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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명예
토포스명(프랑스) honneur
토포스명(러시아) честь, слава, достоинство
정의 1. 신분이 높을수록 명예를 더욱 더 중시한다.
2. 자존감이 높을수록 명예에 대한 욕구도 더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 ‘오뇌르 honneur[ɔnœːʀ]’는 품위, 명예, 체면, 도의, 영광, 존경의 표현을 뜻하며, 복수의 형태로는 예우나 권세, 고위 관직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풀이들은 오뇌르가 갖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반영한 것인데, 하나는 인간이 내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이라는 정신적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물질적 가치이다. 이는 라틴어 어원 ‘오노르honor’가 신들이나 사람에게 바치는 경의의 의미와, 명예직, 고위관직, 관료의 의미를 동시에 가졌던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롤랑의 노래』(11세기) 등 중세 기사들의 모험담과 사랑을 다룬 무훈가에서 ‘honor’는 기사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의미하기도 하고, 주군에 대한 봉사와 충성에 대한 대가로 하사받은 봉토(피에프fief)를 가리키기도 한다. 봉토는 권력의 기반이 영토와 군사력에 있던 봉건 사회에서 주군과 가신의 관계를 유지해주는 핵심적인 매개였으며, 봉토와 함께 수여받는 귀족의 작위는 그 자체가 기사들의 목표이자 최고 명예였다. ‘honor’는 ‘승리’를 의미하기도 했는데, 이는 주군에 대한 기사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전쟁에서의 승리였고 그것이 명예를 가져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어원적 배경으로 볼 때 ‘명예’는 중세 기사도 문화와 관련하여 발전한 개념이다. 기사도 정신은 오늘날 서구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주로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배려’, ‘남성의 용기 있는 행동’ 등 남성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의 형태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여전히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개인의 가치로 여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갈랑터리(프랑스인 특유의 여성에 대한 친절), 솔리다리테(공동체 연대의식)와 같은 개념들은 구체제 이전 귀족 문화의 잔재로서 기사도 정신에 그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기사계급이 처음 형성된 10~11세기는 바이킹이나 사라센과 벌인 전쟁, 그리고 영토와 전리품을 두고 벌이는 귀족들 간의 경쟁이 빈번했던 시기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전사들의 도움이 없다면 영주뿐 아니라 성직자나 농민들도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따라서 기사들의 충성심과 전사로서 갖는 가치는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였고, 그들은 점차 세금을 면제 받는 특권 계층이 되면서 귀족화하였다. 용기와 용맹성, 투철한 충성심과 명예의식 같은 전사적 가치가 기사도 정신의 핵심을 이루었다. 

“프랑스 귀족에게 고유하고 유일하며 본질적인 것은 바로 군사적 소명이다.” (미셀 드 몽테뉴, 『수상록』, 1580)

  12세기 말부터 기사도 정신에 ‘궁정예법’으로 지칭되는 사교적 덕목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궁정예법이란 영주 주위로 기사들이 몰려들고 귀부인들을 중심으로 궁정이 형성되자 과거의 거친 전사적 풍속에서 벗어나 보다 세련된 풍속을 지향하며 규범화되기 시작한 궁정의 행동 양식을 가리킨다. 궁정예법의 개념은 전사적 가치의 시효가 만료되는 16세기 말 이후 귀족 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기사도 소설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주인공이 용감함, 승리와 같은 전사적 가치 외에도 우아함, 예의바름, 관대함, 유쾌함, 춤과 노래의 소양 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욕망을 절제하되 금욕적이지 않으며 겸손하고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낭만적인 모습의 영웅-기사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열정을 지켰는데, 이는 그것이 바로 기사로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궁정 소설 『트리스탄과 이즈』(1170 년경)에서 주군의 아내 이즈를 사랑한 기사 트리스탄은 죽음의 순간까지 이즈에 대한 사랑을 지킴으로써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켰다. 
  이와 더불어 기사들의 난폭한 기질을 기독교를 위해 봉사하는 데 활용하면서 순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신의 평화운동’(11세기)을 전개하면서 기독교가 부과하는 의무도 기사도 정신에 포함되었다. 우선 교회는 기사들에게 교인을 비롯하여 약자를 보호할 의무를 부과했는데, 이는 기사들의 폭력과 난폭함이 사회 무질서의 원천으로 지목되는 데 따른 조처였다. ‘약자 보호’의 의무는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둔 것으로, “기사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권한을 부여한 제후들에게 복종하는 것으로써 하느님을 섬긴다.”는 논리에 따라 기사들에게 종교적 의무로 부과되었다. (김정희, <기사도 정신의 형성과 변용 : 중세에서 르네상스까지> 참조) 
  중세 기사도 소설이나 무훈시에서 명예에 대립되는 용어로 등장하는 ‘수치’ 또는 ‘불명예’는 기사와 주군이 쌍무적 관계를 위배할 때, 적 앞에서 도망치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여성에게 폭행을 가했을 때, 가문의 명예가 훼손되었는데도 비겁하게 복수하지 못할 때 그런 행위를 비난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곧 명예를 잃는 것으로, 이는 감정적으로 자존감이 훼손된다는 의미를 넘어 자신에게 주어진 직위와 그 직위에 합당한 예우를, 다시 말해 귀족의 신분을 잃게 됨을 뜻했다. 따라서 ‘명예가 걸린 일(아페르 도뇌르 affaire d'honneur)’에서는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해 반드시 복수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는 관례도 만들어졌다. ‘아페르 도뇌르'에는 ‘결투’의 토포스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기사도 정신의 핵심인 명예 개념은 그 기원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의 중앙 집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로서 특정 사회 집단이나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남성의 의무 또는 도리를 규정한 집단적, 남성적 가치임을 알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귀족 계급의 존재 이유인 ‘명예’가 구체제의 근간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가치였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보수적인 군주제 국가에서 권력을 제한하는 것은 명예이다. 명예는 권력의 원동력이고 귀족과 백성을 다스리는 군주와도 같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1748) 

  명예가 남성적 가치라는 것은 12세기경에 ‘옴므 도뇌르 homme d'honneur’가 ‘신의를 지키는 남자’를 가리키는 반면, ‘팜므 도뇌르 femme d'honneur’는 ‘정조와 순결을 지킨 여자’를 가리킨 데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르주 뒤비에 따르면, 중세에 “여자는 남자의 봉신이자 신의 가신(家臣, arrière-vassal)으로서 가장 낮은 자리에 위치”했는데, 이는 『성서』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며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구절이 중세의 여성관에 반영된 것이다.(조르주 뒤비, 『중세의 결혼, 기사, 여성, 성직자』 참조) 혈통에 근거를 두는 귀족의 가문은 철저한 가부장제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그 가문을 지키는 일이 바로 명예 개념의 본질이 되었다. 그런데 혈통은 여성을 통해 유지될 수밖에 없으므로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처녀성이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여성이 정절을 지키는 것은 여성 개인의 품행 문제가 아니라 가문의 혈통 즉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이어서 남편이 여성의 정절을 지켜주는 의무를 졌다. 결국 여성의 명예는 철저히 남성의 명예에 종속되었던 셈이다. 
  16세기 프랑수아 1세 시대에 이르면 기사도 정신에서 궁정예법의 개념이 강화되고 전사적 가치가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명예 개념은 차츰 물질적 보상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귀족 계급의 상징 내지 귀족 계급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 그것을 내재화한 감정인 자존감의 의미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는 파비아 전투(1525)가 벌어진 날 저녁 프랑수아 1세가 어머니 루이즈 드 사부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된다. “명예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는 프랑수아 1세의 말에 부인은 “그렇다면 아무 것도 잃지 않았다. 적어도 가장 중요한 것은......”이라고 답한다. 1606년에 발간된 한 사전에서 명예는 “봉건 영주들 사이에서 봉토와 더불어 갖게 되는 그 집안의 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honneur 참조) 
  귀족의 명예가 혈통이나 가문보다 개인적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명예를 뜻하는 대표어로 ‘체스티 честь[chest']’를 들 수 있겠으나 이것과 의미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도스토인스트보 достоинство[dostoinstvo]’와 ‘슬라바 слава[slava]’도 러시아적 명예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들이다.
  원시슬라브어 *čьstь로부터 기원하는 ‘체스티’는 고대 인도어 cíttiṣ(사고, 이해, 의도), сḗtаti(준수하다, 사고하다)와 어원적으로 관련된다. 특이한 점은 대다수의 러시아어 사전과 저서들에서 ‘체스티’가 ‘도스토인스트보’(존엄성, 품위)를 통해 설명된다는 점이다. 명예란 “인간의 내적, 윤리적 존엄성”(<달 사전>)이며 “도덕적, 사회적 품위”(<우샤코프 사전>)라는 것이다. ‘체스티’가 표현하는 명예는 사회적 성격이 부각된 개념이라고 한다면 ‘도스토인스트보’가 나타내는 명예는 인격 및 품성의 문제와 보다 밀접히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명예를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 ‘슬라바’는 ‘슬로보 слово[slovo](단어, 말)’, ‘슬리티 слыть[slyt'](~라는 평판이다)’와 동일한 어근을 지닌다. ‘슬라바’가 표현하는 명예는 사회적 ‘성공’과 ‘명성’,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존경’과 ‘영광’을 복합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명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보다 과거의 전통 사회에서 보다 더 핵심적인 문화 키워드였을 것이다. 고대 사회, 특히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명예는 공동체적 가치의 핵심이었다. 공동체 중심의 사회였던 그리스에서 개인의 명예는 사회가 추구하는 공통의 명예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했으며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를 완수하는 경우에 사회적 존경과 칭송으로서의 개인적인 명예도 극대화되었다. 
  명예가 사회의 핵심적 가치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는 중세 시대가 될 것이다. 이 시기의 명예 개념은 특정 사회 계층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속성이었다. 명예는 바로 중세의 기사계층을 다른 계층과 구분시켜 주는 핵심적 가치였다. 기사의 명예는 자체의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시키고 그들을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윤리규범이자 생활양식이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명예가 국가와 사회를 위한 공동체적 가치였다고 한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 중세 기사들에게 명예는 고대 사회에 비해 다분히 개인화되기에 이른다.
  프랑스를 포함하여 서유럽에서 명예 개념은 중세 기사도 문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반면 서유럽의 역사와 다소 상이한 길을 걸어온 러시아에서는 엄격한 의미의 기사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대두되기도 한다(가령, 베르댜예프, 『불평등의 철학』). 베르댜예프의 주장처럼 중세 러시아 사회에서 명예 개념이 서유럽 기사도 문화의 그것과 큰 관련이 없을지라도 중세 사회의 독특한 특성은 중세 러시아의 명예 개념도 다른 시기의 것과 상당부분 차이가 나도록 만들었다.
  중세 사회는 실재하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상징적인 가치를 더 중시하는 사회였다는 측면에서 ‘기호성의 사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명예와 같은 추상적 개념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가령, 러시아 최초의 법전 <루스카야 프라브다>는 칼집이나 손잡이로 가격하는 행위에 대해 무는 벌금이 칼날로 입힌 심한 상처의 것보다 더 과중하였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이치에 어긋나 보이기도 하지만 명예의 손상 여부를 고려하여 벌금 액수를 책정하였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중세적 시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칼날로 가격하는 행위는 명예에 어긋나지 않는 반면 칼집이나 손잡이로 가격하는 행위는 무기가 아닌 것으로 가하는 ‘모욕적인’ 타격인 까닭에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중세 러시아에서 명예 개념을 표현하는 두 단어 ‘체스티’와 ‘슬라바’는 상이한 의미와 가치 체계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 또한 중세의 ‘기호성’과 연관관계가 깊다. ‘체스티’는 ‘포상, 선물’과 같은 물질적 속성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명예로서 위계 관계에서 더 높은 자로부터 낮은 자에게 부여되는 것이었다. 반면 물질적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슬라바’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명예이며 명예를 등급화시킬 수 있다면 최상급의 명예 개념이었다(로트만, <키예프 시대 비종교적 텍스트에서 ‘체스티’-‘슬라바’의 대립에 관하여> 참조). 
  이처럼 현대 러시아에서는 종종 동의적 개념으로 사용되는 ‘체스티’와 ‘슬라바’가 봉건 사회에서 상이한 의미였음은 고대 러시아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인 『이고리 원정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고리 원정기』는 12세기 말 남러시아의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후 이고리가 터키계 유목민 폴로베츠족의 정벌에 나섰다가 패배로 끝난 사건을 담고 있는 작자 미상의 전쟁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는 공후의 덕목으로서 ‘영광(슬라바)’과, 신하들이 공후로부터 받는 최고의 찬사로서 ‘명예(체스티)’가 체계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러시아 언어학자 야콥슨은 『이고리 원정기』의 마지막 부분인 “공후들과 친위대에 영광(슬라바)이”라는 표현은 후대에 훼손된 것이라 지적한다. 이 부분은 “공후들에게 영광(‘슬라바’)이, 친위대에 명예(‘체스티’)가”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고리의 업적은 한 지역의 공후로서 자신의 ‘슬라바’와, 다른 한편 키예프 대공(大公)의 신하로서의 ‘체스티’라는 측면에서 평가된다. 이고리공은 폴로베츠족의 포로로 잡혀서도 공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으나 그가 이끈 전투는 결과적으로 패배한 전투로서 “명예롭지만 영광스럽지는 못한 전투”였던 것이다(로트만, <키예프 시대 비종교적 텍스트에서 ‘체스티’-‘슬라바’의 대립에 관하여> 참조 및 재인용). 이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는 보로딘(1833~1887)의 오페라 <이고리 공>(1890 초연) 속에서도 이러한 중세적 명예관이 반복된다. 특히 오페라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고리 공이 폴로베츠족에게 포로로 잡힌 장면에서 비록 포로가 됐지만 이고리 공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친절하고 정중하게 그를 대하는 폴로베츠족의 모습이나 포로이면서도 공후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는 이고리 공의 모습은 명예를 중시하는 옛 시대의 명예관을 잘 보여준다.

  신분, 계급의 의미와 밀접히 관련되던 명예 개념은 전통 사회가 붕괴되고 전통적인 신분체계가 해체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중세의 ‘선택받은 자’들의 윤리 규범은 근대의 ‘보통의’ 인간들의 윤리 규범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되고 명예 개념도 소수의 특권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내적, 도덕적 가치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합리주의와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물질적 보상 혹은 외적인 명망과 관련 깊던 봉건적 명예 개념의 허구성이 설파되고 인간의 내면화된 가치이자 인간의 존엄성, 자존감으로서의 명예 개념이 부각되는 양상으로 명예의 의미변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러시아에서 명예 개념이 사회적 명성이나 명망보다 인간의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러시아 정교 사상의 역할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전통 사회의 명예 개념은, 인내와 복종, 그리고 겸손을 강조하고 교만을 가장 큰 죄악 중 하나로 간주하는 정교 사상과 그 본질 상 양립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었다. 러시아 문화에서 명예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특성과 더 깊은 상관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러시아 문화의 독특한 특성, 즉 ‘명예’와 ‘명성’을 나타내는 ‘체스티’나 ‘슬라바’와, ‘존엄성’을 뜻하는 ‘도스토인스트보’가 명예를 총칭하는 말로 종종 동의어처럼 사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적 명예의 토포스가 변화 발전해 나가는 양상은 명예를 나타내는 세 단어의 상관관계 속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7세기 ‘명예의 시인’이라는 별칭에 맞게 코르네유는 귀족의 목숨과도 같은 명예 개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 지적하고 있다. 

“그대의 영광과 권력은 오직 과인이 그대에게 베푸는 은총에서 나온다.
그대가 높이 받들어지고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있는 것도 과인의 은총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것은 과인의 은총이지 그대의 인격이 아니다.
그대는 오로지 과인의 은총이 허락한 세력과 지위를 누릴 뿐이다.”
(코르네이유, 『신나』, 1640)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신나는 오랜 전통의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폭군 아우구스투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폭군이라고 간주한 자를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고 믿는 신나에게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명예가 왕인 자신에게서 비롯되었고 그것만이 신나 가문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귀족의 가치인 명예의 원천이 자신에게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르 시드』(1636)에서도 코르네유는 명예가 귀족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자 그들만의 배타적 가치임을 역설한다. 동 디그가 아들 로그리그에게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복수를 종용할 때 아버지의 요구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자 의무가 된다. 혈통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곧 가문의 존재 이유를 지켜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모든 행위는 정당하며, 명예가 걸려 있는 한 어느 한 쪽이 명예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잃고 혈통이 끊어질 때까지, 복수 즉 결투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 법적 체계가 최고의 권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던 시대에, 결투는 서로 충돌하는 명예의 갈등을 해결하고 명예를 지키는 행위였다. 
  그러나 명예의 개념은 17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앞서 16세기 말부터 명예와 밀접하게 연관된 귀족의 개념에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귀족의 신분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시대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 신교를 믿는 귀족 가문과 가톨릭을 믿는 귀족 가문 사이의 갈등으로 엄청난 피를 뿌리며 내란으로 전개된 종교전쟁이었다. 특히 1572년 파리에서 가톨릭의 수장 기즈 공이 신교도의 수장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고 신교도들을 무참히 학살한 일은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최고 3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나오고 민중의 원성이 귀족에게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용기와 미덕 그리고 전사의 소명을 지닌’ 전통적인 귀족의 개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1575년 클로드 아롱은 『회고록』에서 “과거 프랑스의 귀족들은 국왕과 왕국을 위해 보여준 용기와 미덕 그리고 헌신을 통해 귀족의 칭호와 특권을 부여받았지만”, 그 후손들은 “과거 선조들의 용기와 무훈을 통해 획득한 귀족의 특권에 뒤따른 봉사의 의무”를 잊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것이 귀족들에 대한 민중의 반감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임승휘, <프랑스 구체제의 절대군주와 엘리트> 재인용 및 참조) 이처럼 귀족의 자질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명예의 개념도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17세기 중반 이후 희극 작가 몰리에르의 시대에 오면 귀족의 명예는 노골적으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서서히 집단적 가치에서 개인적 가치로 변해가는 징후를 보인다. 이는 루이 14세 시대에 귀족의 사회적 위상이 이전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7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귀족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수가 크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칭송받던 전사적 가치도 상당히 축소된 상태였다. 이처럼 귀족의 세력이 약화되자 루이 14세는 신흥 사회계급인 부르주아를 등용하여 중앙집권 행정의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그들을 구 귀족과 경쟁구도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두 세력을 동시에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귀족 계급의 변화는 몰리에르의 작품에 잘 묘사되어 있다. 『동 주앙』(1665)에서 동 루이가 아들 동 주앙에게 들려주는 귀족의 의무와 가치는 코르네유가 역설한 귀족의 명예 개념과 상당히 달라져있다. 

“[…]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귀족이 되기 위해 한 일이 뭐냐?
가문의 이름과 군장만 챙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살면서 귀족의 피를 타고 
태어났다고 영광이 우리 것이 되느냐?
아니다, 아니야.
태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덕이 없다면 말이다.
[…] 잘 알아 두어라.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귀족은 
세상에서 추한 존재일 뿐, 귀족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덕성이고,
내가 이름보다 행동을 더 중시하며,
그리고 훌륭한 인격을 지닌 평민의 자식을 너처럼 살아가는 
왕의 자식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몰리에르, 『동 주앙』, 1665)

  이제는 귀족의 혈통이 귀족의 자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질을 갖추어야만 귀족의 명예를 가질 수 있다. 주로 부르주아나 하층민을 통해 귀족과 성직자 계층을 풍자하는 몰리에르의 작품에서, 중세적인 명예 의식을 갖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복수를 감행할 때조차 귀족들은 별로 위엄 있어 보이지 않고 대체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몰리에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르주아들은 신분의 벽을 넘어서려 몸부림치는 인물들이다. 경제력을 가졌지만 아직 지식이 부족하고 그들 고유의 도덕적 가치나 모럴을 갖지 못한 부르주아들은 귀족 계급의 문화를 동경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행태를 보인다. 명예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집착도 그와 같은 욕구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이 명예를 언급할 때 그것은 귀족들의 명예를 형식적으로 흉내 내는 데 그칠 뿐 대개의 경우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력을 갖춘 부르주아가 귀족 행세를 하려드는 『부르주아 귀족』(1670)에서 주인공 주르댕이 자주 입에 올리는 명예라는 말은 남들의 평판에만 의존하는 체면을 의미한다. 명예와 관련하여 주르댕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바람난 아내에게 속는 얼간이 남편이 되는 것이다. 

“그 둘이 어느 정도로 정을 통했는지 알아 봐야겠어.
내 명예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야.
나는 아네스를 아내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런 처지에
그녀가 잘못을 한다면 나는 완전히 치욕을 뒤집어쓰는 거지.
그리고 아네스가 한 모든 짓은 결국 내 책임이 될 것이고 말이야.” 
(몰리에르, 『부르주아 귀족』, 1670)

  귀족들은 딸이나 아내가 순결을 잃고 정절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실을 가문의 불명예, 남편의 수치라고 여긴다. 주르댕은 아내를 사랑하여 질투를 느끼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귀족의 명예에 집착하고 그것을 흉내 내려 한다. 
  귀족의 명예에 대한 더욱 명쾌한 비판은 미천한 신분인 농민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 주앙에게 농락당한 두 시골 처녀들이 귀족의 명예를 언급할 때 명예는 더 이상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심지어 순진하지만 신중한 시골 처녀는 귀족들의 방종함과 무책임함을 비판하고 오히려 자신의 명예를 내세운다.

“사실 나리, 나리께서 말씀하실 때면 뭘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말씀을 듣다보면 편안해져요.
그리고 나리를 정말로 믿고 싶어지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나리들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했어요.
[…] 전 가난한 농사꾼이에요. 
그러나 저에게도 존중해야 할 명예가 있어요. 
그 명예를 잃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몰리에르, 『동 주앙』, 1665)

  하층민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명예’는 절대적으로 존중받던 귀족의 명예가 아니라 그녀의 자존심을 일컫는다. (김익진, <몰리에르 작품 속의 명예의 문제> 참조) 
  17~18세기에 명예 개념은 귀족의 전유물에서 널리 서민층으로 확산되었다. 쿠르탱은 『명예의 중요성에 관하여』(1675)에서 “어떤 사람에게 명예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라. 그는 당신에게 그것은 심장을 지니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장을 지닌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질문하라. 그는 당신에게 그것은 모욕을 견디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또한 18세기 치안총감 르누아르가 자신의 『회고록』에 경찰이 명예 및 평판과 관련된 청원의 폭주에 시달렸다고 기록한 것을 볼 때 서민층이 얼마나 명예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아를레트 파르쥬, 『사생활의 역사』 참조) 계몽철학자 볼테르는 종교전쟁과 앙리 4세의 즉위를 소재로 삼아 구체제를 비판한 서사시 『앙리아드』(1728)에서 구체제의 명예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꼬고 있다.

“나는 다른 악당들과 결탁한 한 악당이 그 공모 사실을 숨기는 것을 이해합니다. 불한당들은 그것을 명예의 문제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범죄에도 사람들이 명예라 부르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볼테르, 『앙리아드』, 1728)

  18세기 모랄리스트이자 시인으로서, 구체제 말기 상류 사회의 타락한 풍속을 신랄하겍 비판했던 샹포르의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도 명예 개념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인간은 대개 자기 혼자 살 때 미덕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 때 명예가 필요하다.” (샹포르, 『격언과 사유, 인물과 일화들』, 1770년대) 

  전통적인 명예 개념의 근대적 변화는 18세기 사상가이자 작가로 이름을 날렸던 장-자크 루소가 “외적 표식을 기준으로 남들의 평판에 좌우되는 명예가 아닌 스스로의 자존감에 기반 한 명예” 개념을 강조하면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이른바 명예에 대해, 사람들의 평판에서 나오는 명예와 자신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는 명예를 구분한다.” (장-자크 루소, 『신 엘로이즈』, 1761)

  1789년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성직자와 귀족의 특권을 폐지한 이후로 귀족 계급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세기의 여러 문학 작품에는 옛 영예를 되찾기 위해 여전히 낡은 명예를 지키려는 귀족들, 신분상승을 꿈꾸며 상류 사교계에 진출하려는 부르주아와 하층민들, 공화주의를 신봉하며 사회개혁을 꿈꾸는 혁명가 등 다양한 이념과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념과 입장이 어떻든 전통적인 ‘명예’ 개념을 잘 차려 입어야 하는 의복처럼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콩베페르는 근엄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데 그쳤다. ‘저 멀리 떨어진 별들을 지키는 것처럼 명예의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지.”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1862)

  스탕달의 『적과 흑』(1830)에서 신분상승을 꿈꾸는 야심찬 청년 쥘리엥에게 명예는 루소가 말한 명예 곧 그의 자존감이며, 귀족의 명예는 그저 처세를 위해 알아야 할 형식적 의례이다. 비천한 출신 때문에 상류층에게 경멸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쥘리엥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데서 생겨나는 명예 의식이다. 레날 부인에게 연모를 품은 쥘리엥이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모험을 감행할 때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방법 또한 그것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의무이자 명예라고 믿는 것이었다. 한편 귀족들의 풍속으로 정형화된 의례들은 쥘리엥에게 여전히 풀어야 하는 암호와도 같은 명예이다.

“그것은 내게 명예지요. […] 매일 후작 부인과 만찬을 하는 것은 나의 의무입니까 아니면 그녀가 내게 베푸는 호의입니까? - 그것은 명예의 표식이지! 사제가 분개하며 말을 이었다. 15년 전부터 꾸준히 아첨을 해온 아카데미 회원 N.씨는 그의 조카에게 결코 그 명예를 얻어줄 수 없었단 말일세.” (스탕달, 『적과 흑』, 1830) 

  보바리 부부를 파멸로 몰아넣고 그의 재산을 몰수한 뒤 후에 마을 시장 자리까지 꿰차며 승승장구하는 마을의 약제사 오메가 최고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나폴레옹 1세가 1802년 자신에 대한 군인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제정한 훈장)를 받는 장면에서 플로베르가 보여주려는 것은 명예는 오로지 출세한 사람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1857)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국가주의가 발흥했던 프랑스에서 명예가 다시 한 번 집단적 가치가 되었던 일이 있다. 그것은 애국주의의 구호 아래 드높여졌던 공화국의 명예, 프랑스의 명예였다.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 현재 우리 모든 국민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역사적 명예, 모든 우리 민족의 역사적 명예, 우리 조상들의 명예, 우리 아이들의 명예이다.” (샤를 페기, 『공화국』, 1910년 경)

  그러나 20세기 이후로 명예는 개인의 신념과 종교, 사상, 입장에 따라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지고 더욱 개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세상의 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줄 하나님의 은총을 믿은 가톨릭 작가 베르나노스에게 명예는 무엇보다 기독교도가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할 자존감이었다.

“세상은 자존감을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마키아벨리나 레닌에게 명예의 법칙을 배우겠다는 기괴한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물으러 결의론자들에게 가는 것도 내게는 어리석어 보였다. 명예는 곧 절대자이다.” (베르나노스, 『달빛 아래의 대 묘지』, 1938) 

  제국주의와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현대 사회의 질서와 가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20세기 중반 프랑스인에게 명예는 버려야 할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하기도 했다. 

“조국, 명예, 자유, 별 것 없다. 우주는 한 쌍의 엉덩이를 둘러싸고 돌아간다. 그뿐이다.” (사르트르) 
“명예, 지겹군.” (체게바라) 
“가장 귀중한 정신의 재능은 알량한 명예를 잃는 것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

  현대에 전통적인 명예의 개념이 남아 있는 곳은 장례 의례(honneurs funèbres), 군대 환영 의례(honneurs militaires), 전쟁 포로 예우(honneurs de la guerre) 등 제도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모두가 동의하여 지키는 의례나 관례이다. 또한 프랑스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공을 세우거나 프랑스를 빛낸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영광의 군단)에도 전통적인 명예 개념의 흔적은 남아있다. 이 훈장에 새겨진 문구는 ‘명예와 조국(Honneur et Patrie)’이다. 
  오늘날 명예는 개인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가 무엇이든 세속적 욕망에만 종속되지 않고 인간적 가치를 지키려는 자존감의 의미로, 개인의 실천적 윤리의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잃어버린 명예는 결코 되찾을 수 없다.” (프랑스 속담)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의 서구화를 지향했던 표트르 대제(1689~1725)는 수많은 개혁들을 단행하였는데 여기에는 명예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는 러시아 귀족들을 공직에 복무하도록 하고 그들의 관등을 14등급으로 나누어 계층화한 ‘관등표’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를 위해 공무를 수행한 인물들의 명예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서훈제도의 도입이다. 러시아어에서 관등을 가리키는 단어 ‘친 чин[chin]’은 고대 러시아어에서 ‘질서’를 의미했던 단어이고 훈장을 가리키는 말 ‘오르덴 орден[orden]’ 역시 ‘줄, 질서’ 의미의 라틴어 ordo에서 기원하였다. 어원에서도 드러나듯, 관등체계과 서훈제도는 모두 명예를 위계질서에 따라 등급화해 놓은 것이었다. 
  서훈제도는 실질적인 하사품, 선물, 상이 아니라 명예로운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명예의 물질적 속성을 기호적 속성으로 바꾼 것이라 볼 수 있다. 표트르 대제가 만든 ‘성 안드레이 훈장’(1698년 제정), ‘성 예카테리나 훈장’(1714),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1725) 외에도 예카테리나 2세 시대(1762~1796)에 만들어진 ‘성 게오르기 훈장’(1769), ‘성 블라디미르 훈장’(1782) 등이 러시아의 대표적 훈장들이다. 훈장 사이에도 엄격한 위계가 존재하여 성 안드레이 훈장이 가장 명예로운 훈장이고 다음으로 성 예카테라니 훈장, 성 블라디미르 훈장,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의 순이다. 또한 위계에 따라 그것을 다는 위치도 달라지는 등 서훈제도는 엄격히 등급화된 체계를 이루었다.

  표트르 대제는 혈통이나 신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대한 공헌과 직무 능력에 따라 직위 및 그에 따른 명예가 상응하도록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 바로 ‘관등표’이다. 관등표는 혈통이나 가문에 따라 저절로 주어지던 귀족의 명예를 실질적인 국가 공헌에 따라 획득되는 것으로 전환시켰다. 표트르 대제의 ‘관등표’에는 관등에 따라 ‘명예’의 정도가 달라지며 또한 그에 따라 ‘경의 표현’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원칙이 나타난다. 

“관등이 높은 자일수록 그에 합당한 명예를 요구할 수 있다. 자신의 관등에 합당한 것 이상의 경의 표현을 요구하는 자나 부여받은 관등보다 높은 자리를 제멋대로 차지한 자에게는 각기 두 달 치 급료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린다.” (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재인용). 

  서훈제도와 관등체계는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명예의 가치가 더욱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명예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자신의 명예가 어느 정도인지는 타자의 인정과 태도에 달려있게 되며 이로써 스스로의 내면적 가치로서의 자존감이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명예를 더욱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평가, 그리고 그에 의해 결정되는 명예를 중요시하는 당시 귀족 사회의 세태를 푸시킨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여론이란 것이다! 명예의 태엽, 우리들의 우상! 세상은 바로 이 위에서 돌아가는 것이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명예를 극히 중요시하던 러시아 귀족들에게 명예의 훼손은 중대한 인격 침해로 간주되었다.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일정한 절차가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절차 중 하나가 바로 이 시대 귀족 사회를 휘감았던 결투문화라 할 수 있다. 게르첸은 결투의 윤리적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리란 생명보다 값진 것이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으며 진리를 부정하는 삶을 살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 (게르첸, <명예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소고>, 1846)

  귀족들에게 명예를 지키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진리이며 생명보다 값진 것이었기에 명예를 수호하고 회복하는 수단으로 결투가 용인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결투는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전제 군주의 포악한 열망으로부터 귀족들의 독립성과 자유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차르의 절대적 힘이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음에 있다고 할 때 결투는 바로 명예를 위해 그 목숨을 가벼이 버릴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을 통해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져있었던 결투문화를 상세히 보여주기도 했던 푸시킨은 그 자신이 결투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기도 하다. 푸시킨에게 있어 명예와 자존감은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중심적 가치였다. 

“자존감은 그에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언제든지 피 흘릴 준비가 되어있도록, 그를 겨누고 있는 총구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로트만,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1982)

  명예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푸시킨은 『대위의 딸』(1836)에서 아버지 안드레이 그리뇨프의 입을 빌어 군대에 가는 아들 표트르 그리뇨프에게 러시아 속담 “옷은 새 것일 때부터, 명예는 젊어서부터 소중히 여겨라”를 강조한다. 이 속담은 이후에 명예와 관련해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속담 중 하나가 되었다.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존엄성과 명예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에게 있어 명예는 정신적 자유와도 비슷하다. 정신적 자유가 육체적 평온을 위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거운 짐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처럼 명예도 차라리 아예 없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면 삶이 좀 더 편안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레르몬토프가 푸시킨을 “명예의 노예”라 불렀던 것도 명예의 이러한 측면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되었을 듯하다.
  “명예와 자존감은 그 무엇보다도 강인한 힘을 지닌다”라는 격언을 남긴 도스토옙스키 역시 푸시킨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자존감과 명예를 잃지 않은 자로 기억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삶의 온갖 괴로움, 고통, 번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것을 삶의 가장 위대한 임무로 생각하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집행이 취소된 직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우울해하지도 의기소침해하지도 않아. 내 주위에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영원히 인간으로 남는 것, 그 어떤 불행한 일이 있어도 우울해하지 않고 의기소침해하지 않는 것 - 바로 여기에 삶이 있고 바로 여기에 삶의 임무가 있는 것이니까.” (도스토옙스키, <미하일에게 보내는 편지>, 1849)

  러시아 귀족 사회의 상징적 기호였던 명예는 소비에트 시대에 이르러 이념적, 정치적 색채의 밑바탕 위에 독특한 개념적 표상을 확립해 나갔다. 이 시기에 인간의 명예는 사회적 유익성의 측면에서 평가되는 개념이 되면서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노동의 윤리적 가치야말로 진정으로 명예로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명예가 노동의 생산력을 높이고 격려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이는 스탈린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주의 생산 경쟁의 가장 훌륭한 점은, 이것이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에 근본적인 전환을 야기한다는 데 있다. 예전에는 노동을 불쾌하고 무거운 짐으로 생각해 왔으나 사회주의 생산 경쟁은 노동을 명예와 영광의 일로, 용맹성과 영웅성의 일로 변화시켜 준다.” (스탈린, <제 16차 당 대회 중앙위원회 정치 보고>, 1930) 

  또한 이 시기에 인간의 자존감, 명예심을 키우는 일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무감을 육성하는 임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정권은 국가적 차원에서 명예의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소비에트 시대의 유명한 교육철학자 마카렌코(1957)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문화적 소비에트 노동자를 육성하기를 바란다. [...] 우리는 그 안에서 의무감과 명예심을 길러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과 자기 계급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이를 자랑스러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계급에 대한 자신의 의무도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카렌코, 1957)

  소비에트 시대 개인이나 단체에게 부여되던 갖가지 ‘명예칭호’도 명예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34년 제정된 ‘소련 영웅’이라는 칭호는 국가적 차원의 공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수여되던 칭호이며 이 칭호와 함께 소비에트 시대 가장 높은 훈장 중 하나였던 레닌 훈장도 수여되었다. 경제와 문화 영역의 공훈을 치하하는 ‘사회주의 노동영웅’(1938년 제정),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아 기른 여성에게 수여되는 ‘어머니 영웅’(1944년 제정)과 같은 명예칭호 등 이 시기 갖가지 명예칭호들이 만들어졌다(<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을 아는 사전> 참조). 
  그러나 명예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소비에트 정권이 최초로 활용한 것은 아니다. 애국심과 조국이 전면에 배치되고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던 시기,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가장 명예로운 일로 칭송받았다. 요컨대 차르들이 강대한 러시아를 꿈꾸며 벌인 수많은 전쟁에서, 두 번의 조국전쟁 즉 ‘1812년 전쟁’(‘나폴레옹 전쟁’)과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 중 1941~1945년의 소련-독일 전쟁)에서 명예의 공적인 가치는 극대화되었다.
  러시아 전쟁 영웅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명예의 공적인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고리 공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 후의 인물인 노브고로드 공후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러시아를 지켜낸 인물이다. 특히 1242년 독일의 튜턴 기사단을 유인해 대승을 거둔 추트 호수 얼음벌판에서의 결전은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민족적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긍정적 이미지는 후세에 다양한 장르에서 수많은 반복을 통해 ‘민족적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 전형화 되기에 이른다.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찬양하는 수많은 민요들이나 그의 이름을 딴 다양한 기념비들, 표트르 대제가 세운 네바 강가 옛 전쟁터 부근의 넵스키 수도원,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에서 그를 성인으로 받들고 있다는 사실 등을 통해 러시아에서 넵스키가 지니는 긍정적 상징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에이젠시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와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영화음악 칸타타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1939) 등에서도 전쟁 영웅의 긍정적 이미지는 반복된다. 민족적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서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이미지는 후대에 애국심의 고취 목적으로도 자주 애용되곤 하였다. 특히 1942년 추트 호수 전투 700주년을 기념하여 내 걸린 현수막에는 “이 전투에서 우리의 위대한 선조들이 보여준 용맹스러운 모습에 고무되길...”이라는 스탈린의 유명한 말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애국심이 고취되던 시기와 소비에트 시대에 명예의 공적인 가치가 강조되고 각광받았지만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명예는 공적인 가치보다는 내면적인 가치와 보다 깊은 관련성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명예라는 것이 타인과의 경쟁에서 우월할 때 드러나는 것이며 타인의 인정을 토대로 한다는 측면에서 외적인 가치라고 할 때 이러한 가치는 정교 교리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정교 교리 안에서 명예는 외적인 특성보다는 내적인 특성과 상관적인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명예의 내면적 가치는 톨스토이도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내면적 가치로서 명예가 빛을 발하는 경우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도덕성을 고양할 때이며 이 경우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으로 승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반면 명예가 외적인 명성과 영광만을 좇는다면 결코 바람직한 가치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명예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과 박수갈채에 대한 번뇌만큼 사람들을 오래도록 그 지배 아래 묶어 놓고, 인생의 의의와 참된 행복의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은 없다.”
“어떤 선행이든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는 점은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선행을 세속적 명예를 위해서만 행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러시아적 명예를 말할 때 양심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규명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에서도 명예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독특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에서는 명예를 사회적 행동의 외적인 조절자로 간주하고, 내적인 조절자로서의 양심을 더욱 부각시키고 강조한다. 명예가 나에 대한 타자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양심은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명예가 내면적인 가치로서 인간의 존엄성이 되도록 추동하는 힘이 바로 양심에 있다는 것이다(콜레소프, 『언어와 텍스트에 나타난 러시아적 멘탈리티』 참조). 이처럼 러시아적 명예를 양심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규명하려는 시도들은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명예가 외적인 가치보다는 내면적 가치와 보다 밀접히 관련되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을 드러내준다.
비교문화적 설명   명예를 뜻하는 프랑스어 ‘오뇌르 honneur[ɔnœːʀ]’는 신들이나 사람에게 바치는 경의와 고위관직, 관료의 의미를 함께 가졌던 라틴어 ‘오노르honor’를 어원으로 하고, 러시아어 ‘체스티’는 원시슬라브어 *čьstь로부터 기원한다. 명예의 사회적 성격이 부각된 ‘체스티’ 외에 ‘슬리티 слыть[slyt'](~라는 평판이다)’와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 러시아어 ‘슬라바’도 사회적 ‘명성’과 그 결과로 얻게 된 ‘존경’과 ‘영광’을 복합적으로 함축하는 개념이다. 
  명예는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모두 중세적 특성과 기원을 갖는 개념으로, 물질적인 포상의 개념과 정신적 품위, 사회적 평판과 명성, 그 결과로서 얻게 되는 존경의 개념을 동시에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에 명예는 기사들이 귀족으로 계급화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개념이자 가치였다. 그것은 주군으로부터 하사 받는 봉토와 그에 결부된 작위, 신분을 뜻하는 동시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신분적 의무, 자질을 동시에 의미했다. 기사 계층이 뚜렷이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의 경우도 물질보다 상징적인 가치를 더 중시하던 중세에 체스티는 포상과 같은 물질적 표현과 결합된 명예를, 슬라바는 가장 높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인간적 가치를 지시하는 용어였다. 
  프랑스에서 명예는 16세기 이후로 혈통에 근거한 귀족에게 가문의 유지를 위해 철저하게 지켜야 할 귀족의 자질이자 가치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면에 치우치면서 귀족의 명예는 비판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자존감이라는 개인의 내면적 가치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였다. 18세기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러시아의 경우 서구 귀족의 명예 개념은 표토르 대제의 제도 개혁에 반영되었다. 상류 계층 사람들의 공직을 나눈 ‘관등표’와 명예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서훈제도의 도입이 그것인데, 지침과 규정이 매우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 서구 귀족의 ‘명예’ 개념이 내용보다 형식적, 제도적 측면에서 더 많이 고려되었던 것 같다. 이와 더불어 목숨을 걸고 명예를 지키는 결투도 이 시기에 러시아로 유입되었는데, 그것이 개인의 차원에서 명예를 지키는 방법에 그치지 않고 차르라 불리는 전제 군주의 절대적 힘과 포악한 열망으로부터 귀족들의 독립성과 자유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이란 함의가 내포된 데는 러시아 제국의 절대적 권력자 차르의 압제의 역사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통적인 신분 체계가 와해되는 19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귀족의 명예 개념에서 그것의 귀족적 가치는 희석되고 개인의 교양이나 윤리적 자질과 관련된 보편적 가치로 개인화되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현대에 명예는 계급과 연관된 낡고 위선적인 개념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려는 개인의 내면적인 가치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례, 예우를 가리키는 예의범절의 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러시아 소비에트 시대 명예는 이념적, 정치적 색채의 밑바탕 위에서 사회적 유익성의 측면에서 평가받는 독특한 개념으로 정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에는 명예의 공적인 가치, 외적인 가치가 강조되고 각광받기도 하였지만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명예는 인내와 복종, 겸손을 강조하는 정교 교리의 영향 속에 인간의 내면적, 도덕적 특성과 더 깊은 연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는 추세이다. 
연관 토포스 가톨릭; 결투; 결혼; 귀족; 도덕; 모욕; 신앙; 여성; 의지; 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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