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별장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별장
토포스명(프랑스) villa, maison de campagne
토포스명(러시아) дача
정의 1. 도시적 일상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질수록 별장에 대한 지향도 더욱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 ‘빌라 villa[vi(l)la]’는 본래 농업 경작지를 가리키는 라틴어 villa에 기원을 두고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빌라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성행하고 이후 프랑스 및 전 유럽에 확산된, 시골이나 바닷가의 저택, 교외의 별장이나 별장식 주택을 가리킨다. 빌라 외에도 알프스의 목동들의 거처였던 작은 나무집 ‘샬레(chalet)’, 정원의 정자나 별채 건물을 가리키던 ‘파비용(pavillon)’도 조금씩 의미가 다르게 별장의 의미를 갖지만 오늘날 휴가를 보내는 집의 의미로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용어는 ‘전원주택(maison de campagne)’, ‘두 번째 집(résidence secondaire)’이다.
  본래 빌라는 경작용과 안락한 주거용으로 나누어, 넓은 대지에 농장과 정원을 조성하고 가운데에 주변 환경을 관장할 수 있는 주거용 건물을 세우는 배치 형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빌라의 원형은 고대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76~138)가 로마 교외의 티볼리에 지은 하드리안 빌라이다. 티볼리는 로마 제국 시대에 여름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 부유한 로마인들이 근처에 별장과 소규모의 신전을 지은 곳이다. 또한 폼페이 도 고대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그곳에 있는 시민 베티의 주택은 독특하게 꾸며진 건물과 장식 벽화, 고대 그리스풍의 기둥과 대리석 수영장, 오리를 안고 있는 큐피드 동상으로 유명한 별장이다. 
  로마식 빌라가 다시 성행하게 된 시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이다. 문예부흥을 주도한 메디치, 알비치 등의 대상인 가문들은 도시에는 대규모 저택인 팔라초를, 교외에는 별장 주택인 빌라를 건축했다. 티볼리에 위치한 빌라 데스테(Villa d'Este)는 16세기 르네상스기의 대표적인 별장으로, 수백 개의 분수가 있는 계단식 정원이 유명하다. 르네상스 문화의 진수이며 이탈리아 정원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곳은 유럽 정원발전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Chastel, A., Folz, R., Picard, G.-C., Universalis, «villa, histoire» 참조). 이러한 이탈리아의 빌라는 르네상스기 루아르 강변에 지어진 왕들의 호화로운 성, 샤또(château)의 건립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와 20세기에 일반화되는 호화주택으로서의 별장의 형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에 지어진 빌라의 연장선에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한국어로 ‘주말농장, 여름별장, 러시아식 별장’ 등으로 번역되는 러시아어 ‘다차 дача[dacha]’는 한국이나 여타 나라들의 별장 개념과는 다소 상이한 독특한 러시아식 별장 문화를 드러내준다. 러시아의 다차는 조그만 텃밭이 있는 오두막집에서 2~3층의 대저택에 수영장까지 갖춘 고급별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별장을 아우른다. ‘주다, 하사하다’를 뜻하는 동사로부터 파생한 ‘다차’는 애초에는 공후가 신하들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행위를 뜻하다가 하사품으로서의 영지 자체를 지칭하게 된 어휘이다.
  러시아 사회에 현대적 의미의 다차 문화가 공고화된 된 시기는 대략적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로 추정된다(샨스키&보브로바 <러시아어 어원사전> 참조). 그러나 다차의 등장은 이미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맞물려 시작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조성하면서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땅을 귀족들에게 하사하였다. 다차 부지의 하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혼합되어 있었다. 신하들에게 베푸는 황제의 은총이라는 측면에서 신하로서 황제에 대한 의무와 명예의 복합적 의미가 담겨 있었으며, 또한 페테르부르크 주변의 황량한 땅이 귀족들에 의해 빠르게 개발되고 아름답게 꾸며지길 바라는 표트르 대제의 의도도 숨어있었다.
  다차 문화는 19세기 중반 단행된 농노제 철폐와 이후에 가속화된 산업화 속에 확대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농노제가 사라진 후 지방의 영지를 떠나 도시에서 관료 생활을 하게 된 지방 귀족들은 황량하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도시민에게 자연이란 도시를 체험한 후에 비로소 등장하게 된 개념이듯, 옛 지주들의 자연에 대한 향수는 도시 생활 후 더욱 짙어졌다. 이러한 향수는 근교의 땅에 다차를 짓고 텃밭을 가꾸는 취미로 이어지게 되었다. 주말이나 여름에 다차에 와서 한가로운 시골의 정취를 즐기는 생활방식이 정착되면서 다차 문화는 귀족 사회의 일상적인 생활 문화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이탈리아 빌라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및 유럽의 빌라는 일반적으로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 건립된 토호들의 거대한 농장으로서 경제적 기능과 일상생활의 기능을 모두 갖춘 유형이다. 규모가 크고 구조가 복잡한 이 별장들은 농가와 구분된 주거용 고급주택을 포함한다. 빌라루스티카(villarustica)라 불린 이 별장은 유럽으로 퍼져나가 영어로는 컨트리하우스(country house), 프랑스어로는 샤또(château)라 불렸다. 
  원래 프랑스어 샤또 즉 성은 15세기까지는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시설로서 요새의 성격이 강했는데, 중세 식 전쟁이 잦아들고 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방어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왕이나 영주들이 영지에 과시적으로 건립하는 고급 주택의 성격을 띠게 된다. 특히 16세기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르네상스 문화를 접하고 그것을 프랑스에 적극 도입한 프랑수아 1세가 루아르 강변에 건립한 아름답고 화려한 샤또들은 빌라 데스테와 같은 이탈리아식 별장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후 일 드 프랑스 지방으로 왕궁이 옮겨가면서 귀족들이 거주하는 샤또가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건립된다. 베르사유 성의 모델이 된 보 르 비콩트 성은 루이 14세 통치 시기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재무상 니콜라 푸케(1615~1680)가 건립한 17세기 중반의 화려한 건축물이다. 특히 조경전문가 앙드레 르 노트르(1613~1700)가 설계한 성 주변의 기하학적 정원은 17세기 일 드 프랑스 지역 최고의 정원으로 여겨졌는데, 르 노트르는 루이 14세의 요청으로 베르사유 성의 정원도 설계했다. 
  19세기 파리의 이른바 ‘화려한 구역들’에 귀족과 대부르주아들이 권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건립하고 장식한 주택들을 지배한 것도 이 샤또 양식이었다. 대부르주아들이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활동이 전개되는 도시에 거주하기를 선호한 반면, 정통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그들이 버리고 떠나온 농촌 지역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옛 권위를 되찾고자 하는 정통 왕당파 귀족들이 고딕 양식을 선택한 반면,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신분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개인이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했던 르네상스 시기의 양식을 선호했다. 19세기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성의 숫자는 프랑스 전역에서 20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과거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도시와 휴양지에 화려하게 지었던 샤또는 오늘날 고급 숙박업소로 변신하여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명소가 되고 있다.
  절충주의적인 새로운 양식의 빌라들도 등장했는데, 가령 1829년 은행가인 제임스 드 로칠드가 푸셰 집안 상속자로부터 페리에르 성을 구입하여 그 자리에 새로 지은 독특한 양식의 대규모 별장이 그 경우이다. 건물의 중앙에 천장이 유리로 된 커다란 홀을 두고 그 방을 중심으로 응접실, 살롱, 식당, 당구실, 게임실, 침실을 배치하고, 지하 100여 미터 아래에 설치된 부엌과 식당 사이에는 조그만 기차가 다닐 수 있는 회랑을 마련했다. 로칠드 집안사람들은 10월 초에 페리에르에 와서 그곳에 머물다 1월에 파리로 돌아가곤 했는데, 정통 귀족이나 벼락출세한 부르주아들의 이러한 행태는 매우 과시적이어서, 파리를 떠나 별장으로 가는 이들의 행렬은 은식기, 도자기와 유리로 된 그릇 뿐만 아니라 장난감, 책, 그랜드 피아노까지 대동하여 거대한 원정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시골 별장에서의 주요한 행사는 개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나서는 사냥이었다(필립 아리에스, 조르주 뒤비, 『사생활의 역사』 참조).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바닷가 휴양지가 별장을 짓는 장소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르카숑, 도빌 같은 해안지역에 많은 부유층이 몰려들어 별장을 지었다. 
  14세기 이후로 빌라는 주로 이탈리아어 빌라에서 차용된 어휘로 정의되었지만 19세기에 이르면 “정원에 둘러싸인 전원주택”(빅토르 위고, 『편지』, 1821)을 의미하는 어휘로 일반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Centre national de ressources textuelles et lexicales, http://www.cnrtl.fr/definition/villa 참조) 
  두 번째 유형의 별장은 도시 부유 계층이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휴양을 위해 잠시 머무는, 소박하고 규모가 작은 거처이다. 샤또와 별개로 쾌적한 거주지에 초점을 맞춘 이 두 번째 유형의 별장이 건축의 주요 테마로 등장한 것은 18세기이다. 이러한 별장들은 풍속이 타락하지 않고 조용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자연과 건축을 조화롭게 결합한 양식을 선호했다. 이 유형의 별장은 20세기 중산층을 중심으로 대도시 교외의 전원에 소박한 정원이 딸린 작은 규모의 빌라를 건립하는 유행이 확산되면서, 이후 복잡하고 피곤한 도시 생활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전원생활을 누리는 여가 문화와 연관된 거주형태로 정착했다. 
  이처럼 16세기 이후 대도시나 휴양지에 건립된 호화 주택을 가리키는 샤또나 빌라 외에도, 과거 알프스의 목동들이 여름 방목기에 머물면서 치즈를 제조하던 거처를 본 따 나무로 지은 작은 별장 ‘샬레(chalet)’, 샤또의 정원에 있는 정자나 별채 건물을 가리키다 오늘날 전원이나 대도시 교외의 소규모 빌라를 가리키는 ‘파비용(pavillon)’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주 생활공간인 도시의 주택 외에 시골이나 전원에 마련한 휴식 공간을 가리키는 어휘로 ‘전원주택(maison à la campagne)’, ‘두 번째 집(résidence secondaire)’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별장은 휴가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과거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상징적 기능을 벗어나 도시의 일상생활을 보완해주는 필수 휴양공간으로 일상화되어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한 다차 문화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귀족들만이 향유하던 것이었다. 다차는 단순히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귀족의 명예와 부를 드러내주는 기호로 작용하였다. 해마다 5월이면 다차에서 여름을 나기 위해 짐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네바강을 줄지어 이동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하였다.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다차 문화는 19세기 중반 들어 도시화와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그 향유계층이 더욱 늘어난다. 또한 이 시기 등장하게 되는 철도는 다차 지역을 도시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곳까지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다차에 대한 최초의 기고문으로 알려져 있는 아래의 글은 당대 유명한 작가이자 비평가 불가린이 쓴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이 시기 다차 문화가 귀족들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에게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름에 가게에서 상인을, 약국에서 약사를, 작업장에서 독일 직공을, 사무실에서 사업가를 찾지 마시오! 그들은 모두 다차에 있으니까!” (<북쪽의 벌> 176호, 1837)

  19세기까지 다차는 비록 그 형태와 규모는 사회 계층 및 보유 재산에 따라 차이가 났을지라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이 시기의 다차는 휴식, 여유로움, 한가로운 자연과 연상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다차로 향하는 마음은 답답한 도시 생활을 떠나 탁 트인 공간으로 나아가 자연을 만끽하고자 하는 열망과 맞닿아 있으며 자연이 푸르러지고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이러한 열망은 더욱 증대되었다. 다차 생활은 다소 무료함을 느낄 정도로 평온하고 느린 호흡의 휴식이었다. 해질녘 그림 같은 가로수 길을 산책하고 찻잔을 사이에 두고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독서 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열린 테라스에서 자연을 배경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다차에서의 주된 일과였다.
  이 시대를 살았던 푸시킨 역시 대다수의 도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여름을 답답하고 더운 도시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결혼 첫 해 여름을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보내고 싶었던 푸시킨은 지인 플레트뇨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쓴다.

“모스크바에 남을 생각은 추호도 없네. [...]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머물고 싶다네. 얼마나 환상적인 생각인가! 여름과 가을을 영감이 가득 찬 외떨어진 곳에서, 그렇지만 수도 가까이에서 소중한 추억에 둘러싸여 보낼 수 있지 않은가. [...] 매주 그대와도 주콥스키와도 만날 수 있고 말이네. 페테르부르크가 바로 가까이 있으니” (푸시킨, <플레트뇨프에게 보내는 편지>, 1831. 3. 26) 

  플레트뇨프의 도움으로 차르스코예 셀로에 다차를 구한 푸시킨은 그해 5월 말에 아내와 함께 조그마한 목조 건물로 이사했다. 다차에서의 하루 일과 중 빼놓을 수 없는 산책 시간이 되면 푸시킨은 아내의 손을 잡고 나타나곤 하였다. 아침 시간은 푸시킨이 다차의 서재에서 창작에 몰두하는 시간이었다. 푸시킨은 1831년 5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5개월 동안 차르스코예 셀로의 다차에 머물면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오네긴이 타티야나에게 보내는 편지와 『살탄 황제 이야기』 등을 완성하였고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벨킨 이야기』의 출판 준비도 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코네츠니 외, 『푸시킨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일상생활』 참조). 

  19세기 초 다차가 없는 귀족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귀족 사회에서 다차의 유행은 실로 대단했다. 이 시기 다차에서 무도회와 연주회가 열리고 연극이 상연되는 등, 다차가 문화의 중심지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그 이후에도 다차에 대한 지향과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도시화 및 산업화와 맞물려 계속적으로 증대되었다. 
  19세기 말 다차의 유행이 더욱 강력해지고 있음은 체호프의 『벚꽃동산』(1903)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빚 때문에 영지가 경매에 넘어갈 상황에 직면한 라넵스카야에게 앞으로 다차를 임대할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며 따라서 벚꽃동산에 다차를 지어 임대하면 상당한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역설하는 로파힌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전에는 시골에 지주들과 농민들만 있었지만 이제 다차임대인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모든 도시들은, 심지어 아주 작은 도시들조차 다차로 둘러싸여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20여년이 지나면 다차인들의 수는 상상 이상으로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이야 발코니에서 차나 마시지만 자신의 1 헥타르의 땅에서 농사일을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게 되면 벚꽃동산은 행복하고 풍요롭고 호화로워질 것입니다.” (체호프, 『벚꽃동산』, 1903)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활동한 인상주의 화가 코로빈(1861~1939)의 회고록을 통해 당시 다차의 구조와 그 안에서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모스크바 주변 경관은 훌륭했다. 점차 다차가 주변에 지어졌고 여름에 이 목조 다차들은 그야말로 시적이었다. [...] 다차 안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고 홀에서 테라스 쪽으로 유리문이 나 있다.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테라스는 정원과 연결되어 있고 정원에는 라일락과 자스민이 가득 차 있다. 다차 안은 소나무향내로 가득하고 숲과 정원으로부터 꽃내음과 건초내음이 풍겨져 온다. 다차에서의 생활은 환상적이었다. 마치 천국에 있는 것과도 같았다.” (『콘스탄틴 코로빈은 회상한다』, 1990) 

  한편 소비에트 시대에 이르러 다차의 형태와 그 의미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수많은 다차가 국유화되고 일반인들의 개인적 다차 소유는 금지되었다. 노멘클라투라(엘리트 특권층)만이 다차를 보유함으로써 귀족의 상징이었던 다차의 기호성이 다시금 부활한 듯하였다. 고위 관리들의 다차는 방이 10개가 넘는 등 다차가 지나치게 거대해지고 화려해지자 1938년 다차의 규모를 제한하는 ‘고위 관리들의 다차에 관한 법령’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 말 노멘클라투라의 다차 문화는 미할코프 감독의 영화 <위선의 태양>(1994)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은 음악가, 작가, 배우 등 노멘클라투라 예술가들의 다차가 모여 있는 곳으로서, 주인공 가족이 머무는 다차는 실제로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전 시장 드미트리 베드냐코프의 다차였다고 한다. 
  다차의 대중화는 흐루시초프 해빙기(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에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나 이 시기의 다차는 이전 시기와 비교해 그 의미 기능이 다소 변화하게 된다. 당국은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 등을 통해 도시 근교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다차 조성을 장려하였다. 즉 협동조합을 결성하여 텃밭을 일구는 집단 원예사업을 적극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다차는 도시민의 휴식 공간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자가 농업으로서의 기능이 더욱 부각되고 그 경제적 가치에 초점이 돌려진 듯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적 혼란과 극심한 식량난 속에 도시민에게 식량 조달이라는 다차의 경제적 효용 가치가 전면에 대두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러시아의 다차는 일반적인 별장이나 전원주택과는 다소 상이한 러시아 특유의 별장 문화, 곧 경제적 효용가치를 중시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되기에 이른다.
  현대에도 다차는 그것을 빼놓고는 러시아인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일상생활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다차는 종종 보드카와 바냐(러시아식 사우나)와 함께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 문화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현대 러시아의 다차 문화에 대해 말할 때 늘 따라다니는 문제가 하나있다. 다차가 여가문화의 일환인가 아니면 경제적 수단인가 하는 것이다. 분명 현대의 다차는 예전과 같은 휴식의 공간으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노동의 연속, 그리고 안전한 먹거리의 제공과 부수입 수단이라는 경제적 효용가치와도 연상작용하는 공간으로 바뀐 듯하다. 때로 상류층의 다차는 휴식의 공간이지만 중하층의 다차는 경제적 의미가 더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다차는 경제적 효용가치와 휴식의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다.
  귀족의 호화로운 대저택에서부터 조그만 텃밭이 딸린 오두막집까지, 귀족과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적 상징으로부터 텃밭 경작의 기능까지, 다차의 형태와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지만 이러한 다양한 특성들의 공존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러시아적 별장의 토포스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여전히 다차는 신흥부자들(노비 루스키)의 부의 상징이기도 하고 대다수 서민들의 주말농장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호흡하고 땀 흘려 일하는 것 자체를 진정한 휴식이라고 말하는 러시아인들에게 다차는 여전히 경제적 기능과 여가 문화의 복합체인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교외의 별장이나 별장식 주택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빌라’는 본래 농업 경작지를 가리키는 라틴어 villa에 기원을 둔 용어로, 역사적으로 이탈리아 별장 빌라를 모태로 하여 이후 프랑스의 대도시와 휴양지에 건립된 화려한 별장을 일컫는다. 한국어로 주말농장, 여름별장, 러시아식 별장 등으로 번역되는 러시아어 ‘다차’는 ‘주다, 하사하다’를 뜻하는 슬라브어 동사에 그 기원을 둔다.
빌라의 원형은 고대 로마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성행하는 시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이다. 이탈리아 별장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및 유럽의 별장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거대한 농장과 주거용 고급 주택을 포함한 별장으로서 이탈리아식 빌라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샤또’가 이 유형에 속한다. ‘샤또’는 15세기까지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시설로서 요새의 성격이 강했는데 16세기 이후 왕이나 영주들이 권력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 건립하는 별장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호화 별장들은 주로 샤또 형태로 지어진 것들로서 귀족과 대 부르주아들의 권력과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두 번째 유형은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휴양을 위해 잠시 머무르는 소박하고 규모가 작은 거처로서의 별장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이 유형의 별장은 18세기에 등장하여, 20세기 중산층을 중심으로 대도시 교외나 전원에 지은 소박한 정원이 딸린 작은 규모의 빌라로 정착하게 된다. 
  러시아의 별장도 이 두 가지 유형이 혼합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별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별장이 최초로 출현한 표트르 대제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별장이 귀족의 명예와 부를 드러내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 또한 19세기 프랑스식 샤또 양식의 별장에서도 발견되는 점이다. 이 시기에 이미 프랑스에 비해 러시아에서 별장이 좀 더 폭넓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두 사회에서 별장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즉 별장은 휴식, 한가로움, 자연과 연상작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양국의 차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러시아에서 별장이 보다 넓은 계층에 확대되고 더욱 유행하게 되면서 별장 문화가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련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소비에트 시대에 정부 차원에서 도시민의 휴식과 여가 공간이라기보다는 자가 농업을 할 수 있는 곳으로서 별장 활성화 정책이 추진됨으로써 예전보다 이것의 경제적 효용가치에 방점이 옮겨가게 된 것도 프랑스적 별장과 차이가 나는 배경을 이룬다. 
  오늘날 별장은 프랑스어로 ‘전원주택(maison à la campagne)’, ‘두 번째 집(résidence secondaire)’이라는 일상적 표현으로 사용될 만큼 프랑스에서도 일상생활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프랑스적 별장의 토포스가 휴식 또는 여가와 보다 밀접히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면 러시아적 별장의 토포스는 경제적 기능과 여가 문화의 복합체라는 독특한 러시아식 별장을 대변하면서 현대 러시아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관 토포스 귀족; 도시; 산책; 숲; 시골; 여가; 정원; 집;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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