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토포스명(프랑스) argent
토포스명(러시아) деньги
정의 1. 돈은 많을수록 인간의 영혼을 더 지배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돈을 뜻하는 프랑스어 ‘아르장 argent[aʀʒɑ̃]’은 금속 은의 의미도 지닌다. 은으로 전쟁에 재정지원을 했던 고대 그리스 왕국들이 은에 아르기로스(argyros, 하얗게 빛나는 것)라는 이름을 붙였고 로마인들도 이 이름을 따서 아르겐툼(argentum)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프랑스어 아르장의 어원이다. 아르장이 돈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은이 화폐 주조에 사용되고 기준화폐의 가치를 갖게 된 데서 연유한다. 그 밖에도 돈, 화폐를 가리키는 용어로 모네(monnaie, 금속화폐), 피에스(pièce, 주화, 동전) 비예( billet, 은행권 지폐) 등이 있다. 이 용어들이 지불수단으로서 구체적인 화폐를 가리키는 반면 아르장은 금이나 보물이 갖는 축재나 인색함의 어감과 구별되어, 은은한 달빛의 기운이 상징하는 ‘부’의 느낌도 갖고 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주는” (거트루드 스타인, 1874~1946) 돈은 “현실인 동시에 허구, 물질인 동시에 기능, 대상인 동시에 정복 수단,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가치이자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가치, 개인들이 맺는 관계의 동력이자 궁극적인 목적, 어떤 범주에도 갇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 성분의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Albert Rigaudière, L'Argent au Moyen Age ),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돈을 사용해온 역사는 5000년 정도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기원전 431~기원전 425)에서 카르타고에서 온 상인들의 거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와서 가지고 온 물건을 낯선 해안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자기네 배로 돌아가서 불을 피워 연기로 신호한다. 연기를 본 원주민들은 바닷가에 와서 금을 놓아두고 물건을 갖고 다시 돌아간다. 카르타고 인들은 배에서 내려와 금을 확인하고 적당하다고 생각되면 금을 갖고 떠난다. 만약 금이 충분하지 않으면 상인들은 다시 배로 돌아와 기다린다. 원주민들은 상인들이 만족할 때까지 금을 갖다 놓는다.” (헤로도토스, 『역사』)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던 초기의 생산물 교환에는 아직 화폐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물건의 가치는 생산하는 데 걸린 노동시간으로 평가되었다. 사용가치에 따라 교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물건은 반드시 서로에게 쓸모 있을 때만 교환되었다. 이런 원시적인 교환방식은 오늘날에도 원시적 삶을 영위하는 소수종족에게서 발견된다. 서구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총독인 피터 미뉴잇이 현재 뉴욕시의 중심지가 된 맨해튼 섬을 멘헤이트족 족장에게 24달러 정도에 해당하는 도자기와 수건 몇 장 그리고 유리구슬 등 잡동사니를 지불하고 사들였다는 기록은 ‘쓸모’라는 가치기준의 황당함을 보여주는 예다. (클라우스 뮐러, 『돈과 인간의 역사』 참조)
  물건의 종류와 교환상황이 다양해지면서 물건의 ‘쓸모’를 교환기준으로 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겨진다. 차츰 특정 상품이 가치기준의 특별한 임무를 맡도록 자연스럽게 합의가 이루어진 듯하다. 마르크스가 ‘일반적 등가물’이라고 개념화한, 특별한 임무를 맡은 원시적 형태의 화폐는 현물화폐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화폐는 동물이고, 소가 가장 유력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호메로스(기원전 800~기원전 750)가 “디오메데스의 갑옷은 황소 9마리의 가치와 같고 글라우코스의 갑옷은 황소 100마리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전쟁에서 죽은 그리스의 영웅 파트로클로스를 기리기 위한 시합을 묘사하면서 “승자에게는 소 12마리의 가치가 있는, 불 위에 놓는 삼각 용기를 주고, 패자에게는 소 4마리에 해당하는,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꽃다운 나이의 여인을 주기로 결정했다.”(『일리아스』, 기원전 900)는 표현에서 확인된다. 또한 고대 아일랜드의 법률서에도 “짐을 운반할 수 있고 젖이 나오고 뿔이 있고 흠집이 없는 세 살에서 열 살 사이의 몸집이 큰 암소”를 가치척도로 정해두고 있다.(클라우스 뮐러, 『돈과 인간의 역사』에서 재인용) 그러나 소는 가치척도는 되었지만 교환수단은 아니었다.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로는 식량이나 담배, 차 등 특산물이나 기호품들이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에티오피아의 소금화폐, 이집트의 대추야자 화폐 외에도 설탕, 생선 등이 그것이다. 식민시대 동안 미국인들이 일시적으로 위스키와 브랜디를 공식화폐로 사용했고 1642년 버지니아에서는 담배가 법적인 지불수단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식민지 정착민들을 위해 수입된 젊은 여자들의 가격은 담배 100파운드였고 수요가 급증하자 150파운드로 올랐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현물화폐들과 함께 금속도 사용되었는데, 화폐가 동일한 크기에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금속은 현물화폐에 비해 매우 큰 장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금속은 종류에 따라 적은 양이라도 상대적으로 큰 가치를 가질 수 있어 특히 장거리 상거래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장신구나 도구, 무기의 형태로도 금속이 화폐 기능을 했던 듯하다. 플루타르코스(46?~120?)에 의하면 철이 그리스에서 제일가는 화폐 금속이었고 스파르타인들이 지불수단으로 철을 가장 오랫동안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금속들 중에서도 금과 은이 화폐 자리를 독차지하게 된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은은 달의 여신, 금은 태양신의 상징물로 여겼다. 
  금과 은은 환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어서 가치변동이 적고 가치보존의 기능도 매우 뛰어난 금속이며, 조각으로 나누거나 그것들을 모아 큰 덩어리로 만들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금과 은의 무게는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표현할 수 있어서 가치관계가 안정적으로 표현되며, 저장과 수송에 드는 비용도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금과 은의 특성 때문에 차츰 다른 현물화폐들을 밀어내고 화폐의 자리를 독점하게 되었다. 금과 은은 “상품들 간의 교환을 매개하는 임무를 수행할 뿐 그 자체로 특정한 수요가 없는 절대적 척도를 갖는 물건, 상품교환의 매개수단이자 유통수단”이라는 본격적인 의미의 화폐 기능을 수행했다. (클라우스 뮐러, 『돈과 인간의 역사』 참조 및 인용)
  고대로부터 화폐에는 중립적인 가치가 부여되었다. 1세기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섬유업자들이 공중변소에서 수거한 오줌으로 양털의 기름기를 제거한다는 이유로 소변에 세금을 매겼다는 일화가 있다. 황제는 아들 티투스의 코에 이 세금을 가져다준 산물인 소변을 들이대고 그 동전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프랑스 속담,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와 일맥상통한다. 풍자작가 유벨나리스도 “이윤에서는 재화가 무엇이든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난다.”(『풍자시』, 201~205)라는 말로 돈의 물질성보다 실용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속담을 패러디한 “돈에는 냄새가 없다. 그러나 백만이 넘으면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는 근대 이후의 새로운 속담은 고질적인 돈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꼬집고 있다. 
  대규모 무역이 쇠퇴하고 기독교의 지배가 확고해지는 중세로 접어들면 서구 사회에서 화폐의 사용과 기능은 점차 약화된다. 대영주들과 교회가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들 권력층의 기반은 주로 땅과 농노, 독립성이 줄어든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부역과 납세의 의무가 있었고, 영주와 교회는 일부 세금을 현금으로 받기도 했지만, 교회 특히 수도원들은 현금으로 받은 십일조와 교회 영지의 개발로 얻은 수익금을 쌓아두었다가 화폐가 필요할 경우 그것들을 주조하여 다시 화폐로 만들곤 했으므로, 화폐는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6세기 말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는 약 2000명의 주조 장인을 둔 900여 곳의 주화 생산지가 있었다. 메로빙거 왕조(481~751) 때 금화의 무게와 순도가 점차 낮아지자 7세기에는 그것을 은화로 대체하되고, 8세기 중반 카롤링거 왕조가 주화를 개혁하면서 은본위제가 시행되었다. 프랑크족의 왕인 소 피핀(714~768)은 왕만 돈을 주조할 수 있게 하고, 빈민구호금을 제정하여 성목요일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을 나눠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로마 황제들을 본떠 왕들은 자신의 얼굴을 동전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중세에 화폐의 기능이 약화된 데는 신도들에게 돈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합당한 화폐 사용법을 가르친 기독교 교리의 영향도 컸다. 교회가 돈을 가진 사람들을 판단하고 필요할 경우 단죄하기 위해 근거로 든 성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죄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할지니” (<집회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있지 않다.” 
“너희는 너희 소유를 팔아서 자선을 베풀어라.” 
“나쁜 부자는 지옥에 가는 반면 가난한 라자로는 천국에서 대접받는다.” (<누가복음>)

  기독교 교리는 영혼 구원의 관점에서 가난을 예수가 구현하고자 한 이상으로 제시하며 탐욕을 단죄하고 자선을 예찬했다. 중세의 종교화에서 돈에 대한 경멸과 돈과 지옥의 연계를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도상들도 찾아볼 수 있다. 30 드니에를 받고 예수를 팔아넘기는 유다는 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12세기 일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환희의 정원』에는 돈을 받는 유다의 도상에 “유다는 고리대금업자를 구현하는 최악의 상인이다. 예수는 재물에 희망을 두고 돈이 승리하고 통치하고 지배하기를 원하는 장사꾼들을 신전에서 내좇았다.”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또한 화폐를 상징하는 대표적 도상은 지옥으로 가는 부자의 목에 걸린 돈주머니로, 흔히 고딕 성당의 팀파늄과 기둥에 새겨진 조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테의 『신곡』(1321)에도 “그들은 모두 목에 돈주머니가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색채가 선명했고 각기 다른 문장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의 눈은 그 주머니에 골몰해 있는 것 같았다”와 같은, 지옥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12~13세기에는 도시가 발달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대규모 정기시장이 열리면서 화폐의 통화량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금융거래와 환전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런 직무를 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르주아들로, 이들은 십자군 원정에 재정적 지원을 한 영주의 파산과 반비례하여 부를 축적했다. 차츰 자치권을 얻고 독립적이 된 이들 도시에는 대규모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돈을 축재할 수 있었던 교회와 도시의 부르주아들이 그 비용을 충당했다. 정당하게 축재를 할 수 있었던 교회, 특히 당시 클뤼니 수도원이 속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주요한 대부업자 노릇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자크 르 고프, 『중세와 화폐』 참조) 
  13세기 이후 가장 눈에 띄는 징후는 교회가 고리대금을 둘러싸고 벌였던 토론이다. 교회는 경우에 따라 고리대금업을 비난하고 단죄시하는 강경한 태도와 어느 정도 면죄부를 주고 그 유용성을 인정하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던 알베르투스(1200~1280)가 1257년 경 한 설교에서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마태복음> 5장 14절)를 주제로 도시를 찬양하고 상인과 부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기념물들을 선사하여 도시의 대광장에 지상 천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레스터 리틀, 『중세 유럽의 종교적인 가난과 수익 경제』 참조) 
  도시는 새로운 부만 창출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난도 창출했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농촌보다 도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화폐유통의 증가와 더불어 대부업과 자선 행위도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3세기 이후 도시에서는 의학 등 전문직에 종사하며 소득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가난한 기독교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대부업이 번창했다. 
  이 시기 논쟁의 핵심은 이자의 문제였다. 교황청은 교리에 입각하여 기독교인인 채권자가 기독교인인 채무자에게 이자를 징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출애굽기>) 

“너희 동족 가운데 누가 옹색하게 되어 너희에게 의탁해야 할 신세가 되거든 너희는 그를 몸 붙여 사는 식객처럼 붙들어 주고 함께 데리고 살아라. 너희는 그에게서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한다.” (<레위기>), 

“외국인에게는 변리를 놓더라도 같은 동족에게는 변리를 놓지 못한다.”(<신명기>)

  13세기에 교회 법전은 돈을 빌려준 대가로 대부금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고리대금으로 간주했고, 고리대금을 오로지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을 훔치는 일종의 도둑질로 여겼다. 

“고리대금업자들은 말이 말을 낳게 하거나 노새가 노새를 낳게 하는 것처럼 돈이 돈을 낳게 하기를 원하면서 자연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다. 더군다나 고리대금업자는 자신들의 소유가 아닌 시간을 팔기 때문에 도둑들이고, 그 소유자의 뜻에 반하여 생경한 재산을 파는 것이어서 그 역시 도둑질이다. 게다가 그들은 돈을 기다리는 시간, 결국 낮과 밤의 시간 외에 아무 것도 파는 것이 없다. 낮은 밝음의 시간이고 밤은 안식의 시간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빛과 안식을 파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영원한 빛과 안식의 소유자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중세와 화폐』에서 재인용)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267~1274)

  수도원이나 성당에 부속된 학교 밖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업료를 받은 새로운 전문계층, 이른바 신지식인들 또한 신의 소유인 학문을 팔았기 때문에 “단어를 파는 사람이자 단어의 상인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리로 번 돈은 영혼의 죽음을 가져온다.” (교황 성 대 레오 1세, 5세기 중엽)
(자크 르 고프, 『돈과 구원』에서 재인용)

  고리대금업자가 두려워한 것은 죽은 뒤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져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리대금업자에게 교회가 제시한 구원의 방법은 자선 또는 기부였다. 고리대금업자가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은 고리대금으로 얻은 이익을 교회와 가난한 자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최선은 고리대금업자가 죽기 전에 반환하는 것이었지만, 유서에 반환의 의사를 남기면 사후에 구원받을 수도 있었다. 그 반환이 얼마나 완수하기 힘들었는지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보여준다. 

“그는 돌려준다는 것(rendre)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어서 그 단어를 발음할 때조차 두 개의 ‘r’ 때문에 목구멍에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이니, 타인의 재산을 빼앗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말했다. 두 개의 ‘r’은 악마의 갈퀴를 의미하며 그 갈퀴는 타인의 재산을 돌려주려는 자들을 항상 뒤에서 잡아당긴다.” (주앵빌, 『중세와 화폐』에서 재인용)

  이자는 14~15세기를 거치면서 차츰 정당성을 획득했다. 이는 선량한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하는 고리대금업자들의 소망과 가장 나쁜 죄인들까지 구원하려는 교회의 소망이 일치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카리타스’ 즉 자비를 채 실천하지 못한 죄인이 죽으면 그의 상속자가 죄인의 죄를 대속할 때까지 죽은 영혼이 반성하며 대기하는 장소인 연옥이 탄생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고리대금업자가 구제된 오래된 사례는 한 수도사가 쓴 『기적들에 관한 대화』(1220년경)라는 책에서 볼 수 있다. 

“수사: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일인데, 리에주에 살고 있던 고리대금업자 한 명이 죽었다. 주교가 그를 묘지에 묻기를 거절하자 고리대금업자의 아내는 로마 교황청에 가서 남편을 성지에 묻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교황이 거절하자 그 여자는 이렇게 남편을 옹호했다. ‘교황님, 남편과 아내는 한 몸이라 했습니다. 또 사도의 말로는, 불신자 남편은 신실한 아내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제 남편이 잊고 행하지 못한 것을 그의 일부인 제가 그를 대신하여 기꺼이 행하려 합니다. 저는 그를 위해서 은둔 수녀가 되어 그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속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추기경들의 청에 못 이겨 교황은 죽은 이를 묘지에 묻고록 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무덤 옆에 거처를 정하고 은둔 수녀처럼 칩거하면서 자선과 금식, 기도와 철야로ㅆ 하느님의 노여움을 가라앉혀 남편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밤낮으로 노력했다. 7년이 흐른 뒤에 그의 남편이 감은 옷을 입고 그녀 앞에 나타나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갚아 주시기를. 당신이 겪은 시련들 덕분에 나는 지옥 깊은 곳의 가장 끔찍한 형벌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소. 당신이 만약 앞으로 7년 간 나를 위해 그같이 해준다면 나는 완전히 풀려날 수 있을 것이오.’ 그녀는 그대로 했고, 남편은 7년 뒤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흰 옷을 입은 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느님과 당신에게 감사드리오. 나는 오늘 풀려났다오.’” (자크 르 고프, 『돈과 구원』 참조 및 재인용)

  이어서 리에주의 고리대금업자가 영혼이 해방되기까지 중간에 머물렀던 그 곳이 연옥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돈과 구원의 이러한 타협은 14세기에 지오토 디 본도네가 그린 그림에도 선명하게 나타나있다. 
  지오토의 <최후의 심판>은 신흥부자인 스크로베니 가문의 엔리코의 주문으로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 엔리코는 아버지 사업을 계승해 발전시켰지만, 고리대금업자였던 아버지의 영혼― 단테는 『신곡』에서 그가 지옥에 빠져있는 모습을 묘사한 바 있다. ―을 구원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예배당을 지어 교회에 헌납했다. 지오토의 그림에는 예배당을 교회에 바치는 엔리코가 묘사되어있다. 그는 위대한 자선가로 남겨졌다. 
  돈이 갖는 구원의 힘은 더욱 강해져서 15세기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베드로 성당의 신축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1506년에 면죄부를 발행했다. 교황은 돈을 많이 바치는 사람에게 교회의 관직을 내주었고, 면죄부를 팔고 다닌 도미니크회 수도사 요한 테첼(1456?~1519)은 “금화가 상자 속에서 쩔렁거릴 때 영혼은 천국으로 승천한다.”는 시구를 되뇌었다고 한다. 영혼도 구원하는 돈의 힘은 자본주의가 정착하고 점점 더 많은 부와 더 비참한 가난이 창출되는 18~19세기에 이르면 더욱 강해진다. 

“오! 명심할 지어다. ‘자본’은 당신네들의 말을 듣고 달아나버린다! […] 자본은 가능한 어떤 법령이나 혁명적인 어떤 조치가 아무리 탄환을 쏘아대도 사정거리 밖에 있다. 매우 효율적이라고 여겨진 어떤 권력도 자본을 잡을 수는 없었다. 역사를 뒤져보라. 중세 때 아무리 가혹하기 이를 데 없던 형벌도 유대인의 금고에서 단 한 푼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가? 루이 14세는 1708년에 돈을 확보할 수 있었는가? […] 국민공회가 사형으로 다스리고 국유재산 매각으로 뒷받침했어도 아시냐의 하락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가? 결코 그러지 못했다. 그 어떤 유명하고 확실한 예들을 들이대려 해도 소용없다.” (발자크, 『노동에 관한 편지』, 1848)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돈을 나타내는 러시아어 ‘덴기 деньги [dengi]’는 ‘화폐, 돈’을 의미하는 터키어 ‘탕카 täŋkä’, ‘텐게 теңге’를 차용한 것이다. 터키어 ‘탕카, 텐게’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작은 은화, 구리 동전’을 뜻하는 이 단어는 ‘탕가, 텐가, 탄카’ 등으로 인도, 티베트, 네팔 등의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이 어원은 현재 카자흐스탄의 ‘탱게 тенге' 라는 화폐 단위로 쓰이고 있다 . 

1) 그리브나 

  러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화폐는 11세기경에 키예프 루시에서 사용되었던 ‘그리브나’이다. 그리브나는 ‘목걸이, 반지, 장식품, 돈’을 뜻하는 고대 러시아어 ‘그리브나 гривьна’에 어원을 두고 있다. 키예프 루시 시절에 그리브나는 원래 ‘목에 두르는 금 쇠사슬 장식’을 의미하였는데, 이것은 공후들만 두를 수 있는 특별한 장식이었고, 때때로 공후들이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애초에 그리브나는 고귀한 금속 (주로 은)의 무게 단위로 사용되었고, 약 204g의 은괴를 1 그리브나로 책정하고 거래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키예프 루시 사회에 화폐의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그리브나는 중량 단위로 사용되었고, 은괴 형태의 그리브나를 주화 모양으로 제조하고 ‘쿠나 куна’라는 보조 단위를 붙여 ‘그리브나 쿠나’라는 화폐로 사용하였다. ‘쿠나’는 당시 물물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담비 (쿠니차 куница) 가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1 그리브나 쿠나는 1 그리브나의 약 4분의 1인 51g의 은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키예프 루시는 11세기경부터 약 140-160g의 육각형 형태의 그리브나를 제작하여 매매의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형태의 그리브나는 고대 러시아 여러 공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13세기 무렵 루시의 중심이 키예프에서 노브고로드 공국으로 넘어가면서, 자연히 키예프의 그리브나는 당시 상업이 발달하였던 노브고로드 그리브나로 대체되었다. 무게 약 204g의 노브고로드 그리브나는 막대 모양의 은괴로서 1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 루시 공국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한편, 이 시기부터 노브고로드 그리브나는 종종 네 등분으로 잘라서 통용되기도 했는데, 잘라진 각각의 그리브나를 오늘날 러시아 화폐 단위로 사용하는 ‘루블’로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리브나는 키예프 루시의 후손격인 우크라이나의 공식 화폐 단위이기도 하며, 표트르 대제 시절인 1699년에 ‘그리벤니크’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10코페이카 은화를 지칭하기도 한다. 

2) 루블 (рубль)

  오늘날 러시아의 공식 화폐 단위로 사용되고 있는 ‘루블’의 어원은 ‘자르다’라는 러시아어 동사 ‘루비티 рубить’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노브고로드의 그리브나를 네 등분으로 잘라서(рубить) 사용함으로서 통용되기 시작했으며, 1316년에는 그리브나를 대신하여 루블이 공식적인 화폐 단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루블의 어원에 관해서는 다른 의견들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노브고로드 그리브나를 네 등분으로 잘라서 사용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4분의 1, 네 개의 조각’을 의미하는 아랍어 ‘루브 ربع‎‎ рубъ’에서 기원했다는 설과 네 등분으로 잘라낸 각각의 ‘가장자리 (루베츠 рубец)’, ‘벤 자국 (루베즈 рубеж)’의 어원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초기의 루블은 오늘날과 같은 지폐나 주화의 모양이 아니라 그리브나를 절단한 은괴형태로 통용되었다. 이후 루블은 14세기 중엽에 모스크바 공국에서도 그리브나를 대신하는 화폐 단위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3) 코페이카 (копейка)와 덴가 (денга) 

  현재 루블의 보조 단위 (1/100 루블)로 사용되는 코페이카의 어원은 ‘창’을 뜻하는 러시아어 ‘코피요 копьё’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정설이다. 코페이카는 초기에는 루블의 보조 단위의 의미를 지녔지만, 루블보다 더 확산되어 사용된 화폐였다. 
  13-14세기 러시아는 노브고르드 공국과 모스크바 공국이 패권을 다투는 시기였는데,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코페이카’와 모스크바 공국의 ‘덴가’ 화폐가 주로 사용되었다.

  노브고로드 공국의 ‘코페이카’ 주화에는 말을 탄 채로 ‘창’을 들고 용을 무찌르는 공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그 무게가 루블의 1/100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모스크바 공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양의 주화를 제조하였는데, 그 주화에는 공후가 ‘창’이 아닌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당대인들은 창을 들고 있는 노브고로드의 주화를 ‘코페이카’로 불렀고, 모스크바의 주화를 ‘덴가’로 불렀으며, 여기에서 돈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덴기’가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모스크바 공국이 1478년에 노브고로드를 점령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덴가를 제조했는데, 주화에는 성 게르르기우스가 ‘창’으로 용을 무찌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이때부터 모스크바 공국의 이 주화는 덴가라는 명칭 대신에 코페이카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모양은 제정러시아, 소비에트 러시아 시대를 거쳐 현대 러시아 코페이카 주화에도 담겨져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흔히 근대의 시작이라 불리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대금업 가문 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며 명성을 누린 메디치 가문에 의한 것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메디치라는 이름은 의료 분야의 직업에 종사한 누군가로부터 내려온 혈통임을 나타낸다. 당시 상인이었던 지오반니 디 비치 드 메디치(1360-1429)가 은행업을 시작하면서, 두 아들 코시미와 로렌조는 가장 주목받는 은행가이자 상인인 동시에 피렌체의 통치자이자 교회의 추기경으로 활동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을 만들고 그들이 얻게 된 정치권력과 영광을 예술을 후원하는 일에 바쳤다. 메디치 가문은 당시 피렌체에 존재했던 다른 부유한 상인 가문들 중에서도 자신들이 획득한 부와 사업적 성공을 정치적 권력과 귀족적 명예로 재탄생시킴으로써 유럽 전체에서 사회적,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 되었는데, 이는 명실공이 고리대금업자의 승리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프랑스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상업의 방향을 제시하고 예술 형식을 전파했다. 16세기 미셀 드 몽테뉴가 쓴 작품 『수상록』(1571)의 프랑스어 제목 ‘에세essais’는 시장에서 사용되는 동전과 보석들을 평가, 검사하며 이루어진 실험과 그것의 시행이란 개념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시기에 돈은 서유럽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리들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것으로 자리 잡는다. (잭 웨더폴드, 『돈의 역사와 비밀』 참조) 

“돈을 앞세우면 모든 문이 열린다.” (셰익스피어, 1564~1616)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에 돈과 관련된 모티브들이 등장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이 명예나 권력, 사랑이 아닌 돈과 재물 때문에 갈등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고리대금업자나 수전노 같은 인물이 주역이 되기도 했다. 
  시대의 풍속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몰리에르의 작품 『수전노』(1668)는 당시 수많은 고리대금업자들이 활동하고 있던 파리에서 탄생된 작품이다. 몰리에르 연구가 앙투안 아당은 이 작품의 주인공 아르파공의 실제 모델이 장 타르디외라는 한 몰락한 귀족으로 추정했다. 장 타르디외의 아버지는 파리 고등법원에서 일한 경력을 바탕으로 1576년 귀족의 작위를 사들인 사람이었으며, 그가 1638년 결혼한 아내는 자신보다 더 지독한 수전노 여인이었다고 한다. 고리대금업으로 악명 높았던 이 부부는 결국 집안에 든 도둑들에 의해 살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사건은 몰리에르가 『수전노』를 쓰기 일 년 전에 일어났다. (김익진, <아르파공, 귀족 부르주아> 참조) 아르파공이 돈을 도둑맞고 절규하는 대목은 돈이 그에게 그 자체로 절대적 목적이며 나아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짐을 보여준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강도야 ! 살인자야! 정의의 신이시여! 나는 돈을 잃고 암살당했습니다. 내 목이 잘렸습니다. 오호! 내 불쌍한 돈, 내 친구, 내게서 너를 앗아가다니. 네가 내게서 없어진 이상 나는 내 발판을, 위안을, 기쁨을 잃었다. 모두 끝장이다. [...]
네가 없이 나는 살 수가 없다. 끝장이다,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었다, 매장되었다.” (『수전노』, 1668)

  몰리에르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글쓰기는 매춘과도 같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 다음에는 몇몇 친구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 글을 쓴다.”라는 말로 인간에 대한 돈의 공고한 지배력을 인정했다. 명예와 정념 사이에서 갈등하다 파국에 이르는 정념비극의 작가 장 라신도 “돈이 없다면 명예는 질병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돈 앞에 선 인간의 초라함을 한탄했다. 정념을 억누르고 인간의 고귀함을 지키려는 의지비극의 작가 코르네유의 작품, 『오라스』(1640)에도 “돈을 벌어라, 할 수 있다면 공정한 방법으로, 그렇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벌어라”, “우선 돈을 벌어라, 미덕은 이어서 따라온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네덜란드 화가들을 중심으로 ‘바니타스 즉 헛됨’을 주제로 한 정물화가 유행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고자 한 이 정물화들은 보석이나 귀금속을 소멸하는 생명의 이미지와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화려한 부와 인생의 허망함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켰다.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현실을 장악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이후에도, 사용가치 이상을 돈에 부여하지 말 것과 돈에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계속 있어왔다. 

“일생동안 돈을 모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죽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돈은 그것을 경멸할 때 평가할 만한 것이 된다.”
“돈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돈을 낭비하는 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수전노들은 더더욱 모른다.” (몽테스키외, 1689~1755)

“예술가가 돈을 생각하는 순간 그는 미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 (디드로, 1713~1784)

  한편 18세기는 초기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증대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학문과 예술, 사치, 상업, 법률 등의 발전에 매혹되어 부의 증대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이 확산된 시기였다. 이윤의 추구라는 개인의 합리적 활동이 결국 선을 이루리라는 믿음은 “각 개인은 거의 동일한 조건으로 공동체와 계약을 맺는다. 그는 공동체에 말한다. ‘나를 도우면 나는 내 힘으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또 내게 도움을 주면 당신도 내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계약은 매순간 반복된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과 불이익을 계산하고 비교해보면 항상 균형을 이루게 된다.”(돌바크, 『자연적인 정치 또는 정부의 진정한 원칙에 관한 개론』, 1733)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난다. 

“돈은 알라딘의 램프다.” (바이런, 1788-1824)

  프랑스에서 종이화폐가 발행된 시기는 루이 14세가 사망할 무렵이다. 당시 엄청난 국가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광적인 도박꾼이었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탈출한 영국인 존 로를 영입했다. 그는 ‘신용의 발전은 인도의 발견과 비견될 만한 것’이라고 믿는 신용제도 신봉자였다. 그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왕실은 국왕이 보증한 금속화폐 대신 종이화폐를 발행한다. 1716년 존 로는 왕실로부터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주식은행 설립허가를 받아냈고, 식민지 무역에 기여할 회사설립에 착수하면서 주식을 발행했다. 이윤에 대한 기대로 주가는 상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금화를 은행권으로 바꾸기 위해 로의 사무실로 몰려”들었고(러시아 여행객 니콜라이 카람진의 기록), “하인들 심지어는 학자들까지도 행운을 낚으려는 무리들 속에 끼어들었다.”(루이 세바스티엥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781) 존 로는 학술원 회원이 되고 1720년에는 재무장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주가가 하락세로 돌아서고 화폐가 과잉 공급되면서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자 온 국민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돈이 만들어낸 새로운 부와 새로운 가난은 18세기, 성직자, 귀족, 평민으로 이루어진 구체제의 신분체제에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새로운 계층구분을 첨가시켰다. 사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불평등한 계약에 기초해있어 인간 사회에 불평등이라는 악이 생겨났다는 장-자크의 주장이 나온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다.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나는 부유하고 당신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끼리 합의를 하자. 나는 당신이 내가 명령하느라고 든 수고에 대하여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을 준다는 조건에서 나를 섬기는 영광을 갖는 것을 허락하겠다.” (장-자크 루소, 『정치경제』, 1764)

“사람들이 소유하는 돈은 자유의 수단이지만, 추구하는 돈은 예속의 수단이다.” (장-자크 루소)

  『마농 레스코』(아베 프레보, 1731)의 주인공 철학도 슈발리에 데 그리외와 어린 마농 레스코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돈 때문이다.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외 몰래 돈을 받고 정부 노릇을 한 마농과 그것을 알게 된 그리외의 고통, 그리외 역시 생계를 위해 암거래에 얽혀 들어 체포되고 이어지는 질병, 이별, 피신 생활까지, 그들의 사랑은 순수한 그들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 막을 내린다. 『마농 레스코』는 모든 것이 돈의 압력에 굴복해버린 세상에서 인간이 행복과 만족을 찾는 일이 얼마나 헛된가를 보여준다. 
  역사학자 미슐레는 근대적 정치체제가 구축되는 19세기에 만연해진 돈과 정치의 유착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정치는 서로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부자들에게서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는 표를 얻어내는 기술이다.” (쥘 미슐레, 1789-1874) 

“일해서 부자가 되라. 그러면 유권자가 될 수 있다.” (1830, 7월 왕정의 내무대신 기조)

  부자는 이제 자선이라도 해서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정체를 숨겨야 하는 죄인이 아니라 당당한 사회의 주도 계층이 되었다. 이제 돈의 엄청난 위력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돈의 위력을 인정하고 나아가 예찬하는 풍조를 만들어내는 한편, 인간을 왜곡하고 소외시켜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돈의 폐해에 대한 강한 비판도 야기했다. 

“아! 내가 그토록 경멸했고 어떻게 해도 사랑할 수 없는 돈, 그렇지만 너의 장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의 원천인 너는 우리 삶의 온갖 것들을 정리해주어 네가 없이는 모든 것이 힘겹다.”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무덤 저 너머의 회상』, 1848)

“피로 결합되었다가 돈 문제로 사이가 틀어지는 개인들의 집단을 가족이라 부른다.” (에두아르 레이, 1836-1901)

“나는 가난해질까 두렵다. 나는 돈을 좋아한다......“(조르주 다리엥, 1862~1921, 무정부주의적 성향의 작가)

“인민의 피, 그것이 돈이다. 사람들은 수세기 전부터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어왔다. 돈은 모든 고통을 풍성하게 요약한다.” (레옹 블루아, 1846~1917)

“자본주의 사회에 돈을 주어보라. 그러면 세상의 종말마저도 막으려 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돈, 돈, 돈을 주어보라. 그러면 인간의 피를 모조리 짜낼 것이다.” (D.H. 로렌스, 1885~1930)

  발자크(1799~1850)의 편지의 한 구절, “내가 빠져있는 혼란은 엄청난 것입니다. 파산이지요. 그렇지만 그건 내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난 우리 둘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야 합니다. 난 지금 게다가 엄청난 빚을 안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불가마 속에 빠져있는지 그냥 잊으세요.”(발자크,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847)는 그가 “피 대신 돈이 순환하는 육체”라는 평을 들을 만큼 “돈에 예속된 인간의 정념을 뛰어나게 비판적으로 묘사한”(이철의, <발자크와 1848> 참조) 『인간희극』을 집필할 수 있었는지 설명해준다. 

“빌어먹을 돈! 빌어먹을 소설! 소설을 험담하는 사람들이 옳습니다! 나요, 난 소설을 증오합니다. 특히 완결지어야 할 소설들을 말입니다.” (발자크,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846)

“오늘 아침 증권거래소의 시황표를 보고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용기와 재능, 그 동안 꺾여 있던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엄청나게 솟아올랐습니다.” (발자크, 『한스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848)

  19세기에는 돈이 인간의 피를 어떻게 짜내는지를 보여주는 많은 프랑스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담 보바리』(1857)에 나오는 장사꾼 뢰르도 그 중 하나이다. 포목상이자 고리대금업자인 그는 상인이 아니 인간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기게 돈을 추구하는 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엠마의 허영심을 부추기고 비위를 맞추며 소비와 사치를 권장하고, 그 비용을 남편인 의사 샤를에게 부풀려 청구한 끝에 결국 곤궁한 샤를에게 돈을 꾸어주고 어음을 받아낸다. 그는 “마음 착한 뢰르 씨”라 불리며 엠마의 모든 연애 행각과 사치와 소비에 조력자를 자처하고 자금을 조달한다. 마침내 그녀가 더 이상 지불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뢰르가 그녀가 서명한 어음들을 돌리고 다시 한 번 ‘착하게도’ 엠마에게 어음을 끊어주며 말미를 줄 때, 뢰르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거둬들여야만 하는 돈의 하수인이다. 플로베르의 결론은 “돈은 행복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28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에밀 졸라의 소설 『돈』은 돈의 현실적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고단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부자가 되고 싶은 아내를 위해 남편 아멜랭이 금융계를 주무르는 사카르와 손을 잡고, 탐욕에 눈이 먼 사카르가 투기를 조장하며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다 금융계의 작전에 말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다. 돈의 주인에서 노예로 전락한 자본가와 벌레처럼 그의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의 군상에서, 이 작품을 영화화한 감독 마르셀 레르비에는 인간의 추악한 영혼을 본다. 

“돈은 내일의 인류가 돋아나게 하는 퇴비이다. […]독살자이고 파괴자인 돈은 모든 사회라는 식물의 효모가 되었다. 민중들을 서로 가깝게 만들고 땅을 평화롭게 만들 대 공사에 필요한 부식토 역할을 했다.” (에밀 졸라, 『돈』, 1891) 

  “돈이 엮어내는 드라마에 대한 두려움”(에밀 졸라, 『돈』, 1891)은 20세기 이후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에게 그 어떤 재앙보다 위협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모든 매음과 음주벽 그리고 탈선은 부자에게는 특권이었고 가난한 자에게는 범죄였다” (토마스 울프, 1900~1938) 

  돈은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돈은 심술궂고 변덕스럽지만 또한 자극적이고 유혹적이다. “돈은 선에서 악이, 악에서 선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천사이자 악마이고 천국이자 지옥이며 독재자이자 친구다.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빛나는 꿈이요 저주 중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저주이다.” (클라우스 뮐러, 『돈과 인간의 역사』) 돈과 관련된 많은 속담과 통설들은 돈에 대한 균형 잡힌 태도가 늘 필요함을 말해준다. 

“부자들은 돈이 더 많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가 더 많다.” 
“사람들은 자주 돈을 경멸한다. 특히 돈이 없는 사람들이.”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마다 당신은 그의 기억을 파손한다.”
“돈은 만병통치약이다. 구두쇠병을 제외하고.”
“현금이 치료약이다.” 
“돈 없이 지내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다.” (발자크, 『루이 랑베르』, 1832)

“젊은이들은 돈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늙으면 그것을 확신한다.” (오스카 와일드, 1854~1900)
“부는 바닷물과도 같다. 많이 마실수록 점점 더 목이 마르다.” (아르튀르 쇼펜하우어, 1788~1860)

“돈은 돈이 없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보리스 비앙, 1920~1959) 

“돈 문제를 꼬치꼬치 따지는 일은 사랑보다 인간을 더 바보로 만든다.” (윌리암 그래드스턴, 영국의 정치가, 1809~1898)

  신성한 노동을 통한 축재를 신이 허락한 정당한 활동으로 받아들인 신교의 교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가톨릭의 전통적 교리가 오랫동안 지배력을 가졌던 프랑스는 영국이나 독일,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본주의의 정착이 느린 편이었다. 이미 16세기 말에 이자 대출을 합법화한 스위스, 영국, 네덜란드보다 2세기 뒤인 1789년에야 프랑스가 이자 대출을 합법화한 것이 그 일례이다. 20세기 이후 전후복구를 위해 경제발달에 주력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프랑스인들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야만적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돈은 항상 순환되어야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거나 덧없는 것들을 사는 데 소비되어야 하고, 돈을 써버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위인 반면 돈을 벌거나 축적하고 돈에 집착하는 것은 천한 행위로 여기는 오랜 귀족 정신도 귀족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다른 계층에게로 전파된 프랑스에서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돈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할 수 있을 때 돈을 잡아 창밖으로 집어던져야 한다. 더러운 것을 주머니에 간직하면 결국엔 언제나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마르셀 에메, 『말썽꾸러기』, 1931)
“자신의 봉급에 대해 쉽게 말하는 영국인이 70%인 데 반해 프랑스인은 47%에 불과하다”(『프랑코스코피』, 2001)는 한 통계가 보여주듯 프랑스인들은 돈의 노골성을 덜 직시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김정희, <프랑스식 자본주의>,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2004)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화폐 개혁> 

1. 1535년 옐레나 글린스카야의 화폐 개혁 - 화폐 단위를 코페이카로 통일 

  중앙 정부 차원에서 실시된 최초의 화폐 개혁은 1535년 바실리 3세의 미망인이자 이반 뇌제의 어머니였던 공후 옐레나 글린스카야에 의해 실시되었다. 당시 모스크바 공국에서는 여러 공국의 화폐와 외국 화폐 등이 혼용되어 상거래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기에 글린스카야는 이들 모든 화폐 사용을 금지 시키고 모스크바 공국에서 발행한 코페이카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2. 1654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로마노프 황제의 화폐 개혁 - 최초의 1 루블 주화 발행

  알렉세이 로마로프 황제 시절에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은화 ‘탈레르’를 본떠 ‘예피모크’라고 불리는 최초의 루블 주화(은화)가 발행되었다. 탈레르는 체코 동남부 보헤미아 지방의 성 요하임 골짜기에서 생산된 은으로 만든 은화이며, 골짜기를 의미하는 독일어 ‘탈 tall’에서 유래가 되었으며, 미국 화폐 단위 ‘달러 dollar’ 역시 탈레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예피모크에는 처음으로 ‘루블’이라는 글자가 공식적으로 삽입되었고, 비잔틴 제국을 계승하는 의미로 147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쌍독수리의 문양이 정면에, 뒷면에는 말을 타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3. 1700-1718년의 표트르 대제의 재정 개혁 - 10루블 금화, 2루블 금화, 코페이카 동화 발행 

  러시아의 유럽화와 군사 강국화를 추진한 표트르 대제는 1700-1721년에 걸친 스웨덴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함대 건설, 군대 양성을 위한 재원 마련과 경제와 교역 촉진을 위해 15년에 걸친 화폐 개혁을 단행한다. 특히, 표트르 대제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금화 ‘두카토’를 본떠 10루블짜리 금화 ‘체르보네츠 червонец’ (붉은, 주홍빛이라는 뜻의 ‘червовый’에서 유래)와 2루블 금화를 제작하였고, 1704년에 1루블 은화의 100/1 가치를 지닌 코페이카 동화를 발행하였다. 

4. 1769년의 화폐 개혁 - 최초의 지폐 ‘아시그나치야’ 발행 

  1730년에 2코페이카 주화, 1755년에 5코페이카 주화를 발행한 러시아는 1769년에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지폐 발행의 주목적은 첫 번째로 교역과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의 수요가 급증하여 은에 대한 공급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와 더불어 1768-1784년에 걸친 터키와의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것도 지폐 발행을 시행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에 발행된 지폐는 오늘날과 같은 일반 지폐가 아니라, 이른바 ‘위임 지폐, 위탁 지폐’라 불리는 ‘아시그나치야’ (ассигнация -위탁, 은행환이라는 독일어 안바이종 anweisung에서 유래) 지폐였고, 1, 3, 5, 10, 25, 50, 100, 200루블짜리 지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지나친 발행으로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며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는데, 1802년에는 한 해 동안 총 20억 루블이 발행되기도 했다. 1797년에는 정부가 아시그나치야의 발행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으며, 파벨 1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6만 루블을 공개적으로 소각시키기도 했다. 특히 1812년 프랑스와의 조국전쟁 당시에는 수많은 위조 아시그나치야가 통용되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으며, 결국 아시그나치야는 1843년 화폐 개혁 당시 폐지되었다. 

5. 19세기 중, 후반의 화폐 개혁 

  1843년 니콜라이 1세 시절에 러시아는 아시그나치야 루블을 폐지하고 새로운 지폐 제도를 도입한다. 이른바 ‘신용화폐’라 불리는 ‘크레디트느이예 빌레트이’를 발행하면서 러시아는 화폐 유통, 특히 지폐 유통이 매우 활발히 전개된다. 이후 1897년 니콜라이 2세 시절에 당시 재무 장관이었던 니콜라이 비테의 주도로 은화를 없애고 금화 루블을 도입하는데 1, 2, 5, 10, 15, 20, 50 루블짜리 금화를 제조하였다. 이후 금화 루블은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중단되었다. 
  이 당시 발행된 신용지폐는 지폐의 색깔과 형상에 따라 별칭을 지니고 있었는데, 루블의 단위보다 이러한 별칭으로 일반 사회에 더 통용되었고, 특히 문학 작품에서 그러한 현상들이 더 두드리게 나타나곤 하였다. 루블에 따른 별칭은 다음과 같다.

* 1루블 - 죨텐카야 (노란색)
3루블 - 젤레누쉬카 (초록색)
5루블 - 시넨카야 (파란색)
10루블 - 크라스넨카야 (붉은색)
25루블 - 벨렌카야 (하얀색)
50루블 - 별칭 없음
100루블 - 카테린카
(예카테리나 여제의 이름을 변형)
500루블 - 페트로브카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변형)[img135 참조]


6. 소비에트 시대의 화폐 개혁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 정부는 1918-1922년의 내전을 경험한 후, 피폐된 국내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정 부분 자본주의를 허용하는 ‘신경제정책 (네프)’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지속된 네프 시기에 소비에트 정부는 대대적인 화폐 개혁을 시행하는데, 지폐의 경우 제정 러시아 시대의 신용지폐를 없애고 1922년에는 우표 형식의 루블 지폐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1, 3, 5, 10루블 주화 (금화)를, 10, 15, 20, 50 은화 코페이카, 0.5, 1, 2, 3, 5 동화 코페이카를 발행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형식의 일반 적인 지폐 모양은 1961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고, 1991년 소연방 해체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한 러시아는 1998년에 루블의 평가절하 정책을 시행하면서 현재의 화폐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발행되고 있는 루블은 50, 100, 100, 500, 1000, 5000 루블 지폐와 1, 2, 5, 10루블 주화를 쓰고 있다. 코페이카는 1, 5, 10, 50 코페이카 주화가 발행되고 있으나 실생활에서는 거의 쓰여지지 않고 있다. 2013년 현재 루블당 원화의 환율은 1루블이 약 35원 정도이다. 

7. 코페이카의 별칭

  코페이카가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16세기 중엽부터 오랜 시간을 걸쳐 코페이카는 그 단위마다 독특한 별칭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2코페이카, 10코페이카 등의 명칭보다는 다음과 같은 코페이카의 별칭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폴루쉬카 полушка - 1/ 4코페이카 (1700-1916)
덴가 деньга - 1/ 2코페이카 (1700-1916)
그로쉬 грош - 2코페이카 (1724-1916) 
알트인 алтын - 3코페이카 (1827-1916)
드부흐그로쉐비크 двухгрошевик - 4코페이카 (1723-1916)
퍄타크 пятак - 5코페이카 (1701-1917)
그리벤니크 гривенник - 10코페이카 (1701-1917)
퍄티알트인느이 пятиалтынный - 15코페이카 (1760-1917)
드부그리벤느이 двугривенный- 20코페이카 (1760-1917)
폴루폴틴니크 полуполтинник -25코페이카 (1701-1901)
폴틴니크 полтинник - 50코페이카 (1699-1914)

8. 화폐의 가치

  러시아 사회에서 루블이 화폐로서 본격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17세기부터 현재까지 루블의 가치는 시대에 따라 많은 변동을 보여 왔다. 각 시대별 루블의 가치를 모두 다 살펴 볼 수는 없지만 1911년 모스크바 신문에 기재된 당시 물가를 통해 루블의 가치를 참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월평균 급여

8등관 이상의 고위 관료 - 300-400 루블, 회계사, 신문기자 – 100-150루블,
대위 이상의 장교 – 80-200루블, 교사 - 60루블, 전문 기술자 – 70 루블,
일반 노동자 - 25루블, 

2) 교통 및 통신비

전차 - 7코페이카, 
마차 - 15코페이카 (모스크바 절반 정도의 거리)
전보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25단어 미만) -62코페이카

3) 식료품 및 잡화

여성 부츠 - 3루블 50코페이카, 싼 담배 한 갑 - 6코페이카, 
거리에 파는 불린 - 1코페이카, 일반 카페에서 차 한잔 -5코페이카,
보드카 한잔 - 10코페이카, 학생식당에서 점심 -25코페이카,
보통 식당 -55코페이카 , 고급 레스토랑 - 1루블 75코페이카
밀가루 1푼트(0.4kg) – 6코페이카, 빵 - 5코페이카, 계란 10개 -44코페이카, 일반 보드카 한 병 -17코페이카

4) 숙박 시설

노동자 기숙사 한 달 월세 - 2루블, 방 세 개 부엌 한 달 월세 - 50루블,
욕실과 전기 시설 있는 방 5개 월세 -100루블
일반 호텔 하루 숙박료 - 75코페이카, 고급 호텔 하루 숙박료 -10루블

5) 기타

유명 가수가 등장하는 극장 공연 - 1루블, 비싼 표 - 2루블에서 7루블
문서처리를 빨리 해달라고 관리에게 주는 뇌물 – 5-10루블,
경찰서 구류를 피하기 위한 경찰에게 주는 뇌물 - 3루블

<문학에서 돈의 토포스>

  문학에 나타난 돈의 토포스는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러시아 문학이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과 나란히 그 시기 서구 유럽을 통해 유입된 자본주의가 러시아 사회에서 태동되기 시작한 것이 그 이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세기 초 러시아 사회는 1812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의 조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유럽의 문물을 급속도로 받아들이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토포스를 형성하는데, 그 근간에는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넘어온 자본주의와 계몽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계몽주의와 자본주의는 이전 러시아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정교적 금욕과 절제에 대한 표상을 약화시키면서 돈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욕구를 강화시키는 한편, 돈을 축척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출세와 권력에 대한 욕구를 사회 전반에 걸쳐 강하게 상승시켰다. 이러한 돈의 토포스는 당시 러시아 문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러시아 문학에 나타난 돈의 토포스는 주로 주인공들이 돈, 물질에 집착하는 탐욕적인 형상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는데 푸시킨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형상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푸시킨의 작품에서는 돈과 물질에 대한 탐욕의 토포스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벨킨 이야기』(1830)의 <장의사>편에 나오는 물질적 탐욕 속에 갇혀 사는 장의사 아드리안, 『스페이드 여왕』(1833)의 도박에 미쳐 물질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파멸하는 게르만이 그 본보기가 된다. 
  특히, 푸시킨의 희곡 『인색한 기사』(1830) 역시 돈과 탐욕과의 관계가 아주 잘 반영되어 있는데, 돈 때문에 아버지를 결투에서 죽이는 아들 알베르, 돈이 권력이자 행복, 명예, 영광이라고 여기며 극도의 인색함과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을 드러내지만 결국은 파멸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인색한 기사』에서 흥미로운 형상은 이후 러시아 문학에서 탐욕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는 고리대금업자 유대인의 형상이다. 무자비하며 이해 타산적이며 탐욕적인 고리대금업자의 형상은 이후 고골리의 『초상화』(1834)에 나타나는 고리대금업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 알리나 이바노브나로 이어지며, 전당포는 러시아 문학에서 주인공들의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물리적 공간이자 탐욕의 토포스의 직접적인 공간의 역할을 한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돈이다. 한 사람의 비열한 사람을 희생시켜 수만 명의 인간을 구원한다는 이념, 위대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심지어 살인까지 허용된다는 초인 사상과 소냐를 통해 보이는 구원과 종교적 성찰을 다루는 『죄와 벌』(1866)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돈이다. 돈, 그것을 둘러싼 탐욕과 살인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기본적인 동인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이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1880)은 아버지와 큰 아들 드미트리의 3000루블이라는 돈, 그루쉔카를 둘러싼 치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나타나는 돈의 토포스는 19세기말 20세기 초 체호프의 작품들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19세기 말부터 강화된 정부의 반동정책과 억압, 박해로 사회는 침체되었고 세기말초의 프랑스에서 유입된 데카당스한 분위기는 인텔리겐차를 중심으로 무력감과 나태함을 사회 전반에 침투시켰다. 한편에서는 서구의 산업자본주의가 폭넓게 확산되어 러시아 사회에서는 어렵게 얻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사회적 지위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지키려는 분위기가 나타나 소시민적 탐욕이 팽배하게 되었다. 세기말 러시아 문학 작품에서는 이러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반영되었는데 특히 체호프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이다. 
  체호프의 작품에 나타나는 돈의 토포스는 이전의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거대한 액수의 돈이라든가, 높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작은 액수의 돈, 하급관직에 대한 소시민적 탐욕의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체호프의 초기 단편 작품에서는 가족, 가까운 친인척, 남편과 아내, 부모와 아이, 형제, 자매 사이의 돈에 얽힌 탐욕들이 드러나는데 아들이 자신의 돈 25루블을 훔쳐갔다고 의심하여 재판에 회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아버지』(1881), 『방앗간에서』(1886)라는 작품에서 어머니에게 1루블 주기도 아까워하며 가난한 형을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 탐욕스런 방앗간 주인인 비류코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1899)에서 평생을 자신의 공부 뒷바라지를 한 처남 바냐와 딸 소냐의 헌신과 수고는 생각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들이 사는 영지를 팔아 핀란드의 별장을 사려는 교수 세레브랴코프, 『세자매』(1903)에 등장하는 세 자매의 정신적, 물질적 삶의 터전을 조금씩 침식하여 자신의 안위만을 채우려는 나타샤의 형상에서도 이러한 소시민적 탐욕의 토포스를 발견할 수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돈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는 표기상 차이를 보이지만 그 어원이 ‘은’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프랑스어 아르장은 은으로 전쟁에 재정지원을 했던 고대 그리스 왕국들이 은에 아르기로스(argyros, 하얗게 빛나는 것)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유래 되었고, 러시아어 ‘덴기’는 ‘작은 은화’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텐게’에서 유래되었다. 금속 은이 돈의 어원으로 사용된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고대 국가에서 화폐를 제조할 때 은을 사용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유추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은 부, 탐욕, 권력 등의 부정적 토포스를 강하게 발현하였는데, 기독교가 지배한 서양 중세에서는 성서의 원리에 입각하여 부자, 재물, 부의 축적을 강하게 경계하였다. 그러나 초기 물물교환의 원시적 경제 상태를 탈피하여 돈이 경제 활동의 주된 수단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6, 17세기를 거쳐 18세기 초 자본주의라는 말 그대로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돈의 위력은 사회와 개인의 모든 삶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몰리에르 작품의 ‘수전노’를대표로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돈의 위력을 문학에서 강하게 발현시킨 프랑스는 발자크, 모파상, 졸라 등의 작품들을 통해 돈, 물질, 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돈의 노예로 전락한 당대인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러시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돈의 토포스가 강하게 발현된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18세기말 프랑스와 유럽으로부터 도입된 계몽주의와 자본주의는 이전 러시아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정교적 금욕과 절제에 대한 표상을 약화시키면서 돈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욕구를 강화시키는 한편, 돈을 축척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출세와 권력에 대한 욕구를 사회 전반에 걸쳐 강하게 상승시켰다. 이러한 돈의 토포스는 당시 러시아 문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연관 토포스 가난, 도박, 부르주아, 소시민, 유대인, 욕망,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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