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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무정부주의
토포스명(프랑스) anarchisme
토포스명(러시아) анархизм
정의 1. 권력이나 조직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수록 더욱 불필요하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무정부주의를 일컫는 프랑스어는 ‘아나르쉬슴 anarchisme [anaʀʃism]’이다. 이 명사는 ‘무정부상태’ 또는 ‘혼돈’, ‘혼란’을 의미하는 ‘아나르쉬 anarchie’에 추상명사화를 위한 접미사 ‘-이슴 isme’이 붙어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어 ‘아나르쉬슴’의 어원은 ‘아나르쉬’로부터 출발해 거슬러 올라야 한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이 ‘아나르코스’ 또한 합성어이다. 즉 ἀν-(無)와 ἀρχός(지배자, 통치자)가 그 구성 요소들이다.
  그래서 그 뜻을 유추해 보자면 “지배가 없는 상태” 또는 “누가 누구를 통치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최초로 가졌다. 결론적으로 ‘아나르쉬슴’은 “누군가가 혹은 어떤 것이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것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정신, 태도 또는 그를 위한 사회적 운동이나 사상” 쯤이 될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가장 무난한 것이 ‘무정부주의’이겠으나 정작 아나키스트들은 이 번역어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오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번역어는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에 그냥 '아나키즘' 또는 '자유연합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는 고대의 공동체에서 비롯하여 갖가지 공동체나 고대의 철학, 사상에서도 연원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근대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권위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발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함께 발흥하였으며 페미니즘, 펑크 문화 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아나키즘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포용하는 중용이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19세기 중 후반 프랑스를 중심한 서유럽에서 배태된 무정부주의는 국가 권력을 비롯하여 인간 사회의 모든 지배체제에 반대하여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극단으로까지 추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정부주의에는 대체로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고대 사상가나 근대 문학자들의 무정부주의와, 다른 하나는 사회사상가들의 그것이다. 루소의 근원적 문명비판에서 전자의 흐름을 볼 수 있다면, 국가권력의 강제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무정부사회를 주장하는 것이 후자의 입장이다. 후자의 경우 그 발원을 대체로 영국의 고드윈의 낙관적인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19세기 사상가 프루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급진적 정신들을 매료시킨 무정부주의의 기본 신념을 몇 가닥으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아나키스트들에게 인간은 본래 선(善)의 능력을 가진 긍정적 존재이다. 단지 관습•제도•권력 따위가 그들을 타락시키려 들어오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발적으로 서로 협력할 수 있으며 또 그럴 때 가장 인간다워진다. 공동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따라서 이러한 사회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국가는 그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여러 제도 가운데에서 특히 사유재산과 국가는 인위적인 악의 대명사이다. 당연히 그것들은 사람들을 서로 타락시키고 또 착취하게끔 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변화는 자생적이고 직접적이며 대중적인 기반을 둔 것이라야 하며, 이와 반대되는 모든 조직화된 운동은 권위의 조작에 의한 산물에 불과하다. 혁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개인들을 조직하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지기 일쑤이다. 그것은 하나의 억압을 다른 하나의 억압으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와 독립의 상태, 아무도 누구를 지배하지 않는 상태야말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인 것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아나키즘’이란 용어는 영국의 사상가 윌리엄 고드윈(1756~1837)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저술한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도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 고찰>(1793)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에서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용어 사용에 부정적이다. 이는 마치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의 타도, 전복을 일차적 목적으로 한다는 인상을 주며 종종 ‘테러리즘’의 동의어로 오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언어권에서 무정부주의는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개념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황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란 용어가 그 시작부터 아나키와 혼용, 동일시, 대체 관계에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아나키를 뜻하는 ‘아나르히야 анархия[anarkhiay]’가 먼저 등장하였다. 18세기경부터 러시아어에 나타나기 시작한 ‘아나르히야’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ἀναρχία(‘권력의 부재’), ἄναρχος(‘지배자의 부재’)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유입경로는 프랑스어 anarchie 혹은 독일어 Anarchie를 통해서인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어로 아나키즘을 가리키는 ‘아나르히즘 анархизм[anarkhizm]’은 ‘아나르히야’에 비해 좀 더 이후에 등장하여 오랜 시간동안 ‘아나키’와 동일시 혹은 혼용 관계에 있었다. 러시아 철학자 베르댜예프는 러시아에서 아나키즘과 아나키가 흔히 동일시되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아나키즘을 아나키와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아나키즘은 질서, 화합, 조화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 폭력, 카이사르 왕국에 대립한다. 아나키는 카오스, 부조화로서 곧 기형(畸形)에 다름 아니다.” (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이념』, 1971)

  아나키즘과 아나키의 혼용 혹은 동일시는 프루동이 아나키즘을 지칭하는 용어로 아나키를 사용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여러 러시아 사전들(가령 <소련대백과사전>)은 아나키즘 이론의 창시자 중 한명으로 간주되는 프루동이 아나키즘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프루동이 아나키즘의 개념을 정립하고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끌어올린 것은 맞지만 이를 지칭하는 용어로 그가 사용한 단어는 ‘아나키’였다(<체르니흐 사전> 참조). 프루동이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자처한 1840년 이후에 그 이전까지 ‘혼란, 무질서’ 등의 동의어로서, 경멸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던 ‘아나키’가 아나키즘을 뜻하는 하나의 정치 용어로 본격적으로 도입되기에 이른 것이다(장 프레포지에, 『아나키즘의 역사』 참조). 이렇게 때로는 아나키즘의 의미로, 때로는 혼란이나 무질서의 의미로 사용되던 ‘아나키’를 이후에 등장한 ‘아나키즘’이 대체하면서, 아나키즘이란 용어는 권위나 폭력, 전제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용어로서 뿐만 아니라 아나키의 애초의 의미까지 흡수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이미 그 유래에서부터 시작된 아나키즘의 의미적 복합성도 아나키즘을 일관된 의미로 정의내리기 어렵게 만들지만 또 다른 상황도 이러한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아나키즘의 배경이 되는 철학의 다양성으로 인해 아나키즘 내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며 이에 따라 아나키스트로 자처하는 집단들 가운데서도 철학, 경제학, 사회학적 시각차와 활동의 전략, 전술 등에 있어서의 대립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양한 아나키즘 경향들 속에서 하나의 일치 지점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어떤 권위나 권력에도 억압받지 않는 자유지상적인 사회를 꿈꾼다는 점이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절대자유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며 이에 따라 자유를 억압하는 일체의 것에 맞서 투쟁한다. 
  아나키스트들에 따르면 국가 권력은 그 어떤 것보다 더욱 강력하게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며 따라서 그들의 공공의 적으로 군림한다. 따라서 국가조직의 파괴, 국가의 소멸은 아나키스트들이 꿈꾸는 사회를 위한 필연적인 단계이며, 19세기 중반부터 아나키스트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이 출현한 시기는 1860년대로 추정되며 1860~1870년대 혁명적 인텔리겐치아들, 특히 인민주의자들은 바쿠닌의 아나키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인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토대로서 농민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지녔으며 농민계층의 사회주의적 본성을 믿었다. 브나로드 운동으로 전개되었던 농민계몽운동과 혁명사상 고취운동도 러시아 아나키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전개되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당국의 탄압과 국내외 정세의 영향으로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1900년도 제네바에서 ‘해외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을 출범시켰으며 1903년에는 크로포트킨이 참여한 러시아 아나키스트 저널 <빵과 자유>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러시아 자국 내 아나키스트 그룹은 1903년 초반에 출현하기 시작하여 1905년 혁명을 거치면서 그 수가 크게 늘어나 당시 수천 명의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고된다.
  1917년 혁명기에도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볼셰비키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은 지향하는 바가 달랐던 까닭에 곧 두 노선은 갈리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두 진영을 화해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국가에 대한 시각차였다.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을 지향하는 볼셰비즘과 모든 종류의 국가 조직을 부정하는 아나키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이 가로놓여있었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의 전선에서 열렬히 투쟁하였지만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언제나 국가의 해체였다. 아나키즘은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한다. 흔히들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충돌할 수밖에 없고 이때 중재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환상을 깨야 한다는 것이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이다. 가령 바쿠닌은 국가가 적대관계의 중재자로서의 역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적대관계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과 양립불가능하고 상충하며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까닭에 둘의 조화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만일 지금까지 이러한 이해관계가 어느 곳에서도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바로 국가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국가는 특권층의 소수를 위하여 다수의 이익을 희생한다.” (바쿠닌, 『파리 코뮌과 국가주의 개념』, 1871)

  반면 마르크스주의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기구를 탈취한 후 부르주아 계급을 몰아내기 위한 혁명의 도구로서 국가기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혁명의 강령은 국가의 해체임을 말하지만 그 수단으로서 국가 권력의 필수성 또한 인정하고 있는 레닌의 주장도 이러한 시각에 기반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일시적으로 국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국가의 소멸을 목표로 하는 아나키스트들과 견해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착취자들에 대항하는 일시적인 수단이요 도구이자 방법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할 따름이다. 또 계급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피착취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필수불가결하다.” (레닌, <국가와 혁명: 마르크스의 국가론,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임무>, 1917)

  바쿠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국가론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바쿠닌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일단 혁명이 완수되고 나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국가에 의한 속박, 즉 독재는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기 위한 필연적인 이행 수단이다. 즉 아나키나 자유가 목표이고, 국가나 독재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선 민중을 구속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독재만이 민중의 자유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 어떤 독재도 그 자체의 영구지속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고, 독재가 민중을 더욱 강하게 예속시키며 그 예속의 상태에 적응하도록 길들인다고 답하겠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 민중 전체의 궐기와 노동자들의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자유로운 조직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 (바쿠닌, <국가주의와 아나키>, 1873)

  이렇게 국가관 등 여러 가지 근본적인 차이를 지녔지만 전제 정권의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두 진영은 혁명이 완수된 이후인 1918년부터 갈등과 분열의 조짐을 극명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1918년 4월 체카는 아나키스트 무장 세력인 ‘검은 근위대(черная гвардия)’ 제거 작업에 돌입하여 40명의 아나키스트를 살해하였고 아나키스트들은 1919년 9월 모스크바에서 강력한 테러를 자행하는 등 그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소비에트 정권의 탄압으로 수많은 아나키스트들이 처형 혹은 유형에 처해졌고 남아있는 아나키스트들은 대다수가 공산당으로 넘어가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러시아에서 아나키즘 세력은 극도로 위축되어갔다. 소련 내 아나키즘의 마지막 거점은 모스크바 크로포트킨 기념관으로서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나갈 뿐이었으며 이마저도 1938년에 스탈린에 의해 폐쇄되었다.
  위축되어가던 러시아 아나키즘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이다. 1980년대 말 무렵 러시아내 ‘아나키스트-생디칼리스트 연맹’이 거대 조직으로 출범하게 되고 1990년에는 ‘아나키스트 운동 연합’이 결성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아나키스트 운동 연합’은 2004년에 국제 조직인 ‘아나키스트 연합 인터내셔널(IAF-IFA)’에 편입되었다.
  오늘날 아나키즘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비하면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지금도 러시아를 포함하여 여러 나라에 아나키즘 지지자들이 활동 중이다. 현대의 아나키즘 운동은 환경 운동,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운동으로 전개되는 등 과거와는 다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종류의 권력과 조직을 거부하면서 이를 대체할 사회 대안체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과거의 아나키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아나키즘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계속하여 활동해 나가리라는 것이 아나키즘 이론가들의 예상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8세기 말 영국의 고드윈은 프랑스에 앞서 처음으로 무정부주의의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을 지켜본 후 『정치적 정의와 그것이 일반 미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고찰』(1793)이라는 책에서 최초로 지배가 없는 사회를 꿈꿀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사상은 단연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에게서 시작한다.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모든 소유는 도둑질의 결과라고 급진적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 계몽 사상가 루소의 사유를 떠올리게 한다. 루소는 인간의 삶의 모든 불행은 바로 사유재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루소는 소유가 인간에게서 평등을 앗아갔던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무정부주의적 사유의 시원에 루소가 있었다고 말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일단 위에 언급한 프루동의 존재와 업적에 먼저 눈길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한 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던 그는 반복되는 급진적 주장과 저술을 멈추지 않아서 프랑스 사법 당국의 제재를 받아 벨기에로 두 번이나 망명했었다. 유럽의 몇몇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그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매우 일찍 접했으며 훗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만나 무정부주의적 세계관을 공유하기도 했었다.
  프루동의 열망은 지배가 없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그 관건으로 재산의 사유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그가 보낸 실망과 경멸의 눈길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을 인정했던 대혁명은 그의 눈에는 진정한 혁명이 되지 못했다. 

“무정부상태, 그것은 권력이 없는 질서이다.”

  진정한 평등과 원론적인 자유에의 열망을 버리지 않는 프루동의 입장은 친구 마르크스에게도 불편한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직과 힘의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여긴 마르크스의 생각에 프루동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공산당이든 무슨 당이든 기구와 조직은 그 자체로 억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프루동의 생각이었다. 1846년, 프루동의 책, 『경제적 모순의 체제 – 빈곤의 철학』이 출간되자 마르크스는 곧바로 『철학의 빈곤』을 써서 맞받아 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크스에게는 국가라는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최소한의 조직인 공산당이 필요했지만 프루동에게 공산당은 또다른 억압과 지배의 연속이었다.
  한편, 프랑스의 극단적 무정부주의는 20세기로 넘어와서 또 한번 나타나는데, 소설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이 대표적이다.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의 주인공 바르다뮈는 1차대전 참전을 위한 프랑스 정부의 징집을 거부하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정의를 위한 총질”을 거부한 셀린과 그의 주인공은 급진 좌파의 전유물이었던 무정부주의를 우파에게도 열린 사상으로 만든 셈이었다. ‘정의’ 보다 중요한 것은 ‘총질’이 없는 세상, 총을 제작할 국가 제도가 없는, 오로지 개인들만이 어울려 춤추는 그런 사회였을 것이다.
  오늘날의 프랑스에서는 매우 약화된 무정부주의적 사유는 그러나 프랑스의 개인주의 및 자유주의의 한 단면을 형상화한 소중한 토포스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아나키즘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독특한 러시아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서유럽의 아나키즘이 하나의 철학 혹은 사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러시아 아나키즘은 사상이라기보다는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며 혁명운동과의 강한 유대관계 속에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러시아 아나키즘의 상징적 존재인 바쿠닌(1814~1876)에게서 극명히 드러난다. 바쿠닌은 선구적인 아나키즘 사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들과는 사뭇 달랐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바쿠닌이 아나키즘 사상가라기보다는 직접 혁명 전선에 뛰어들어 혁명을 선동한 행동가였다는 점이다. 바쿠닌은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루동과도,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주창했던 막스 슈티르너와도 달랐다. 아나키즘의 이론적 기반을 수립한 프루동에 대해 바쿠닌은 “이상주의자인 프루동은 우리 시대 가장 훌륭한 프랑스인 중 한명이다.”(『참회록』, 1851)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프루동이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사상가였다면 바쿠닌은 혁명 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활약한 활동가였다. 또한 바쿠닌의 아나키즘도 자유가 핵심적인 문제를 이룬다는 점에서 여타의 아나키즘 이론과 다르지 않았지만 바쿠닌 이전의 아나키즘이, 가령 막스 슈티르너의 아나키즘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었다면 바쿠닌의 아나키즘은 집단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바쿠닌의 행동주의적 경향을 설명하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바쿠닌 스스로가 자유에 대한 “광적인 애호가”(『파리 코뮌과 국가주의 개념』, 1871)로 자처하였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는 사회 안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예외 없이 평등하게 누리는 자유, 곧 ‘모두’의 자유이다. 인간의 자유가 의미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회 안에서이며 연대적 공동체 안에서 각 개인들의 자유는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바쿠닌의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란, 각자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만났을 때 그 앞에서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들의 자유 속에서 자기 것을 인정받고 무한하게 확대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자유이다. 각자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 연대적 자유, 평등 속의 자유에 의해 제한되지 아니한다.” (바쿠닌, 『파리 코뮌과 국가주의 개념』, 1871)

  이처럼 자유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는 바쿠닌은 개개인의 자유는 다른 모든 이들의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타인의 자유가 자신의 자유에 대한 필수조건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단 한사람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면 이는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 전체가 자유롭지 않다면, 이 단어(역주-‘자유’)의 휴머니즘적 의미에서 볼 때 어느 누구도 완전히 그리고 다 같이 자유로울 수 없다.” (바쿠닌, <마치니의 정치 신학과 인터내셔널>, 『인터내셔널과 마치니』, 1871)

  자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바쿠닌과 그의 추종자들이 왜 그토록 민중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민족해방운동에 열정적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그 날이 와야 비로소 나의 자유도 온전히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자유의 전제 조건이 되는 모든 이들의 자유를 위해 바쿠닌은 직접 투쟁하는 행동가였던 것이다. 1848~1849년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혁명의 불길 속에 늘 바쿠닌이 있었다. 바쿠닌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에 참여하였으며 1848년 6월 프라하 봉기와 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를 선동하였다. 바쿠닌의 절대적 영향 하에 있었던 러시아 아나키즘은 인민주의 등 당대의 급진 세력과 연합하여 아나키즘 혁명 운동으로 활발히 전개되어나갔다.
  이처럼 사상보다는 실천적 운동의 성격이 강했던 러시아 아나키즘은 19세기 러시아의 다양한 사조, 운동, 경향 속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드러내었다. 이 또한 러시아 아나키즘의 독특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모든 사조들, 작가들, 심지어 러시아인의 민족성 속에서도 아나키즘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베르댜예프의 주장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다.

“독특한 아나키즘적 요소는 19세기 러시아의 모든 사회 사조에서, 종교적 및 반종교 사조에서, 동시에 위대한 러시아 작가에게서, 그리고 러시아인의 민족성 속에서도 발견된다.” (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이념』, 1971)

  특히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휩쓸었던 허무주의와의 밀접한 관련성은 러시아 아나키즘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특성 중 하나이다. 허무주의는 권위를 부정하고 그 수단으로 파괴의 가치를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하다. 아래의 바쿠닌이 한 유명한 말들은 허무주의자들 사이에 강령처럼 퍼져있던 것이었다. 

“파괴를 향한 열정은 그와 동시에 창조적 열정이다” (바쿠닌, <독일에서의 반동>, 1842)
“우리의 임무는 파괴이지 건설이 아닙니다. 건설은 다른 이들, 우리보다 더 훌륭하고 지적이고 순수한 사람들이 할 것입니다.” (바쿠닌, 『참회록』, 1851)

  당대 허무주의자라 불리던 자들은 또한 아나키스트이기도 하였다. 네차예프(1847~1882)와 같은 혁명적 아나키스트는 동시에 극단적인 허무주의자로 간주되었다.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은 그 수단으로서 테러리즘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에서도 유사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허무주의, 테러리즘, 아나키즘이 거의 동의적인 의미로 간주되고 혼용되는 풍조를 만들기도 하였다. 투르게네프가 『아버지와 아들』(1862)에서 허무주의라 부른 운동이 때로는 테러리즘이라 불리기도 함을 지적하면서 이 둘을 구분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크로포트킨의 아래의 언급은 당대의 이러한 상황을 잘 드러내준다.

“신문에서는 이 운동에 대해 언급할 때 허무주의와 테러리즘을 혼용했다. 알렉산드르 2세 말년에 폭발하여 그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난 혁명은 어느 곳에서나 허무주의라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허무주의와 테러리즘을 혼동하는 것은 [...] 잘못된 것이다. 테러리즘은 어떤 역사적 순간에 발생하는 특정한 정치적 투쟁 방식을 일컫는 것이다. 그것은 있다가도 사라지고, 부활했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은 그 후로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크로포트킨, 『혁명가의 수기』, 1899)

  허무주의와 테러리즘의 혼용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을 동의어 혹은 유사어로 간주하는 인식은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 아나키즘이 실천적 운동으로 전개되는 과정 중에 테러의 수단을 기꺼이 활용하였다는 점이 이러한 연상작용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1860년대 팽배했던 허무주의와 아나키즘 사상은 귄위와 권력에 대한 투쟁을 가속화시켰으며 급진 세력들에 의한 테러가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났다. 1866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미수사건을 주도한 카라코조프가 거사를 치르기에 앞서 뿌린 선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담겨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민중들이 죽어가는 모습에 너무도 슬프고 괴로웠다. 그래서 악당인 황제를 제거하고 소중한 민중을 위해 나 자신도 죽기로 결심했다. 내 계획이 성공한다면 내 죽음으로 소중한 나의 친구인 러시아 농민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죽을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누군가 나의 길을 걷는 이가 나올 것이라 믿으리라.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성공해낼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나의 죽음이 본보기가 될 것이며 그들을 고무하게 되리라...” (카라코조프, 1866, 실로프, <1860년대 혁명 운동사>에서 재인용)

  혁명기에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졌다. 1905년 혁명기부터 검은 깃발(черное знамя)를 내건 아나키스트 그룹, 공산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수차례에 걸쳐 국가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였으며 그 횟수는 1905년부터 1906녀까지 무려 136회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진다(장 프레포지에, 『아나키즘의 역사』 참조).
  러시아 아나키즘의 또 다른 특징으로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특징이기도 했던 민중에 대한 독특한 태도를 들 수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바쿠닌의 아버지는 1200명의 농노를 거느린 귀족이었으며 바쿠닌과 함께 러시아 아나키즘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크로포트킨이나 종교적 아나키스트로 간주되는 작가 톨스토이도 역시 최고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19세기 귀족출신 인텔리겐치아들은 일종의 보편적 죄의식을 지닌 자들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안락함이 민중의 고혈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죄의식 혹은 죄책감은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과 같은 귀족 출신 아나키스트들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주변에 배고픈 사람들이 빵 한 조각 때문에 투쟁하는 때에,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내가 이 고상한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해 소비하는 모든 것이 바로 땀 흘려 농사지어도 자식들에게 빵조차 배불리 먹일 수 없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닌가.” (크로포트킨, 『혁명가의 수기』, 1899)

“무엇보다 저를 놀라게 하고 괴롭게 만든 것은 선량한 러시아 민중, 모든 이로부터 억압받는 농민이 처해있는 불행한 상황이었습니다.” (바쿠닌, 『참회록』, 1851)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러시아 민중, 농민에 대한 죄책감은 민중에게 복무하고 민중을 계몽해야한다는 사명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민중을 변혁의 최전선에 세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이는 마르크스와 격하게 대립했던 바쿠닌도 지녔던 생각이다. 마르크스가 혁명의 주체로 프롤레타리아를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달리 바쿠닌은 농민, 특히 러시아 농민의 역할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저는 농민에게 갱생의 희망을, 러시아의 위대한 미래에 대한 믿음을 걸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저는 순수함, 넓은 영혼, 저 바다 건너 부패에 감염되지 않은 빛나는 지혜, 그리고 러시아의 힘을 보았습니다.” (바쿠닌, 『참회록』, 1851)

  러시아 농민이 강력한 혁명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바쿠닌의 믿음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정신적 선구자로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를 꼽는 바쿠닌은 여러 글에서 라진과 푸가초프 봉기를 종종 언급하면서 미래의 혁명을 주도할 세력으로서 러시아 농민 계층에 대한 신뢰 표명을 주저하지 않았다. 농민들을 규합해 알렉세이 1세의 학정과 봉건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던 스텐카 라진은 1670년 농민봉기의 주역이다. 러시아 전역을 뒤흔든 스텐카 라진 난은 그가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지만 스텐카 라진의 모습은 러시아 민중의 뇌리 속에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유명한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을 비롯하여 수많은 오페라, 영화, 연극을 통해 반복되어온 그의 이야기는 농민 지도자 스텐카 라진을 러시아의 전설적인 영웅의 지위로 올려놓았다. 이로부터 한 세기 후인 1773년에 더욱 강력한 농민 봉기 푸가초프 난이 일어났다. 푸가초프는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폐위, 암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표트르 3세를 참칭하며 대규모의 농민을 규합하여 예카테리나 여제에 맞섰다. 푸가초프는 농민 해방, 지주 타도, 재산 몰수를 내건 일종의 혁명정부를 수립했으며 푸가초프 난은 거의 2년 동안 볼가 강 유역 전역에 걸쳐 위세를 떨쳤다. 

  러시아 인민주의의 근간이기도 했던, 진리와 정의의 수호자로서 민중에 대한 믿음은 혁명적 인민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슬라브주의자들과 톨스토이도 지녔던 것이다. 슬라브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에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팽배했다. 그들은 국가와 권력을 혐오했으며 그 어떤 종류의 권위든 그것을 악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가장 아나키스트적인 슬라브주의자로 손꼽히는 악사코프는 “국가는 원리상 악이다”, “국가는 그 이념상 거짓이다”라는 생각을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이념』 참조).
  톨스토이는 역사의 진정한 주역으로서 민중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으로써 민중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였다. 톨스토이는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이가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전쟁과 평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역사의 진짜 주역은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자기희생과 행동을 묵묵히 실천하는 민중이라는 인식이다. 역사의 원동력인 민중이 지배 권력에 의해 무지의 상태가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한 톨스토이는 민중 계몽을 위해 스스로 학교를 세워 농민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땅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민들이 토지 소유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은 톨스토이로 하여금 토지 소유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톨스토이의 아나키즘은 토지소유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땅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다. 따라서 땅은 경작하는 자에 속한다.”라는 농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옛 격언을 신봉하였던 톨스토이는 토지 소유를 범죄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네흘류도프(『부활』)가 유산으로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톨스토이 스스로는 자신을 아나키스트라 생각한 적이 없지만 많은 아나키즘 연구가들은 톨스토이를 아나키스트로 간주한다. 심지어 베르댜예프는 톨스토이의 종교적 아나키즘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즘이라 천명한 바 있다.

“톨스토이의 종교적 아나키즘은 가장 일관되고 급진적인 형태의 아나키즘이다.” (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이념』, 1971)

  국가와 권력, 군대와 사법제도, 소유문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견해는 그의 사상을 아나키즘과 연결시킬 근거를 제공해준다. 국가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구라 생각하였다는 점에서 톨스토이의 사상은 아나키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아나키즘적 사고는 국가의 소멸을 주창하는 바쿠닌의 언급을 자신의 저서에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앞으로 인류에게 도래할 변화는 동물의 상태에서 인간의 상태로의 이동이 될 것이다. 이 전환은 오로지 국가가 소멸된 경우에만 가능하다. -바쿠닌”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국가의 사이비 교리는 거짓을 진실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으로도 해롭지만 무엇보다 해로운 것은 선량한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과 신의 법칙에 반하는 행위들을 하도록 종용한다는 점이다.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고, 재판하고, 교수형에 처하고,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들 모든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다만 톨스토이의 아나키즘은 수단적 측면에서만큼은 두드러진 시각차를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있는 권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을 봉기나 혁명과 같은 폭력적 수단이 아니라 도덕적 자기완성에서 보았다(심성보, <레프 톨스토이와 아나키즘> 참조). 톨스토이의 아나키즘은 지주이면서 백작이라는 지위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반군국주의적 견해, 전쟁과 병역 의무에 대한 거부는 아나키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는 공동체 생활을 하며 병역 의무를 강력히 거부했던 두호보르 종파(러시아 정교의 한 분파로 교회중심이 아닌 신앙중심의 개혁을 주장)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1898년 탄압받던 두호보르 신자들의 해외 이민을 돕기 위해 『부활』의 저작권료를 모두 내놓기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톨스토이의 사상은, 아나키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을 남긴 크로포트킨(1842~1921)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크로포트킨은 톨스토이를 통해 역사를 이끄는 민중의 역할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베리아에서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크로포트킨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름 없는 민중이 전쟁을 포함해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완성해 나가는 것을 목격한 나는 이들의 역할을 실감하게 되었다.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가 표현한 것처럼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정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것은 비밀결사도 혁명조직도 아니다. 비밀결사와 혁명조직의 임무와 역사적 사명은 혁명에 정신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상황도 허락되고 혁명의 정신이 준비되었을 때 최후의 박차를 가하는 것은 선도적인 그룹이 아니라 사회의 하부조직 바깥에 머물러 있는 민중이다.” (크로포트킨, 『혁명가의 수기』, 1899)

  바쿠닌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지주귀족 가문 출신의 크로포트킨이 민중의 처지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 계기는 시베리아 부대에서의 5년간의 경험이었다. 

“시베리아에서 몇 년간 지내면서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교훈을 얻었다. 행정기구는 절대로 민중을 위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 아무르 지방에 이주한 두호보르파 공동체의 생활방식을 보면서 형제애를 기반으로 한 반(半)공산주의적 조직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크로포트킨, 『혁명가의 수기』, 1899)

  사회학자이자 자연과학자이기도 했던 크로포트킨은 사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아나키즘 이론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아나키즘 명저로 손꼽히는 『진화의 동인으로서 상호부조론』(1902)이다. 이 저서는 운동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아나키즘에 과학적 토대를 마련해 준 최초의 연구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를 탐험하면서 자연 생태계를 면밀히 관찰한 그는 생존경쟁보다 상호 협력, 연대가 동물세계,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의 진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요인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자연의 법칙에는 상호투쟁도 있지만 상호부조라는 원리도 존재하며 상호부조야말로 인류의 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단지 실험실이나 박물관에 국한되지 않고 숲, 초원, 산 속의 동물세계를 살펴보면, 비록 다양한 동물 종들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상호투쟁이 관찰되지만, 이와 동시에 더욱 큰 규모의 상호원조, 상호부조, 상호보호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회성은 상호투쟁만큼이나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상호부조는 상호투쟁만큼이나 동물세계의 자연적 법칙이라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상호부조가 진화의 동인으로서, 즉 발전의 조건으로서 상호투쟁보다 더 큰 의의를 지니는데, 습관과 특성의 발전을 촉진시킴으로써 종의 진화를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 『진화의 동인으로서 상호부조론』, 1902)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수용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청년에게 고함』, 『빵의 쟁취』, 『아나키즘』, 『진화의 동인으로서 상호부조론』 등 크로포트킨의 대표 저작들이 거의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크로포트킨주의는 독립 운동가들의 민족해방운동 이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한국의 아나키스트 1세대라 불리는 신채호, 유자명 등이 모두 크로포트킨주의자들이었다. 유자명에 따르면 1928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기관지 제목을 <탈환(奪還)>이라 한 것은 바로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завоевание хлеба)』에서 따 온 것이다. 또한 신채호도 조선청년들은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의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동아일보, 1925.1.5.). 
  이처럼 사상이나 철학보다는 실천적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고 혁명의 주체로서 민중, 농민에 대한 믿음과 농민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간직하였으며, 허무주의와 테러리즘과의 강력한 상관관계 속에 전개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러시아 아나키즘은 세계 아나키즘 역사의 한 축을 이루며 한국을 포함해 수많은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비교문화적 설명   무정부주의를 일컫는 프랑스어 ‘아나르쉬슴 anarchisme [anaʀʃism]’과 러시아어 ‘아나르히즘 анархизм[anarkhizm]’은 각각 ‘아나르쉬 anarchie’, 그리고 ‘아나르히야 анархия[anarkhiay]’에 접미사 ‘-이슴’ 혹은 ‘-이즘’이 붙은 형태로 합성된 말이다. 후자들은 ‘무정부상태’ 또는 ‘혼란’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이 ‘아나르코스’ 또한 합성어이다. 즉 ἀν-(無)와 ἀρχός(지배자, 통치자)가 그 구성 요소들이다. 유추해 보자면 “지배가 없는 상태” 또는 “누가 누구를 통치하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양국의 아나키즘의 역사에서 먼저 깃발을 들고 나온 쪽은 프랑스였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1840년에 이미 유명한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를 발표함으로써 무정부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사상을 뚜렷이 밝혔다. 그러나 머지않아 러시아의 바쿠닌이 등장하여 무정부주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동시에 그 실천을 위한 투쟁적 방법론을 전개해 나간다. 
  프랑스에서는 프루동 이후에 엘리제 르클뤼 같은 사상가들이 프루동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러시아의 무정부주의 열풍만큼 강렬하고 풍성하지는 않았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바쿠닌을 필두로 크로포트킨, 볼린, 톨스토이 등의 많은 사상가들이 무정부주의의 전통을 이어나갔으며 또 그 갈래를 다기화하면서 20세기 초까지 활동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일정 정도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낸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왕정의 향수를 회복하려는 세력과 시민사회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세력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느라 무정부주의 같은 극단적인 정치이념은 사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반면 러시아의 경우, 아직도 차르 체제하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수탈과 억압을 당하고 있었으며 또한 슬라브 정서의 전통적인 허무주의의 심성이 함께 스며들어 수많은 젊은이와 지식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는 또 1871년 파리 코뮌이라는 제한된 형태의 자치정부를 경험한 사실도 러시아와 다르다. 비록 80일 정도의 짧은 무장투쟁이었으며 또 수도 파리에 제한된 경험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최소한의 실험적인 무정부주의를 경험해 보았다는 사실에서, 그 이후로는 역설적으로 무정부주의를 향한 열망은 크게 시들고 만다.
  이에 비해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들은 황제의 암살 시도와 같은 테러리즘을 동반한 무장투쟁으로까지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
  아나키즘의 토포스는 그 출발과 기본 정신은 어원만큼이나 유사하고 공통된 것이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의 역사적 정황이 상이했던 만큼 그 성격과 강도에서 많은 차이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관 토포스 농민(민중); 봉기; 지식인; 테러리즘; 허무주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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