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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결혼
토포스명(프랑스) mariage
토포스명(러시아) брак
Definition 1. 사랑이 공인될수록 행복이 지속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결혼 또는 결혼생활, 즉 인간의 공동 생활의 기초적인 최소 단위인 자웅의 짝 맺음 혹은 남녀의 결합 및 그러한 상태의 실존의 영위를 뜻하는 근대 프랑스어 ‘마리아쥬 mariage [maʀjaːʒ]’의 어원에 관한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12 세기 중반 (약 1145년경) 중세의 문헌에 나타나는데, 마리아쥬는 “한 처녀를 짝지워주다”라는 의미의 동사 marier의 명사형이며, 라틴어 동사 마리타레(maritare)에서 왔다.
  이 동사 자체는 ‘남편’을 의미하는 명사 마리(mari)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mari는 고전 라틴어 마리투스(maritus)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이며 마리투스는 수컷을 뜻하는 마스(mas) 또는 마리스(maris)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는 사회적 제도로서의 결혼과 그에 따른 가족의 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는데, 그것의 인류학적 보편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서로 다른 성의 두 개인이 다소간 지속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상태에서 결합하여 2세들을 생산하고 양육함으로써 가족을 형성하는 결혼 제도는 실제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며 거의 모든 형태의 사회에서 나타난다.”

  물론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의 배타적 상호 결합인 일부일처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원시 부족사회에서는 한 남성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일부다처, 또는 한 여성이 여러 남편과 결합하는 일처다부 등의 중혼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기도 하나, 이는 소수의 경우이며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역사가 기록된 이후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는 『혈족관계의 기본 구조』라는 저서에서 “남녀의 관계가 대칭적인 경우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적었는데, 일견 당연한 듯 보이는 이러한 정황은 남녀의 결합, 그리고 삶의 단위를 구성하거나 조건 짓는 그러한 비대칭적 관계와 관련된 결혼이라는 사건을 하나의 문화적 토포스로 끌어올리는 기본 조건이 되게 하는 듯하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학적 개체들이 부여받고 있는 암수의 차이는 사실 때로는 간과되어도 무방한 작은 것으로 비치기도하고 또 때로는 상쇄될 수 없는 크고 근원적인 이타성으로 다가오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크기와 의미를 일의적으로 규정하기는 힘든 그 이타성, 혹은 간극,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긴장과 이반과 욕망들은 결국 인간의 삶의 갖가지 개념과 형상과 역사를 만드는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결혼이 실존의 기본적이고 제도적 장치이기를 넘어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하고 환호하고 안타까워하는 하나의 문화적 토포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충분히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결혼이라는 개념 혹은 사건 앞에서는 모든 존재는 인류 혹은 사람이 아니라 남자이거나 여자일 뿐이다. 결혼의 문화적 의미는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의 결합과 공동생활이라는 보편적 형태와 의미의 결혼은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조금씩 편차를 보이기도 한다. 즉 시대에 따라 그 세태와 풍속은 다양한 의식과 문화적 발현을 보이고 또 결혼의 개인적 사회적 의미 자체도 동일하지는 않다. 
  우선 고대 이집트 문화에서 결혼은 신들이 저마다 천군이나 천사와 같은 보좌관을 거느린 것처럼, 여자(들)를 거느리고자하는 남자들의 의도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스 시대에 결혼은 신과 인간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물론 신들 간에도 사랑과 결혼의 드라마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남녀의 결합을 통해서 자신들의 종을 유지하여야 하는 필요성은 인간만의 것이었다. 또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결혼을 통해 2세를 법적 사회적 틀 안에서 공식화하고 재산을 세습하며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였다.
  로마 시대로 넘어오면 결혼과 결부된 세속적 의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결혼을 앞두고 먼저 약속하는 절차를 거치기 시작했으며 이때 상호 인정의 증표로 반지가 등장한다. 이것들은 대체로 2~3세기에 그 첫 기록이 나오며, 또한 신부에게 면사포를 씌워 식을 진행한다든지 꽃으로 그 아름다움을 장식하는 따위의 풍습들은 중세 기독교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것들이다. 
  제국의 말기에서 초기 교부 시대에 이르러 종교와 그 관계자들은 일상의 중요한 순간인 결혼과 관련하여 이를 문화적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혼인의 신학적 근거 및 거기에 결부된 제 윤리적 덕목들을 성서에서 찾아내어 일반인들에게 제시하려 든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4~5 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결혼의 문제는 사람들의 의식과 삶의 성격을 좌우할 수 있는 매우 결정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는데, ‘기독교적 결혼의 박사 ’로 불리기도 한 그는 결혼에 관한 초기 교부들의 성찰을 ‘대(代)잇기’, ‘신의(정절)’ 그리고 ‘예식’의 세 영역으로 나누어 요약 정리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혼인의 중요성은 흔히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이라는 굳어진 표현을 매개로 강조되기도 하였다. 
  카톨릭에서 혼인이 일곱 가지 성사 중 하나의 자격으로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은 중세로 넘어와서의 일이다. 12 세기 말 교황 루치아노 3세는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들의 결혼을 이교도들의 것과 구분하는 문제를 언급하며 그것을 종교적 제도 아래 두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13 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 9세가 혼배 성사를 7성사의 하나로 정식으로 포함시키게 된다. 
  그러나 교황청의 이러한 공식화 노력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중세인들의 삶에 교회와 사제가 미치고 또한 행사하던 영향력과 지배력은 명확한 것인 바, 공동체 안에서 부부로 인정받고자하는 마을의 한 쌍의 남녀가 다른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교회의 신부에게 달려가 승인을 청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결혼 및 결혼 생활과는 달리 중세의 그것들에는 종교적인 것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적 삶의 틀과 여건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프랑스의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는 저서 『기사, 여자, 사제 : (봉건 프랑스) 중세의 결혼』에서 그 의미와 양태, 그리고 거기에 작용하는 여러 (봉건주의적) 힘들의 관계를 매우 잘 정리하고 있다.
  뒤비는 우선 중세 사회, 특히 11~12세기의 프랑스에서의 결혼은 사회적 힘의 지배관계에서 고찰하려는 역사적 태도를 시종 견지한다. 즉 결혼이 남성들이 여성을 분배 소유하는 과정임을 적시한다. 즉 사회 구성과 유지를 위한 기초적인 장치로서의 결혼은 남성들 간의 경쟁을 규제하고 또한 번식을 공식화 및 사회화 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의 입장은 세속사외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 윤리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 명분은 결혼 제도를 통해 사회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을 보호하고 세속적 틀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족 및 기사 계급으로 대변되는 남성들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활용하였다. 이 당시 남자들의 결혼 윤리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일부일처 / 족외혼 / 쾌락의 배제’라는 세 가지 원칙이었다고 조르주 뒤비는 분석하고 있다. 일견 대립하는 듯 하는 사제와 기사 계급은 기본적으로, 나약한 여성에 대한 불신과 경멸을 그 전제로서 공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중세의 결혼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남녀의 결합을 개인과 개인의 문제이기 보다는 일정한 재산과 세력을 갖는 가족과 가문의 결합으로 여기려 했다는 점이다. 
  세속 권력인 왕가와 귀족들, 그리고 정신적 사회적 스승으로 자처한 교회의 사제들 간의 의견 대립이 가장 첨예한 분야 역시 결혼이었다. 귀족과 기사들은 신부들의 설교와는 반대로, 혈통이 좋은 가문의 여성들 중 남자 형제가 없는 규수들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가문을 보존할 수 있고 재산을 늘릴 수 있으며 세력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학사적 자료로 남아있는 중세의 기사도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사가 영주의 부인을 사랑했다는 그 수많은 기사도 소설은 과연 어느 만큼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까? 그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는, 혹은 그러한 드라마가 기사와 귀족으로 대변되는 남성들의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서 나오는 퍼포먼스에 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숙지하는 당대인들의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한) 열망과 꿈의 문화적 표상에 불과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결혼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는 ‘브라크 брак [brak]’, ‘제니티바 женитьба [zhenitlba]’ ‘수프루제스트보 супружество [sufruzhestbo]’ 등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브라크’이다.
  ‘브라크’는 ‘잡다, 데리고 오다’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동사 ‘брать [brati]’의 어간 ‘бра-’에서 명사형 파생 접미사 ‘-к’를 결합시켜 만든 단어이다. ‘잡다, 데리고 오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결혼을 의미하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종종 타 종족의 여인을 납치, 매매하여 결혼했던 고대 슬라브족의 결혼 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대 슬라브어에서 ‘브라크’는 ‘결혼’이라는 의미보다는 우리말과 유사한 개념인 ‘시집가다, 남편에게 가다’라는 ‘자무제스트 замужество [zamyzhestbo]’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후 고대 러시아어에서 ‘브라크’는 ‘결혼, 결혼식, 결혼식 피로연’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결혼’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다. 
  결혼을 의미하는 또 다른 러시아어로는 ‘제니티바’가 있는데, 이 단어의 보다 근원적인 의미는 ‘남자가 하는 결혼’을 지칭한다. ‘제니티바’는 ‘결혼시키다’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동사 ‘제니티 женить’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이 역시 ‘남자를 여자와 결혼시키다’ 혹은, ‘남자가 결혼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женить’는 ‘아내, 여성’을 의미하는 ‘제나 жена [zhena] (여성을 뜻하는 고대그리스어 ‘귀네 γυνή[gynē]에서 파생)’와 동사 어미 ‘-ть’를 합성시켜 만든 단어인데, ‘아내를 데리고 오다, 아내를 맞이하다’의 의미를 가진다. 
  ‘결혼, 결혼생활’을 의미하는 ‘수프루제스트보’는 ‘한 쌍의 남녀, 남편과 아내’를 의미하는 고대 러시아어 ‘스프루기 съпругъ[sufrugi] 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съпругъ’는 ‘성행위를 하다’를 의미하는 고대 러시아어 ‘스프랴제챠 съпряжеться [sufruzhecha]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수프루제스트보’는 ‘결혼’의 의미도 가지지지만, 주로 ‘결혼 생활’을 의미한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결혼식’이라는 말을 종종 ‘결혼’이라는 의미와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결혼식, 결혼 피로연’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는 ‘스바지바 свадьба [sbaziba]’와, ‘벤차니예 венчание [benchanie]’가 있다. ‘스바지바’는 결혼 중매쟁이를 의미하는 ‘스바트 сват [sbat]’에서 파생된 단어이며, ‘벤차니예’는 결혼식 때 쓰는 화관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베노크 венок [benok]’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벤차니예’는 일반적인 결혼식과 구별하여 ‘교회에서 기독교 예식으로 올리는 결혼’을 의미한다.

  고대 러시아에는 조혼의 풍습이 만연하였다. 13세기 키예프 루시에서는 여자가 13살, 남자가 15살이면 결혼을 하곤 했는데, 이것은 가계의 안정과 노동력 확보를 중시하였던 농경 사회의 전통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조혼의 풍습은 16세기 모스크바 공국 시대까지 이어졌는데, 사회적인 차원에서 금지 시키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정교의 영향이 강화된 16세기 이후부터이다. 16세기에 제정된 러시아 정교의 <100항목 결의집>에서는 조혼을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있으며, 6촌 형제간의 결혼과 다른 종교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의 결혼도 금지시켰다. 또한 결혼을 세 번 이상 허용하지 않았고, 두 번째 결혼한 사람도 2년 동안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100항목 결의집>에는 성직자 그레고리 보고슬라프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첫 번째 결혼은 합법, 두 번째 결혼은 용서, 세 번째는 위법, 네 번째는 돼지 같은 불결한 생활이 되므로 불신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결혼 적령기에 대한 언급은 제정 러시아 시대에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표트르 대제는 1714년 지령을 발표하여 귀족 남자는 20세 이전에, 여자는 17세 이전에 결혼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1775년에 예카테리나 2세는 모든 계층에서 남자는 15세, 여자는 13세 이전에 결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를 어길 시에는 엄격한 형벌을 부여했고 결혼을 집도한 사제의 사제직을 박탈시키기도 하였다. 이후에 점차 결혼 연령이 높아지다가 1830년 니콜라이 1세는 여자는 16세 이상, 남자는 18세 이상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규제와 상관없이 여전히 평민과 농노들은 노동력 확보 등의 이유로 보다 낮은 연령에서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이와 반대로 귀족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좀 늦게, 대게는 30세 전후로 결혼을 했고, 귀족 여성들은 20세 이전에 결혼을 했으며, 20세는 결혼 적령기를 넘긴 나이로 여겼다. 실제로 푸시킨은 32세가 되는 1831년 2월 18일 19세의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을 했으며, 결혼을 앞둔 2월 10일 크리브초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 이제 나도 서른이 넘었군요. 사람들은 보통 서른 살에 결혼을 하더군요. 나도 이제 다른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해봐야겠습니다.”

  결혼 의식은 주로 13-14세기에 형성되었는데 이 당시에 형성된 결혼 의식은 주로 기독교 수용 이전의 슬라브 민간 신앙의 토대 위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정교의 영향으로 교회 결혼 의식이 도입되면서 ‘즐거운 결혼’이라는 민중적 결혼 의식과 정교회의 영향으로 ‘성스러운 결혼’이라는 두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양상을 보여준다. 
  ‘벤차니예’라고 불리는 교회 결혼 예식의 기원은 5세기 아르메니아 정교회에서 최초로 시행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기독교 국가들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처음에는 신자들과 귀족들 중심으로 교회 결혼 예식이 이루어지다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확산되었다. 
  러시아에서의 ‘벤차니예’는 11세기 키예프의 이오안 2세가 이교도적인 결혼 풍습과 신부를 납치, 매매하는 풍습을 없애기 위해 귀족들에게 필수적으로 권장하면서 시작되었고 ‘벤차니예’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특히 이교도(가톨릭, 루터교, 유대교, 무슬만)들과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교회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표트르 대제가 1721년 이교도와의 결혼을 교회 결혼에서 허용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 정교에서는 이교도인이 세례를 받고 자녀를 정교의 신앙으로 양육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경우 교회 결혼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결혼 의식은 예식 자체를 교회에서 올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민간 풍습을 따르고 있다. 결혼식 과정과 결혼 의식은 러시아인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그 대략적인 과정은 다음은 같다. 

1. 중매 

  결혼은 일반적으로 신랑과 신부를 대신하여 집안의 친척들이나 부모들이 상대방의 집안과 혼담을 나누게 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스바트 сват [sbat]’ (혹은 여자인 경우 ‘스바하 сваха [sbaha]’)라고 불리는 중매쟁이가 나서서 결혼을 진행시킨다. ‘신부를 고르지 말고, 중매쟁이를 잘 선택하라’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스바트는 러시아 결혼 풍습에서 매우 중요하며 결혼 과정은 스바트로부터 시작된다. 주로 신랑의 부모가 먼저 스바트에게 의뢰하여 신부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 것으로 결혼 과정이 시작되는데 신부의 집을 방문한 스바트는 방문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비유적인 구절로 흥정을 시작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바트: 당신에게는 꽃이 있고, 우리에게는 정원이 있습니다.
당신의 꽃을 우리 정원에 옮겨 심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젊은 숫거위가 자신의 암거위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의 집에 암거위가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신부의 부모: 우리 집에는 암거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립니다.” 

  스바트의 흥정에 일반적으로 신부의 부모는 혼례가 마음에 들어도 첫 번째는 무조건 거절해야하며, 결혼의 수락 여부에 있어 실제 결혼 당사자인 신부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전적으로 부모의 의사에 달려 있다. 중매쟁이가 신부의 집을 방문하여 혼사를 진행할 때, 때로 신랑의 부모, 신랑이 동행하는 경우도 있는데 양가의 부모들은 결혼 지참금, 혼수, 결혼 피로연 규모 등을 놓고 흥정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종종 갈등이 발생하여 혼사가 깨어지기도 하며 중매쟁이가 중재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러한 사항들이 합의가 되면 축배를 들고 결혼에 동의한다. 

2. 신랑 집 방문

  중매를 통해서 결혼에 대한 1차적인 동의가 완료되면, 이번에는 반대로 신부의 부모가 신랑의 집을 방문한다. 방문의 목적은 신랑 집의 경제력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기 위함이다. 신부의 부모는 신랑 집의 경제 상태를 면밀히 체크한다. 이 과정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종종 혼사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3. 혼약 

  신부의 부모가 신랑 집을 방문한 후, 결혼에 동의를 하면 혼약식이 이루어진다. 이번에는 다시 신랑의 부모와 친척 등이 신부의 집을 방문하여 결혼비용, 결혼식 규모, 결혼 날짜 등을 협의 한 후 모든 것이 결정되면 박수를 치면서 결혼을 최종 승낙한다. (이 과정의 러시아어 원어는 ‘루코비티예 рукобитье’인데 원뜻은 ‘두 손을 때리다. 박수를 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가의 친척, 친구들이 모여 주연을 즐기며, 이때 신랑은 신부에게 반지와 같은 것을 선물한다. 
  결혼 날짜는 봄에는 부활절이 끝난 시기, 가을에는 농사일이 끝나는 10-11월경을 선택하기도 한다. 

4. 결혼 전야

  결혼 전 아침에 신부는 여자 친구들이나 부모들과 함께 강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결혼 전날 밤에는 여자 친구들과 함께 특별한 의식의 시간을 갖는다. 러시아의 처녀는 전통적으로 땋은 머리를 하고 지내는데 결혼을 앞둔 이 날 밤에는 신부의 친구들이 그녀의 땋은 머리를 풀고 머리를 빗어준다. 머리를 푼다는 것은 처녀의 삶을 마감한다는 의미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과 이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친구들이 머리를 풀어주는 동안 신부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울기도 한다. 

“금도 아깝지 않네 / 은도 아깝지 않네 / 아까운 것은 오직 하나 / 처녀적 아름다웠던 / 아마빛 땋은 머리뿐.”

5. 결혼식 당일

  결혼식 날이 되면 신부는 자신이 사용할 물건들과 침구를 가지고 집으로 찾아온 신랑의 들러리와 함께 신랑의 집으로 향한다. 신부는 결혼 예복을 차려입고 어젯밤에 풀어 헤쳐졌던 머리를 이번에는 유부녀를 상징하는 의미로 두 갈래로 땋아 올리고 머리에 화관을 쓴다. 신랑과 신부는 교회에 들러 혼례 예배를 올리고 예식이 끝나면 교회의 출구에서 하객들은 이들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곡식의 낱알을 뿌리는데 이 의식은 민중의 전통과 정교의식이 결합된 독특한 현상으로 사료된다. 이후 결혼 행렬은 신랑의 집으로 향한다. 신랑의 부모는 귀중한 손님을 맞이하는 의미로 ‘빵과 소금’ 쟁반을 신랑과 신부에게 내밀고 그들은 빵을 한 조각 물고 소금을 마당에 뿌린다. 

6. 결혼식 피로연
 
 신랑의 집에 모인 신혼부부와 양가 부모, 친척, 친구들은 신혼부부의 삶을 축하해주는 의식을 개최하는데 ‘스바지바’라고 불리는 피로연은 결혼식 과정의 마무리이자 가장 성대한 축연이다. 피로연이 진행되는 동안 신부는 절대로 흐느끼거나 눈물을 보이면 안 되고, 신혼부부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다. 친척들과 친지들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동안 혼례 주관자는 신혼부부를 신방으로 데려가고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음식을 먹인 후 잠자리에 들게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신혼부부 사이에서는 이른바 ‘신발 벗기기’ 의식이 행해진다. 신부는 남편에 대한 순종의 의미로 그의 발에서 신발을 벗긴다. 신발의 한쪽에 동전이 들어 있는데 동전이 들어있는 신발을 벗기면 신부에게 행복한 가정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로 여겨지고, 동전이 없는 신발을 벗기게 되면 신부가 평생 노예처럼 남편을 기쁘게 해야 된다는 징조로 여기기도 하였다.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남편은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장인에게서 받은 채찍으로 아내를 가볍게 때리기도 한다. 
결혼 피로연은 러시아 결혼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나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 이후 귀족들은 교회에서 결혼 미사가 끝나면 피로연을 가지지 않고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시골로 신혼여행을 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20세기 초까지 이어져온 이러한 결혼식 과정은 혁명 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교회 결혼 예식과 전통적 결혼 예식은 금지가 되었고, 거주민들의 출생, 결혼, 사망 등의 신고를 주관하는 기관인 ‘작스’에서 신혼부부가 결혼 신고 후 전몰 용사비에 추모 헌화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간소화 하였다. 오늘 날에는 작스에서 혼인 신고와 간단한 예식을 거행한 뒤 친구, 친지들과 결혼 피로연을 한 뒤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전통적인 결혼 방식과 교회 결혼 예식 역시 종종 거행되기도 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위에서 언급된 바, 기독교가 자체 내의 문화적 제도적 지배권을 주장하고 또 영유하고 있던 제도로서의 결혼 및 결혼식의 소유관계가 바뀌는 것은 역시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과 대혁명을 계기로 이루어진다. 18~19세기 내내 지속된 탈교권운동의 결과 이전에는 신의 이름으로 교회의 신부님이 두 남녀를 부부로 인정해 주었으나 혁명을 거치면서 19세기 후반, 특히 제 3 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그러한 부부 인정권을 신으로부터 ‘공화국’이 빼앗아 오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결혼식은 시청 혹은 면사무소에서, 그리고 파리의 경우 각 구청 청사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그리고 결혼 담당 부시장이 공화국의 이름으로 두 사람을 부부로 선언하는 그 자리에는 성모 마리아 대신 시민사회의 상징인 마리안느의 초상이 늘 놓여 있다. 이러한 시민결혼의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경제적 여유가 있고 또 희망하는 자들은 성당에 모여 전통적인 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
  그러나 결혼과 부부 제도의 이러한 시민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기 이전 프랑스의 결혼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체로 카톨릭 교회의 엄정한 권위 아래 놓여 있었다. 그래서 종교걔혁 이후 신구교의 갈등이 표면화 되던 16 세기 말, 하나의 궁정 결혼식이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과 모순을 잘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1845년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94년 파트리스 셰로가 감독한 영화 <여왕 마고>는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도 이채로운 결혼식을 묘사해 보여준다. 1572년의 어느 여름날, 프랑스 남쪽의 신교 제후국인 나바르 공국의 왕자 앙리가 수행 군사들과 비서진 3000명 가량을 이끌고 파리로 올라온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섭정하던 파리의 프랑스 왕국의 공주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서이다. 서로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 처음 만난 신랑신부는 왕궁으로 모셔진 추기경의 혼인 의사 질문에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마르그리트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뒤에 선 오빠들 중 하나가 머리를 밀어서 숙여진 것을 본 추기경은 대답한 것으로 간주하여 혼인을 승인한다. 며칠간의 대단한 잔치와 향연후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날, 왕실은 군사를 풀어 새벽이 오기 전까지 그 삼천 명을 모두 살해한다. 유일하게 도망가던 앙리를 마르고가 자신의 방 장롱에 숨겨 주지만 들이닥치는 오빠들을 피하진 못한다. 마르고의 애원으로 마지막 기회를 얻은 앙리는 그러나 선뜻 개종을 약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칼이 목에 들어오자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고통스럽게 선언한다. 
  그 후 몇 번의 개종을 더 거친 앙리는 후일 프랑스의 국왕 앙리4세로 즉위하여 낭트칙령을 선포한다. 그 칙령의 핵심을 범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 영토 내에서는 신교도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법이다’ 정도이다. 
  그리고 앙리는 그 후 어느 날 카톨릭 광신자에 의해 암살당하며 약 100 년 뒤, 그의 왕령은 루이 14세에 의해 취소된다.
  유럽인들에게, 특히 프랑스인들에게 종교적 이타성이란 어떤 것인지, 그 이질감 혹은 이물감이 얼마나 두렵고 역겨웠던 것인지를, 그래서 훗날의 프랑스에 왜 톨레랑스가 역설적으로 필요했던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 사건에 한 성대한 결혼식이 매개해 있었다.
  결혼 제도에 관한 앞서 기술된 현실 정치적 지형은 당대를 사는 모든 일상인들에게 본능적으로 학습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적 지형과는 별개로, 모든 문화 토포스들이 그러하듯, 결혼의 토포스 역시 실제 현실을 정확히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결여된 부분, 그 현실적 여건에 둘러싸여 실재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어떤 심정적 혹은 정신적 여망을 토포스는 늘 언급한다고 볼 때, 유럽 대륙의 역사에서 결혼 혹은 사랑의 짝 맺기의 토포스의 발현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앞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에 먼저 담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민담 혹은 전설에 대해 아주 색다른 분석과 평가를 내리고 거기에 윤리적 판결까지를 곁들인 저술가는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평론가 드니 드 루쥬몽이다. 그는 『사랑과 서양 』에서 이성간의 정념과 초월적인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로 구분지어 분석하는데, 에로스의 근원을 트리스탄 신화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정념의 뒷면에 무의식적으로 (혹은 근원적으로) 붙어있는 타나토스(죽음의 신)의 존재를 언급한다. 루쥬몽은 불사르는 사랑 즉 에로스의 위험한 성격을 자기 파멸적이며 나아가 전체주의적인 특성에 빗대어 경고하며 그에 대신할 아가페적 성실을 현대인에게 권유한다. 사랑의 본능을 부부간의 신의( 혹은 정절)라는 시민적 덕목으로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쥬몽이 굳이 그러한 권면과 독려를 하지 않아도 근대 이후의 서양인들은 그 교훈을 서서히 내재화하여 습득하고 생활의 덕목으로 실천해 왔음을 독일의 풍속사가 에두아르트 푹스가 역사적으로 잘 기술하여 제시한 바 있다. 
푹스의 진단에 따르면 결혼과 그로 인한 가족의 생성, 그리고 남녀의 관계의 결속의 정도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17~18세기에 시작된 산업화이다. 부르주아 계층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서 이를 상속하기 위해 장자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법제적으로 확립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는 거슬러, 부부 관계의 공인인증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중세의 기사의 영주부인을 향한 로맨스, 그리고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귀족부처의 부부싸움의 한 장면 ( 백작 : 우리 아이들 셋 중 정말 내 아이가 있기나 하오? -- 부인 : 무슨 소리예요! 그래도 셋째 아인 당신 것이예요! ) 이 방증하듯 근대적 부르주아 경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부부간의 성 모랄은 훨씬 더 느슨하고 여유 있는 것이었다. 이후로는 부부와 가족이 생활 속의 정의(情意)적, 문화적 단위이기를 넘어 경제적 단위로 들어서게 됨으로써, 그것의 균열은 곧바로 해당 개인들의 경제적 실존을 흔드는 사건이 되어 버리는 과정을 푹스는 잘 보여주었다. 
  서유럽에 곧 들어서게 될 그러한 시민적 질서의 도래에 앞서 지금까지의 (적어도 공식적 무대 뒤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남녀 관계의 마지막 향연을 구가한 시기로 볼 수 있는 18 세기를 푹스는 ‘색의 시대’라 명명하였으며 프랑스 문학사는 소위 ‘리베르티나쥬 문학’이라는 말로 그러한 경향을 인정하고 있다.
  결혼 혹은 결혼 생활과 관련하여 프랑스 문학이 남긴 역작이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일 것이다. 비소를 먹고 두어 시간동안 고통에 자지러지는 모습을 남편 샤를에게 보이고 나서 가는 엠마의 단말마 절규는 한편으로는, 당대에 대세로 들어서고 있던, 무미건조하고 숨 쉴 틈 없으며 범속하기 짝이 없는 부르주아적 결혼 생활의 풍속도를 향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혼은 격동하는 시기의 청년에게 일생일대의 기회로 제공되기도 한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은 자신의 속 깊은 사랑인 레날 부인을 곁에 두고 귀족 규수인 마틸드와의 결혼에 들떠 있으나 부인의 우연찮은 고백성사와 고해 신부의 발설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고 만다. 주인공들을 모두 비극으로 이끈 원흉이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될 수 있겠으나 어쨌든 거기에 결혼이라는 삶의 한 계기 혹은 제도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손쉽게 연애결혼/정략결혼으로 나누어 말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둘 사이의 경계는 흐려져서 어느 경우에나 결혼이 ‘사랑’과 오래도록 붙어 있는 경우는 실제로는 잘 없다는 사실을 20 세기 초 공산주의 초현실주의 시인 루이 아라공이 그의 시 『행복한 사랑이란 없다』로 선언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넘어오면 결혼의 토포스가 조금 더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990년 피터 위어 감독이 프랑스의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 등을 동원하여 만든 호주-프랑스 합작 영화 <그린 카드>에서는 일종의 체류증인 그린카드를 얻기 위해 실제 부부 생활은 없는 위장 결혼을 둘러싼 해프닝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프랑스어 사전은 ‘흰, 백색의’를 의미하는 어휘 ‘블랑 blanc’ 항목에서 그 파생된 의미 -- “실효성이 없는, 알맹이가 빠진” -- 를 설명하는 데에 새로운 예문을 첨가할 수 있었다. 즉 ‘마리아쥬 블랑 mariage blanc’이 그것이다. ‘가짜 결혼’ 혹은 ‘속 빈 결혼’인 마리아쥬 블랑은 위의 영화에서처럼 불법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의 체류 자격 획득을 위한 사기 행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그의 아내의 경우에서 보듯, 말의 원래의 의미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의미, 즉 “무늬만 결혼 생활”을 지시하게 될 때도 있었다. 평생 처녀로 살아간 지드의 아내를 둘러싼 후일담은 프랑스 문학사에서 분명 색다른 문화적 울림을 낳았을 것이다. 
  개인이 누리는 다양한 차원의 권리의 사회적 확립에 유달리 힘써온 프랑스 사회의 특성이 결혼의 토포스에 녹아드는 현상도 발견되는데, ‘팍스 PACS’ 제도가 그것이다. ‘기혼’ 아니면 ‘비혼’ 상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기존의 문화적 장치에 불만을 느끼기라도 한 듯, 프랑스는 21 세기로 접어 들면서, 커플들이 선택학 수 있는 관계유형의 선택 항을 하나 더 늘이기에 이른다. 기존에도 실제로는 독신/ 자유 동거/ 정식 결혼 등 세 생활 유형 중 동거와 결혼 사이에, 말하자면 ‘약식 결혼’ 쯤에 해당하는 ‘민간 계약 pacte civile’ 제도가 법적으로 추인받기에 이른다. 전통적 결혼이 부과하는 굴레를 피하고 싶고 동시에 정식 부부가 누리는 모든 사회경제적 혜택들, 즉 각종 지원금 및 세제상의 혜택은 받고 싶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팍스로 결합하지만 이 새롭게 제정된 제도의 숨은 타깃은 다름 아닌 동성애 부부들이다. 2000 년대 초만 해도 정식 결혼 등록이 용이치 않아 가족 수당 등 일절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던 그들에게 이 제도는 재정적으로 숨통을 틔워준 셈이었다. 그러나 2013 년 동성 부부의 결혼이 프랑스에서 합법적으로 가능하게 되면서 팍스는 상당수의 ‘팍세pacsé (팍스 결합자)’들을 잃게 될 것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수 세기에 걸쳐 이어 내려져온 러시아의 결혼 문화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내면서 독특한 토포스를 형성한다. 18세기부터 본격화된 서구 유럽 문물의 수용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는 각 분야에 걸쳐 전반적인 변화와 충돌이 만연하였고, 결혼은 모든 계층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한 부분이었기에 그 변화와 충돌이 가장 직접적이며 광범위하게 드러난 현상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특히, 1812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의 조국전쟁 이후 급속도로 밀려들어온 유럽의 사상과 문물들로 인해 19세기 초 러시아 결혼문화는 구세대와 신세대, 슬라브 문화와 유럽 문화, 이교도 문화와 기독교 문화, 기독교 문화와 무신론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토포스를 잉태시켰다. 19세기 전반에 걸쳐 복잡하게 진행된 결혼 관습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1877)의 한 장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요즘은 옛날처럼 결혼하지 않는다고 젊은 처녀들이나 나이를 먹은 사람들 까지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 자식의 운명을 부모가 결정해야 한다는 프랑스식 습관은 배척받고 비난당하고 있다. 또 딸의 완전한 자유대로 해야 한다는 영국식 방법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는 러시아 사회에서 불가능했던 것이다. 러시아식 중매에 의한 결혼 관습은 어딘지 모르게 촌스럽게 생각되었고, 공작부인 역시 남들과 마찬가지로 그 제도를 비웃었다. 그러나 어떻게 결혼해야 하고, 또 결혼시켜야 할 것인가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다.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각해봐요. 이제 그런 구시대적 관습은 버려야 해요. 결혼하는 건 아이들이지 부모가 아니잖아요. 그러나 자기네들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그들에게 맡겨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7)

  또한 작품에서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 아르카지는 동생의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데, 이는 당대 결혼 문화의 특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제 내가 말을 해야겠구나. 넌 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시집갔지. 넌 사랑도 없이, 아니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시집을 간 거야.”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7)

  19세기에 들어 이전과 비교되는 결혼 문화의 가장 큰 변화는 결혼의 주체가 부모에게서 결혼 당사자인 젊은 남녀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18세기까지 러시아 귀족사회는 전통적 결혼 예식이 지배적이었다. 즉, 구혼자는 먼저 부모의 승낙을 얻은 다음에야 신붓감인 여성에게 고백할 수 있었으며 부모의 동의 없는 연애와 결혼은 귀족적 품성과 예의에 매우 어긋난 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로 접어들면서 러시아 귀족 사회의 젊은이들은 서구 유럽의 계몽사상과 낭만주의 등의 영향으로 부모가 결혼을 결정하는 관습에 대항하여 자신의 의지로 연애와 결혼을 주관하게 되었고, 이것은 슬라브적 전통에 기반을 둔 구세대와 유럽 문화에 심취한 신세대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젊은이들의 행동은 종종 신부를 납치하는 극단적인 형태로도 이어졌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당시 문학 작품에서 종종 그 실례를 찾아 볼 수 있다. 푸시킨의 『눈보라』(1830)에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반도주하여 비밀결혼을 올리려 계획한 마리야 가브릴로브나와 블라지미르 니콜라예비치가 그러한 전형적인 예이며, 고골의 『무서운 복수』(1836)에서도 젊은 시절 아파나시 이바노비치는 친척들이 자신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던 폴헤리야 이바노브나를 감쪽같이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로트만의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고대 루시에서 사실상 실재하고 있었지만 범죄처럼 여겨졌던 바로 그것이 18-19세기로 옮겨가는 전환기에 낭만주의적 의식 속에서 옛 조상들의 풍습에 대한 ‘유럽적’ 대안으로 갑작스레 인식되었다. 19세기 초에는 이런 행동이 ‘낭만적’ 행위규범에 들어가면서 일상생활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1994)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결혼 문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귀족사회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무도회에 대한 고찰이 매우 중요하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프랑스 문화의 가장 강력한 영향중의 하나로 번성한 러시아 귀족 사회의 무도회는 사교계의 교류 모임의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무도회는 만남과 교우 관계, 소문의 발생과 확산, 상류 사회로의 출세의 통로라는 매우 흥미로운 토포스를 발현하면서 귀족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가 보내기의 한 방법이자 귀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상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무도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는 남녀가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며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부모 세대의 입장에서는 혼담이 오가는 중요한 공간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푸시킨은 1829년 댄스교사 이오겔의 집에서 열린 가장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만이 참석하는 무도회에서 16세였던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바로 청혼을 하였다. 결혼을 위한 중매시장 같은 무도회의 분위기에 대한 바젬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은 흥미롭다.

“무도회는 마치 이름 모를 시골 도시에서부터 모스크바의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동반하고 참석하는 전 러시아의 모임 같아 보인다. <...>
무도회는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모임 같아 보인다.”

  귀족들의 결혼 시기 역시 농사력에 영향을 받는 일반 민중들의 결혼 시기와 유사하게 봄의 부활절 축제 이후와 늦여름에서 가을 대정진기 시기(11월 15일-12월 24일 - 순교자 구리야 아비바의 날에서 성탄절까지)에 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스크바의 귀족들은 물론, 지방의 귀족들까지 이 시기에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의 무도회에 거의 매일 머물면서 신붓감 찾기에 몰두한다. 
  무도회에서 벌어지는 혼담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1824)의 무도회 장면이나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1831)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특히,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무도회를 ‘신부 시장’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시 무도회를 통한 결혼 세태를 지적하고 있다.

“마님, 염려하실 것 없어요. 모스크바의 신부 시장에 데리고 가면 되요. 거기에는 오라는 데가 많아요.”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신부 시장’인 무도회에 참석하는 여성들은 무도회에서 그 상품성을 인정받기 위해 어릴 적부터 부모들에 의해 철저하게 훈련 받는 풍토가 만연했으며, 이것은 당시 러시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로 작용한다.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에서 파무소프는 딸을 고위 관료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어릴 적부터 철저히 양육시키는 당대 귀족 부모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지! 춤! 노래! 말투! 행동!
마치 그놈들의 아내가 되기 위한 광대로 준비시켰지!”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이러한 과도한 여성들의 신부 수업에 대해 벨린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의 처녀들은 이 단어의 유럽적 인식에서 본다면 여자도, 인간도 아니다. 그녀는 신붓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떤 남성의 신붓감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다. <…….> 어린 나이부터 그녀들의 모든 염원, 생각, 지향, 기도는 오로지 하나에 집중된다. 결혼 할 수 있게 해 달라, 좋은 곳에 시집가게 해달라는. 그녀들의 유일한 욕망이자 목적, 존재 의미인 좋은 신붓감이 되게 해달라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그녀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남성들에게 그녀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붓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결혼 문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결혼 의식 자체에 대한 변화에 있다. 민중들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이전까지 귀족들의 결혼 의식은 민중 문화의 토대 위에서 교회 의식을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럽 문물의 영향으로 귀족 사회의 결혼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변화를 보이는데, 우선은 결혼 의식 자체를 간소화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중매쟁이를 통한 혼담의 진행과정과 그 이후의 과정을 혼인 당사자들과 부모들 간의 합의로 마무리 짓는 간소화된 유럽적 결혼 방식을 선호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따른 무신론의 영향으로 교회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교회 결혼 예식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 러시아 귀족들의 결혼 문화는 민중적 의식, 교회 결혼 의식, 유럽적 의식이 합성된 독특한 토포스를 보여준다. 
  전통적 결혼 의식과 유럽적 결혼 의식의 충돌과 혼합의 특성이 자주 발현된 19세기 초반의 러시아 결혼 문화는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또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른바 ‘귀족의 시대’가 저물고 ‘상인과 잡계급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 시기 결혼은 출세, 돈, 신분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대 러시아 귀족 관료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많은 논란이 되었던 고골의 『감사관』(1836)에서 지방 도시의 시장은 자신의 딸을 가짜 감사관에게 속아 시집을 보내려고 계획하고, 이것을 자신의 절호의 출세의 기회로 삼는다. 

“시장 : 여보, 나도 훌륭한 인간이야. 한번 생각해봐. 지금 우리는 큰 날개를 얻는 거나 마찬가지야. 안나 안드레예브나, 그렇지 않아? 하늘 높이 훨훨 날아보는 거야. <…….> 여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이젠 큰 벼슬자리 하나는 따 놓은 거잖아? 그 사람은 모든 대신들과 친하니까, 연줄로 그렇게 승진하다 보면 장군도 될 거야.” (고골, 『감사관』, 1836)

  결혼을 출세와 물질의 보상 수단으로 삼으려는 문화는 동서고금 어느 곳에서나 존재해왔지만,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에서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물질주의 팽배로 인해 더욱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특히, 신부 쪽에서 결혼을 하면서 신랑 쪽에 건네는 결혼 지참금을 둘러싼 갈등과 파국은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 『지참금 없는 처녀』(1878)와 체호프의 『결혼피로연』(1888)에 잘 드러나 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따른 결혼의 문제는 19세기 중반의 화가 페도토프의 『소령의 중매』(1848)와 바실리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1862)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은 60대의 노인이 나이 어린 처녀와 결혼을 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서 물질이 최우선 가치로 여겨진 당대 결혼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19세기까지 이어져온 러시아의 이러한 전통적 결혼 풍습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구시대 전통, 특히 기독교적 전통과의 단절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혁명 정부는 대중들의 일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새로운 형태의 결혼 문화를 정착시키려 노력하였다. 혁명 정부는 1917년 12월 18일 <결혼, 육아, 주민등록 도입에 관하여>라는 법령을 발표하여 이전까지 교회에서 이루어지던 결혼식을 페지하고, 시민들의 결혼에 관한 모든 절차와 등록을 ‘작스 (출생, 사망, 결혼 등록소)’라는 일종의 관공서에서 시행토록 하였다. 따라서 소비에트 시절의 결혼 문화는 슬라브 전통과 기독교 예법에 따라 떠들썩한 주연과 엄숙한 예식이 주를 이룬 19세기 결혼 문화를 탈피하여 매우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소비에트 삶의 풍자 백과사전이라는 일프와 페트로프의 장편 소설 『열두개의 의자』 (1928)에서는 작스에서 거행되는 결혼식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처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마치 마술사처럼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신혼부부의 이름을 두꺼운 호적부에 기입한 다음, 처녀가 부리나케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서 데리고 온 그들의 결혼 증인들에게 엄격하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런 다음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사각형의 도장에 여러 번 부드럽게 입김을 불어넣고, 몸을 일으킨 다음 너덜너덜 해진 두 사람의 여권에다 증명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신혼부부로부터 2루블을 받고나서 증명서를 건네면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결혼 신고에 대한 비용이요.”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야단스럽게 소리쳤다. (.......) 
“옛날식으로 말한다면,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두 손을 맞잡고 영원한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당신들과 같은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어 매우,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매우,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장황한 말을 한껏 늘어놓은 이폴리트 마트베예비치는 신혼부부와 악수를 한 다음, 매우 만족스런 마음으로 자리에 다시 앉아 2번 서류철을 훑어보았다.” (일프와 페트로프, 『열두 개의 의자』, 1928) 

  혁명 초기에는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결혼 예식을 치루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의 결혼 의식은 간소하게 작스에서 진행하게 되었고, 이러한 형식은 오늘날 러시아 사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결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마리아쥬’는 ‘처녀를 짝지워주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마리예’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며, 동사 ‘마리예’는 남편을 의미하는 명사 ‘마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결혼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브라크’는 ‘잡다, 데리고 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이는 여인을 납치, 매매하여 결혼했던 고대 슬라브족의 풍속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결혼을 의미하는 또 다른 러시아어인 ‘제니티바’ 역시 ‘아내를 데리고 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원으로 미루어 볼 수 있는 양국의 결혼 문화의 차이는 서구에 비해 뒤늦게 시작된 러시아에서 가부장적인 성격이 다소 강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프랑스에서 결혼 제도는 카톨릭의 영향 하에 종교적 위엄 하에 놓여 있었다. 부부의 연을 맺고자 하는 젊은 남녀는 가족들의 동의를 구한 후 가장 먼저 교회의 사제에게 찾아가 결혼 허락을 청하였다. 그러면 사제는 두 사람이 부부의 단위로서 자신의 종교 공동체에 편입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두 사람의 결혼을 신의 이름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한 커플의 사회 공동체 편입의 관문을 관장하는 주체가 바뀌게 되었다. 시민사회가 성립하고 난 후로는 한 쌍의 남녀는 자신들의 부부 관계를 공인받기 위해 교회가 아니라 시청으로 찾아가야만 했는데, 시청의 결혼 담당 부시장은 찾아온 두 사람이 동성만 아니라면 대부분의 경우, 신의 이름이 아닌 ‘공화국’의 이름으로 그들을 각각 남편과 아내로 선포하여 주었다.
  프랑스 시민 사회는 이후 범위를 넓혀서 동성의 커플마저도 그 울타리 안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 왔는데, 2000 년 들어 ‘팍스 PACS’라는 일종의 간이 혼인제도를 마련하였다. 그것의 핵심은 두 사람이 굳이 이성이 아니더라도 시청의 부시장 앞에 모습을 드러낼 필요 없이 간단한 서류에 서명을 하여 시청에 혹은 파리의 경우 구청에 송부만 함으로써 공동체를 구성하는 당당한 커플로 공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달리 19세기까지 러시아 사회의 결혼은 크게 두 가지 요소, 즉 슬라브 전통에 의한 혼례방식과 러시아 정교의 교회 의식이 혼합된 형태로 그 외양을 유지해왔다. 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의 결혼 문화는 남녀간의 사랑이 우선되는 낭만적인 요소보다는 집안과 집안, 가문과 가문과의 결합이라는 토포스의 지배를 매우 강하게 받고 있었다. 
  결혼을 출세와 물질의 보상 수단으로 삼으려는 문화는 동서고금 어느 곳에서나 존재해왔지만,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에서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물질주의 팽배로 인해 더욱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20세기 초까지 이어져온 이러한 결혼식 과정과 그 형태는 혁명 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교회 결혼 예식과 전통적 결혼 예식은 금지가 되었고, 거주민들의 출생, 결혼, 사망 등의 신고를 주관하는 기관인 ‘작스’에서 신혼부부가 결혼 신고 후 전몰 용사비에 추모 헌화 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간소화 하였다. 
연관 토포스 가족; 계몽; 돈; 무도회; 사랑; 여성; 인생; 축제; 탄생;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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