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살롱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살롱
토포스명(프랑스) salon
토포스명(러시아) салон
정의 1. 사회적 교류의 욕망이 커질수록 살롱은 더욱 번성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일차적으로는 “큰 방” 정도의 의미를 갖는 프랑스어 명사 ‘살롱 salon [salɔ̃]’의 어원과 역사에는 약간의 굴곡이 있다. 이 말은 직접적으로는 “큰 방”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살로네 salone’에서 온 것으로 기록된다. 이 ‘살로네’는 이탈리아어 자체에서 미리 파생과 변화를 겪었다. 즉 “방”을 의미하는 ‘살라 sala’에 “(더) 큰”을 의미하는 접미사 ‘-오네 -one’가 붙여져서 만들어진 명사였다. 
  그런데 이 이탈리아어 ‘살라’ 자체는 이탈리아어의 많은 명사들처럼 라틴어 어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서방 게르만족의 방언인 프랑크어 명사 ‘sal’이 약 8 세기경에 ‘-a’를 덧붙이는 라틴어화를 거쳐 생긴 결과물이다. “하나의 방으로 된 거주 공간”을 의미하는 이 프랑크어 명사는 중세에 이미 프랑스어에 ‘sal(l)e’, 독일어에는 ‘Saal’, 스웨덴어에는 ‘sal’ 이라는 명사들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생각하면 ‘살롱’이라는 말은, 크기의 축소를 나타내는 접미사들만 있고 확대를 의미하는 접미사는 갖고 있지 않은 프랑스어와는 달리 ‘-one’라는 접미사를 갖고 있던 이탈리아어 덕분에 생겨난 어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실 혹은 응접실 즉 주택이나 가옥 내의 한 공간을 지칭하는 어휘 ‘살롱 salon’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몇 개의 구체적 의미로 나누어져 쓰였다. 전통 한옥 구조에서의 ‘사랑방’을 떠올리게 하는 그 일차적인 의미에 다른 함의가 덧붙여지게 된다. 이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만남으로써 온갖 형태의 관계들이 형성되며 다양한 활동들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파리-르부르제 우주 항공 국제 살롱’이나 ‘파리 국제 모터 살롱’ 등을 떠올릴 수 있다. 현대의 과학기술 단계나 소비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이러한 행사들 외에도, 살롱은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는 당대의 미술가들, 주로 화가들의 그림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전람회를 일컫기도 했다. 그리고 회화 작품에 대한 분석적 식견을 겸비한 프랑스의 문인 디드로는 그 전시회에 걸린 그림들을 평하는 자신의 미술평론 작업에 <1759년의 살롱전> 등의 이름을 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1세기의 몇몇 인터넷 채팅공간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살롱’이라 불리기도 하며 샌프란시스코에 거점을 둔 미국의 한 웹진은 salon.com 이라는 주소를 갖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살롱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서로 다른 이들 즉 복수의 개별자들의 회합이라는 성격일 것이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이 조건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대륙에 독특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을 낳게 되는데, 이른바 ‘문예살롱 salon littéraire’이라는 명칭으로 구별되기도 하는 그 ‘살롱’이다.
  어느 정도의 미모와 학식, 그리고 상당한 정도의 재기와 교양을 갖춘 명망가의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의 일정한 동의나 묵인아래 자신의 저택의 한 공간을 접객용으로 꾸며두고 당대의 명사나 문인 또는 이름 있는 세력가들들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곳을 하나의 사교 장소로, 적절한 다과 및 음식과 함께 제공함으로써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비록 사적이긴 하지만 자유로운 대화와 만남의 열린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중세 후기의 라틴 문화의 부흥기를 맞아 태동한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말이나 16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프랑스에도, 그 시대에 이탈리아 원정을 거듭하여 새로운 문물을 도입한 국왕 프랑수와 1 세 덕분에 곧바로 도입된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이탈리아어로 ‘살로네’라 불린 이 공간은 프랑스에서 처음에 ‘이탈리아식 살롱’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이내 ‘이탈리아식’이라는 사족을 떼어버려도 좋을 만큼 본격적인 사교 관행으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시작된 살롱은 남녀 간의 신분 벽을 넘어선 대화와 토론장이었으며 또한 문학공간으로서 문화와 지성의 산실이자 중개소와 같은 기능을 하였다. 특히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이 개장하고 운영하였으므로 살롱은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영역이 되어주었다. 거기에는 교양과 재능이 뛰어나고 특히 언어의 구사력이 좋은 예의바른 사람으로 간주되기만 하면 누구나 초대되었다. 남녀노소나 신분과 직위에 대해서는 특별히 까다로운 기준은 적용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모여서 함께 독서하고 토론했던 이 장소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면 ‘새로운 문학 공간을 고무하는 최초의 학교’이기도 하였다. 
  대체로 오후 2시 혹은 6시쯤에 시작하여 밤 10시까지 열린 이 ‘사교와 대화의 장’에서 사람들은 소설이나 희곡 작품을 읽고 감회를 나누면서 가볍게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였으며 때로는 음악 연주나 소규모의 공연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긴장되고 민감한 시기에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외국 도서나 금서로 지정된 책들과 그 필사본들이 이곳에서 교환 및 유포되기도 하였다. 특히 살롱의 유행이 정점에 달한 18세기 후반에는 파리에서만 거의 800개가 넘는 살롱이 운영되었으며 그곳에 약 2000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이른바 ‘철학자’를 자처하며 드나든 것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1608년 랑부이예 저택의 저 유명한 ‘푸른 방’을 필두로 시작한 살롱이지만 그 기원을 찾아보자면 멀리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5세기 아테네의 젊은 귀족들은 일종의 스포츠클럽 같은 공간에서 대화와 사교가 곁들여진 향연을 즐겼는데, 특히 아테네의 유명한 기녀 아스파지아의 집에서 열린 사교 모임에는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등이 드나들었다고 전해진다. 예술에 관해 그녀와 나눈 대화를 통해 복잡한 국사를 떠나 휴식을 취하고자 했던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지아의 수사학 및 철학 지식에 매료되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의 살롱문화의 정착에는 역사적으로 여성성의 발현과 고양이 그 밑받침이 되었다. 사회생활에서 여성에게 확고한 문화적 역할이 주어진 것은 기사적 전통의 중세에 와서일 것이다. 여성의 위상, 특히 십자군 원정에 출정한 남편을 대리하여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위임받게 된 귀부인의 위상은 11세기에 와서 서서히 높아졌다. 또한 기사 계급의 연애 풍속, 성모 마리아 숭배의 확산 등 중세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여성과 사랑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관찰된다. 이러한 변화는 트루바두르라 불리는 음유시인들의 연애시, 그리고 남프랑스의 이른바 ‘사랑의 궁정’라는 유희 양식에서 그리고 ‘궁정의 사랑’의 전통에서 두드러진다. 단순한 경애의 대상이기를 너머 구애행위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의 대상이자 주체인 여성은 이후의 시문학의 자극제이기도 하였으며 하나의 문화현상인 살롱의 장본인이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이탈리아에는 근대의 살롱과 흡사한 ‘무젠호프’가 있었다. 무젠호프는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탈리아 각 지역에서 활발하게 운영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곳에 출입했던 문학과 예술에 뛰어난 ‘재사’들 가운데는 교황 레오 10세도 있었는데, 그는 항상 ‘위대한 예술가는 인생의 스승이자 불안 가운데의 위안’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낳는데 일조하였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 ‘살롱 салон[salon]’은 프랑스어 ‘salon’을 음차한 단어이다. 프랑스어 ‘salon’은 ‘넓은 장소’, ‘큰 방’을 의미하는 라틴어 ‘salum’을 어원으로 하는 이탈리아어 ‘salone’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기본적으로는 ‘손님을 접대하는 방, 장소’를 의미하는 ‘객실’이나 ‘응접실’을 의미한다. 
서구에 비해 궁정, 귀족 문화의 발전이 매우 늦었던 러시아에서는 18세기 중엽까지 궁정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손님 접대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나 별도의 방, 즉 ‘응접실-салон’이라는 공간 자체의 개념이 부재한 것은 물론, ‘салон’이라는 단어 자체도 사용되지 않았다. 귀족들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고, 대화하는 장소를 ‘큰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괄적으로 진행하곤 하였다. 
  이러한 특별히 큰 장소에 대한 개념과 명칭은 서구화를 시작한 표트르 대제 시절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프랑스어 ‘salle’에서 차용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잘 зал[zal]’(hall)이다. 집에서 손님들의 접대와 의식을 위한 큰 방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잘’은 표트르 대제 초기 시절에는 손님의 접대와 주연을 위한 은밀한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문화의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수용과 귀족 문화의 정착 단계인 19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러시아에서는 손님들의 접대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특히 가구들이 배치가 된 방, 즉 응접실의 개념으로 부를 있는 공간들이 궁정과 귀족들의 저택에 등장하면서 ‘салон’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1830년대 중반까지도 러시아 사회에서는 ‘салон’과 ‘зал’의 개념은 정확히 구분되지 않았지만, 이후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접대하며 향응을 즐기는 장소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주로 무도회를 중심으로 손님들을 접대하는 장소를 ‘зал’, 특히 ‘танцевальный зал’로, 문학, 예술, 정치 등을 위한 모임이나 토론을 위해 손님들을 초대하여 접대하는 장소를 ‘салон’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세기 초반 러시아 귀족 사회의 일상에서 무도회와 살롱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지만, 무도회보다 살롱이 더욱 성행하면서 귀족들의 집에서 ‘танцевальный зал’은 집의 측면이나 별채로 이동되었고, 살롱이 건물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학, 예술 모임의 장소로서 살롱이 가지는 토포스는 19세기 초반에 두드러진 현상이었지만, 이미 18세기 말 무렵에 러시아에서는 살롱과 유사한 형태의 모임이 존재했었다. 당대 귀족이자 고위 관료들이었던 라주모프스키, 슈바로프, 베즈보로드코, 스트로가노프 등이 자신들의 집에서 문학과 예술, 그리고 당대의 정치 등에 대해 토론을 하였고, 이후 문학가이자 정치가였던 제르좌빈, 헴니체르, 삼보르스키, 무라비요프, 레비츠키, 보로비코프스키 등도 서로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문학, 정치, 음악, 건축 등의 다양한 분야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문학가들이 중심이 된 이러한 모임들은 19세기 초반에 적지 않게 활성화가 되었는데, 특히 1815-1818년까지 브르도프, 우바로프등의 집에서 ‘아르자마스’라는 이름으로 당대의 문인이었던 카람진, 주코프스키, 바튜쉬코프, 바젬스키, 푸시킨 등이 참석한 이 모임은 러시아 최초의 이른바 ‘문학살롱’, ‘문학서클’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 살롱이나 문학 서클들을 본격적인 살롱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서구의, 특히 프랑스적 살롱의 전통과 매우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살롱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살롱을 결성하고 이끌어가는 주인이 ‘살롱의 여제’라고 부르는 여자였는데 반해 러시아 문학 서클은 남성들의 모임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러시아 문학 서클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 손님을 초대해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살롱과 달리, 비정기적으로 가까운 친척들, 친구들 간의 우호관계를 다지는 모임이었다는 점이다.
  서구식 살롱과 유사한 러시아의 살롱은 1820-30년대에 여주인들이 개설한 살롱들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출현과 발전을 이루어나가게 된다. 프랑스 문화의 수용 과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토포스의 하나인 살롱의 출현에서 다슈코바 공작부인(1743-1810)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친구이자 동력자인 다슈코바 부인은 수많은 유럽 여행과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프랑스 방문을 통해 디드로를 비롯한 당대 프랑스의 예술가들과 철학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프랑스 계몽사상을 러시아로 들여오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와 유럽 문물 수입에 적극적인 활동을 한 다슈코바 부인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었던 살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프랑스식 살롱의 개념과 역할을 러시아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공작부인은 자신이 직접 살롱을 개설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이러한 활동은 19세기 초 러시아 귀족 부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러시아 살롱 개화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소피야 포노마료바 부인의 살롱, 푸시킨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골리치나 부인과, 지나이다 볼콘스카야 부인의 살롱, 카람진의 부인이었던 예카테리나 카람지나 부인의 살롱, 스미르노바 부인의 살롱, 1812년 나폴레옹 전투에서 공을 세운 유명한 러시아 장군 쿠투조프의 딸인 히트로보 부인과 그녀의 딸인 피켈몬 백작부인이 함께 운영한 살롱, 로스토프치나의 살롱 등이 당시 유행했던 살롱들이다. 당대의 유명한 문학가, 예술가, 사상가등이 거의 모두 이들 살롱에 출입하면서 활동할 만큼 살롱은 유행되었고, 살롱 문화는 20세기 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러시아 문화 발전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클로드 뒬롱은 그의 『서양의 여성사』에서 “글쓰기 이전에 말하기가 있었고 창작 이전에 대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곧 살롱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여성들의 섬세하고도 고상한 언어와 재치 있는 대화가 있는 이 문화적 공간은 우선, 현실 정치와 역사의 남성적 무대인 왕실과 조정에 대한 대안적 성격의 공간이었다. 프랑스 문화사 혹은 지성사의 한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게 될 이러한 살롱이 처음 시작된 것은 17세기 초 랑부이예 후작부인에 의해서이다.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아버지와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매력적인 검은 눈에 뛰어난 미모와 남다른 지성 그리고 예술적 재능까지 겸비한 랑부이예 후작부인은 푸른색이 감도는 벽지와 커튼의 응접실에 18 개의 큰 의자와 커다란 병풍을 비치하였다. 일주일에 1~2회 열린 그녀의 살롱에는 언제나 10~20 명의 명사들이 모여들었으며 그 중에는 17세기 프랑스 문학사의 페이지들을 차지하는 생테브르몽, 라로슈푸코, 보쉬에, 말레르브, 세비녜 부인, 라파이예트 부인, 코르네이유 등이 있었다. 토포스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아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크게 유행하게 될 살롱의 등장은 바로크 시대를 마감하면서 위대한 질서와 균형 그리고 섬세한 절제미를 완성해 낸 고전주의 시대의 도래를 예시하는 선구적 현상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또한 한편으로 살롱은 이 시대의 교양인들의 새로운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앙리 4세 시절 궁정의 거칠고도 남성적인 세계가 드러내 보이는 바로크적인 특성과는 다른 성격과 양식의 분위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즉 살롱은 더 이상 투박하고 전투적인 격론이 아닌, 고전주의적 교양과 품격을 갖춘 우아하고도 섬세한 여성이 이끄는 인문주의적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나누는 사랑과 시의 대화, 그리고 새로운 지식과 지성을 흡수하기에 어울리는 예절바르고도 깊이 있는 토론의 언어 등은 이러한 요구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살롱 문화의 번성은 그 무대를 궁정이라는 공식적 공간으로부터 개인의 저택 혹은 도시의 사적 공간으로 옮김으로써 가능한 현상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왕국’이었던 살롱에는 항상 지식인만 드나든 것은 아니었다. 정치가, 귀족, 성직자, 학자, 문인, 관리, 법률가, 상인, 학생, 심지어 군인과 건달 등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이 출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카페가 도시의 사랑방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신분의 벽을 허물고 근대적인 사상과 공공성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면 프랑스의 살롱은 특히 초기에는 귀족적 생활양식에 입각한 작은 공간을 통해 삶의 지혜와 여가를 일구어내는 공간이었으므로 어느 정도 그 귀족적 성격을 유지한 채 확산되었다. 
랑부이예 부인의 살롱은 1645년까지 전성기를 맞이하며 이후 1665년에 그녀는 사망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살롱의 모델은 도처에서 모방되었다. 파리의 곳곳 즉 루브르궁과 팔레 카르디날 주위에서, 그리고 마레 및 플라스 루아얄에서, 또 왕족과 영주들의 저택과 심지어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집에서도 살롱이 열렸다.
  가스케가 말한 것처럼 랑부이예 부인의 살롱은 국립 학술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이상으로 풍속을 순화하고 언어를 세련되게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동시대인들에게 예의바른 태도, 기사다운 정중함, 고상한 감정 등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말레르브에 의해 권위와 품격을 획득한 프랑스어가 부인의 살롱에서는 언어의 뉘앙스와 재치가 지나치게 강조된 결과 일종의 공허한 언어유희로 치닫는 경향도 없지 않았는데, 그 결과 유쾌했던 모임이 때로는 일종의 언변 교습소로 변질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이른바 ‘프레시오지테 ’로 지칭되는 그러한 특성은 특히 몰리에르의 희극 『우스꽝스런 여인들』에 그 소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라브뤼예르 또한 그의 『성격론』에서 프레시오지테를 “싱겁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잡담 ”이라며 비판하였다. 
  랑부이예 후작부인의 살롱 외에도 17세기의 유명한 살롱은 마드무아젤 드 스퀴데리의 그것이 있다. 위의 희극에서 몰리에르가 집중적으로 조롱한 스퀴데리와 그녀의 살롱의 언어는 허식과 무의미한 어구로 인해 과장되고 속물적인 상투어로 굳어질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의 사교계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어 약 150년 후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은 『스퀴데리 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남기기도 한다.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살롱은 귀족적 성격을 상당히 탈피함으로써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당연히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세기의 후반에 이르면 예컨대 레피나스 양, 조프랭 부인, 네케르 부인 등이 연 살롱에서는 더 이상 귀족 신분에 대한 존경이나 동경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의 평민계급의 계몽주의 사상가들 또는 외국에서 온 저명한 문인이나 명사들이 더 환영받는 분위기였다. 탕생 부인의 집에는 영국인 볼링브로크와 체스터필드가 출입했고 독일의 멜키오르 그림은 마담 데피네의 친구가 되었으며 장년 시절의 벤자민 프랭클린은 마담 엘베시우스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파리의 ‘뷔로 데스프리(bureau d'esprits 정신들의 사무실)’는 시대와 국경을 넘어 모든 유럽 살롱들의 좌표로 자리잡게 되며 볼테르의 지적처럼 “아름다움은 퇴색했으나 대신 지성의 여명을 밝혀주는 여성들이 지배한 모임”이 프랑스와 유럽의 살롱들이었다. 또 루소는 1742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 “여성들이 없이는 파리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말을 듣고서 살로니에르들(살롱 여인들)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된다. 
  1698년 문을 연 랑베르 부인의 살롱에서는 여주인과 출입자들이 전 세기의 프레시오지테와 그 경박함을 넘어서서 문학과 철학에 보다 집중하려 애쓴다. 특히 몽테스키외가 법과 국가의 이념과 관련된 대화와 토론을 주도하는가하면 화가 앙투안 바토는 회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표한다. 또 마치 고전주의 시대의 유명한 ‘신구논쟁’의 쟁점을 그대로 가져오기라도 한 듯, ‘옛것’ 보다 ‘오늘날의 것’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이 제기되는 등, 진보와 계몽의 문제가 상당한 수준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이처럼 18세기 프랑스 살롱의 여성들은 더 이상 ‘우스꽝스런 재녀들’이 아니었으며 그녀들의 관심은 소설이나 연극 등의 문예 중심의 화제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언어의 문학적 표현에 결코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은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는 지적이고 경쾌한 대화의 파트너였으며 백과전서파 등 당시의 계몽주의 투사들의 동반자가 되어 새로운 사상의 중개자 혹은 매개인 역할을 기꺼이 맡으려 들었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철학자들의 비판적이고도 반교권적인 사유들은 살롱에서 자유롭게 표현되고 또 살롱의 여주인들에게 흡수되었으며 이는 다른 출입객들 사이에서 재차 논의되고 전파되기도 하였다. 특히 영국의 새로운 사조와 발견들은 볼테르 같은 인물을 통해 가장 먼저 파리의 살롱으로 수입되고 여기에서 다시 전 유럽으로 역전파되는 양상도 발견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영국 숭배 현상은 살롱의 존재를 빼고는 설명되기 힘들 정도이다. 
  18세기 살롱들의 이러한 지적인 성격과 진보적 성향은 급기야 남자 주인이 운영하는 살롱을 등장시키게 된다. 독일의 부유한 실업가 폴 하인리히 디트리히 폰 홀바하는 프랑스로 귀화하여 폴 앙리 티리 돌바크가 되어, 디드로를 필두로 하는 극단적인 사상가들의 집회를 일주일에 두 차례 자신의 파리 저택에서 열었다. 『자연의 체계』를 저술하기도한 이 ‘고결한 무신론자’의 살롱은 여느 살롱과는 사뭇 달라서 하나의 서클과 유사한 공간, 혹은 그가 런던 유학 시절 열심히 드나들던 ‘카페’와 비슷한 장소로 기능하였다. 그곳은 주인의 표현대로 일종의 ‘철학관’인 셈이었다.
  위에 언급된 대표적인 여성 살롱들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소수 문화를 형성하는 듯 보이는 돌바크의 살롱과 엘베시우스의 것 등 몇몇 남성들의 살롱은 혁명 전야 프랑스의 지적, 정치적 긴장과 그 사상적 과감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살롱 문화의 고유한 여성성은 혁명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유지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마담 드 스탈의 살롱이다. 19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프랑스 여성문인 스탈 부인은 재기 넘치는 감각과 뛰어난 통찰력, 그리고 자유분방한 정신을 가진 ‘프티트 프레시외즈 (귀여운 재녀)’로서 주위의 뭇 남성과의 연애 편력을 즐겼지만 황제 나폴레옹과는 극단적 대립으로 일관하였다. 황제와의 적대관계로 인해 독일로 한 때 망명하였던 그녀는 돌아와서 예전에 열던 살롱을 속개하였다. 그녀는 자닌의 살롱에서 유럽의 명사들과 어울렸는데, 파리에 이틀을 머문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하루를 그녀의 살롱에서 보냈으며 후에 외무장관이 된 샤토브리앙도 그녀의 살롱을 찾았다. 
  19세기의 프랑스 살롱은 전 시대처럼 번성하지는 않지만 왕정과 공화정이 번갈아드는 사회적 격변을 따라가며 계속 그 전통을 유지하게 된다. 특히 샤를 노디에가 파리 시내의 아스날 도서관의 관장으로 취임하면서 개설한 작가들의 살롱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어서 프랑스 낭만주의시대의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든 것으로 기록된다. 거기에는 빅토르 위고, 라마르틴, 비니, 뮈세, 발자크, 알렉상드르 뒤마 등의 소설가와 시인 뿐만 아니라 음악가 리스트 그리고 화가 들라크루아도 함께 모였다.
  그러나 몇몇 살롱들은 귀족과 명사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살롱의 사교장으로서의 전통과 그 귀족적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살롱들은 부르주아들의 선망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그러한 풍속도를 묘사하고 있는데, 영감의 딸 델핀의 경우가 그러하다. 파리의 생 제르르맹 포부르에 있는 보세앙 자작부인이 여는 살롱에는 귀족들만이 초대되는데 델핀은 그곳에 드나들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부인 라스티냑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초대받기에 이른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파리에서 살롱은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특히 1870년대 이후 제3 공화정의 수립과 더불어 시민사회의 공공성이 공식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주어지면서 살롱이라는 엘리트주의적인 공간에의 요구 자체가 점차로 사라지는 추세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19세기 말과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마틸드 대공부인, 에드메 들라로슈푸코, 마리 로르 드 누아이유 등의 여성들이 살롱을 열어,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예컨대 마르셀 프루스트, 폴 부르제, 쥘 르메트르 또는 모파상 등의 작가들은 그러한 문학 서클에 모여 작품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고 또 영감을 받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살롱은 과거의 절대주의 구체제나 왕정 시대에 그것이 담당했던 사회적이고도 문화사적인 역할들을 그대로 다하지는 않게 된다.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공화국의 광장이 열린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관심을 갖는 주제나 문제들에 대해 듣거나 말하기 위해 특정하게 보호되고 허락된 공간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살롱은 결투, 무도회와 더불어 19세기 초반 러시아 문화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세 가지 문화 토포스는 서구, 특히 프랑스 문화로부터 직접적으로 수용되어 과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단기간 내에 러시아에 정착되어 성장했다는 점과 19세기 초반 1820-30년대 러시아 귀족 문화 형성에 근본적인 토대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세 가지 토포스가 급속도록 발전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이 토포스들이 귀족을 귀족답게 만들어주는, 귀족들만이 전유할 수 있는 차별화된 독특한 성격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토포스들이 귀족 문화 형성 과정과 그 결과에서 드러난 차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투는 귀족 자신들을 일반 민중과 구별시켜주는 정신적 가치, 즉 ‘귀족적 명예’의 표출을 위한 행동의 양식이었고, 무도회는 귀족 자신들만의 소속감과 일체감을 높이면서 출세의 도구를 위한 ‘귀족들의 유흥거리’의 성격을 지닌다. 
  반면, 살롱은 당시 니콜라이 1세 시기에 억눌러져 있었던 귀족들의 정신적인 욕구, 즉 문학과 예술, 사상, 정치 등의 표현과 논쟁의 자유를 분출시키고자 한 토포스라 할 수 있다. 특히, 결투와 무도회와는 달리 살롱의 토포스는 단순히 그 시간과 그 장소의 행위에 소비되는 일회성의 성격에서 벗어나, 살롱을 통해 문학과 예술, 정치적 사상 등의 직접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다른 두 토포스와 매우 큰 차별점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살롱의 토대 위에서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예술, 철학 사상, 그리고 정치의식들이 성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생긴다. 
  살롱은 바로 이러한 귀족들의 정신문화적인 욕구의 분출 장소로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즉, 살롱 문화는 당시 귀족들의 지적, 문화적 교류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동시에 미적 취향과 사상들을 형성시키면서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살롱에서는 문학과 예술, 정치와 역사에 대한 담화가 활발히 오가는 한편, 귀족의 필수소양의 하나였던 독서와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살롱을 문학적 행위와 그에 대한 담론의 장으로 만들게 되었다. 귀족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욕구를 보다 구체적이고 전문적으로 표출하길 원했고, 자연스레 그들은 유명한 작가, 음악가, 미술가, 사상가 등을 초대하여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감상, 토론하면서 지적 수준을 높여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귀족들의 일방적인 전유물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살롱으로 초대된 작가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고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당대 문학과 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의 살롱은 앞서 여러 번 언급되었듯이 프랑스 살롱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태동되었고, 그로 인해 초기의 러시아 살롱은 프랑스 살롱의 일반적인 특징들 즉, 장소, 모이는 사람들, 살롱 주인의 역할, 예절, 대화 주제, 유희거리 등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살롱은 단순히 프랑스의 살롱을 차용해서 모방한 것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문화의 특수성, 특히 당시 역사,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독특하게 발전, 진화되어 러시아만의 고유한 토포스를 획득한다. 
  러시아 살롱이 프랑스와 차별되는 것 중의 하나는 철저히 귀족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잡계급 출신의 문학계 인사와 상류층의 귀족 문사들이 한데 섞인 살롱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귀족 출신 작가 오도예프스키는 자신의 집에서 개최한 문학 살롱에서 두 계층의 인사들을 연합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으나 이를 꺼려한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바 있다. 이것은 시민 계급 출신의 살롱 여주인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계층 간의 거리가 좁아진 계기가 되었던 18세기 프랑스 살롱과는 달리 주로 상류층과 궁정 인사들의 근거지가 된 러시아 살롱의 하나의 특징으로 간주 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살롱만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살롱에서 문학이 가장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19세기 러시아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 살롱이 문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당국의 검열로 인해 출판과 발표가 힘들었던 작품들을 작가들이 살롱에서 직접 낭독,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그리보예도프의 『지혜의 슬픔』이 검열로 발표가 되지 않자, 작가는 골로치나 부인의 살롱에서 이 작품을 낭독하여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지혜의 슬픔』은 다시 허가를 받게 되어 상연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살롱 문화 역시 여주인의 살롱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1820-30년대 러시아, 특히 당시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에는 여주인들이 운영하는 살롱이 등장하였고, 이들 살롱을 통해 당대의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드나들면서 러시아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살롱의 여주인들은 대체적으로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우선은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하여 살롱을 드나들던 문인들의 연모의 대상이었다는 점, 외모만큼이나 지적인 수준이 뛰어나 여러 개의 외국어 구사는 물론, 문학과 예술에 깊은 조예를 가진 여성들이라는 점, 당대 사회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은 대담한 여성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대표적인 살롱은 골리치나 부인의 살롱, 볼콘스카야 부인의 살롱, 카람지나 부인의 살롱 등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살롱은 지나이다 볼콘스카야(1789-1862)의 살롱이었다. 어릴 적부터 문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지닌 그녀는 수차례 런던과 파리를 방문하면서 살롱 문화를 접하였고, 1817년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 화려하게 데뷔를 한 후 1822년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살롱을 열어 당대 문인들과 예술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다.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과 작곡에도 재능을 발휘한 그녀는 직접 살롱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여 수많은 남성들을 매혹시켰다. 

  개방적이고 낙천적인 예술 애호가로서 푸시킨, 바라트인스키, 키례예프스키 등의 문인들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기도 한 그녀를 푸시킨은 ‘뮤즈들의 여왕’이라고 칭송하였고, 바젬스키는 이 살롱을 ‘음악의 요정들이 사는 마법의 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화려한 예술적 취향 못지않게 그녀는 정치적 사건을 예리하게 비판하기도 했는데, 특히 니콜라이 1세와 러시아 정교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으로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 운동 이후 주모자들과의 관계를 의심한 정부의 내사와 박해로 인해 1829년 러시아를 떠나 로마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도 살롱을 열기도 하였다. 
  당대 살롱 중 가장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고, 문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은 골리치나 공작부인의 살롱이었다. 이 살롱에는 오를로프, 투르게네프 형제, 쥬코프스키, 바튜슈코프, 코즐로프, 뱌젬스키 등이 드나들면서 러시아의 당면한 정치문제를 심각하게 토의했으며, 그 당시 대두되었던 애국주의, 자유주의, 헌법, 입헌 등의 새로운 개념에 대해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토론하였다. 특히, 대단히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던 골리치나 부인은 푸시킨과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
  1817년 가을, 리쩨이를 갓 졸업한 18세의 푸슈킨은 골리치나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기 시작하였고 약 3개월간 무려 19살 연상의 부인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을 불태웠다. 이 흔적은 시인이 같은 해에 쓴 전형적인 연시 『낯선 이국을 사랑하는 애송이』에 담겨 있다. 이 시에서 낯선 땅에 대한 낭만적 몽상과 열정적인 삶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찬 시적 화자는 조국과 조국의 여성들에 대한 험담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시의 말미에서 ‘조국을 증오하다시피 했던 나’는 어제 골리치나 부인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조국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특히 푸시킨은 골리치나 부인에게 헌정한 송시 『자유』를 발표해 커다란 정치적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는 필사본 형태로 낙후된 러시아 정치의 일대 변혁을 갈망하는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갔고 이로 인해 푸시킨은 남방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카람진의 부인이었던 카람지나 부인의 살롱은 일명 ‘붉은 거실’이라는 이름으로 1830년대에 가장 유명했던 살롱 중의 하나였다. 남편인 카람진을 따라 자주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일찍부터 살롱 문화를 접했던 카람지나 부인은 남편 사후(1826년) 살롱을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양식을 모방했지만, 독자적인 모델로 발전시켜 나갔고, 프랑스어를 주로 쓰던 다른 살롱과는 달리 유일하게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카드놀이나 유희를 즐기지 않았고, 문학이 주 관심사였던 당대의 유일한 살롱이었다. 또한 외국에서 유입되는 진보적 사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중요 관심사가 됨에 따라 정치색이 강한 살롱이 되었다. 따라서 그녀의 살롱에는 푸시킨, 투르게네프 등 당대의 문학가들이 주로 드나들었고, 바라트인스키는 그녀의 살롱을 살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완벽하게 체현한 진정한 살롱으로 평가했다. 
  1820-3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살롱은 19세기 중반 1850년대 말이 되면서 점차 쇠퇴해졌다. 이 시기 살롱과 문학 서클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이유는 다양한 형태의 잡지들의 등장이 그 첫 번째 원인이다. 19세기 초반에도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이 중심이 된 문학잡지들이 존재하였지만, 당국의 검열 등에 의해 대부분 그 수명이 길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따라서 당대의 문인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자신들의 작품들을 살롱과 문학 서클을 통해서 발표하고 평가를 받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엄혹했던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시기(1825-1855)를 지나 다소 유화적인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 시기(1855-1881)에 접어들면서 많은 잡지들이 재창간, 혹은 창간되면서 문인들은 잡지를 통해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게 됨으로서 자연히 살롱에 대한 필요성이 감소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문학가들은 살롱과 서클에서 독자들을 만나 직접 소통하는 대신, 혼자 외떨어져 창작에 전념하는 전업 작가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 공간은 점차 살롱에서 잡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특히 1860년 농노해방령 이후 러시아 사회는 개혁과 개방에 대한 강렬한 욕구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와 혁명적 인민주의적 사상이 만개되었고, 이러한 욕구는 교육과 출판, 잡지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특히, 당시에 발간된 잡지들로서는 벨린스키가 이끌었던 <조국수기>(1839-67), 네크라소프, 체르니세프스키, 도블로류도프 등이 이끌었던 <동시대인>(1836-1866), 피사레프, 자이체프 등이 중심이 되었던 <러시아 말>(1859-1866), 1820년에 폐간되었다가 다시 창간된 당시 가장 유명했던 자유주의적 성향의 <유럽 통보>(1866-1918), 카트코프의 <러시아 통보>(1861-1906)등이 대표적인 잡지들인데, 이들 잡지는 당대의 거의 모든 문인과 사상가들이 참여하면서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사상들을 쏟아 내면서 19세기 초반 살롱이 담당하던 기능을 대신하였다. 
  19세기 중반에 살롱이 쇠퇴한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19세기 초반의 러시아 ‘귀족들의 시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살롱이 귀족 문화의 전유물적인 토포스로 사료된다면 ‘귀족들의 시기’인 1820-30년대를 절정기로 볼 수 있고, 귀족 문화의 시기가 끝나가는 1840-50년대는 자연히 살롱의 역할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 ‘잡계급’ 출신이 등장하면서 러시아 문학, 예술은 잡계급의 시대가 되고, 살롱 역시 그들이 중심이 되는 ‘잡계급의 살롱’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살롱들은 이전의 여주인이 이끌었던 살롱들과는 달리 잡계급 출신 지식인들이 살롱을 이끌었으며, 주로 문학 단체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살롱들은 이전의 살롱들에 비해 그 활동성이 미약하긴 했지만 19세기 후반까지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하였고, 주목할 만 한 점은 주로 혁명가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정치, 사회사상 등을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정치적 모임의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정치적 색채의 살롱들은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의 ‘은세기’ 시대에 와서 문학, 예술적 살롱으로 부활된다. 철학적 탐색, 정신적 영역의 탐구, 종교적 가치, 문학,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 다양한 관심과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내었던 은세기 문학은 살롱 문화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폴론스키, 슬루체브스키가 중심이 되어 은세기 문학의 모태 역할을 한 문학 클럽 <금요일>, 메레쥐코프스키와 기피우스 부부의 아파트의 모임, 바츠 이바노프를 중심으로 블록, 벨르이, 솔료구프, 쿠즈민 등의 상징주의자들의 모임이었던 <첨탑>등의 살롱에서는 문학과 예술, 종교, 사상 등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과 탐색, 시와 희곡 작품 발표 등을 통해 20세기 초 러시아 문화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문화에서 살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살롱 문화 자체를 과거 귀족 문화의 유산으로 보는 혁명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자연히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혁명을 수용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망명한 문인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살롱은 해외에서 그 명맥을 유지한다. 지나이다 기피우스가 파리에서 만든 망명 문학가 모임이 <녹색 램프>(1927-1939)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 ‘salon’은 ‘넓은 장소’, ‘큰 방’을 의미하는 라틴어 ‘salum’을 어원으로 하는 이탈리아어 ‘salone’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기본적으로는 ‘손님을 접대하는 방, 장소’를 의미하는 ‘객실’이나 ‘응접실’을 의미한다. 러시아어 ‘салон’은 프랑스어 ‘salon’을 음차한 단어이며, 프랑스에서 유래된 살롱의 이러한 의미들은 러시아어에서도 거의 동일한 의미들로 통용되었다. 
  프랑스 살롱문화의 토포스는 무엇보다도 여성성의 발현과 고양, 그리고 그 여성성의 섬세한 발현으로 인한 인문, 예술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17세기부터 프랑스의 귀족 부인들이 자신들의 대저택 응접실에 문학, 음악, 미술 등의 문화계의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하여 정기적 사교 모임을 가지는 것을 계기로 하여 살롱은 남녀 간의 신분 벽을 넘어선 대화와 토론장이었으며 또한 문학공간으로서 문화와 지성의 산실이자 중개소와 같은 기능을 하였는데, 특히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이 개장하고 운영하였으므로 살롱은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영역이 되어주었다. 
  러시아에서 살롱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프랑스 문물의 가장 직접적이며 중요한 영향을 받은 토포스 중의 하나이다. 프랑스 살롱 유행이 정점에 달한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수입된 러시아의 살롱은 프랑스 살롱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태동되었고, 그로 인해 초기의 러시아 살롱은 프랑스 살롱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모방하면서 프랑스의 최신 유행들이 흡수되는 중요한 통로의 역할을 한다. 
  초기에 러시아 살롱은 여성이 중심이 된 프랑스식 살롱보다는 남성들, 당대의 고위관료들이나 귀족들의 문학, 정치 담소의 장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러시아에서도 여주인이 중심이 된 살롱들이 번성하였는데, 프랑스식 살롱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19세기 초반에 생성되기 시작한 러시아 귀족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에 있다. 살롱 문화는 당시 귀족들의 지적, 문화적 교류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었고 예술 영역의 지식을 전달해주는 동시에 미적 취향과 사상들을 형성시키면서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즉, 서유럽 귀족들과 같은 고상한 자신들만의 모임, 서클을 흉내내면서 귀족을 귀족답게 만드는 정신문화의 토포스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의 살롱은 당국의 검열 등의 이유로 활동에 제한을 받았던 문학 작가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되면서 19세기 러시아 황금시기 문학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살롱이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여성 중심의 살롱문화에서 남성이 주도가 되는 살롱이 등장하면서 문학, 예술에 대한 담론 보다는 프랑스 혁명 전야의 지적, 정치적 긴장과 그 사상적 과감성을 표출한 토포스로 전환된 것처럼 러시아의 살롱도 19세기 중, 후반에 접어들면서 혁명가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정치, 사회사상 등을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정치적 모임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매우 동질적인 토포스를 보여주고 있다. 
연관 토포스 결투; 계몽; 귀족; 나폴레옹; 무도회; 사교계; 팜므파탈;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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