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계몽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계몽
토포스명(프랑스) lumières
토포스명(러시아) просвещение
Definition 1. 인간 이성의 빛이 보다 밝게 빛날수록 인류는 더 진보할 수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 ‘뤼미에르 lumière[lymjεːʀ]’는 ‘빛, 불꽃, 밝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lūmen, -ĭnis’에서 파생된 ‘lūmĭnarĭa’가 그 어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맨 처음 인간에게 문명을 가르친 거인족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에게서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것은 신의 지혜의 상징인 불이었다. 기독교에서도 진리의 근원이라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속성은 빛에 비유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사람은 결코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성서』, <요한복음> 8)라는 예수의 말씀이 대표적이다. 서구문명의 두 뿌리인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에서 빛은 이처럼 진리, 지식, 나아가 문명을 상징한다. 
  특히 ‘뤼미에르’의 복수형 ‘lumières’는 일반적으로 ‘지식’을 의미하며, 프랑스어로 계몽주의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한 ‘Lumières’이다. 서구에서 계몽주의는 17세기 말 서유럽에서 나타나 이후 전 유럽과 아메리카로 확산되고 특히 18세기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던 철학, 문화, 문학 전반에 걸친 지적운동을 가리킨다. 따라서 프랑스의 18세기는 계몽의 세기 또는 빛의 세기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빛은 이성의 빛이다. ‘뤼미에르’가 계몽주의 철학을 가리키는 용어로 처음 사용된 것은 1733년 역사학자 장-바티스트 뒤보스(1670~1742)에 의해서이며, 1750년경에는 이미 널리 사용되었던 듯하다. 이 용어가 한 세기를 풍미한 지적 운동의 의미에서 사상사의 한 조류로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가 출간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독일어 ‘Aufklärung’과 영어 ‘enlightenment’가 프랑스어 ‘lumières’와 함께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18세기 중반 이후이다. 
  계몽주의의 더 정확한 시대 구분은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9년까지이며,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을 계몽주의 철학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 그 출발점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출간된 1763년에 두기도 하고, 정치와 과학에서 앞서있던 영국의 명예혁명(1688)과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1690)이 출간된 시점에 두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들은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의 뿌리가 프랑스 특유의 합리적 사유를 확립한 데카르트와, 영국의 자유민주주의 사상, 그리고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이 가져온 세계관의 변화에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문학사가 귀스타브 랑송이 정의했듯이 18세기가 “반기독교적이고 국제주의적이며 모든 신앙에 대해 파괴적이고 전통을 부정하고 권위에 반항하며 격렬하게 비판적인”(귀스타브 랑송, 『프랑스 문학사』, 1894) 세기였다면,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연 1789년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18세기 계몽운동의 귀결점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는 당시 유럽 계몽주의의 중심지였다. 프랑스어는 볼테르와 루소,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의 언어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서장을 연 라이프니츠와 프러시아 왕립아카데미의 언어이기도 했고, 이탈리아에서부터 러시아에 걸친 유럽전체 교양 계층의 언어였다. 또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와 디드로의 교류, 계몽전제군주인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와 볼테르의 교류, 또한 괴테와 칸트, 톨스토이에 미친 루소의 영향은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과 18세기 프랑스 문화가 전 유럽에 미친 영향을 짐작하게 해준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 ‘프로스베셰니예 просвещение[prosveshchenie]’는 ‘빛’을 뜻하는 원시슬라브어 *světъ을 어원으로 한다. ‘프로스베셰니예’는 18세기 이전에도 나타났지만 중세 러시아에서는 종교적 의미에서의 ‘교화, 정화’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현대적 의미의 ‘계몽, 교육’의 의미로 굳어지게 된다. 작가 고골은 이것이 유럽어에서 차용된 단어가 아니라 러시아 정교 신앙의 유산이라 주장한다. 고골의 언급을 통해 ‘프로스베셰니예’가 ‘교화, 정화’라는 애초의 의미로부터 ‘계몽’으로 의미 발전하게 된 연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요즘 아무 생각 없이 ‘계몽’이란 말을 반복한다. 이 단어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이 단어는 그 어떤 언어에도 없는 것으로 오로지 우리에게만 존재한다. ‘계몽하다’는 가르치거나 이끌어주거나 혹은 교육하거나 밝혀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단순히 지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그 모든 역량에 대해 속속들이 밝혀주고 인간의 온전한 본성이 일종의 정화의 불을 통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의 교회로부터 온 것이다. 교회는 주변의 암흑과 무지몽매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이미 천여 년 동안 사용해 왔으며 왜 이것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고골,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선』, 1847)

  철학, 문화, 문학 전반에 걸친 지적운동으로서 계몽주의는 인간의 문제를 종교적 측면에서 바라보던 중세적 세계관에서 점차 탈피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풀고자 하는 지향이었다.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지식의 보급과 전수에 의해 인간 이성이 완성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계몽주의는 다분히 긍정적인 세계 인식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17세기 말 서유럽 곳곳에서 계몽주의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그 폭발적인 발전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의 공로 아래 이루어졌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루소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수많은 계몽철학자들의 사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사상적 흐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계몽사상의 형성 및 발전 과정에 있어서도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의 역할은 주도적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서구 사상의 유입이 활발해졌지만 러시아에서 계몽사상이 형성되고 본격적으로 발전의 기반을 다지게 되는 때는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1762-1796)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계몽군주이길 자처했던 여제는 볼테르, 디드로, 그림 등 프랑스 ‘백과전서파’ 회원들과 활발히 접촉하였으며 백과전서파의 저서가 자국에서 출판금지를 당하였을 때는 러시아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까지 하였다. 프랑스 계몽철학을 러시아제국의 국내외 정책 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계몽철학을 통해 러시아 전제정권의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하고 전제정권은 결코 독재정권이 아님을 보이려고 애썼다. 이 시기에 프랑스 계몽철학서들이 대거 번역되었으며, 또한 18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가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의 이중 언어 사회였음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의 번역되지 않은 저서들도 러시아 계몽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프랑스 계몽주의의 상징은 무엇보다 『백과전서』(1751~1772)일 것이다. 본문 17권, 도판 11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백과전서』는 오늘날 축적된 지식과 기술, 정보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미흡할 뿐만 아니라 그다지 체계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과전서』가 특별히 계몽운동 또는 계몽주의 철학의 대표적 상징이 되는 이유를,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사회학자인 뤼시엥 골드만은, “『백과전서』는 지식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데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알파벳 순서로 나열된 항목들의 총합이 지식이라는 계몽주의의 기본이념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뤼시엥 골드만, 『정신 구조와 문화 창조』, 1970)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백과전서』를 기획, 감수한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서문에서 『백과전서』를 “인간지식의 질서나 연쇄에 대한 체계적 설명”이라고 기술하며 그들의 작업이 단순한 정보의 모음이 아니라, “원주민이나 여행자만 알고 있는 세분화된 여러 지도들”을 항목으로 갖는 일종의 “세계지도”(마들렌 피노, 『백과전서』에서 재인용)로 소개하고 있다. 
  『백과전서』 서두의 ‘지식의 체계적 도표’는 그들의 시도가 어떤 점에서 혁신적인지를 보여준다. ‘지식의 체계적 도표’는 인간의 이해(entendement)를 기억력(역사), 이성(철학), 상상력(시)이란 큰 줄기로 나누고 각 줄기에 제반 학문들을 잔가지로 연결시켜 인간지식의 전체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이 도표에 의하면 “이성에서 도출된 과학 즉 철학”이 나무의 가지가 아니라 중요한 줄기를 이루며, 기존의 학문체계에서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던 종교와 관련된 대부분이 철학 줄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잔가지로 연결되어 있지도 않아 지식의 체계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계시신학 즉 기독교도 거기에 포함되어 미신, 주술, 선령과 악령에 관한 학문과 같은 의심스러운 주제들 옆에 나란히 놓여있다. 이로써 『백과전서』는 사실상 종교와 관련된 이른바 신성한 것들을 학문의 세계에서 배제시켜버렸다. 이러한 의도는 항목의 기술에도 반영되어 가령 ‘식인풍습’이라는 항목에는 ‘성체성사, 성찬, 제단을 참조하시오’라는 주가 달려있다.(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참조) 

  이처럼 종교를 철학 즉 이성에 종속시키는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종교를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하는 『백과전서』는 당연히 교회와 당국의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수차례에 걸친 발매중지 명령과 디드로 및 저자들의 수감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그렇지만 『백과전서』는 유럽을 넘어 멀리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전질을 구입하고 디드로를 초청할 정도로 당대의 큰 관심사였다. 반기독교, 반교권은 이념의 측면에서나 현실적 투쟁의 측면에서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의 가장 주된 특징이다. 
  철학 즉 이성의 중요성은 볼테르가 기고한 『백과전서』의 ‘문인’과 ‘철학자’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된다. “예술과 과학의 완성을 통해 역사는 전진하였고, 예술과 과학은 문인들의 노력을 통하여 개선되었으며, 문인들은 철학자로 기능함으로써 그 모든 과정에 동인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문인들의 특성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 정신으로 보인다.” 철학의 이러한 위상에 따라 18세기 문인들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명명했다. 1750년대에 간행된 온갖 팸플릿과 희곡, 정기 간행물, 논문 등에서 ‘철학자’라는 어휘는, ‘백과전서파’와 더불어, ‘구체제의 전통과 기독교에 대항하는 집단으로서 문명의 세속적 사도’로 인정을 받거나 반대자들로부터 욕설을 들으며 학자, 현학자, 지성인 등의 어휘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재인용 및 참조)
  ‘지식의 체계’에서 볼 수 있듯이 계몽철학자들의 무기는 이성이었다. 그 무기를 마련해준 것은 많은 프랑스 계몽철학자들이 열광한 영국의 로크와 뉴턴이었다.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은 “과학을 초월적이거나 초경험적인 원인과 관계없이 오직 경험에 대해 그리고 경험을 통해, 인간정신의 명석함이 행사되는 인간지성의 소산”(이동렬,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이성만으로 세계의 기계적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뉴턴의 혁신적인 이론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영국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영국견문기 『철학서한』(1734)과 『뉴턴철학의 기본원리』(1738)를 저술한 볼테르이다. 랑송이 “구체제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이라고 말한 『철학서한』은 당국에 의해 “종교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방종을 부추기는 위험한 책”(귀스타브 랑송, 『프랑스 문학사』, 1894)으로 분류되어 분서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위험한 책이 5판까지 인쇄될 만큼 팔려나갔다는 사실은 이미 변화를 추구하는 시대정신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계몽주의 철학을 낳은 책이라고 평가될 만큼 영향력이 컸던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로크의 『인간오성론』(1690)은 1700년 프랑스어로 번역된 이후 전 유럽에 보급되었다. “마음이란 백지 또는 암실이고 모든 지식은 감각과 반성을 통해 외부에서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존 로크, 『인간오성론』, 1690)이라는 로크의 말은, 모든 진리는 신에게서 비롯되며 인간의 능력만으로 그것을 파악알 수 없다는 기존의 모든 형이상학적, 신학적 교리들을 인간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버렸다. 볼테르는 로크를 “상상하는 대신 관찰하고, 체계를 구축하는 대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며,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 또는 알 수 없는 것과 자신이 아는 것을 구분하려고 애쓰는 최초의 진정한 철학자”(볼테르, 『철학편지』, 1734))라고 격찬했다. 
  정치권력이 왕이나 정부에 있지 않고 정부에 권력을 위임한 시민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사회계약, 인간의 자연권, 자유, 평등의 개념을 언급한 로크의 『통치이론』(1690)은 프랑스의 계몽철학자들에게 절대군주제와 가톨릭 교권의 지배하에 있는 프랑스 사회의 낡은 제도와 특권층의 모순을 성찰하게 만들었다. 계몽철학자들은 정부의 의무가 무엇보다 국민의 행복에 기여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된다. 
  특히 로크 사상에서 더 나아가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1755)과 『사회계약론』(1762)에서 불평등의 기원이 사유재산에 있으며, 거기서 비롯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의한 사회계약에 입각하여 국민의 일반의지를 구현한 정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영국이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를 채택하면서 로크의 통치이론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비록 루소 자신은 혁명을 주장한 적이 없지만, 그의 평등이론이 주권재민의 원칙과 함께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신을 거부한 계몽주의는 자연스레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즉 인간의 현세적 행복에 관심을 가졌다.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면 신이 있어도 좋다는 태도를 보인 이신론자 볼테르는 인간 조건의 비참함을 강조하는 파스칼의 기독교적인 비관적 인간관을 반박하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인간의 지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신념을 토로했다.

“파리나 런던을 바라볼 때, 나로서는 파스칼 씨가 얘기하는 바의 그런 절망에 빠질 이유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황량한 섬과는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 차고 풍요로우며 개화된 도시, 사람들이 인간적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 행복하게 살고 있는 도시를 볼 뿐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신을 마주보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의 이성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의 목을 매달 태세를 갖추는 현명한 자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네 발과 두 날개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그 정도로 절망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의 존재에 혐오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삶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믿게 하려는 것만큼 그렇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를 감옥처럼, 모든 사람을 곧 처형할 죄인처럼 보는 것은 광신자의 생각입니다.” (볼테르, 『철학서한』, 1734)

  또한 무신론자 디드로는 “단 하나의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행복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고 억제할 수 없으며 양도 불가능한 나의 경향은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진정한 의무들의 원천, 유일한 원천이고 일체의 훌륭한 법제의 유일한 기초다”(『예카테리나 2세와의 대담』, 1774)라고 말하며 인간의 유일한 목표는 행복임을 주장했다. 
  반교권 투쟁의 선봉에 섰던 볼테르의 활약이 정점에 이른 것은 『관용론』(1763)의 집필에서이다. 1762년 툴루즈에서 발생한 칼라스 사건은 신교도인 칼라스의 아들이 목을 매달아 자살하자, 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이 그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씌워 아버지 칼라스를 처형하고 가족을 추방한 사건이다. 볼테르가 이 사건을 접하고 종교적 불관용과 적대감에 대해 느낀 분노는 『관용론』에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 이 사건은 유럽 지성계의 대표적 정신으로 추앙받던 볼테르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유럽을 떠돌다 1760년부터 마지막 은신처 스위스의 페르네에 정착해있던 볼테르가 마침내 1778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루이 16세가 질투를 느낄 만큼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18세기를 ‘볼테르의 세기’라고도 부른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라는 프랑스의 별칭에는 계몽주의의 전사 볼테르에 대한 기억이 깃들어있다. 드골의 지지자들이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며 드골 대통령에 맞섰던 사르트르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을 때, 드골 대통령이 사르트르를 볼테르에 빗대어 “볼테르를 감옥에 가둘 수는 없다.”고 응수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볼테르는 불의와 억압에 결연히 맞선 계몽운동의 위대한 투사로 남아있다. 
  반교권운동에서 이론적으로 더 과격했던 사람들은 유물론에 기반을 둔 무신론자들이었다. “뇌가 없으면 정신도 없다.”, “세계정신으로서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모든 의식 현상을 물질적 작용의 결과로 제시한 라메트리의 『인간기계론』(1747), 감각적 쾌락의 추구를 정신활동의 근원으로, 이기심과 이해(利害)를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기로 보고 종교에 기반 한 모든 도덕적 근거를 부인한 엘베시우스의 『정신론』(1758), ‘유물론의 성서’라 불리며 왼손으로 왕좌를 전복하고 오른손으로 제단을 파괴하는 책으로 낙인찍혀 분서 령을 받은 돌바크의 『자연의 체계』(1770) 등이 대표적인 유물론 저서들이다. 이들은 성적 자유를 인간의 자연적 자유의 완성으로 보고 그것을 단죄한 기독교의 덕목, 순결과 정숙을 비판했다. 
  18세기 전반기에 계몽철학자들의 반 교권투쟁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1670년경 신앙을 갖지 않은 자의 수는 셀 수 있을 정도였고 또 그들 대부분도 늙어 회개하였다면, 1740년경에는 대화 도중 수도승이나 신부, 나아가 교리를 비웃지 않는 사람의 수를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다니엘 모르네, 『프랑스 혁명의 지적기원』에서 재인용)는 당시 통계가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인가되지 않은 책을 쓰거나 인쇄하거나 팔거나 지니기만 해도 사형 아니면 갤리선을 젓는 형벌을 받았고, 배교행위는 손목절단이라는 잔혹한 징벌에 처하는 등 당국의 검열과 처벌이 강화된 것도 사실이다. 1739년에는 프랑스 왕국의 443개 도시에 있는 인쇄소들이 모두 폐쇄된 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처벌은 철저하지 않았고 감시도 느슨했으며 심지어 때로는 경찰이 공모자가 될 정도로 이미 시대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백과전서』를 옹호한 서적검열관 말제르브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당시 한 경찰의 기록에는 “자기 집에 반종교적인 글의 필사본 하나 없는 고등법원관리는 한 사람도 없었다.”(다니엘 모르네, 『프랑스 혁명의 지적기원』 인용 및 참조)라고 적혀 있다. 
  유물론자들의 주장은 반계몽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패륜아 주인공을 등장시켜 계몽철학, 특히 유물론의 이론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다가 자가당착에 빠지고 결국 회개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계몽주의 철학의 비도덕성과 철학체계의 모순을 고발하는 성직자 소설가들의 작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반계몽주의적 편집방침을 고수하여 계몽주의에 적대적인 문인들의 저술활동을 독려하고 소개한 정기간행물 『문학의 해』(1754~1790)의 적극적인 대항도 이루어졌다. 1770년 출간되자마자 10개의 판본이 나올 만큼 성공을 거둔 돌바크의 『자연의 체계』에 대해 편집장 프레롱이 보이는 투쟁의 결의는 당시 계몽주의 철학을 둘러싼 논의가 어느 정도로 격렬했는가를 보여준다. 

“철학의 광란이 오늘날보다 더 지나쳤던 적은 없었다. 가장 신성한 방호벽이 흔들거렸다. 거기에는 원칙도 모랄도 종교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념에 대한 구속력이 반쯤은 무너졌으니,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어쨌든 막아야 한다.” (『문학의 해』, 정해수, <18세기 프랑스의 반계몽주의자들에 대한 연구>에서 재인용) 

  이 잡지의 간행에 깊이 간여했던, 반백과전서파 팔리소가 디드로를 비롯한 자칭 철학자들의 위선과 계몽주의 철학의 해악을 희극 『철학자들』(1760)을 써서 신랄하게 조소한 사건은 당시 화젯거리였다. 디드로를 풍자한 등장인물 도로티디우스가 자신이 주장한 도덕의 근간이 이해(利害)임을 설득시키기 위해 남의 돈을 훔치고, 루소의 화신인 크리스펭이 네발로 기어 다니면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풀을 뜯기를 권하는 장면에서 계몽주의에 대한 조롱은 적나라하다. 
  계몽철학자들이 새로운 지적, 문화적 운동을 이끌며 구체제의 악습과 사상에 맞서 투쟁하던 18세기에 ‘계몽주의’는 계몽철학자들이 확립하려는 이성, 자유, 평등, 진보, 관용 등의 새로운 가치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격렬한 소용돌이 그 자체를 가리키는 하나의 토포스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 16세가 1789년 혁명 발발 직후 비로소 루소와 볼테르의 저서들을 접하고 혁명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고 탄식했듯이, 또한 “숭고한 이여!”로 시작하는 로베스피에르의 루소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보여주듯이, 계몽주의와 직결된 역사적 사건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었다. 

“숭고한 이여! 당신(=루소)은 내게 나를 아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당신은 내게 나의 본성의 존엄함을 인정하게 해주었고 사회질서의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숙고하게 해주었습니다. […] 당신의 모범이 여기, 나의 눈앞에 있습니다. […] 전대미문의 혁명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위험한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의 글 속에서 끌어올린 영감에 변함없이 충실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에서 재인용)

  혁명 이후 루소의 시민교육사상과 콩도르세의 『공교육 일반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1792)을 따라 공교육이 실시되기 시작했고, 계몽사상의 합리적 정신과 정치사회이론이 적용된 공화국이 건설되었다. 이후 공적인 영역과 개인의 갈등, 정치권력의 찬탈을 둘러싸고 계급적 갈등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지만, 계몽주의가 확립한 시민사상과 공화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는 직접 이해관계가 얽힌 구 특권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에게 정치와 사회의 구성 원리로 정착된 듯하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에 나오는 열렬한 공화주의자 마리우스도, 거칠고 무지한 민중을 혐오하면서도 역사를 지탱할 힘을 상실한 특권층을 전복시킨 혁명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 스탕달의 『적과 흑』(1830)의 주인공 쥘리엥 소렐도, 드레퓌스 사건(1894년 유태인 출신의 프랑스 장교인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악마도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군법 회의에서 그의 무죄가 밝혀지지 않자,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재심청원 운동이 일어나 군법 회의 재판과정의 비합법성을 폭로한 사건을 말한다.) 끝까지 드레퓌스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작가로서 투쟁한 에밀 졸라도 18세기 계몽주의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황제자리에 오르며 공화국을 파기시켰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여겼던, 혁명적 합리주의 원칙을 법제화시키며 근대시민법의 모델이 된 『민법전』(1804) 또한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나 프랑스 계몽주의가 품었던, 지식의 무한한 진보와 보편적 교육만으로 인류의 해방을 이룩하고 사회적 악을 종식시키는 데 충분하다는 지나친 낙관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하기 시작한다. 논점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논의는 계몽주의 철학이 전파되던 18세기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혁명의 결실에 대한 기대감과 좌절이 계몽주의와 계몽철학자들에 대한 환멸과 회의를 가져온 19세기 내내 프랑스 사람들은 계몽사상을 애써 외면했다. 19세기 초에는 “사실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상상으로 추론하는 작가-사상가”(데스튀트 드 트라시, 『이데올로기』, 1801)를 철학자라 부르는 경멸적인 용례들이 눈에 띈다. 계몽철학자들에 대한 후대의 평가 또한 엇갈린다. 먼저 유럽의 지성이라 불리며 압도적인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했던 볼테르에 대해, 낭만주의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는 “볼테르와 볼테르 조상들 초상의 눈과 입 주위에 걸린 저 흉측한 미소만 봐도 끔찍하다.”고 혐오감을 보였으며,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는 “반시인, 실없는 구경꾼들의 왕, 피상적인 인간들의 군주, 예술의 적, 수다쟁이들을 위한 설교자”라고 볼테르를 폄하했다. 반면 프랑스 소설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1947)한 앙드레 지드(1869~1951)는 세계문학의 최고 걸작 가운데 열권만 골라야 한다면 우선 성서를 고른 다음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그리고 볼테르의 『캉디드』(1759)를 고르겠다고 말하면서 볼테르의 지적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이동렬,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 재인용 및 참조)
  반면 18세기 당시 주류 철학자들과의 반목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루소는 동시대인보다 후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계몽철학자로 분류된다. 혁명기에 팡테옹으로 옮겨진 그의 무덤에는 ‘혁명의 정신적 아버지’라는 헌사가 새겨졌다. 이는 혁명을 반대한 루소 자신과 무관하게 자유와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루소의 공화주의 사상을 혁명의 정신으로 추앙한 혁명가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신화였다. 또한 루소의 저작들은 프랑스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루소는 “칸트로 대표되는 독일의 관념철학자들에게는 의지의 숭고함에 기초를 둔 도덕성의 창시자로, 낭만주의 세대들에게는 자연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언자, 감정과 정열의 원초적 힘을 재발견하고 이를 사회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 사상가”로 여겨졌다. 또한 『신 엘로이즈』(1761)와 『고백록』(1782~1789)의 작가 루소가 후대에 남겨준 “인간적 행복에 대한 열망, 자유와 평등 속에서 진정한 사랑과 우애를 누리고 싶다는 열망”(이동렬,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과 진솔한 자기성찰은 후대에 루소를 계몽주의의 한복판에서 그 한계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한 견자로 평가받게 한다. “볼테르와 함께 한 시대가 끝나고 루소와 함께 새 시대가 열렸다.”는 괴테의 말에서 유럽에 미친 루소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한 비판은, 루소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1790~1831)에서 그 문학적 표현을 얻었다. 계몽주의의 인간적 이상을 구현한 주인공 파우스트는 순수 지식의 한계와 그것의 공허함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계몽주의 이후 지식인의 초상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철학과 법학과 의학
그리고 아! 신학까지도 열심히 노력하여 속속들이 공부해왔다.
정말이지 나는 젠체하는 선생들보다도
박사나 석사보다도, 서기나 승려들보다도 똑똑하다.” (괴테, 『파우스트』, 1831) 

  그러나 파우스트는 다음 순간 모든 것을 다 알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감옥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고 순수 지식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이어간다. 

“아! 나는 여전히 이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있구나.
이 황량하고 저주받은 음침한 방안에, […]
오래된 가구들로 가득 차고 묶여 있는 곳, 이것이 내 세계다
어떤 개라도 이러한 저주받은 삶을 참지는 못하리라!” (괴테, 『파우스트』, 1831) 

  20세기 이후 서구 사회는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추동해온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과, 산업자본의 축적이 가져온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을 겪으며, 이성에 대한 계몽주의의 지나친 신뢰, 인류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초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인종주의라는 괴물이 출현하고 그것이 촉발하는 전쟁의 위협,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소외, 생태학적 위기 등의 문제들이 현실로 나타나자 계몽주의에서 발원된 근대성의 원칙들을 심각하게 진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리성 개념을 둘러싼 베버와 아도르노 그리고 하버마스와 푸코의 근대성 논쟁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베버와 아도르노가 이성이 본래의 목표를 상실하고 도구화됨으로써 근대 계몽의 기획이 실패했다는 비관적 인식을 보인 반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통해 상호이해와 합의라는 목표를 지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계몽의 기획이 아직 ‘미완의 과제’라는 논의를 펼쳤다. 
  한편 미셀 푸코(1929-1984)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거론, 의미를 보완함으로써 근대성 개념을 새롭게 조명했다. 2세기 전 똑같은 물음을 던지며 계몽주의를 사상사의 측면에서 일정하게 자리매김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는 계몽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계몽주의란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미성숙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미성숙은 타자의 지도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의 불가능성 속에 있다. […]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주의의 표어이다.” (이동렬,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에서 재인용) 

  그러나 푸코는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이 강조한 보편적 이성의 이념이 18세기 서구사회의 특정한 ‘권력-지식’ 관계의 산물로서 이성과 비이성의 구분 자체가 거기서 비롯되었으며, 계몽주의 철학을 빚어낸 ‘진리를 지향하는 의지’가 권력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놓은 규범이었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이런 분석을 통해 푸코가 강조한 것은 계몽주의 철학 이념의 파기가 아니라, 진리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복합작용에 대한 끊임없는 이성적 비판이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그 한 예에 불과하며, 칸트가 주장했듯이 “계몽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개인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용기 있는 행동이고, […] 참여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 행위자가 될 수 있고 자발적 행위자가 되겠다고 의지하는 만큼 계몽의 과정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미셀 푸코, <계몽이란 무엇인가?>, 1984). 
  하버마스와 푸코를 따른다면 계몽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은 더 짙다. 그런데 어둠을 알지 못하고는 정확하게 빛을 평가하기란 불가능”(사르트르, 『상황』, 1947~1976)하다는 사르트르의 발언 또한 계몽이 미완의 과제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계몽주의 철학으로 통칭해서 불린 많은 저서와 이론들, 그리고 사상가들은 오늘날 상당부분 낡고 시효가 만료된 듯하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신뢰한 합리성 그것이 곧 서구 근대성의 핵심이라는 정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듯이, 오늘날의 서구사회가 계몽주의적 근대성의 연장선에 있음은 분명하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프랑스 계몽철학이 전 유럽에 위력을 떨치던 18세기, 러시아에서 계몽사상의 폭넓은 전파도 프랑스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볼테르,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특히 “우리는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루소를 경험했다”는 게르첸의 말처럼 루소의 사상과 저서는 러시아 계몽사상의 전개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루소는 러시아에서 그를 일컫는 말 ‘우울증 환자’(예카테리나 여제), ‘달변의 미치광이’(푸시킨), ‘혁명적 민주주의자’(체르니솁스키)와 같은 호칭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러시아 계몽사상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계몽군주의 표상이길 희망했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의 사상에 대해서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찬성하고 환영하는 입장이었지만 루소의 사상에는 항상 부정적이었다. 특히 『사회계약론』에 나타난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에 대한 비판, 러시아 제국이 필연적으로 쇠퇴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제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루소의 교육학적 시각에도 반대하였던 여제는 그의 사상이 다분히 개인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이라 비난하며 스스로 반 루소적 교육서인 『어린이 회화책』(1781)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계몽주의 사상이 집결된 저서로 『(입법위원회에 하달된 예카테리나 2세의) 지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767년 법률 개정에 착수한 여제는 직접 『지침』을 집필하게 된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지침』을 유럽적인 계몽철학의 산물로 만들고 싶어 했으며 이를 위해 당시 계몽철학자들의 사상을 대폭 반영하였다. 『지침』은 계몽절대주의 사상, 다시 말해 ‘군주에 의한 위로부터의 진보’를 추진하기 위해 프랑스 계몽사상을 적용 발전시킨 것이다. 많은 부분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1748)과 이탈리아 법학자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1764)에서 따 왔으며 일부는 프랑스 『백과전서』에 실린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글을 편집한 것이다. 여제 스스로도 몽테스키외의 저서에서 표절했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몽테스키외의 군주제의 장점에 대한 논거를 자신의 전제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가령 푸시킨은 “이 위선적인 『지침』을 읽고 있노라면 정당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18세기 러시아 역사에 대한 소고>, 1822)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지침』은 1760년대 예카테리나 여제가 견지했던 정부방침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측면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문서라는 로트만(2002)의 지적처럼 당시 러시아 계몽주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사례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을 듯하다.
  18세기에 부흥했던 초기 계몽사상은 바른 교육의 확대와 지식의 전파, 그리고 이상적인 계몽 군주와 법에 기대를 건 다소 온건한 사상이었다. 이 시기 계몽 사상가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어리석고 잔인한 지주들, 프랑스적 유행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귀족들이었다. 노비코프의 풍자잡지들과 극작가 폰비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지주들은 잔인무도하며 무지하고 프랑스적 유행을 따라하기에 여념 없는 자들로 그려진다. 노비코프는 농노제의 현실을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훌륭한 지주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폰비진 역시 인간적이고 교양 있는 귀족(가령 『미성년』(1781)의 스타로둠과 프라브딘처럼)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러시아 계몽주의의 정점으로 일컬어지는 라디셰프에 이르러 전제정권에 대항한 민중 혁명 사상의 고취라는 혁명적 계몽철학 노선이 태동하게 된다. 라디셰프는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루소의 사상과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긍정성과 지고한 소명을 믿었으며 악의 근원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1790)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의 자연권을 억누르는 농노제를 비판하고 농노제 철폐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가 족쇄를 차고 있는가? 누가 노예상태의 짐을 짊어지는가? 바로 농민이다! 우리를 먹이는 자, 우리의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자, 우리에게 건강을 주는 자, 우리의 생명을 이어나가게 하는 자.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경작한 것을 처분할 권한도, 자신이 생산한 것을 마음대로 할 권한도 없는 것이다.
[...] 우리가 진정 우리의 편견을 극복하고 우리의 이기심을 억누를 용기가 없단 말인가? 우리의 형제를 노예적 속박에서 해방시키고 모두에게 자연의 평등함을 되돌려 주는 것이 어떠한가?” (라디셰프,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1790)

  라디셰프의 급진적인 계몽사상은 19세기 초․중반의 게르첸, 벨린스키와 같은 걸출한 사상가들에 의해 철학, 사상, 예술 비평 분야의 눈부신 발전을 토대로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특히 1840년대 사상가들과 소위 ‘60년대 사람들’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던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러시아 계몽주의가 더욱 혁명적, 급진적 방향으로 선회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부타세비치-페트라솁스키에 의해 결성된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푸리에의 프랑스식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던 급진적 성격의 비밀 토론 모임이었다. 서클 회원 중에는 도스토옙스키도 있었는데 훗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논쟁의 대부분이 서클 활동 시절 동료들이 벌였던 주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발리츠키, 『계몽사조에서 마르크스주의까지』 참조). 페트라솁스키 서클의 활동은 소위 ‘60년대 사람들’이라 불리는 1860년대의 급진적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역사에서 1860년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860년대란 러시아가 크림전쟁에서 패배한 1855년을 기점으로 하여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난 1866년을 종착점으로 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1860년대 러시아 사상운동은 이전 시기에 이루어진 다양한 분야의 사상적 발전을 발판으로 하여, 니콜라이 1세 시대의 반동적, 억압적 정책에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2세 시대의 다소 자유로워진 분위기 속에서 그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60년대 사람들’의 대표주자인 체르니솁스키, 도브롤류보프, 피사레프 등과 같은 급진적 사상가들은 민중을 계몽함에 있어 미학과 예술의 의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사회의 계몽과 진보를 위해 기능할 때 그 본연의 의의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예술관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시키지 않고 삶 자체를 미학화하려는 지향, 예술을 끊임없이 일상생활 속으로 침투시키려는 지향으로 나타났다. 체르니솁스키는 인간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보다 이성적인 방법으로 충족시키고 무지, 편견, 반사회적 열정과 싸우며 삶을 개선하도록 도와주는 데 예술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고 보았다(이샤야 벌린, 『러시아 사상가』 참조). 그는 학위논문 『현실에 대한 예술의 미학적 관계』(1855)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술의 필요성은 초상화에 대한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초상화가 그려지는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우리 눈앞에 없을 때 그에 대한 회상을 용이하게 해주고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예술은 그 재현으로써 삶의 흥미로운 부분을 생각나게 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거나 관찰하지 못한 흥미로운 측면들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체르니솁스키, 『현실에 대한 예술의 미학적 관계』, 1855)

  즉 예술이 결코 삶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고 “아름다운 것은 삶 자체”인 바, 예술의 의의는 삶의 실재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이를 재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체르니솁스키의 예술관은 순수예술을 옹호하던 자들뿐만 아니라 사실주의 작가들에게서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가령 투르게네프는 네크라소프에게 보내는 편지(1855)에서 이 논문을 가리켜 “예술에 대해 서투르게 감춰진 적의의 산물”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체르니솁스키의 저서가 러시아 예술계에 미친 영향은 강력하였다.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레핀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듯이 당시의 젊은 화가들은 체르니솁스키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체르니솁스키의 예술관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민중의 모습, 민중의 삶 그대로를 담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먀소예도프의 <젬스트보의 점심>(1872), <수확기>(1887), 레핀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1870-73)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 러시아의 농촌 풍경, 민중의 생활 모습이 당대의 진보적 화가들의 주요 테마를 이루었다.
  1870년대 러시아 계몽주의의 급진적, 혁명적 노선은 러시아 민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 민중을 계몽하고 민중의 혁명적 주도권을 촉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인민주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가난과 무지에 허덕이고 핍박받는 농민의 해방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에 대한 죄책감을 씻고자 하는 일종의 순례와도 같은 행위였다. 이들은 농민들을 교육하고 민족 문화와 예술의 기초 위에 러시아를 바로 세우는 것을 그 임무로 삼았다. 러시아 인민주의 현상에 대해 러시아 철학자 베르댜예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시아 허무주의나 러시아 무정부주의가 고유한 러시아적 현상이듯이 인민주의도 고유한 러시아적 현상이다. 인민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보수적 인민주의와 혁명적 인민주의도 있고 유물론적 인민주의와 종교적 인민주의도 있다. 슬라브주의자들과 게르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와 70년대 혁명주의자들은 모두 인민주의자였다. 그러나 어느 것이건 그 근본적 토대에는 진리의 보유자로서의 민중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베르댜예프, 『러시아 이념』, 1946)

  이 시기 러시아 계몽 운동은 이러한 인민주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강력한 민중친화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을 직접 계몽시키고자 했던 이 운동은 러시아 문학, 회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 영향력을 드러냈다. 
특히 계몽사상의 실천과 보급에 있어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이 담당했던 역할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작품 속에서 ‘친 민중성’은 무지와 억압 속에 살고 있는 농민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거나 지주들의 포악한 욕망과 전제 정권의 횡포, 농노제의 참담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문학에서 처음으로 합리적 인간으로서 농민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1852)는 농노와 농노 해방 문제에 대한 시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훗날(1855) 러시아 황제가 되는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1861)을 결심하게 되는 것도 이 작품을 읽고 나서였다고 전해진다.
  ‘친 민중성’의 경향은 네크라소프의 작품 속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체르니솁스키와 함께 당대의 비판적 문학사상 잡지 <동시대인>을 간행하기도 했던 네크라소프는 흔히 ‘인민주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네크라소프는 러시아 농민과 교감하고 그들의 자의식을 표현하였으며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시인이었다. 특히 『누구에게 러시아는 살기 좋은가?』(1863-78)는 농민의 삶을 그들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서사시로서 일곱 명의 농민이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문제로 말씨름을 벌이다가 이를 알아보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겪게 되는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사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다음의 시구는 이 시의 제목이기도한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듯하다.

“일하는 삶은 / 친구의 마음으로 / 곧바로 가는 길.
겁쟁이와 게으름뱅이여 / 문지방에서 사라져라.
이게 곧 천국이 아니겠는가?
민중의 운명 / 그들의 행복은 / 무엇보다도
빛과 자유라네!“ (네크라소프, 『누구에게 러시아는 살기 좋은가?』, 1863-78)

  그러나 네크라소프가 즐겨 사용하기도 했던 농민의 다소 거칠고 투박한 표현 등은, 에이헨바움의 유명한 말 “네크라소프 - 니크라시프(아름답지 못하다)”에서도 드러나듯이 여러 문학가들로부터 ‘예술’이 되기에는 너무 상스럽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샤야 벌린이 “유럽 계몽주의의 전통을 통틀어 가장 풍부한 재능을 가진 사상가”라고 평한 톨스토이도 러시아 계몽사상을 논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일 것이다. 젊어서부터 루소의 초상화를 십자가와 함께 가슴 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스스로도 여러 번 밝힌 바 있듯이 톨스토이는 루소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자연법을 믿은 톨스토이는 인간에게 ‘자연적’ 본성이 있으며 이러한 본성을 억누르는 요소들을 제거한다면 인간 내부의 조화, 인간들 사이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톨스토이는 루소의 『에밀』(1762)의 교훈처럼, 오로지 자연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인간이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가 1859년에 저택을 일부 변경하여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를 세우고 손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였다. 1862년 무렵부터 <야스나야 폴라냐>라는 월간지를 창간해(12호까지 발행) <민중 교육에 대하여>, <읽기와 쓰기 교수법에 대하여>, <훈육과 교육>, <교육의 진보와 정의> 등과 같은 교육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아즈부카』(1872)라는 농민 자녀들을 위한 읽기쓰기 교재를 만들기도 했다. 
  예술에서 인민주의 사상은 예술이 민중의 삶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민중성과, 더 나아가 유럽적 지향에서 탈피해 러시아 고유의 양식과 주제를 찾아야 한다는 민족성과의 강한 유대관계 속에 전개되었다. 이러한 지향은 특히 당대 문화 예술계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문화 비평가 스타소프의 활동에서 두드러졌다. ‘60년대 사람들’ 중 한명이었던 스타소프는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러시아 문화 예술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스타소프는 러시아 예술가들이 서구식 모방을 그만두고 러시아 민중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이름은 당시의 러시아 미술계와 음악계가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는 굵직한 사건들과 관련된다. 세계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이름을 남긴 ‘이동전시협회’와 러시아 작곡가 5명으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일명 ‘쿠치카’가 모두 스타소프의 조력 하에 조직된 단체들이었다. 발라키레프, 림스키-코르사코프, 무소륵스키, 보로딘, 큐이로 구성된 ‘쿠치카’는 서양 음악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을 극복하고 음악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민족적 접근을 지향하였다. 이동전시협회는 여러 도시를 이동해 가며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 대중도 전시회를 향유할 수 있도록 지향했다는 점에서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이동전시협회’가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이라면 유사한 움직임이 연극계에서도 관찰되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극장을 지향하는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목적이 러시아 사회를 계몽하고 진보시키는 것이라는 당시의 지배적 신념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8년에 배우이자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에 의해 누구든지 입장할 수 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민중의 극장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모스크바예술극장(므하트)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계몽주의가 보다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운동으로 전개되고 또한 예술 문화 전반에 걸쳐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강력한 민중친화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당시 러시아의 독특한 정치 사회적 상황이 상당한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강력한 전제정권과 농노제의 사슬에 묶여 있던 러시아에서 전체 국민의 80% 이상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노와 농민 문제는, 1861년 농노해방령이 발표되기 전까지 거의 100여 년간 지속되어온 농노제 철폐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고 농노해방령 이후에는 농민의 지위와 상태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첨예한 문제였다. 계몽주의는 이러한 러시아적 토양 속에 뿌리 내리면서 당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농민(민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 이들을 계몽함으로써 진정한 정의와 평등의 사회를 이루고자하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계몽’을 뜻하는 프랑스어 ‘뤼미에르’와 러시아어 ‘프로스베셰니예’는 둘 다 ‘빛’을 어원으로 하며 두 단어 모두 대문자로 시작하는 경우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흐름을 가리킨다. 철학, 문학, 문화 전반에 걸친 지적운동으로서 계몽주의는 17세기 말 영국에서 출발하여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특히 18세기 프랑스에서 그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오랜 가톨릭 전통으로 교권이 막강했던 프랑스 사회에서 계몽주의는 종교를 인간 이성에 종속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는 프랑스 계몽주의의 상징 『백과전서』에서 잘 드러난다. 지식의 체계적 도표를 표방하는 『백과전서』는 종교를 이성의 학문, 곧 철학 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종교를 효과적으로 탈기독교화 시켰다. 탈기독교, 반교권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반기독교적, 반교권적 투쟁은 반계몽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쳐 이후 자유와 평등을 골자로 하는 공화주의 사상을 확산시켰고 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주변 국가들의 사상적 흐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계몽철학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러시아에서 계몽주의의 확립과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스스로 계몽군주이길 자처했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에서 『백과전서』가 출판 금지되었을 때 러시아에서 출판되도록 조치할 정도로 프랑스 계몽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에 부흥했던 초기 계몽사상은 바른 교육, 지식의 전파와 이상적인 계몽 군주에 기대를 건 다소 온건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18세기말 러시아 계몽주의의 정점으로 일컬어지는 라디셰프에 이르러 보다 급진적인 계몽철학 노선이 태동하게 된다.
  이처럼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러시아에서 계몽사상은 그 역사적 조건과 사회적 제반 상황 속에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위와 상태에 대한 문제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사회문제 중 하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 속에 러시아 계몽주의는 민중 계몽 운동과의 밀접한 관련성 속에 전개되었다. 1870년대에 계몽주의 운동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강력한 민중친화운동, 이른바 ‘브나로드’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민중 속으로 직접 들어가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던 이 운동은 러시아 문학, 회화, 음악 등 당시의 문화 예술 전반에 다양한 방식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시기적인 차이와 전개방식에서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프랑스와 러시아의 계몽사상은 모두 이성, 자유, 평등, 진보 등의 새로운 가치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격렬한 지적 소용돌이였다. 비록 지식의 전파와 보편적 교육만으로 인류의 해방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은 계몽주의의 지나친 낙관론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인간의 지적 성찰은 인류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프랑스에서 계몽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으며 러시아에서 계몽사상은 당시의 러시아 현실 속에 녹아들면서 보다 더 급진적, 혁명적 사회 운동의 형태로 실현되기에 이른 것이다.
연관 토포스 농민; 신앙; 이성; 자유; 지식인; 평등; 허무주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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