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속물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속물
토포스명(프랑스) snob
토포스명(러시아) пошляк
정의 1. 과시적 욕망에 몰두할수록 가식적이 되고 삶의 내면적, 성찰적 가치에서 멀어져 속물이 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속물’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스놉 snob’ 18 세기 말 영국에서 탄생한 표현이다. 이것의 어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명이 전해지고 있다.
우선 구두 제조인을 뜻하는 스코틀랜드어 ‘스납 snab’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는데, 구두 제조인이라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점차 의미를 확장하여 ‘낮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생긴 말이 ‘스놉’이라는 설명이다. 
  두 번째 견해는 라틴어 ‘시네 노빌리타테 sine nobilitate’에서 ‘스놉’의 어원을 찾는다. “고귀하지 않은” 정도의 뜻을 갖는 이 두 개의 라틴어 단어들에서 앞 단어의 ‘s’ 와 뒷 단어의 ‘nob’만을 따 와서 합성한 결과물이 ‘snob’이라는 것이다.
  흔히 토포스들의 어원을 찾을 때 라틴어에 주로 기대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라틴어와의 현학적 연계에 기대지 않는 전자에 조금 더 신뢰가 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포스란 워낙 사람들의 집단무의식이 원하는 쪽으로 방향 지워지는 어떤 것이니만큼 후자의 어원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라틴어에 기댄 어원 설명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놉’의 어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19 세기 전반 영국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 하나의 은어가 생겨나는데 이 또한 ‘스놉’ 토포스의 전개 과정에서 의미를 갖는다. 원래 귀족 자제들에게만 입학을 허락하던 이튼 칼리지나 캠브리지 대학이 평민의 자제들에게도 문을 열어주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nobs / snob 대립쌍이 탄생하기도 했다. 즉 학생들 사이에서, 귀족을 의미하는 ‘nobles’를 ‘nobs’로 줄여 부르고 그 반대인 낮은 신분의 학생들을 ‘snob’이라고 지칭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까지는 ‘스놉’이 오늘날의 의미를 미처 갖지 못하고 단순이 ‘평민’ 또는 ‘지체 낮은 사람들’의 뜻으로만 쓰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831년 7월의 영국 신문 링컨 헤럴드의 한 기사는 ‘상민들은 가당찮게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잃게 되었고 지체 높은 양반들이 그것을 되찾았다.’라는 문장을 포함하고 있다. 
  snob과 nobs, 두 낱말의 아나그람(철자 위치 바꾸기 말놀이)적 관계가 적어도 19 세기 중반까지는 영국 언어권에서 일정한 긴장의 토포스를 형성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귀족이 아닌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의미를 갖던 ‘스놉’에 보다 복합적인 의미가 덧붙게 되는 사실이 확인되는 19 세기 중반에 와서의 일이다. 즉, ‘스놉’이란 말이 단순히 평민이나 지체 낮은 사람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자신보다 더 우월한 신분과 지위와 교양을 소유한 계층을 부러워하고 흉내 내면서 동시에 자신과 동류인 수준의 사람들을 무시하려는 일종의 허영심에 젖은 사람을 의미하기에 이른 것이다. 
  1848년 영국의 쌔커리의 책 『스놉의 책』에서 그러한 의미가 굳어지고 유포된다. 1846~7년, 자유주의적 잡지 <펀치>에 <영국의 스놉들>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글들을 모은 쌔커리의 그 책은 후에 소설 『허영의 시장』(1847∼1848)에 편입되기도 하는데, 이 책에는 자신에게 결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교계 등 상류 사회를 늘 동경하고 그들과 동일시하면서 정작 자신이 실제로 속한 신분의 동류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애써 차별화하려는 갖가지 형태의 허영심들이 형상화되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에도 유입되어 쓰이기 시작한 ‘스놉’이라는 말도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유포되기 시작한다. 즉,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계층의 문화와 행동을 특히 지적으로 추수하고 모방하며 스스로를 그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정체성을 찾으려하는, 자신이 속한 계층이나 하위의 사람들을 무시하며 그들로부터 자신을 구분 지으려드는 태도와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스놉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꾸미는 말이 꾸밈 받는 말 뒤에 오는 프랑스어의 어순상의 특성 때문인지 ‘스놉’은 형용사적으로도 자유롭게 쓰인다. 가령 “속물 동아리” 등의 표현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명기해야할 사실은 영어권이나 프랑스어권 즉 서구에서의 ‘스놉’의 토포스와 한국어의 ‘속물’의 토포스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어 사전이 ‘속물’ 항목에서 제시하는 어의는 위에 제시된 프랑스어의 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어 사전은 ‘속물’에 대해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뜻풀이를 제시하고 있다.
  한국어 ‘속물’에 대한 위의 정의는 사실 그리 정밀하지 못하다. 정확히 말하면 ‘속물’이란 말은 그 발화되는 정황에 따라 매우 미묘하고 다양한 의미를 실어 나르는 듯하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문제일 것이며 또한 일상적으로 이익과 명예는 종종 대립하기도 하는 개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프랑스어 ‘스놉’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저급하고 허황된 선민의식을 겨냥하는 것이라면 한국어 ‘속물’은 그 겨냥하는 바가 단일하지 않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질적 가치에의 집착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내재화된 타인의 시선에의 지나친 종속을 가리키기도 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어떤 말의 밑바탕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생활양식과 세계관에 대한 평가가 깔려있는 경우가 있는데, 러시아어의 속물, 즉 ‘포실략 пошляк [poshlyak]’이라는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이 말은 어원상 러시아어 동사 포이티 пойти [poiti]’의 형동사가 형용사화한 ‘포실리 пошлый [poshlyi]’에서 파생되었으며, ‘포실리’는 17세기 이전의 여러 고문서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또는 ‘이전의, 보통의’(고대 러시아어 ‘포실리나пошлина [poshlina]’와 비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당시에는 이어져 내려와 풍습이 되고 오래된 삶의 표준으로 편입되어 신성화되었다는 의미에서 ‘흠잡을 데 없는 것’이라는 의미까지 포괄한 것이다. 
  그러한 말이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들어 고대 러시아 전통 즉, 옛것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음영을 띠게 되었다. 일종의 미적 평가를 담은 새로운 의미 즉, ‘질이 낮은, 아주 평범한, 하찮은’이라는 의미가 형성되었으며, 그런 맥락에서 이 말은 표트르 대제(1689~1725) 이전 전승과의 사회전반적인 단절을 함축한다. 이런 의미에서 솔로비요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참조할 만하다. 

“18세기 초반에는 옛 풍습이라는 명목으로 가려놓은 무지와 남용, 편견과의 대결이 벌어졌는데, 그러한 대결로 인해 새로운 질서의 지지자들은 자연스레 옛것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전에는 가능한 한 멀어져야할 암흑뿐이던 러시아에 18세기 초부터 비치기 시작한 빛의 자손으로 간주했다.” (솔로비요프, 『18세기 러시아사 저자들』)

  그 후 한동안 러시아 아카데미 사전에 빠져있던 이 말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재생되어 널리 쓰이다가 19세기 초부터 폭넓게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사, 옛 문헌과 언어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다.(비노그라도프, 『말의 역사』 참조) 이와 관련하여 블라디미르 달은 자신의 사전에서 1850~60년대 ‘포실리’의 의미를 ‘고리타분한, 널리 알려진, 진저리나는, 관례를 벗어난’, ‘상스러운, 거칠고 단순하고 저급하며, 비열하고 천박한 것으로 간주되는’, ‘비속한, 저속한’과 같이 특징짓고 있다. (『달 사전』, 1882) 이러한 두 가지 의미 간에는 ‘다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는 의미 성분을 통한 일정한 연관을 찾을 수 있다. 또한 ‘포실리’에서 기본적으로 그 속성을 표시하는 추상명사 ‘포실로스티 пошлость [poshlost’]’가 형성되고, 또 이 단어의 표현적 색채에 힘입어 특히 19세기 중반 경 ‘포실략’ 즉, 속물 외에도 비슷한 뜻의 여러 가지 파생어를 탄생시킨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더 나아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는 이 말의 의미와 각종 뉘앙스가 계속 첨예화되며 규정되어갔다. 마침내 이 말은 ‘정신적 도덕적 태도에서 범상하고 저급한, 고상한 관심사나 요구를 모르는’, ‘몰취미의 조잡한, 진부한, 저속한’( 『우샤코프 사전』, 1935~1940)과 같이 정의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용한 속물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로는 ‘포실략’ 외에도 기원이 다르고 뉘앙스와 쓰임새의 차이가 있는 ‘메샤닌 [meshchanin]’이 있으며, ‘스놉сноб[snob]’, ‘필리스테르филистер[filister](philistine)’ 등의 차용어도 있다. 이 중에서 역사적으로 특정 사회계층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으며 기본적으로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을 지칭하는 ‘포실략’(즉, ‘포실리 첼로벡пошлый человек[poshlyi chelovek]’)을 택하여 의미와 구체적인 쓰임새 및 변화상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포실략’과 그 속성을 표현하는 ‘포실로스티’는 러시아 자체의 문화역사적 맥락에서 중간계급 도시민 즉, 소시민의 특정 속성과 더욱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토포스 스놉은 기본적으로 근대 산업화 이후에 가능했던 토포스이다. 다시 말해 그 토포스는 이미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다. 귀족이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하는 구체제를 무너뜨린 부르주아들의 세계가 도래하지 않았다면 ‘스놉’이라는 말도 사용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언간 사회의 주축으로 성장하고 전면에 나선 시민계급의 불안하고 허전한 역사의식이 빚어낸 산물이 바로 스놉의 토포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귀족의 전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19 세기 내내 그들은 잔존하는 특권계급의 불합리성과 싸우면서도 동시에 그 ‘지체 높음’을 부러워하고 흉내 내어왔다. 그들은 끊임없이 상류층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으려 안달했으며 과거 귀족들의 문물과 생활양식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애썼던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 동경과 경향의 한 표현이 바로 범박하고 교양 없는 자신들의 동류들을 그들보다 한 발 앞서 무시하고 폄하함으로써 자신에게로 향할 지도 모르는 그러한 비난을 피해나가려는 몸짓 즉 스노비즘이었다.
  프랑스 문학사, 특히 연극사는 ‘스놉’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미 스노비즘에 해당하는 행태와 속성을 무대에 올려 비판한 바 있다. 바로 몰리에르의 희극 『서민귀족』(1670)이 대표적인 예인데, 그 주인공이야말로 스놉의 전형이랄 수 있을 것이다. 
  한 재산 모으기에 성공한 주르댕이 지체 높은 귀족 행세를 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관객에게 우스꽝스럽게 보여줌으로써 단단한 희극성을 확보하는 몰리에르의 이 연극을 가장 즐겼던 관객들 중 하나는 태양왕 루이 14 세였다. 왕은 기회있을 때마다 베르사이유 궁에 조정 신하들과 유력한 귀족들을 불러 모아 놓고 몰리에르의 극단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연극은 주르댕의 스노비즘이 확연히 드러나는 장면을 다수 보여 주는데, 우선 그는 자신의 딸이 귀족이 아닌 평민과 결혼하려하자 매우 못마땅해 하며 반대한다. 그리고 비싼 돈을 들여 모셔온 철학 과외선생에게서 운문-산문의 구분을 배우며 “오오 맙소사, 내가 산문이라는 걸 사십년 넘게 이미 사용해 왔다구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를 따라 나서거라, 내가 이 옷 입은 것을 시내의 모든 사람들이 봐야하니까”라는 대사를 큰 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몰리에르는 진실과 조롱의 웃음을 위해 늘 하인 또는 하녀를 등장시켜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데, 주르댕 역시 하녀인 니콜의 조롱의 대상이 된다.

“주르댕 : 나 화낸다 - 니콜 : 잠깐만요 주인님 용서하세요, 저 한 번 웃을게요. 하 하 하”(몰리에르, 『서민귀족』, 1670)

  이처럼 프랑스인들에게 몰리에르의 인물 주르댕은 거의 ‘스놉’의 원조 격으로 기억된다. 그리하여 『서민귀족』은 끝없이 재공연되며 영화 및 tv 영화로 늘 새롭게 각색되며 소비되는 문화상품으로 자리잡는다.
  1850년에 사망한 소설가 발자크가 ‘스놉’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것 같지는 않으나 그의 소설 『농민들』(1844)의 2 부 초입에는 당대의 스노비즘이 드러나는 대목이 있는데, 파리에서 가게를 운영하여 재화를 모은 한 등장인물은 지방으로 내려가 사교계를 드나들며 ‘지체 높은’ 행세를 하다가 결국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발자크의 소설 세계 『인간희극』(1829~1850)에는 스노비즘 행태를 보이는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스놉’이란 단어가 명시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19 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평론가 이폴리트 텐느가 거의 최초로 ‘스놉’을 언급하게 된다. 그는 『영국 문학사』(1864)를 쓰면서 “스놉은 신분사회의 산물이다. 자신의 횟대에 앉아 자기보다 높은 횟대에 앉은 이를 존경하고 낮은 횟대에 앉은 이들을 경멸하는데,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정작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영국에서 들어온 말 ‘스놉’이 19세기 후반과 말에 이르러 점차 대중에게로 확산되면서 프랑스인들은 스놉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공유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후 20 세기로 넘어와서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에 의해 산업화 이후의 프랑스 사회에서 상층 부르주아들의 스노비즘이 얼만큼 교묘하고 역겹게 드러나는지 형상화된다.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편에 걸쳐, 사교계에 드나드는 인물들의 것멋과 허영을 매우 잘 묘파하였다. 가령 므슈 스완의 은근한 속물적 행태라든가 베르뒤랭 부인과 그 주변 인물들의 스노비즘은 소설의 문학적 의미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1850년 이래 프랑스로 유입된 ‘스놉’이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채 주로 면전에 없는 제 삼의 인물을 지칭하여 쓰였다면 20 세기에 들어와서 그 말은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담아내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속물인가?> 라는 매우 과감한 질문을 에세이 형식으로 발표하며 그 책에 독일의 발터 벤야민은 <속물에게 무엇을 던져줄 것인가?>라는 발문을 달아 화답해 준다. 토포스 ‘스놉’에 새로운 문화적 자장이 형성되고 그 가치체계에 있어 일정한 역전이 일어나는 듯한 모습이다. 이전까지는 3칭이 아닌 1인칭을 주어로하여 스놉이라는 서술어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토포스 스놉의 보다 과감한 발현 사례가 발견되는데, 1954년 경 프랑스 현대 문단의 이단아 보리스 비앙은 “난 속물” 이라는 샹송을 발표하고 직접 노래부른다. 노래의 가사는 “난 속물, 그래 난 속물이야 / 그건 내가 감수하는 유일한 약점이지...”하고 이어진다.
  토포스 ‘스놉’이 21 세기에 들어와서 발현된 한 예는 매우 일상적인 차원의 것이다. 프랑스의 한 중소기업 사장이면서 재치있는 언변으로 많은 네티즌들의 팔로우를 받고 있는 장 카잘레라는 인물은 SNS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놈의 모기가 좀 스놉이었나봐, 귀족의 피만 빨더라구.”

  그리고 파생어를 쉽게 만드는 프랑스어의 특성 때문인지 프랑스인들은 ‘snob’를 어간으로 하여 타동사 ‘snober’를 만들어 쓰기도 하는데 “~를 (경멸하여) 무시해 버리다”라는 의미를 갖는 이 동사의 목적어는 주로 어떤 모임이나 초대 또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가령 “Elle a snobé notre invitation 그녀가 우리 초대를 무시하고 오지 않았어.” 또는 “Tu snobes mon texto? 넌 내가 보낸 문자에 답장도 안 하니?” 등의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18 세기 말 영국에서 태어나 19 세기 중반에 그 근대적 의미 특성을 정립한 ‘스놉’이라는 말은 이후에 프랑스에도 그대로 유입되어 일상 언어생활과 문학 연극 등의 문화계에 일정한 토포스를 형성하고 또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속물성은 동서고금, 인종이나 국가, 계층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러시아어 ‘포실로스티’라는 표현에 대해 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그 의미의 포괄성과 번역불가능성을 지적하곤 한다. 일례로, 나보코프의 소설 『업적』(1932)에는 유럽을 떠돌게 된 젊은 이주자 마르틴이 ‘포실로스티’ 등의 단어를 타국인에게 설명하다가 혀짤배기처럼 되어 발작적으로 웃어야하는 지경에 이르곤 했다는 언급이 있다. 나보코프는 차후의 글 『속물과 속물성』(1957)에서 이 표현이 ‘의기양양한 속물성’을 일컫는 특수한 명칭으로서 ‘가짜 권리요구’를 그 핵심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포실로스티’는 ‘명백한 저질에다 가짜 중요성, 가짜 아름다움, 가짜 재주, 가짜 매력’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어떤 것에다 이 말을 적용하는 것은 미적 심판이자 도덕적 비난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속물성을 꾸짖는 일에는 속물성 자체를 배태하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기본적으로 염두에 둬야한다. 사실상 속물성은 명확치 않은 기만이자 독특한 가장무도회인데, 거기서는 하급문화가 고급문화를 희롱하고 끝내는 고급문화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다시피 ‘예로부터 내려오는, 해묵은’ 정도로 규정되던 말이 어떤 전개과정을 거쳐 나보코프의 사유와 같은 속물의 토포스가 발생했을까? 우선 이반 뇌제와 연관된 전설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차르이반의 청혼을 거절했을 때, 그는 거만하게 ‘그 여자 기껏해야 비천한 처자일 뿐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비천한 처자’라는 말은 하층 출신의 여자를 일컫는다. 러시아어의 ‘포실로스티’라는 말의 역사는 서유럽의 동의어들 즉, 영어의 banality, vulgarity, triviality라는 말들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포실로스티’라는 개념이 문화적 돌연변이를 일으킨 과정을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예브게니 오네긴』 (1825~1837)에서 푸시킨은 ‘포실리’라는 말을 약간 아이러니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낡은, 평범한’ 이라는 당시에 익숙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차후 이 개념의 발전상이 그 문맥에서 예견된다. 오네긴이 올가에게 바친 ‘포실리한 찬가’는 구애하는 남성이 여성을 의례적으로 칭송하는 장르와 관련되는 동시에 그가 올가와 상류사회의 규칙에 맞춰 행한 조건부 희롱까지도 규정한다. 그러한 오네긴의 ‘포실리한 행위’는 인간적 관계의 심각한 파괴로 귀결된다. 이 운문소설에서 우리는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교차를 엿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와 외국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뱌젬스키의 저서와 고골의 서간집 등을 살펴보자. 

“시적인 사유를 장난스럽고 꽤나 ‘포실리’하게 표현하는 걸 즐기는 주코프스키는 그녀(로세티)를 천상의 소악마라고 불렀다. [...] 통상 여자들은 진부함이나 ‘포실로스티’를 이해하는 데 서툰데, 그녀는 그런 말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들이 너무 진부하거나 너무 ‘포실리’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뻐하기도 했다.” (뱌젬스키, 『낡은 수첩』, 1825) 

“그(푸시킨)는 삶의 ‘포실로스티’를 그토록 선명하게 제시하고 ‘포실리’한 인간의 ‘포실로스티’를 아주 능란하게 특징짓는 재능은 여태 어떤 작가에게도 없었다고 항상 내게 말하곤 했어요. 잘 눈에 띄지 않는 모든 사소한 것이 모두의 눈에 크게 어른거리도록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오직 나만의 주요 특성이죠.” (고골, <『죽은 혼』의 다양한 인물에 관한 편지 4통>, 1843) 

“우리의 위선적인 짓거리 / 갖가지 ‘포실로스티’와 일상사 가운데서 / 나는 세상 단 하나를 문득 발견했지 / 신성하고 진실한 눈물은 / 가난한 어머니들의 눈물 바로 그것” (네크라소프, 『전쟁의 참화를 지켜보며』, 1855 또는 1856. 참고. 이 작품들에서 사용된 ‘포실리’ 또는 ‘포실로스티’의 당시 맥락을 살피자는 의미에서 음역으로 표현) 

  여기서 ‘포실로스티’는 기본적으로 저속한 어떤 것의 속성일 뿐 아니라 저속한 세태풍속, 저속한 행위, 저속한 표현이나 책망을 의미한다. 이 말의 표현적 색채는 19세기 중반 무렵 더욱 더 강화된다. 추콥스키는 네크라소프의 시적 기교를 논하는 저서 『네크라소프의 기교』(2005)에서 시인이 사용한 ‘포실리’, ‘포실로스티’라는 말은 1860년대 무렵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 부여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추콥스키에 따르면, 이 말에 점점 더 정치적인 의미가 가미되어 ‘정체, 마비, 감각상실, 낡은 질서 신봉’과 같은 뉘앙스를 갖게 되었다. 또한 앞서 인용한 예문에서 보듯이 고골이 이 말을 그렇게 지각할만한 가능성을 처음 선보인 것으로 여겨진다. 

“속물성에는 거대한 힘이 있다. 그것은 생기 있는 사람에게 항상 불시에 들이닥친다. 그 사람이 놀라서 두리번거리는 사이 속물성은 재빨리 그를 올가미에 걸어 꼼짝 못하게 만든다.” (살티코프-셰드린, 『골로블례프가 사람들』, 1880) 

“우리 집에서는 자주 ‘돈은 셈을 즐긴다’느니 ‘카페이카로 루블을 아낀다’느니 하는 말들을 자주했다. 그런 속악한 말들에 압박받은 누이는 어떻게든 지출을 줄이려고만 애를 썼고 그런 탓에 우리의 식사는 궁색했다.” (체호프, 『나의 생활』, 1896) 

  고골뿐만 아니라 살티코프-셰드린과 체호프는 자주 일상 속의 속물성을 그렸는데, 앞의 예는 몰취미하고 비도덕적인 조악함에 이끌리는 인간을 그렸으며, 뒤의 것은 속악한 행동 혹은 그러한 언행과 그 후과를 언급하고 있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899)에서 휴양지에서 만난 유부남 구로프와 첫날밤을 보낸 유부녀 안나는 눈물을 비치며, 그가 자신을 ‘속물스런 여자’라고 여길까봐 두려워한다. 두 사람은 눈물도 참고 상호 고백도 주저한다. 그런데 ‘포실로스티’의 공포가 서구 스타일의 휴양지의 간통을 러시아적인 연애사로 변화시킨다. 이 단편에서 안나가 들고 있는 ‘통속적인 손잡이 외알 안경’은 시적이고 에로틱한 대상으로써 구로프는 이 안경 덕분에 자신의 여인을 알아본다. 이 안경을 매개로 독자는 속물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달리 보게 된다. 속물적인 것이 항상 시적인 것에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셈이다. 체호프는 일상적인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삶의 속물성’에 대한 공포와 놀라움을 표현한 최초의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보임, 『속물성』 참조) 체호프는 단편 『이오니치』(1898)에서 한 지방도시 의사가 몇 가지 사건을 거친 뒤 돈벌이와 카드놀이 외에는 관심이 없는 정신세계가 빈곤한 사람으로 속물화된 상황을 제시하기도 했다. 일상이 역한 냄새를 풍기는 늪처럼 사람을 끌어당기고 점차로 그에게서 고상한 지향과 아름다운 꿈들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러시아인들은 ‘포실리’하다는 말을 ‘과거의 것’이 아니라 ‘타락한 것’으로 알아듣는다. ‘포실로스티’는 매춘이 아니라, 흥분된 감상성을 포함하여 모든 점잖지 못하고 비정신적이며 과도한 것에 대한 욕망으로 풀이된다. 일례로, 톨스토이는 예술적 자서전에서 유년 시절에 사랑에 관해 처자들과 나눈 진지한 대화가 ‘포실로스티’로 간주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한 대화가 훌륭한 취향, 남성의 우정과 귀족적 대화의 규칙을 무너트린 셈이다. 
  이처럼 ‘포실로스티’는 특히 미적 판단 및 도덕적 태도의 색채를 띠고 점차 쓰임새가 달라졌다. 나보코프는 ‘포실략’ 즉, “속물의 관심사는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흔한 특성을 지니며, 그의 사고방식은 그룹과 시대의 상투적이고 널리 통용되는 이상들로 형성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그의 언급에서 속물은 독창성의 결여와 연관된다. 그는 이러한 특성의 인간을 플로베르식의 부르주아에 빗대어 언급한다. 부르주아는 ‘호주머니가 아닌 머릿속 상태’이고, ‘의기양양한 속물이며 그럴싸해 보이는 천박한 인간’이다. 그러한 속물은 순응주의자이며 특권층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스놉과도 같다. (나보코프, 『속물과 속물성』 참조) 이렇게 속물성은 창조의식과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대신에 아늑한 사이비문화와 집단적 취기를 제안한다. 그런데 나보코프는 특히 훌륭한 취향이 ‘포실로스티’와 대조되는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로 이 범주 자체의 속성으로 내장되어 있는 순환논법에 걸려들기도 한다. 이런 논점은 고독을 향유할 없게 되어 있는 사회에서 고독의 자의식을 가진 고급속물 또는 ‘거룩한 속물’을 논하는 김수영과 비교해볼만하다. 김수영은 속물성에 대한 비판에서 자신 또한 자유롭지 못함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의 의견대로라면, 인간의 심연이 무한한 만큼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대체로 나보코프에게서 ‘포실로스티’는 러시아적인 비판적 사유의 이상적인 인공물로 변화한다. ‘포실로스티’의 발현이 서유럽, 타인의 취향, 에티켓의 모방과 자주 연관되는 한에서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물성의 부드러운 터치는 민족적인 경계와 ‘서구와 러시아’라는 지루한 대립쌍 자체를 무너트린다. 도덕적이고 미적인 현상으로써 속물성이라는 나보코프의 정의는 문화의 저급한 분신으로써 예술과 개인의 창조적 차원을 허물고자하는 헤르만 브로흐의 키치에 대한 정의를 연상시킨다. (보임, 『속물성』 참조) 
  여기서 ‘포실로스티’라는 러시아어가 그 자체로 세계와 수신자에 대한 화자의 태도의 순수한 증거라는 점은 지적할만하다. 이 말에는 특정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서술 즉, 설명하는 내용면이 부재(소시민성과의 변별점)하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변화상을 담은 속물성과 관련하여 레본티나, 잘리즈냑, 시멜례프 같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말이 아름다움이라는 개념만큼이나 포괄적 개념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속물성이라는 개념은 러시아어에서 가장 치명적인 미적 평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속물적인 것은 추한 것보다 훨씬 더 너절한 것이다. 추한 것은 그 자체로 미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확증함으로써 아름다운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속물성은 아름다운 것의 가치를 훼손한다. 왜냐하면 속물성은 통상 아름다운 것을 모방하는데, 일례로 패러디는 때로 원본과 그저 어렴풋한 차이만 나기 때문이다. 속물성은 각각의 현상 속에서 내밀한 의미를 구성하는 것을 제거해버린다. 
  대체로 모종의 미적인 의의가 덧붙는 행위, 상황, 대상 혹은 언급만이 속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버섯, 꽃송이나 바다 조가비 같은 것은 일터에 다니거나 버섯을 따러 숲에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속물스런 것이 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누군가 거기에 어떤 추가적인 미적 가치를 덧붙이면서도 화자가 그러한 가치를 공유하지 못할 때만 속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속물성 속에는 나보코프가 지적한 바의 도덕적인 일반적 평가로 유동하는 현상이 있다. 그러나 지극히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아름답지 않아서 너절하다는 이념 자체이다. 
  또한 속물성이라는 러시아 단어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는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 합치하는 의미상 성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복성, 재생성, 상황의 예측가능성, 대다수의 경험에 속한 영역이라는 이념이 그러한 성분이다. 이처럼 ‘포실로스티’ 문제의 근저에는 반복성과 협약의 역설이 놓여있다. 반복과 조건성은 인간적 생존의 기초적인 양상이며, 이것들은 기억의 작동과 문화의 보존, 예술적이거나 규범적인 언어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포실로스티’로 이해되는 것은 텁텁한 맛을 가득 채운 반복, 닳고 닳은 클리셰로 변한 조건성, 무한 반복되는 일련의 기법으로 귀착된 전통이다. 이것들은 미적 비판적인 실험과 다른 경험의 획득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포실로스티’를 문화, 아름다움, 정신성과 도덕의 고약한 분신들로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와 더불어 해석상 다음과 같은 숨겨진 중요한 의미를 도출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그의 행위를 속물적 또는 속물성이라는 말로 특징짓는 경우, 화자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의 판단상 그 사람보다 월등해진다. 다시 말해, 나의 가치는 진정한 것이고, 나와 같은 소수의 사람은 너보다 무한히 우월하다는 식이다. 속물성이라는 말 속에서 미적인 평가가 화자에 의해 객관적 사실처럼 주어질 수 있고, 평가의 대상에게는 무조건적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다. 일례로,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1904)에서 아름다운 벚꽃 동산을 간이별장으로 쓰도록 임대하라는 상인 로파힌의 설득에 금전적으로 곤란한 처지의 여지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간이별장이나 그 거주자들, 그런 건 너무 속물스러워요, 실례합니다.” 이런 의미 성분 속에는 속물성이라는 말이 형성하는 순환논법의 원천이 숨어있다. 다져놓은 오솔길로 무리지어 가는 사람에 대한 우월감에서 오는 만족은 잘 개척된 시시한 길 중의 하나, 즉 속물성인 것이다. 
  사실상 러시아어에서 속물성이라는 말은 ‘가짜 권리요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속물적인 인간은 자신의 속물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취향이 흠잡을 데 없다고 자만하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짜 권리요구가 해소된다면, 속물성이 자리 잡을 곳도 사라지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순환논법의 한계를 벗어날 도리는 없어 보인다. 속물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속물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잘리즈냑 외, 『속물성과 일상사』 참조) 
  이처럼 다수 러시아 문화학자에게 있어서 ‘포실로스티’의 재앙은 그것의 개념적인 무정형성에 있다. 스베틀라나 보임의 지적처럼, 이미 철학적 분석이 행해진 선과 악의 평범성(아렌트가 제시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동인형’처럼 행동한 아이히만의 경우 또한 일종의 마비이자 속물적 과시행위와 비교 가능) 및 그 담론 자체의 평범성에 덧붙여 ‘포실로스티’의 범주는 고급과 저급 사이의 특징을 씻어내는 근대의 절충적인 문화를 가리킨다. 따라서 민중문화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이상과 그 문화의 민족적 순수성은 위협에 처하게 된다. (보임, 『속물성』 참조) 
  대체로 러시아 문화에서 ‘고급’과 ‘저급’이라는 대립쌍이 중요할 역할을 한다고 할 때, 저급은 일상생활, 일상의 정돈, 물질적 부와 연관된 모든 것을 자주 연상시킨다. 이런 것들은 말하자면 개조된 미래로의 돌파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변하지 않는 현재를 비판적 성찰 없이 안정화하려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협소하게 굳어진 틀에 박힌 표현으로 생명이 질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 힘과 결부된 것이 속물의 토포스인 것으로 보인다. 
비교문화적 설명   속물성은 발현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인종과 국가, 계층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어의 ‘스놉’ 과 러시아어의 ‘포실략’은 우선 어원과 관련한 출발선의 함의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근대적 의미를 정립한 ‘스놉’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 유입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한 단계 높은 계층의 문화와 행동을 지적으로 추수하는 상류지향적인 자기정체성을 갖고 동일한 혹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태도와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에 비해 순수 러시아어 기원의 ‘포실략’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의미하던 말이 18세기 초 사회전반의 고대의 옛것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얻은 부정적 색채와 연결된다. 19세기 중반 경에는 문화 역사적 변화의 맥락에서 몰취미하고 비도덕적인 조악함에 이끌리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이처럼 두 나라의 다소 차별적인 근대 발전과정에서 출현한 속물의 토포스가 보여주는 차이는 우선 어원상 신분과의 직접적 관련성 여부에서 비롯한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스놉’이라는 말이 도입되기 훨씬 전 몰리에르가 희곡 『서민귀족』을 통해 재산 축적에 성공한 후 귀족행세를 하는 스놉의 전형이라 할 법한 주르댕을 우스꽝스럽게 형상화했다. 이러한 스놉의 원조가 새롭게 각색되어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는 데까지 이어진 일련의 변화 과정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상층 부르주아의 역겹고 교묘한 스노비즘 즉, 사교계 인물들의 겉멋과 허영을 묘파해보였다. 프랑스어의 스놉은 신분상승 의지와 연관된 인간의 저급하고 허황된 선민의식을 겨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와는 다른 19세기 러시아의 색채를 강하게 반영한 ‘속물적 인간의 속물성’을 그린 작가로는 고골과 체호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어의 속물성은 번역불가능이라 일컬을 만큼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포괄적 특징을 얻었다는 점에 주의해야한다. 또한 속물 토포스가 ‘정체, 낡은 질서 신봉’이라는 사회정치적 차원의 뉘앙스를 갖게 된 과정에서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역할은 독특하다. 러시아문화에서 속물성과 결부된 미적 판단과 도덕적 태도에 대한 역설적 통찰은 독창성 결여로써의 속물 토포스에 내재한 겉멋이나 가식을 포착하는 연장선상에 있다. 
  러시아어의 ‘포실략’은 ‘가짜 권리요구’라는 측면에서 프랑스어의 상층지향적인 ‘스놉’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나보코프는 속물이 순응주의자이며 특권층에 속하기를 갈망하는 스놉과도 같다고 했다. 이렇게 속물의 토포스를 고찰한다면, 이런 지점에서는 민족적인 경계나 ‘서구와 러시아’라는 대립쌍 자체도 무력해진다. 
연관 토포스 귀족; 도시; 부르주아; 소시민; 지식인; 탐욕
참고자료(프랑스) Jacqueline Bel / Till R. Kuhnle (dir.) : Péripéties du snobisme (= Germanica 49), Lille : Université Lille III, 2012.
Frédéric Rouvillois. Histoire du Snobisme, Flammarion, 2008. (ISBN 978-2-0812-0542-0) [présentation en ligne]
Philippe Jullian, Dictionnaire du snobisme, préface de Ghislain de Diesbach, Bartillat,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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