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나폴레옹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나폴레옹
토포스명(프랑스) Napoléon
토포스명(러시아) Наполеон
정의 1. 새로운 삶과 자유에 대한 열정이 강할수록 나폴레옹은 영웅이 되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섬의 아자시오에서 태어나서 1821년 5월 5일 영국령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사망한 나폴레옹 1 세는 샤를마뉴 대제 이후 프랑스 역사상 두 번째 황제였다. 재위기간은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804년부터 1814년까지, 그리고 1년 뒤의 3월에서 6월까지 ‘백일천하’였다. 그 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싸웠다하면 이기는’ 부르봉 왕실의 잔존 가족과 일부 왕당파 귀족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프랑스인들을 열광시킨 혁명군의 장군이었다. 
  파리 시민들이 자발적이고도 대중적인 분노와 충동에 촉발되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함으로써 혁명을 시작한 지 10년 째 되던 1799 년, 나폴레옹은 이른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감행하여 권좌에 올랐다. 그는 제 1 통령이라는 직함을 가지긴 했으나 실제로는 그 직함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의 권력으로 프랑스와 유럽의 정치적 판세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5년 후 교황 피우스 7 세를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으로 불러 자기 머리에 황제의 관을 씌우게 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의 왕실들은 왕과 제후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봉기한 프랑스 땅의 터무니없고 무례한 ‘시민들’을 응징하고 그 불온한 사상을 평정하고자 1792년부터 수차례 연합군을 결성하여 나폴레옹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황제는 ‘오스테를리츠 대전투’ 에서 승리를 통해 그들을 대파함으로써 유럽대륙 내에서 부동의 왕좌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바이킹과 몽고의 징기스칸 이래 그 어떤 군대도 이토록 멀리 나아간 적이 없으며 그토록 많은 위정자들을 굴복시킨 적이 없었다’고 기록하기도 한 나폴레옹 휘하의 붉은 군대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의 기치를 내걸고 공화국 정신을 온 대륙에 전파하기 위해 나일 강에서 모스크바까지 원정에 원정을 거듭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황제 나폴레옹은 또한 지속적으로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정비해 나갔다. 제국의 영토는 로마와 함부르크, 바르셀로나와 암스테르담을 이미 포함하였다. 이탈리아는 1802년부터 1805년까지 그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이후 1814년 그가 실추할 때까지는 국왕으로 섬겨야 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그 기간 동안 스위스 연맹의 중재자로 개입하였고 라인 연맹의 후원자로 자처하였다. 
  그는 대륙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며 그 실질적 수단으로 자신의 보나파르트 가문의 많은 가족과 인척들을 여러 나라의 왕좌에 앉히기에 이르렀다. 조제프를 나폴리 왕국에 이어 스페인에, 제롬을 웨스트팔렌 왕국에 그리고 루이를 네덜란드로 보내어 통치하게 했는가하면 처남인 조아켕 뮈라를 나폴리로 보내어 자신의 지배력을 증명했다. 그리고 바르샤바 공작의 직위를 만들어 폴란드의 국정에 간여하며 피정복국인 프러시아 왕국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신화의 대상이었으며, 또 다른 면에서는 검은 야욕의 정복자라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전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나폴레옹이 생전부터 온 유럽에 걸쳐 누린 명성은 그가 발휘한 남다른 군사적인 지략과 정치적인 수완이 없었더라면 획득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어이 황제에 등극하여 공화국을 제국으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프랑스의 정치사에 일정한 굴곡을 가져왔다는 점도 나폴레옹이란 이름에 결부되는 하나의 음영으로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사적 정복이 필연적으로 야기한 살상과 인명 피해 - 기록에 따르면 약 백만 명이 넘는 목숨이 그의 영광의 제물이 되었다 - 가 고스란히 그의 야망의 대가로 바쳐진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특히 에스파냐와 러시아 원정에서의 대패 그리고 그의 퇴위를 불러온 워털루 전투의 패패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대륙의 무수한 청년들을 군복 속의 주검으로 만들었다. 
  또한 독살의 의문이 가시지 않는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그의 죽음은 프랑스를 넘어 러시아를 포함한 온 유럽에 걸쳐 역사가와 호사가들의 후일담에 소재를 제공하였다. 
  한편 19세기 유럽의 많은 소설가들은 그들의 젊은 등장인물들에게, 나폴레옹의 영광에 심취하거나 그 성취와 성공의 전례 앞에서 동기부여 받거나 간혹 그를 폄하하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 작품 속의 청년들 중 몇몇은 어김없이 나폴레옹적인 야망과 권력의지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나폴레옹의 이러한 명성은 그 이름이 후세에 하나의 토포스로 자리잡게 하기에 충분히 크고 넓은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나폴레옹 스스로가 후세의 유럽인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각인하게 될 문화적 혹은 대중적 영향력의 크기와 깊이를 짐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받게 될 찬사와 숭앙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세인트 헬레나의 기록』이라는 저작을 남겨 나폴레옹의 말들을 후세에 전한 엠마뉘엘 드 라스 카즈에 따르면, 유배된 나폴레옹은 마치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난 작가들이 언급하는 단골 소재가 되게끔 되어있어. 그렇지만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든 두렵지는 않아. 무슨 소리를 하든 그들은 기껏해야 단단한 화강암에 붙어 앉은 먼지가루들 같은 존재이겠지. 그들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어 할 것인 만큼 결국엔 나를 찬양하게 될 거야” (엠마뉘엘 드 라스 카즈, 『세인트 헬레나의 기록』)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프랑스와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의 영향력은 이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큰 격랑을 겪은 것은 당시만 해도 유럽의 낙후된 변방이었던 러시아였다. 나폴레옹과 러시아는 1812년 양국 간의 전쟁을 통해 일차적인 관계를 맺게 되지만, 이 전쟁은 이후 제정 러시아 사회의 근본적인 체계를 뒤흔든 중요한 사건이자, 러시아 문화사에 가장 강력한 변혁을 준 토포스로 나타난다. 
  가난하고 낙후된 후진 농업국이었던 러시아는 17세기에 이르러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에 따른 급진적인 개혁과, 계몽 군주로서 유럽 문물, 특히 프랑스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통치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바탕위에 이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사이의 러시아 문화는 외부의 강력한 자극에 의해 다시 한 번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바로 그 중심에 1812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와의 전쟁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쪽에서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러시아 쪽에서는 조국전쟁 (혹은 ‘나폴레옹 전쟁’) 이라고 일컫는 1812년의 이 전쟁은 19세기 러시아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가장 중요한 토포스중의 하나이다.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쟁은 의외로 러시아의 승리로 끝이 나면서 나폴레옹에게는 몰락을, 유럽의 변방에 있던 러시아에게는 강대국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틀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쟁이 러시아 사회에 끼친 보다 중요한 영향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문물을 폭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러시아군의 승리로 파리까지 직접 입성한 젊은 귀족 장교들은 이제껏 책과 지인들을 통해 듣던 유럽 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돌아와서 프랑스 문물 수입의 직접적인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무도회, 결투, 살롱 등의 귀족 문화를 비롯해 음식, 옷 등의 생활관습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선진화된 프랑스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수용, 러시아 귀족 사회에 전파하여 단기간에 프랑스 문물의 급속적인 확산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양적인 문물의 수용이 아니라 젊은 장교들이 프랑스 사회를 보고 느꼈던 자유로운 분위기와 사상을 통해 조국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의 낙후성, 억압성, 폐쇄성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1825년 ‘귀족들의 혁명’, 혹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까지 이어지면서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정신적 자각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따라서 1812년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을 이끌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프랑스 문물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매개체이며, 러시아 지식인들의 정신적 자각을 일깨운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토포스를 이룬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혼자서 세상을 뒤흔든 입지전적인 큰 인물’. 나폴레옹 토포스의 함의는 그 자체로 충분히 대중적인 것이었다. 토포스의 그러한 일상적 성격은 당대의 역사가들을 우선 움직였다. 『세인트헬레나 비망록』을 쓴 프랑스의 역사가 라스 카즈 백작은 섬에 갇힌 자신의 영웅을 돌려받기 위해 1818년 영국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 시도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아직도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는 『예술의 역사』라는 저작을 남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미술사가이자 문필가인 엘리 포르는 나폴레옹을 “근대를 부른 선지자”로 여겨 『나폴레옹』을 저술한다. 포르의 이 책은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 아벨 강스로 하여금 배우 알베르 디외도네를 동원하여 동명의 영화를 찍게 한다. 그리고 약 20년 후 유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영화산업자들은 그 무성영화에 음성더빙 작업을 추가하는 수고를 더하기도 하였다.
  강철 같은 의지의 도전, 성취, 패배, 좌절, 감금, 탈출, 극적인 재기, 패퇴와 유배를 반복한 나폴레옹에게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본 것은 빅토르 위고를 위시한 프랑스의 낭만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낸 것처럼 세상에 없던 ‘자유’와 신분으로부터의 ‘평등’을 훔쳐내 인간들에게 가져다주어 그 맛을 보게 한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유럽 대륙의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공통된 희망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그들을 대표하여 위고는 자신의 문학과 삶에서 시종일관 나폴레옹의 옹호자를 자처하였다. 『Les Orientales XL』 (1829)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래도 그분이야 ! 어딜 가나 그분이야 ! 살아있을 때나 차갑게 식은 지금이나,
그의 모습은 끊임없이 내 사유를 흔들어 깨워.
그분은 내 정신에 창조의 바람을 불어 넣어.
그분의 거대한 이름이 후광을 두른 채 내 詩에 우뚝선 그 높이로 들어설 때
내 몸은 부르르 떨리며 내 입에 말들이 가득 고이지.” (위고, 『Les Orientales XL』, 1829)

  그러나 프랑스 문학사에서 보나파르트의 의지과 출세에의 야망을 체화한 인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탕달의 쥘리앵 소렐일 것이다. 붉은 군복을 입을까 검은 신부복의 길로 나아갈까를 망설이는 평민 출신의 이 젊은이는 그러나 자신의 모델만큼 인간적인 감정사를 냉정하게 제어하지도 못하며 치밀하게 주변을 조율하지도 못한다. 흔히 베일리슴이라 지칭되는, 청춘의 정열과 에너지를 의미 있는 삶의 한 요소로 믿는 작가 스탕달의 가치관이 나폴레옹의 영웅적 행적과 만나는 장면은 그의 소설 『파르마의 수도원』의 주인공 파브리스 델 동고가 연출한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군대에 동참하기 위해 선뜻 프랑스로 떠나는 파브리스의 모습은 소설의 독자에게 먼 옛날의 기사도적 열정과 동경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이들과는 조금 다르게 발자크는, 나폴레옹에게서 결코 ‘위대한 우리들의 대장, 찢긴 국토에 평화를 가져다준 자, 새로운 프랑스의 초석을 마련한 자 또는 혁명의 완성자’ 등의 이미지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을 ‘힘의 지배자, 의지의 전형, 타고난 전제군주 혹은 치밀한 완벽주의자’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발자크가 그의 소설 속에 이러한 자신의 평가와 입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나폴레옹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당대의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인물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은 여전히 기적의 영웅이며 신이 내린 프랑스의 전사였으며 극복과 성취의 모델이었다. 발자크의 수많은 소설들 속에서 그는 당대의 일반인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비친 바 그대로 “병사들의 아버지”, “프랑스인들의 수호자” 또는 “모든 사람들의 황제”였다.
  나폴레옹에 대한 발자크의 이러한 이해 및 그에 따른 나폴레옹 상(像)은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두 인물 보트랭과 라스티냑에게서도 간접적으로 그 음영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전쟁에서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사회라는 정글에서 펼쳐야 할 유효한 전술들과 그 구사를 위한 기회 포착 따위를 순수한 청년 라스티냑에게 일러주는 보트랭은 어설픈 규범이나 도덕률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목표만을 향하여 살쾡이처럼 접근하여 기어이 쟁취할 것만을 권한다. 또 라스티냑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을 직시하여 이전의 젊고 순수한 정열을 기어이 도전에의 야망과 의지로 전환시키고야 만다. 이와 같이 설정되고 형상화된 두 인물은 당대에 이미 들어선 나폴레옹이라는 토포스를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훨씬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음악의 영역에서 발현된 나폴레옹은 정작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기껏 베를리오즈가 그의 <테 데움>을 황제의 이름 앞에 바친 것 정도인데, 이는 음악 예술 자체가 시각적 형태나 언어로 표현되지 않고 주로 절대 추상의 영역인 소리의 멜로디와 시간의 분할과 리듬으로 구성되는 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작품 외적인 후일담의 형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비록 프랑스는 아니지만), 베토벤의 교향곡 3 번의 경우이다. 애초에 표지에 “보나파르트”라고 친필로 기재되어 있는 악보를 대사관을 통해 나폴레옹에게 전달하려 계획했으나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에 실망하고 분개하여 표지를 찢어버리고 곡의 표제를 ‘에로이카’로 변경한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쨌거나, 3악장의 빠른 행진곡을 들으면서 자유 평등 형제애의 기치를 높이든 혁명군의 전진하는 발자국소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일 것이다.
영화 및 영상물의 생산이 나폴레옹에 얼마나 크게 기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과 관련된 필모그라피를 일별하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정도이다. 뤼미에르형제가 이 예술 형식을 개발한 이래 2007년에 이르도록, 등장인물로서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영화를 세어보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것들을 합쳐 얼추 150 편의 영화에 달한다. 물론 뤼미에르형제도 여기서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1897년에 이미 <나폴레옹과 교황의 만남>라는 ‘활동사진’을 제작한 바 있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인들의 애국심 및 긍지를 아래에 깔고 성립된 하나의 토포스 나폴레옹은 매우 드물게도 하나의 개인과 그 삶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일정한 역사적 지리적 조건하에서 펼쳐진 가장 극적인 한 실존의 전개의 실례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듯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 이름은 하나의 고유명사에 그치기보다는 오히려 ‘승리의 영웅’, ‘걸출한 정복자’를 의미하는 하나의 뚜렷한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19 세기 이후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갖게 되는 이미지는 대체로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자신만을 주체로 등극시키고 종국에는 모든 타인들과 주변 세계 일체를 대상화하기에 이르는 전제적인 황제로서의 나폴레옹, 야망과 권력의지의 화신으로서의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제의 잔존 위협을 강력한 힘으로 일소해 버림으로써 평민들의 우상이 되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시민사회의 공화정을 완성하고 확산시킨 대중적 자부심의 표상으로 기억되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처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두 상반된 평가의 사회역사적 쟁점으로서의 성격이 오히려 문화적 토포스로서의 ‘나폴레옹’을 특징짓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나폴레옹이 러시아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807년 7월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틸지트 조약’을 통해서이다. 1807년 6월 14일 러시아는 프러시아의 프리들란트에서 프랑스군에게 패함으로써 같은 해 7월 7일 틸지트에서 프랑스와 굴욕적인 ‘틸지트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프로이센 영토의 일부분을 프랑스에 건네주었고, 영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대륙 봉쇄령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였다. 조약 당시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수모와 모욕을 줌으로서 러시아 사회를 자극 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럽을 정복해나가던 나폴레옹의 명성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익히 인지되었지만 자신들의 황제와 국가에 수모와 굴욕을 안긴 ‘틸지트 조약’을 통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은 ‘정복자, 독재자’로 각인되었다. 틸지트 조약이 러시아 사회에 준 굴욕은 푸시킨의 시 『나폴레옹』(1821)에도 묘사되고 있다.

“보라, 부끄러운 위용 자랑하며 / 거대한 우상이 유럽의 가슴 짓밟았다.
틸지트...! 이 욕된 이름을 들어도 이제 러시아 인은 놀라지 않는다.” 
(푸시킨, 『나폴레옹』, 1821)

  이후, 1812년 나폴레옹의 직접적인 침공으로 러시아인들에게 나폴레옹은 당연히 야만적인 침략자의 형상으로 남게 되었다. 러시아 문학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푸시킨의 시를 통해서이다. 푸시킨은 조국전쟁과 나폴레옹에 관한 시를 세 편 정도 썼는데, 『차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회상』(1814), 『엘바섬의 나폴레옹』(1815), 『나폴레옹』 (1821)이 그것이다. 
  푸시킨이 리체이(황립 귀족 사립학교) 시절 발표한 초기 시인 『차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회상』에서는 조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대의 야만성과 러시아 군인들의 용맹성과 애국심이 그려지고 있는데, 특히 푸시킨은 나폴레옹을 야만적이며 교활한 침략자로 묘사하고 있다.

“계략과 파렴치로 왕관을 쓴 황제 / 그 횡포한 손바닥에서 피묻은 검이 번득여
온 세상에 천벌이 내리고 / ... / 정의의 목소리와 신앙과 법률을 무시하고
총칼로 왕위를 뒤엎으려고 교만스레 꿈꾸던 자여” (푸시킨, 『차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회상』, 1812)

  전쟁 이후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푸시킨은 이 시에서 조국의 승리를 찬양함과 동시에 나폴레옹과 프랑스 군대에 대한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다. 이것은 비단 푸시킨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의 대규모 전쟁을 치르고 난 후, 자연스레 생성된 러시아 전체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푸시킨의 나폴레옹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당시 진보적인 그룹에서는 공감을 얻지 못했는데, 그것은 당대 러시아 사회가 나폴레옹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이중적인 잣대에 기인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1812년 전쟁은 19세기 러시아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프랑스 문물의 폭발적인 수용이며, 더불어 프랑스 사회에 퍼져 있던 자유, 진보적인 사상이 전쟁에 참가했던 젊은 귀족 장교들을 각성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폴레옹에게 자신들의 조국을 침략한 침략자 ‘나폴레옹’의 형상과는 별개로 민중을 해방시킨 ‘혁명의 아들’이자, ‘유럽 봉건주의를 무너뜨린 ’해방자’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운명적인 영웅’, 자신의 강력한 의지의 힘으로 세계를 뒤흔든 ‘악마적인 천재’라는 낭만적인 후광이 더해져 러시아 사회에서는 나폴레옹에 대한 독특한 토포스가 형성되었다. 
  1812년 전쟁과 나폴레옹의 이러한 영향은 1825년 12월 발생한 러시아 최초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직접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서유럽의 자유사상을 접한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들이 귀족 정치를 반대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1812년의 자식들’이라고도 불리는 데카브리스트 당원들에게도 나폴레옹의 형상은 이중적이었다. 
  데카브리스트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원들은 두 가지 정치적 경향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즉, 모든 혁명적 변화가 엄격히 민주적인 절차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한 경향과, 혁명적인 독재의 필요성을 고수하는 급진적인 경향이었다. 온건파들은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혁명독재가 군사독재로 변했음을 지적하면서 영웅독재의 위험성을 경고한 반면, 급진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인한 지도자와 급진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 사이의 나폴레옹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인식은 나폴레옹에 대한 푸시킨의 시 『나폴레옹』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노예들 가운데 기뻐 날뛰며 / 권력의 갈증을 해소시킨 너
국민군의 사슬을 월계수로 장식하여 / 전쟁터로 내몰았다.
... 그를 칭송하라, 그는 러시아 민중에게 / 숭고한 운명을 보여주고
어두운 유배지에서 /
세상에 영원한 자유를 물려주었으니까.” 
(푸시킨, 『나폴레옹』, 1821)

  실제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패배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1821년 사망한다. 나폴레옹 사망 뒤, 러시아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히 그에 대한 기억들이 약화되었지만,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은 아주 흥미로운 형상으로 재정립된다. 즉, 19세기 초반 러시아 사회에서 나폴레옹이 ‘침략자, 정복자’, 혹은 ‘민중의 해방자’, ‘구체제 전복의 영웅’이라는 토포스를 형성했다면,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사회에서 나폴레옹은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문학과 사상의 양축을 이루고 있었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1869)는 1812년 전쟁과 나폴레옹을 직접적인 소재로 사용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기본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나폴레옹에 대해 냉혹한 침략자의 형상을 부여하고 있으며, 러시아 군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 민중은 전쟁을 이끈 승리자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작가는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의 승리를 민중의 도덕적 정신의 승리로 해석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나폴레옹주의에 빠져 있던 당대 러시아 귀족들 (“모든 사람들은 늘 보나파르트에게 열중했다. 모든 사람들은 육군 중위 출신의 그가 어떻게 황제가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전쟁과 평화』)을 비판하면서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의 정신세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는 한 평생 마지막 날까지도 선도 미도 진도, 또 자기 행위의 의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행위는 그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선과 정의에 반대되고 너무나 모든 인간다운 점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절반으로부터 찬미를 받은 자신의 행위를 부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의라든지 선이라든지 그 밖의 모든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9)

  즉,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의 패배를 단순히 전쟁의 패배가 아니라, 정신적, 도덕적, 관념적인 패배로 보았고, 그 패배의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 민중의 도덕적 우월성, 이타주의, 자연 숭배를 강조하면서 러시아 사회가 진정으로 나아가야 방향을 제시하였다. 
  『전쟁과 평화』에 나타난 나폴레옹주의와 러시아 민중성의 대립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1866)에서 이른바 ‘초인사상’과 ‘기독교적 구원 사상’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그가 노파를 살해한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노파는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며 그녀를 죽임으로서 사회가 더 유익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초인사상’이 시작된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인류는 '나폴레옹'과 '이(蝨)'로 분류된다. 즉 라스콜리니코프는 인류를 선악을 초월하고 나아가서 스스로가 바로 법률이나 다름없는 비범하고 강력한 소수의 인간과 인습적 도덕에 얽매이는 약하고 평범한 다수의 인간으로 분류한다. 그는 자신이 전자에 속하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 마리의 이에 불과한 무자비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죽인다.

“아주 긴 이야기입니다, 아브도찌야 로마노브나. 여기에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일종의 이론이 개재되어 있는데, 내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예를 들어 본질적인 목적만 정당하다면 한번 정도의 악행은 허용될 수 있다는 그런 식의 이론입니다. 단 한 번의 악과 수백 가지의 선행이라는 거지요!”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866)

  그리고 이러한 이론의 출발점이 바로 나폴레옹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실제 도스토옙스키는 몇 가지 실화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는데, 그 중의 하나가 1835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나폴레옹을 자칭하는 자가 두 모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작품에서 자신이 나폴레옹을 따르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난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지. 그래서 죽였어••••••. 자, 이제 이해할 수 있겠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861)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가 나폴레옹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러시아 민중의 힘이라고 설파하였다면, 『죄와 벌』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나폴레옹주의를 평범한 사람, 기독교적 구원 사상을 대표하는 ‘소냐’를 통해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나타난 나폴레옹과 그와 대비되는 러시아 민중, 러시아 정교의 정신은 19세기 중후반의 혼돈스럽고 이중적인 러시아 사회상의 함축적인 의미로도 파악할 수 있다. 실제,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사회는 급속한 자본주의화로 물질적 탐욕, 이기주의, 출세 지향적 사회가 형성이 되면서 정신적, 도덕적 혼란이 가중되었던 시기였다. 즉, 작가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했던 유럽식 합리주의, 자본주의, 출세 지향적 욕구를 나폴레옹이라는 상징적 형상을 전면에 내세우며 비판하면서 러시아 사회가 나아가야할 이상적 지향점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매우 드물게도 ‘나폴레옹’은 역사상 실존한 하나의 개인 신분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에서 하나의 문화적 토포스로 형성되었다. 그 이름은 프랑스 러시아 양국을 넘어 근대의 모든 유럽인들에게 일정한 정서적, 역사적 혹은 사회적 함의를 갖는 이름이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나폴레옹은 우선, 자국인이다. 귀족이 되었든 농민이건 프랑스인에게 그 이름은 그 집단 내에서는 ‘나와는 다른 유별난 타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타인은 혁명군의 장군에서 황제로, 또 찬란한 정복자에서 씁쓸한 패퇴의 운명적 주인공으로 바뀜에 따라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달라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귀족이냐 평민이냐에 따라 그 이름은 권력의 찬탈자이자 야만적 폭압 군주로서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혹은 자유와 평등과 진보를 가져다준 영웅으로서 환호와 열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19세기의 많은 프랑스 무명 청년들에게 그 이름은 ‘성공한 삶’의 롤모델이 되어 주었다. 
  게다가, 눈을 국경 넘어 유럽 전역으로 돌리게 될 때,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에게 나폴레옹은 ‘자랑스런 문화 대국 우리 프랑스’의 표현이 되어주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폴레옹은 유럽을 결코 ‘정복’한 침략 장군이 아니라 미개한 주변 지역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가져다줌으로써 각각의 구체제 왕정을 타도할 수 있는 동력과 계기를 선사한 전도사였을 뿐이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 체제로 전환된 이후의 유럽을 사는 역사적 실존들에게 일정한 정도의 국가주의는 그들의 의식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민중들과 작가들에게 나폴레옹은 훨씬 더 복합적인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그 환기와 의미의 복합성은 천재 푸시킨에게마저도 양가적 감정을 안긴다. 어쩌면 푸시킨이 내보인 그 분열된 반응은 차라리 정직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양가적 감정의 기원에는 1812년의 전쟁이 있다. 애초에 나폴레옹의 이름은 러시아인들에게 ‘침략자’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 폭력을 이겨낸 군인들, 장교들 그리고 민중들에게 나폴레옹은 슬라브의 집단적 자부심을 확인시켜준 계기였다. 
  이러한 의미의 일차적인 자의식으로부터 젊은 장교와 청년들 그리고 지식인들로 하여금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난이었다. 최초의 진보적 혁명을 이끌기 위한 그들로서는 ‘평민의 제왕’ 혹은 ‘공화국의 영웅’ 나폴레옹이 갖는 일정한 역사적 의미를 긍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서유럽 세계를 향한 동경과 선망의 집단적 정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 동경과 선망을 극복할 때에야 러시아의 희망을, 그 민중들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는 나폴레옹들과 이(蝨)들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른바 ‘초인’사상은 톨스토이가 볼 때는 매우 미성숙하고 위험한 관념이었다.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나폴레옹 토포스는 프랑스 러시아 양국에 각각의 이중적인 의미로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나폴레옹’에 대해 양국 언중이 갖는 정서적 양가성의 구체적 내용은 각각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관 토포스 귀족; 부르주아; 영웅; 전쟁; 지식인; 혁명; 1812 전쟁
참고자료(프랑스) François Antommarchi, Les Derniers Moments de Napoléon, Éd. Buchet/Chastel, 1975
Jean-Antoine Chaptal, Mes souvenirs sur Napoléon, Plon/Nourrit, Paris, 1893 ;
Emmanuel de Las Cases, Le Mémorial de Sainte-Hélène , Gallimard, 1956
Jacques Bainville, Napoléon, 1931. Réédité Godefroy de Bouillon, Paris, 1995.
André Suarès, Vues sur Napoléon, Grasset, Paris, 1933.
참고자료(러시아) Верещагин В. 1812. Наполеон в России. М.: 2007.
Геннадьевна М. Образ Наполеона Бонапарта в русской публицистике. 1799-1815 гг. тема диссертации и автореферата, кандидат исторических наук Лобачкова, 2007.
Заборов П. Россия и франция. Литературные и культурные связи. М.: 2010
Лютман М. Ю. Беседы о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е. СПБ.:1994.
Понасенков Е. Правда о войне 1812 года. М.: 2004.
Радзинский Э. Наполеон. Жизнь после смерти. М.: 2007.
Чандлер Д. Военные кампании Наполеона. М.: 1999.
Черкасов П. Россия и Франция 18-20 века. М.: 2010.
추천자료(프랑스) 막스 갈로, 『나폴레옹』, 김정란 옮김, 문학동네, 2002.
서정복, 『나폴레옹 - 위대한 프랑스를 향한 열정』, 살림, 2009.
추천자료(러시아) 도스토옙스키, 『죄와벌』, 박형규 옮김, 누멘, 2010.
푸시킨, 『문학작품집』,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박형규 옮김, 인디북,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