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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허자집』 11권, 『유고보유』 8권 절강 범무주가 천일각장본(『逃虛子集』 十一卷, 『類稿補遺』 八卷 浙江 范懋柱家 天一閣藏本)
분류 집부 > 별집류
저자 요광효(姚廣孝)
번역

명나라 요광효(姚廣孝, 1335~1418)가 지었다. 요광효는 장주(長洲; 지금의 江蘇省 蘇州) 사람이다. 애초에는 승려로, 법명은 도연(道衍)이고, 자는 사도(斯道)였다. 홍무(洪武) 연간(1368~1398)에 승려 종륵(宗泐)의 추천으로 시연저(侍燕邸)에 선발되었다. 연왕(燕王)이 반역을 모의했을 때 그의 계책과 무력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연왕이 찬립(篡立)한 후에 성씨를 회복시키고 지금 이름을 하사하였다. 관작은 자선대부(資善大夫), 태사소사(太子少師)에 이르렀으며, 영국공(榮國公)에 봉해졌다. 그러나 승복을 갈아입지는 않았다. 사적은 『명사(明史)』 본전에 갖추어져 있다.1)

요광효는 고계(高啓, 1336~1374)2)북곽십우(北郭十友)3)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처음에 『독암집(獨菴集)』이라 이름하였는데, 사후에 오(吳)땅 사람이 그의 시문을 합각하여 『도허자집(逃虛子集)』이라 하였다. 후대 사람이 일실된 것을 수습하여 『보유(補遺)』라 하였다. 요광효의 시는 청신하고 완약하여 옛 정조를 많이 보존하고 있지만, 엄숭(嚴嵩, 1480~1565)4)『검산당집(鈐山堂集)』5)과 함께 유자(儒者)에 의해 부끄럽게 여겨져 왔다. 시비(是非)의 공정함은 예로부터 덮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여록(道餘錄)』 2권이 덧붙여져 있는데, 지론이 더욱 거리낌이 없다. 『고소지(姑蘇志)』에서 이르기를 “영국공 요광효가 지은 『도여록』에서는, 정이ㆍ주희를 오로지 비판하고 있다. 태자소사 요광효가 죽은 뒤 그의 친구인 장홍(張洪)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요광효와 나는 친분이 두터운데, 지금 죽었으니 보답할 길 없다. 다만 매번 『도여록』을 볼 때마다 불로 태워 버렸다’고 하였다.”라 하였다. 이는 이 책이 망령되고 잘못되어 비록 친한 사람이라 해도 곡해하여 은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지운)

각주

1) 『명사』 권145 「오광효열전」에 실려 있다.

2) 高啓는 명나라 長洲(지금의 江蘇省 蘇州) 사람으로, 시인이다. 자는 季迪이고, 호는 靑丘子이다. 명나라 초 『원사』 편수에 참여했고, 翰林院 國史編修를 역임했다. 明 太祖가 戶部侍郞를 제수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登金陵雨花臺望大江』 등이 있다.

3) 北郭十友는 명나라 高啓, 王行 등 열 명으로, 모두 吳(지금의 江蘇省 蘇州市) 北郭에 거주하면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을 이른다.

4) 嚴嵩은 명나라 分宜 사람으로, 자는 惟中이고, 호는 介溪이다. 嘉靖 연간에 20여 년간 전권을 휘둘렀다.

5) 『총목』 「집부ㆍ별집류존목3」에 실려 있다.

원문

逃虛子集十一卷, 類稿補遺八卷 浙江范懋柱家天一閣藏本

明姚廣孝撰. 廣孝, 長洲人. 初爲僧, 名道衍, 字斯道. 洪武中以僧宗泐薦, 選侍燕邸. 燕王謀逆, 資其策力居多. 篡立之後, 乃使復姓賜今名. 爵至資善大夫, 太子少師, 封榮國公. 然迄未改僧服. 事跡具『明史』本傳. 廣孝爲高啓北郭十友之一. 所著初名『獨菴集』, 沒後吳人合刻其詩文, 曰『逃虛子集』. 後人掇拾放佚, 謂之『補遺』. 其詩淸新婉約, 頗存古調, 然與嚴嵩『鈐山堂集』同爲儒者所羞稱. 是非之公, 終古不可掩也. 附載『道餘錄』二卷, 持論尤無忌憚. 『姑蘇志』曰, “姚榮國著『道餘錄』, 專詆程ㆍ朱. 少師亡後, 其友人張洪謂人曰, ‘少師與我厚, 今死矣, 無以報之. 但每見『道餘錄』, 輒爲焚棄’.”云云. 是其書之妄謬, 雖親暱者不能曲諱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