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소시민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소시민
토포스명(프랑스) petit bourgeois
토포스명(러시아) мещанство
정의 1. 일정한 물질적 부에 기초하여 현존 질서에 대한 순응적 태도가 강할수록 소시민에 가까워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소시민’을 뜻하는 프랑스어는 ‘쁘띠 부르주아 petit bourgeois’이다. 그러나 이 말은 주어와 술어를 바꾸어 말할 필요가 있다. ‘쁘띠 부르주아’에 해당하는 한국어를 찾자면 ‘소시민’이 그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이 두 진술의 차이를 굳이 들추는 것은 쁘띠 부르주아라는 개념의 서양사적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쁘띠 부르주아는 서구의 특히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역사의 한 단계 혹은 국면에서 생겨난 용어이다. 우리가 한국어로 ‘소시민’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 담는 정의적 의미와 울림이 프랑스어로 쁘띠 부르주아 또는 ‘쁘띠뜨 부르주아지 petite bourgeoisie’라고 말할 때 그대로 거기에 담기는 것은 아니다. 
  시민 혹은 시민계급 즉 부르주아의 하위 개념으로 들어선 ‘쁘띠 부르주아’ 는 19 세기 서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토포스인데, 그것에 대한 언급은 ‘쁘띠’가 붙기 전의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아지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부르주아’라는 말의 어원을 찾기 위해서 굳이 고대 라틴어로까지 거슬러 오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것은 ‘부르 bourg’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일차적인 의미를 갖는다. 
  시골이나 농지가 아닌 큰 마을 혹은 큰 장이 서는 장터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일찍이 ‘도성’이라는 의미를 갖기도 했던 ‘부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의 봉건 경제 제도하의 생활 지형을 간단히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봉건 영주의 일가가 거주하는 성의 외곽에 형성되어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부르’는 농민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일하는 농촌 또는 시골과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성에 거주하는 부르주아들은 평민의 신분으로서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차츰 그 규모와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주축 세력으로서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전통적 신분 특권을 철폐하고 시민 사회를 성립시키기에 이른다.
  이처럼 사회의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신분 없는 평등 사회를 인류사에 가져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던 프랑스 부르주아 계층은 그러나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 역사 정치적 성격에 변화를 겪게 된다.  
  17세기부터 영국을 시발점으로 진행된 산업혁명의 여파는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결과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이르러 전통적인 농업 중심 국가인 프랑스에 상공업과 초보적 형태의 금융업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맞물려 약진한 프랑스 상공인 계층은 점점 더 부를 축적하기에 이르고 그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임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고용하는 경제적 시스템을 정착시키기에 이른다. 인간의 노동을 구매하여 생산에 활용하는 이른바 ‘자본’의 존재가 프랑스에도 들어서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부르주아 평민 계층의 일부는 이러한 산업 환경의 변화를 적절히 활용하여 막대한 재화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귀족이라는 정치적 상위 계급이 없어진 시민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는 새로운 상층 계급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러한 상층 부르주아지 혹은 대 부르주아지 즉 그랑드 부르주아지에 속하지 못한 대부분의 평민 계층은 신분 상승을 꿈꾸면서도 그 열망을 이루지 못한 채 공동체의 중간계층으로 남게 된다. 서양 경제사는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계층 분화를 대체로 네 그룹으로 나누어 설명해왔다. 즉, 상층 부르주아지, 대 부르주아지, 중산 부르주아지 그리고 소 부르주아지가 그것들이다.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물결이 불러온 이러한 상공인 계급의 분화는 그 계급의 역사, 정치적 성격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온다. 애초에 평등 사회를 구축하는 진보적 세력으로 기능했던 부르주아들은 그 진보적 성격을 금새 잃게 되고 그들 내부의 경제적 투쟁에 함몰한 나머지 어느새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보수화 과정을 세계사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예 또한 프랑스의 19세기이다. 나폴레옹의 몰락과 왕당파의 복귀에 이은 1815년의 왕정복고 그리고 1830년 입헌 군주제의 수립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미 시민계급은 대혁명 당시의 정치적으로 참신한 진보적 성격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지켜내는 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행태는 19세기 중반, 1948년 2월 혁명과 1952년 제 2제정의 수립 과정에서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더 이상 역사의 바퀴를 앞으로 굴려 내는 진보적 세력이 아니었다. 화폐가 모든 것을 매개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힘없는 작은 톱니바퀴들이었다. 
  이 와중에서 상층 부르주아지와 대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과거에 타도해 마지않았던 귀족의 모습과 매우 닮아 갔다. 그들은 밤에는 살롱을 비롯한 고급 사교계를 드나들면서, 살아남은 몇몇 귀족 출신의 인사들과 우아한 교양과 품격을 나누었으며 낮에는 대도시로 몰려온 농촌 출신의 근로자들과 도시 빈민을 싼 값에 고용하여 자신들의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거나 주식 시장과 은행가를 주름잡으며 자신들의 부를 재생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다. 파리 시민의 절반 이상은 이들의 삶과 행태를 곁눈질하면서 부러워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주위에 눈에 띠는 도시 빈민과 공장 근로자의 신세로 전락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그들의 생업은 주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이거나 그 때까지 남아있던 가내수공업, 또는 각종 중개업으로 이윤을 취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수준이었다. 그 중 몇몇은 상층 부르주아지 또는 대 부르주아지가 설립한 회사에 고용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전반부터 양산되기 시작한 이러한 중간 계층이 ‘소시민’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지칭은 오늘날에 와서는 그리 많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일정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갖는 하나의 토포스로 남아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의 소시민이라는 표현은 12~13세기 도시를 의미하는 폴란드어 친족어 ‘메스토 место’의 거주자인 ‘메샤닌 мѣщанинъ’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모스크바 루시 시절에는 하위직급 도시민 즉, 소상인, 수공업자, 날품팔이를 이따금 ‘메샤닌 мещане’이라고 일컬었으나, 이와 더불어 내성(內城) 밖 ‘파사드 주민 посадские’이라는 보다 확장된 명칭도 있었다. 
  1775년에 관련 칙령 공포 후 ‘소유한 자본이 일정 금액보다 적어서 상인 집단에 등록되지 못한 도시 거주민을 ‘메샤닌’이라 칭했고, 1785년의 이른바 도시조례에서는 제3신분을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을 ‘메샤닌’이라 일컫고 있다. 그럼으로써 ‘파사드 주민’이라는 명칭은 상류층, 상인층, 동업조합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도시형 생업과 수공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도시 주민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때 소시민(달리 말해, 도시서민)은 상인이나 동업조합인과는 달리 좁은 의미에서의 신분이며, ‘메샨스트보 мещанство’ 즉, 소시민 집단에의 소속관계는 상속되는 한편 어떤 규칙을 준수한다는 조건이 달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러한 소시민층은 이전의 납세(인두세) 신분을 이어가는바, 그것은 이들의 법적 지위가 갖는 일련의 특징과 관련된다. (스테파노프, <소시민층> 참조)
  그러면 이들 소시민층의 신분상 변화를 간략히 개괄해보자. 1866년 우선적으로 유럽지역 러시아의 소시민층이 신분제적 조세의 성격을 띤 인두세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들에 대한 다른 신분제적 제약들은 1904~1906년에 가서야 폐지된다. 그 기간 동안 법적으로 재산권의 주체임을 인정받는 소시민 단체가 각지에서 형성되었고, 위신을 손상시킨 구성원을 제명시키는 등의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다 20세기 초 들어서 해당 단체에 등록하는 방법으로 그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하위직급 도시민 신분을 가리키는 ‘메샤닌’이라는 표현이 러시아 사회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일정한 사회적 세력으로 성장한 중간계층으로서 소시민이 보여준 기회주의적 행태와 기본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표현에는 사회적 소속과는 상관없이 협소한 사적소유제적 관심사와 한정된 정신적 시야를 가진 사람 즉, ‘속물’이라는 의미가 부가된다. 1930년대 러시아어 사전은 그러한 맥락에서 ‘메샤닌’을 ‘혁명 전 러시아에서 상인보다 낮은 특수 신분을 형성하며 주로 도시의 소부르주아에 속한 인물에 대한 공식적인 명칭’이라고 하는 한편, ‘저속하고 제한된 소유제적 관심사와 협소한 이념적 사회적인 시야를 가진 사람’(『우샤코프 사전』)이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정의되는 소시민이라는 표현에는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중간계층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간의 특정 속성과 그에 대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전반의 부정적 인식이 깊이 내포되어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산업화 과정을 진행 중인 신흥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 구성을 생각할 때, ‘소시민’이라는 지칭 자체는 이미 일정한 사회-문화적 지시를 함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위에서도 언급된 바, 그들은 아래로는 하층 근로 계급과 도시 빈민 혹은 서민층, 그리고 위로는 잔존 귀족들과 상층 부르주아지, 이 둘 사이에 낀 ‘중간’ 계급으로서의 성격을 결코 버릴 수 없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 ‘쁘띠 부르주아’라는 말에는 어느새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의미가 덧붙게 된다. 거기에는 특히 소시민 계층들이 그들의 사유와 생활 속에서 노정하는 일정한 ‘범용함’이나 ‘속스러움’에 대한 비난이 담겨져 있다.
  ‘인간성의 어떤 숭고한 고양이나 아름다움을 향한 예술적 지향 또는 상상력의 발현 같은 것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고 그저 눈앞의 이해에 함몰된 옹졸한 경제인’으로서의 소시민 혹은 소시민성을 경멸의 눈길로 바라본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를 언급하자면 단연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일 것이다. 
  플로베르의 대표작 『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남편 샤를르를 비롯하여 주인공 엠마를 둘러싼 남성들의 행태를 보면 ‘소시민’이라는 명확한 지칭은 딱히 없지만 작가가 어떤 눈으로 당대의 몰개성적 인간 군상을 바라보고 있는가가 충분히 느껴질 정도이다. 
  엠마 보바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숨 막히는 소시민적 일상성과 범용함에 목 졸린 희생자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녀는 적어도, 생래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인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그녀의 낭만성으로 인해 파멸한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과 시선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는 저 너머 어딘가를 늘 갈망하고 있었으며 입술은 늘 마치 “지금, 여기, 이렇게는 아냐...”라고 중얼거리는 듯 했다.
  시인 보들레르가 추구한 낭만주의는 보바리 부인의 소녀적 동경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때로는 공격적이었다. 그의 시집 『악의 꽃』과 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의 많은 구절들이, 소시민의 토포스를 염두에 두고 다시 읽을 때, 훨씬 더 선명한 환기력을 갖는다. 
  우선 그는 『악의 꽃』 맨 앞의 <서시>에서 “위선의 독자여!”라고 외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파리의 우울』에 실린 산문시 <군중>의 첫 문장, “군중 속에 파묻혀 미역 감을 수 있는 재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에서의 그 군중은 독일의 천재 평론가 발터 벤야민 식으로 읽자면 틀림없이 화폐경제의 그림자들인 쁘띠 부르주아들의 무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자본주의 전성기의 한 서정시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러한 입장에 서면 『악의 꽃』에 나오는 “네게 내 독액을 주사 놓고 싶어”라는 절규와 같은 일갈이 과연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 짐작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여러 갈래로 읽을 수 있겠으나 시인의 공격성은 아마도 시 없는 소시민적 세계관의 그 지루하고도 무미건조한 맹목성과 물질성을 표적으로 삼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인이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추구하기도 했던 ‘댄디 dandy’의 개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보들레르의 ‘당디슴 dandysme’이 내세우고자 했던 것은 것 멋을 추구하는 그 허영기 안에는 적어도 어떤 일말의 영웅주의가 남아있다는 사실일 수 있다. 물론 자칫하면 귀족적 정신주의 혹은 정신적 귀족주의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말이다. 댄디의 경박한 탐미주의가 분명한 한계를 갖기는 하지만 적어도 범용한 일상에 그저 안전히 머물 수 있기를 염원할 뿐 일체의 열망이나 고양 혹은 초월에의 의지를 스스로에게 금하는 것을 생활의 신조로 삼은 듯한 소시민들의 속물성을 향해 던지는 한 개의 아픈 돌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발자크는 부르주아지 혹은 쁘띠 부르주아지를 향해 위의 플로베르와 보들레르가 보낸 것과 같은 시선을 보내지는 않는 듯하다. 그 이유를 우선 발자크가 19세기 전반기만을 살았던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1850년에 사망한 이 소설가가 살았던 시기는 대체로 왕정복고기와 입헌왕조기에 해당했으며 이때만 하더라도 부르주아 계급은 그 역사-정치적 진보성과 건강함을 완전히 소진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당위론 상의 얘기이겠지만 시민 계급은 그들의 윗세대가 쟁취했던 공화정을 되찾아 올 의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발자크가 부르주아 또는 쁘띠부르주아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인간희극』에 등장하는 2000명의 인물들 중 농민, 도시 빈민, 몰락 귀족, 상층 부르주아를 제외한 대략 절반 가까이가 계층상으로는 쁘띠부르주아지에 속할 것인바 소설가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주안점을 둔 것은 자신의 인물들의 모든 열망, 회한, 허영, 야심을,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선택들과 말과 행동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개하는 ‘돈’의 작용과 그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발자크는 생전에 출간하지는 못했지만 『소시민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남긴 바 있는데 평론가들은 대체로 미완의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후에 출판될 때에는 『파리 생활 정경』 편 속으로 분류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마리 잔 브리지트 튈리에라는 이름의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당시 파리의 중간 계급들의 생활과 인간관계의 한 단면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문학사는 소설가 에밀 졸라의 소설 세계 『루공 마카르 총서』를 통해서 프랑스 사회 각 계층 군상들의 야만성과 위선, 나아가서 그 폭력성과 희생을 그려 보인다. 
  『목로주점』, 『제르미날』 그리고 『대지』 와 같은 소설에서 주로 농민과 노동자들의 거친 삶과 투쟁의 과정을 기록한 졸라는 『쟁탈전』, 『돈』 또는 『한 페이지의 사랑』 등의 작품에서는 제 2제정기의 파리에서 부르주아지 혹은 쁘띠 부르주아지가 벌이는 이전투구와 음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군상들의 위선과 악덕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상층부르주아지와 마찬가지로 소시민 계층에서도 대혁명 전후의 그 역사적 진보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됨은 물론이다. 그 세계에서 ‘소시민’들은 그저, 무르익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탐욕의 기계를 구성하는 작은 톱니바퀴일 뿐이다. 이처럼 형성된 19세기 프랑스의 ‘소시민’ 토포스는 그 부정적 성격을 20 세기에 들어와서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메샤닌’이라는 명칭은 기본적으로 도시의 소시민 단체에 등록된 사람으로, 수공업자, 소상인 혹은 건물소유자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들은 대개 과거의 농민 즉, 해방농노 혹은 몸값을 내고 풀려난 자, 군복무를 마친 군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80)에는 도시에서 온 순례자들이 신분상 소시민이냐는 조시마 장로의 물음에 자신들은 도시 사람이고 신분상 농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들은 마차꾼들로 마차와 말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가축 매매업에 종사하는 소시민들은 농민들처럼 농사를 짓기도 했다. 이처럼 도시에 사는 중간층이 모두 소시민 집단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소시민층은 상인이 대다수인 자본가와도 구분된다. 자본가들은 비록 일련의 귀족 칭호나 특권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몇몇 명예 칭호의 형태로 보상을 받았다. 1832년 도입된 명예 칭호 중 일부는 상인뿐만 아니라, 비귀족 학자나 의사들에게도 특수한 개인적 업적을 이유로 수여되었고, 명예시민은 귀족과 유사한 일련의 혜택과 특권을 얻었다. 이와는 달리 몰락한 상인들은 소시민 신분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메샨스트보’라는 말은 제정 러시아의 도시 소시민 집단과 연관되며, 더 나아가 사회적 범주로서 소시민 집단에 내재하는 심리와 행위의 특수성, 평가적 관념의 총체 즉, 소시민성 혹은 속물성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19~20세기 러시아적 전통 속에서 소시민 계층의 중립적 정의를 욕설과 구분해내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중간계급 구성원’과 ‘정신세계가 빈곤한 주민’이라는 두 개념이 러시아 문화의 신화체계 속에서 하나로 합류했다는 지적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보임, <소시민성, 중간계급>, 참조) 
  소시민층과 인텔리겐치아는 현세적인 ‘세태’와 영속적 것이 내포된 ‘존재’를 체현하는 문화적인 두 대척자로 간주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적 출신과 역사적 역할이라는 면에서 ‘쌍둥이 형제’와도 같은 이 두 사회적 그룹은 표트르 대제(1689~1725)의 개혁 이후 어느 정도 조짐이 드러났고, 표트르 대제 이전 러시아의 봉건 귀족적 구조와 대조되어 커다란 운동력을 얻었다. 인텔리겐치아의 이상이 가난과 결합한 정신의 고귀함이라고 할 때, 인텔리겐치아는 민중적인 동시에 고결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소시민층은 제3의 범주이며, 고귀하지도 않고 민중도 아니다. 1785년 예카테리나 2세의 칙령에 의해 소시민 계층의 존재가 법적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이러한 제3 계층이 서유럽식으로 형성되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러시아에서 중간계급은 사회의 양 극점, 즉 상부와 하부 사이에 배치되었을 뿐 스스로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로 연구자들은 19세기 초반 독일식의 낭만주의적 갈등(이원화된 세계)이 러시아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사회적 파토스를 상실했다고 언급한다. 당시 러시아 문화는 이른바 잡계급 지식층조차 등장하지 않은 상황 속의 귀족문화로 일관되어 ‘부르주아적 가치에 대한 저항’이 의미를 지닐만한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 중반, 중간계급이라는 개념은 모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러시아에서는 대체로 ‘중도’라는 개념이 사회적 이상이 된 적도 없으며, 심지어 사회적 혹은 서술적 범주가 종종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로 이동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의 소시민층과 관련된 태도에도 해당한다. 실제로 중간계급이라는 서유럽의 개념을 ‘메샨스트보’로 처음 번역한 이는 게르첸인데, 그는 유럽의 부르주아 문명을 ‘잇속에 밝으며 소시민적인 것’으로 묘사한 바 있다. 

“소시민은 서유럽이 밑바닥의 모든 지점에서 일어서며 지향하는 이상이다. 이것은 앙리 4세가 염원한 바로 그 ‘닭고기 수프’이다. 길가로 조그만 창문이 난 작은집, 아들을 보낼 학교, 딸에게 입힐 원피스, 힘든 일을 처리할 일꾼, 게다가 이것은 사실상 구원의 항구 즉, 아브르 데 그레이스이기도 한 것이다!” (게르첸, 『끝과 시작』, 1863)  
 
  러시아의 지식인 게르첸에게 있어서는 예술과 정신성이 수프에 든 한 조각 닭고기보다 더 의미가 큰 것이었고, 배고픔이 부른 배보다 더 높이 평가된다. 정신적인 거처부재가 일상의 안락이나 거주시설 편의에 대한 소시민적인 염원보다 더 풍요롭다. 그는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혁명적 부르주아가 어떻게 자만한 소시민 계층으로 변화하는지를 언급하였다. 19세기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로 대표되는 인텔리겐치아의 소시민층 비판은 게르첸의 이러한 언급과 일맥상통한다. 세태풍속, 사생활, 돈벌이와 생계 걱정 같은 중간계급의 가치는 러시아 문화와 이념이라는 인텔리겐치아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면 실제로 당시의 현실이 예술작품 속에 반영된 실례를 살펴보자. 오스트로프스키의 희곡 『뇌우』에서 소시민 쿨리긴이 신분이 다른 보리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재능 있는 이 독학 기계공 쿨리긴은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고자 하지만, 그러한 권리나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나리, 나리님은 소시민들에게서 난폭함과 적나라한 가난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우린 이 껍데기를 결코 벗어날 수가 없을 거예요! 정직하게 일해서는 하루 식량 이상을 벌어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죠. […] 소시민들한테 일거리를 줘야 되요. 두 팔이 이렇게 멀쩡한데, 아무런 할 일이 없어요.” (오스트로프스키, 『뇌우』, 1860) 

“(로푸호프의 아버지는) 랴잔의 소시민이며, 그 신분으로 볼 때 풍족하게 살았다. 다시 말해, 그의 가족에게는 오직 일요일이 아니어도 일용할 고기 수프가 있었고, 심지어는 매일 차를 마시기도 했다. 그는 그럭저럭 아들을 김나지움에 보낼 수도 있었다.”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1863)   
 
  앞의 예는 신분제 사회의 한계에 갇힌 소시민, 뒤의 예는 소시민이 일정한 자본 축적을 통해 자식의 교육문제도 해결할 능력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무렵 또 다른 작가 포먈로프스키는 ‘삶에 적대적인 소시민성의 위력’(고리키, <소시민성에 대한 단상>)을 감지하고 『소시민적 행복』(2부작, 1861)에서 이에 대해 묘사함으로써 소시민을 조롱했다. 이후 소설의 제목은 아무런 고귀한 목적이나 지향이 없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걱정과 치부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진 생활을 의미하는 격언이 되었다. 
  실제로 19세기에는 슬라브주의자나 서구주의자가 공히 자본주의적 속내뿐만 아니라 철저한 비러시아적 정신을 문제 삼아 소시민층을 비판했다. 소시민층이 중시한 세태풍속, 사생활, 돈벌이 걱정 등은 인텔리겐치아들의 사회문화적 인식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1902년 막심 고리키가 소시민 계층의 주인공을 제시하고자 『소시민』이라는 당시로서는 도발적이고 노골적인 명칭으로 희곡작품을 발표했을 때, 몇몇 격앙된 반응이 이어졌다. 예를 들어, 소시민층의 출현을 피할 길 없는 묵시록, 즉 서유럽 문명의 최종 단계가 도래한 표식으로 본 메레시코프스키는 고리키만이 아니라 체호프까지도 예로부터 종교적인 러시아 사회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데에 기초해서 소시민성을 드러낸다고 비난한다. 고리키 또한 그를 비롯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의 작가들이 민중으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며 자신들의 보수적인 소시민성을 제시하는 굴종을 설교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심각한 문화적 모독이 러시아에서처럼 구체적인 사회적 계층에 관련된 경우는 아주 드물다. 

“소시민성은 현대의 지배계급을 대표하는 자의 정신 구조이다. 소시민성의 기본적인 어감은 기형적으로 발달된 소유의 감각이며 자기 안팎으로 평온에 대한 긴장된 바람, 이런 평온을 해칠만한 모든 것 앞에서의 막연한 공포, 마음에 깃들인 균형을 흔들고 삶과 사람들에 대한 습관적 견해를 파괴하는 모든 것을 속히 납득하려는 완강한 지향이다.” (고리키, 『소시민성에 대한 단상』, 1905)   
 
  이처럼 고리키는 자본주의적 세태 속 인간의 특정 속성을 소시민과 연관시킨 인식을 보여준다. 이는 일정한 사회 세력으로 성장한 일상의 인물을 그린 희곡 『소시민』에서부터 소시민층(혹은 소시민성)에 대한 지극히 상반된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아주 복잡한 진화를 웅변한다. 스테파노프의 지적에 따르면, 고리키는 지극히 격한 정치적인 평가를 내리는 한편, 소시민층을 강력하고 지배적이지만 진화를 억제하는 계층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소시민의 삶은 상당한 정도로 고리키 자신을 연상시키는 클림 삼긴과 같은 복잡한 인물들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스테파노프, <소시민층> 참조)
  한편으로 사회를 안정화하는 계층이기도한 소시민층에 대한 이런 식의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도덕적인 평가는 러시아 사회문화적 특성의 한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혁명기 러시아 사회에서 소시민층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태도는 당시 소시민층이 대거 혁명운동의 적대세력이 되어 보수적인 방어연합으로 집결하고 볼셰비키에 직접적인 대립행위를 한 결과와도 관련된다. 이와 연관시켜보면 러시아어의 소시민성이라는 표현은 자체 역사에서 형성된 소시민층 일반의 요구 및 기본적 행태와 이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부정적 대응 및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강하게 반영하는 토포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자신들의 도덕적 임무로 여겨 장기간 진행한 이른바 ‘소시민성과의 투쟁’은 다양한 국면을 경과한다. 스베틀라나 보임에 따르면, 1860년대에는 사회민주적 인텔리겐치아가 투쟁을 이끌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상업문화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민중적 취향에 반대하는 싸움이었다. 혁명 후 1920년대 이러한 투쟁은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 미술가들, 작가들에 의해서도 진행되었다. 전반적으로 시월혁명 이전 인텔리겐치아가 소시민성을 거짓된 민중적 정신으로 이해했다고 한다면, 혁명 후에는 소시민성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배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혁명 후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제일의 적은 부르주아화된 노동자 즉, ‘전기기술자 장’과 같은 인물이다. 마루샤가 사랑한 그는 기계조립공 이반이었으나, 정신적으로는 파리시민이어서 ‘전기기술자 장’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소비에트의 매력적이면서도 증오스러운 안정성의 알레고리적 인물인 ‘이반-장’은 속물인 동시에 자신의 자유연애에 걸림돌이 되는 소시민성을 거부하는 투사이다.(<마루샤의 음독자살>) 그러나 마야코프스키의 후기 창작과 관련, 소시민성과 이에 반대한 투쟁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지 규정하기는 대체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무렵 계급으로서 소시민층은 사라졌어도 이와 관련된 이념은 스탈린 시대의 공식적 담론에 포함된다. 초반부터 소비에트 담론에 특징적이던 만악의 근원으로서 소시민성(속물성)과의 투쟁이 사회적 그룹으로서 소시민층이 사실상 사라졌을 때에서야 격화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 후 이른바 소시민적(속물적) 안락을 폭로하는 현상은 소비에트 문학에서 예사로 벌어지는 일이 된다. 특히 1960년대 경에는 소시민성 개념이 순수하게 평가적인 범주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심지어 결혼식이나 때로는 결혼제도 자체도 소시민성(속물성)의 발현으로 여겨진 것이다. 로트만의 <비-회상록>에는 혼인하는 과정에서 가족생활을 소시민성과 결부시킨 자신의 신부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신부의 친구가 “개인적인 것은 후진, 사회적인 것은 전진!”(잘리즈냑 외, <속물성과 일상사> 재인용)이라는 독설로 요약했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러시아 문화에서는 이와는 다른 흐름도 분명하게 제시된다. 이런 인식의 단편은 불가코프, 파스테르나크 같은 작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과 같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달리 바라보면, 생명력 없는 미사여구를 위해 행해지는 생생하고 따뜻하고 친근한 일상성에 대한 경멸이 오히려 무서운 속물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일례로, 불가코프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속물성을 상징하는 대표적 가정잡화 중 하나로 취급된 전등갓의 다양한 쓸모를 들어 신성하다고 옹호한 바 있다. 지난날의 작가 체호프와 마야코프스키에게 소시민성은 속물성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었던 반면, 현대의 시인 키비로프는 <렌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과거 사회주의 담론 속 ‘발전되고 현실적이며 성숙한 낭만주의’를 끔찍하게 조악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소시민이 되자고 청한다. (잘리즈냑 외, <속물성과 일상사> 참조) 
  기본적으로 소시민적 가치와 연관되는 개념으로 평온, 아늑함, 정돈된 일상, 내일에 대한 확신, 부, 신중성, 상식, 행위와 도덕의 안정된 규범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가치를 고수하는 태도를 소시민성이라 특징지을 때, 사람들은 보통 보다 고상한 정신적 관심사가 실재한다는 데 기초한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소시민성과 관련하여 존재의 외적이고 사회적인 면에 대한 애착과 있는 그대로 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내보이려는 바람은 대체로 탐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소시민성 범주에서는 미적인 관념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소시민성이 발현되는 상황 중 하나가 ‘아름다운 삶’에 대한 지향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소시민성을 상징하는 것들 자체가 미적인 속성을 갖고 있지만, 소시민성이라는 비난에는 보통 그것의 미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내포되어 있다. 가령 누군가의 ‘겉멋’은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어떤 것인 셈이다.   
  전반적으로 러시아 문화에서 소시민 토포스의 전개와 관련하여 스테파노프는 유사한 기원을 갖는 독일어의 ‘Bürgerschaft(공민, 시민성)’를 토마스 만 연구자 페도로프의 저서(『토마스 만. 걸작의 시간』)에서 인용해 차이점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 토마스 만이 즐겨 창작한 대상은 ‘특수하며 고도로 발전된 정신적인 생활 요소’인데, 그는 이러한 생활 요소를 시민성이라고 명명한다. 그에게 있어서 시민성은 유럽 인문주의 문화에 대한 어떤 총합적 정의와도 같은 것이며,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시민성은 의미상 고결성이나 지성이라는 말과 아주 가깝다. 그런데 이런 개념들은 사회의 여러 교양 있는 인물들의 자질일 뿐만 아니라 대체로 평범한 인물 즉, 시민의 자질이다. 이는 도시들의 번영이 수세기에 걸쳐 진보의 추동력이었던 독일의 역사적 조건과 관련이 있다. 이와는 달리 보다 억압적인 전제정치와 부침의 역사과정을 거친 러시아에서는 중간계급의 속성으로 소시민성(속물성)이 부각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한국의 일례로 작가 이호철은 『소시민』(1964~1965)에서 이야기의 기반인 피난시절의 부산을 “어디서 무엇을 해먹던 사람이건 이곳으로 밀려들면 어느새 소시민으로 타락하기 마련인 공간”으로 규정하여 피난 중에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행태를 다루고 있다. 전쟁 중의 불안을 짙게 반영하는 이들의 세태는 러시아어의 소시민 토포스의 순응적이고 자기보전적인 태도와 맞닿아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소시민의 토포스는 오늘날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도시의 성립 및 역사적 계급변동과의 긴밀한 연관성 위에서 근대 계급 혹은 계층 변화의 복잡한 측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부르’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 부르주아의 하위 개념인 ‘쁘띠 부르주아’는 19세기 서유럽에서 발생했으며, 러시아어의 ‘메샤닌’ 또한 하위직급의 도시민을 지칭하던 데서 유래하였으나 직접 파생된 상위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다.
  부르주아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주축 세력으로 전통적 신분제를 무너뜨려 시민사회를 성립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화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여 이를 임금노동에 활용하는 부르주아가 등장하고 계층분화가 이뤄지는 속에서 이들은 전반적으로 보수화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계급분화의 끝자리에 위치한 다수의 소부르주아 즉, 소시민은 도시빈민과 공장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하는 ‘중간계층’이었다. 그럼으로 인해 이른바 ‘화폐경제의 그림자’로 전락한 이들은 시가 없는 무미건조한 맹목성 및 물질성과 결부되기에 이른다.
  반면 18세기 말부터 도시의 ‘제3 신분’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분류된 ‘메샤닌’은 사실상 소시민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을 일컬었으며, 상인이 대다수인 자본가와는 구분되었다. 19~20세기 러시아적 전통에서 ‘가난한 중간계급 구성원’과 ‘정신세계가 빈곤한 주민’이라는 두 개념이 구분하기 어렵게 결부된 데에는 특히 제3 계층이 서유럽에서처럼 형성되지 못한 채 사회의 상부와 하부 사이에 배치되었을 뿐 강력한 사회적 위치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와 더불어 ‘중도’라는 개념이 사회적 이상이 된 적이 없는 러시아 사회에서 중간계급에 대한 인텔리겐치아 전반의 부정적 인식이 깊이 작용하고 있다. 19세기의 인텔리겐치아는 소시민의 자본주의적 속내와 철저히 비러시아적인 정신을 문제 삼았다.  
  이처럼 사회를 안정화하는 계층이기도한 소시민의 토포스에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의미가 공히 담긴 것은 소시민의 탄생 과정과 결부된 자본주의의 속성과도 연관된다. 여기에는 일상에 안전히 머물 수 있기를 염원하며 일체의 고양 혹은 초월에의 의지를 금기시하는 공통성이 있다. 그런데 소시민성이 발현되는 상황은 또한 일상 자체의 가치 인정 및 비록 겉멋일지라도 ‘아름다운 삶’에 대한 지향과 관련된다. 소시민성이라는 비난에는 그것의 미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연관 토포스 도시; 속물; 모드; 지식인; 탐욕
참고자료(프랑스) Régine Pernoud, Histoire de la Bourgeoisie en France - Les temps modernes, Le Seuil,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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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nand Braudel, Civilisation matérielle, Économie et Capitalisme - XVe-XVIIe siècle, Les Structures du quotidien, Armand Colin,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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