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감옥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감옥
토포스명(프랑스) prison
토포스명(러시아) тюрьма
Definition 1. 문명이 발달할수록 감옥은 더욱 정교하게 개인을 통제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로 감옥은 ‘프리종 prison[pʀizɔ̃]’이며, 이는 ‘붙잡다, 체포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프레헨시오prehensio’에서 유래되었다. 1080년경에는 ‘체포’의 의미로 사용되거나 죄수 또는 포로를 의미하기도 했으며, 1165년경에는 사랑의 포로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된 기록이 있다. 감옥이 무엇보다 사람을 가두어두는 장소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1210년경이다.(http://www.cnrtl.fr/definition/prison 참조) 감옥은 재판 전, 또는 재판 중이거나 형을 선고받은 사람에게서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여 사회와 격리시키는 사회제도로서 언제나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범죄를 규정짓고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사회에 해를 끼치는 악인 내지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을 수 있는 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한편 감옥의 감금 기능 때문에 고대로부터 감옥은 영혼을 가두고 있는 육체에 비유되어왔다. 한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독약을 마시게 된 소크라테스는 “우리 인간들은 일종의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파이돈』, 기원전 347)는 말로, 육체를 영혼의 무덤 또는 감옥에 비유했다. 이후로도 감옥으로서의 육체라는 비유는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영혼의 감옥인 육체, […],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의 감옥일 뿐이다.” (클레망 마로(1496-1544), 『풍자시』)

“인간은 영혼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머무르는 일종의 감옥이다.” (빅토르 위고, 『관조』, 1856) 

“몸의 영역 또한 정신의 영역 속에서 창조한다는 것은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 1912)

  “일상과 공무의 감옥에서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에피쿠로스, 기원전 342~기원전 270), “소심함은 마음의 감옥이다.”(에스파냐 속담), “확신은 감옥이다.”(니체), “편견은 우리가 갇힌 감옥의 창살이다”(프랑스 격언)와 같은 감옥의 비유적 표현들도 이러한 비유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은 사회질서의 유지를 내세워 범죄자나 정신이상자, 때로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왔다. 대체로 비좁고 더러우며 어둡고 습기로 가득 찬 감옥은 잔혹한 형벌을 가하는 간수들의 존재와 함께 공포심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다. 그러나 감옥이 감금이 아닌 형벌의 수단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고대 로마의 법률학자 유스티니아누스의 『판례집』(533)에는 “감옥은 사람을 처벌하는 곳이 아니라 가두어두는 데 쓰인다.”라고 적혀있다. 고대에는 노예가 될 전쟁 포로나 범죄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채석장이나 저수통, 탄광 등에 억류해두었는데, 이 장소들이 바로 감옥이었다. 이 감옥들은 노예를 가두어두는 지하 감옥과는 달리, 재판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기는 했지만, 법률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었고 형벌은 더더욱 아니었다. 고대에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교화하거나 심리적 전향을 도모한다는 개념도 아직 없었던 것 같다. 
  중세에 들어서면 성문 안쪽 중정(中庭) 가운데에 감시탑을 세우고 그곳의 지하에 감옥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감옥은 영국의 런던탑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이다. 런던탑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 된 건축물의 하나로 처음에는 영국 왕이 사는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이 되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기 전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갇혔던 감옥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의 강화와 더불어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임의적으로 사회와 격리시키는 시설을 건립하기 시작했는데, 1392년에 건립된 파리 고등법원 부속 콩시에르쥬 왕립 감옥과 15세기 중반에 건립된 바스티유의 요새, 벵센 감옥이 그것들이다. 이 감옥들은 런던탑과 마찬가지로 정치범을 수용한 곳들로, 특히 바스티유 감옥은 1789년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분노한 민중의 습격을 받았고 이것이 1789년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감옥을 구원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교화의 개념을 고안한 것은 기독교이다. 종교 권력은 종교재판이 이루어지던 감옥에서의 고문 또는 화형을 영혼을 구원하는 강제적 수단이라고 정당화했다. 가문의 명예를 훼손시킨 자식을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고 회개시킨다는 명분으로 그를 평생 동안 수도원에 가두어두는 일은 중세에는 물론 18세기까지도 횡행했다. 부모에 의해 강제로 수녀서원을 한 수녀가 서원취소 소송을 낸 실제 사건을 소재로 디드로가 소설 『수녀』를 쓴 것은 1781년이다. 거액의 돈을 받고 그들을 수용하기 때문에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결코 수용자들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신도 수도원에 갇혔던 경험이 있고 여동생 또한 수녀원에 갇혔다가 결국 정신이상으로 요절한 일을 겪은 디드로는 수도원의 이러한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런 한편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유폐를 자청하기도 했는데,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산속에 위치한 수도원이 그러한 수행을 위한 은신처 구실을 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충돌하던 16세기에 노동과 학습을 통해 교화를 시도하는 감옥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수도원의 독방을 모델로 삼아서이다. 1703년 클레망 11세의 교서는 감옥의 교화 기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악덕한 자들에게 형을 집행하여 겁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형을 적용하면서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교황 클레망 11세, 1703)

  그렇지만 감옥이 범죄자를 구금하는 곳이지 처벌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은 고대 로마 이래 중세를 거쳐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대체로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사형 또는 신체형이었고 구금은 그러한 처벌 전후로 죄수를 가두어두는 기능만 했다. 신체형은 성이나 수도원을 구축하는 데 죄수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동시에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 노예나 죄수를 동원해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게 하던 갤리선 형벌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것이 폐지된 것은 프랑스의 경우 1748년이다. 18세기에 체벌과 폭행이 자행되던 전제적인 감옥의 행태와 잔인한 형벌에 대한 묘사는, 주교이자 문헌 학자였던 장 마비용(1632~1707)이 죄수들을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할 것을 주장한 『수도회의 감옥에 대한 고찰』(1690~1695)이나, 18세기 파리의 거대한 풍속화를 제공한 레스티프 드 라 브러톤의 『파리의 밤』(1788)에서 확인된다.

“감옥의 공기는 누구나 그곳에서 언제나 흉악범이 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분명 악행을 부추김에 틀림없다. 이는 간수 제도와 그들의 잔혹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을 무시하는 데 익숙한 그들은 죄수들이 행인을 약탈할 때 했던 방식으로 죄수를 다룬다. 또한 이는 피고들을 의도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재판관의 잔인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 (레스티프 드 라 브러톤, 『파리의 밤』, 1788) 

  감옥과 인연이 깊은 작가로 18세기의 이단아 도나티엥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1740~1814)를 들 수 있다. 초기에는 방탕과 스캔들로, 후기에는 문화와 도덕을 타락시키는 그의 작품들로 유명세를 치렀던 사드는 20년을 감옥살이를 했고,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종신형을 선고받고 정신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사드는 현실에서 실패하고 단죄 받은 그의 삶에 대한 보상을, 마음껏 글을 쓸 수 있었던 감옥에서 찾았다. 현실 세계가 지옥이었던 사드에게 비참한 감옥이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유일한 공간이 되어 준 셈이다. 
  18세기에는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계몽사상을 전파하려 한 많은 새로운 지식인(철학자라 불렸다.)들이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사상범으로 감옥에 감금됨으로써 감옥은 전제 권력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루소가 문명의 폐해를 지적하고 올바른 지식의 사용을 주장한 『학문예술론』(1749)을 구상한 이후 『사회계약론』(1762)을 통해 인권과 평등사상을 확립하게 된 첫 계기는 벵센 감옥에 갇힌 『백과전서』의 편집자 디드로를 면회하러간 일이었다. 또한 『범죄와 형벌』(1764)이라는 저서로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계몽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근대 형법학의 선구자 케사레 베카리아가 “형벌은 마땅히 입법자에 의하여 법률로 엄밀히 규정되어야 하고 범죄의 경중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죄형법정주의, 고문과 사형의 폐지를 주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감옥의 엄격함은 피고의 도주를 막기 위해 필요할 뿐이다. 또는 범죄 증거를 발견하기 위해서. 소송은 가능한 한 단기간에 끝나야 한다. 재판관의 게으름과 피고의 불안, 또 한편 무관심한 사법관의 안락함과 향락, 수감자의 끔찍한 상태만큼 잔인한 대조가 있는가?” (체사레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1764) 

  감옥의 형태와 운영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제레미 벤담이 프랑스 혁명 직후 프랑스 입법의회에 건립을 제안한 원형감옥, 『팬옵티콘』(1791)이었다.

“이 건물은 중앙의 한 지점에서 각 수용실을 볼 수 있게 만든 벌집 형태를 갖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할 수 있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낸다.”(제레미 벤담, 『팬옵티콘』, 1791) 

  벤담은 제안서에서 중앙에 높은 감시탑이 있고 그 주변에 여러 개의 독방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를 제안했다. 그리고 이런 구조의 감옥이 ‘진행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팬옵티콘’이라 명명한다고 밝혔다. 감시탑은 어둡고 수감자들의 방은 밝아서, 감시자는 수용된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으나 수감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감시자가 없는 경우에도 수감자는 여전히 감시받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공리주의자였던 벤담은 ‘최소 비용 및 감시로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팬옵티콘을 이상적인 사회의 축소판이라 생각했다. 그 효율성 때문에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팬옵티콘 개념을 감옥과 같은 감시시설에만 국한하지 말고 군대 병영, 병원, 수용소, 학교, 공장 등으로 확대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팬옵티콘 개념은 절대 권력을 가진 통치자 ‘빅브라더’가 첨단 감시 장치와 권력을 동원해 사람들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하는 가상 국가를 묘사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1949)에 등장한 이후, 오늘날에도 국가 내지 절대 권력의 개인에 대한 통제와 억압, 그에 맞선 인간 최후의 저항을 묘사하는 수많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달린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팬옵티콘의 본질이 항상 감시받는다고 느끼는 수감자가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며 자기 통제를 내면화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푸코에 따르면, 팬옵티콘의 개념은 감옥이 수감자를 단지 사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기능에 제한되지 않고, 규율과 감시를 통해 육체를 통제하고 길들이는 권력의 합리적 수단으로 작용하게 함으로써 근대이후 감옥의 변화를 추동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감옥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튜르마 тюрьма’의 어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은 16세기 무렵 폴란드어 ‘turma’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폴란드어 ‘turma’는 라틴어 ‘turrim’에서 유래된 ‘탑’을 뜻하는 중세 독일어 ‘turm’에서 파생되었다. 두 번째는 역시 비슷한 시기 ‘어둠, 감옥’을 뜻하는 고대 터키어 ‘*turma’에서 기원되었다는 것이다. 
  튜르마가 문헌에 최초로 기록된 것은 1550년 이반 4세 시절 편찬된 러시아 중세 법전인 ‘수데브니크’이다. 그러나 이 당시 튜르마는 죄수들을 감금하는 장소가 아닌 벌을 주는 장소를 의미하였다. 즉, 이 시기 튜르마는 죄수들에게 일정 기간 형기를 마치고 갱생의 기회를 주는 곳이 아니라 가혹한 벌을 주어 그 가능성조차 박탈시켜버리는 장소였다. 
  1649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절에 편찬된 법전 역시 튜르마에 대한 기능을 신체적 형벌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 법전으로 인해 튜르마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대단히 가혹한 형벌 행위가 허용되었다. 극단적인 경우 눈을 뽑는 형벌이 가해지기도 했고, 국가나 정교에 대해 불경스런 말을 한 경우에는 혀를 뽑아버리고, 국가 반란, 폭동, 사기 등의 경우에는 손을, 도둑, 강도질을 할 경우 볼을, 살인의 경우는 귀를 잘랐다. 형벌의 적용 범위가 대부분 두 세 개 중복되어 죄수들은 거의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시절에 이르러서야 위와 같은 잔혹한 신체적 형벌을 금지시켰고, 감옥을 신체적 형벌을 가하는 장소가 아닌 일정기간 죄수들을 수감하면서 갱생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러시아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식적인 감옥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옥의 체계도 정립되지 않았다. 게다가 감옥이라는 용어 자체도 매우 혼돈스럽게 사용되었다. 
성, 요새를 뜻하는 ‘острог’는 18세기부터 감옥의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죄수들의 집’이라는 뜻의 ‘колодничья изба’, 경찰서를 뜻하는 ‘частный дом’, ‘съезжий двор’도 감옥으로 불리곤 하였다. 이것은 당시 죄수들을 감금하는 장소가 경찰서, 지방 의회, 관청 등에 부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운용하는 최초의 공식적인 감옥들은 계몽군주로서 서구 유럽의 여러 문물을 수용한 예카테리나 여제시대부터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 지역마다 정치범을 위한 감옥들이 만들어졌고, 주로 지하실 등을 이용한 이전의 감옥들과는 달리 높은 벽돌 벽과 첨탑이 세워진 ‘감옥-성(城)’의 모습을 한 감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의 대표적인 감옥은 주로 정치범들의 수용을 위해 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안의 알렉세예프스키 보루에 건설된 이른바 ‘비밀의 집’이라고 불린 감옥이다. 1718년부터 요새의 구금실을 감옥처럼 사용하다가 1796년에 20개의 독방이 있는 1층짜리 감옥을 만들어 이후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정치범 수용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에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감옥은 모스크바 북부에 위치한 ‘부티르카’감옥이다. 오늘날에도 감옥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티르카는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감옥 중의 하나이다.

  정치범이나 흉악범들을 위해 1771년 세워진 부티르카는 농민반란을 이끈 푸가초프가 1775년 처형 직전까지 수감된 감옥으로서 유명한 곳이며, 그가 감금된 탑은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푸가초프의 탑’이라고 불린다. 1784년 부티르카는 4개의 탑과 성곽을 갖춘 하나의 성으로 개축되면서 ‘부티르카 감옥성’이라고 불렸고, 이후 매년 3만 명의 죄수들이 이곳을 거쳐 지방의 감옥이나 유형지로 떠나면서 유형자들의 관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톨스토이는 자신의 소설 『부활』을 작업하면서 1899년 1월 이곳을 방문하여 감옥과 죄수들의 생활을 면밀히 관찰하였고, 4월에는 부티르카에서 니콜라예프스키 역을 거쳐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죄수들의 무리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체험들은 『부활』에서 카츄샤의 감옥 생활, 그리고 유형을 떠나는 카츄샤를 따라가는 네흘류도프의 모습들에서 매우 면밀하게 반영되어 있다. 
  한편,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에는 죄질의 경중에 따라 감옥을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스미리텔느이 돔 смирительный дом’은 자식 양육을 소홀히 한 자, 육체적 상해를 입힌 자, 방탕하고 무절제한 삶을 사는 자들이 주로 8개월에서 2년의 형을 받고 복역하는 경범죄 죄수들을 위한 감옥이었고, ‘노동의 집 рабочный дом’이라고 불린 이 감옥은 주로 도둑, 강도, 사기범 등 무거운 죄를 지은 자들을 위한 곳으로서 이곳에 복역하면서 공공 건설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초에는 감옥이 좀 더 세분되어 성, 나이, 신분, 형사범, 일반 군인, 해군 등을 위한 감옥을 분리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감옥과 형벌의 형태 중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일정 장소에서 거주 제한을 하며 강제 노역을 하는 ‘유형 ссылка’이라는 제도이다.   16~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폭넓게 확산된 유형은 주로 정치범들에게 적용되었다. 1591년 보리스 고두노프가 참칭자 드미트리의 반란에 가담한 우그리치 도시민들을 페름 지방으로 유형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하여, 18세기 후반에는 사형수들이나 종신형을 받은 사람들, 19세기 초에는 시베리아와 카프카즈로 데카브리스트들과 페트라세프스키 서클 가담자들이, 19세기 중반에는 정치범뿐만 아니라 일반 범죄자들도 유형을 가기도 하였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후반부에서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카츄사와 그를 따라가는 네흘류도프 공작을 통해 당시 유형수들의 상황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유형은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더욱 확산되었는데, 1905년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1906년에는 약 20만 명의 시베리아 유형수들이 발생하였다. 1917년 혁명 후 정치적 유형을 금지시켰지만 1920년대 중반에 유형이 다시 부활하여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1930년대에는 약 16만 명의 사람들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권력이 위험한 인물로 규정한 사람들을 사회와 격리시키고 그들의 육체와 시간을 철저히 감시, 통제하여 체재에 순응하는 존재로 길들이는 합법적 도구로 감옥을 제도화하는 것은 18세기 말 이후라 할 수 있다. 이는 18세기 말 이후 유용성과 합리성이 확고한 사회적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소유한 귀중한 것이고, 누구나 보편적이고 한결같이 자유에 대해 애착을 갖는 사회에서 어떻게 감옥이 전형적인 형벌이 되지 않겠는가? 자유의 상실은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벌금보다 더 나은 평등한 징벌이 된다.”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1975) 

  가장 큰 변화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던 고문과 처형이 비공개적으로 바뀌고 범죄자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감옥의 역할과 기능이 더욱 정교해진 것이었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구체제 하에서 권력이 죄인을 처벌하는 수단은 무엇보다 죄인의 신체에 가하는 잔인한 고문이었다. 고문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푸코는 공개처형이 실시된 이유를 무엇보다 그것이 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 의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법을 위반한 자가 받아야 하는 형벌은 공개처형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절대군주의 위력을 과시하고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최대한 잔혹해야 했고, 이 의식에 참여한 재판관은 특권적인 상태에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고 권력의 이익을 옹호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공개적인 고문과 사형에는 권력이 원하지 않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따르기도 했다. 죄인이 오히려 공개적으로 무죄를 주장하고 권력을 고발할 기회를 가짐으로써, 잔인한 고문을 목격한 군중이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심을 갖는 대신 고문당하는 사람에게 동조하고 그를 영웅시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군중이 사형집행인에 대해 표출하는 집단적 분노는 권력에 대한 상당한 위협이었다. 대부분 하층민인 구경꾼들의 집단적 분노는 순식간에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권력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체제 하에서 빈번했던 공개 처형은 차차 줄어들게 된다.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1975에서 인용 및 참조) 
  푸코는 이러한 변화의 주된 원인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유재산과 소유권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자본의 증식과 산업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피 흘리는 폭력 범죄보다 사기와 횡령 등 경제사범이 급격히 증가”한 시대적 변화를 든다. 이에 따라 범법자는 공개적으로 고문을 당하는 대신 국가사업에 동원되어 강제노역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죄수들의 사역을 공개함으로써 저항적인 시민들이나 반체제적 인사들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는 도덕적 효과도 가져왔다. 그리고 다양한 범법행위에 상응하는 처벌규정들을 만들기 위해 범법자들의 유형과 그들이 속한 사회계급, 그리고 그들의 범죄 형태를 철저히 조사하고 자료화했다. 또한 엄격한 통제와 감독 하에 일과시간표에 따라 기계적으로 하루 생활이 이루어지는 감옥 체제가 도입되면서 감옥은 사회에 해를 끼쳤거나 그럴 소지가 있는 자들을 더욱 철저하게 통제하는 동시에 교화하는 기능도 갖게 되었다.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에서 인용 및 참조)
  이처럼 자료화된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감시와 추적은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 1862)에서 탈옥수 장 발장을 세상 끝까지 추적하고 그것이 사회에 기여하는 자신의 임무임을 확신하는 경감 자베르로 형상화되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강제노동을 했던 장 발장에게 감옥은 당시 파리 하층민들의 비인간적인 비참한 삶의 상징이자, 채찍과 강제노동과 쇠고랑으로 그들을 탄압하는 냉혹하고 잔인한 권력의 상징이다. 1829년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은 감옥에서 사형 날만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한 사형수의 생각과 기억, 인상을 기록한 단편이다. 사형수는 자유와 행복을 상징하는 과거와, 구속과 불행만을 환기시키는 현재를 대립시키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사형수에게 감옥과 사형 선고는 삶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 위고는 과연 누가 그럴 권리를 정당하게 가질 수 있는지, 이 작품을 통해 묻고 있다. 

“지금 나는 갇힌 몸이다. 육체는 감옥 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고 정신은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끔찍하고 참혹하며 견디기 힘든 생각! 단 한 가지 생각, 확신뿐이다. 사형수!” 
“인간은 형제를 처벌한다는 비극적인 자만심 속에서 계속해서 타락해왔다.” 
“범죄 때문에 감옥에 갇힌다고 해서 또 다른 범죄를 막을 수는 없다.” (빅토르 위고, 『사형수 최후의 날』, 1826) 

  감옥은 권력이라는 억압자가 수감자라는 피억압자에게 가하는 강제적인 조치이고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구속한다는 비인간적인 측면 때문에,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가난한 자의 거의 모든 욕망들이 감옥 형에 처해진다.” (루이-페르디낭 셀린, 『밤의 끝으로의 여행』, 1932)

“창살 너머로 비참한 하루가 미소 짓는다.
감옥은 죽음을 위한 역겨운 학교다.” (장 주네, 『사형수』, 1942)

“감옥은 사회의 실패를 감추는 벽에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다.”(안토비 다슈빌, 『또 다른 삶』, 2003)

  그러나 감옥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별개로,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은둔과 기도의 장소였던 중세 수도원과 연관되는 감옥의 또 다른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했다. 감옥을 수도자의 수도원처럼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속된 외부세계와 격리된 채 고독과 명상을 통해 내면의 삶으로 침잠할 수 있는 행복한 은신처로 상상한 작가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현실의 삶을 일종의 유배로 여겼는데, 그 결과 현실 세계와 분리된 감옥이 역으로 은둔과 구원의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육체의 자유가 박탈되는 점에 주목하기보다는 감옥이 더욱 본질적인 내면의 자유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감옥 소설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1845)의 주인공 단테스는 나폴레옹과 연계되어 있다는 누명을 쓰고 마르세유 앞바다 사토 디프의 감옥에 갇힌다. 바다 한 가운데 고립된 섬은 그 자체가 감옥이었는데, 탈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죽음만을 생각하던 단테스에게 지옥과도 같은 이 감옥은 부당한 권력이 자신에게 휘두른 폭력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 감옥에서 파리아 사제를 만나 그의 수도자적 태도에 감동받고 부활과 자유를 꿈꾸며 구체적인 탈출 계획을 세우게 되면서 감옥은 구원의 장소로 바뀌게 된다. 죄수와 수도자가, 감옥과 구원이 겹쳐지면서 감옥은 자유를 박탈하는 곳이 아니라 자유를 추구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적과 흑』(스탕달, 1830)에서 감옥은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미천한 계급 출신의 쥘리엥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엄청난 긴장과 부단한 노력 속에서 고단하고 힘겨운 나날들을 보낸 끝에 마침내 라몰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결혼식 직전 옛 연인 레날 부인이 그의 과거소행을 밝힌 편지를 보내오자 격분한 줄리엥은 단숨에 달려가 권총으로 그녀를 저격했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쥘리엥은 그 감옥에서 그때까지 쉼 없이 뒤쫓아 온 욕망의 굴레에서 마침내 벗어나 혼자만의 고독에 빠져들며 서서히 자기 자신을 되찾아간다. 또한 쥘리엥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써야했다는 레날 부인의 고백 앞에서 마침내 그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이 때 감옥은 비열하고 타락한 외부세계를 차단시킴으로써 그를 보호해주고 나아가 평안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안식의 장소가 된다. 그리고 ‘갇힌 자유’라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게다가 생활마저 즐거워, 이 거처도 평온하고, 결코 지겹지가 않아, 웃으며 쥘리엥이 덧붙였다.” (스탕달, 『적과 흑』, 1830) 

  한편 모파상의 『사형수』(1883』에서 감옥은 또 다른 의미에서 행복한 감옥이다. 모나코에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사형을 언도받는 일이 생긴다. 모나코에는 선례가 없어 감옥도 단두대도 없었기 때문에 모나코의 왕은 프랑스 정부에 단두대를 빌리기로 한다. 하지만 대여료가 너무 비싸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바꾸고, 감옥을 지어 간수 한명을 고용하고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하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 비용 또한 만만치가 않아 결국 그를 국외로 추방하려 하자 사형수는 “법관나리! […] 처음에 저에게 사형을 구형하고도 죽이지 않았을 때 저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기징역으로 바꾸어 나를 감옥에 가두었을 때도, 그 다음에 간수를 없애고 스스로 자신을 지키라고 했을 때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국경 밖으로 나가라니, 이것은 너무 불공정한 일입니다.”라고 항의한다. 죄에 대한 판결은 정부가 내렸고 그에 따라 그는 성실하게 감옥에서 지냈으므로 모나코를 떠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죄수는 풀려나 모나코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과수원을 얻고 매년 정부로부터 육백 프랑씩 받으며 행복하게 여생을 지냈다는, 이 우화 같은 단편은 ‘문명화된 사회의 형벌’인 감옥 제도를 뒷받침하는 유용성의 논리가 정말 합리적인지 묻는 듯하다. 
  양차대전 사이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으로 점점 황폐해져가는 현대인의 부조리 의식을 묘사한 『이방인』(알베르 카뮈, 1942)에서도 감옥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주인공 뫼르소가 비로소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직시하고 거기에 맞서 자신의 진실을 찾겠다는 ‘행복한’ 선택을 하는 곳이 감옥이기 때문이다. 뫼르소에게 감옥은 존재의 실체를 넘어 “모든 것이 진실이지만 아무 것도 진실하지 않은” 세계의 부조리를 뚜렷이 인식하게 해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같은 해 발표된 장 주네의 『사형수』(1942)는 절도죄로 수감되었던 작가가 감옥에서 만난 한 젊은 사형수에게 바친 시로서, 감옥과 사형이라는 반자연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을 다 말하지 못했다.
지탄 담배를 다 피우지도 못했다.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다. 왜 형을 언도하는지 
햇빛을 바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살인범에게.” (장 주네, 『사형수』, 1942)

“자유의 관념이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감옥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자들이 스스로 밖에 갇히는 위험에 처하게 될 우려가 있다.” (장 콕토, 『즉흥극』, 1962)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감옥을,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증스러운 해결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감옥, 규율이 엄한 병영, 관용 없는 학교, 어두운 작업실, 요컨대 이것들은 질적으로 다른 점이 전혀 없다. 이 이중의 기능 - 법적, 경제적 기능과 기술적, 규율적 기능 -이 감옥을 모든 형벌들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문명화된 형태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이중의 기능 덕에 감옥은 즉시 공고해졌다.”(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1975)

  감옥의 이러한 이중의 기능은 현대 사회를 작동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제도 전반으로 확산된 듯하다. 

“감옥이 학교보다 나은 점은 감옥에서는 간수들이 쓴 책을 읽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1856~1950)

“감옥, 그것은 문명화된 사회의 검은 꽃이다.” (나다니엘 호슨, 『주홍글씨』, 1850)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19세기 러시아 감옥은 무엇보다 차르 황제의 정치적 권력 강화와 억압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의 난, 1850-60년대의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와 인민주의자들 중심으로 19세기 러시아 감옥은 정치범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들에 대한 처우 역시 매우 혹독하였다. 
그중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은 러시아의 수많은 정치, 문화 활동가들이 수감된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정치범 감옥이었다. 요새 감옥은 19세기 이전부터 주요 인사들이 수감되곤 하였는데 우선은 타라카노바 공작 부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타라카노바 공작 부인은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생아로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다가 예카테리나 여제의 손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1775년 대홍수가 발생하여 요새 감옥에서 그대로 수장되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또한 예카테리나 여제 당시 개혁 사상가였던 라디쉐프, 시인 노비코프도 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19세기에도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는 수많은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참가한 500명의 주요 인사들, 1830∼1831년의 폴란드 11월 봉기 참가자들, 1849년의 페트라세프스키 클럽 참가자들, 1863∼1864년의 폴란드 1월 봉기 참가자들, 1870년대의 나로드니키들, 1890년대 이후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감옥에는 도스토옙스키가 1849년에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에 가담한 죄로 수감되었고, 1862년 체르니세프스키도 반정부 운동으로 인해 이곳에 수감되었고, 수감 중에 체르니세프스키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막심 고리키 역시 1905년 혁명 가담 활동으로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고, 수감 중 『태양의 아이들』이라는 희곡을 집필하였다. 
  19세기 러시아의 또 하나의 중요하면서도 가장 혹독한 조건의 정치범 감옥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쉴리셀부르크 요새 감옥이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전쟁의 전초기지로 건설한 이 요새는 섬 위에 위치하여 외부와 고립된 가장 혹독한 감옥 중의 하나였다. 특히 이 감옥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사건에 연루된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율랴노프가 수용되어 사형당한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차르 정부에 대항한 죄로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들을 더욱 혹독한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시베리아 유형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데카브리스크 반란에 가담한 주동자들이었다. 당시 알렉산드르 1세는 다섯 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0명을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는데 37일간의 긴 여정 끝에 유형수들은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혹한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였다. 

  유형을 받은 데카브리스트들의 삶은 매우 혹독하였는데, 그들은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경우를 제외하곤 잠잘 때나 일할 때나 늘 쇠고랑을 착용한 채로 생활하였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시베리아 유형지에는 남편을 따라온 11명의 부인들이 그들을 뒷바라지 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에 나오는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의 원형이라 여겨지는 톨스토이의 숙부인 세르게이 발콘스키와 그의 부인 트루베츠카야가 유형을 함께한 대표적인 부부이다.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들과 그들의 아내를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시베리아 깊은 탄광 속에서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나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니라.
깜깜하게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서 열리고 자유가 네 앞에서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푸시킨, 『시베리아 유형』, 1827)

  흥미로운 점은 19세기 러시아의 대다수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은 물론, 자신의 생애에서 감옥이나 유형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극작가 그리보예도프는 희곡 『지혜의 슬픔』에서 당대 모스크바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여 데카브리스트 반란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는 의심을 받게 되어 그로즈느의 요새 감옥에 수감되었다. 역시 데카브리스트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푸시킨은 젊은 시절 카프카스와 미하일로프스카야로 유형을 가기도 했으며, 1837년 푸시킨을 애도하는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서 체포된 레르몬토프 역시 카프카스로 유형을 갔다. 그러나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유형은 유형지의 감옥에 수감된 것이 아니라 거주 제한을 받은 채로 공직에 근무한 일종의 좌천의 성격이 강한 형태였다. 
  실제 삶에서 감옥을 체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대표적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1849년 페트로세프스키 서클에 가담한 죄로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수감된 도스토옙스키는 1850년에서 1854년까지 시베리아 옴스크 요새 감옥에서 유형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본인의 4년간의 유형 생활을 바탕으로 『죽음의 집의 기록』 (1860)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고, 『죄와 벌』의 에필로그 역시 라스콜리니코프의 시베리아 유형과 감옥 생활에 대한 묘사가 들어있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주인공인 알렉산드르 고랸치코프의 눈으로 수감 시작부터 출옥까지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참혹한 감옥의 생활을 중심으로 죄와 형벌, 그리고 교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한다. 

“감옥이나 강제 노동 같은 제도가 범죄자들을 교정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범죄자들을 벌하고, 평온한 사회를 향후에 있을 죄인의 음모로부터 안전하게 할뿐이다. 감옥의 죄수에게 가장 힘든 강제 노동은 오히려 증오와 금지된 향락에 대한 욕망과 무서운 경솔함을 부추기는 역할을 할 뿐이다.”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1860)

  감옥의 비인간적 환경, 혹독한 삶의 조건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은 톨스토이의 『부활』 에서도 언급된다. 소설 『부활』에서는 미결수가 일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장기형을 받아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카츄샤를 따라가는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를 통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의 직무는 남녀 정치범들을 요새의 독방에 수감하는 것이었는데, 얼마나 가혹하게 운영했는지 십 년 사이에 수감자 절반이 죽어나갔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 나가고, 어떤 사람은 폐병에 걸려 죽거나 자살했다. 자살한 사람 중에는 단식으로 죽은 사람, 유리로 동맥을 자른 사람, 목매단 사람, 분신한 사람이 있었다. […] 그리고 형무소장의 엄격함도 떠올랐고, 병약자들에게 짐마차도 허용하지 않고 기차에 출산을 앞둔 여자가 고통스러워하는데도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호송대 장교의 잔혹성도 떠올랐다.” (톨스토이, 『부활』, 1899)

  또한 도스토옙스키와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역시 감옥 제도에 대한 불합리성과 부조리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 오늘날 러시아에서 정직한 시민이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감옥이야!”

“그런 관료들은 심심하거나 공적을 세우고 싶을 때면 사람들을 왕창 체포해 놓고 자기의 기분이나 상관의 기분에 따라 감옥에 넣거나 석방을 한다. 고위층 관리 또한 자신의 공적이나 장관 등 높은 분과의 관계 때문에 정치범들을 세상 끝까지 유형을 보내거나 독방에 수감하고 때로는 징역이나 사형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어떤 귀부인이 청탁이라도 하면 금방 석방시켜준다.” (톨스토이, 『부활』, 1899)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유형의 죄수 분류도 흥미롭다. 

“첫 번째 부류는 마슬로바나 불을 지른 적이 없는 방화범 멘쇼프처럼 완전히 죄가 없는 사람들로 오심의 희생양이었다. 7퍼센트 정도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는 분노나 질투, 만취 등의 예외적 상황에서 저지른 행위 때문에 처벌받은 사람들로 전체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세 번째는 자신들 생각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법률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네 번째는 사회의 평균적 도덕 수준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 사람들. 정치범 ?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인, 권력에 대항한 사회주의자들, 동맹 파업자들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범죄 행위에서 사회적 환경이 더 큰 사람들이다. 즉 억압과 유혹에 이기지 못해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다.” (톨스토이, 『부활』, 1899)

  정치범에 대한 탄압과 대규모 유형은 20세기 소비에트 시절에도 계속된다. 특히, 스탈린 독재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기도 했는데, 도스토옙스키와 유사하게 솔제니친 역시 자신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1년 포병 대위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 솔제니친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니콜라이 비트케비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닌주의 왜곡’이라는 제목으로 스탈린을 비판한 내용이 발각되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지내게 된다. 바로 이 8년간의 수용소 생활이 솔제니친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962), 『제 1권』 (1968), 그리고 『수용소 군도』 (1958~1967)의 밑거름이 되었다. 솔제니친은 이들 작품에서 스탈린 시대와 감옥, 수용소, 강제 노동소를 배경으로 하여 이곳들의 잔혹한 실상과 정치권력의 허상을 신랄하게 폭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모자를 벗어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숟가락으로 죽그릇의 가장 자리부터 먹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제, 죽을 먹는 이 순간부터는 온 신경을 먹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얇은 그릇의 밑바닥을 싹싹 긁어서 조심스럽게 입 속에 넣은 다음, 혀를 굴러서 조심스레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어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곳에 가면, 한 달 동안 계속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몸을 녹일 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움막 한 채 없고, 모닥불을 피울래야 피울 나무토막 하나 없는 곳이다. 몸을 녹일 유일한 방법은 죽어라고 곡괭이질을 할 수 밖에 없다.”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962)

“수용소 군도에서는 ‘무슨 일이건 가능하다’라는 말이 있다. 더할 수 없이 추악하고 비열한 행위도, 그 어떤 종류의 배신행위도……. 하긴 우리나라의 수용소는 ‘마굴, 강도들의 공동체, 상습범의 온상, 부도덕을 전파하는 시설 (이건 제정 러시아 시대의 감옥을 두고 하는 말이다) […]”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1967)

  솔제니친의 수용소 배경 작품들은 아무 범죄 행위도 없고, 정치적 사상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인물이 감옥에 수용되어 온갖 고초를 겪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러한 인물들의 개인적인 비극을 통해 참혹한 수용소를 고발하는 동시에 수많은 약자를 무자비하게 억압하는 소비에트 권력의 전제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로 감옥은 ‘프리종 prison’이며, 이는 ‘붙잡다, 체포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prehensio’에서 유래되었고, 감옥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튜르마 тюрьма’의 어원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16세기 무렵 라틴어 ‘turrim’에서 유래된 폴란드어 ‘turma’(‘탑’을 뜻하는 중세 독일어 ‘turm’에서 파생)이고, 다른 하나는 비슷한 시기에 전해진, ‘어둠, 감옥’을 뜻하는 고대 터키어 ‘*türmä’이다. 어느 경우이든 감옥은 감금과 처벌의 기능을 가진 폐쇄된 장소를 가리킨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권력은 사회질서의 유지를 내세워 범죄자나 미친 사람, 때로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왔다.
  위험한 인물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감금의 기능에 국한되었던 감옥이 형벌의 성격을 갖게 되는 시기는, 유럽의 경우 종교와 정치의 권력이 강화되는 중세 이후이다. 프랑스는 1392년에 파리 고등법원 부속 콩시에르쥬 왕립 감옥을, 15세기 중반에 건립된 바스티유의 요새, 벵센 감옥을 건립했다. 이 감옥들은 주로 정치범을 수용한 곳으로서, 특히 바스티유 감옥은 전제정치의 상징으로서 1789년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이후로 감옥은 권력이 위험한 인물로 규정한 사람들의 육체와 시간을 감시하고 통제하여 체재에 순응하게 만드는 가장 효율적이고 합법적 도구로 바뀌어간다. 처벌 또한 일상의 통제와 강제노역이 핵심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절대왕권이 약화되고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 범죄가 늘어난 시대변화를 반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로는 근대화된 사법체제가 범죄 유형과 범죄자들을 분류하고 그들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감옥의 통제와 교화 기능이 더 정교하고 강력해졌다. 
  러시아의 경우, 근대 이전까지 감옥이라 불린 ‘튜르마’는 죄수들을 감금하는 곳이라기보다 가혹한 벌을 주는 장소를 의미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이 시행된 1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튜르마’는 신체적 형벌이 금지되고 일정기간 죄수들을 수감하는 장소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특이한 것은 거주지를 제한하며 강제 노역을 시키는 ‘유형’ 제도이다. 16~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널리 확산된 유형은 주로 정치범들에게 적용되었지만, 19세기 중반에는 정치범뿐만 아니라 일반 범죄자들도 유형에 처해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혹했던 것은 폭압적인 차르 정부에 대항한 죄로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들이 겪었던 시베리아 유형이었다. 정치범에 대한 탄압과 대규모 유형은 20세기 소비에트 시절에도 계속되어 1905년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1906년에는 약 20만 명, 1930년대에는 16만 명의 시베리아 유형수들이 발생했다. 감옥과 수용소의 잔혹한 실상과 정치권력의 허상을 신랄하게 폭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솔제니친의 수용소 문학도 그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근대 서구의 역사에서 프랑스와 러시아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이념과 계급의 갈등, 그 때문에 빚어진 혁명을 치열하게 경험했던 나라인 만큼, 양국에서 감옥은 무엇보다 정치범을 수용하는 기능이 강했던 듯하다. 그러나 산업화와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프랑스에서 경제적, 사회적 범죄자를 더욱 정교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감옥의 기능이 강화되었다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소비에트 체제로 나아간 러시아는 많은 사상범들을 폭압적으로 관리한, 유형이라는 독특한 감옥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연관 토포스 계몽; 범죄; 공포; 지식인; 지하실; 탐욕; 테러리즘; 혁명
참고자료(프랑스) Baker, C. Pourquoi faudrait-il punir?, Tahin Party, 2005.
Céré, J.-P. La prison, Dalloz, 2007.
Foucault, M.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Gallimard, 1993.
Hugo, V. 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Librio, 2002.
Kensey, A. Prison et récidive, Armand Colin, 2007.
Petit, J.-G. Ces peines obscures. La prison pénale en France, 1789-1870, Paris, Fayard, 1990.
Rey, A. dir. Le dictionnaire culturel en langue française, Le Robert, 2005.
Wacquant, L. Les Prisons de la misère, Raisons d’agir, 1999.
김연권, 「스탕달 소설에 나타난 <감옥의 주제> 연구」, 경기대 논문집(제15집 1호), 1984.
참고자료(러시아) Конечный А. Быт пушкинского Петербурга 1, 2. Спб.: Ивана Лимбаха. 2003.
Лютман М. Ю. Беседы о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е. СПБ.: Искусство. 1994.
Мулукаев Р. С. Полиция и тюрменые учерждения дореволюционный России. М.: 1964.
Екоршкин Н. П. 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енных учерждений дореволюционный России. М.: 1980.
추천자료(프랑스) 드니 디드로, 『수녀』, 이봉지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나남, 1994.
빅토르 위고, 『사형수 최후의 날』, 한택수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스탕달, 『적과 흑』, 이동렬 역, 민음사, 2004.
체사레 백카리아, 『체사레 백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한인섭 역, 박영사, 2010.
홍성욱, 『파놉티콘』, 책세상, 2002.
추천자료(러시아)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러시아 희곡 1』, 조주관, 홍대화, 오종우, 김혜란 옮김, 열린책들, 1998.
도스토옙스키, 『죄와벌』, 홍대화 옮김, 열린책들, 2007.
___________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동현 옮김, 문예출판사, 1999.
________ 『수용소 군도』, 김학수 옮김, 열린책들, 2009.
톨스토이, 『부활』, 박형규 옮김, 민음사, 2003.
________ 『전쟁과 평화』, 박형규 옮김, 인디북, 2004.
푸시킨, 『문학 작품집』,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