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도시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도시
토포스명(프랑스) ville
토포스명(러시아) город
정의 1. 문명이 발달할수록 도시는 비대해진다.
2. 도시가 발달할수록 도시의 외관은 화려하고 개인은 고립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도시 ‘빌 ville[vil]’의 어원은 역설적이게도 본래 농촌에 있는 넓은 땅을 가리키던 라틴어 ‘villa’이다. 오늘날 프랑스어로 빌라는 시골의 별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라틴어 빌라의 고유한 특성이 독립적인 관계들로 구성된 경제적, 사회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라틴어 villa와, 프랑스어 ville의 개념에는 일관성이 있다. 갈로-로마 시대 이후 중세를 거치면서 점점 더 중요한 기능을 갖게 된 빌은 마을, 촌락을 의미하는 ‘빌라주 village’와 구분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로 발전해왔다. 도시 빌은 경제적, 사회적 공동체라는 점에서 정치적, 종교적 공동체를 의미한 고대의 도시 ‘시테cité’와 구분된다. 시테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폴리스polis’의 정치적 성격을 지시하는 라틴어 ‘키비타스civitas’에서 파생되었다. 모든 시테는 도시 빌과 비슷하지만 그것은 도시 이상의 의미, 즉 도시국가의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어로는 도시와 관련하여 빌과 시테 두 용어가 모두 사용되고 있다. 
  한편 중세 이후 도시의 발달은 시장이 열리는 큰 마을을 의미하는 ‘부르bourg’와 연관해서 논의된다. 부르는 원래 요새나 성채를 의미하는 라틴어 ‘burgus’에서 파생된 말로 본래의 의미는 독일어 ‘Burg’에 보존되어 있다. 부르가 성이나 요새의 의미에서 특정한 형태의 마을의 의미로 변화하는 것은 8세기경부터이다. 고대 로마 도시인 키비타스나 성 또는 수도원 근처에 그리고 일부 농촌 지역에 새로 형성된 마을을 가리키던 ‘부르’는 10세기 이후 알프스 지방, 지중해, 노르망디 지방, 대서양 연안 등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부르주아라 불렀다. 
  인류가 도시를 창조해 온 역사는 5000년에서 7000년으로 추정되며 도시는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건설되어 온 인류 보편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자연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영국의 시인 윌리암 카우퍼(1731~1800), 『임무 1』, 1785)는 표현이 말해주듯, 도시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로 여겨진다. “도시는 예술과 종교, 문화와 통상, 기술이 태어난 곳”이며, “가장 심원하고 지속적인 방법으로 자연환경을 새롭게 바꿀 줄 아는 인류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물”, “인류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들어 낸 최고의 세공품이다.”(조엘 코트킨, 『도시의 역사』, 참조.)
  도시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역사와 일치한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도시들의 흥망성쇠를 목격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때 거대했던 도시들이 대부분 오늘날 왜소해졌다. 그러나 과거에 왜소했던 곳이 내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거대해졌다. 인간의 번영이 같은 장소에서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나는 과거의 도시와 현재의 도시 모두에 똑같이 주의를 기울일 생각이다.” (헤로도토스, 『역사』, 기원전 5세기경)

  역사에 등장했다 소멸한 위대한 도시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도시에 관한 이론은 일반적으로 도시를 형성하는 주된 요인으로 장소의 성스러움, 안전하고 권력을 도모 할 수 있는 여건, 그리고 도시에 활력을 주는 무역통상에 유리한 입지를 든다. 이 요소들이 결집되는 곳에서 도시는 번성하고 이 요소들이 약해질 때 도시는 쇠약해졌다. 위의 세 요소는 각기 서양의 대도시들이 가졌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힘에 상응한다. 
  서양에서 도시라고 불러도 무방한 최초의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는 그리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 충적지대에 위치한 우르와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의 테베와 멤피스를 든다. 이 도시들은 처음에는 씨족단체로 시작하였으나 차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도시국가로 발전해갔다. 기원전 15세기에 만들어진 한 찬가에는 테베를 찬양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테베는 도시라 불린다. 다른 많은 것들이 테베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고 테베의 그림자 안에 자리를 잡는다.”(해몬드, M. 『고대 세계의 도시』에서 재인용.)

  도시국가들이 통합되어 이집트나 고대 바빌로니아와 같은 대제국이 생겨났고 제국의 발상지가 된 도시 지역은 대제국의 통치의 거점이 됨으로써, 도시는 농민의 주거지인 전원과 대조적으로 국왕, 관료, 성직자, 상인 등이 거주하는 집단 거주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고대 오리엔트의 문명이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그리스에도 구릉이나 고지를 거점으로 다수의 촌락이 통합된 정치적 단위, 즉 ‘폴리스’라는 일종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폴리스는 서로 규모는 달랐지만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여 도시부와 전원부로 나누어진 형태를 띠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인 도시부에는 지배층이 거주했으며, 그들은 시민권을 가지고 서로 평등한 자격으로 시정에 참여하는 민주정치를 실시했는데, 대표적인 폴리스가 아테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를 인공물이라기보다 인간 생존의 자연스러운 발현에서 비롯된 자연의 산물로 간주했다.

“몇몇 마을들이 합쳐서 이루어진 공동체가 완벽하게 자치를 하는 수준에 도달하면 그것이 시테이다. 시테에서 삶이 가능해지기만 하면 시테는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모든 시테가 자연적인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355) 

  고대 로마도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8세기경 테베레 강 연안에서 발생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였지만, 여러 도시국가가 통합하여 대제국이 건립되면서 지방의 도시국가들은 로마 제국의 강력한 통치를 받게 되었다. 수도인 로마는 지배의 거점으로서 거대도시로 성장했고, 이후 5백 년에 걸쳐 최전성기에는 영국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과 인구 5천만을 통치하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경구를 만들어낼 만큼 거대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의 자부심을 네로 황제의 충신 페트로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전 세계는 의기양양한 로마인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
그들은 대지와 바다와 별들의 벌판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페트로니우스, 20~66)

  그보다 1세기 전 정치가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도 로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이곳이 내 종교이고 이곳이 내 인종이며 이곳이 조상들이 남긴 흔적이다.”, “나는 내가 여기서 느끼는 매력을, 내 마음과 감각에 파고드는 매력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라고 표현했다.(조엘 코트킨, 『도시의 역사』에서 재인용.) 로마는 그들이 정복하고 통치한 지역에 도시 건설의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로마화는 곧 선진적인 도시화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가 건설한 지방 도시들은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식민도시, 변경지대에 건설한 요새라 불리는 병영도시, 상업도시가 그것이다. 이 도시들이 보장하는 치안과 안전과 부의 가능성은 유럽 곳곳에 로마식 도시를 전파했다. 
  2세기 그리스 작가 아르스테이데스(117~189)는 “로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주민으로 데리고 있는 요새다.”라고 표현했고, 161년에 황제에 등극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로마의 사명은 넓은 의미에서 당시 알려진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마의 번영은 신전, 사원, 도서관, 목욕탕, 가운데 전승기념비가 세워진 중앙의 큰 광장,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인 동시에 재판이나 정치 집회가 열리는 공공장소로 기능을 점점 넓혀간 포럼(그리스의 아고라)을 통해 표출되었다. (조엘 코트킨, 『도시의 역사』, 참조.) 
  한편 로마의 번영이 만든 도시의 이미지는 로마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탐욕과 타락의 온상으로서 신을 저버린 인간들의 도시라는 이미지와 명백히 대조를 이룬다. 창세기에 의하면 최초의 도시는 아담과 이브의 자식으로 동생인 아벨을 살해하고 에덴에서 쫓겨나 떠돌아다니던 카인이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정착하여 세운 도시이다. 프랑스 신학자 자크 엘륄은 이 창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카인이 “하느님의 에덴을 자신의 도시로 대체”했고, 그 때문에 카인은 신의 은총에서 벗어나 추락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 즉 도시를 창조한 최초의 인간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자크 엘륄, 『대도시의 성서적 의미』, 참조 및 재인용.) 카인의 죄에서 비롯된 놋 땅은 타락과 폭력에 얼룩지고 결국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대홍수에 쓸려가는 벌을 받았다.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로도 성서에서 인간이 건설한 도시는 바빌론(바벨탑 신화), 예루살렘까지 모두 파괴되는 역사를 겪었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신의 계획을 벗어난 인간의 창조물 도시의 불가능성을 주지시켰다. 
  기독교는 인간의 도시 건설을 창조주인 신에 대적하는 위험한 행위로 간주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413~427)에서 로마를 인간의 권력과 물질적 번영, 도시에 깃든 타락 때문에 징벌 받아 마땅한 속세의 도시로 묘사하며, “인간의 지혜는 없고 오로지 믿음만 있는” 하느님의 도시,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을 로마인들에게 강권했다. 
  고대 도시들이 쇠퇴하고 서구 근대도시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중세 도시들이 등장한 것은 11세기경이다. 일반적으로 서유럽 도시이론가들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자치권을 획득한 중세의 상업도시가 서유럽 특유의 자유주의 전통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이후 근대 유럽 민주주의에 초석을 놓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된 시기는 특히 19세기인데, 이는 프랑스의 역사가들이 정치적인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지의 기원을 중세 도시에서 찾은 데서 연유한다. 중세의 도시 자치를 위한 코뮌 운동이 봉건제를 타도하려는 혁명적인 성격을 띠었고 이것이 도시의 자유를 쟁취하게 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한편 칼 마르크스처럼 경제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중세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나 수공업이 발전했고 이것이 봉건적인 농촌사회를 변화시키며 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중세 도시에서 근대성의 뿌리를 찾는 데서는 일치한다. 
  『중세 도시』(1925)의 저자 앙리 피렌은 이러한 연구를 포괄하여 도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상인과 수공업자로 구성된 도시민과 자율적 도시 공동체인 코뮌 조직을 내세웠다. 도시에서 핵심적 기능을 수행한 이들은 부르에 사는 사람 즉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도시민 집단이었다. 이들은 농노제의 예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신체의 자유, 봉건적 관할권에서 벗어나게 할 도시법과 법정, 자유로운 재산권의 확립을 주장했고 시민들의 자율적 공동체인 코뮌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강철구, 「유럽의 중세도시와 자유」, 참조.) 
  10세기에 ‘부르’라는 용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있지 않은 촌락”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부르의 주민들은 군역이나 부역, 인두세 등을 면제받는 경우가 많았고, 부르를 관할하는 영주가 있었지만 직접 행사하는 재판권이 아닌 벌금 징수권만 가졌기 때문에 부르에는 독립적인 재판권이 있었다. 부르의 개방성과 이러한 특권들은 상당한 흡인력으로 작용했다. 특히 성 주변에 형성된 부르의 경우 영주가 필요한 노동력과 이윤을 부르에서 확보하고, 성의 주민들은 부르의 시장과 종교시설을 이용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부르의 발전 가능성은 점점 더 커졌다. 12세기 중엽에는 성벽 밖의 부르주아와 성벽 안의 주민을 포괄하는 시민공동체가 형성되었다.(강일휴, 「중세 프랑스의 bourg와 도시의 형성」, 참조.) 
  부르의 특권들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재산권이었다. 도시민은 영주에 예속된 농민과 달리 토지재산을 제한 없이 양도하고 또 상속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장원에서 농노가 보유하는 토지에 부역이 따르는 것과 달리 부르에서는 토지를 소유해도 정해진 재산세만 납부하면 되었다. 이러한 특권을 바탕으로 도시는 행정 관리를 직접 선출하고 도시에만 적용되는 법률을 따로 마련하면서 독립적, 자율적이 되어갔다. 
영주에 예속되어 있던 농민들은 도시가 보장해주는 법적, 사회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차츰 농촌을 떠났고, 신분의 제약이 없는 귀족들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더 강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도시의 자유를 필요로 했다. 도시의 발전은 행정 업무와 이를 처리할 전문가에 대한 수요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도 설립되었다. 기존 학문의 영역을 벗어나는 새로운 전문지식의 필요는 자유로운 사고로 새로운 사상을 창출하는 신지식인들을 양산했다. 주로 부유한 도시 상공인 계층의 자식들이 그러한 교육을 받으면서 중세의 대학교육은 발전을 거듭했다. 이러한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13세기경에는 신학연구를 위한 예비과목인 전통 삼학(三學)(문법, 수사학, 변증법) 외에도 ‘산수, 기하, 음악, 천문’이라는 사과(四科)가 중세 대학 교양학부의 주요 교과내용으로 신설되었다.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프랑스 속담)

  재물과 학문이 집중되고 정치적 자율권까지 획득한 도시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베네치아, 피렌체로 대표되는 이탈리아의 신흥 도시들이 상업과 제조업, 은행업, 무역업의 발달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패권을 차지했다. 근대적인 형태의 새로운 도시 피렌체를 일으킨 메디치 가문의 목표는 신앙의 전파나 거대한 제국의 건설이 아니라,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도시를 위해 최대한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조엘 코트킨, 『도시의 역사』 참조.) 14세기 교육의 중심지였던 볼로냐의 한 법학도는 이미 당시의 노골적인 물질주의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돈이 사람을 만들고
돈이 멍청한 이를 총명한 이로 여기게 하며
돈이 죄로 가득 찬 보물창고를 사고
돈이 자랑을 하는구나.” (앙리 피렌, 『중세의 도시』에서 재인용.)

  물질만능주의가 가져올 폐단에 대한 경고는 단테에게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과 갑자기 불어난 이익은, 
피렌체여, 그대 안에 오만과 무절제를 잉태시켰고
그리하여 그대는 그 때문에 울게 되었구려.” (단테, 『신곡』, 1321)

  시민공동체의 형태로 출발한 도시의 기반은 무엇보다 엄청나게 축적된 부였다. 또한 도시는 출신과 성분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동의 협약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고대의 윤리적 응집력이나 중세의 종교적 결집력이 들어설 여지가 적었다. 따라서 도시가 더 풍요로워지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며 비대해질수록, 도시의 유지에 필요한 내적 응집력과 시민 정신은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시가 발달하여 인구가 증가할수록 위생과 치안, 주거문제 같은 도시의 고질적인 병폐들도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화려했던 고대의 도시 로마에서부터 도시생활의 불안과 불행에 대한 탄식이 이어져온 것은 이 때문이다. 풍자 작가 주베날리스는 로마의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도시의) 침실에서 자는 잠은 어떠한가? 짐마차들이 비좁고 꾸불꾸불한 거리를 지나가고 가축 상인들의 욕설이 잦아들기 전까지는 바다표범이나 클라우디우스 황제라도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주베날리스, 『풍자』, 90~127)

여유롭고 인간적인 시골의 삶과 대조적인 풍요롭지만 불안한 도시의 삶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라틴의 오랜 속담에도 나타나있다.

“도시에서 남을 위해 살지 말고 시골에서 너 자신을 위해 살라.” (라틴 속담)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도시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고로드 город [gorod]’의 어원은 ‘울타리, 담장’라는 뜻의 공통슬라브어 ‘고르드 gordъ’에서 유래된 고대슬라브어 ‘그라드 градъ’이다. 공통슬라브어 ‘고르드’는 인도-유럽어족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오늘날 ‘정원’으로 해석되는 독일어의 ‘가르텐 garten’, 영어의 ‘가든 garden’의 애초의 뜻도 ‘울타리, 담장’이었다. 
  러시아어의 도시 ‘고로드’는 그 기원에서 ‘방어, 보호’의 의미가 강조되어 이후에는 ‘울타리, 담으로 경계 지어진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 ‘성벽으로 둘러싼 거대한 집단 거주지’를 ‘고로드’라고 일컫게 되었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러시아 도시는 753년에 건설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루시의 첫 번째 수도인 ‘스타라야 라도가’이다. 그러나 ‘스타라야 라도가’는 도시를 의미하는 ‘고로드’로 불리지 않았고, ‘촌락, 집단 거주지’를 의미하는 ‘셀로 село’로 불렸다. ‘고로드’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859년에 건설된 ‘노브고로드’이다. 러시아 북서 지방의 볼호프 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노브고로드의 최초의 지배자는 바랑기아인(동유럽에 진출한 바이킹족의 하나로 추정)이었던 류리크였다. 879년에 류리크가 죽고 나자 그의 후계자였던 올레그는 키예프로 수도를 옮겨 키예프 루시를 건국하였고, 대다수의 바랑기아인들과 슬라브족들은 키예프로 이주하게 된다.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 나머지 슬라브족들은 볼호프 강 하구 쪽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고, 자신들의 거주지를 ‘새로운 도시’라는 뜻을 지닌 ‘노브고로드(노브이-새로운, 고로드-도시)’라고 명명하였다. 
  중세 러시아 시대로 접어들면서 도시의 숫자는 급속도록 확산된다. 10세기경 도시는 약 25개 정도였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노브고로드, 키예프, 수즈달, 블라지미르 등과 같은 도시를 포함하여 약 300여 개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중세 러시아 도시들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거주민들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규모가 확장되면서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수공업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도시는 경제 활동의 중심지로 전환되었고, 이것은 이후 셀로(촌락)와 도시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되었다. 이 밖에 도시는 주변 셀로 지역들을 지배하는 정치, 교육, 종교의 중심지가 되면서 그 규모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중세 러시아 도시들은 13세기 무렵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약 200년에 걸친 몽골의 침입과 압제로 러시아의 모든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이것은 이후 도시의 기능이 경제 활동의 중심지에서 다시금 방어, 보호의 기능으로 전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전까지 도시의 주거주민이었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숫자와 그들의 영토가 줄어들게 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강력한 군대를 가진 공후의 세력이 강화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주종 관계가 형성되면서 봉건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도시가 재도약한 시기는 몽골의 압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14세기 중반이며, 그 중심에는 새롭게 러시아의 패권을 차지한 도시 모스크바가 등장하게 되었다. 
  『원초연대기』에 1147년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모스크바는 1156년에 로스토프 출신의 돌고루키가 목재로 요새를 두른 크레믈린을 건설하면서 도시의 기반을 다졌고, 몽골의 압제가 끝나갈 무렵 모스크바는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327년에 블라지미르-수즈달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모스크바가 이전의 러시아 도시들과 다른 점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주변 도시 공국들을 점령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이라는 강력한 도시국가를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모스크바는 15세기 말 이반 3세 시절에 공국의 위치를 벗어나 ‘국가’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대러시아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서유럽의 중세도시들이 한 국가 안에서 비교적 균등하게 발전한 것과는 달리, 모스크바는 여타의 러시아의 도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공업, 수공업, 무기, 직물 산업들을 발전시켜 거대한 도시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모스크바가 강력한 도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모스크바 제3로마설’이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소피아 공주가 러시아의 이반 3세와 결혼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문물과 동방정교의 본거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비잔틴 제국의 문양이었던 ‘쌍독수리’ 문양을 사용하였고, 1547년 이반 4세 때에는 황제의 칭호인 ‘차르’를 (로마 황제의 칭호였던 ‘카이사르’에서 유래)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을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이민족에 의해 멸망해버린 로마(제1로마)와 콘스탄티노플(제2로마)에 이어 모스크바를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제3로마’, ‘새 예루살렘’으로 칭하면서 모스크바를 성스러운 도시로 여겼다. 이후 모스크바는 1917년 혁명으로 성당들이 파괴되기 전까지 약 1600개의 정교회 성당이 도시에 자리 잡게 되면서 정교의 도시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17세기 말까지 독점적인 지위를 가졌던 모스크바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되면서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1682년 러시아의 황제가 된 표트르 대제는 낙후된 러시아를 개혁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 유럽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데,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의 중심에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등장한다.
  1703년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74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핀란드만 근처의 늪지대를 개척하여 요새를 만들고, 전쟁에 승리한 후 본격적으로 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해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한다.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이전의 러시아 도시들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특성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철저히 유럽식으로 지어진 계획적인 인공 도시라는 점이다.
  페테르부르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모스크바와 흥미로운 대조가 된다. 모스크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특히 당시의 건축 자재는 나무가 주가 되었기에 ‘목조의 도시’라는 별칭이 있는 반면, 페테르부르크는 모든 건축물을 돌을 사용하여 철저히 계획적으로 단기간에 형성된 ‘석조의 도시’이자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개발이라는 근대적 도시의 개념을 보여준다. 
  또한 수도를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의 본거지는 모스크바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며, 황제의 즉위식도 대주교의 집전 아래 모스크바에서 거행되곤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모스크바는 러시아인에게서 종교적이며 전통적인 러시아 도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이후 슬라브주의자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표트르 대제가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한 목적은 전통적, 정교적 러시아를 지양하고 유럽의 문물에 바탕을 둔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으로 향한 창’이라는 별칭과 함께 서구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상트-성자, 페테르-베드로, 부르크-도시, 요새라는 독일어에서 유래) 그 이름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러시아는 약 400년간 수도였던 모스크바를 신도시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기득권 상실을 염려한 모스크바의 귀족들, 정교회 세력들과 표트르 대제 간의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강력한 전제정치로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모스크바 귀족들과 정교회는 표트르 대제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대중들에게 수도 이전이 신의 뜻을 거스른 반종교적 행위라고 선동하였다. 실제로 페테르부르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늪지대를 개간하여 자연과 신의 섭리에 대항하여 인간의 힘으로 건설한 도시이며, 도시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민중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이런 연유로 페테르부르크는 종종 ‘피위에 세워진 도시’, ‘신바빌로니아’, ‘사탄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표트르 대제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반종교적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수호성인인 ‘베드로’의 이름을 붙여 ‘성 베드로의 도시’ 라는 뜻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반석, 돌’이라는 베드로의 이름의 뜻과 연관되어 ‘반석 위의 도시’, 즉 도시 자체가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성스러운 도시의 이미지를 가지기도 한다. 표트르 대제의 이러한 성시화(聖市化) 정책은 이후 도시 건축물에도 영향을 주어 기독교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뱀을 밞고 있는 동상들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는데, 네바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과, 궁전 광장의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 위의 뱀을 밟고 있는 천사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페테르부르크는 선과 악, 빛과 어둠, 인간과 자연의 대립과 공존이라는 기묘한 분위기와 이중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들은 19세기 러시아 문학, 특히 고골리,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한 모티브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이후 페테르부르크는 혁명 후 1918년 3월 12일에 모스크바로 다시 수도가 이전되기 전까지 약 200년 간 제정 러시아의 수도로서 급속한 성장을 하는데, 이미 1811년에는 모스크바의 인구인 27만 명을 넘어 약 30만 명이 거주하는 보유한 러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위상에 관해서 19세기 중반 게르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페테르부르크가 현재 유통되고 있는 동전이라면, 모스크바는 화폐 수집가에는 기가 막힌 소장품이지만 실제로는 유통되지 않는 화폐와 같은 존재이다.”(게르첸,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1857) 

  표트르 대제의 수도 건설 이후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인 1775-1785년에 걸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도시의 수를 급속도로 증가시켰는데, 기존의 232개의 도시에 새로이 165개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19세기 초에는 러시아에 약 400여개의 도시가 러시아에 존재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0세기 카페 왕조가 통치의 중심지로 지목하면서 수도의 입지를 갖게 된 이래로 프랑스에서 파리만큼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아온 도시도 드물 것이다. 프랑스가 서양의 다른 나라들보다 수도 외에 다른 대도시의 성장이 저조한 데는 파리에 권력과 예술과 문화를 집중해온 프랑스 통치자들의 노력이 일조했다. 프랑스에서 도시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1789년 혁명에서 파리 코뮌에 이르기까지 근대 정치혁명의 본산이자, 베르사유 궁의 궁정문화에서부터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모더니즘의 중심지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유럽 문화와 예술의 수도였던 수도 파리를 통해 생겨났다. 
  파리는 12세기에 필립 2세가 도로를 포장하고, 센 강 한복판의 시테 섬에 있던 큰 시장을 센 강 우안으로 옮겨 상가를 정비(레 알이라 이름 붙임)한 이후로 오늘날까지 천년에 걸쳐 프랑스의 심장 역할을 해오고 있다. 13세기에 파리는 도시 주위에 더 튼튼한 성벽을 쌓고 인구 15만을 수용하는, 유럽의 가톨릭 권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했다. 특히 파리는 점점 강해지는 왕권을 토대로 통치가 유리하고 대학이 번성하여 사상의 중심지가 된 장점을 갖고 있었다. 파리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오랜 종교전쟁을 거치고 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앙리 4세가 마침내 왕위에 오른(1594) 16세기 말이다. 당시 파리에 입성하며 앙리 4세가 말한 “파리는 미사를 올릴만한 가치가 있다.”에는 자신의 종교인 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해서라도 파리를 거대한 왕국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었다. 
  1670년경에는 불결한 거리를 청소하고 수많은 광장을 건설하고 루브르궁을 확장하며 파리가 더욱 발전하자 많은 귀족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났다. 루이 14세가 거처를 베르사유로 옮기면서 그의 재위기간 동안 권력과 사교와 예술의 중심이 파리를 비켜간 듯 했지만, “백성들이 경외감을 품고 바라보게 만들 건축물보다 군주의 위대함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재상 콜베르의 신념에 따라 파리는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선 대로와 왕궁을 비롯하여 수많은 건물과 기념비, 조각들로 채워졌다. 튈르리 정원과 샹젤리제 가로수 길이 조성되었고 성벽이 있던 자리에 낸 대로와 개선문, 방사형 거리가 루이 14세를 찬양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7세기 파리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은 ‘쿠르cour’라 불린 산책로와, 법복귀족을 양산한 고등법원이 상주했던 팔레(palais, 궁전, 관저, 대저택을 의미)였다. 몽팡시에 공작부인(1551~1596)은 『회고록』에서 파리의 숙녀가 누리는 삶의 세 가지 즐거움으로 하나는 가면을 쓰는 것, 둘째는 생제르맹 정기시장에 가는 것, 마지막으로 쿠르에서 마차를 타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팔레는 고등법원 업무와 관련된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그들을 대상으로 한 노점상, 사치품 상가들이 몰려들어 파리의 또 다른 중심지를 이루었다.

“(팔레의) 회랑에는 작은 노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그리고 그곳에서는 늘 수많은 기사와 부인들, 심지어 왕과 신하들까지 만나게 된다. 부인들은 즐기기 위해 왔고 기사들은 이곳 법원에 볼일이 있었다. […] 팔레는 연인들에게 일종의 중개소 역할을 했다.”(마르셀 포엣, 『18세기 파리의 산책』, 1913)

  이 장소들은 런던이나 암스테르담 같은 거대한 교역도시와는 다른 파리의 사교적,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1690년대 『여행』을 쓴 마틴 리스터는 파리 사람들에 대해 “보기 위해 또는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이들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기록했다. 쿠르에서 산책을 하고 팔레에서 사교와 소비를 일삼는 상류층 인사들의 풍속은 ‘사교계’라는 용어와 함께 유럽 도시에 새로운 도시 생활양식을 전파했다.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 같이 즐기며 특정한 옷을 입고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걷고 행동하고 집을 꾸미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정의되는 사교계는 이후 유럽의 대도시에서 매우 영향력을 갖는 집단이 된다. 극장, 오페라하우스, 유원지, 집회장, 경마장, 카페, 상점 그리고 어떤 특정 구역이, 그러다가 마침내는 도시 전체가 모두 사교계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발달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용적이었던 중세의 도시와 근대의 도시는 성격을 확연히 달리한다.(마크 기로워드, 『도시와 인간』, 참조) 
  17세기에 루이 14세가 주도한 문화예술정책은 이후 프랑스에서 권력의 중앙 집중과 더불어 파리에 대한 국가주도 식 집중투자와 도시계획, 이른바 ‘그랑 프로제’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이 전통은 19세기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3세의 파리 정비, 20세기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프로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군주와 사교계의 화려한 생활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도시 파리의 이러한 이면에는 여전히 중세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좁고 더러운 골목길, 가난한 주택 그리고 하층민들의 궁핍한 삶이 도시의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총 7권 2400쪽에 달하는 레스티프 드 라 브러톤의 『파리의 밤』(1788)과 12권 4000쪽에 달하는 루이 세바스티안 메르시에의 『파리 풍경』(1788)에는 18세기 파리의 어두운 이면이 묘사되어 있다. 

“부엉이-관찰자가 밤에 수도의 거리를 걷는다. 그의 머리 위로는 부엉이가 날고 있는 것이 보이고, 거리에는 여자들의 납치, 문을 뜯어내고 침입하는 도둑들, 기마 순찰대와 보병 순찰대가 보인다. “모두의 눈이 감겨 있을 때, 볼거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레스티프 드 라 브러톤, 『파리의 밤』, 1788) 

“사기꾼”, “가발제조업자”, “가난한 자들의 세금”, “감옥”, “사형선고문”, “사형집행인”, “잘못 교수형에 처해진 하녀”, “바스티유”, “형무소”, “유치장” 등 『파리 풍경』의 소제목들은 계몽주의자 메르시에가 당시의 파리를 바라보는 관점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형수의 시체를 얻기 쉬운 파리에서 시체를 구하기 위해 도굴꾼과 거래하는 파리의 외과 의사 이야기 “해부”는 파리로 상징되는 문명과 그것이 자행하는 야만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영목, 「계몽주의 정신이 그린 파리」, 참조.)

“시체를 잘게 썰고 해부한 다음 해부학자는 이제 그 시체를 원래 장소로 되돌려 놓는 방법은 모른다. 그는 시체 조각들을 되는 대로, 때로는 강에, 때로는 하수구에, 때로는 변소에 던져버린다. 사람 뼈가 그를 먹어치운 동물의 뼈와 뒤섞여 발견되고, 거름 더미에서 인류의 잔해를 발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메르시에, 『파리풍경』, 1788) 

  1780년대 파리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회합 장소이자 유럽의 중심 상점가가 된 팔레 루아얄에 대한 묘사는 도시 파리의 역동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말해준다.

“파리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파리에서 찾을 수 없는 모든 것이 팔레 루아얄에 있다. […] 이곳에는 권태를 위한 온갖 치료약과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한 온갖 달콤한 독, 돈 있는 자들을 사취하고 돈 없는 자들을 괴롭히는 방법들,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모든 수단이 모여 있다. 아무리 인생이 길다 해도 평생 동안 팔레 루아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카람진, 『한 러시아 여행자의 편지』, 1791~1792)

  도박과 매춘이 판을 치던 팔레 루아얄은 또한, 1789년 7월 12일 변호사 카미유 데물랭이 그곳 정원에 모인 군중들에게 왕의 군대에 대항해 무장할 것을 선동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 소식은 파리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새로운 소식, 연설, 논쟁의 중심지였던 팔레 루아얄의 카페들은 새로운 사상의 생성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로서 진보적이고 모험적인 도시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도시의 이미지는 능력과 지성, 야망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서로 만나 대화하며 새로운 사상을 공유하고 전파시켰다. 이미 1615년에 출간된 파리 지도에는 “이 도시는 또 다른 세계이며 그 곳에서 사람들은 번창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프랑스의 나머지 지방들에게 파리는 자유와 변화와 모험을 통해 인생역전이 가능한 선망의 도시였다. 그런 만큼 파리는 “피를 빨아먹는 향락과 악덕의 대도시”가 되었다.(마크 기로워드, 『도시와 인간』, 참조.) 

“파리에 들어섰을 때,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얼마나 달랐던지! 토리노에서 외부 장식, 아름다운 거리, 균형을 맞추어 늘어선 집들을 본 뒤라 나는 파리에서는 다른 무엇을 찾고 있었다. 훌륭한 거리와 대리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궁전들이 가득한 더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 마르소 변두리로 들어섰을 때, 내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더럽고 악취 풍기는 좁은 거리, 더럽고 칙칙한 집들, 불결하고 가난에 찌든 분위기, 거지들, 짐수레꾼, 헌옷을 수리하는 여공, 길거리에서 싸구려 샴페인이나 낡은 모자를 파는 여자들뿐이었다. 처음에 이 모든 것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 뒤로 파리에서 정말 굉장한 것을 보아도 이 첫 인상을 지워주지 못하고 수도에서의 삶에 대해 늘 은밀한 불쾌감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장 자크 루소, 『고백록』, 1762)

  처음 본 파리에 대한 루소의 묘사는 당시 지방 사람들이 파리에 대해 품고 있던 환상이 어떠한지, 또 대도시의 병폐를 모두 안고 있는 파리의 실재는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도시와 시골과 인간에 대한 루소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도시는 인류의 구렁텅이다. 몇 세대가 흘러가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결국 죽거나 타락한다. 그들을 되살려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시골이다. 따라서 여러분의 아이들을 시골에 보내어, 너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유해한 공기를 마시며 잃어버린 그들의 활력을 들판에서 되찾을 수 있도록, 말하자면 스스로 소생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장 자크 루소, 『에밀』, 1762) 

  파리의 위선과 허영에 대한 비판은 스탕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탕달은 19세기를 “퇴락한 권태로운 세기”로 규정하고 파리 귀족의 삶을 “이른바 19세기 문명이 강요하는 끝없는 코메디,” (스탕달, 『적과 흑』, 1830)라고 조롱한다. 라몰 후작의 딸 마틸드가 그에게 청혼하는 파리의 젊은 귀족들을 “금박을 입힌 바보들”이라 경멸하는 것은 아무런 열정도 없이 허영심에 가득 차 유행만 뒤쫓는 수도 파리의 무기력한 인간군상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파리가 현대적으로 대변신을 하게 되는 것은 “이 위대한 도시를 장식하는 데 우리의 총력을 쏟아 부을 것이다.”라고 선언한 나폴레옹 3세의 절대적 지원 속에서 오스만의 파리정비계획이 실행된 19세기 중반이다. 오스만(1853~1870년 파리 시장으로 재직)의 파리정비 사업으로 파리는 복잡하고 어둡고 더러운 중세의 도시에서 벗어나, 사통팔달한 대로들과 깨끗이 정비된 구역을 갖춘 현대도시의 면모를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갖추게 된다. 위생과 원활한 교통이라는 두 개의 원칙을 기준으로 방사선 모양의 도로망 구축에서 상수도 및 하수도 시설 확충, 강변 정리, 다리 건설, 도심 공원과 외곽의 숲 조성에 이르기까지 파리는 조직적이고 유기적으로 다시 건설되었다. 이러한 오스만의 개발방식은 빈, 부에노스아이레스, 하노이, 워싱턴, 시카고 등 특히 미국의 실용주의 원칙 아래 진행된 현대 도시 건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애영, 「영원한 수도 파리」, 참조)
  한편 오스만의 파리 정비계획은 도시 건설이 주로 도심에서 부르주아지 중심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그들이 위험한 계층이라 불렀던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들을 도시 외곽으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도시 외곽이 빈민굴로 전락하는 고질적인 도시 문제를 낳았다. 또한 이 사업은 도시개발 사업에 의해 기존의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역사적 혹은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문화유산들을 희생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의 사회문제가 처음으로 거론된 1848년 2월 혁명과, 도시를 강제로 근대성으로 몰아넣은 오스만의 파리, 그 이전과 이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그 전에는 앵그르, 다비드 같은 고전주의자와 들라크루아 같은 색채주의자가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 마네의 인상주의가 나왔다. 그 이전에는 낭만주의 시인과 소설가가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플로베르와 보들레르가 나왔다. 이전에는 수공업 공정을 따라 조직된 제조업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이후에는 대부분이 기계와 근대적 산업에 밀려났다. 이전에는 좁고 꼬불꼬불한 거리나 아케이드에 소점포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이후에는 대로변에 널찍하게 터를 잡고 펼쳐진 백화점이 등장했다. 이전에는 유토피아주의와 낭만주의가 있었지만 이후에는 빈틈없는 경영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가 나왔다. 이전에는 물장수가 중요한 직업이었지만 상수도가 설치됨에 따라 1870년에는 물장수가 거의 사라졌다.”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 참조.) 

  이러한 시간적 이분은 공간적 단절로도 나타나 파리가 갖는 이중적인 두 모습은 “두 도시, 두 종족”이란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4시. 다른 쪽 파리, 일하는 파리는 깨어난다. 두 도시는 서로를 거의 알지 못한다. 한낮에 일어나는 도시와 8시에 자리에 눕는 도시. 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일이 거의 없고 슬프고 엄숙한 혁명의 날에만 마주 볼 뿐이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산다. 그들은 다른 언어를 쓴다. 그들 사이에는 상실된 사랑도 없다. 그들은 두 개의 종족이다.” (『파리 안내』,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에서 재인용.) 

  혁명과 봉기의 시대 19세기에 도시 파리의 들끓는 모습은 발자크와 플로베르를 위시하여 당시의 많은 작가와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다. 

“프레데릭과 원수는 모든, 거의 모든 클럽에 가보았다. 붉은 곳이나 푸른 곳이나, 광기 어린 곳이나 엄격한 곳이나, 청교도적인 곳이나 보헤미안적인 곳이나, 신비스런 곳이나 술꾼들이 모이는 곳이나, 왕이라면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이나 깐깐한 식료품상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곳이나 모두 찾아다녔다. 어디서나 세입자들은 집주인을 욕했고,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은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은 비난했으며, 부자들은 빈민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보이려면 항상 변호사에 대해 신랄한 말을 해야 하고, 기회만 있으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써먹어야 한다. 즉 누구나 건축물에..... 사회문제에.....작업장에 자기 몫의 돌을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플로베르, 『감정교육』, 1869)

  보들레르는 근대가 만들어낸 열정의 새로운 형태와 현대 도시의 아름다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파리라는 도시를 주목했다. 보들레르에 의하면, 근대성의 신화는 “시적이고 놀라운 소재가 풍부한” 도시의 삶에서 피어난다. 보들레르보다 먼저 파리를 중심으로 도시의 신화를 발굴하고 그 신화의 이면을 파헤치며 도시의 사회적 힘을 분석한 작가는 『인간희극』(1842)의 작가 발자크이다. 『인간희극』에 등장하는 3000명에 달하는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출신지역과 성분은 파리와 지방, 도시와 시골에서의 삶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며 파리라는 도시의 근대성과 그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묘사했다. 
  『인간희극』에 포함된 『농민』(1844)은 “쉴 새 없이 전율을 자아내는 파리의 극적인 구경거리와 고달픈 생존 투쟁”이 “자연, 시골에 가기만 하면 바로 시작되는 단순한 생활과 식물적인 삶에 대한 필요를 본능적으로”(발자크, 『농민』, 1844) 느끼게 함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환상』(1836-1843)은 시골 출신이 파리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과정과 도시에 적응한 뒤 결국 파멸에 이르는 과정, 그럼에도 시골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뿌리 뽑힌 자들’의 삶을 보여준다. 또 『사촌누이 베트』(1846)는 농촌 출신의 주인공 베트가 파리에 사는 부자 친척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로 그 귀족 가문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파리가 지방을 경멸하고 부정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를 보여준다. 사실 대혁명 이전의 프랑스가 궁정이 있는 베르사유와 파리라는 도시, 그리고 자율적인 여러 지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모든 권력과 권위가 집중된 파리와 그에 대비되는 나머지 지방으로 재편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방은 정치, 사회적으로 수도인 파리에 종속된, 멀리 떨어진 곳, 시간이 지체되고 침묵하는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철, 「발자크 소설에서의 파리」, 참조)
  『고리오 영감』(1835)의 마지막 부분에서 라스티냑은 파리를 내려다보며 서유럽 도시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신화를 탄생시킨 “괴물 가운데 가장 유쾌한 괴물” 파리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는 굽이치는 센 강의 양편 제방으로 파리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불빛들이 여기저기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길은 방돔 광장의 원기둥과 앵발리드의 돔 사이 공간 한 곳을 탐욕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그가 정복하고 싶은 찬란한 세계가 있다. 그는 약탈을 예고하는 표정으로, 마치 그의 입술에 벌써부터 벌꿀의 단맛이 느껴지는 것처럼, 그 웽웽거리는 벌집을 쏘아보며 도전적으로 말했다. ‘이제 우리 둘의 싸움이다!’” (『고리오 영감』, 1835)

  “보트랭, 라스티냑, 비로토 여!(모두 발자크의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다), 일리아드의 영웅들은 당신들에 비하면 소인배다.”는 보들레르의 말은 발자크가 파헤친 근대성의 신화의 핵심이 도시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파리에서는 “어디에나 즐거움과 돈벌이가 있고 사기가 벌어진다. 어디에 가든 내일 일용할 빵이 약속된다. 어디에 가든 활력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먼지와 고함소리와 즐거움이 있고 난리법석”이 벌어지며 “허리가 굽고 늙어 쇠약해지고 패배한 인생을 산 늙은 광대”가 있다.(『파리의 우울』, <늙은 광대>, 1869) 보들레르는 전통의 상실과 미래의 창조가 공존하는 도시 파리를 마치 “늙은 난봉꾼이 옛 애인을 찾듯이” 만나러가는 늙은 창녀로 묘사하며 파리를 “유곽과 병원, 감옥, 연옥, 지옥”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치욕의 도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파리의 우울』, 1869) 

  벤야민은 쥘 라포르그의 말을 인용하여 보들레르를 “수도의 일상적인 저주(매춘의 바람에 흔들리며 거리에서 반짝거리는 가스등, 레스토랑과 그곳의 환기구, 병원, 도박, 톱으로 켠 나무가 장식이 되어 정원의 포석 위로 떨어지는 소리, 화롯가, 고양이들, 침대, 스타킹, 술주정뱅이, 현대적 제조법으로 만든 향수)를 통해 파리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시인이라 평가했다. 벤야민이 파리를 19세기 유럽의 수도로 명명했을 때, 그는 파리를 도시계획, 경제와 상업, 새로운 정치사회적 이념들의 형성과 전개, 문화예술의 역동성을 보여준 최첨단의 도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도시는 자연과 무관하게 순전히 인간이 진화시켜온 “사람들의 기억과 과거의 창고이자 문화적 전통과 가치들의 저장소”이다. (벤야민, 『파리, 19세기의 수도』, 『아케이드 프로젝트』, 1940경) 
  도시를 찬미하든 증오하든 이미 19세기 후반이후 도시는, “지구상에 미지의 땅은 중앙아프리카나 브라질의 열대 우림지역이 아니라 파리, 런던, 홍콩 같은 대도시들이며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단순한 공간을 넘어서 그 실체를 탐색해야 할 숲”이, 인간의 삶의 절대적 배경이 되었다.(R. M. Alberes, Métamorphoses du roman, 참조 및 인용.) 
  도시 자체가 작품의 주요 인물이 되어 주인공과 대적하는 양상을 보이는 미쉘 뷔토르의 소설 『일과표』(1956)는 20세기 도시와 인간의 삶의 밀착관계를 구조적으로 파헤친 대표적인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작품에 나오는 블레스턴은 1년 연수를 위해 주인공 자크 르벨이 가게 된 영국북부의 가상의 산업도시이다. 주인공은 그곳에 도착할 때부터 도시가 자신에게 적의를 갖고 위협을 가해온다는 느낌을 받으며 도시에 맞서 전쟁을 선포한다. 

“도시가 오염된 결과 그 도시에 대한 지독한 증오심이 퍼져있었으며, 처음부터 이 도시는 내(르벨)게 적의가 있는 듯했고 기분 나쁘게 느껴졌으며 나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미셀 뷔토르, 『일과표』, 1956)

  블레스턴이라는 도시가 르벨의 정신에게 행사하는 독특한 힘, 뷔토르는 그것을 통해 “도시는 사회구조인 동시에 시간을 통해 그 문화적 실존이 축적된 문화유산이며, 공동체의 문화적 토대와 연결되는 대우주이자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개인의 의식에 기록된 소우주”(M.C. Gruber, La Ville dans L'Emploi du temps de Michel Butor )임을 보여준다. 뷔토르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가령 『변화』(1957)는 로마와 파리라는 실제의 두 도시를, 『계단』(1960)은 파리를, 『모빌』(1962)은 미국의 대도시들을 작품의 내적 구조 안에 긴밀히 끌어들임으로써 도시를 작품의 주제 자체로 삼는다. (김남향, 「미쉘 뷔토르 소설의 도시」, 참조)

“도시는 진정으로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자크 아탈리, 『박애-새로운 유토피아』, 1999)

“도시는 단순히 인간과 시설의 밀집지역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 상태이다.” (로버트 박, 『도시』, 1925)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도시의 토포스는 러시아 문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러시아 문학 작품에서는 수많은 도시 중에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라는 두 도시가 주로 언급되는데,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 두 도시는 상이한 토포스를 보인다. 우선 페테르부르크는 주로 이성적, 인위적, 추상적, 규칙적, 관료적인 분위기를 지닌 비러시아적인 공간으로, 모스크바는 가족적, 자연적, 전통적인 분위기를 지닌 러시아적 공간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페테르부르크는 머리, 모스크바는 가슴” (러시아 속담)

“페테르부르크는 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이며 인위적인 도시이다.”
(도스토옙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 1864)

“네프스키 거리는(페테르부르크의 중심 거리) 직선의 대로입니다. 왜냐하면 네프스키 거리는 유럽식 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유럽풍 대로죠. <…….> 네프스키 대로가 비러시아적 도시인 이곳 수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습니다. 다른 러시아적 도시에는 목조 가옥이 즐비할 뿐입니다.” (벨르이, 『페테르부르크』, 1916)

  또 하나의 흥미로운 대비점은 모스크바는 주로 ‘여성의 도시’, ‘신부의 도시’로, 페테르부르크는 ‘남성의 도시’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페테르부르크는 19세기 중반까지 남녀의 비율이 3대1 정도로 남성이 월등히 많았는데, 이것은 페테르부르크가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였기에 수많은 관료들과 군인들이 도시에 거주한 까닭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페테르부르크에는 모스크바와 달리 수많은 사창가가 형성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창녀 소냐의 생활을 통해 잘 묘사되고 있다. 두 도시의 남녀의 이미지에 대한 속담과 작품 속에서의 예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모스크바는 시집가고, 페테르부르크는 장가간다.” (러시아 속담)

“모스크바에 오지 않으면, 미인을 볼 수 없다.” (러시아 속담)

“마님, 염려하실 것 없어요. 모스크바의 신부 시장에 데리고 가면 돼요. 거기에는 오라는 데가 많아요.”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0)
 
“모스크바는 여성이고 페테르부르크는 남성이다. 모스크바에는 언제나 신붓감이 넘치고, 페테르부르크에는 신랑감이 넘친다. <…….> 꼼꼼한 성격의 독일인과 같은 페테르부르크는 매사에 계산이 빨라서, 파티를 열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부터 살핀다. 전통적인 러시아 귀족을 닮은 모스크바는 일단 흥이 나면 주머니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맘껏 잔치를 벌인다.” (『1836년의 페테르부르크에 관한 메모』, 고골리, 1836)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문학작품에서 주로 부정적인 형상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그 시발점이 된 것은 푸시킨의 서사시 『청동 기마상』이다. 1782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도시의 건설자인 표트르 대제를 기리기 위해 네바 강변에 세운 웅장한 기마상은 당대인들에게 도시의 가장 큰 상징물로 여겨졌다. 푸시킨이 『청동 기마상』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실제 1824년 홍수로 인해 자신의 약혼녀를 잃어버린 가난한 하급관리인 예브게니의 비극적 운명이다. 예브게니는 자신의 약혼녀가 홍수에 죽은 것은 늪지대에 건설되어 배수에 결함을 지닌 페테르부르크의 태생적 한계라고 생각하여 네바 강변의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향해 원망한다. 

“불쌍한 광인은 동상 주변을 걸으면서 세계 절반의 지배자의 얼굴을 향해 맹렬한 시선을 던졌다. <......> 가슴에 불길이 내달음쳐 피가 끓어올랐다. 오만한 우상 앞에서 그는 우울해졌다. 검의 힘의 포로가 된 듯 적의에 몸서리치면서 나직이 말했다. ‘좋소! 기적의 건설자여! 어디 두고 봅시다!’ 그리고는 갑자기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푸시킨, 『청동 기마상』,1833) 

  예브게니의 이 말이 끝나자 갑자기 말을 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움직여 주인공을 쫒아오게 되고, 주인공은 이 기괴한 환영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게 된다. 작품을 통해 푸시킨은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 세워진 도시의 부작용, 권력의 힘에 희생된 민중의 이야기를 하면서 페테르부르크 신화의 부정적 요소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 페테르부르크가 배경이 되는 푸시킨의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은 신비한 카드점을 통해 일확천금을 노리는 게르만의 파국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푸시킨은 작품을 통해 환상과 사실이 교차하는 기묘한 분위기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물질적 탐욕에 눈이 먼 당대 페테르부르크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푸시킨에 의해 제기된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부정적 형상은 이후 러시아 문학에서 줄기차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에서 이를 가장 잘 묘사한 작가는 고골리이다. 특히, 고골리의 『코』, 『외투』, 『광인 일기』, 『초상화』, 『네프스키 거리』가 수록된 단편 모음집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페테르부르크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묘사하면서 부정적인 측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의 다섯 편의 소설들에 나타나는 페테르부르크는 허위와 환영, 탐욕으로 가득한 도시이며, 계급과 서열이 중시되는 관료 제도와 권력에 의해 이른바 ‘작은 인간’들이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부조리한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 

“이 네프스키 거리는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 그리고 악마가 모든 것들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 주기를 거부하고 램프의 불을 직접 켤 때, 네프스키 거리는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속인다. <......> 그러나 가장 기묘한 것은 네프스키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오, 이 네프스키 거리를 믿지 마라! 모든 것이 기만이고 모든 것이 꿈이며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 (고골리, 『네프스키 거리』, 1835)

  가장 페테르부르크적인 작가로 불리는 도스토옙스키는 페테르부르크가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이중성을 자신의 작품 세계의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가장 긍정적인 인간’과 악마의 형상을 한 ‘가장 부정적인 인간’의 충돌과 대립을 통해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페테르부르크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 긴밀하게 관련되는데,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백치』의 므이쉬킨과 로고진, 『죄와 벌』의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작품에 등장하는 이른바 ‘악마적 초인’이나 ‘욕망의 화신’ (『백치』의 로고진,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이 작품 속에서 행하는 살인과 그들의 파멸의 원인 중의 하나를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분위기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도스토옙스키가 작품 활동을 한 19세기 중, 후반 페테르부르크는 급속한 산업화와 그에 따라 심해진 빈부격차 등으로 알코올중독, 매춘, 빈민, 대기오염 등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정신 상태를 더욱 악화 시켜 살인을 부추기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로 결심한 라스콜리니코프는 하숙방을 나와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의 분위기에 의해 더욱 정신적으로 악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거리는 무척이나 더웠다. 게다가 답답한 공기, 번잡한 거리, 여기저기 나뒹구는 석회 부스러기, 건축 현장의 나무판자, 벽돌, 먼지, 그리고 여름을 별장에서 보낼 여유가 없는 페테르부르크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여름의 그 이상한 악취 - 이 모든 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이 청년의 신경을 불쾌하게 자극했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866) 

  푸시킨, 고골리,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묘사된 페테르부르크의 음울하고 파멸적인 분위기는 20세기 초 러시아 상징주의 철학가이자 시인인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1916)를 통해 절정을 이룬다. 
  소설 『페테르부르크』는 1905년 혁명 이후 고위 관리인 아폴론 아폴로노비치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이전의 푸시킨, 고골리,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드러난 페테르부르크의 온갖 부정적인 형상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그것을 집대성하여 페테르부르크의 파멸을 그려 내고 있는 소설이다. 벨르이가 말하고자 하는 페테르부르크의 파멸은 단순히 한 도시의 몰락이 아니라,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설된 제정 러시아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벨르이는 소설에서 푸시킨의 『청동 기마상』과 유사하게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도시를 날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파멸의 길로 이끄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소설 곳곳에서 페테르부르크를 거짓과 환영의 도시, 나아가 파멸과 지옥의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 

“페테르부르크, 페테르부르크! 너는 안개 속에 싸여 무상한 두뇌와 유희로 나를 쫒는구나. 너는 가혹한 형리, 너는 형체 없는 유령이다.”

“그렇다. 핀란드 소택지 위에 건설된 정착지는 당신에게 붉은, 붉은 얼룩의 광기 어린 도시를 보여 준다. 멀리, 밤의 어둠 속에 떠오른 얼룩이 보인다. 끝없는 조국 땅을 편력하는 당신의 눈에 저 멀리 밤의 어둠 속에 떠오른 붉은 피의 얼룩이 보인다. 놀란 당신은 말할 것이다. ‘지옥의 불구덩이가 바로 저긴가요?”

“날아가는 네덜란드인이 그늘진 돛단배를 타고 발틱 해와 독일 해의 납빛 공간을 지나 페테르부르크로 날아왔다. 이곳에 안개 낀 거짓 땅을 세우고 흘러가는 구름의 물결을 섬이라 불렀다. <......> 네덜란드인은 200년 간 술집에서 지옥의 불길을 태웠다. 정교의 신민들은 지옥의 술집으로 몰려들었다. 부패한 병균을 전염시키며...” (벨르이, 『페테르부르크』, 1916)

  이처럼 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 문학 안에서 주로 부정적인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모스크바는 그와 대비적으로 포근한 안식처의 느낌을 주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된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모스크바는 푸근하고 친근한 시골 마을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는데, 여주인공 타티아나는 렌스키가 오네긴과의 결투에서 죽자 모스크바로 떠난다. 이후 타티아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귀족 관리와 결혼하기 전까지 모스크바에서 머물며 심신의 안정을 취한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7장은 타티아나가 모스크바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푸시킨은 7장 서두에 동시대 시인들의 모스크바 찬미에 관한 시를 제사로 넣으면서 모스크바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모스크바여, 러시아의 사랑받는 딸이여,
어디에서 너에 버금가는 것을 찾을까? -드미트리예프
고향 모스크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쏘냐? - 바라트인스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930)

  또한 푸시킨은 타티아나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할 즈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 유랑하는 운명의 몸이 되어
슬픈 이별을 해야 할 때
모스크바여, 얼마나 자주 너를 생각했던가!
모스크바..... 이 한마디 소리에
러시아인의 가슴은 얼마나 풍요로워졌던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이 울렸던가!”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930)

  모스크바를 가장 사랑한 작가로 알려진 체호프의 작품에 나타나는 모스크바는 단순한 정신적 안식처를 넘어 유토피아적 이상향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체호프의 장막 희곡 『세 자매』에서 세 자매들은 끊임없이 모스크바로 가고 싶어 한다. 고위 장군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외딴 시골 마을에서 세 자매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든 날을 보낸다. 1막부터 4막까지 세 자매들은 줄기차게 ‘모스크바로! 모스크바로!’라고 외치고 있으며, 예전에 모스크바에서 만난, 그리고 얼마 전까지 모스크바에서 근무한 중령 베르쉬닌이 오자 그를 무척이나 환대하며, 유부녀인 마샤는 베르쉰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즉, 세 자매에게 모스크바는 상황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희망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가 러시아 문학에서 긍정적 안식처의 형상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모스크바 역시 도시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현상들, 즉 물질 만능과 탐욕, 권력과 출세로 얼룩진 인간 욕망의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19세기 초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1825)에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희곡 『지혜의 슬픔』은 유럽 자유주의 사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차츠키의 눈으로 구태의연한 모스크바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딸인 소피야를 고위 관료에게 시집보내 자신의 출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파무소프를 비롯하여 당대 귀족들의 권력과 출세에 대한 탐욕,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관료 사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보예도프는 무대 지시문에서 공간을 ‘모스크바의 파무소프의 집’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여 당대 모스크바의 부정적인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연유한 이른바 ‘파무소프의 모스크바’는 권력, 출세, 부정, 부패의 모스크바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문학 용어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모스크바가 보여 주는 부정적인 도시의 이미지는 혁명 후 수도가 다시 모스크바로 이전되면서 더 심화된다. 러시아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의 기능을 회복한 20세기 소비에트 모스크바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면서 소비에트 도시의 모든 힘을 한 곳으로 흡수하는 거대한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소비에트 사회가 태동하면서 드러난 여러 가지 문제들, 소비에트 독재 권력과 관료주의, 그리고 네프 시기의 빈부 격차, 물질만능주의와 인간 소외 현상들은 모스크바를 이전과 완전히 다른 형상의 도시로 바꾸어버렸다. 
  소비에트 모스크바의 부정적인 형상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작가는 불가코프이다. 불가코프는 중편 소설 『개의 심장』을 통해 인간의 이념과 사상을 강제로 개조하려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강압적인 모습을, 희곡 『조야의 아파트』를 통해서는 네프 시기 모스크바의 물질 만능과 탐욕, 관료주의를, 희곡 『극락』과 『이반 바실리예비치』에서는 창작적 자유를 억압하는 당대 권력과 관료주의를,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통해서는 1930년대 모스크바의 탐욕과 부정, 소비에트 사회의 위선과 권력의 압제를 그려 내고 있다. 이 모든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모스크바는 불가코프에게 부정하고 싶은 소비에트 러시아 그 자체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도시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와는 별개로 지방 소도시에 관한 토포스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15세기 이후 러시아의 도시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중심으로 발전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의 모든 영역이 이 두 도시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다른 도시들은 소외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데, 러시아 전체 경제 활동의 80% 이상이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 집중되고 있다.
  러시아 문학에 나타나는 지방 도시의 토포스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은 중앙 정부로부터 소외된 지방 도시민들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를 동경하면서 끊임없이 그곳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강한 출세 욕구를 지닌다. 이러한 현상은 귀족 관리들이 득세했던 19세기 전반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고골리의 희곡 『감사관』과 소설 『죽은 혼』을 통해 그 현상의 이면을 들여 볼 수 있다. 고골리의 작품들이 대다수 페테르부르크가 그 배경인 반면에 위의 두 작품은 지방의 소도시, 혹은 지방 도시 N시가 그 무대가 된다. 
  기본적으로 두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지방 도시의 특성과 그것에 바탕에 둔 사건의 전개는 유사한 점이 있다. 소설 『죽은 혼』과 희곡 『감사관』의 지방 도시민들은 주인공들이 수도 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는 사실에 호감과 동경을 가지면서 그들이 펼치는 사기 행각에 순순히 당하고 만다. 특히, 『감사관』의 시장은 자신의 딸을 가짜 감사관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는데, 그는 딸의 결혼을 통해 별 볼일 없는 지방 도시를 벗어나 중앙 도시로 진출하여 출세 가도를 달리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시장: 여보, 지금 우리는 큰 날개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아? 하늘 높이 한번 훨훨 날아 보는 거야. <......> 그런데, 여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이젠 큰 관직 자리 하나는 따놓은 거잖아. 그 사람은 모든 대신들과도 친하겠다, 그러니까 연줄로 그렇게 승진하다 보면 장군도 될 거야. 안나 안드레예브나, 당신 생각은 어때, 장군이 될 수 있을까?” (고골리, 『감사관』, 1836)

  지방 도시의 또 다른 특성은 폐쇄성과 정체성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자본주의화와 산업화에 의해 대도시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로 인구 유입과 부의 집중이 가속화 되었고, 그 결과 중앙과 지방과의 격차가 더욱 심해지면서 지방 도시들은 소외되고 정체된 상태로 머물게 되었다. 
  지방 도시의 이러한 현상들은 19세기 말 살티코프-쉐드린과 체호프의 작품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데, 바흐친은 이러한 것들을 이른바 ‘지방 소도시의 흐르노토프’라고 규정하였다. 바흐친의 ‘지방 소도시의 흐로노토프’에 의하면, 지방 소도시는 반복적이며 일상적인 시간이 흐르는 장소로서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으며, 똑같은 일상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정체된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등의 시간이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정체되고 폐쇄된 지방 도시의 토포스는 체호프의 극작품에서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체호프의 4대 희곡인 『갈매기』(1896), 『바냐 아저씨』(1898), 『세 자매』(1900), 『벚나무 동산』(1904)의 배경은 모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지방의 소도시이며, 바흐친의 지적대로 작품에서는 특별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일상을 보여 주고 있다. 희곡 전반부에 주인공들은 지방을 벗어나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로 가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막이 진행될수록 주인공들은 지방 도시의 정체성에 묻혀 무력하고 나태한 삶을 살아간다. 작품들에서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주인공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더욱 악화된 상황을 맞이한다. 체호프의 드라마를 ‘삶의 드라마’라고 부르곤 하는데, 체호프는 자신의 희곡들을 통해 세기말 초 러시아 지식인들의 무력함과 정체성뿐만 아니라 삶의 일상성과 속물성에 갇혀 버린 채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인간 보편에 대한 운명을 지방 도시의 토포스의 특성과 결부시켜 보여주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 도시 ‘빌ville’의 어원은 역설적이게도 본래 농촌에 있는 넓은 땅을 가리키던 라틴어 ‘villa’이고, 도시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고로드 город’의 어원은 ‘울타리, 담장’이라는 뜻의 공통슬라브어 ‘고르드 gordъ’에서 유래된 고대슬라브어 ‘그라드 градъ’이다. 오늘날 프랑스어로 빌라는 시골의 별장을 가리킨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에서 근대도시의 형성은 전통적인 중세 사회의 신분 체계를 벗어나서 이루어졌고, 그 기본적인 성격은 교역이었다. 자본주의 발달의 요체로서 도시는 프랑스의 경우 부르주아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곳으로 성장하였으며, 도시가 가진 경제력은 특권 계층들을 도시로 끌어들이면서 정치권력의 중심지로서의 위상도 차지하게 된다. 1789년 혁명이 부르주아의 정치권력의 발판을 마련해 줄 수 있었던 것도 도시, 특히 파리라는 대도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19세기 파리가 정치체제들의 실험장으로서 치르게 된 혹독한 역사와 거기서 피어난 다양한 예술적 경향과 새로운 시대 정신은 파리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중심, 나아가 전 유럽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프랑스에서 파리가 차지하는 위상은 특별하다. 다른 서구 선진국들과 달리 프랑스는 파리 외에 대도시의 발달이 저조한데, 그만큼 프랑스에서 파리는 프랑스의 기원이자 역사의 중심이었고 오늘날에도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구심점이 되고 있다. 파리는 또한 19세기 후반 오스만의 파리정비 계획을 통해 도시가 안고 있는 위생과 치안의 문제, 노골적인 빈부격차의 문제 등을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선례를 보임으로써 다른 서구 도시들에 현대적 도시계획의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20세기 이후 도시는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의미를 넘어 인간과 같이 호흡하고 때로 대결하기도 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 비유될 정도로 인간의 삶과 점점 더 밀접해지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도시의 발달 과정에서 겪은 특별한 경험은 몽골의 침입과 압제가 일으킨 변화이다. 중세 러시아 도시들은 13세기 무렵 몽골의 침입으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후 약 200년에 걸친 몽골의 지배는 러시아의 거의 모든 도시들을 파괴시켰다. 이로써 중세 러시아 도시는 경제활동의 중심지에서 다시 방어, 보호의 요새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이전까지 도시의 주거주민이었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의 숫자와 그들의 영토도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강력한 군대를 가진 공후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다시 봉건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러시아에서 도시가 재발전하는 시기는 14세기 중반으로, 그 중심에 새롭게 러시아의 패권을 차지한 도시 모스크바가 있었다. 모스크바는 ‘모스크바 제3로마설’에 힘입어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소피아 공주가 이반 3세와 결혼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문물과 동방정교의 본거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말까지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모스크바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되면서 그 지위를 상실한다.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에 의해 1712년 러시아의 수도가 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철저히 유럽식으로 지어진 계획도시로서, 여러 측면에서 모스크바와 대비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도시로 형성된 모스크바와 달리 단기간에 계획적으로 개발된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개발이라는 근대적 도시의 개념을 보여준다. 수도를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교의 본거지는 모스크바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며, 황제의 즉위식도 대주교의 집전 아래 모스크바에서 거행되곤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모스크바는 러시아인에게서 종교적이며 전통적인 러시아 도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이후의 슬라브주의자들의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도 하였다.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으로 향한 창’이라는 별칭과 함께 서구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두 도시의 역사는 곧 러시아 역사의 중요한 체험들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 러시아 대도시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산업화, 자본화가 뒤늦게 이루어진 러시아는 프랑스에 비해 이들 대도시와 지방 도시 간의 격차가 더 크며, 그 격차가 그 지역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연관 토포스 결혼; 대로; 부르주아; 산책; 시골; 탐욕 거리; 광장; 사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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