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모드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모드
토포스명(프랑스) mode
토포스명(러시아) мода
정의 1. 시대에 민감할수록 유행을 더 따른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방식, 측정, 치수, 척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modus가 유행, 특히 복식의 유행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모드 mode’[mɔd]의 어원이다. 개인적인 방식, 기호의 의미로 쓰이던 모드가 집단적인 옷 입는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 경으로, 이 무렵부터 ‘유행하다 être à la mode’라는 표현은 ‘새로운 방식으로 옷을 입다’의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 모드는 오늘날 특정 형태의 의상과 옷 입는 방식에 대한 집단적이고 일시적인 열광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상과 장신구, 몸짓 등 외모와 관련된 일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어떤 복식이 유행한다는 것은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지배적인 취향이 있으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기에 부합하는 옷과 옷 입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식의 유행은 단지 의복에만 관련된 현상이 아니라 한 사회의 미적 기준, 사회가 부과하는 코드, 구성원 개인의 취향,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기준 등을 폭넓게 함축한다. 따라서 개인의 복식은 그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 나아가 인격까지 짐작하게 하는 사회적 지표가 된다. 유행의 본질적인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과 시대에 뒤져 보이기 전에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드는 한 사회와 그 구성원의 심층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는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옷을 입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성서의 창세기에 근거한 수치설과,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보호설, 아름답게 보이려는 본능에서 비롯되었다는 장식설 등의 가설들이 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이 가설들은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가 다양하며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의 외관에 관심을 기울여왔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의상의 유행이 사회 구성원 다수가 참여하는 현상이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고대 로마 사람들이 입었던 기본 의상은 소매 없는 원피스 모양의 튜닉과 망토라 불린 외투이다. 귀족이나 평민, 남녀 모두 튜닉을 기본 의상으로 입었고 길이와 허리띠의 유무에 따라 신분과 성을 구분하였다. 로마 지배하에 있던 서유럽은 로마가 쇠퇴하고 게르만 족이 대거 이동해오는 4세기 이후 게르만족 의상의 영향을 받는다. 게르만족 의상은 검소하여 남자는 어깨 부분을 고정시킨 무릎길이의 좁은 랩스커트(몸에 감아 입는 치마)와 바지를 입었고, 여자는 소매 끝부분이 트인 블라우스와 발목 길이의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다. 유럽 의상의 기본은 로마와 게르만의 의복 형태에서 유래한다. 
  유럽에서 부분적으로 유행이라는 현상이 만들어지는 최초의 계기는 십자군 원정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서로 다른 민족의 다양한 생활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고, 원정을 통해 동양의 문물을 접하고 그것을 유럽에 유입시킴으로써 새로운 미적 감각과 욕구가 창출되는 기회를 제공했다. 1000년경부터 의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궁정성의 개념이 자리 잡는 중세의 문예부흥기(12~13세기)에는 옷감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염색술이 발달하며 자수를 의상에 활용하고 날염이 도입되는 등 의복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2세(973~1024)의 부인인 쿠니군데 황후가 붉은 점이 박히고 노란색 장식이 달린 흰 드레스를 입었다는 기록이나, 15세기에 숙녀들이 반은 붉고 반은 초록색인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는 기록(『비갈로이스』, 1493)이 그것을 확인해준다. 의복의 형태나 색상으로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기능은 확고하여, 회화에서 푸른 색 물감은 귀족이나 왕, 교황 등 높은 신분의 의상에만 사용되었고 유대인과 창녀를 표시하는 노란색은 천시되었다고 한다. (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 참조)

  중세에 결혼한 여성은 외출할 때 반드시 머리를 가려야 했는데, 이러한 전통은 사도 바울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십시오.”라고 말한 데서 연유한다. 머리카락을 가리는 것은 아내가 남편의 뜻에 복종함을 상징하여 남편만이 아내의 드러난 머리를 볼 권리를 가졌다. 이러한 관습은 이후 왕 앞에서만 모자를 벗고 맨머리를 보이는 궁정예법에 흔적을 남겼다. 차츰 귀족 남성들도 모피로 장식된 천 모자를 쓰기 시작했는데 프랑스어 모드는 복수형태(les modes)로는 부인용 모자나 모자가게를 가리킨다. 12세기에는 의복을 제작하는 전문 재단사들의 동업조합이 결성되었다. 
  서구의 남성복이 튜닉을 최종적으로 벗어나 상의와 바지가 확실히 분리되는 것은 14세기 말이다. 생 드니 수도원의 대연감은 크레시전투(1346)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대패한 이유를 프랑스 남자들의 점잖지 못한 의상에 대한 신의 분노라고 한탄하며 당시 기사가 착용한 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쪽 편은 주인을 섬기기 위해 몸을 구부릴 때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지와 그 속에 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짧은 옷을 입었다. 그런데 이 바지는 매우 좁아서 입고 벗을 때 마치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특별한 도움이 필요했다.” (13세기)

  이 시기 남성복에서 유행과 관련하여 눈에 띄는 것은 브라게트라 불린 성기주머니 장식이다. 16세기까지 유행했다는 브라게트는, “예의상 결코 이름을 언급해서는 안 되는 신체 일부분과 똑같은 모형”(미셸 드 몽테뉴, 1533~1592)의 천 조각을 바지 앞트임에 덧댄 것으로 프랑스에서 유래하여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남성의 매력을 과시하려는 이 주머니는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주목을 끌기 위해 리본으로 정교하게 장식을 더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프랑수아 라블레(1483~1553)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바지 개폐부를 묘사하면서, “남성복에 달려 있던 그 부속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머니 역할을 함으로써 대체로 모든 상스러운 성격을 잃고, 신사들은 그 주머니에 손수건과 지갑을 보관하였으며 심지어는 오렌지까지도 넣고 다니다가 귀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꺼내주기도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1532~1564) 그러나 이 시기까지 유행은 귀족계급과 왕족에게만 국한된 매우 부분적인 현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의복은 태어난 환경에 의해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조건이었다. (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 재인용 및 참조) 
  16세기까지 유럽 왕실의상을 주도한 것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앞서 있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이었다. 메디치칼라는 15~16세기에 번영한 이탈리아의 피렌체 명문가 메디치 가 출신으로 앙리 2세의 왕비가 된 카트린과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등이 착용한 데서 온 명칭이다. 사각과 크게 파진 목둘레 뒤로 풀을 먹이거나 철사를 넣어 부채꼴 모양으로 세운 메디치칼라는 163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17세기 초까지 지배적이었던 스페인 복식은, 17세기 후반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유럽 열강들이 수십 년간 전쟁에 휩싸이자 “군인들이 껍질 속에 순대처럼 처박히게 되는 옷이나, 러프로 감싸서 팔 관절을 구부릴 수도 없게 하는 스페인 식 의복”(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을 기피하면서 점차 밀려났다. 좁고 꽉 끼는 스페인 바지 대신 헐렁하고 긴 바지가, 타이즈 같은 바지 밑에 신던 낮은 신발 대신 긴 장화가 등장했다. 딱딱하고 불편했던 소매 러프도 두꺼운 주름을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뜨리는 형태로 바뀌었고, 러프를 아예 없애고 좁은 리넨칼라나 부드럽고 넓은 레이스칼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칼라가 변함에 따라 머리 모양과 모자도 변했는데, 뻣뻣한 러프 때문에 짧았던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루이 13세(1601~1643) 시대가 배경인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1844)에서 달타냥과 삼총사가 착용한 복장이 바로 그것이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유행하자 가발이 등장했고 거기에 파우더를 뿌리는 풍습도 생겼다. 여성의 복식도 딱딱한 코르셋과 거대한 맷돌러프, 주름 없이 뻣뻣한 치마 대신 버팀대와 엉덩이 쿠션을 없애고 자연스런 선의 흐름이 드러나는 형태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를 선도한 것이 프랑스 궁정이다. 루이 13세 시대부터 루이 18세(1755~1824)까지 패션에서 아름다운 모든 것은 ‘프랑스 풍(아 라 프랑세즈 à la française)’이라 불렸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일반적으로 ‘모드(mode)’는 ‘유행’을 의미하고 소문자로 쓰는데, 롤랑 바르트는 대문자로 쓰면서 ‘의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어 ‘모다 мода[moda]’도 ‘유행’과 ‘의상’의 의미를 모두 지니는 어휘로서, 그 직접적 기원은 러시아 의상과 유행에 큰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어 mode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다’는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어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유행하는(модный)’ 단어가 되기에 이른다.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모드는 의복, 모자, 장신구, 신발 등 외양을 치장하는 수단뿐만 아니라 행위 방식과도 관련되는 집단적 선호 체계로서 모드에는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지배적인 사조가 반영되어 있다.
  문화사학자들에 의하면 모드가 태동한 시기는 12~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의복 분야에서 필수적 요소 혹은 인류의 미적 취향의 발전이라 볼 수 없는 요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가령 1미터 높이의 모자라든지 2미터가 넘는 긴 치맛자락, 입고 서있기조차 힘든 통이 좁은 바지, 뾰족한 구두코 등의 등장은 바로 모드의 태동을 의미하는 것이다(오를렌코, 『의상 용어 사전』 참조).
  그러나 문화적 현상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지칭하는 하나의 용어로서 모드의 확립은 프랑스 궁중 모드가 전 유럽 국가들의 모델이 되는 17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7세기부터 프랑스는 ‘모드의 창시자’, ‘모드의 선구자’라는 호칭을 누리게 된다. 이탈리아식 취향이 아직 위력을 떨치던 르네상스 시대에 프랑스적 모드가 차츰 유럽인들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베네치아의 성 마르크 광장에서 프랑스식 모드로 치장한 인형들이 전시되었으며 부유한 베네치아인들은 그 의상과 장신구를 기꺼이 모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프랑스 출신’ 인형들은 일 년에 두 번 프랑스 항구를 출발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들로 운반되었는데 그 나라들 중에는 러시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17세기 말~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정책 이후 프랑스식 모드가 급속히 확산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의 러시아에서는 개인적 취향에 따른 치장과 멋내기는 있었을지라도 모드라고 부를 만한 사회적 현상이 크게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의복은 기본적으로 전통 의상이 주를 이루었다. 그 당시 의복의 기능은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자연과 나쁜 기운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하는 기능이 주된 것이었다. 남녀 모두 루바하, 혹은 루바시카라 불리는 상의를 착용하였고 여기에 남성은 바지를 입고 여성은 사라판이라는 소매 없는 원피스나 치마를 걸쳐 입었다. 이들 전통 의상에는 고대 러시아인들의 자연숭배 사상과 원시 신앙의 흔적이 드러난다. 특히 소매나 깃에 있는 자수는 장식의 효과뿐만 아니라 악한 기운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주는 주술적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한다.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정교를 수용한 후에도 민중의 의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반해 상류층의 의복은 비잔틴 문화의 영향으로 이전보다 더욱 화려해졌다. 점차 옷의 재료나 장식, 재봉법에 있어 계층 간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중세 러시아의 의복은 그 이후 시기에 비해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었으며 계층 간 차이가 그리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1696~1725)의 서구화정책으로 서구의 모드가 본격적으로 러시아에 유입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상류층의 의상은 러시아 전통 의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유럽적 전통으로 편입된 반면, 민중들은 러시아 전통 의상을 유지함으로써 둘 사이의 간격이 더욱 벌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시대를 가리켜 “할머니 시대의 유행이나 의상, 행동방식은 손녀들에게 이미 우스꽝스럽게 여겨졌으며 실소를 자아냈다”는 로트만(1994)의 지적처럼 표트르 대제 이전과 그 이후의 러시아는 모드와 모드에 대한 관점, 행동방식 자체에 있어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유럽식 모드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게 된 러시아 상류 사회에서는 서구 사교계 여성들을 모델로 하여 그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열망이 선풍적으로 일어났다. 의복이 바뀌면서 머리 모양도 바뀌었으며 가발이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하기까지 하였다. 상인의 부인들 사이에서는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것이 인기를 끄는가 하면 좀 더 유럽화된 귀족사회에서는 얼굴에 벨벳으로 만들어진 애교 점을 붙이는 것이 유행하고 애교 점의 위치에 따라 의미하는 바도 달랐다고 한다(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참조). 이렇게 러시아 모드는 프랑스를 위시해 서유럽 모드의 영향을 받으며 다채롭게 변화 발전해 나가게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의 유행이 이전의 유행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 변화의 속도에 있다. 유행하다는 뜻의 프랑스어 ‘아 라 모드(à la mode)’를 수용하여 독일에서 ‘아라모디쉬(alamodisch)’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 ‘아라모도 씨’라 불리며 풍자시나 그림에 등장한 것은 17세기 초반이다. “새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의 뒤를 쫓아 다양한 종류의 모자를 들여온다”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독일의 작가 모쉐로쉬의 글에서 당시 프랑스 모드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때는 버터 항아리 같은 모자를 들여오는가 하면, 원뿔형의 각설탕 모양, 추기경이 쓰는 모자 등을 들여오고 그런가하면 차양이 몇 엘레나 되는 넓은 테의 모자를, 그 다음에는 사슴털로 된 모자, 낙타털로 된 것, 비버털로 된 것, 원숭이 털로 된 것, 바보머리카락으로 만든 모자, 또 다음에는 흑림 치즈 같은 모자, 네덜란드 치즈 같은 모자, 뮌스터 치즈 같은 모자를 들여왔다.” (모쉐로쉬, 『이야기 모음집』, 17세기 중반, 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에서 재인용)

  프랑스식 긴 머리에 대해 “죄를 지어 한쪽 귀가 잘린 프랑스인들이 그것을 감추려고 고안해낸” 스타일이라고 비난하는 글 또한 독일의 프랑스 모드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 재인용 및 참조)
  한편 모럴리스트들은 외국의 옷이나 천을 들여오는 일을 곧 외국의 관습과 죄악도 함께 들여오는 일로 여겨 그것을 금기시했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은 17세기에 쏟아진 복장금지령에 반영되어 있다. 1662년 드레스덴의 가발 금지령, 브라운슈바이크의 리본복장 금지령, 1668년 라이프치히의 트레인(드레스의 길게 끌리는 옷자락) 금지령 이 내려졌는데, 프랑스 모드를 저지하기 위한 이 조치들은 사치에 세금을 부과하고 복식을 통한 신분들 간의 가시적 차이를 유지하려는 목적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1666년 영국의 찰스 2세가 시도한 의상개혁은 프랑스 모드의 파급력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 모드를 근절시키기 위해 의상 개혁을 시도한 찰스 2세는 1666년 10월 8일 의회에서 자신이 새로운 의상을 도입할 것이며 결코 그것을 벗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15일에 새로운 의상을 입고 나타난다. 긴 페르시아 재킷에 다리에 리본을 묶은 찰스 2세의 새로운 의상에 대해, “의상이 너무 훌륭해서 실현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는 새로운 의상이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다”(피프스, 『일기』, 1666)는 당시 기록은 찰스 2세의 개혁 시도가 오히려 프랑스 모드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피프스의 『일기』에 의하면, 루이 14세는 재위기간 동안 정치뿐만 아니라 취향에 관한 문제에서도 프랑스를 유럽의 중재자로 만들었다. (제임스 레버, 『서양 패션의 역사』 재인용 및 참조) 
  루이 14세의 영향력은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여성의 머리장식, 퐁탕주 스타일에서 잘 드러난다. 퐁탕주 스타일은 루이 14세의 애첩 퐁탕주 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왕과 함께 사냥을 나간 퐁탕주 부인이 헝클어진 머리를 스타킹을 고정시키는 가터로 모아 뒤로 묶었는데, 그 모습에 왕이 찬사를 보내자 다음 날 궁정의 모든 귀부인들이 머리를 리본으로 묶고 나타나면서 퐁탕주 스타일이 생겨났다. 거기에 레이스가 덧붙여지고 레이스에 캡이 첨가되면서 점점 높아지는 구조물을 지탱하기 위해 와이어 프레임까지 등장했다. 이 유행이 사라지게 된 것도 1699년 그것에 싫증이 난 루이 14세가 불만을 표시하자 곧이어 레이디 샌드위치라는 한 영국 여성이 머리 장식의 높이를 낮추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면서라고 한다.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릴 만큼 엄청난 권세를 누렸던 퐁파두르 부인의 의상과 몸치장은 퐁파두르 스타일이라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영국 한 보병연대(1755~1881)가 ‘퐁파두르들’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이 이 연대 군복의 표식 색깔이 퐁파두르가 좋아하던 색깔과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일화는 퐁파두르 스타일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 퐁파두르가 즐겨 신은 구두는 ‘퐁파두르 힐’로,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퐁파두르 머리형’이라 불렸는데, 특히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은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자니 케쉬,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등이 선호하면서 다시 한 번 유행이 되기도 했다.(이지은,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참조) 
  이처럼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지나치게 과시적인 유행에 대한 조롱과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유행을 무엇보다 왕에 대한 아첨과 추종을 일삼는 궁정인의 속성으로 보고 그것을 천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젊은이들이여, 저들의 오만한 정신은 새것이 아니면 모두 경멸하고, 의상과 화장, 몸치장의 시조 또는 창시자가 누구인지만 판단하며, 그들의 인내심은 일시적 유행이 지나갈 때까지도 지속되지 못한다.” (섹스피어, 『끝이 좋으면 다 좋아』, 1602-1605)

  17세기, 희극작가 몰리에르나 우화작가 라퐁텐이 유행을 주도하는 자에게서 본 것은 그들의 지나친 과시욕, 자신을 남과 차별화하려는 자의 허영심이었다. 모럴리스트 라브뤼예르도 권력과 재산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을 버리고 유행을 따르는 궁정인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출세하려는 궁정인이 기회를 잡으려고 독신자가 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 불안하고 경박하고 변덕스러워 모습을 수천 번이나 바꾸는 그를 어떻게 하나의 모습에 정착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그를 독신자로 묘사하고 그를 파악했다싶으면, 그는 이내 내 생각을 벗어나 자유사상가가 되어 있다. 계속 그런 상태라면 나는 그가 정신착란에 빠졌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행이 그를 압박하면 그는 또 독신자가 된다.” (라브뤼예르, <유행에 관하여>, 『성격론』, 1688)

  유행에 대한 비판은 남과 차별되기 위해 유행을 창출하는 소수 사람들의 허영심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조건 따르는 다수 사람들의 모방성을 겨냥한다. 유행이라는 사회적 현상의 본질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어린아이는 어른과 비교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그들의 태도와 방식을 모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남보다 열등해보이지 않기 위한 일종의 모방의 법칙이, 더욱이 유용성과 무관한 어떤 영역에서 나타날 때, 유행이라 불린다. 따라서 유행은 허영의 범주에 속한다. 그의 의도에는 어떤 내재적 가치도 없다. 또한 무분별의 범주에도 속한다. 유행은 예속상태를 동반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다른 사람들이 제공하는 하나의 예를 노예처럼 따를 수밖에 없다.” (칸트, 『실용적 관점의 인류학』, 1798)

  유행의 사회적 구속력은, “위선은 유행하는 악이고, 유행하는 모든 악은 미덕으로 간주된다”는 몰리에르의 말에서 적절하게 풍자되어 있다. 

“스가나렐 : 내가 옷을 입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야.”
“아리스트 : 언제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맞추어야 한다. […]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유행을 추종하는 자들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 는다. […] 하지만 나는 근거가 무엇이든 모두가 따르는 것을 고집스럽게 회 피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한다.” (몰리에르, 『남편들의 학교』, 1661)

“유행을 타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다. 유행에서 벗어나 옛 방식을 고수하는 자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들 한다. 유행에서 벗어나 있는 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괴짜이다. 한계를 벗어나 만족하는 바보보다 유행에 갇힌 바보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칸트, 『실용적 관점의 인류학』, 1798)

  유행이 갖는 영향력은 유행의 본래적 속성 즉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유행은 개념상 변화하는 삶의 방식이다.” 지배적인 위치에 있든 소외된 위치에 있든 기존의 집단적 유행의 획일적인 기준을 벗어나 자기 고유의 스타일로 특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새로운 양식으로 사회의 변화를 유도하고 변화의 방향을 가늠하는 일정한 역할을 한다. “유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그 새로움 때문이다.” (칸트, 『실용적 관점의 인류학』, 1798)

“여성들은 유행을 소중히 여긴다. 새로움은 언제나 젊음의 반영이기 때문이다.”(마들렌 드 스퀴데리, 『도덕적 대화』, 1701)

  유행의 새로움은 반드시 최초라는 의미에서의 독창성은 아니다. 현재의 스타일이 아닌 다른 스타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새로움이다. 그 다른 스타일은 지나간 유행이 오늘날의 취향으로 되살아난 것일 때도 있다. 유행은 언제나 그것이 새로움을 예고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유효해진다.

“하나의 유행이 다른 유행을 파괴하자마자 그 유행 또한 더 새로운 다른 유행에 의해 파괴된다. 그 또한 뒤 이은 유행에 굴복하고 그 유행도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경박함이란 바로 이렇다. 이런 변화를 거치는 동안 한 세기가 흘러갔다. […] 가장 특이하고 보기 좋은 유행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라브뤼예르, 『성격론』, 1668)

  일시적이지만 아름다움의 사회화된 형식임이 분명한 유행은 제도권으로 흡수되지 못하는 다양한 사회적 욕구가 표출되는 장이기도 하다.

“유행에 관하여, 현자들에게 기준을 부과하는 것은 광대들이고 여성들에게 기준을 부과하는 것은 화류계의 여자들이다.” (디드로, 『경솔한 보석들』, 1748)

  한편 1789년 프랑스 혁명기에 등장한 혁명 복장은 변화를 갈망하는 시대의 새로운 욕구를 적극적, 극단적으로 반영한 유행의 예를 보여준다. 특히 당시까지 귀족 등 상류층에게만 국한되던 유행 현상이 사회의 하층민에 의해 주도된 최초의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혁명에 의한 의복의 변화는 남성복에서 두드러졌다. 폭이 좁고 무릎까지 오는 바지 퀼로트는 당시 귀족의 상징적 복장이고, 노동자나 뱃사람들이 입던 폭이 넓고 긴 바지 판탈롱은 파리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층민의 남성 복장이었다. 이 명칭은 혁명 직전 파리에서 공연된 한 연극 작품에서 팡타로네라는 인물이 이 바지를 입고나온 데서 유래한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시민들은 대부분 이 판탈롱을 입고 있었는데, 자코뱅파는 그들이 퀼로트를 입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그들을 ‘상퀼로트’라 불렀고 혁명기 그것은 곧 혁명의 주체인 민중과 혁명의 정신인 평등을 상징하는 복장이 되었다. 

  카르마뇰이라 불린, 뒷면이 길고 앞면은 짧으며 금속 단추를 단 상의 또는 조끼는 자코뱅파들이 혁명 기간에 즐겨 착용한 것으로 일명 자코뱅 상의라고도 불렸다. 1789년 혁명 때부터 착용하기 시작한 붉은 색의 혁명모자, ‘프리지아 모자’(bonnet phrysien)는 가장 강렬한 혁명의 상징이었다. 본래 고대 로마에서 해방된 노예의 표식이었던 이 모자는 해방과 자유의 상징으로서 혁명파가 의도적으로 채택한 것이다. 프리지아 모자를 쓰고 창을 든 상퀼로트의 모습은 혁명세력의 사회적 상징이자 민중 선동의 수단이었다. 프리지아 모자는 1792~1793년에는 강제 착용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홍기현, <프랑스 혁명 전후의 복식 연구> 참조)

“민중은 혁명모를 모든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의 상징이며 전제정치에 저항하는 자들의 집합 신호로 이해한다. 그들로서는 이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며, 그 점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모든 시민은 프리지아 모자의 착용을 원한다.”(『파리 혁명』, 1792, 홍기현, <프랑스 혁명 전후의 복식 연구>에서 재인용)

  19세기 이후 프랑스의 유행에 대한 근대적인 논의에서 주목할 점은 영국의 댄디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유행을 예술의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하고자 한 일련의 예술가들의 관점이다. 댄디즘은 19세기 초 런던 사교계의 총아로서 ‘미남 브러멀’로 불린 멋스런 넥타이 매듭의 창안자 조지 브러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지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확산되면서 그들의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세계관에 대한 반발이 다양한 예술적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 댄디즘은 특히 문인들을 중심으로 “우아하고 사치스런 옷차림이나 세련된 생활형식, 냉소주의 등 철저히 외면적인 규율”을 채택함으로써 “부르주아지의 기계적이고 천박한 삶에 대한 항의”(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표현하고자 한 예술 경향이다. 댄디즘은 바르베 도르빌리가 『조지 브러멀과 댄디즘에 대하여』(1845)를 발표하면서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초기에 댄디즘은 ‘넥타이를 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스탕달, 1783-1842) 같은 표현이 보여주듯이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댄디즘은 특히 보들레르에게서 새로운 미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현재적 의미의 생생한 미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사회적 수단으로 해석되면서 예술적 인간의 존재론적 표지가 된다.(고봉만, <조지 브러멀과 댄디즘에 대하여> 참조) 
  보들레르는 댄디를 예술가보다 상위에 두고 댄디가 구현하는 ‘인공적 생활’을 열렬히 예찬했다. “문화가 닿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자연은 심미적 매력이 없으며, 이른바 자연의 매혹보다 도시, 도시적 문화, 도시적 오락, 인공적 생활, 인공낙원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정신적이고 영혼을 파고든다.” 거기서 피어난 것이 새로운 미 『악의 꽃』이다. 

“인간이 아름다움에 대해 갖는 관념은 그가 하는 모든 치장에 새겨져서, 그에 따라 복장을 흐트러지게 입거나 빳빳하게 입고, 동작을 유려하게 하거나 절도 있게 하며, 결국엔 그 개념이 표정에도 섬세하게 스며들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모습과 비슷하게 된다.” (보들레르, <미, 유행, 행복>, 『현대적 삶의 화가』, 1863)

  아름다움은 결코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특정 시대에 한정된 재현, 요컨대 유행을 통해 제공된다. 

“아름다움은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요소와 상대적이고 상황에 따른 요소로 구성된다. 후자는 번갈아서 또는 한꺼번에 그 시대이자 유행이고 모럴이고 열정이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식욕을 돋우는 신성한 과자의 모습과 같은 상황적 요소가 없다면 미의 영원한 요소는 소화될 수도 판단될 수도 적용될 수도 없어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보들레르, <미, 유행, 행복>, 『현대적 삶의 화가』, 1863)

  19세기 말에 유행은 예술과 영원한 미의 일시적 양식화, 시대에 강하게 새겨진 미의 살아있는 형식, 아름다움의 최신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1852년 영국인 찰스 워스는 파리에 오트 쿠튀르라 불리는 최초의 고급 의상실을 차렸다. 
  찰스 워스는 디자인을 창안하고 소비자보다 한 발 앞서 유행을 이끌며 섬유산업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최초의 디자이너이다. 유일한 소비자였던 귀족에게 전적으로 예속된 재단사나 쿠튀리에(디자이너)와 달리 그는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고 독자적으로 의상실을 운영하며 유행을 창출했다. 처음으로 모델에게 옷을 입혀 선보이고 실제 비용보다 높은 판매가를 책정함으로써 브랜드의 이미지가 가격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새로운 관행이 만들어진 것도 그에 의해서다.(이순재, <유행, 혹은 시대정신> 참조) 이때부터 20세기에 전형적인 모드의 양상이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 의복에 혁신을 가져온 코코 샤넬이 파리에 여성용 모자가게, ‘레 모드(les modes)’를 연 것은 1910년이다. 코르셋을 버리고 무릎까지 올라간 치마와 활동이 자유로운 여성용 바지,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는 손가방 등 이른바 샤넬 스타일은 당시로서는 혁명이자 해방이었다. 샤넬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확대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단순하면서 편하고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1947년 당시 유행을 뒤집고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풍성한 플레어 치마로 여성의 곡선미를 드러낸 ‘뉴룩’을 선보이며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최초로 라이센스 시스템을 정착시키며 세계를 무대로 파리 모드를 상업화하는 데 성공하고 프랑스 모드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전 세계에 심어주었다. 디오르는 전쟁으로 억제되었던 소비자의 심리가 풍성하고 화려한 스타일을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했다.
  샤넬과 디오르는 소비자도 아직 인식하지 못했던 그들의 욕구를 가시화해서 시장에 내보인, 후기 산업사회에 나타난 새로운 유행 현상의 창시자들이다. 유행의 변천 속에서도 변함없이 오늘날에도 애용되는 샤넬 스타일은 ‘모드’ 대신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유통시켰다. 

“유행은 유행에 뒤지게 되지만 스타일은 그런 일이 없다.” (코코 샤넬, 1971)

  20세기에 유행 현상은 엄청나게 풍부해졌으며 혁신성과 확산력은 더욱 강해졌다. 유행의 교체 속도 또한 빨라져 유행의 추이를 쫓아가기도 힘들 정도이다. 

“유행은 어려서 죽는다. 형을 선고받은 것 같은 그 분위기가 유행에 고귀함을 부여한다. 유행은 뒤늦은 재판, 항소, 회한을 기대할 수 없다. 유행은 표출된 바로 그 순간에 목표를 달성하고 그것을 납득시켜야 한다.” (장 콕토, <초상화-추억>, 『피가로』, 1963)

‘유행은 죽은 꽃이다.’ (프란시스 피카비아, 『글 모음』, 1970년대) 

  오늘날 유행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누구도 유행과 무관할 수 없다. 바르트가 유행에 관한 제도적 담론의 장의 형성에 주목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바르트는 유행을 일시적이고 우연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제도적으로 자율성을 갖춘 문화적 대상으로 본다.

“패션 잡지들의 - 그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대중적인 잡지들이라 할 수 있다 - 대중적인 확산이 얼마나 유행 현상을 변화시키고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바꾸어놓았는지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글을 통해 소통되면서 유행은 새로운 목적과 독창적인 구조를 갖춘, 자율적인 문화적 대상이 되었다. 의상의 유행에서 일상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적 기능에 문학의 기능과 유사한 다른 기능들이 대체 또는 추가되었다. 한 마디로 유행을 전담하는 언어를 통해 이제 유행은 이야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롤랑 바르트, 『유행의 시스템』, 1967)

“옷 입기는 일종의 삶의 방식이다.” (이브 생 로랑, 2008)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모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유럽식 모드의 중심에는 단연 프랑스가 있었다. 특히 표트르 대제 이후 그의 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 시대(1741~1761)에 프랑스의 영향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안나 이오안노브나 시대(1730~1740)의 독일적 취향에 대한 반발로 간주되기도 하는 엘리자베타 여제의 프랑스 심취는 일상문화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 단면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 이른바 ‘판도라들’이다. 최신 유행 스타일로 옷 입혀진 인형들이 파리에서 러시아 황실로 공수되어 왔는데 이 인형들의 명칭이 바로 ‘판도라’이다. ‘작은 판도라’, ‘큰 판도라’라 불린 이 인형들은 그 크기에 따라서가 아니라 옷의 용도, 가령 간단한 접견과 같은 소규모 행사용인가 파티와 무도회 등의 대규모 행사용인가에 따라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당시 판도라가 하는 역할은 훗날 유행잡지나 패션잡지들의 그것과 맞먹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17세기에 이미 유행잡지들이 출현하였지만 러시아에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판도라’들이 그 기능을 계속 이어나갔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가장 먼저 시즌의 신제품을 맛보기를 즐겼으며 다양한 의상과 장신구를 끊임없이 선보임으로써 스스로가 귀족들의 판도라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키르사노바, <러시아 여제들의 의복사> 참조).
  리하초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엘리자베타 여제 시대에 궁중 의상이 심지어 궁전 안의 건축물 및 정원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했음을 보여준다.

“엘리자베타 여제 치세에 페테르고프 궁전의 성대한 모임이나 무도회에서는 귀부인들과 그 파트너들이 특별한 ‘페테르고프식 의상’을 착용해야만 했다. 이 의상은 궁전의 색조, 그리고 분수 정원의 노란색, 흰색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리하초프, 『정원의 시학』, 1982)

  프랑스식 모드를 적극적으로 즐겼던 엘리자베타 여제 시대에 궁중 의상,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귀족들의 의상은 더욱 더 화려해져만 갔다. 이에, 예카테리나 여제(1762~1796)는 궁중 의상이 과도하게 화려해지고 사치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실, 은실 자수의 사용을 제한한다든지 레이스의 크기를 제한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특히 의상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이용하고자 애썼다. 지나친 프랑스화를 막고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러시아 전통 의상의 부활에 힘썼으며 또한 궁중의 여성들도 제복을 입도록 하는 법령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복장의 제한을 통해 과도한 사치와 낭비를 막고자 하는 의도뿐만 아니라 제복을 통해 여성들도 국가 통치 체계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그러나 여제의 이러한 의도가 귀족 사회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여인들은 여전히 최신 유행 좇기를 멈추지 않았다. 쿠친의 초상화 속 이름 모를 여인은 당시의 유행잡지들이 추천하는 방식 그대로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에 여성의 머리는 그 높이가 높을수록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 여인도 수직으로 높이 솟아있는 머리모양에 만족하지 않고 여기에 깃털까지 가미해 머리의 높이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엘리자베타 여제 시대에서부터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담배케이스가 모드의 필수적 소품으로 등장한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중반 두드러졌던 독특한 행위 방식이 바로 이 담배케이스의 유행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당시 궁중 홀의 구조적 특성(통풍구의 부재 및 촛불들의 산재)과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곤 했던 상황으로 인해 공기를 환기시키고 정신을 맑게 할 목적으로 코담배가 널리 유행하였다. 지금의 담배와는 성격이 다소 상이한 코담배는 주로 아로마향의 마른 잎으로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 담배 향이 전염병을 막고 피를 맑게 해준다고 믿었다. 코담배가 유행하면서 담배케이스가 필수적인 사치 용품이 되었으며, 이제 담배케이스는 그 화려함과 사용된 보석의 종류에 따라 소유주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신호하는 기호가 되기에 이른다. 특히 여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담배케이스가 포상품으로 수여되기도 하였는데 화려하게 장식된 담배케이스는 가장 선호되는 포상품이었다. 담배케이스는 특히 이것을 사용할 때의 행위를 일종의 모드로 만들었다. 이 독특한 행위는 자잘하고 분주한 제스처들을 배제한 채 느리고 우아한 손놀림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담배케이스만큼이나 이러한 행위 방식 자체가 유행하였다고 한다(타라부킨, 『의복사 개설』 참조).

  쿠친 초상화 속의 극도로 높이 말아올려진 머리모양이나 부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애교점에서도 드러나듯이 18세기의 모드는 다소 인위적인 것들이 많았다. 가발도 이러한 요소들 중 하나였다. 가발의 유행은 이것을 제대로 쓰기 위해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을 모드로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에 등장하는 늙은 백작부인은 18세기 후반 풍미했던 이 모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녀의 짧게 깎은 백발의 머리에서 분을 뿌린 가발을 떼어냈다.”(푸시킨, 『스페이드 여왕』, 1834)

  그러나 18세기 말엽부터 낭만주의가 싹트고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움에서 미적 가치를 찾는 경향이 점차 두드러지게 된다. 이에 따라 의상이 소박해지고 자연적인 것이 추구되면서 여성옷은 목선이 깊이 파이고 허리선이 높이 올라간 의상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각광받게 된다. 보로비콥스키의 초상화속 여인 로푸히나는 당대 손꼽히는 미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와 자연스러운 머리 모양은 당시의 유행을 그대로 보여준다. 

  낭만주의 시대에 모드의 변화는 외모에 대한 대중적 취향도 바꾸어 놓았다. 그 이전 시기에는 미인이 건강함과 풍만함의 상징이었으며 통통하고 혈색 좋은 여인이 미의 이상으로 간주되었다면 낭만주의 시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여인을 이상화하게 된 것이다. 아래의 주콥스키의 시에서도 묘사되고 있듯이, 창백한 얼굴, 여린 몸매, 우수에 찬 눈빛에 남성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눈을 즐겁게 하는 생기 있는 얼굴빛
그것은 젊은 날의 훈장,
하지만 창백한 얼굴빛, 우수의 증후야말로
그보다 더 사랑스럽지” (주콥스키, <알리나와 알리심>, 1814)

  변화무쌍한 모드의 속성상 18세기 러시아 사회의 모드도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주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을 하나 꼽는다면 바로 러시아 모드의 중심에 항상 프랑스가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18세기~19세기 초 러시아 사회에서 프랑스 모드의 위력이 여성들의 머리모양이나 의상에서만 발견되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모드는 ‘새로운 것’, ‘서구적인 것’, ‘세련되고 우아한 취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기호였다. 패션 잡지라기보다는 사회문화 비평 잡지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 수성(水星)>의 발행인 마카로프가 잡지의 방향키로 파리의 모드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수성>은 매달 발행될 것이며 날짜는 명시하지 않는다. 외국잡지들에 따라 그 날짜가 달라진다. <수성>의 독자가 최신 모드에 대해 알게 되는 시기는 <파리 잡지>의 독자들보다 단지 일주일 늦을 뿐이다. 즉 프랑스에서 최초로 모드가 공개된 후 35~6일 후면 최신의 모드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 이처럼 모드는 우리의 방향키가 될 것이며 이를 토대로 우리 잡지의 다른 기고문들도 작성될 것이다.” (<모스크바 수성>, 1803)

  그러나 프랑스 모드에 대한 심취, 무조건적인 모방은 작가들의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가령 크릴로프는 <유행하는 상점>, <딸에게 보내는 교훈>(1807) 등을 통해 프랑스적 모드에 열광하는 세태를 풍자한 바 있다. 또한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에서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프랑스 상점들이 즐비해있는 곳, 즉 ‘쿠즈네츠키 모스트’ 거리에 대한 파무소프의 불평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쿠트네츠키 모스트, 다 영원한 프랑스인들 덕분이지. 거기서 유행이라면 작가에서 뮤즈까지 죄다 끌어오니. 주머니와 마음을 털어가는 도둑놈들! 신은 언제 우리를 모자, 보닛, 머리핀, 단추, 책방, 과자가게에서 벗어나게 해주실런지!”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5)

  한편, 손님 접대를 즐기는 러시아인들의 이 잘 알려진 성향은 18세기~19세기에 여주인의 의상과 관련해 당대의 독특한 사회 현상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손님 접대시 여주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집안 식구들끼리 있을 때 입는 실내복과 손님을 맞을 때 입는 실내복이 달랐으며 손님을 맞을 때도 모임의 상황과 성격에 따라 옷, 장신구, 신발까지 모두 달리 하였다. 이처럼 이 시기 귀족 사회를 지배했던 사교계 에티켓은 행동이나 제스처뿐만 아니라 의상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었다. 사교계에 나갈 때 어떤 상황에서 어떤 옷과 어떤 장신구들을 어떤 방식으로 착용해야하는지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었다. 이 부분에 있어 실수는 그 사람의 명성에 치명적일 수 있었기에 상류사회의 일원들은 이 원칙들을 익히고 지키는 것을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공식적인 모임에 초대받은 경우 그에 걸맞은 의상 형태가 권유되며 이 권유는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1834년 1월 26일 푸시킨의 일기는 모임의 성격에 맞지 않는 옷을 착용한 푸시킨이 느꼈을 곤란한 심경과, 따라서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드러내준다.

“지난 화요일에 아니츠코프 저택에 초대되었다. 제복을 입고 갔다. 손님들이 연미복을 입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모드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특징적인 문화 현상으로 댄디즘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 태동한 댄디즘은 19세기 전반 러시아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한다. 댄디즘은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독특한 행위방식과 보다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겉으로 표출되는 주요 방식 중 하나가 세련되고 우아한 의상이었다. 댄디의 창시자라 불리는 영국인 조지 브러멀은, 심지어 그가 모드를 따른 것이 아니라 모드가 그를 따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련되고 우아한 복장의 아이콘이었다. 브러멀은 오전 시간 전부를 치장하는 데 썼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외모 가꾸기는 당시 댄디들의 필수적 요소였다. 19세기 러시아 댄디의 모습은 푸시킨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옷에 관한 한 전문가였으며
소위 말하는 진짜 멋쟁이였다.
적어도 하루 세 시간은
거울 앞에서 보냈으며
치장을 마치고 나올 때는
흡사 경박한 비너스가
남장을 하고
가면무도회에 달려가는 모습 그대로였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댄디를 댄디답게 만드는 것은 세련되고 우아한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댄디의 공공연한 행동방식 중 하나였던 ‘건방지고 뻔뻔스러운 태도’도 댄디의 필수적 요소였으며 이러한 태도는 당시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그 이전에도 안경이 몸치장을 위한 소품으로 유행했던 적은 있었지만 댄디들에게 안경은 몸치장 그 이상의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일상적 예의범절에 따르면 연령이나 지위가 더 높은 사람과 여성을 안경 너머로 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댄디들은 이러한 행위를 노골적으로 하였으며 안경(특히 오페라 안경) 너머의 시선은 전형적인 댄디적 제스처로 간주되었다.

“낯선 귀부인들이 앉아있는 특별석을
오페라 안경으로 흘끔흘끔 곁눈질해 본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댄디즘은 관습으로부터, 기존의 사회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개인주의적 지향이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댄디라는 것은 열광하거나 분노하는 관찰자로서 대중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외모에 대한 집착은 미적 취향에 있어 두드러지고자 하는 바람, 대중의 흠모와 열광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지향, 하지만 이에 대해 노골적인 싫증과 환멸을 드러냄으로써 만끽할 수 있는 쾌감과 밀접히 관련된다. 댄디적 외모와 행위방식에 젊은 아가씨들이 어떻게 반응하였을지는 푸시킨의 『벨킨 이야기』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알렉세이가 우리 아가씨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들이 난생 처음 만난 우수와 환멸의 인간이었고, 그녀들에게 잃어버린 기쁨과 시들어버린 청춘에 대해 이야기해준 최초의 남자였다. 더군다나 그는 해골 문양이 새겨진 검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 현에서는 지극히 새로운 것이었다. 아가씨들은 그에게 거의 얼이 빠진 상태였다.”(푸시킨, 『벨킨 이야기: 귀족아가씨-시골처녀』, 1831)

  이처럼 푸시킨은 19세기 유행했던 댄디의 모습을 작품 곳곳에서 형상화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푸시킨 자신도 한때 댄디의 전형적 요소들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1820년대 남쪽지방에서 유형생활을 하던 시절의 푸시킨은 엉뚱한 행동, 무례함, 외모에 대한 관심, 주변인들을 멸시하면서도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자 애쓰는 등 댄디의 전형적인 행동방식을 많이 드러냈다고 한다(코네츠니이 외, 『푸시킨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일상생활』 참조). 푸시킨이 동생에게 쓴 아래의 편지에는 댄디즘에 입각한 충고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에 대해 절대 진심으로 판단하지 말고, [...] 그들을 가장 예의바른 방식으로 경멸해버려.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냉정을 잃지 마. 친근함은 항상 해로우니까. [...]
만약 금전적 상황이나 환경이 너를 빛나게 해줄 상황이 아니라면 궁핍함을 감추려들지 말고 다른 극단을 선택해버려. 냉소주의는 그 강렬함으로 인해 세상의 견해를 위압할 수 있지만 허세를 부리려는 얕은 책략은 인간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무시 받도록 하는 법이니까.” (푸시킨, 1822)

  이처럼 18~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옷차림뿐만 아니라 행동방식,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서구식 모드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반면 19세기 후반까지 농노제가 유지되었던 러시아에서 서구식 모드에 물들지 않은 채 러시아 전통 의상을 계승, 보존하는 일은 러시아 농민들의 몫이었다. 이로써 러시아 의상에 있어서도 러시아 문화의 전형적인 이중구조 귀족-농민, 서구-러시아, 신-구의 대립이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대립의 양상을 드러내던 러시아 모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사회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혁명기 러시아에서는 민족적 특성을 살린 러시아적 의상이 주목을 받았으며 유럽적 스타일에 러시아적 전통 요소를 혼합한 스타일이 유행하였다. 
  한편 소비에트시기에는 의상과 유행 즉 모드 자체가 부르주아적 개념으로 규정되어 거부되기에 이른다. 소비에트 정권은 여성의 옷이나 화장에 대한 욕구를 비난하고 이를 여성의 평등권을 저해하는 요소로 규정하였다. 요컨대 모드에 대한 지향은 여성이 스스로를 남성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시기 소비에트 정권이 위로부터 설정한 이상적인 여성상은 ‘노동자’와 ‘어머니’였으며 따라서 여성들의 모드에 대한 욕구는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소비에트 시대에 억눌렸던 욕구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세련되고 비싼 옷, 화장품, 액세서리 등에 대한 소비 욕구로 폭발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자본주의의 물결 이후 내면의 정신적 가치가 아니라 겉에 걸치고 있는 옷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경향도 짙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자주 인용되는 표현처럼 “당신의 옷이 곧 당신”이며, “누더기를 입고 있으면 황제도 거지로 본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모드에 대한 열망과 욕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모드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높은 관심은 모드를 자신의 표현이자, 더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 보려는 경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 ‘모드 mode’[mɔd]의 어원은 방식, 측정, 치수, 척도를 의미하는 라틴어 modus이고, ‘유행’과 ‘의상’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모다 мода[moda]’의 직접적 기원은 프랑스어 mode이다.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의 모드는 특히 18세기 이후 러시아 의상과 유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상이야말로 지형과 기후 등 자연적 조건에 따라 특성이 마련되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보편적 요소이다. 그러나 지역적 차이를 벗어나 특정한 형태의 의상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라 입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흔히 프랑스어 ‘모드’를 사용하여 가리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형태의 의상을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유행시킴으로써 모드를 선도한 나라는 프랑스다. 루이 14세 시대 화려한 궁정문화를 하나의 모델로 제시하며 의상뿐 아니라 일정한 예법과 생활양식을 전 유럽에 전파시킨 이래로 프랑스는 ‘아 라 모드(à la mode, 유행하는)’라는 프랑스어를 널리 퍼트릴 정도로 유행의 중심에 있는 나라가 되었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도 코코 샤넬과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시대의 변화와 대중의 심리를 파악하여 그것을 반영한 복식을 선보이고 그것을 전 세계에 보급함으로써 프랑스의 모드는 다시 한 번 세계를 선도하며 패션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그런 한편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이래로 남의 환심을 사고 주목을 끌려는 유행의 동기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유행의 속성에 주목하여 유행을 불안정하고 경박한 허영심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비판적 시각 또한 끊이지 않았다. 모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세계 유행을 주도하는 패션의 중심지라는 프랑스의 이미지 이면에서, 유행을 경멸하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개성을 보여주려는 프랑스인들의 강한 성향에 반영되어 있다. 
  러시아에서 의상과 모드는 표트르 대제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가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이전 시기까지 비교적 전통이 잘 유지되었다면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정책 이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러시아 상류사회가 유럽식 모드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게 되면서 서유럽, 특히 프랑스식 모드에 대한 지향이 선풍적으로 일어났다. 18~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는 옷차림뿐만 아니라 행동방식,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프랑스 식 모드에 맞게’ 하는 것을 중요시할 정도로 프랑스 모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한편 19세기 후반까지 농노제가 유지되었던 러시아의 농민 사회는 전통 의상을 오래도록 보존하였다. 이로써 러시아 의상과 모드에 있어서도 러시아 문화의 전형적인 이중구조 귀족-농민, 서구-러시아, 신-구의 대립이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프랑스 모드와 별개로 러시아 모드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혁명기와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이다. 혁명기에는 유럽적 스타일에 민족적 특성을 가미한 러시아적 스타일이 유행하였으며 소비에트 체제하에서는 모드 자체가 부르주아적 개념으로 규정되어 거부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소비에트 시기에 억눌렸던 모드에 대한 욕구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폭발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른다. 오늘날에도 모드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관심과 열망은 여전히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연관 토포스 귀족; 무도회; 미; 살롱; 속물; 의복; 혁명
참고자료(프랑스) Bailleux, N., Remaury, B. Modes et vêtements, Paris, Gallimard, 1995.
Barthes, R. Système de la mode, Éditions du Seuil, Paris, 1967.
Besson, J.-L. Le Livre des costumes. La mode à travers les siècles, Gallimard, 1986.
Deslandres, Y. Müller, F. Histoire de la mode au XXème siècle, Paris, Somogy Éditions d’Art, 1986.
Godart, F. Sociologie de la mode, Paris: La Découverte, 2010.
Grumbach, D. Histoire de la mode, Seuil, 1993.
Picabia, F. Écrits, Ed. Olivier Revault d'Allonnes et Dominique Bouissou, Paris, Belfond, 1975, 1978.
Rey, A. dir. Le dictionnaire culturel en langue française, Le Robert, 2005.
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 이재원 역, 한길사, 2000.
아놀드 하우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 염무웅 공역, 창작과 비평사, 1983.
이지은,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 탐미의 시대 유행의 발견』, 지안출판사, 2012.
제임스 레버, 『서양패션의 역사』, 정인희 역, 시공사, 2005.
고봉만, <조지 브러멀과 댄디즘에 대하여>, 『프랑스문화예술연구』, 2010.
이순재, <유행 혹은 시대정신>, 고봉만 외,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 한길사, 2001.
홍기현, <프랑스 혁명 전후의 복식 연구>, Journal of fashion business, 1997.
참고자료(러시아) Жуковский В. А. <Алина и Альсим>,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4 т. М. Л., 1959—1960.
Кирсанова Р. <Из истории костюма русских императриц>, РОССИЯ / RUSSIA, Вып. 3 (11): Культурные практики в идеологической перспективе, Россия, XVIII - начало XX века, М., 1999.
Конечный А. А. и другие, Быт пушкинского Петербурга:Опыт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ого словаря, СПб., 2011.
Лихачев Д. С. Поэзия садов: К семантике садово-парковых стилейб Л., 1982.
Лотман Ю. М. Беседы о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е. Быт и традиции русского дворянства (XVIII — начало XIX века), СПб., 1994.
Орленко Л. В., Терминолог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одежды, М., 1996.
Пушкин А.С.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10-х томах. М. 1977-1979.
Тарабукин Н. М. Очерки истории костюма, М., 1994.
Фасмер М. Р. Этимолог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русского языка, М., 1987.
강윤희,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여성의 정체성과 소비: 패션을 중심으로>, 『국제지역연구』 12:3, 2008.
추천자료(프랑스) 마거릿 크로스랜드, 『권력과 욕망』, 이상춘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막스 폰 뵌, 『패션의 역사』, 이재원 역, 한길사, 2000.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김붕구 역, 민음사, 2001.
앙리 지델, 『코코 샤넬』, 이원희 역, 작가정신, 2008.
이순재, <유행 혹은 시대정신>, 고봉만 외, 『프랑스 문화예술, 악의 꽃에서 샤넬 No.5까지』, 한길사, 2001.
추천자료(러시아) 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김성일, 방일권 옮김, 나남, 2011.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 시로 쓴 소설』, 김진영 옮김, 을유세계문학전집 25, 2009.
______,『벨킨 이야기』,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
______,『스페이드 여왕』, 김희숙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