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발레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발레
토포스명(프랑스) ballet
토포스명(러시아) балет
정의 1.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강해질수록 발레는 보다 더 정교한 기술이 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 ‘발레 ballet[balε]’는 16세기 말 작은 무도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balletto를 어원으로 갖는다. 무도회 bal 또한 이탈리아어 발로ballo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어원은 라틴어 ‘ballare(춤추다)’이다. 발레 용어가 이탈리아어, 대개는 프랑스어인 데서 드러나듯, 발레는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의 궁정 연회에서 탄생하여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궁정 발레라는 정형화된 형식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 전반 낭만 발레의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근대적 의미의 발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낳은 무용 예술로 14~15세기 이탈리아의 무언극이나 가면극, 막간 희극에서 발생하였다. 당시의 무언극이나 가면극에는 무용수들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만드는 군무, 안무가가 고안한 춤 동작을 무용수가 드라마틱하게 연출하는 무대 무용, 기묘한 의상에 가면을 쓰고 춤을 추는 즉흥 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춤들은 이탈리아 왕실이나 귀족들이 권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탄생, 결혼 등 가문의 거사를 일종의 축제로 만든 궁정 연회에서 여흥으로 공연되었다. 당시의 궁정 연회는 춤, 연극, 노래, 무언극 등 아직 전문화되지 않은 여러 예술적 요소들이 모두 포함된 예술적 형식의 총체였다. 발레의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1489년 이탈리아에서 베르곤치오 데 보타라는 부유한 예술애호가가 밀라노 공 갈레아초 스포르차와 이사벨라 공주의 결혼식을 위해 마련한 축하연에서 공연된 막간 희극이다. 
  발레를 프랑스에 도입하여 보호, 육성한 사람은 카트린 드 메디치(1519-1589)이다. 그녀는 1533년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파리로 오게 된다. 그녀는 이탈리아인 무용교사들을 프랑스로 데려 와 무용수들의 교육, 훈련 그리고 무대 감독과 공연 제작을 맡겼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으킨 주역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인문학적 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던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는 데 이러한 예술적 소양을 활용했다. 무용의 역사에서 프랑스 궁정 발레처럼 정치와 무용이 밀접하게 관련된 예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30 년에 걸친 종교전쟁(1562~1598)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종교적,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카트린은 왕이 된 병약한 세 아들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재위 기간에 섭정을 맡아, 권력을 집중시키고 전 유럽에 프랑스 왕실의 당위성과 힘과 부를 과시하는 데 발레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리스 신화와 구약성서에 나오는 영웅들이나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주요 주제로 다룬 궁정 발레는 그 영웅들을 통해 강한 왕의 이미지를 구축했고, 또 단순한 여흥거리에 그치지 않도록 건축, 회화, 조각, 음악, 의상 등이 총동원된 화려한 무대는 귀족들을 제압하고 왕실의 입지를 굳히는 데 일조했다. (박경숙,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궁정발레와 정치적 기능」 참조) 
  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폴란드인들의 발레>(1573)와 <왕비의 연극 발레>(1581)이다. 두 작품 모두 카트린의 수석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발타자르 드 보주아외가 제작했다. 아들 앙리가 폴란드의 왕좌를 계승하는 기념으로 만든 <폴란드인들의 발레>는 카트린이 지은 튈르리 궁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환상적인 의상을 입은 등장인물들, 무용수들의 연속동작은 조화롭고 우아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한 마디로 경탄 그 자체였다. 폴란드인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해 버렸다.”(박경숙, 「카트린 드 메디치의 궁정 발레와 정치적 기능」에서 재인용)라는 당시 기록이 보여주듯이, 이 작품은 폴란드 외교사절에게 앙리 왕의 위엄과 강력한 프랑스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왕비의 연극 발레>는 앙리 3세의 부인 루이즈 왕비의 동생 마르그리트 드 보드몽과 주아외즈 공작의 결혼 피로연을 위해 제작된 작품으로 구성과 규모 면에서 발레의 효시로 간주된다. 루브르의 프티 부르봉 연회실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마녀 키르케와 앙리 왕을 상징하는 주피터를 등장시켜 마력을 뛰어넘는 앙리 왕의 권능을 보여주며 그를 칭송하는 일종의 용비어천가이다. 5시간에 걸쳐 상연된 이 작품이 최초의 발레로 여겨지는 것은, 여흥거리가 아닌 감상 차원의 예술로 승화된 공연 형식을 갖추고 시, 음악, 미술, 의상 등의 요소들이 통일과 균형의 극치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공연 다음 해에 발간된 작품의 대본이 작품의 주제를 명시하고 연출 의도를 밝힌 최초의 발레 문헌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미영, 「14~16세기 이태리, 프랑스와 조선전기 궁정무용 양식 비교연구」 참조) 

  카트린에 이어 발레를 정치적 통치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한 통치자는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이다. 열 살 때 처음 발레를 접하고 발레에 심취한 루이 14세는 평생 발레를 이해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였다. 27편의 작품에서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기도 한 루이 14세는 현재의 프랑스 국립음악무용 아카데미의 전신인 왕립무용학교를 설립하였다. 루이 14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왕의 춤>(제라르 코르비오, 2001)은 열 네 살의 루이가 무대에서 춤을 추는 <밤의 발레> 공연으로 시작된다. 당시 왕실 전복을 시도한 ‘프롱드’ 당의 귀족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우주의 중심인 태양을 상징하는 의상과 장신구로 치장하고 발레를 추는 루이 14세는 이후 ‘태양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공연의 의도는 명백히 우주의 중심인 태양에 자신을 비유하여 왕실이 왕국의 축이자 태양임을 귀족들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도 서너 차례 발레 공연에 출연할 정도로 발레에 심취했던 루이 14세의 발레 사랑은 발레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적으로 향상시켰다. 발레를 구성하고 가르치는 무용수와 무용교사들은 돈과 권력을 쥐었고, 귀족들은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앞 다투어 발레를 배웠다. 
  발레의 역사에서 루이 14세가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프랑스 발레 학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왕립 무용아카데미(1661)를 설립한 것이다. 발레의 과학적 원리를 정리하고 교육의 질을 개선하는 한편, 왕이 주재하는 공연에 출연할 무용수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맡았던 이 아카데미는 발레가 지배계급의 여흥에서 전문가의 예술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루이 14세의 무용 교사였던 피에르 보샹이 고전 발레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고 장 발롱은 도약 기술을 개척했다. 프랑스의 발레는 교육과 훈련 체계를 갖춘 이 기관을 통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669년 왕립 음악아카데미가 설립되고 1672년에는 두 아카데미가 왕립 음악무용아카데미로 통합되었는데,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 및 발레단 즉 파리 오페라 극장의 모태이다. 
  18세기 이후 발레가 완전히 독립적인 장르로 확립되기 전 무대에서 정식으로 공연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코메디-발레와 오페라-발레 양식이 만들어진 것도 이 아카데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양식들은 루이 14세에게 발탁되어 베르사유 궁에서 6년 동안 연극과 코미디-발레를 만들고 공연한 몰리에르(<부르주아 귀족>1670, <상상병 환자>1673)와 음악을 담당한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 륄리(오페라를 프랑스에 처음 도입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무용 교사인 보샹의 합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음악과 발레를 결합하여 궁정 축제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면서도 연극, 발레, 음악이 고르게 조화를 이룬 일종의 뮤지컬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통치수단이었던 궁정발레와 별개로 발레가 하나의 공연 예술로서 형태가 확립되는 데는 루이 14세의 공이 크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발레를 뜻하는 ‘발레트 балет[balet]’는 프랑스어 ballet 혹은 독일어 Ballett를 통해 러시아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 ‘발레리나 балерина’는 프랑스어 ballerine로부터 직접 차용되었다.
  많은 연구가들은 발레의 시초를 종교 의식에 수반되었던 종교적 춤에서 찾는다. 이집트인들은 춤으로 천상의 빛을 표현하였고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옮겨졌을 때 다윗왕이 춤을 춘 이야기가 전해진다(『성경』, 사무엘 하 6:14~16). 그리스 로마 시대에 발레는 희극이나 비극에 수반되는 디베르티스망(Divertissment, 줄거리와 상관없이 하나의 볼거리로 삽입되는 춤)이나 종교적 무도와 유사한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발레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이탈리아의 무언극, 막간 희극을 통해 등장하였다. 왕실과 귀족의 여흥거리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이탈리아 발레를 프랑스 왕실이 적극 수용하면서, 이제 발레는 프랑스 궁정발레라는 형태로 최고의 부흥을 맞이하게 된다. 발전을 거듭하던 서유럽의 발레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번성한 오페라에 점차 밀리게 되면서 쇠퇴의 길에 접어든다. 그리고 발레의 중심지는 러시아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러시아로 그 무대를 옮긴다.
  러시아 발레의 시초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 치세인 1672년 마슬레니차 축제 때 공연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거슬러 올라간다(자벨린, 『러시아 여제들의 가정생활』, 1872 참조). 그러나 러시아에서 발레가 본격적으로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시기는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춤을 적극 지원하고 장려하였다. 춤은 귀족들이 익혀야 하는 궁중 에티켓 중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젊은 귀족 청년들은 의무적으로 춤을 익혀야만 했다. 여기서 춤은 단순히 유희나 오락거리가 아니라 ‘러시아의 서구화’라는 정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들의 발레 사랑과 발레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표트르 대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가령 예카테리나 2세 시대(1762-1796)에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 발레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여러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제의 신하들이 직접 참여한 발레 공연이 대관식의 대미를 장식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황태자 파벨은 황실 극장 발레에서 직접 춤을 추곤 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 지주들이 농노 소녀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농노들로 구성된 ‘농노 발레단’을 조직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로 발레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러시아 황실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호 속에 해외 유수의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러시아로 초빙되었고 이들에 의해 러시아 발레는 보급과 발전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연극이나 오페라와 분리되어 독립된 공연 예술로서 발레의 기본 원칙과 표준적인 형식이 확정되는 시기는 18세기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행위 발레 또는 발레-무언극은 장 노베르와 그가 쓴 『춤과 발레에 관한 서한』(1760)의 영향이 결정적이다. 그는 발레가 여러 장르들을 혼합할 것이 아니라 무용수의 동작만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야기를 전달할 것을 강조했다. “발레는 춤을 보여 주기 위한 구실이 아니다. 발레 속에 있는 춤은 극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라는 노베르의 말은 춤의 정신을 바꿔놓았다. 이에 따라 발레에서 가면이 폐기되고 의상에도 혁신이 일어나면서 17세기의 궁정발레와 완전히 결별한, 노베르의 행동발레 양식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초연 당시 화제를 일으켰던, 노베르의 제자 장 도베르발이 안무한 <말괄량이 딸>(보르도에서 1789년에 초연)은 아직 코미디-발레의 요소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실재하는 인물을 등장시킨 근대발레의 시초로 여겨진다. 
  특히 발레에서 의상의 혁신은 발레의 발달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고 베르사유 궁의 틀에 짜인 엄격한 생활과 과시적인 연회에 싫증이 난 귀족들이 궁정 발레에도 흥미를 잃게 되자, 발레는 점점 더 높은 도약과 빠른 회전을 시도하는 등 자체적으로 기술을 연마하며 궁정 발레와 차별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발레 혁신의 첫 계기는 남성 무용수 못지않은 기술을 구사하며 획기적인 의상 변화를 시도한 여성 무용수 마리 카마르고의 등장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도 발레는 왕실이나 귀족의 여흥거리로 여겨진 만큼 가발과 가면, 한껏 부풀린 스커트, 굽 높은 구두 등 과장된 의상과 화려한 겉치장을 기본으로 삼았다. 또한 루이 13세가 칙령으로 여자 무용수는 발목을 덮는 긴 치마를 입게 하는 등 온갖 사회적 편견들로 인해 까다로운 규칙에 매여 있었다. 반면 남자 무용수는 활동하기 편한 바지를 입고 빠른 발동작과 높은 도약을 보여줄 수 있어서, 18세기까지 발레는 남성 무용수들의 전용물이었다. 
  카마르고는 1726년 파리에서 데뷔했다. 카마르고는 어느 날 공연에서 한 남성 무용수가 머뭇거리다 등장할 자기 순서를 놓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튀어나가 활력 넘치는 테크닉과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화려한 미모에 섬세한 감각을 겸비하고 남성 못지않게 어려운 스텝을 구사한 그녀는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그녀를 “남자처럼 춤춘 최초의 발레리나”라고 칭찬했다고 하는데, 현란한 발동작이 남성 무용수의 전유물이었던 만큼 이 말은 대단한 찬사였을 것이다. 이어서 카마르고는 다음 날 공연에서 자신의 앙트르샤(공중에서 두 발을 차 모으면서 교차시키는 스텝)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스커트를 잘라 발목을 드러낸 채 무대에 등장했다. 이 사건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녀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이때부터 대중의 관심은 남성 무용수에게서 여성 무용수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후로 여성 무용수의 치마 길이는 점점 짧아지기 시작한다.

  요리에도 카마르고의 이름이 붙여질 만큼 대단했던 그녀의 인기는 그녀와 전혀 다른 춤을 추는 마리 살레와의 경쟁 때문에 더 높아졌다. 눈부신 기교와 경쾌한 움직임, 생동감 넘치는 춤으로 기술 면에서 필적할 사람이 없었던 카마르고와 달리, 살레는 화려한 기술보다 시적인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단순하고도 우아한 춤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아! 카마르고 그대는 빛나고 / 살레는 나를 황홀하게 하네.
그대 스텝은 가벼이 나는 듯하고 / 그녀의 스텝은 부드럽게 스치네.
그대는 영원한 샛별, 그러나 / 그녀를 따를 이는 아무도 없어.
그대가 님프처럼 솟아오를 때 / 그는 여신처럼 춤추누나.” 
(볼테르, 『혼합적인 정취와 취향의 사원』, 1723)

  18세기 발레의 혁신을 주도한 장 조르주 노베르(1727~1810)는 “살레의 춤은 화려함도 우리 시대의 갈등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허식을 천진하고 감동적인 우아함으로 대치시켰고, 어떤 겉치레도 없이 표현이 고결하고 설득적이며 생기가 있었다. 그녀의 춤은 세련미를 과시했고, 관객을 움직인 것은 도약이나 익살스러운 동작이 아니었다.”(『춤에 관한 서한』, 1802)라고 평가하며 발레의 경향이 달라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살레의 춤은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 카마르고에게 뒤졌지만 19세기 낭만 발레를 꽃피우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라 실피드>(1832), <지젤>(1841) 등 걸작들이 탄생하는 19세기 전반에 발레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이탈리아 등 전 유럽에서 이른바 낭만 발레의 시대를 열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변화는 1830년 파리 오페라 극장의 경영권이 국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며 공연 극장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부르주아들이 발레의 주요 관객이 되면서 관객의 수가 많아진 시대적 배경에 기인하는 한편, 무엇보다 현란한 스텝과 우아한 동작, 개성 있는 춤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며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 발레리나들의 존재에 힘입은 것이었다. 또한 화가 외젠 라미가 디자인한 무릎길이의 종 모양의 치마, ‘로맨틱 튀튀’라 불리는 발레 의상이, 당시 무대 조명으로 개발된 가스등과 더불어, 발레리나들의 동작을 더욱 우아하고 환상적으로 돋보이게 함으로써 낭만 발레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로맨틱 튀튀는 1832년 낭만 발레의 대표작 <라 실피드> 공연에서 주연을 맡은 마리 탈리오니가 처음 착용했다. 다리 전체를 다 드러내어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다리와 현란한 발동작을 돋보이게 하는 접시꽃 모양의 클래식 튀튀도 <백조의 호수>(1877) 중 백조와 흑조의 의상으로 처음 등장한 이래 발레 의상의 대명사가 되었다.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가였던 작곡가 륄리에 의해 오페라가 전해진 뒤 19세기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가 발전하기까지, 19세기는 사실 오페라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낭만 발레가 대중의 주목을 끌게 된 것도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형식의 확립자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악마 로베르>(1831)에 포함된 발레 때문이었다.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로베르는 이자벨이라는 여성을 흠모하지만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자, 마법의 힘으로 사랑을 얻기 위해 성 로자리 수녀원으로 간다. 마법의 힘을 가진 수녀장 에레누가 수녀원의 마당에 묻혀 있다. 그곳은 간음의 죄를 범한 파계 수녀들이 묻혀 있는 묘지로, 그녀들은 승천하지 못하고 무덤에서 악마의 유혹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의 장면은 바로 그곳을 배경으로 주문에 따라 수녀들이 서서히 묘지에서 일어나 에로틱한 춤을 펼치는 부분이다. 
  이 오페라는 1893년까지 751회나 상연될 만큼 인기를 끌었는데, 그것이 3막에 나오는 <수녀들이여, 누가 잠들어있는가>라는 곡에 맞춰 수녀들의 영혼이 펼치는 에로틱한 발레 덕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이 발레가 낭만 발레의 효시이다. 달빛이 비치는 수녀원의 묘지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고딕 풍의 폐허로 연출되어 낭만주의가 선호하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발레가 대성공을 거둔 데는 마리 탈리오니라는 탁월한 발레리나(독무를 추는 여자무용수를 일컫는 이 용어는 이탈리아어로 1858년에 처음 사용되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탈리오니는 다음 해 낭만 발레의 대성공 작 <라 실피드>의 주인공이 되었다.
  샤를 노디에의 환상 소설 『트릴비 혹은 아가이루의 요정』을 원작으로 한 <라 실피드>는 아돌프 누리(테너이자 대본가)가 탈리오니에게 춤을 추게 할 목적으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대본을 쓰면서 탄생했다. 스코틀랜드의 농촌을 무대로, 결혼을 앞둔 청년 제임스에게 공기의 정령이 붙어 청년의 결혼을 파멸로 이끈다는 비극적 내용의 <라 실피드>는 발레의 전통적인 주제인 결혼을 명확하게 보여 준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출신인 탈리오니가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첫 공연을 한 것은 1827년 7월 23일이다. 그 때까지 관객이 봐오던 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춤과 몸매를 보인 탈리오니는 단번에 스타가 되었다. 발레를 ‘발끝으로 서서 추는 춤’으로 알게 한 최초의 발레리나가 바로 탈리오니이다. 발끝으로 서는 프웽트(pointe) 기법은 발의 다섯 가지 포지션과 더불어 발레의 기본 원칙이다. 탈리오니의 인기는 파리를 비롯하여 전 유럽에 하늘거리는 실피드식 의상, 실피드식 꽃장식, 실피드식 꽃다발을 유행시켰다. 또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연에서는 황제가 로열박스를 마다하고 오케스트라 피트 바로 뒷자리에 앉아 공연을 볼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발레 열풍을 일으킨 또 다른 발레리나인 파니 엘슬러와 탈리오니의 경쟁 또한 당시 세간의 큰 관심거리였다. 오늘날 발레리나의 유형을 구분하는 말로 쓰이는 ‘탈리오니 형’과 ‘엘슬러 형’은 그들에게서 나온 용어이다. 가냘프고 순수한 청순가련 형의 표상이 탈리오니라면, <카추샤>(1836)의 집시 춤으로 유명한 파니 엘슬러는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발레리나였다. 테오필 고티에는 두 사람을 ‘기독교 형’, ‘이교도 형’으로, 평론가 앙드레 레빈송은 ‘쇼팽의 느린 왈츠 뒤에 오는 리스트의 랩소디’라는 표현으로 두 사람을 비교했다. 활발한 해외 공연을 펼친 엘슬러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의회가 하루 휴회를 할 정도로 온 도시가 법석을 떨었다고 하니 엘슬러가 당시 어느 정도의 대중 스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엘슬러의 파리 진출로 탈리오니와의 경쟁이 본격화되자, 두 발레리나에 열광하는 팬들의 열띤 논쟁도 연일 계속되었다. 여섯 살 연상인 탈리오니가 러시아로 진출하게 된 데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파리에 진출한 엘슬러의 영향이 컸다. 엘슬러가 미국에서의 성공에 취해 파리 오페라 극장과의 계약을 파기할 즈음 파리에는 <지젤>(1841)의 카를로타 그리지라는 새로운 스타가 출현했다. 
  낭만주의 시인인 테오필 고티에가 대본을, 작곡가 아돌프 아당이 음악을, 당대를 대표하는 안무가 장 코랄리와 쥘 페로가 안무를 맡았던 <지젤>은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과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하는 전형적인 낭만 발레의 대표작이다. 고티에는 사랑에 배반당하고 죽은 처녀 귀신들이 밤마다 무덤에서 나와 춤을 춘다는 독일의 한 전설을 바탕으로 <지젤>의 대본을 썼고, 주인공 지젤 역은 이탈리아 출신의 발레리나 그리지에게 돌아갔다. <지젤>은 오늘날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와 더불어 가장 자주 상연되는 발레 작품 증 하나이다. 프랑스에서 탄생한 <지젤>은 초연에서 제법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파리 오페라 극장의 장기 공연작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지젤>은 러시아로 건너가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오늘날 공연되는 <지젤>의 안무 또한 러시아 고전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의 것으로 남아있다. <지젤>에서 그리지의 파트너 무용수였고, 후에 파리오페라 극장 발레 마스터가 되는 뤼시엥 프티파는 마리우스 프티파의 형이다. 이 형제의 활동은 유럽에서 러시아로 발레의 중심이 옮아간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유럽에서 낭만 발레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1845년 쥘 페로가 안무하고 런던의 허 마제스티 극장에서 초연된 <파 드 카트르>라는 작품의 기획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파 드 카트르>는 ‘네 사람의 춤’이라는 뜻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공연은 당시 최고의 발레리나인 마리 탈리오니, 카를로타 그리지, 그리고 파니 체리토와 루실 그란을 한 무대에 세우기 위해 계획되었다. 한 사람을 섭외하기도 어려운 터에 이런 공연이 기획되었다는 것은 기획자와 운영자가 성사만 된다면 대규모 흥행이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만큼 발레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발레리나들 사이의 무대 위 자존심 대결이 치열하였음은 물론 객석의 팬들 사이의 경쟁도 과열되어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긴장이 팽배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뒤 『더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사상 최고의 무용의 제전, 전례가 없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네 명의 발레리나들이 불꽃 튀는 경쟁심으로 다른 무대에서는 볼 수 없을 최고의 에너지와 기량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공연 내내 박수가 이어졌고 각 무용수들의 바리아시옹이 끝날 때는 마치 폭풍우가 일 듯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 무대 앞쪽은 온통 꽃으로 뒤덮였다.” (『더 타임스』, 1845년 7월 12일자)

  네 발레리나의 개성과 장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목표였던 만큼 줄거리 없는 최초의 발레가 되었다는 점에서, 또 이러한 기획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발레리나들이 대중의 우상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나흘 공연에 그쳤지만 이 공연은 발레 역사에 남을 세기의 대공연이었다. 
  19세기 무용수의 삶과 운명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1829~1850)에서 발레리나를 꿈꾸는 플로랑틴 카비롤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졌다. 어머니와 가난하게 사는 플로랑틴은 당시 파리 발레 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발레 교사 쿠론의 연습실에 소속된 발레리나 지망생이다. 우연히 그녀를 본 칼드 노인의 후원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파리 오페라 극장에 데뷔하는 주인공 플로랑틴을 통해, 발자크는 생활비를 지원하고 무대에 데뷔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돈 많은 세도가의 그늘에서 하층계급 출신의 무용수들이 겪는 어둡고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식 무용수가 되어도 높은 급료를 받지는 못했으므로, 무용수들은 후원자의 원조를 기대해야 했고 그 대가로 돈 많은 후원자나 귀족의 애인이 되는 것이 예사였다. 
  파리 오페라 극장은 당시 발레 장면을 반드시 오페라 2막에 넣으라는 규정을 두었는데, 이 규정은 저녁 식사 후 오페라 극장으로 몰려든 귀족 청년들(일명 ‘조케 클럽 Jockey club’ 회원들)의 강한 요구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한다. 공연 감상보다 무용수들을 만나러 오페라 극장을 찾는 그들이 공연 시작 시간에 맞추어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무용 연습실’이라 불리는 무대 옆 공간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무용수들이 몸을 풀고 연습하는 장소인 그곳은 후원자들이 후원을 결정한다는 명목으로 무용수들을 직접 만나 연습을 지켜보기 위해 수시로 드나드는 공간이기도 했다. 발레를 둘러싼 당시의 이러한 풍속도는 에드가 드가의 그림 속에도 재현되어 있다. 
  발레리나를 소재로 한 그림을 천오백 점이나 남겨 ‘무희의 화가’라 불리는 드가(1834~1917)는 화려하고 빛나는 무대의 모습보다 무용수와 그들의 연습 장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당시의 풍속도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고된 훈련으로 지쳐있는 발레리나의 모습, 후원자임을 내세워 연습실을 무시로 드나드는 검은 옷의 세도가들의 존재가 드가 그림 곳곳에 등장한다. 드가의 그림에서 무용수는 환상과 동경의 대상이 아닌, 숱한 좌절을 딛고 각고의 노력으로 직업적 기량을 갖추고도 후원자에게 자신의 삶을 맡길 수밖에 없는 고단한 노동자이다. 이러한 그림 속 풍경은 또한 더 이상 주목할 만한 창작물 없이 식상한 발레 작품들만 반복해서 공연하던 활기 없는 19세기 말 파리 오페라 극장의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작품 속 인물이 아니라, 발자크가 묘사한 것과 같은 운명을 겪은 실제 인물로 널리 알려진 무용수가 엠마 리브리이다. 엠마의 어머니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무용수로서 한 귀족의 애인이 되어 엠마를 낳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인 엠마는 발레 수업을 받고 엄마의 새로운 귀족 애인의 후원을 받으며 1858년 16세의 나이로 <라 실피드>를 통해 파리 오페라 극장에 데뷔한다. 엠마는 ‘탈리오니의 재탄생’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하룻밤에 스타가 되었는데, 그녀의 인기에는 그녀가 파리 출생이라는 사실이 큰 몫을 했다. 낭만 발레는 파리의 오페라 극장을 주 무대로 삼았지만 사실 당시에 프랑스 출신의 뛰어난 무용수가 거의 없었다. 후견인의 도움으로 탈리오니의 지도를 받았고 탈리오니가 엠마를 위해 직접 안무한 <나비> 공연으로 그녀는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나비> 공연 2년 후 의상 리허설 도중 입고 있던 로맨틱 튀튀가 가스등을 스치면서 엄청난 화염에 휩싸인 그녀는 끔찍한 화상을 입고 21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고 만다. 엠마 이후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발레리나는 등장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발레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스타 발레리나의 인기와 명성에 들떠 발레 자체는 발레리나의 묘기를 빛나게 하는 장식물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생겨나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급성장한 오페라 공연에 밀리면서 발레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발레는 18세기부터 프랑스와 유럽의 무용수와 안무가를 적극 수입한 러시아 황실의 아낌없는 후원에 힘입어 프티파(1819∼1910)라는 거장을 만들어 낸 러시아로 중심이 옮겨진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러시아에서 최고의 기량을 펼친 프티파, 안나 파블로바와 니진스키 등 뛰어난 무용수, 기획자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안무사 미하일 포킨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의 파리 공연(1909)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러시아는 확고한 발레 왕국으로 자리 잡는다. 러시아는 고전 발레 최고의 작품, 프랑스와 러시아 예술의 합작품들인 <백조의 호수>(1877),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불새>(1910) 등을 생산하며 새로운 발레의 바람을 일으켰다. 러시아 발레의 열풍을 타고 파리에서 다시 한 번 <파 드 카트르>에 버금가는 발레 공연이 기획된 것은 20세기 초이다. 
  러시아의 발레 기획자 디아길레프는 20세기 초 유럽 예술가들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1914년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장 콕토는 작곡가 에릭 사티와 새로운 공연, 『퍼레이드』를 기획하면서 디아길레프를 끌어들인다. 이 획기적인 이벤트에 피카소가 합류하면서, 콕토의 발상에 피카소의 재치와 창의성이 더해지고 특히 피카소가 무대의상을 담당하며 무대는 입체파적인 상상력으로 구성되었다. 1973년 이 작품을 재현한 로버트 조프레는 피카소의 의상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작품은 정말 한 시대를 대변한 작품이다. 발레 작품에 이처럼 많은 재능이 한꺼번에 동원된 예는 거의 없다. 피카소가 입체파 식 의상으로 꾸며 놓은 매니저들의 모습 한 가지만 보더라도 이건 정말 멋지다. 그것만으로도 걸작이다. 그런 걸작을 가지고 발레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근사한 일이다.” (조앤 카스, 『역사 속의 춤』에서 재인용)

  화가들은 피카소가 디아길레프와 작업하는 것을 비난하여 “무대미술을 하는 것, 특히 러시아 발레를 위해 일하는 것은 범죄행위다”라고까지 비판했지만 전위 예술가들은 이 작품에 열광했다. 타이프라이터 소리, 총소리, 비행기 엔진 소리 등이 뒤섞인 사티의 음악도 충격적이었는데,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음악을 두고 “신선하고 참된 독창성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퍼레이드>는 요란한 기획과 발상, 무대장식으로 선풍을 일으켰지만, 정작 발레 공연으로서는 “사실 발레 안무 작품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20세기 전위파의 유명인사들, 콕토, 피카소, 사티 등이 관여했기 때문에 중요하게 언급될 뿐”(조앤 카스, 『역사 속의 춤』 인용, 참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쨌든 이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격렬했다. 

  이 공연의 가장 큰 의미는 예술사에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파리 초연 당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미술과 무용, 조각과 마임이 조화돼 보다 완벽한 예술 형태를 창조한 최초의 성공작”이라고 이 작품을 평가하면서 “새로운 정신을 표현해낸 이 작품이 바로 초현실주의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에서 발레가 본격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는 18세기에 그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이들은 프랑스 출신의 발레 안무가들이었다. 그 첫머리를 장식한 인물인 장 밥티스트 랑데는 러시아 최초의 발레 학교 ‘황실 발레 아카데미’(1738년 개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러시아 발레의 토대를 다지는 데 일조하였다. 
  18세기 말부터 발베르흐(<새로운 베르테르>(1799), <로미오와 줄리엣>(1809) 제작)처럼 러시아 출신의 발레 활동가들도 차츰 등장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러시아 발레 역사의 중심에는 프랑스인들이 있었다. 러시아 발레의 최고의 부흥기로 간주되는 19세기 초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이도 프랑스 출신의 무용가이자 안무가 디들로였다. 1801년 페테르부르크에 초빙된 디들로는 이후 30여 년간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 발레가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디들로가 러시아 발레에 미친 영향이나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였는지는 당대의 문화 비평지를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등장인물의 우아한 몸놀림 속에 자신의 시적 영혼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 (<소문> No. 21, 1834)
“발레의 진행과정은, 디들로가 믿을 수 있는 사학자이자 예사롭지 않은 화가이며 위대한 시인임을 잘 보여 준다.”(<조국의 아들> No.48, 1817)

  디들로의 제자이자 모스크바에서 발레 안무가로 활동하였던 글루시콥스키는 디들로의 발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 이 매혹적인 공중 도약은 디들로가 최초로 도입한 것으로 이후에 파리 극장에서도 사용되기에 이른다. 관객은 디들로의 발레에 완전히 매료당해 자신들이 극장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전혀 다른 세상, 환상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우리의 민족시인(푸시킨)의 위대한 시를 무언극의 산문으로 바꾼 디들로만큼, 이렇듯 완벽하고 유사하며 아름답게 시인의 작품을 개작한 이는 지금껏 없었다. [...] 발레는 디들로의 손 안에서 서사시의 훌륭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되었다.” (글루시콥스키, <위대한 안무가 디들로에 대한 회상과 무용 예술에 대한 소고>, 1940) 

  디들로가 활동하던 19세기 초 러시아 사회는 발레에 흠뻑 빠져있었으며 러시아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서도 발레가 차지하는 의미는 각별했다.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에서 살게 된 첫 해 디들로의 발레 공연들을 접하게 된다. 『예브게니 오네긴』에 붙이는 작가 주석에는 디들로의 발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타난다.

“디들로의 발레는 생동감 넘치는 상상력과 독특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낭만주의 작가들 중 한 사람은 그의 발레들 속에서 프랑스 문학 전체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시정(詩情)을 발견하였다.” 

  1808년 디들로의 <제피르와 플로라>를 보고 경탄을 금지 못하였던 시인 데르자빈은 당시의 감흥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이 매혹적인 환영들은 무엇인가
가볍고 빛나는 존재들이여
천국의 회합, 천상의 회합을 하는구나.
신들의 그림자, 신들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환희 속에
내 영혼을 어루만지고 즐겁게 하는 것인가?
내가 신들의 궁전에 있는 것인가?” 
(데르자빈, 『발레 제피르와 플로라에 대한 찬가』, 1808)

  디들로의 역할은 발레 안무가 혹은 무용수로 한정되지 않았다. 디들로는 발레 교사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드러냈으며 특유의 열정과 엄격함으로 수많은 발레 무용수들을 발굴해냈다. 푸시킨이 찬사를 마다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 이스토미나, 작가 그리보예도프가 그토록 매료당했던 텔레쇼바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발레는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1816년 데뷔한 이래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이스토미나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1823년 1월 15일 페테르부르크 볼쇼이 극장에서 푸시킨의 서사시 『카프카스의 포로』를 개작한 디들로의 발레가 초연되었다. 발레 <카프카스의 포로>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자아내었으며 특히 여주인공 체르케스 여인 역을 열연한 이스토미나는 이 작품을 통해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로 등극하게 된다.

“발레 <카프카스의 포로>는 우리 발레 무대의 최고의 성취이다. 의상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막의 자연스러움과 생생함,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경들의 변화, 그리고 춤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대의 여주인공 체르케스 여인. [...] 그녀의 춤과 무언극, 그녀의 모든 것이 관객을 황홀경에 빠뜨렸다.”(<여성 저널>, No 20, 1827)

  <카프카스의 포로>의 원작자인 푸시킨은 발레공연에 크게 만족해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연을 본 직후인 1823년 1월 30일에 푸시킨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디들로에 대해, 그리고 카프카스의 포로처럼 내가 쫓아다녔던 체르케스 여인 이스토미나에 대해 나에게 알려 줘.” (코네츠니이 외, 『푸시킨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일상생활』에서 재인용)

  『예브게니 오네긴』 곳곳에서 디들로의 발레와 이스토미나에 대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1장의 “아직 사랑의 여신과 갖가지 요정들, 뱀들이 / 무대 위에서 시끄럽게 뛰놀고 있고”라는 구절은 디들로가 안무하고 이스토미나가 주연을 맡은 <롤란드와 모르가나>(1821)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아래의 구절은 이스토미나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찬연하게 천상의 모습으로,
신비스런 바이올린 선율에 귀 기울이며
님프 무리 한가운데
서 있는 이스토미나. 그녀는,
한 발은 살짝 바닥에 대고
다른 발로 천천히 돈다.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휙 날아올라서
바람의 신의 입김에 불린 솜털처럼 날아간다.
몸을 움츠렸다가 펴며,
빠르게 발과 발을 맞추어 친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이스토미나와 동시대에 활동한 텔레쇼바도 이스토미나 만큼이나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누린 발레리나이다. 1824년 페테르부르크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된 <루슬란과 루드밀라>는 그녀에게 커다란 명성을 안겨다 준 작품이다. 루슬란을 유혹하는 즐로미라 역을 열연한 텔레쇼바는 주인공 루드밀라 역의 이스토미나 못지않은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남성 팬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앞다투어 텔레쇼바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였다. 작가 그리보예도프의 시 『텔레쇼바에게』도 그녀에게 바쳐진 헌시이다.

“오, 그녀는 누구인가? 사랑과 미의 여신
혹은 날개달린 천사인가? 
다른 세상을 위해 자신의 에덴동산을 떠나와
얇디얇은 구름을 휘감고 있구나.
돌연, 바람과도 같은 그녀의 비상!
별을 흩뿌리고, 순간 번쩍이다 사라지고 공기를 휘감는다.
높게 뛰어오른 발걸음으로……” (그리보예도프, 『텔레쇼바에게』, 1824)

  니콜라이 1세 치세(1825-55)에도 발레의 번성은 계속되었다. 니콜라이 황제는 단 한편의 발레 공연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발레에 심취해 있었다. 이 시기 다른 무대 예술은 다소 경시되는 경향까지 나타났으며 극장 측의 예산 배정에서 가장 우선시 되었던 것은 단연 발레였다. 프랑스를 휩쓴 낭만 발레가 디들로에 의해 러시아로 도입되면서 러시아에서도 1830년대 이후부터 낭만 발레가 지배적인 경향이 되었다. 서정성의 강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지향, 동양과 이국적인 것에 대한 동경, 환상적, 서민적 요소의 강화 등이 낭만 발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세기 초반 러시아 발레가 누렸던 폭발적 인기는 디들로가 은퇴하고 오페라가 성행하면서 다소 주춤하는 듯 보였다. 1850년대 발레 공연은 볼쇼이 극장에서 일요일에만 열렸으며 또한 그 이전과는 달리 극장 객석을 차지하는 이들은 주로 발레애호가들 뿐이었다고 한다(<브로크가우즈&에프론 백과사전> 참조). 다만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해외의 유명한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이 러시아 무대를 찾았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탈리오니, 엘슬러, 그리지 등도 있었다. 당시의 발레 상황이 어떠하였는지는 벨린스키의 다음 언급을 통해 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발레는 고전주의와 18세기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비극, 희극과 함께 대중의 관심의 중심에 있었다. 디들로는 위대한 창조자였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춤추는 이스토미나에 대한 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누구인가? 탈리오니, 파니, 엘슬러에 대해서도 그러한 시구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발레가 유지되고는 있으나 이미 예전의 의미는 아니다. 탈리오니라는 이름이 있으면 대중이 모이지만 그녀가 없는 곳에서 발레를 즐기는 이는 오로지 열혈 발레 애호가들뿐이다. 그러나 푸시킨 시대에 발레는 고전 비극과 희극에 승리를 거두었었다.” (벨린스키, <알렉산드르 극장>, 1845) 

  그러나 러시아에서 발레의 침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세기 중후반 유럽이 전반적으로 발레의 침체기를 경험하였다면 러시아 발레는 19세기 최고의 발레 거장으로 칭송되는 마리우스 프티파에 의해 그 발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프랑스 태생의 프티파는 1847년 페테르부르크로 건너와 50년이 넘게 활동하면서 70편 이상의 발레 작품을 남겼다. 프티파에 의해 비로소 러시아 고전 발레가 완성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가 러시아 발레 역사에 남긴 흔적은 강렬했다. 이 시기 발레는 기교적 측면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고 낭만적 요소에 고전적 요소가 가미된 새로운 형식, 화려한 의상, 눈부신 무대장치, 그리고 음악이 하나로 결합된 종합 무대양식으로 거듭나게 된다.
  프티파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 때 작곡가, 화가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작업하였으며 특히 프티파와 차이콥스키의 공동 작업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성과가 집약된 것이 바로 “발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이다. 프티파와 차이콥스키의 협업을 통해 이 시기 발레 음악은 높은 완성도를 획득해 나갔다. 위대한 작곡가와 위대한 안무가는 심포니 발레, 즉 교향곡의 각 악장처럼 발레의 막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완벽한 형식을 가지는 발레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급격한 사회 정치적 변동 속에서 러시아 문화예술계에도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났다. 인간의 심리를 심도 깊게 보여주고자 하는 지향은 발레 예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표현 수단과 새로운 발전 경로를 모색하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마린스키 극장의 수석 무용수이자 안무가 포킨이 있었다. 전통적인 무용 형식과 관행에 반대하면서도 고전 춤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포킨은 ‘발레 뤼스’를 통해 새로운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발레 뤼스’는 러시아 발레의 전성기, 그 중심에 있던 것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 발레는 디들로의 시대처럼 러시아 무대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러시아 발레’라는 뜻의 프랑스어 ‘발레 뤼스(Ballet Russe)’는 공연 기획자 디아길레프가 유럽에 러시아 발레를 알리려는 의도로 결성한 발레단의 명칭으로서 러시아와 프랑스 문화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화 현상이다. 20세기에 발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를 비롯해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발레가 한물 간 궁정 오락거리로 간주되었고 진지한 지식인들은 발레를 “속물과 피로한 사업가들을 위한 오락”으로 보았다(올랜도 파이지스, 『나타샤 댄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애초에는 프랑스에서 발레를 받아들였지만 문화의 창조적 수용과 변용을 거쳐 이제 바그너식 종합 예술로 승화한 러시아 스타일의 발레가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새로운 발레의 부흥을 알리게 된 것이다. 
  발레 뤼스의 주요 활동가들은 대부분 ‘예술 세계’의 회원들이었다. ‘예술 세계’란 베누아와 디아길레프가 펴낸 잡지(1898-1904)이자 화가, 작가, 음악가, 비평가들의 모임이며 전시회 조직(1899-1906, 1910-1924)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명칭이다. 예술 세계인들은 예술 양식 간 경계를 허물고 예술의 종합을 추구하였는데 이들의 이론적 배경에는 바그너의 종합예술론(Gesamtkunstwerk)이 놓여 있었다. 무대를 통합예술의 이상이라 보는 바그너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회화, 건축, 음악의 창조적 종합으로서의 극장 예술에 주목하였으며 그 중 특히 음악과 회화 그리고 안무를 통합한 새로운 발레 형식을 착안하는 데 집중하였다. 예술 세계의 ‘예술의 종합’이라는 이상은 ‘발레 뤼스’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탁월한 공연 기획자 디아길레프의 지휘 아래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협력하였다. 박스트, 베누아, 골로빈, 레리흐의 다채로운 디자인과 당대 최고의 발레 안무가였던 포킨의 혁신적인 안무, 여기에 니진스키, 파블로바, 카르시비나와 같은 뛰어난 무용수들의 춤, 그리고 천재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의 결합은 예술의 이상적인 종합을 실현하며 러시아 발레를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무용과 조형 예술, 음악의 완벽한 결합은 세계 문화의 수도 파리에서 1909년 개최된 ‘러시아 시즌’을 통해 성공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후 전 세계로 위력을 떨쳐 나갔다. ‘발레 뤼스’는 20세기 초 침체되었던 서구 발레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발레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발레 뤼스’의 기획 의도는 발레라는 서구의 예술 양식을 통해 러시아적인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발레 뤼스’의 기획자 디아길레프는 이것의 기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러시아 농민이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그는 러시아적인 발레를 만들고자 하였고 그 안에 농민 문화와 러시아 민속적 특색을 담아내고 싶어 했다. 디아길레프는 자신이 구현해내고자 하는 러시아적인 발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저는 러시아적인 발레 - 그런 것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러시아 발레 - 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오페라, 러시아 교향곡, 러시아 노래, 러시아 춤, 러시아 선율은 있지만 러시아 발레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년 5월 파리와 런던 공연을 위해 제가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디아길레프, <랴도프에게 보내는 편지>, 1909, 『나타냐 댄스』에서 재인용)

  디아길레프는 파리의 ‘러시아 시즌’에서 공연할 발레를 구상하면서 러시아 전래 동화 <불새>(1910)를 테마로 하는 발레를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러시아 민속 주제를 여러 번 다룬 적이 있는 작곡가 랴도프에게 발레 음악을 부탁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불새>의 발레음악은 랴도프가 아니라 잘 알려진 것처럼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게 된다. 스트라빈스키는 <불새>를 포함해 수많은 발레곡들 안에 러시아 민속 음악, 농민 음악, 농민 문화를 담아냄으로써 디아길레프의 의도를 훌륭히 구현해내었다.
  1909년 발레 뤼스의 공연에 합류한 이후 발레 뤼스의 활동을 통해 전설적 명성을 얻게 된 러시아 무용수 니진스키는 발레애호가들뿐만 아니라 당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강력히 매료시켰다. 그들 중에는 조각가 로댕도 있었다. 로댕은 발레 <목신의 오후>에 큰 감흥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의 시를 원작으로 드뷔시가 작곡한 <목신의 오후>는 니진스키가 직접 안무까지 맡은 작품이다. 1912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열렬한 지지와 혹독한 비평을 동시에 받으며 당시 최고의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이 공연을 직접 관람한 로댕은 니진스키의 연기에 큰 감동을 받고 무대 뒤로 직접 찾아가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이후 로댕은 니진스키가 춤추는 모습을 3점의 조각으로 남겼다.
  니진스키의 발레는 배우 찰리 채플린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찰리 채플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니진스키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첫 번째 발레 <세헤라자데>가 무대에 올랐다. 별로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무언극이 상당히 많은 데 반해 춤은 너무 적었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음악은 단조로웠다. 다음 순서는 니진스키의 파-데-데였다. 그가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극도의 흥분이 전신을 감쌌다. 지금껏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는데 니진스키는 그런 천재 중 하나였다. 그는 매혹적이고 멋졌으며 그의 신비로운 우울함은 다른 세상으로부터 온 것 같았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시였으며 그의 도약은 환상의 나라로의 비행이었다.”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1964/2007)

  러시아 발레가 세계에 남긴 흔적은 강렬한 것이었다. 러시아 음악이 클래식 음악 분야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공헌이라 일컬어지는 발레 음악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 이전에 발레 음악은 무용을 보조하는 수단이었으며 진지한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스트라빈스키는 발레 음악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80년대 초 그(차이콥스키)는 대담하게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될 <백조의 호수>의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이 대담함에 대해 처절한 실패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대중은 무지하였고 발레 음악이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디아길레프 사단이 등장하기 전, 인텔리겐치아와 소위 ‘진지한’ 음악가들의 눈에 발레 예술과 발레 음악이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지에 대해 몇 마디 해야겠다. 그 당시 우리의 발레가 기교적인 완성도 면에서 최고였고 관객들이 극장을 가득 메운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관객 중에 앞서 언급한 부류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발레를 오페라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무엇보다도 고전 발레 음악에 해당된다. 당시 고전 발레 음악은 진지한 작곡가가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스트라빈스키, 『내 삶의 기록』, 1963)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의 노력에 의해 발레 음악이 오페라나 교향곡 수준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는 그에게 ‘발레 음악의 혁명가’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으며 그의 작업을 기반으로 훗날 발레 음악 분야의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돌아온 탕아>, <신데렐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페트루시카>, <불새>, 쇼스타코비치의 <황금시대>와 같은 작품의 등장은 차이콥스키라는 선배 작곡가의 발레 음악에 대한 땀과 열정이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영원히 번성할 것만 같았던 러시아 발레는 소비에트 시대에 이르러 위기를 맞게 된다. 상류사회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온 발레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이의와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정권의 교육 인민위원(1917-1929)으로 문화 정책을 주도하였던 루나차르스키와 레닌의 지지 속에 발레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발레에 대한 수많은 평론을 쓴 저자이기도 한 루나차르스키는 발레가 인민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피력하며 발레의 존속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레닌 역시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며 발레를 포함한 문화 예술의 유용론을 지지하였다.

“대중의 전반적인 문화적 수준의 향상은 견고하고도 건강한 토대를 마련하여 이로부터 예술, 과학, 기술의 발전을 만드는 강력하고 무한한 힘이 나오게 된다.”(체트킨, 『레닌에 대한 추억』. 1955)

  10월 혁명 이후 수많은 발레 안무가들과 무용수들이 망명의 길에 나섰으나 고르스키처럼 망명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체류하면서 발레 공연과 교육에 힘쓴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 의해 러시아 발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비에트 발레로 건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발레에서는 왕자, 공주, 요정과 같은 비현실적인 주인공이 농민, 노동자 등과 같은 현실적 주인공으로 대체되었으며, 내용 전개와 등장인물의 심리 표현 등에 있어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적 발레가 각광받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발레 <붉은 양귀비>(1927)는 1917년 러시아 혁명 10주년을 기념하여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주제로 하는 <파리의 불꽃>(1932)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렇듯 소비에트 시기의 발레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전파와 국민 대통합의 기제라는 정치 사회적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시대 발레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바가노바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노바 교수법’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의 독특한 발레 교육 방식은 무용사에 있어 가장 훌륭한 교수법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이를 집약한 『고전무용의 기초』(1934)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현재도 러시아 발레의 지침서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바가노바 교수법을 통해 ‘볼쇼이 발레단’, ‘키로프 발레단’과 같은 세계적인 발레단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 발레단에 의해 현재도 러시아는 ‘발레의 나라’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발레의 인기는 발레를 주제로 하는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08년 최초의 발레 영화 <피에로와 피에레타>가 등장한 이래로 1940년대에는 콘서트 형식의 발레 영화가 대거 제작되었으며 50년대부터는 장편의 칼라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볼쇼이 극장과 키로프 극장의 유명한 발레들 <로미오와 줄리엣>(1955), <백조의 호수>(1957), <잠자는 숲속의 미녀>(1964) 등이 영화화되었다. 발레 안무가 프티파의 예술 세계를 다룬 프랑스-러시아 합작 다큐멘터리 영화 <세 번째 청춘>(1965),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안나 파블로바>(1983)가 제작되어 인기리에 상영되었으며 다큐멘터리 발레 영화도 계속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도 발레의 인기는 여전히 시들지 않고 있다. 백발의 노신사 홀로 발레 공연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은 러시아 발레 극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경이다. 러시아에서 발레는 소수의 문화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대중도 향유하는 일상적인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 ‘발레 ballet[balε]’는 16세기 말 작은 무도회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balletto'를 어원으로 하며, 러시아어로 발레를 뜻하는 ‘발레트 балет[balet]’는 프랑스어 ballet 혹은 독일어 Ballett를 통해 러시아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 어원에서도 드러나듯이, 발레만큼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서로 큰 영향을 미쳤던 분야도 드물다. 음악, 무언극, 의상, 장치 등을 갖추고 이야기나 주제를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무용으로서 연극 무용 또는 극장예술 무용이라 할 수 있는 발레의 최초의 기원은 이탈리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궁정 발레의 특징은 정치와 무용의 밀접한 관련에 있다. 발레를 프랑스에 도입하여 보호, 육성한 이탈리아의 카트린 드 메디치(1519~1589)는 섭정을 맡아, 권력을 집중시키고 전 유럽에 프랑스 왕실의 당위성과 힘과 부를 과시하는 데 발레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본인이 직접 발레를 추기도 했던 루이 14세 또한 발레를 강한 왕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귀족들을 제압, 왕실의 입지를 굳히는 데 활용했다. 또한 그는 왕립무용학교를 설립하여 고전 발레의 이론적 기초와 도약 기술을 개발하는 등 발레를 하나의 독립적인 공연 예술로 확립했다. 18세기 이후 프랑스는 발레의 전문용어가 대부분 프랑스어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명실 공히 발레의 중심국이 된다. 그리고 발레는 19세기 전반 프랑스를 비롯하여 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른바 낭만 발레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1830년 파리 오페라 극장의 경영권이 국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면서 공연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고 부르주아들이 발레의 주요 관객이 되면서 관객도 늘어났다. 무엇보다 우아함과 현란한 기교를 갖춘 발레리나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며 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르면서 발레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 출신의 유명한 발레리나가 별로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시기 발레가 프랑스에서 성행한 것은 상당 부분 19세기 유럽 문화의 수도로 자타가 인정했던 파리의 위상에 힘입어 공연이 파리에 집중되었던 데 기인하는 듯하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프랑스의 발레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급성장한 오페라 공연에 밀리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반면 러시아에서 발레는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발레가 쇠퇴하는 19세기 후반에도 그 인기가 시들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 시대 춤은 귀족들이 익혀야 하는 궁중 에티켓 중 하나로 여겨질 정도였는데, 이 때 춤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러시아의 서구화’라는 정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러시아 황실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호 속에 프랑스의 안무가와 무용수들이 러시아에 초빙되었고 이들에 의해 러시아 발레는 널리 보급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19세기 전반 러시아 사회를 발레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 안무가 디들로를 비롯해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전반적인 발레 침체기에 러시아 발레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마리우스 프티파 역시 프랑스 출신이었다. 특히 프티파에 의해 러시아 고전 발레의 명성이 세계에 각인되었으며 또한 프티파와 차이콥스키의 공동 작업을 토대로 “발레의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는 발레 최고의 걸작이 탄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발레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 온 러시아 발레는 20세기에 마침내 ‘발레 뤼스(Ballets Russes)’라는 프랑스어 이름으로 결성된 발레단의 활동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발레를 프랑스에 선보이게 된다. ‘발레 뤼스’는 20세기 초 침체되었던 서구 발레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발레의 새로운 부흥을 이끌었다. 소비에트 시기에도 발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비에트 발레로 건재했으며 ‘볼쇼이 발레단’, ‘키로프 발레단’과 같은 세계적인 발레단이 양성되었다. 
  이처럼 프랑스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발레의 종주국으로서 명성을 누렸다면 프랑스로부터 발레를 적극 수용한 러시아는 19세기 후반부터 발레의 새로운 부흥기를 이끌며 유럽 본토의 발레를 넘어 세계 발레를 선도하는 ‘발레의 나라’로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연관 토포스 결혼; 귀족; 무도회; 축제;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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