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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결투
토포스명(프랑스) duel
토포스명(러시아) дуэль
정의 1. 결투는 명예와 관련될수록 보다 자주 발생하는 갈등 해결책으로 인식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결투는 다른 사람에 의해 모욕을 당하거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러한 분쟁의 해결을 위해 그 사람과 벌이는 무기를 동반한 물리적 싸움을 의미한다. 이 대결은 비교적 자세하게 정해진 규칙들 아래, 복수의 증인들 혹은 심판관들을 입회시킨 상태에서 진행되는데, 두 당사자들 중 하나가 피를 흘리거나 죽임을 당함으로써 완료된다. 
결투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duel’은 ‘싸움, 전쟁’이라는 라틴어 ‘bellum’에서 변형된 ‘두 사람의 싸움’이라는 라틴어 ‘duellum’에서 기원한 것으로 기록된다. 
결투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그 사회 문화적인 배경은 서구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변모를 거치며 19세기 말까지 이어지며, 당연히 서양인들의 삶에 하나의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관행으로 자리 잡는다. 
  카이사르와 타키투스는 게르만족들이 한판의 칼싸움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이 후세의 결투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이후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은 옳은 사람의 편에 선다’는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하여 결투를 ‘신의 심판’으로 여기는 인식이 퍼져나가면서, 상호간의 분쟁 해결 수단으로 삼는 이른바 ‘사법적 결투(judicial duel)’의 형태로 유럽 각지에 퍼졌나갔다. 사법적 결투는 한 사람이 법관에게 어떤 상대방에게 죄가 있다고 고발하고 그 상대방은 자신을 고발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할 경우, 법관은 두 사람이 결투를 벌여 시비를 가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법적 결투는 신의 개입에 의해 죄가 없는 쪽이 반드시 이긴다고 믿었고, 패한 사람은 법에 따라 처리했다. 10∼11세기 프랑스에서 성행하였지만, 죄 없는 사람이 지는 폐단도 종종 발생하였기에 15세기 무렵에 금지되었다. 
15세기 이후에는 결투는 사법적 판단의 권위를 더 이상 갖지 못하고 단지 개인들 간의 명예의 회복 혹은 감정적 보복의 차원에서만 행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를 ‘명예 결투’라고 칭하여 ‘사법적 결투’와 구분한다. 
  한편, 결투는 그 예정된 진행 정도에 따라 ‘상징적 결투(duel de plaisance)’와 ‘死鬪(duel à outrance)’로 분류되기도 한다. 후자는 한 당사자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진행하기로 약속된 결투이며, 전자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누가 정당한지를 밝히기 위해 어느 한 쪽이 일정한 정도로 부상을 입으면 완료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결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둘의 구분은, 칼로 하는 결투에서 총포를 사용하는 결투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그 실제적 의미가 없어진다. 총을 사용하는 결투에서는 언제나 죽음을 전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구체적 사례들에서 드러나겠지만, 결투는 그것이 탄생한 시대인 중세를 넘어 근세에 들어와서도 결코 잦아들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빈번히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서구의 역사에서 결투라는 관행이 일상 속의 매우 강렬한 문화적 토포스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토포스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결투는 ‘명예’의 토포스 바로 옆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 때로 사적인 감정사의 해결을 위한 비상수단으로 인식되면서, 그것은 동양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문화적 항목으로 자리 잡는다. 
  결투와 관련된 문화적 성격으로 또한 지적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귀족적’ 성격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어떤 순간에도 ‘맨손’의 결투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맨손을 쓰는 것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언어적 표현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즉 결투에는, 억제되지 않는 감정을 아무런 매개나 성찰 없이 제도적 장치에 기대지도 않고 곧바로 표출한다는 자연적이고 원시적인 측면과 문명의 이기인 최소한의 ‘무기’를 사용한다는 문명적 측면이 동시에 포함된다. 
그래서 중세 이전의 고대에서는 결투의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에는 전쟁 중에 일어나는 개별 전투가 실제로 벌어지거나 훈련된 검투사(글래디에이터)들의 실황 공연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투라는 문화적 관행을 배태한 근저에는 목숨보다 존엄을 더 중시하고 실질적 이해관계보다 명예를 앞세우며 개인의 문제를 제도적 사법에 맡기기보다는 개인의 자율적 의지와 선택이 해결한다는 다분히 귀족적이며 정신적인 어떤 이상이 전제되어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결투를 의미하는 ‘두엘 дуэль [duel]’은 18세기 무렵 프랑스어 결투 ‘duel’을 음차한 것이다. 결투를 의미하는 또 다른 러시아어로는 ‘포예디노크 поединок [poedinok]’가 있는데, 이 단어는 폴란드어 ‘pojedynek’를 차용한 것으로 ‘jedyn’은 러시아어로 ‘하나 один [odin]’를 의미하며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1대 1의 싸움’이라는 뜻이다. 
  러시아에서 결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세기로 추정되지만, 중세 러시아 시절부터 서구의 결투와 유사한 형태들이 존재하였다. 우선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유행했던 서구의 ‘사법적 결투’와 유사한 ‘폴레 поле [pole]’가 있다. ‘폴레’는 유럽의 사법적 결투와 다소 상이한 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폴레의 목적은 주로 재산의 소유권 문제로 발생하였으며, 참관인이나 증인 없이 이해 당사자끼리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맨주먹으로 결투를 벌이는 형태였다. 15세기에 이르러서 국가가 폴레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16세기까지 러시아 대중들에게 널리 유행되었다. 
  폴레가 상호간의 불화로 인해 발생하는 결투라고 한다면 중세 러시아의 또 다른 결투 형태인 ‘클라츠느이 보이 кулачный бой’는 오락성과 축제성을 지닌 매우 흥미로운 형태의 결투이다. 키예프 공국의 기독교 수용(988년) 이전부터 존재한 이 결투는 천둥과 번개를 다스리는 슬라브족의 신인 ‘페룬’을 기념하는 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주로 광장에서 맨주먹으로 싸움을 벌이는 쿨라츠느이(주먹) 보이(싸움)은 일대일 싸움과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참가하는 집단적인 두 가지 결투 방식을 가진다.

  이교도 신을 신봉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금지시킨 쿨라츠느이 보이는 13세기 후반 운동경기나 축제 형식으로 발전하여 오랫동안 러시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민족의 강인함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쿨라츠느이 보이를 매우 좋아하였고 이를 조직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17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서 대규모의 쿨라츠느이 보이가 벌어졌고, 이를 목격한 옐리자베타 여왕이 모스크바 근교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먹싸움 단체들을 모두 폐지시키기도 하였다. 예카테리나 여제 당시에 쿨라츠느이 보이의 인기는 다시 상승했으나, 1832년 니콜라이 1세는 주먹싸움이 ‘해로운 오락거리’라는 이유로 완전히 폐지시켰다.
폴레와 쿨라츠느이 보이와 같은 러시아 전통 결투 형태들은 18세기 이후 서구에서 유행하는 근대적 결투가 러시아로 유입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19세기에 군인 작가인 슈베이코프스키는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적 결투의 의미와 러시아 전통적 결투의 차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결투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두 사람이 시간, 장소, 무기를 합의한 후에 치명적인 무기로 두 사람 사이에 벌이는 조건화된 싸움이다. 전통적인 결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1) 결투의 목적 - 실추된 명예 회복. 개인 간의 분쟁이나 소유권 다툼의 문제로 발생한다. 따라서 신의 심판이라는 인식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중세의 ‘사법적 결투’와 구분된다.
2) 결투의 참가자는 오직 두 사람이다. 즉 모욕당한 사람과 모욕한 사람. 바로 이점에서 집단과 집단의 싸움인 ‘쿨르츠느이 보이’와 구별되고, ‘두 사람의 싸움’이라는 의미에서 ‘두엘’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3) 결투의 도구 - 주먹이 아니라 치명적인 무기를 가지고 싸운다는 점에서 ‘폴레’와 ‘쿨라츠느이 보이’와 구별된다.
4) 상호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결투의 법칙은 엄격하게 지킨다.” (슈베이코프스키, 『러시아 군대의 장교사회의 재판과 결투』, 1898 )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원래 결투는 싸움을 통한 사법적 결투, 즉 재판의 형태로 행해졌다. 카이사르와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한판의 칼싸움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중세 초기 서유럽에는 게르만족이 침입하면서 이 결투의 관습이 자리 잡게 되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신하들에게 이러한 관습이 확산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였는데, 이는 중세에 이미 프랑스 영토에서 결투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로마 교황청은 855년에 발랑스 종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결투에서 살아남은 자는 살인자로 간주될 것이며 죽은 자는 자살한 것으로 인정되어 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한다.”
  종교 당국과 세속권력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투의 관행은 민간에서 나름의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서 확산되고 있었다. 일정한 종교적 절차를 갖춘 채 진행된 결투의 결과는 신의 판정으로 여겨져서, 그 승자는 자동적으로 무죄이며 패자는 신에 의해 징벌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1258년에 생 루이는 칙령을 제정하여 소위 ‘사법적 결투’에 행정적 제한과 규정을 가했으며 그 손자인 미남왕 필립은 이 관행을 제한하기 위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때부터, 정상적인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 결투는 그 공식적 기능을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한다. 
  특히 14세기 영국과의 백년 전쟁의 기간을 거치면서 결투는 그 사법적 성격을 상당 부분 잃게 되는데, 1547년 7월 10일의 ‘자르낙의 일전’이라 불리는 마지막 법적 결투를 끝으로 결투는 온전히 개인의 명예와 심리적 복수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투의 관행은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왕권에 심리적으로 저항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규제하고 또 한편으로 용인하는 왕권 아래에서 귀족들은 앞 다투어 결투를 벌이는데, 1588년에서 1608년에 이르는 이십년 동안 약 만 명의 귀족이 명예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 즉, 일 년에 오백 명, 일주일에 10명의 사망자가 프랑스에서 기록된다. 루이 14 세는 그 재위기간 동안 무려 11 번의 칙령을 반포하며, 어떤 경우에는 결투에 임한 귀족을 국외로 추방하기도 한다. 
  구체제 하에서의 이러한 관습은 대혁명을 거치면서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계급의 부상과 발맞추어, 이제 결투는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전 인구의 문화적 관행이 되어버린다. 혁명 기간의 입법의회는 결투에 대해 오히려 사면 법안을 마련하고, 규제를 위한 입법은 중단되어 버린다. 
  1810년의 나폴레옹 형법은 결투에 대한 제재 조항을 마련하지 않으며, 그 결과 결투가 벌어져서 기소되는 경우, 예심 재판에서 다루어지는데 실상은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는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기록된다. 그리하여 19세기의 프랑스 전역에서 결투의 ‘광풍’이 일었다고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결투는 이제 풍속 깊숙이 자리 잡았으며 귀족에게서는 물론이고 그들을 내심 흉내 내려는 욕구에 가득찬 부르주아들에게서도 하나의 문화적 ‘제도’가 되어버린다. 
  1836년 샤토비야르 백작은 일종의 결투 개론서인 『결투에 관한 시론』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그 책에서 그는 적법한 무기(에페 검, 사브르 검, 권총 등), 모욕 당한자의 결투 날짜, 장소 및 사용 무기 결정권, 경우에 따른 증인의 수 등을 규정한다. 

  테오필 고티에, 알렉상드르 뒤마, 프루동 등 매우 많은 수의 문인 및 명사들 나름의 사연으로 혹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 때문에 결투를 치르게 되며, 이미 유행이 되어버린 이 관습은 그것을 주저하는 자를 ‘겁쟁이’로 여기게 되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하여 일정한 지위와 명망을 누리는 자일수록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우려 때문에 마지못해 결투를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우려 섞인 비판이 19세기 전반에 대두되기도 하는데, 피에르 니콜은 『도덕에 관한 시론』에 다음과 같이 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한심한 관습을 한탄하고 저주하면서 또 그것을 따르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결투장으로 가는가!” 

  비판의 목소리는 낭만적 공화주의자 빅토르 위고가 그의 약혼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행하게도 결투를 하게 되었을 때 이를 피하거나 아니면 부끄러워해야만 한다……. 결투는 경멸스러우며 역겹기까지 하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이 어리석은 편견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위고는 몇 달 전에 결투장에 나가서 경미한 부상만 입고 돌아왔었다. 1821년 베르사이유에서 위고는 한 경호원과 가벼운 실랑이를 겪었는데, 위고의 손에 들고 있던 어떤 서류를 경호원이 빼앗았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826년에서 1834년에 이르는 8년 동안 프랑스에서 200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결투의 관행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수그러든다. 그러한 변화에는 이른바 ‘빅토르 누아르 사건’이라고 이름 붙은 한 1870년 1월의 한 총격사건을 기억할 만하다.
  당시의 프랑스 황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사촌이자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피에르 보나파르트는 창간된 지 몇 달 되지 않은 반 보나파르트파 신문 ‘라 마르세이예즈’에 의해 크게 명예훼손을 당하였다고 여기고 그 편집장인 파스칼 그루세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이를 받아들인 그루세는 결투의 제반 조건을 정하기 위해 22 세의 젊은 기자 빅토르 누아르를 피에르 보나파르트의 거처로 보낸다. 그러나 평소에도 그 과격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피에르 보나파르트는 협상과정에서의 이견과 실랑이 끝에 빅토르 누아르를 권총으로 쏘아 즉사시킨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피에르 보나파르트는 기소되고 (약 두 달 후 그는 법정에서 무죄 석방된다) 파리에서 거행된 빅토르 누아르의 장례식에 약 10 만 명의 군중이 운집하여 살인자 및 그의 사촌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을 성토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투의 관행이 갖는 반문명성과 폐해에 대해 일정하게 공감하게 된다. 
  결국 빅토르 누아르 사건은, 정치적으로 공화파가 늘 반대해 왔고 왕당파들은 짐짓 옹호해 왔던 바, 인간사의 민감하고도 애매한 문제의 해결과 판단을 ‘우연의 폭력’ 혹은 ‘폭력의 우연’에 일임하는, 귀족적 허세가 근본에 깔린 이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관습을 객관적으로 반성하게 만드는 하나의 문화사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제 결투는, 사람들의 일상에 종종 벌어지는 실제 사건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자 역사적 기억으로 정리되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1차 대전 이 발발하기 전 1910년경에는 파리의 물랭 루쥬에서는 결투를 주제로 한 공연이 행해지며 사람들은 결투를 하나의 볼거리로 즐기기도 한다.
  2차 대전 이후에는 결투의 관습은 거의 완전히 사라지며 더욱 치밀해지고 정교해진 사법적 제도들이 개인들의 명예에 관한 분쟁을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법정에 가서야 변호사들의 ‘말 결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기록된 결투의 흔적은 의외로 21세기의 벽두에 발견되는데, 한 작가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두고 출판업자와 벌인 한 판 대결이 그것이다. 2008년 3월 브뤼셀의 도서 전시장에서, 가라데 붉은 띠 보유자인 작가 토마 군지크는 태권도 붉은 띠 보유자인 출판사 사장 뤽 피르에게 저작물을 두고 무예 결투를 신청하여, 명예와 저작권을 되찾는다. 
  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유럽의 관습으로 들어서 온 결투는 연극이나 문학을 비롯한 삶의 미학적 표현물에도 당연히 그 자취를 진하게 남기는 주제가 되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문학인들 스스로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실제 결투를 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빅토르 위고나 알렉상드르 뒤마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예 비평의 시조가 된 생트 뵈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등도 문단 내에서의 갖가지 인간관계 속의 감정사에서 비롯된 결투를 피하지 못하였다. 다행히 이 결투들은 중상이나 치명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아서 프랑스 문학사의 각별한 주목을 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투의 토포스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 속에 매우 자주 등장하여 작품의 특정한 장면을 구성하였는데, 우선 코르네이유의 극작품 『르 시드』의 주인공 로드리그는 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자신의 정념을 희생시키는 위대한 결단을 약혼녀의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는 결투로써 드러낸다. 에스파냐의 영웅 엘시드의 줄거리를 차용한 비극이었는데, 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결투를 삶과 운명의 중요하고도 피할 수 없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1782년 발표된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 발몽은 그 사랑과 배신과 유혹의 드라마로 점철된 삶을 한 판의 결투로 마감한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영감을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어주고 난 후 주인공 청년 라스티냑이 불빛이 밝혀진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그래, 어디 한 판 해 보자고!”라고 내뱉는 비장한 일갈은 결투의 문화적 토포스가 그 시대에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었기에 형상화할 수 있었던 소설적 장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의 일생을 모티브로 에드몽 로스탕이 19세기 말에 발표한 동명의 5막 운문 희곡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의 기형적인 코에 가해진 조롱에 대한 분노를 결투를 통해서 해소한다.
  뒤마의 인기 소설 『삼총사』에서 주인공 다르타냥이 아토와 벌이는 결투는 갑자기 중단되어 두 당사자를 오히려 친구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 모로는 시지와의 결투에 임하나 소식을 알고 달려온 아르누에 의해 중단되어 작가로 하여금 소설의 줄거리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 준다.
  모파상의 장 단편 소설들이 발표되던 1880~90년대에 결투의 관습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에서 약화되고 쇠퇴하던 시기였으나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결투에 임하거나 결투에 불려 나갈까봐 두려움에 떤다. 『벨아미』의 조르주 뒤루아는 그가 다니던 신문사의 편집장의 주문으로 신문사의 경쟁자와 결투를 벌일 것을 주문 받으며, 『겁쟁이』의 주인공은 결투 전날 밤의 불안과 내일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또한 모파상은 1883년 제목 자체가 『결투』인 단편소설을 <골루아>지에 발표하기도 한다. 
  영화의 시대에 들어와서도 결투는 매우 중요한 모티브로 살아남는데, 조르주 로트네르 감독이 1981년 만든 영화 『꾼』에서 장 폴 벨몽도가 연기한 주인공 조슬랭 보몽은 결투를 통해 악명 높은 경찰서장 로젠을 죽이기도 한다. 
  위의 모파상의 소설들과 로트네르의 영화는 결국, 실제 행위나 사건 혹은 관습으로서의 결투는 이제 사라졌으나, 하나의 문화적 토포스로서의 결투는 프랑스인들의 심리 속에 그 후로도 지워지지 않고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결투는 러시아 문화 영역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현상 중의 하나이다. 서구의 결투가 15세기 무렵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소멸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의 결투는 18세기 무렵에 유입되어 19세기 초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세기 내내 성행하였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최초의 서구식 결투는 1666년 모스크바에서 벌이진 두 명의 외국인 장교, 스코트랜드의 패트릭 골든과 영국 소령 몽고메리 간의 결투로 기록에 남아 있다. 이 결투는 당대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당시 모스크바 공국의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허용되었기에 소피야 여제는 1682년 10월 25일자로 칙령을 발표하여 결투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결투를 엄격히 금지시키려는 국가적 노력은 유럽식 문물과 관습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표트르 대제 시절에도 계속 이어졌다. 1716년에 표트르 대제가 제정한 『군대 법령』 49장의 ‘결투 및 싸움의 발생에 관한 감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만일 두 사람이 예정된 장소에 나가 서로를 향해 칼을 뽑는다면, 만일 그들 가운데 부상자나 사망자가 없다하더라도, 결투 당사자 두 사람은 물론, 입회인이나 증인으로 판명된 자들도 마찬가지로,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 할 것이다……. 만일 결투가 시작되고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자가 발생하면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 (『군대 법령』, 1716년) 

  이처럼 엄격히 금지된 서구식 결투는 예카테리나 시절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식 예법과 생활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진 이 시기에 러시아 귀족들에게 결투는 서구 문물을 모방하는 하나의 수단처럼 인식되었다. 그리고 그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결투가 유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1787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선포한 ‘결투에 관한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의 내용은 결투를 엄격히 금지하고 결투에 참가한 자들은 많은 벌금이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지만, 여제가 결투를 ‘이전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외국의 것을 모방한 것이거나 외국인들의 전유물이다’라고 표현한 것이 오히려 외국의 것을 모방하고 닮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게 되었다. 또한 국가의 법령과는 달리 실제 결투에 관한 처벌이 지켜진 경우는 드물었고, 그 강도가 약했기에 결투는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다.
  특히, 1812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의 조국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 문물을 직접 접하게 된 러시아 엘리트, 특히 젊은 군인 장교들 사이에서 결투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결투는 18-19세기를 관통하는 러시아의 중요한 문화적 토포스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주로 맨주먹으로 싸우던 러시아식 전통 결투와는 달리, 무기를 사용하여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서구식 결투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논란은 주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대립으로 표출되었는데, 결투에 관한 두세대의 인식 차이는 여러 문학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난다.
  예카테리나 시기의 극작가인 폰비진은 자신의 평론 『나의 사상과 행적에 관한 솔직한 고백』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아버지 세대가 당시 결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결투는 양심을 거스른 일이다. 우리는 법아래 살고 있다. 주먹으로 싸우든, 검으로 싸우든 본질은 같은 것이다. 결투를 한다는 것은 젊은이들의 광기 어린 행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폰비진, 『나의 사상과 행적에 관한 솔직한 고백』, 1791년)

  이러한 두 세대 간의 차이는 푸시킨의 『대위의 딸』에서도 잘 드러난다. 안드레이 그리뇨프는 결투로 인해 부상당한 아들 표트르 그리뇨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네가 비록 장교의 계급장을 달고 있어도 너의 그 못된 행실에 대해서는 마을의 장난꾸러기 다루듯이 혼을 내줄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군도를 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군도는 국가를 수호하라고 너에게 준 것이지, 너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 불량배와 결투를 하라고 준 것이 아니다.” (푸시킨, 『대위의 딸』, 1836년)
  위의 예시에 나타난 것처럼, 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유행되기 시작한 결투는 19세기 초반까지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러시아 사회, 특히 귀족 사회에서 결투는 급속도로 확산되어 세기 전반을 아우르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이어졌다.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결투가 이토록 급속도로 확산된 배경에는 결투의 근본적인 속성 중의 하나인 ‘명예’,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귀족적 명예’가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한 유리 로트만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결투는 명예를 회복하는 일정한 절차이고, 표트르 대제 이후 서구화된 러시아 귀족사회의 전 윤리체계 속에서 ‘명예’의 개념이 갖는 특성을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 러시아 귀족은 사회적 행동을 규제하는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통제장치의 영향 아래에서 살았다. 충성스런 신민이자 국가의 종복으로서 귀족은 명령에 복종했다. 이때 복종의 심리 기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복종자에 가해지는 형벌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귀족은 한 사람의 귀족으로서, 다시 말해서 사회적 지배 집단인 동시에 문화적 엘리트이기도 했던 계층의 하나로서 명예의 법칙에 순종했다. 귀족 문화가 그 자체를 위해 창조하는 이상은 공포심의 완전한 추방과 행동의 기본법으로서의 명예의 확립을 암시한다.”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1994년) 

  명예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애착은 다음과 같은 당대의 속담에서도 드러난다. 

“영혼은 신에게, 마음은 여자에게, 의무는 조국에게 바치지만, 명예는 아무에게도 바칠 수 없다”

“명예는 젊어서부터 지켜야한다”

  이후 러시아에서 결투는 자신의 품위나 도덕성을 고수하려는 극단적인 형태이자, 자신의 명예를 지키면서 갈등을 종식시키는 고귀한 행위라는 의식이 형성되었고 이것은 당대 문학에 그대로 투영이 되었다. 19세기 러시아의 거의 모든 작가들은 실제로 본인이 결투에 참여했거나, 본인들의 작품에서 결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대위의 딸』, 『일발』,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가면무도회』,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체호프의 『결투』, 『곰』, 『세자매』 등을 통해 작가들은 결투를 명예나 귀족적 덕성을 지킬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러시아 결투 현상 중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정부의 공식적인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결투가 성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방법과 형식도 서구에 비해 매우 잔혹했다는 점이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식 결투에 대해 극단적인 잔혹성이 있는 ‘합법화된 살인’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시기 서구의 결투 방식은 매우 완화되었다. 예를 들어 결투의 거리도 25-35걸음 정도로 매우 길었고, 차례로 번갈아 가면서 권총을 쏘았기에 부상자 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한 번의 결투로 승자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서로의 합의에 의해 끝을 내곤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러시아의 결투는 서구와 달리 매우 잔혹했다. 그러한 예를 실제 푸시킨이 단테스와 벌인 결투 법칙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국민 시인 푸시킨을 죽음으로 몰고 간 단테스와의 결투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결투자들은 서로 20보 떨어진 거리에 서고 지정 선으로부터 5보 떨어진 곳에 선다. 이때 지정선간의 거리는 10보이다. 
2. 권총으로 무장한 결투자들은 주어진 신호에 의해 서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발사할 수 있다. 단 그 어떤 경우도 지정 선을 넘을 수 없다.
3. 이와 함께 사격 후 결투자들은 위치를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먼저 발사한 자가 똑같은 거리에서 상대방의 사격을 받기 위한 것이다. 
4. 양측이 사격을 마쳤지만 결과가 없을 경우 결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결투자들은 똑같이 20보 거리에 서고 동일한 지정선과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5. 결투 장소에서 결투자들 사이의 모든 설명에 입회인들이 중개자가 된다.
6. 아래에 서명하고 전권을 부여받은 입회인들은 각자 자기편을 위해 여기에 명기된 조건들이 엄수될 것임을 자신의 명예를 걸고 보장한다.”

  서구에 비해 잔혹한 형태를 유지한 러시아의 결투는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도 여전히 성행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이를 인정하고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1845년 발표된 니콜라이 1세의 ‘형사사건의 처벌 법전’의 결투에 관한 처벌을 통해 알 수 있다. 법전에 명시된 바에 의하면, 결투에 관한 처벌은 이전에 비해 그 강도가 약해졌다. 결투 입회인과 의사는 처벌 하지 않았고, 결투 참가자는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간 경우에도 5-10년 정도의 유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그 강도가 더 약하게 적용되었다. 가장 흔한 형벌은 변방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하는 것이었고, 관직을 박탈당하기는 했지만 곧 다시 복귀가 되기도 하였다. 
  결국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부분적이지만 러시아 사회에서 결투가 공식적으로 허용된다. 1894년 5월 20일자로 선포된 ‘군 장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툼에 관한 규칙’이라는 군 지령 118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대 내에서 장교들 간의 다툼이 발생할 경우 그들의 지휘관이 최우선으로 조정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재판에 회부한다. 재판에서 서로가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결투를 허락한다. 이 경우 반드시 입회인을 두고 상호간에 일정한 규칙을 정해 합의해서 결투를 시행하며 상대방은 결투를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

  이 법령이 발표되고 나서 러시아에서 결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1876년에서 1890년 사이에 재판에 회부된 장교들의 결투는 14건에 불과하였지만, 1894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322건이었고, 재판부에서 허락한 결투는 256건이나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단막 보드빌인 체호프의 『곰』에서 곰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스미르노프는 자신의 부채를 돌려받기 위해 미망인이 된 채무자의 부인을 찾아간다. 돈을 주지 않겠다는 여자와 옥신각신 끝에 그는 여자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자신이 여자 때문에 세 번이나 결투를 했다는 얘기를 자랑삼아 한다. 
  19세기 말까지 러시아 사회에 유행처럼 번진 결투는 세기 초가 되면서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이후 1917년 소비에트 혁명이 발생한 이후 귀족 문화의 잔재를 없애고자 하는 혁명정부의 방침에 의해 급격히 소멸되었다. 
비교문화적 설명   결투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duel’은 라틴어 ‘bellum’(싸움, 전쟁)의 옛 형태어 duellum에서 기원하며, 러시아어 ‘두엘 дуэль’의 어원은 프랑스어 결투 ‘duel’을 차용한 것으로서 프랑스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 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의 결투의 역사는 유럽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중세의 ‘사법적 결투’와 ‘명예 결투’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서구의 역사에서 결투라는 관행은 일상 속의 매우 강렬한 문화적 토포스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결투는 루이 14세 치하의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왕성하게 성행하였으며,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 때로 사적인 감정 해결을 위한 귀족들의 독특한 의식인 동시에,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왕권에 심리적으로 저항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귀족들의 시대가 저물고 부르주아와 시민계급이 형성된 18-19세기 프랑스에서 결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성행한다. 시민계급의 부상과 발맞추어, 이제 결투는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닌, 그들을 내심 흉내 내려는 욕구에 가득 찬 부르주아들에게까지 퍼져서 프랑스는 19세기에 결투의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 
  중세에 ‘폴레’, ‘쿨라츠느이 보이’와 같은 원시적 형태의 결투 양식이 존재했던 러시아에서 서양식의 결투가 본격적으로 성행한 것은 여타의 토포스들과 유사하게 프랑스의 문화적 세례를 강하게 받았던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로 여겨진다. 특히, 결투의 토포스는 러시아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여러 문화적 현상 중에서 단기간에 가장 강력한 확산을 이루었다는 점에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예카테리나 대제부터 시작된 프랑스 문물의 본격적인 수입과 더불어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 결투 문화를 직접 접한 젊은 귀족 장교들 중심으로 급속도로 전파된 것에 일차적인 원인을 둘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의 결투 토포스가 가지는 ‘귀족적 명예’ 의식이 당시 귀족 문화 정착 단계에 있었던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인식되면서 귀족을 귀족답게 만드는 귀족성의 발현이자, 자신의 품위나 도덕성을 고수하려는 인간 정신영역의 최대한의 발현으로 표출되어 프랑스와 달리 그 방법과 결과에서 매우 잔혹한 형태로 19세기 말까지 성행하였다. 
연관 토포스 귀족; 나폴레옹; 명예; 모욕; 부르주아;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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