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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귀족
토포스명(프랑스) noblesse
토포스명(러시아) аристократия, дворянство
정의 1. 귀족이 되면 특권을 더 누리려고 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평민에 대한 귀족 또는 그 계급을 일컫는 프랑스어 중 대표적인 것은 ‘노블레스 noblesse’이다. 이는 “귀족(출신)의” 또는 “고귀한”의 뜻으로 쓰인 형용사 ‘노블 noble’의 추상명사 형태로 파생된 것인데, 정확하게는 우선 “귀족의 신분” 혹은 “고귀함”을 뜻하며 그 의미 확장으로 그러한 신분과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게 되면서 일종의 집합명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어원을 거슬러 오르면 라틴어 형용사 ‘노빌리스 nobilis’ 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잘 알려진, 저명한” 등을 의미하였으며 나아가 “명문 출신의”의 뜻으로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 것으로 기록된다. 
  귀족을 일컫는 다른 말로는 ‘아리스토크라티 aristocratie’가 있다. 이 말은 ‘귀족(들)’이라는 집단적 지칭 이전에 ‘귀족제도’ 또는 ‘귀족정치체제’라는 의미를 우선 가졌는데, 플라톤의 저작에서 이미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어의 ‘아리스토스 aristos’ 는 ‘우수한, 훌륭한 (사람들)’을 뜻하며 ‘크라토스 kratos’ 는 ‘정치, 권력, 통치’를 의미하니, 결국 ‘뛰어난 사람들의 다스림’을 지칭한 말이 ‘아리스토크라티’였다. 프랑스어에 들어온 이 말은 ‘노블레스’에 비해 보다 더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전문용어로 사용되었는데, 그야말로 “사회계급으로서의 귀족계층”을 의미할 때 동원된, 말하자면 학술용어인 셈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이 테르미놀로지가 ‘노블레스’ 또는 ‘노블’이 갖지 못하는 심리적, 문화적, 정의적 함의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의 형용사 형태인 ‘아리스토크라티크 aristocratique’는 ‘귀족의, 귀족정치의’라는 본래의 의미 외에, 비난과 경멸의 의미에서의 ‘귀족적인’이라는 뜻을 나타낼 수 있다. 가령, 로제 마르탱 뒤 갸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에 “그 부르주아의 귀족(주의)적 허영”이라는 표현이 나오며 사르트르의 『구토』의 한 대목은 어느 한 써클의 폐쇄적이고 엘리트적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그 귀족적 집단”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모두 ‘아리스토크라티크’라는 형용사를 동원한다. 
  유럽 대륙에서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하나의 계층으로 확립된 귀족 계급의 탄생을 정확히 시기적으로 짚어내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으나, 대체로 고대 로마의 몰락 이후 전기 중세에서 후기 중세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9~10세기에 초보적 형태의 왕국들이 등장하지만 넒은 영토를 군주가 직접 통치하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지방의 유력자들과 일종의 계약 관계를 맺는데, 형식적인 충성 맹세와 그에 대한 보답의 형식으로, 군주는 지방 유력자들이 기존에 점하고 있던 지역을 ‘봉토’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하사한다. 하사받은 봉토를 관장하는 제후들은 ‘영주’의 자격으로 등극하여 그 땅의 소출들 중 일부를 국왕에게 세금으로 바치는데, 중세 ‘봉건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이 관계에서 영주들은 역사적으로 보면 최초의 귀족이 되는 셈이다. 넓은 봉토를 영주는 또 다시 몇몇 가신들에게 분할하여 관리하게 하면 그 가신들은 바로 아래 계급의 귀족으로 등극하게 된다. 결국은 비옥한 농토에서 농민 혹은 농노들이 생산하는 소출들을 관리하고 거기에서 일정 비율의 세금을 거두는 경제적 과정에서 더욱 세분된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관리들은 적절한 명분으로 그들의 권위를 장식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러한 권력의 행사는 집안 혹은 가족의 단위로 행사되는데, 그러한 가문(家門)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가문(家紋)을 대문에 그려 붙이기에 이른다.
  귀족 계급의 탄생과 분화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세력들이 바로 중세의 기사계급이다. 평소에는 영주와 그 가족을 옹위하고 이웃 오랑캐가 침범하여 작물을 약탈하는 사건으로부터 관할 농민의 생업을 물리적 군사적으로 보호해주는 역할에서 시작했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영주의 부인이나 영애들의 로맨스의 대상이 되어주는 역할을 맡기도 했던 이 건장하고 잘생긴 남성들은 후세에 상층 계급으로 승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 이슬람, 돌궐, 흉노 등의 이민족과 야만인들의 침입이 있을 경우 이들의 존재 가치는 더없이 높아졌으며 그 때의 공로에 따라 귀족으로 서임되기도 했는데,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귀족의 한 형태인 ‘대검귀족’의 뿌리를 형성해 주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동•서유럽에서 귀족들은 대체로 공작(대공)-후작-백작-자작-남작 등의 서열을 이루어 르네상스와 근대를 맞게 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귀족’의 러시아어는 ‘아리스토크라티야 аристократия’이다. 아리스토크라티야는 ‘힘, 권력, 뛰어난’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ἀριστοκρατία’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아리스토크라씨aristocratie’를 차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귀족을 얘기할 때, 총칭적인 의미를 지닌 ‘아리스토크라티야’ 보다 18세기 이후의 귀족을 지칭하는 ‘드보랸스트보 дворянство’를 주로 사용한다. ‘드보랸스트보’는 궁정을 뜻하는 ‘드보르 двор’에서 파생되어 애초에는 ‘궁정에 거주하는 사람, 궁정관리’를 뜻하였으나, 이후 ‘높은 신분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드보랸스트보에 속한 사람들을 ‘드보랴닌 дворянин’이라고 불렀는데 드보랴닌은 12세기부터 존재했지만, 이 당시 드보랴닌은 귀족이 아닌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였다. 
드보랴닌이 귀족 신분으로 공식적 인가를 받은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이다. 1785년 4월 21일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귀족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특권 인가장’을 통해 귀족의 신분과 권리를 법제화하면서 ‘귀족’이라는 지칭을 ‘도보랴닌’ 혹은 ‘드보랸스트보’로 공식화하였다. 
  그런데 18세기 이전 러시아 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귀족이 존재하였다. 드보랸스트보 이전의 가장 대표적인 귀족 계급은 ‘보야르스트보 боярство’였다. 키예프 루시 시절부터 18세기까지 존재한 ‘보야르스트보’는 12세기경에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보야르스트보에 속한 귀족을 ‘보야린 боярин’이라 불렀다. 어원은 ‘유명한, 부유한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투르크어 ‘bajar’에서 유래되었다.

  보야린의 사회적 위치와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고대 루시 사회의 신분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루시 사회는 ‘무즈 муж’라 불리는 자유민과 ‘첼랴디 челядь’라 불리는 노예로 구분되었다. 자유민은 ‘류디 люди’라고 불리는 일반 대중, 성직자, 특권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중 일반 대중은 주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었으며, 농촌 주민은 ‘스메르트’로 불리는 자유인, ‘자쿠프’로 불리는 예속민으로 구별되었다. 특권층은 ‘스타레츠’로 불리는 족장, ‘크냐지’로 불리는 공, 그리고 보야린이 있었다. 
  고대 루시 사회에서 국가 운영의 중심은 ‘크냐지’로 불리는 ‘공’이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종족 공동체 추장을 의미하는 ‘konung’에서 파생된 ‘크냐지 князь’는 키예프의 류리크 일족이 공이 된 것이 시초이며, 이후 중세 러시아는 이러한 공을 중심으로 하는 ‘공국’의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공’은 법률제정권, 군사 지배권, 재판 및 행정권을 가진 공국의 지배자였고, 공에게 군사, 행정, 정치적인 봉사를 하며 토지를 부여받아 생활하는 계층을 ‘보야린’이라고 불렀다. 공과 보야린은 중세, 특히 프랑스 봉건주의 체제에서 영주와 기사들이 봉토를 기반으로 맺어지는 주종관계와 유사하다. 

  보야린은 공을 군사적으로 보필하는 ‘종사단 воинская служба’이 중심이었기에 ‘군사귀족층’이라고 부른다. 종사단은 나이에 따라 노장 종사단과 소장 종사단으로 구별하였다. 보다 권위가 높은 쪽은 노장 종사단이었는데 이들을 ‘보야린’이라고 불렀다. ‘오트로크’, ‘그리트’라 불리는 소장 종사단은 주로 행정관리와 재판관 직을 맡았다. 
  이후 보야린은 고대와 중세 루시 사회에서 높은 신분과 특권을 지닌 귀족층으로 생활하였고 그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것은 15세기 모스크바 공국 시절이었다. 몽골의 압제에서 벗어나 모스크바 공국이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자 주변 도시 공국들의 많은 보야린들이 모스크바로 모여들었다. 보야린들은 거대한 집단과 토지를 형성하여 모스크바 공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그들의 권력 형성의 기반이 된 것은 ‘메스트니체스트보 местничество’로 불린 ‘문벌관료제도’이다. 이것은 이후 제정 러시아 시대에도 귀족들의 가장 큰 특권이었는데, 가문의 상하와 조상 관직의 고하에 따라 자식들이 관직에 자동으로 오르는 일종의 세습 관직제였다.
  보야린들은 ‘문벌관료제도’를 통해 모스크바 공국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공’으로 대표되는 중앙 정부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반 3세와 바실리 3세 시절 상호간의 충돌은 극에 달했지만, 왕권이 강력하게 확립되지 못한 모스크바 공국에서 주도권은 보야린들에게 있었다.
  기세등등했던 보야린은 이반 4세의 개혁으로 급속히 쇠락하였다. 강력한 전제정치로 왕권강화를 시작한 이반 4세는 귀족의 특권을 단계적으로 제한하였다. 우선 귀족을 견제할 목적으로 1550년 1천명들의 궁정관리와 행정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들은 궁정에서 일 한다고 하여 ‘드보랴닌’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18세기부터 새롭게 귀족계층을 이룬 드보랴닌의 시초가 되었다. 
  이반 4세는 1564년 보야르의 권력 기반인 토지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이반 4세는 국토를 군주 직할령인 ‘오프리츠니나와 귀족령인 ‘제므시치나’로 나누어 군주 직할령은 귀족이 일체의 간섭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오프리츠니나를 관리하기 위해 ‘오프리치니크’라는 친위대를 창설하였다. 이반 4세는 군주의 영토인 오프리츠니나를 확장하기 위해 오프리츠니크를 앞세워 귀족 토지를 강제로 몰수하였고, 오프리츠니크의 무분별한 학살은 러시아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1570년 이반 4세는 오프리츠니크를 통해 노브고로드 시의 귀족들을 공격하여 토지를 몰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약 1500명의 보아르들과 무수한 평민들이 학살당했다. 특히, 1565년 이반 4세는 자신의 측근이자 대귀족회의 의장이었던 이반 표도로프를 왕이 되려고 했다는 죄목을 씌어 아내와 함께 처형했다. 

  이와 같은 이반 4세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보야린은 그 세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고 그들을 대신하여 신흥 귀족이라 할 수 있는 ‘드보랴닌’이 점차 세력을 형성하였다. 보야린이라는 칭호는 표트르 대제 이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일하지 않되 명성과 특권을 동시에 누리는 윗분들의 사회적 존재는 15~16세기의 모든 유럽 농민과 평민들에게 더 이상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땅을 일구며 노동하는 직접생산자인 그들에게 그러한 특권층은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 부터 존재한 하늘이나 땅, 또는 신 같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였다. 마을에는 신부님이 있었으며, 멀리 영주님이 기거하는 도성이 있었고 자신들은 무슨 후작령이나 백작령에 소속된 주민으로 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람들 사이에, 반성적 의식과 질문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대타적 인식이 태어난다. 그것은 선망일 수도 질시일 수도 있다. 그 선망과 질시를 집중적으로 표현 혹은 구현하는 계층은 우선 부르주아였다. 넉넉한 재화를 손에 넣은 그들은 한 단계 올라서서 사회의 구성과 질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도성 안에 기거하면서 영주의 법률 고문을 맡거나 농기구를 구하러 오는 농민들에게 삽과 호미를 제작 공급하는 그들은 삶이 늘 일정 부분 군림 혹은 복종으로 구성된다는 현실적 인식에 눈뜨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위에 놓은 계급을 문화적, 심리적으로는 선망하면서 동시에 정치 사회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질시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에 이르면 그러한 양가성이 사회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표출되는 일이 발생한다. 소처럼 커지고 싶었던 개구리 이야기를 자신의 우화집에 세 번째로 소개한 라퐁텐은 개구리의 배가 터지고 난 후 다음과 같은 사족을 다는데, 서양 근대의 정치적 삶의 한 단면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세상엔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모든 부르주아들은 귀족이 되려하고 작은 나라의 왕들마저 외교 사절을 갖추려 들고 후작들은 너나없이 모두 몸종을 부리려 한다.” 

  세태의 이러한 경향에 몰리에르는 연극 작품으로 화답한다. 그 제목은 이전에는 누구의 입에서도 발화된 적이 없는 이상한 이름 『서민 귀족』이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특히 좋아해서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여러 번 공연된 이 희극이 과연 부르주아만을 비웃은 것일 까는 다시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비싼 돈을 들여 모셔온 철학 선생님 앞에서 “오오, 내가 산문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40년이나 말해왔구나” 하고 감탄하는 주인공 주르댕을, “주인님 잠깐만요, 저 한 번 웃고 갈게요 하하”하며 깔깔대는 하녀와 함께 재미있게 비웃으며 관람하는 태양왕은 18세가 되기 이전 모후의 섭정 시절 귀족들의 횡포에 몸서리쳐하던 모친의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 6년간에 걸친 프롱드의 난(커지는 왕권에 저항하는 귀족들의 조직적 반란)을 겪으며 어린 루이 14세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왕이 되면 우선 저자들부터 반드시 제압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매우 앞서 강화된 왕권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였으며 이에 따른 특권계층의 상실감과 위기감은 매우 고조된 상태였다. 인두세를 귀족에게도 부과하고 각종 행정 집행에서 제한을 가하려는 왕권에 맞서 기존의 특권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태양왕은 교묘한 전술로써 이들을 한 풀 꺾어놓았다. 귀족을 향한 본격적인 위협은 그러나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경제력과 합리주의적 자각을 겸비한 소상공인들은 바야흐로 ‘사람은 태어나면서 모두 평등한 것이 아닌가.’하는 전대미문의 상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내내 명망가들은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상상력과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의 와중에 평민 볼테르는 영국으로 망명을 가기도 했고 디드로는 감옥에 몇 달간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1789년 파리의 시민들은 바스티유를 습격한 후 드디어 당당하게 외치기에 이른다. ‘이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하인 복장을 하고 야반도주하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를 파리로 끌고 온 시점에서 ‘죽일 것까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지롱드 당원들에게 자코뱅 당의 수장 로베스피에르는 입법의회의 단상에 올라 ‘귀족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며 밀어붙인다.
  유서 깊은 명망가들의 세력은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는 않는다. 그들은 19세기 내내 부르주아들과 밀고 밀리는 싸움을 계속한다. 한 때 왕정을 회복하여 집안을 다시 세우기도 하지만 그러나 1830년을 넘어서면서 눈에 띄게 한 풀 꺾인다. 
  재미있는 현상은 득세한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이 타도한 특권층의 문화를 자신들도 모르게 선망하고 흉내 내려 든다는 사실이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두 딸을 기필코 귀족에게 시집보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으며, 둘 중 하나는 정 안되어, 금융재력가에게 보낸다. 『황금 눈을 가진 소녀』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발자크는 옷가게의 평민 처녀와 귀족 청년 사이의 안타까운 갈등을 매우 정직하게 그려낸다. 
  그의 소설 『잃어버린 환상』의 주인공 뤼시엥 뤼방프레는 사실은 좀 더 지체 높아 보이려고 개명한 이름이다. 마치 오노레 발자크가 오노레 드de 발자크로 행세한 것과 같다. (루트비히 판van 베토벤이 결코 폰von 베토벤으로 바뀌지 않았던 것은 질풍과도 같은 그의 음악을 고려할 때 다행이다). 소멸해 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귀족 계급에 대한 발자크의 체계적인 분석과 묘사는 그러나 『랑제 공작부인』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문학 평론의 분야에서는 귀족과 관련하여 엥겔스와 루카치의 발자크 언급을 언급할 만하다. 그들은 리얼리즘의 승리를 말하면서, 소설가 자신은 왕당파로 자처했지만 소멸해가는 상층 계급의 몰락을 가감없이 그려낸 작가 정신의 승리를 한 목소리로 찬탄하였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은 라몰 후작댁에서의 모임에서 만나는 귀족 청년들 앞에서 묘한 열등감과 적대의식 그리고 선망을 경험한다. 거친 쥘리엥을 사랑하는 처녀 마틸드는 그러나 자신의 귀족적 우월감과 세련된 감수성을 결코 내려놓지 않는다. 
  상승하는 부르주아들의 속스러움에 드러내놓고 치를 떤 작가는 대표적으로 플로베르이다. 그는 미완의 저작인 『고정관념 사전』에서 ‘귀족’항목에 이르자 19 세기 전체의 정서를 다섯 단어로 요약한다. “(귀족을) 경멸하고 동시에 선망하기 la mépriser et l'envier”. 모든 소설가가 다 역사의 흐름을 따랐던 것은 아니다. 혁명기를 거친 소설가 샤토브리앙은 대표적인 왕정옹호가였으며 19세기 후반의 산문인 레옹 블루아는 『관용 표현 주해서』이라는 두꺼운 책 전체를 부르주아 모독하기로 일관한다. 
귀족의 토포스는 그런 의미에서 결코 단순하지 않다. 187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 정부는 귀족 작위를 수여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그치긴 하였지만 사람들의 정서에 이 토포스는 여전히 복합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이반 4세의 개혁으로 전통적 귀족층이었던 보야르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드보랴닌’이라는 계층이 등장하였다. 드보랴닌이라는 용어는 12세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드보랴닌은 귀족이 아니라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를 지칭하였고, 그래서 이들을 궁신, 궁정관리, 궁정 하인이라는 뜻의 ‘드보레츠키’, ‘드보르스키’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점차 이들의 역할과 지위가 높아져 보야린처럼 공에게 군역봉사를 대가로 토지를 받기도 하였다. 드보랴닌은 일정부분 귀족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직과 영지가 세습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야린과 차이가 있었다. 
  보야린은 아버지의 관직이 자식에게 세습 되는 문벌관료제도인 ‘메스트니체스트보’의 특권과 역시 세습 가능한 영지인 ‘보트치나’를 소유하여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하였다. 이에 반해 드보랴닌은 비세습관직이었고, 영지 역시 복무 기간이 끝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되는 비세습토지인 ‘보트치나’를 소유하였다. 따라서 드보랴닌은 관직과 영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적 충성심과 애국심을 군주에게 보여야만 했고, 반대로 보야린과 군주는 서로 견제하며 주도권 쟁탈을 벌였다. 그러나 이반 4세가 오프리츠니나를 통해 보야르들의 영지를 몰수하였고, 1682년 표도르 황제는 보야르의 세습 관직제도를 폐지하여 보야르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락하였다. 반면 왕권과 드보랴닌의 세력은 점차 확장되었다. 
  신분보다 능력과 실용을 중시한 표트르 대제는 1722년 ‘관등표’를 제정하여 신분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관등표는 국가 봉직을 무관직, 문관직, 궁정직의 세 부류로 나누었고, 각각 14개 관등으로 서열을 정하였고 모든 관등에는 드보랴닌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하였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는 드보랴닌, 드보랸스트보라는 칭호와 함께 ‘쉴랴헤트스트보 шляхетство’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 쉴랴헤트스트보는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소지주 계급인 쉴랴흐타에서 유래된 말로서 표트르 대제 시절 드보랴닌과 혼용하여 사용하다가 이후에는 드보랴닌으로 통일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관등표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우선, 무관, 문관, 궁정직의 세 분류 중에서 가장 권위가 높고 특권이 강한 것은 무관이었다. 무관은 14등급 모두 드보랴닌이라는 칭호의 세습이 가능한 반면, 문관과 궁정직은 8등급 이상만 세습이 가능하였다. 무관으로 오른 자는 지위를 얻은 시점부터 귀족이 되고, 그 후에 태어난 자식도 귀족이 된다. 그러나 문관과 궁내관 9등급 이하는 본인만 귀족이 될 수 있었고 자식은 귀족이 될 수 없었다. 푸시킨은 시 『나의 가문』에서 관등에 의한 귀족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의 삼류 문인들 떼거지로 몰려와 / 내 동료들 잔인하게 비웃으며
나를 귀족이라 부른다. / 하지만 이 무슨 허황한 소리인가! 
나는 장교도 아니고 문관도 아니고 / 십자 훈장으로 귀족 된 몸도 아니고
한림원 교수도 대학 교수도 아니고 / 그저 소박한 러시아의 평민” 
(푸시킨, 『나의 가문』, 1830) 

  무관이 귀족으로서 누리는 특권이 훨씬 강했기에 무관직이 진정한 귀족적 직무로 인식된 반면 문관직은 관청서기 보좌관 정도의 직무로 기피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현상은 19세기에 어느 정도는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무관이 우대받는 사회였다. 따라서 젊은 귀족이라고 하면 젊은 장교라는 인식이 강했고, 특히 장교들이 입고 다니는 ‘문디르’라 불리는 제복이 유행하여 귀족의 상징처럼 인식되었다.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일상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에서 차츠키는 제복을 중시하는 당대 귀족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차츠키 : 제복! 오로지 제복뿐입니다! 언젠가 그들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비겁함과 분별없음을 가려주었던 화려하게 수놓인 아름다운 제복 말입니다. 행복의 길로 가려면 우리도 그 뒤를 따라야겠죠! 아내도 딸도 제복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 저도 한때는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니! 이제 그 철없는 시절로 돌아가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누가 제복에 매혹되지 않겠습니까? 황실 친위대에서 누가잠시 이곳에 오기라도 하면 여자들은 함성을 질러대지요, 만세. 그리고 모자를 벗어 하늘로 던지는 겁니다.”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표트르 대제의 신분 개혁의 결과로 보야르는 거의 몰락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보야르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보야르를 대신한 신흥 귀족인 드보랴닌이 ‘새로운 명문귀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푸시킨은 자신의 시 『나의 가문』에서 새로운 귀족 세력 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 나 모르는 바 아니니 / 그것을 반박할 맘은 없어 
오늘날 새로운 명문 귀족 생겨나 / 새로울수록 더욱 존귀하지만 
나는 노쇠한 가문의 부스러기 / (불행히도 나 하나만이 아니다)
구닥다리 귀족의 후손이니 / 이보게들, 나는 보잘것없는 평민이라네.
(푸시킨, 『나의 가문』, 1830) 

  드보랴닌 계층의 성립 과정 중 흥미로운 점은 우연한 군주의 총애로 미천한 신분에서 ‘벼락 출세’를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얻어 빵장수라는 미천한 태생에서 장군이자 행정가로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던 알렉산드르 멘쉬코프 공작, 카자크 천민 출신으로 궁정 호위대 합창단에서 노래를 잘 불러 예카테리나 1세와 비밀리에 결혼한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가 대표적인 벼락 출세자이다. 푸시킨은 시 『나의 가문』에서 이러한 벼락 출세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의 조부는 밀전병을 판적도 없고 / 황제의 신발을 닦은 적도 없고 / 궁정의 시종들과 노래를 부른 적도 없고 / 밑바닥에서 졸지에 공작으로 출세한 적도 없고 / 분가루 처바른 오스트리아 친위대에서 도망쳐 온 병사인 적도 없다. / 그러니 내가 어찌 귀족이겠나? / 다행히도, 나는 그저 평민이라네. (푸시킨, 『나의 가문』, 1830) 

  신흥 귀족 드보랴닌은 점차 세력을 갖게 되자 예전 보야르들처럼 종신근무와 봉사에 대해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모든 드보랴닌은 종신근무를 해야지만 귀족 신분을 유지 할 수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귀족들이 봉직을 회피하면 엄격히 처벌하였는데 1720년에는 봉직의무를 회피하는 드보랴닌에게 코를 잘라 내는 극형이나 강제종신 노동형을 시키기도 하였다. 표트르 사후 1736년에 귀족들의 봉직이 25년으로 감축되기 하였지만 여전히 드보랴닌은 불만이 많았다. 
  1725년 표트르 대제 사후 1762년 예카테니라 여제가 즉위할 때 까지 러시아 황실은 불과 40여 년 동안 5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중앙정부와 왕권이 약화된 틈을 타 귀족은 세력을 확장하였고, 공직에 봉사하지 않고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였다. 이것은 마침내 1762년 2월 표트르 3세의 ‘귀족의 자유에 대한 칙령’으로 이어지게 되며 이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귀족의 황금시대가 시작된다.
  ‘귀족 특권장’ 혹은 ‘귀족의 봉직해방령’이라고 불리는 이 칙령으로 인해 귀족은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 즉 납세, 병역, 처벌 면제가 되고 전시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제외하고는 문무관직에 봉직하지 않을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표트르 3세 시기에 귀족의 힘이 가장 강성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드보랴닌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 계급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된다. 특히 1760년, 1765년의 칙령으로 농노들을 마음대로 처벌하고 유형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러시아에서 농노가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1782년 귀족권력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발표된 데니스 폰비진의 희곡 『미성년』에서는 다음과 같이 농노에 대한 귀족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스코티닌 : 모든 손해는 내 농노들에게서 거둬들이면 그만이죠.
프로스타코프 : 맞아, 처남. 소작료를 능숙하게 거둔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
프로스타코바 부인 : 우리에게 좀 가르쳐 줄래? 우리는 잘 못하겠어. 지금까지 농노가 가 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거둬들였다고 해서 더 이상 벗겨내지 못하면 불행한 일이야.
<.......> 
프로스타코바 부인 : 아니, 무슨 상관이지요? 난 내 하인들에 대해 권한이 있어요. 
프라브진 : 그들을 내키는 대로 채찍질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겁니까?
스코티닌 : 그렇다면 귀족들이 자기 맘대로 하인들을 때릴 수도 없다는 겁니까?
프라브진 : 원할 때 마다! 그러고 싶습니까? 솔직하군요. 스코티닌씨. (프로스타코바 부인 에게) 안 됩니다, 부인. 누구도 학대할 권한이 없습니다.
프로스타코바 부인 : 그럴 수 없다구요? 귀족이 하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귀족 특권 에 관한 법률은 그럼 뭐지요?
스타로둠 : 부인은 법률 해석에 정통하군요.” (폰비진, 『미성년』, 1782)

  귀족 세력의 강화는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에도 계속되었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여제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 귀족 세력에게 특권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제는 표트르 3세의 ‘귀족 특권장’을 보다 확장시킨 ‘러시아 귀족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특권 인가장’을 1785년 훈령으로 공식화하였다. 이 훈령에서는 귀족계층을 공식적으로 ‘드보랸스트보’라 칭하였고 귀족의 후손에게 특권과 자유를 영구적으로 보장하였고, 귀족들의 명예, 생명, 재산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하였다. 또한 귀족 영지와 그에 속한 농노에 대한 무한적인 권리를 인정하여 영지와 농노를 귀족의 완전한 사적 사유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농노에 대한 지주의 권리는 무한하였고 귀족의 권리가 강화될수록 민중과 농노들의 삶의 조건은 악화되었다. 

  이러한 법령들을 통해 드보랸스트보는 토지와 농노소유권, 촌락매매권, 공장운영권, 상업권 등과 같은 다른 신분계층은 획득할 수 없는 권리와 특권을 보유하는 사회내의 유일한 특권계층으로 성장하였다.
  18세기말 귀족의 황금 시기는 비단 정치, 사회적 측면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까지 문화적 측면에서도 풍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당시 성립된 귀족 문화는 주로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문물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19세기 러시아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를 한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러시아 귀족 문화의 발전, 특히 여흥거리로서의 귀족 문화 도입과 확산은 18세기 중반 ‘여제들의 통치 시기’에 이루어졌다. 당시 러시아는 1725년 표트르 대제 사후부터 1762년 예카테리나 여제 이전까지 6명의 황제와 여제가 등극하는 혼돈의 시기였다. 황제들은 정치적으로는 미숙함을 보였지만 유럽 문물을 러시아에 확산시켜 귀족문화 정착에 기여를 하였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귀족문화 중의 하나는 무도회이다.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무도회는 최신 유럽의 문화 유행들 즉 의상, 음악, 춤, 귀족적 에티켓, 놀이 문화 등이 러시아에 전파되는 좋은 통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무도회는 귀족 집단의 사교모임 역할을 하면서 출세의 통로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당시 무도회는 귀족이 가장 선호하는 여가 생활이자 일상생활에 중요한 요소였다.
  표트르 대제의 조카딸인 안나 이오나노브나 (통치기간 1730-1740) 시기에 무도회는 러시아 문화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확산되었고, 엘리자베타 이바노브나는 (통치시기 1742-1762) 무도회의 외양은 물론 내용까지 수용하면서 러시아에서 무도회의 번성을 이끌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무도회 홀을 만든 엘리자베타 시대를 ‘귀족들의 영원한 축제’의 시기로 불렀다. 
  무도회의 의식적이며 화려한 외양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심화된다. 예카테리나 시대에는 궁정이나 귀족 개인이 주관하는 사설 무도회와 공공 무도회가 분리되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귀족의 정기 모임이 형성되어 매주 목요일마다 공공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공공 무도회는 매우 화려했는데 거대한 홀에는 수천 개의 초가 채워져 있었고 모든 벽면은 거울과 수많은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당시 무도회가 얼마나 빈번하게 열렸는지는 문학 작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19세기 모스크바 귀족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 (1824)과 페테르부르크 귀족의 삶을 보여주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1831)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차츠키: 모스크바에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소? 어제도 무도회가 있었고,
내일은 두 개의 무도회가 있고.......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예브게니의 부친은 일 년에 세 번씩 무도회를 열다가 마침내 쫄딱 망하고 말았지... 
세 집에서 그를 파티에 부르고 있었다. 이 집에선 무도회, 저 집에선 아이들 잔치에...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로트만은 당대 귀족 사회에서 무도회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세기 19세기 초의 러시아 귀족들의 삶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눈다. 하나는 가정에 머무는 시간에는 가족과 가정의 일을 돌보는 개인으로서의 귀족과 나머지 반은 문관이나 무관으로서 복무를 수행하며 군주와 정부를 섬기는 충성스런 신민으로서의 귀족이다. 이 두 가지 행위 양태의 대립은 하루를 기념하는 모임, 즉 무도회에서 해소가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귀족들은 자신들만의 사회생활을 실현하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적 인물도 아닌 국가에 봉사하는 봉직원도 아닌 귀족모임에 참석한 귀족 중의 한사람이자 그들의 동류계층이라는 지위를 가지게 되며 무도회에서 이루어지는 사교 생활은 사회적인 일로서 가치를 부여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독특한 동류의식과 계층화는 러시아에서 무도회를 성황 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귀족의 여흥거리는 무도회뿐만 아니라, 연극과 오페라와 같은 공연 예술로 확장되었다. 19세기에 귀족의 유럽 여행이 늘어나고, 선진 유럽 문화를 직접 체험한 귀족들은 유럽 문화에 동경, 특히 문학, 연극, 오페라 발레에 관한 예술적 관심과, 유럽의 도서와 미술품을 수집하면서 생긴 문화적 욕구가 충만하게 되었다. 
  예술 문화, 그중에서도 연극 발전에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통치시기 1742-1762)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유럽 문물, 특히 프랑스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무도회, 살롱 문화를 직접 수입하여 장려하였다. 그중에서도 연극에 관심을 가져 1756년 8월 30일 칙령을 발표하고 러시아 각처에 극장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756년 9월 30일 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 최초의 황실 드라마 극장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건설한다. 이후 1824년 모스크바의 말르이 극장이 개장되었고 귀족의 여흥거리로서의 연극은 19세기 전반 급속도로 성장한다. 
  18세기 귀족의 황금 시기는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은 1825년 귀족들의 봉기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귀족 가문 출신의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전제정치와 농노제 폐지의 개혁을 요구한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당시 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를 낳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으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이를 위해 귀족층에 이른바 ‘비귀족 세력’을 편입시켜 귀족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1832년 4월 10일자로 니콜라이 1세는 ‘명예시민’, 혹은 ‘명예귀족’이라는 ‘포쵸트노예 그라즈단스트보 почётное гражданство’ 계층을 만들어 그들에게 귀족 특권, 즉 영지 소유, 형벌 면제, 세금 면제의 권리를 주었다. 
  또한 표트르 대제 이후 시행된 관등표의 세습 등급을 엄격하게 하여 세습귀족층을 대폭 감소시켰는데, ‘포톰스트벤노예 드보랸스트보потомственное дворянство’라 불리는 세습귀족은 1856년부터 모든 등급이 세습이었던 무관은 6등급 이상부터, 8등급 이상부터 세습이 되었던 문관은 4등급 이상만 세습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세습이 되지 않는 나머지 등급의 귀족을 예전에는 세습귀족이라는 의미의 ‘리치노예 드보랸스트보 личное дворянство’라고 불렀으나, 1845년부터 이들에게 드보랸스트보‘라는 명칭을 빼고 모두 명예시민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주로 상인, 예술가, 지식인이 중심이었던 명예시민들은 1840년에는 약 4800명이었는데, 1897년에는 약 342,9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귀족 특권 약화의 결정적인 계기는 1861년에 시행된 농노해방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역사의 가장 큰 사건으로 인식되는 농노해방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러시아 신분 질서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귀족은 자신의 가장 큰 특권이자 경제 토대였던 농노를 소유할 수 없게 되자 급속도록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지위권 상실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시기 러시아에 유입된 자본주의로 인해 귀족은 점점 사회적으로 자리를 잃게 되었다. 1859년에 발표된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는 농노제 해방을 앞둔 당신 러시아 귀족 세력의 몰락을 모여주고 있다. 


“오블로모프 가문은 한때 부자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알게 모르게 가난해지고 가세가 이루더니만 급기야 다른 귀족 집안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단지 백발의 하인들만이 지난날들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마치 귀한 보배를 다루듯 그렇게 서로에게 전할 따름이었다.”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1859) 
20세기 초가 되면서 귀족의 후손은 경제적 지위와 관등 지배에서 점차 약화되었고, 주로 시골의 오래된 영지에서 삶을 영위하곤 하였다. 이후 귀족들은 1917년 혁명 후 혁명 정부가 시행한 <시민계층 박멸운동>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비교문화적 설명   서양에서 사회적, 제도적 계층으로 확립된 귀족 계급의 탄생은 대체로 로마의 몰락 이후 전기 중세에서 후기 중세로 넘어오는 시점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 중세 시절 특권을 누린 집단으로서의 귀족은 유사한 형태 속에서 생성되고 발전되었다. 양국 모두 중세 사회구조의 큰 틀은 군주 혹은 영주들이 기사들이나 유력자들에게 ‘봉토’를 하사하여 주종관계의 계약을 맺는 ‘봉건제’였다. 토지를 부여받아 정치, 경제적 특권을 누린 이들은 프랑스의 경우 ‘슈발리에’라 불리는 기사계층, 러시아의 경우 ‘보야르’라 불리는 계층이었고, 이들이 귀족의 원형이 되었다. 
  귀족 계급은 필연적으로 중앙 왕권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성망을 반복한다. 프랑스의 경우 일찍이 17세기 루이 14세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속에서 귀족들의 특권이 약화되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는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이념으로 계급에 대한 의식 자체가 약화되었다. 19세기 프랑스는 귀족 계급을 대신하여 ‘부르주아’가 사회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러시아 역시 귀족과 왕권의 긴장 관계는 프랑스와 유사하게 진행되었는데, 주목할 점은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귀족의 특권장’으로 귀족의 권리가 매우 강성해져 ‘귀족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는 점이다. 귀족 세력의 강세는 자연히 일반 민중과 농노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이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 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으로 민족 정체성 상실이라는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단기간에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연관 토포스 결투; 무도회; 명예; 살롱; 소시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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