바둑탕건 및 줄살린 탕건으로 구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