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무도회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무도회
토포스명(프랑스) bal
토포스명(러시아) бал
정의 1. 귀족들이 춤과 사교모임을 원할수록 무도회는 번성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동원된 놀이이면서 동시에 정서적 표현이기도 한 ‘춤’은 그 기원을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의 원초적인 풍경으로 자리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춤을 매개로 하여 사람들이 함께 모여들면서 일정한 시간을 함께 누리는 집단적이고도 사회적인 행위 혹은 행사가 ‘무도회’인데, 이에 대한 의미 있는 기록은 프랑스의 경우, 대체로 12세기 후반에서야 찾아진다. 무도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bal’은 그리스어 ‘ballizein(춤을 추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주로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3박자의 음악을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함께 모여 춤을 추는 모임을 지시하기 위해 맨 처음으로 ‘발 bal [bal]’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원래 민간에서 민속적인 요소가 발현되는 가운데 들판이나 전원에서 행해진 무도회는 르네상스시기를 거치면서 전 유럽에 걸쳐 매우 유행하게 된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이 풍습은 왕실과 조정에서도 적극 받아들여져서, 보다 세련되고 격조 있는 형식으로 발전해 나가기도 한다. 
  왕실과 조정에서 주로 행해진 이러한 발전된 무도회 형식은 하나의 예술적 공연물로 격상되기도 하는데 이를 단순한 ‘무도회 bal’와 구분하여 ‘발레 ballet’라 불렀다. 당연한 말이겠으나, 발레는 공연물이어서 그것을 연출하는 전문적인 무용수들은 그들을 구경하는 관객과는 분리되었다. 그리고 무대에서 보이는 무용의 공연은 훈련을 통해 연출되었으며 그것에는 매우 높은 수준의 미학적 완성도가 요구되었다.
  이에 비해 무도회는 누구나 춤을 출 수 있었으며 그 춤들은 최소한의 움직임의 법칙만 지켜지면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요구도 부과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도회에서 중요한 것은 동작과 안무의 미적 표현이 아니라 춤추는 주체들의 감정의 표출이었으며 자유로운 유희로서의 성격이었다. 
  13세기부터 널리 유행하기 시작한 이러한 무도회는 주로 일요일이나 각종 축제일에 마을과 교회의 광장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몇 시간씩 진행되었다. 그러나 보다 격식에 맞춰진 무도회의 기원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궁정 축하연에서 시작되었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무도회는 14 세기 후반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의 샤를 6세와 바이에른의 이자보와의 결혼식에서 거행된 축하연에서 시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15-16세기에는 궁정이나 귀족들의 성에서는 무도회가 별로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던 중 17세기 부르봉 왕조의 마리 드 메디치 왕비가 프랑스로 가면무도회를 도입하고 또 앙리 4세가 집권한 후 무도회는 폭넓게 확산되었으며, 루이 14세 때에 이르면 진정한 의미의 무도회가 그 본격적인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후 춤추는 주체들의 감정적 자발성과 그 즉발적 표현이 충분히 보장되는 문화적 공간이었던 무도회에서는 때때로 관능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충분히 빠른 템포로 반복적으로 흥겹게 연주되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인 남녀가 만나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대중적인 무도회는 새로운 연애 관계가 태어나는 낭만과 유혹의 공간으로 일정 부분 받아들여지고 또 기능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도회는 일상의 사회 경제적 활동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유희와 유흥의 순간이었으며 결코 과도하지 않은 정도의 일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음악과 리듬에 맞추어 육체를 움직이고 흔드는 동작들은 춤추는 사람에게 인간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이고도 원시적인 감흥을 일깨워 주었다. 그럼으로써 무도회는 오락과 유흥이 허락되는 특별한 축제의 공간으로 각인되었다. 
  무도회가 갖는 그러한 문화적 심리적 표상으로 인해 그것은 연극이나 소설 등에 매우 자주 주요한 배경 및 소재로 언급되고 묘사된다. 그리하여 무도회 장면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국가들의 문예미학 작품들에서 쉽게 발견되는데, 작가들은 무도회 공간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다양한 줄거리와 사건을 등장인물들에게 연결 지을 수 있었으며 인간관계에서 가능한 모든 감정적 발단과 그 복잡한 전개를 무도회가 끝나고 나서도 펼칠 수 있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무도회’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발 бал [bal]’은 프랑스어 ‘bal’을 음차한 것이며, 러시아에 무도회가 시작된 것은 18세기 무렵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수입한 표트르 대제 시기로 추정된다. 문헌에 언급된 최초의 무도회는 1606년 참칭자 드미트리 황제와 마리나 므니세크의 결혼식에서 펼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표트르 대제 시기부터이다. 표트르 대제는 서구의 무도회를 유입하면서 ‘아삼블레야’라는 독특한 형태의 러시아식 무도회를 만들었다. 프랑스어 ‘assemblée (모임)’를 러시아어로 차용한 ‘아삼블레야 ассамблея’는 유럽식의 여가 형태를 본떠 만든 일종의 야외 축제이다. 1718년 11월 26일 표트르 대제의 지령에 의해 만들어진 아삼블레야에 대해 표트르 대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아삼블레야는 러시아어로 한 단어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프랑스 단어이다. 그러나 다음의 것은 명확히 얘기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놀이를 위한 모임이나 회합뿐만 아니라, 사무적인 성격도 가진다. 서로 만나서 필요한 것들을 교섭하고 얘기도 들으면서 여흥을 곁들인다.” (자하로바, 『러시아 무도회』에서 인용) 

  아삼블레야는 무도회와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실내에서 열리는 무도회와 달리 초기에는 주로 여름에 야외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춤이 주가 되는 무도회와 달리 아삼블레야는 음식, 술, 춤, 카드놀이 등 다양한 형태의 여흥이 포함되었고, 각각의 여흥을 즐기는 장소를 구별하기도 하였다. 즉, 한 방에서는 춤을 추고, 다른 방에서는 장기나 카드놀이를, 또 다른 방에서는 긴 파이프 담배를 피면서 술과 음식을 먹곤 하였다. 아삼블레야는 반드시 귀족과 그의 가족만이 참석할 수 있었는데, 특히 여성과의 동반 참석이 필수적이었다. 
  이후 아삼블레야는 1722년에 모스크바 귀족 사이에서도 유행되기 시작하였고, 겨울철에는 일주일에 세 번 (일요일, 화요일, 목요일)이나 열릴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아삼블레야는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의 무도회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무도회로 전환되었다. 
  러시아에서의 무도회의 본격적인 도입과 확산은 18세기 중, 후반 이른바 ‘여제들의 통치 시기’에 이루어졌다. 1725년 표트르 대제 사후부터 1762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통치하기 이전 약 38년간 러시아 황실은 6명의 황제와 여제가 등극하는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를 통치한 여러 황제들, 특히 여제들은 정치적인 미숙함을 드러냈지만, 서구 문물의 도입에 적극성을 보여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서구의 무도회를 도입한 것인데, 무도회는 러시아 귀족들이 서구 귀족들의 여흥 문화를 수용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모방, 동경하는 통로가 되기 시작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조카딸인 안나 이오나노브나(통치 기간 1730-1740) 시기에 무도회는 러시아 문화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여제는 아삼블레야에서 허용된 담배, 음식, 도박을 제거하고 춤이 중심이 되는 유럽식 무도회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여제는 춤을 잘 추지 못하는 귀족들을 공개적으로 비웃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았고, 궁정 무도회는 성황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통치 기간 1742-1762) 러시아에서 무도회를 번성 시킨 통치자로 불린다. 특히 여제는 모스크바에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무도회 홀을 만들어 무도회를 자주 개최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를 일컬어 ‘귀족들의 영원한 축제’의 시기로 부르기도 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외국 문물에 큰 관심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를 비롯한 외국어에도 능통하였다. 한때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프랑스 문물에 매우 관심이 높았고, 특히 무도회와 춤에 큰 관심을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여제가 러시아의 민중 춤에도 능통하여 서구의 춤과 러시아의 민중 춤을 조합한 춤을 러시아에 확산시켰으며, 이것은 향후 러시아 무도회의 독특한 토포스를 형성하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비록 짧은 시기이지만 18세기 중반 러시아 왕조에서 여제들의 지배는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특히 무도회 문화에서 여성들이 무도회의 중심에 서게 되는 흥미로운 토포스를 잉태시킨다. 
  이 시기 무도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무도회의 시작과 끝은 반드시 화려하고 의식적인 열병식을 시행하여 궁정에서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고 일반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과시했다는 점이다. 즉, 당시 무도회는 러시아 왕권과 귀족 문화 정착의 토포스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도회의 이러한 의식적이며 화려한 외양은 예카테리나 여제의 등극 이후 더욱 심화된다. 예카테리나 시대에는 궁정이나 개인이 주관하는 ‘사설 무도회’와 여러 명의 귀족들이나 귀족 모임 단체가 주관하는 ‘공공 무도회’가 분리되어 개최되었다. 특히 공공무도회가 매우 활성화되었는데,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귀족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형성되어 매주 목요일마다 공공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공공 무도회는 매우 화려했는데 거대한 홀에는 수천 개의 초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모든 벽면은 거울과 수많은 그림들로 장식되곤 하였다. 공공무도회는 러시아 사회의 귀족 세력들의 연대감을 강화시키면서 이후 러시아 귀족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인 배타성을 형성하는 근간으로 작용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충분히 대중적이었으며 민속적인 성격도 가미된 원래의 무도회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궁정 및 귀족의 저택 등 상류 계층의 공간에서 주로 열렸다. 특히 루이 14세 시절에 귀족적 무도회 문화는 절정에 달한다. 새롭게 완공한 베르사이유 궁 뿐 아니라 파리의 각처에서 개최된 무도회는 하나의 여흥과 오락의 문화적 공간이기를 넘어서 일정한 정치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당시 과도하게 비대해 진 귀족 세력의 간섭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태양왕은 지방 귀족의 자제나 친인척을 베르사이유에 머물게 하여 그들을 일정하게 견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무도회, 발레, 연극, 음악 등의 다양한 형태의 축연 장치들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관행과 맞물려 프랑스의 무도회는 매우 호사스럽고도 화려한 귀족적 성격을 더해가게 되었다. 
  주로 상층 계급의 전유물로 남아있던 무도회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루이 14세가 죽은 후 오를레앙공 필립의 섭정이 시작될 무렵인 1715년 12월 31일 오를레앙공은 새해맞이를 위해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춤을 출 수 있게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카니발 기간 동안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무도회가 열렸다. 뿐만 아니라 이를 모방한 파리의 유명한 연극단들과 오페라단들, 예컨대 코미디 프랑세즈, 오페라 코미크, 그리고 코미디 이탈리엔느 등이 그들의 극장을 경쟁적으로 열어 무도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오페라 극장은 새롭게 열리는 무도회를 위해 기존의 극장 무대를 변경하기도 한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이 쉽게 무대에 올라와서 더 흥겹고 화려한 동작으로 춤을 출 수 있기 위한 조치였다. 심지어는 주위의 벽을 큰 거울로 장식하여 무대가 더 커보이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빈번하게 열린 각종 대중 무도회는 파리 시민들의 정치적 성취와 희열을 담아내는 공간이기도 하였는데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제 무도회는 더 이상 귀족계급의 전유물이기를 넘어서 일정한 경제력을 갖춘 상층 부르주아들의 문화 공간이 된다. 예를 들어, 1790년 한해에만 파리에서 약 400 건의 대중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특히 혁명 기념일이자 가장 큰 국경일인 7월 14일에 열리는 길거리 무도회는 무도회의 중세적 성격, 즉 대중적이고 민속적인 성격을 고스란히 회복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악기인 아코디언은 무도회의 문화사에 새로운 분위기와 색채를 부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우선 특정 장소에 설치되는 오르간이나 피아노와는 달리 연주자가 가볍게 등에 메고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건반악기의 특성은 고스란히 이어받아 동시에 여러 음을 낼 수가 있었다. 주입되는 공기의 풍량으로 쉽게 조절되는 소리의 크기는 연주자로 하여금 특정한 순간에 관찰되는 춤꾼들의 감정에 맞춰 그 리듬과 강약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아코디언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발흥한 왈츠가 도입되었을 때, 이 춤곡을 공적이고 사적인 모든 무도회에 보급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 아코디언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파리와 그 근교에 등장한 대중 무도회장, 이른바 ‘댄스홀’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대혁명 직후에 대중적 인기를 누린 무도회는 ‘티볼리 무도회’, 몽소 공원의 ‘샤르트르 광란’, ‘비롱 공원 무도회’, 지금은 엘리제 궁이 되어버린 ‘부르봉 공원 무도회’ 등이 그것들이었다. 이 무도회장들은 19세기 내내 그 화려한 위용을 떨쳤으며, 특히 몽테뉴가(街)의 마비유 무도회장에서는 캉캉 춤이 도입되어 무도회에서의 사람들의 몸짓을 더욱 빠르고 현란하게 만든다.
  1850년 이후의 제 2 제정 시대에는 오페라 극장 무도회가 그 전성기를 맞이하며 이것의 성공은 19세기 후반의 물랭 루즈, 타바랭 무도회, 물랭 드 라 갈레트 그리고 라프가의 여러 무도회장들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무도회 풍경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변화는 남미의 리듬과 음악의 도입이다. 익히 알려진 탱고나 살사는 기존의 대중적 춤곡 형식에 더해져서 프랑스의 무도회를 더 활기차고 다양하게 만든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의 이와 같은 무도회의 보급 이전에 역사적으로 기록된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이 언급될 만하다. 이른바 ‘불타는 자들의 무도회 ’라고 불리는 14세기 말 프랑스 궁정의 한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1393년 1월 프랑스의 국왕 샤를 6세는 왕실의 처녀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혼인식을 기념하여 가장 무도회를 개최한다. 그들은 흥을 돋우기 위해 모든 참석자가 짐승의 털로 얼굴과 몸을 가리게 하고, 특히 왕실의 측근 네 명은 사슬에 묶인 채 춤을 추며 피로연을 즐기게 기획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가면과 장식 속의 얼굴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호기심에서 횃불을 이들 네 명에게 너무 가까이 들이댄 나머지 불이 붙고야 만다. 사슬에 묶여 있던 왕의 측근들은 그들을 덮고 있던 짐승의 털들과 함께 불길에 사로잡혀 모두 죽는데, 이 사건 이후 젊은 왕 샤를 6세는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곧 그의 재위기간을 마감하게 되는 역사적 기록을 남긴다. 무도회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반 민중과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삶과 일상에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은 문화적 구성물이기에 오래 전부터 모든 형태의 이야기와 문학에 단골 소재로 쉽게 등장한다. 프랑스의 문화사에서의 무도회 토포스의 발현은 매우 빈번하게 이루어 졌음은 자명한데, 그 중 중요한 사례를 언급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17세기 동화 작가 샤를 페로가 기존에 민담의 차원으로 민간에 퍼져있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새롭게 정리한 『상드리용 혹은 작은 유리 구두 이야기』일 것이다. 
  성인이 읽는 소설이 아니라 모든 어린이들이 어김없이 접하게 되는 동화의 차원에서 등장하는 신데렐라의 무도회 이야기는 그 자체로 프랑스인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하나의 문화적 의미기호로 자리 잡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데렐라에게처럼 낭만을 꿈꾸는 프랑스의 모든 소녀들에게 무도회는 지루한 일상적 운명에 빛나고 화려한 전환을 가져다주는 동경의 토포스로 기억된다. 
  그러나 19세기 소설문학에서 누구나 기억하는 무도회 장면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우연히 참여하게 되는 보비에사르 저택의 무도회일 것이다. 엠마의 낭만적 동경과 환상은 기본적으로 신데렐라의 그것과 궤를 같이 같이하는데, 부르주아 시대의 단조로운 일상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루게 되고 그에서 비롯되는 두 요소의 어쩔 수 없는 부조화가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엠마의 무도회 경험은 단번에 문학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마담 보바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데렐라』의 허황된 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플로베르의 그 소설을, 현실의 냉엄한 성인 세계에 들어서서도 소녀 시절의 유리 구두를 계속 꿈꾸는 예외적으로 유약하고 낭만적인 여성들을 향한 하나의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엠마가 무도회장에서 신었던 비단구두 밑창에 묻은 밀랍 촛농은 수많은 프랑스 여성들의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전형적인 낭만적 로망의 토포스로 남는다. 신데렐라의 프랑스어 발음인 ‘상드리용’이 타고남은 재를 의미하는 ‘상드르’ 의 파생어라는 점은 프랑스어 화자들에게 엠마와 신데렐라를 동일한 분위기 속에서 연상할 수 있게 한다.
  19세기 말에 발표된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에 나오는 선술집 무도회 장면은 위의 두 경우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치열한 생존을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허용되는 싸구려 술과 음악과 춤의 공간은 기존의 무도회가 형성하는 화려하고 흥겨운 축제적 의미와는 달리 하층민들의 일탈과 열망 그리고 분노를 표현해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존의 무도회장에 어쩔 수 없이 포함되어 있는, 실제의 삶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허영의 기만적 분위기를 극적인 반전으로써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문학적 계기는 모파상의 『목걸이』에서 형상화된다. 이 소설에서 무도회는, 현세적 삶에 겹겹이 스며들어있는 허위의식과 그로 인한 세속적 허영과 불행을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주요한 배경으로 기능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크의 수많은 소설에 등장하는 무도회의 언급과 묘사를 다 셀 수는 없다. 그러나 첫 장면을 무도회장에서 시작하는 소설 『사라진느』에서 그 공간은, 당대의 인간 군상들 사이에 흐르는 신비와 수수께끼 가운데 놓인 순진하거나 노회한 등장인물들이 새로운 유혹과 탐닉 그리고 술수의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무대가 되어준다. 『사라진느』의 발자크에게 무도회는 비정한 현실의 굴곡들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스토리라인이 배태되는 문화적 지점일 것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회화가 다양한 유파를 형성하며 화려한 변신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무도회 장면은 화가들에게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것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또한, 무도회는 그 음악 소리와 함께 그곳을 메운 인물들의 화려하고도 역동적인 몸동작으로 인해 영화 예술의 주요한 장면과 모티프로 쉽게 등장한다. 20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많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무도회 장면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소피 마르소가 화려하게 등장하여 일약 스타로 부각된 영화 『라 붐』이 우선 떠오른다.
  19 세기 후반의 프랑스 작곡가 에밀 발퇴펠는 일련의 왈츠곡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곡이 ‘스케이터즈 왈츠’이다. 이 음악은 1985 년 영국의 영화감독 스티븐 프리어즈의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에 삽입되기도 한다. 영화에서 스케이터즈의 왈츠가 영국의 허름한 세탁방 안을 흐르는 동안 춤추는 남녀는 한 쌍 뿐이지만 무도회 무대의 뒷방에서 파키스탄 출신의 청년 오마르와 영국 백인 존(다니엘 대이 루이스 분)은 모든 정치적 갈등을 씻어내는 사랑을 나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표트르 대제 시대에 시작된 러시아의 무도회는 18세기 중, 후반부에 확산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반, 특히 1820-30년대에는 러시아 귀족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당시 무도회가 러시아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최신 유럽 문화들, 즉 의상, 음악, 행동 양식 등이 러시아로 들어오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무도회는 교우 관계, 소문의 발생과 확산, 출세의 통로라는 매우 흥미로운 특징을 지니기도 하였다.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무도회가 얼마나 자주 열렸는지는 문학 작품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모스크바 귀족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1824)과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귀족들의 삶을 보여주는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차츠키: 모스크바에 새로운 것이 무엇이 있소? 어제도 무도회가 있었고,
내일은 두 개의 무도회가 있고…….”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예브게니의 부친은 일 년에 세 번씩 무도회를 열다가 마침내 쫄딱 망하고 말았지……. 
세 집에서 그를 파티에 부르고 있었다. 이 집에선 무도회, 저 집에선 아이들 잔치에…….”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귀족 사회에서 이처럼 빈번하게 열린 무도회에서 실제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기능은 결혼을 위한 일종의 중매 시장의 역할을 한 점이다. 무도회는 젊은 남녀가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며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부모들에게는 혼담이 오가는 중요한 공간으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푸시킨은 1829년 댄스교사 이오겔의 집에서 열린 가장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만이 참석하는 무도회에서 16세였던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바로 청혼을 했다.

“환락과 욕망의 시절에는 나도 정신없이 무도회에 빠져 있었지.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를 건네주기에 그 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결혼을 위한 중매시장 같은 무도회에 대해 바젬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도회는 마치 이름 모를 시골 도시에서부터 모스크바의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들을 동반하고 참석하는 전 러시아의 모임 같아 보인다. <......> 무도회는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모임 같아 보인다.” (자하로바, 『러시아 무도회』에서 인용) 

  무도회 시즌은 주로 늦가을에 시작하여 봄까지 이어졌는데, 그중 마슬레니차 축제 기간이 무도회 시즌의 정점이었다. 모스크바의 귀족들은 물론, 지방의 귀족들까지 이 시기에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의 무도회에 거의 매일 머물면서 신붓감 찾기에 몰두하곤 하였다. 무도회에서 벌어지는 혼담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의 무도회 장면이나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특히,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무도회를 ‘신부 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마님, 염려하실 것 없어요. 모스크바의 신부 시장에 데리고 가면 되요. 거기에는 오라는 데가 많아요.”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1869)에는 1810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참석한 대무도회에서 사람들이 결혼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그녀는 이때 아주 못생긴 딸을 데리고 홀을 질러가는 한 부인을 가리켰다. ‘저이는 백만 루블의 재산을 가진 신붓감이랍니다.’ 하고 뻬론스카야가 말했다. ‘저걸 좀 보세요. 신랑감이 얼마나 많은지.’ ‘저 사람은 베주호프 부인의 오빠인 아나톨리 꾸라긴입니다.’ 높이 고개를 쳐들고 귀부인들의 머리 너머로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유유히 그들의 옆을 지나가는 잘생긴 근위 기병을 가리키면서 뻬론스까야가 말했다. ‘정말 미남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저분을 저 부자 아가씨와 결혼시킨다는 얘기예요.’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9)

  수많은 귀족들이 한 장소에 모여 오랜 시간을 보내는 무도회는 귀족들의 사교모임의 중심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모임 속에서 타인에 대한 비방과 중상모략, 또는 고위 관리에게 줄을 닿아 출세를 하려는 부정적인 현상이 종종 나타났다.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에서는 당대 모스크바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차츠키를 귀족들은 정신병자 취급을 하는데, 희곡에서 이 모든 행위들은 무도회 장면이 주를 이루고 있는 3막에서 펼쳐진다. 

“파무소프 (들어오면서) : 뭐가? 차츠키 말인가? 뭐가 의심스러워? 내가 처음으로 말했소! 내가 폭로한거요! 난 아무도 그를 잡아 넣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어! 정부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소리나 떠벌리고 다니질 않나! ....
흘료스토바 : 세상에 별난 일들도 많다더니! 어떻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실성했을까! 
분명히 젊은 나이에 너무 마셔서 그럴 거예요.
나탈리야 : 병째로 마시기도 했어요. 그것도 큰 걸로요.
자고레츠키 (흥분하며) : 아닙니다. 40배럴짜리 술통이었어요.”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4)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고위관리를 통해 출세를 하려는 현 지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중심에는 무도회가 있다. 

“며칠 뒤 현 지사의 집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마트베이 일리치는 진정 ‘행사의 주인공’이었다. 현의 귀족 단장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신은 마트베이 일리치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 자리에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 지사는 무도회에서도 부동자세로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마트베이 일리치의 상냥한 태도는 오로지 자신의 지위와 권위 때문이었다.”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1862)

  러시아 무도회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독특한 현상은 열병식과 가장 무도회이다. 정렬된 군인들의 열병식은 격의 없는 교제와 상류사회를 위한 휴식의 영역이자 상하관계가 느슨해지는 무도회의 일반적인 성격과 정면으로 대립되지만, 러시아의 무도회는 반드시 열병식으로 시작되었다. 열병식이 의미하는 복종, 훈련, 개성 말살이라는 특징은 18세기말 19세기 초에 러시아 왕조 특히 파벨 1세와 니콜라이 황제의 지시에 의해 매우 독특하고 면밀하게 고안된 의식이며, 이것은 당시 러시아 전제 왕조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군주의 위엄과 권위에 대항하는 속성을 지닌 가장무도회도 이 시기에 성행하였다. 정교문화에서 가면을 쓰는 가장은 악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적 전통들과 원칙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무도회는 지나치게 격식에 얽매이고 꽉 조이는 관복 속에 갇힌 니콜라이 1세 치세의 러시아 사회에 대한 무언의 항거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예는 레르몬토프의 『가장 무도회』(1835)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르베닌: 당신이나 난 기분전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오늘이 축일, 바로 엔겔가르트 가에서 열리는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날이 아닌가…….
공작: 거기에는 부인들이 있지……. 놀라워……. 그런 곳에까지 나타나서 수군수군 대다니…….
아르베닌: 수다를 떨게들 나누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 가면 아래서는 모든 관등이 평등해지고 가면에는 영혼도, 경칭도 없소. 몸뚱이만 있을 뿐이요. 가면으로 일단 표정이 가려지면 의식의 가면도 용감하게 벗어던진다오.” 
(레르몬토프, 『가장 무도회』, 1835)

  무도회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첫 번째는 옷을 잘 입어야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사교성이 좋아야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춤을 잘 추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무도회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무도회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춤이었다. 무도회는 격의 없는 교제, 상류사회를 위한 휴식의 영역이자 상하관계가 느슨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관등질서에 의해 서열화 되는 곳이 아니라 귀부인에게 인기가 있는 자, 사교술이 뛰어난 자, 그리고 춤을 잘 추는 자가 공간을 지배하는 일종의 카니발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즉, 훌륭한 춤 솜씨를 지니고 언변을 지닌 젊은 중위가 늙은 대령보다 더 대접받고 모임의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투르게네프는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젊은 사람이 춤을 잘 추지 못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 ‘아저씨께서는 무도회에 가시나요?’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 무도회는 나를 위해 열리는 거야.’ 마트베이 일리치가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설명했다. ‘춤은 잘 추나?’ ‘추긴 하지만 잘 추진 못합니다.’ ‘그건 안됐군. 여긴 훌륭한 아가씨들이 많은데 말이야. 젊은 사람이 춤을 못 추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지.’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1862) 

  귀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무도회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일반 대중들도 점차 즐기기 시작하였으며, 이 경우 주로 신분보다는 직업에 따라서, 그들끼리 모여 무도회를 열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 무도회는 음악회를 곁들여 오페라 가수나 무용수를 초청하기도 하였고, 불우 이웃 돕기와 같은 자선 행사들을 겸하기도 하였다. 대중화된 무도회의 모습은 19세기 말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안나의 목에 걸린 훈장』(1895)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가난한 교사의 딸인 안나는 집안 형편상 돈 많고 나이 많은 관리와 결혼하여 살아가는데, 남편과 그 동료들이 주관하는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다. 

“큰 홀에서는 이미 관현악이 울렸고, 춤이 시작되었다. 관사에 살아서인지 불빛이며, 울긋불긋한 빛이며, 음악이며, 소음의 인상들에 쉽게 매료된 아냐는 큰 홀을 한번 둘러보고는 ‘이 얼마나 좋은가!’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군중 속에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과, 전에 파티나 산책에서 만난 온갖 사람들과, 이 모든 장교들, 교사들, 변호사들, 관리들, 지주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 사업을 시작하려고, 자선 바자회를 위한 작은 매점과 조그마한 정자에 이미 자리 잡은, 화려하게 차려 입었거나 가슴을 몹시 드러낸 아름답고 추한 상류사회의 부인들도 곧 알아 차렸다.” (체호프, 『안나의 목에 걸린 훈장』, 1895)

  1913년 2월 23일 페테르부르크 귀족회의 건물에서 로마노프 왕조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성대한 무도회가 개최되었다. 귀족들은 물론, 외국 사절단을 포함하여 약 32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무도회는 제정 러시아 최후의 가장 성대한 무도회로 기록되고 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무도회는 척결되어야할 구시대 귀족들의 유산으로 여겨져 거의 소멸되었다. 


비교문화적 설명   ‘무도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bal’은 그리스어 ‘ballizein(춤을 추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러시아어 ‘бал [bal]’은 프랑스어 ‘bal’을 음차한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이 용어는 12 세기 후반 주로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 3박자의 음악을 악기를 동원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함께 모여 춤을 춘 모임을 위해 처음으로 ‘무도회(bal)’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충분히 대중적이었으며 민속적인 성격도 가미된 원래의 무도회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궁정 및 귀족의 저택 등 상류 계층의 공간에서 주로 열리는데, 특히 루이 14세 시절에 귀족적 무도회 문화는 절정에 달하면서 프랑스의 무도회는 매우 호사스럽고도 화려한 귀족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의 무도회에는 대중에게 그 문호를 개방하여 대중성을 가지게 되는데,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빈번하게 열린 각종 대중 무도회는 파리 시민들의 정치적 성취와 희열을 담아내는 공간이기도 하였는데 19 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제 무도회는 더 이상 귀족계급의 전유물이기를 넘어서 일정한 경제력을 갖춘 상층 부르주아들의 문화 공간이라는 토포스를 만들어 낸다. 또한 신데렐라에게처럼 낭만을 꿈꾸는 프랑스의 모든 소녀들에게 무도회는 지루한 일상적 운명에 빛나고 화려한 전환을 가져다주는 동경의 토포스로 기억된다.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무도회는 18세기 중, 후반부에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1820-30년대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토포스를 형성하였다. 무도회가 러시아 사회에서 지니는 의미는 최신 유럽의 문화 유행들, 특히 프랑스의 의상, 음악, 귀족적 에티켓, 행동 양식 등이 러시아로 들어오는 가장 좋은 통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폭넓은 대중성을 이끌어낸 프랑스의 무도회와 달리 러시아의 무도회는 철저히 귀족들을 위한, 귀족들만의 문화 전유물이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러시아의 무도회는 서구 귀족의 문화적 여흥을 동경했던 러시아 귀족들에게 귀족성을 부여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역할을 하였기에 19세기 초반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의 무도회에는 매우 성행하였다. 
  또한 러시아 무도회는 일상적인 춤과 여흥을 즐기는 프랑스 무도회와 달리 사교계의 교류 모임의 역할을 하면서 상류 사회의 출세의 통로, 온갖 소문과 추문의 발생과 확산의 장소, 중매와 결혼, 교우 관계 확산의 중심지가 되면서 19세기 초반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토포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연관 토포스 결투; 귀족; 축제; 사교계;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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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앙 뒤비비에 작, <무도회 수첩>, 1937
추천자료(러시아)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김혜란 옮김, 『러시아 희곡 1』, 열린책들, 1998.
레르몬토프, <가면 무도회>, 홍대화 옮김, 『러시아 희곡 1』, 열린책들, 1998.
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김성일, 방일권 옮김, 나남, 2011.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박형규 옮김, 인디북, 2004.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상원 옮김, 열린책들, 2010.
체호프, <안나의 목에 걸린 훈장>, 강명수 옮김, 『안톤 체호프 선집 4』, 범우사, 2005.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