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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 銙帶 Gwa-dae, Be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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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布帶) 또는 혁대(革帶)의 표면에 띠돈(敬板, 飾板)을 붙여 장식한 띠
Belt decorated with a metal plate
과대(銙帶)는 포대(布帶)를 모체(母體)로 하여 계급분화과정에서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과대(銙帶)에 관련된 기록으로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악조(祭祀樂條)에는 락(新羅樂)……무이인(舞二人) 방각복두(放角㡤頭)를 쓰고 자색(紫色) 대수공란(大袖公襴)에 홍정(紅鞓)으로 된 도금과요대(鍍金銙腰帶)를 띠었다. 라고 되어 있어 당시 과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대는 일종의 요대(腰帶)로서 금ㆍ은ㆍ동ㆍ철로 만든 금속의 식판(飾板)을 혁대(革帶)나 포대(布帶) 표면에 못을 박아서 고정시킨 것인데, 형태는 그 당시 유물 중 가장 대표적인 금관총ㆍ양산부부총ㆍ서봉총(瑞鳳塚)ㆍ천마총(天馬塚)ㆍ경주황남동 제98호 북분 및 남분 등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볼 수 있다. 방형(方形)의 얇은 판에 좌우대칭으로 당초문(唐草紋)을 투조(透彫)한 과판 30∼45개를 혁대(革帶) 또는 포대(布帶)의 표면 위에 연결하여 못으로 박아 고정시켰고 과의 밑에는 심엽형(心葉形) 수하부(垂下部)가 달려 있으며, 그 밑으로는 각종 요패(腰佩)가 연결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색복(色服) 신라조(新羅條)의 기록에 보면 신라 흥덕왕 9년(834)에 내린 복식금제(服飾禁制)에 진골대등(眞骨大等)은 연문백옥(硏文白玉)을 금하였는데, 6두품은 오서(烏犀)ㆍ 유(鍮)ㆍ철(鐵)ㆍ동(銅)을, 5두품은 철ㆍ은을, 4두품은 철ㆍ동을, 평인은 동ㆍ철을 하게 하였다. 이에서 볼 때 과대(銙帶)는 계급에 따라 재료를 달리 하였지만, 남녀·상하(上下)가 모두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과대는 각 계급에 따라 종류도 좀 더 세분화되어 옥(玉)·서(犀)·금·은·동·철·각(角) 등 재료의 차이가 있었다. 형태에 따라 야자대형(也字帶形)과 각대형(角帶形)으로 구분되었고 길이는 착용자에 따라 달랐다. 과에는 양각·음각·타출(打出)·투조 등의 기법을 이용한 연화문ㆍ용문ㆍ점선운문ㆍ동자수금ㆍ당초문ㆍ노안문ㆍ쌍조문ㆍ국화문ㆍ뇌문ㆍ강대문ㆍ유운문ㆍ이화문ㆍ파장문ㆍ공작문ㆍ모란문ㆍ석류문ㆍ인물문 등의 문양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형태는 그대로 조선으로 이어져 조선시대의 야자대(也字帶)와 각대(角帶)의 모체(母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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