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토포스명(프랑스) alcool, vin
토포스명(러시아) алкоголь, водка
정의 1. 술에 취할수록 구속에서 더욱 더 해방된다.
2. 술에 취할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알코올’은 아랍어 ‘알쿨 al-kuhl’에서 온 말로 16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사용되었다. 어원인 ‘알쿨 al-kuhl’에서 ‘알 al’은 정관사이고 ‘쿨 kuhl’은 셈어족에서는 불에 타버린 검은 물질을 지칭하는 단어였는데, 아랍인들에게는 특히 수소화 안티몬인 스티빈이나 황화 안티몬의 분말을 의미했다. 유럽에서는 중세 연금술사들이 이 단어를 ‘알콜 al kohol’로 표기하면서 사용하였는데, 16세기 연금술사 파라켈수스는 증류된 액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13세기 신학자 레이몽 륄은 “화주 (l'eau-de-vie, 생명수라는 뜻), 그것이 바로 포도주의 본질”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서 증류를 거쳐 속된 부분이 제거된 포도주를 지칭하는 ‘알코올 비니 alcool vini’라는 표현이 나왔다. 아직도 프랑스에서는 메칠 알코올(메탄올)을 ‘목정(木精) esprit-de-boi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17세기에 ‘알코올화하다 alcooliser’라는 표현은 ‘분말로 만들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증류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아랍인들은 이렇게 정제하여 만든 알코올을 의학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노인을 젊게 해주고 생명을 연장해주는 약효가 알코올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로부터 ‘aqua vitae(생명수라는 뜻, 화주)’라는 라틴어가 비롯하였다. 16세기 유럽에서도 음료나 약용으로 에칠 알코올(에탄올)을 사용하였지만, 오늘날과 같이 그 화학적 구조를 알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게-뤼싹, 장-밥티스트 뒤마, 마르스랭 베르트로와 같은 화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술의 종류는 크게 양조주, 증류주, 혼성주로 나뉜다. 양조주는 발효주로서 발효 방법에 따라 세분되며 포도주, 사과주(시드르), 맥주, 청주, 탁주 등이 있다. 증류주는 원료에 따라 세분되며 과실이 원료인 경우 포도로 만든 브랜디와 사과로 만든 칼바도스가 있고 곡류가 원료인 위스키, 보드카, 소주가 있으며 그 외에 당밀로 만든 럼주나 곡류에 향유 원료가 혼합된 진 등이 있다. 혼성주는 증류주에 색소나 향료, 초근목피, 과즙 등을 섞은 것으로서 리쾨르, 합성청주, 합성과일주 등이 있다. 
  술 자체의 기원은 사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알코올’이란 낱말의 언어적 기원과는 상관없이 술과 관련된 문화는 신화의 시대에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존재하며 그가 주로 마시는 술은 디오니소스가 쓰고 있는 포도송이로 만든 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포도주다. 포도주와 같이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발효주는 기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 인류의 사랑을 받아왔다. 
  헤시오도스는 그의 작품 『일과 날』에서 “디오니소스의 선물”인 포도주 담는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오리온과 세이리오스가 중천에 오르고
장밋빛 손가락의 에오스가 아르크투로스를 보게 되면, (9월 초)
페르세스여, 그대는 포도송이를 모두 따 집 안으로 들이시라.
그리고 열흘 낮 열흘 밤 햇볕에 보이고 나서
닷새 동안 덮어두었다가 엿새째 되는 날
즐거운 디오니소스의 선물을 독에 담으시라.”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B.C.8세기)

  그러나 디오니소스 신이나 바쿠스 신의 축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술 문화의 상징체계는 쾌락만큼이나 광기의 위험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풍요와 희생, 위안과 폭력이라는 양면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디오니소스 신화는 판본에 따라 포도나무의 기원과 속성을 밝혀주는 것만이 아니라, 포도주 음용에 따른 효과는 물론이고 지나친 음주에 따른 폐해도 경계하는 교훈도 덧붙여 갖고 있다. 

어느 날 디오니소스는 길을 가다 나뭇가지 하나를 줍게 된다. 이 나뭇가지를 새의 뼈 속에 한 번, 그리고 사자의 뼈 속에 한 번, 마지막으로 당나귀 뼈 속에 한 번 넣었다 뺀다. 훗날 이 나뭇가지가 낙소스 섬에 심기어 최초의 포도나무로 자라나게 되고, 이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로 최초의 포도주가 만들어진다. 그래서인지 포도주를 마시면 처음엔 새처럼 재잘거리고, 다음엔 사자처럼 난폭하게 변했다가, 마지막으로 당나귀처럼 우매해진다고 한다. (판본 미상)

  헤시오도스의 『단편』에서도 이 오랜 전통을 지닌 포도주를 환희와 고통을 동시에 주는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디오니소스가 인간들에게 환희와 고통이 되도록 준 선물들처럼,
많이 마시는 자에게는 포도주가 미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들로 두 발과 두 손과 혀와 이성을 
묶게 된다. 그러면 부드러운 잠이 그를 포옹한다.”(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B.C.8세기)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에서 ‘술 алкоголь’은 보드카로 통한다. 현대어에서 보드카는 40도의 주정 희석식 술을 의미한다. 러시아어 어원상 보드카는 물을 뜻하는 ‘보다 вода’와 연관된다. 보드카는 물의 지소형이자 애칭, 즉 ‘작은 물’이라는 ‘말렌카야 보다 маленькая вода’, ‘보디츠카 водичка’, ‘보돈카 водоньк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알코올이 함유된 액체가 작은 양으로도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점에서 물의 지소형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물이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처럼 만큼 보드카가 러시아인에게 친숙하고 긴요한 물질로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상품을 지칭하는 용어로 보드카는 1936년에 확정되었다. 그 이전까지 보드카는 밀이나 감자 등 곡류를 증류하여 제조된 것으로 알코올의 질과 함유량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에틸알코올 희석식 국가 표준이 정해지고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보드카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드카는 러시아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고농도 에탄올을 함유한 액체를 증류식으로 추출한 술 일반을 가리키는 전통적 의미의 보드카와 에틸알코올 희석식으로 생산한 표준화된 보드카가 그것이다. 따라서 보드카는 술에 대한 일반적인 통칭이자 일정한 상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품으로서 보드카는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사용되지만 러시아에서는 반드시 상품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술, 심지어 포도주까지도 보드카로 부를 정도로 보편적인 알코올을 지칭하는 것이다.
  보드카라는 용어는 1533년 노브고로드 연대기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때 보드카는 상처에 바르거나 두통을 치료하는 약제로 사용되는 용어였다. 공식 문헌에서 술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보드카는 1751년 엘리자베타 1세의 칙령 『보드카 증류기 소지 허가권 발급에 관하여』에 나타난다. 그러나 보드카라는 단어가 보다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폴란드에서는 보드카가 폴란드어 ‘wódka’에서 유래하며 러시아에서보다 백여 년 앞서 먼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여 명칭의 기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국제 소송이 전개되기까지 한다. 1982년 국제중재재판소 결정에 의해 러시아의 독창적인 알코올음료로서 생산의 우선권이 인정되었다. 보드카에 ‘러시아에서 생산된 보드카만이 진정한 러시아 보드카!’라는 문구를 러시아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에서 생산된 보드카만이 러시아 보드카라는 당연한 동어반복의 중재였을 뿐, 러시아만이 보드카를 생산하고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러시아 보드카’라는 말이 세계적으로 사용되면서 보드카는 러시아 보드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통용되는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40도 보드카를 만들었다는 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일종의 신화이다. 멘델레예프는 학위 논문에서 에탄올과 물이 46:54의 비중으로 결합할 때 혼합액 양이 최소화된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사실 그것은 혼합액 양을 측정할 때 발생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로서 40도 보드카와는 무관했다. 이미 보드카는 19세기 초에 38도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 보통 포도주를 가열처리하여 그 양을 절반으로 줄이면 약 38.3도에 이르는데 러시아에서는 이것을 ‘폴루가르’라고 불렀고 보드카 도수의 기본 단위로 간주했다. 하지만 계산상의 편리를 위해, 세율 적용의 극대화를 위해, 그리고 ‘유통과정에서 자연 증발을 고려하여’ 관리들이 이를 40도로 취급하였고, 그 과정에서 1886년 40도 보드카가 국가 표준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보드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과 무관하게 전통적으로 러시아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보드카를 제조해 마셨다. 그러나 음주를 금하는 러시아 정교의 영향으로 러시아 사회는 보드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가급적 피하고, 대신 포도주와 관련된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다. ‘곡물 포도주, ‘끓인 포도주’, ‘막사 포도주’, ‘뜨거운 포도주’, ‘러시아 포도주’, ‘취하게 하는 포도주’, ‘쓴 포도주’ 등등 포도주와 연관하여 보드카를 지칭하는 용어는 제조방법과 용법에 따라 수십 가지에 이른다. 또한 집에서 만든 술이라는 ‘사모곤’(‘자신이 직접 증류한 것’)은 오늘날에도 밀주 보드카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된다. 제조법이나 알코올 농도의 차이가 있고 시기가 다르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보드카의 다른 역사적 명칭이다.

  988년 고대 러시아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알코올은 대공의 연회나 추모 연회, 이교적 종교 제의, 민중 연회, 각종 기념일 및 잔치에 널리 이용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의 술은 ‘꿀술’이나 ‘브라가’(집에서 만든 맥주 종류) 등 알코올 도수가 미미했다. 대공이 베푸는 연회와 손님 접대에 빠짐없이 제공되는 알코올음료는 군주와 민중의 결속을 다지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알코올 증류 방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귀리와 밀을 비롯한 다양한 식물의 즙과 버섯의 야생 효모를 활용하여 몇 차례의 증류를 통해 도수가 높은 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재증류하여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들어 마시는 행위도 성행한다. 
  19세기에 원료인 귀리가 점차 감자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보드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토대가 갖추어진다. 그리고 현대의 보드카에 준하는 맛과 순도에 접근해간다. 19세기 말 정부 기술위원회가 설립되어 위생적으로 안전하고 순수한 보드카 제조기술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96도에 달하는 순수 에탄올을 추출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이를 통해 생산된 보드카는 ‘깨끗한 순수 보드카’, ‘국고 보드카’라는 명칭을 얻고 특허를 획득한다. 이런 발전은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 보드카가 세계 최고이며 러시아 문화의 귀한 가치라는 자부심을 더욱 강고하게 해주었다.
  1936년 화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소련은 보드카 생산 방법을 혁신하여 현대의 보드카를 탄생시킨다. 기존의 증류식이 아니라 고도로 정제된 에틸 알코올을 증류수와 혼합하고 특수한 여과과정을 거쳐 순도와 맛을 결정하는 표준화된 보드카가 대량 생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부터 기존의 보드카와 민간 제조 보드카는 ‘보드카 류의 제품들’로 불리고 현대적으로 표준화된 희석식 보드카가 일반적인 보드카로 불리기 시작한다. 
  보드카가 세계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이다. 많은 나라에서 보드카를 제조 생산하고 대중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폴란드나 스웨덴을 비롯하여 보드카 제조 전통이 러시아 못지않은 나라도 많지만 대체로 세계적으로 널리 제조되고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에 들어서이다. 알코올 도수 역시 32도에서 50-60도에 이르는 등 다양하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밀주로 제조되는 러시아의 ‘사모곤’은 80-90도에 이르기까지 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프랑스에서는 포도주가 술 토포스의 중심을 차지한다. 특히 ‘알코올’이란 어휘보다는 ‘포도주’란 단어가 그 오랜 기원만큼이나 풍부하고 지배적인 어휘목록을 펼쳐낸다. 게다가 ‘알코올’이란 단어를 사용한 문장에서도 상당수의 문맥은 ‘포도주’가 이미 구성한 의미체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문화 속에서 술을 대표하는 제유법적 어휘는 ‘포도주’다. 
  술을 음용하는 행위에 관한 여러 언어적 표현은 인류 문명의 전반에 걸쳐 매우 보편적인 성향을 보인다. 음주 행위에 대한 찬양과 경계의 표명은 거의 대부분의 문명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술을 대표하는 포도주와 관련된 속담과 격언은 이 오래된 보편적 의미체계를 규범화하여 드러낸다. 
  프랑스에서는 술에 대한 찬양이 경계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과도한 음주를 경계하는 격언이나 표어도 물론 있지만, 이것들은 종교적 교리나 사회 질서를 우선적으로 중시하는 문화와 체제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육체적 건강을 중시하는 풍조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와는 달리 고달픈 삶을 영위하는 민중이나 예술가들의 생활 속에서라면 술은 지난한 생의 위안거리요, 유쾌한 토론을 위해 혀를 풀어놓는 수단이며, 열정적인 삶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길인 것이다. 

“좋은 포도주는 인간의 마음을 유쾌하게 한다.” (속담)
“포도주가 없으면 모든 게 없는 것.”(속담)
“포도주 없는 하루는 태양 없는 날이다.”(프로방스 속담)
“먹고 마시는 것은 육체와 정신을 결합한다.(알자스 속담)

  술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삶에 열정과 즐거움을 불어넣는 강력한 마법의 액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속담에는 포도주와 여성을 비교하는 표현이 적지 않다.

“좋은 포도주와 아름다운 여인은 멋진 두 가지의 독이다.”(속담)
“포도밭과 아름다운 여인은 지키기 어렵다.”(속담)
“여주인이 예쁜 곳엔 포도주도 좋다.”(속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기 시작하면 여인을 멀리 하고 술병을 잡아라.”(속담)

  술을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도 좋고 몸도 데워진다는 주장도 종종 격언처럼 거론되고 있으니, 이를 단지 술꾼들의 술 마시기 위한 핑계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편협한 정신의 발로라 할 것이다. 

“한 잔의 적당한 포도주는 의사에게서 은화 1냥을 앗아간다.”
“포도주 한 잔이면 따스한 모피 옷 한 벌.”

  하지만 이를 구실로 삼아 포도주 한 잔을 보약처럼 여겨, “샐러드 먹은 뒤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면 몸이 아플 위험이 높다.”라는 주장을 격언으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으니, 사실 술꾼을 위한 어쩌면 술꾼에 의한 술의 찬양은 끝이 없을 정도다.

“술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잠을 잔다. 잠을 자면 죄를 저지르지 않고,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자는 천국에 간다.”(브르타뉴 격언)

  로마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외친 마르틴 루터도 술에는 관대하다. 

“술도 여자도 노래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 바보로 남을 것이다.”

  물론 예수에 기대어 술을 예찬하려는 잔꾀 부리는 주정뱅이도 없진 않다. 

“예수는 포도주를 물로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속담)

  혹시 마음속에 과음에 대한 걱정이 생기더라도 살아가면서 그다지 이룰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알코올은 천천히 죽인다. 그러면 어때, 바쁜 일도 없는 걸.”(속담)

  시시콜콜 음주와 건강에 대하여 잔소리를 늘어놓는 친구라도 술좌석에 끼면 한 마디 던질 수 있게 만들어진 상투어도 있다.

“술 마셔라. 아니면 꺼져라.”

  좋은 포도주는 오래 숙성한 것이다. 인간관계를 이에 비교하기도 한다. 

“좋은 친구는 포도주와 같다. 오래될수록 최상이다.”

  술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는 수단이다.

“물속에선 자신의 얼굴을 보지만, 포도주 속에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본다.” 

그래서 이런 속담까지 나온다.

“사람과 포도주는 저녁과 아침에 맛보지 않으면 판단하지 마라.”

  물론 과음을 경계하는 상투어나 격언도 적지 않다. 

“술이 들어오면 이성은 나간다.”
“좋은 술에 나쁜 머리.”
“과음은 기억을 잠식한다.”
“술은 좋은 하인이지만 고약한 주인이기도 하다.”

  술이 들어오면 말이 많아지고 자주 속마음을 발설한다.

“진실은 포도주 속에 있다.”
“술과 고해는 모든 것을 밝힌다.” 

  16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도 포도주는 “가장 내밀한 비밀도 모두 털어놓게 만든다.”고 속담에 동조한다. 
  과음을 아무리 문제 삼아도, 오래 전부터 속담은 사실상 음주에 대한 변명과 옹호를 더 많이 늘어놓는다.

“목욕과 포도주와 비너스는 우리의 육신을 쇠약하게 한다. 그렇지만 목욕과 포도주와 비너스가 삶을 만든다.”(라틴 속담)
“갈증을 허락받았다면 마시는 것도 허락받은 것.”(라틴 속담)
“인간은 포도주를 마시고 다른 동물들은 샘물을 마신다.”(라틴 속담)
“저녁에 술을 마셔 몸이 괴로우면, 아침에 다시 마셔라. 그러면 낫게 되리라.”(라틴 속담)
“술이 일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일하는 것을 멈춰라.”(브르타뉴 격언)

  결국 로마인들은 멸망을 감수하며 이런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존재한다. 그러므로 마신다. 마신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틴 속담)

  이런 라틴 문화 속의 포도주 예찬은 20세기에 와서도 토속적인 정서를 문학 속에 담아내는 작가에게라면 여전히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 밀은 익었을 때 베어내야 하는 것이고, 포도주는 마개를 땄을 때 마셔버려야 하는 것이라오.” (알퐁스 도데, 『풍차방앗간 편지』, 1869) 

  앞에서 인용한 알퐁스 도데만이 아니라 그전에도 프랑스의 작가나 지식인들은 술에 대해서 - 대부분 포도주 얘기지만 - 많은 말을 남겼다. 술에 대한 절제는 욕망의 절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욕망은 해방시켜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조절하고 억제해야 할 대상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술에 대한 태도도 상당히 다르다. 
“마음껏 마셔라.”, “원하는 대로 해라.”, 이런 말들을 금언처럼 그의 연작소설 『팡타그뤼엘』에 남긴 16세기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는 “포도주는 세상에서 가장 문명화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르네상스적 인간 해방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고전주의 극작가인 라신에게도 포도주는 찬미의 대상이다. 비록 라신이 조화와 질서와 절제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자였지만, 작품의 단단한 형식 속에 정염의 불꽃을 가두어 더욱 폭발적으로 그 억눌린 힘이 분출될 수 있게 하였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포도주를 찬양하는 방식도 그의 글쓰기를 연상시킨다.

“술병을 딸 때 코르크 마개가 내는 파열음은 북이나 트럼펫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로 내게 들려온다.”

  블레즈 파스칼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17세기 고전주의적 중용의 미덕을 적절하게 음주 행위에 적용한 예다.

“지나치게 많은 술이나 지나치게 적은 술은 진리를 막는다.”

  프랑스대혁명의 전조이면서 또 혁명의 분위기를 돋우는데 기여를 한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전래되던 속담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풍자적인 표현을 들을 수도 있다.

“마담, 갈증 없이도 마시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누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 짓게 한답니다.” 

  포도주나 술에 대한 언급에서 시적 영감이나 지식과 지혜를 결부시키는 일은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부쩍 늘어간다. 특히 19세기 이후에는 시인이나 소설가 그리고 지식인들의 글에서 근대 사회의 각박한 현실을 회피하거나 극복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포도주에 대한 찬양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우선 낭만주의자들은 술에 대한 찬양에 매우 적극적이다. 취기에 빠져들기만 하려는 도피적인 경향도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억압된 내면의 욕망을 해방시키려는 의식이 작용한다. 

“취하기만 한다면 어떤 술병이든 무슨 상관있으랴.” (알프레드 드 뮈쎄)
“신은 물만 만들었지요. 하지만 인간은 포도주를 만들었소.” (빅톨 위고)

  낭만주의의 세례를 적지 않게 받은 알렉상드르 뒤마는 포도주에서 단순히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포도주는 한 끼 식사에서 지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고기와 야채는 물질적인 부분일 뿐이다.”

  19세기의 유명한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는 자연 발효가 만들어낸 포도주 속에서 지혜를 발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모든 책보다 한 병의 포도주 속에 더 많은 철학과 지혜가 담겨 있다.” 

  19세기 시인 테오도르 드 방빌은 “포도주의 밑바닥엔 영혼이 감춰져 있다.”고 말했다. 
  동시대 시인인 샤를 보들레르는 포도주 예찬에 누구보다도 열성을 보인다. 그에게 도취하는 것은 물질적 현실에서 벗어나 광대한 정신의 영역에 입성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에게 순교 당하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취하라! 포도주에건, 시에건, 미덕에건
그건 마음 내키는 대로. (보들레르, <취하라!>, 『파리의 우울』, 1869)

  이러한 시인에게 ‘포도주의 혼’은 시적 영감의 씨앗이다. 

너의 몸속에 떨어져 신묘한 식물성 양식이 되고
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소중한 씨앗이 되리
그리하여 우리 사랑에서 시가 태어나
신을 향해 귀한 꽃 한 송이처럼 활짝 피어나리.
(보들레르, <포도주의 혼>, 『악의 꽃』, 1857)

  보들레르는 그의 시집 『악의 꽃』에서 ‘포도주’에 대하여 무려 5편의 시를 할애하였는데, 위에 인용한 시 외에 <넝마주의들의 술>, <살인자의 술>, <고독한 자의 술>, <연인들의 술>이 있다. 여기서 포도주는 덧없는 인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황금의 강’이 되기도 하고, 살인의 두려움과 후회를 잊는 수단이기도 하며, 고독한 시인에게는 어떤 의기양양한 활력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 연인에게 사랑의 신기루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현실 세계에서 소외되거나 실패하거나 혹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술이 갖는 의미는 결국 또 다른 진실로 등장하는 상상의 세계와 결합된 것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은 작품 『크라이슬레리아나』에서 포도주에 대한 상상력을 음악과 관련하여 펼친다. 두 가지 모두 도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생각이 있는 음악가라면 희가극을 작곡할 때 샴페인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샴페인을 마시면 희가극이라는 장르에 필요한, 거품이 일듯 풍성하고 경쾌한 느낌을 찾는다는 얘기다. 종교음악의 경우에는 라인 또는 쥐랑송 산 포도주가 제격이다. 심오한 사상의 근저가 그러하듯이, 라인 산이나 쥐랑송 산 포도주에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쓴맛이 있다. 그러나 영웅적 음악을 작곡할 때는 부르고뉴 산 포도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 이 포도주는 진지한 격정과 애국심으로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다.”(보들레르 외, 『포도주 예찬』) 

  보들레르는 『포도주와 하시시에 관하여』에서 호프만의 이 글을 인용하면서 “내가 볼 때 이런 정신적 척도와 포도주의 음악적 특질에 대한 설명은 분명 형제처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결론을 짓는다. 
  감각들의 상응이론을 응용하여 포도주나 술의 음악적 특질에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보들레르에 이어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에서도 볼 수 있다. 술이 주는 감각적 쾌락을 청각적 연상 작용을 통하여 자신만의 몽상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는 주인공 데 제쎙트는 가히 현실도피의 대가라 할 만한 인물이다. 이 인물은 술통으로 이루어진 “미각 오르간”이라는 장치를 만들기까지 한다. 

“그는 식당으로 갔다. 식당의 벽 중 하나에는 붙박이장이 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백단나무로 된 아주 작은 받침대들 위로 아랫배에 은제 꼭지를 단 작은 술통들이 나란히 줄지어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모인 술통들을 미각 오르간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관에 모든 꼭지가 연결되어 있어서 단 한 번의 조작만으로도 그것들을 작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기계가 장치된 다음에는 나무판 안에 숨겨진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 모든 꼭지가 동시에 열려서 아래에 위치한 아주 자그마한 종지들에 술을 채우는 게 가능하였다. 
오르간은 열린 상태였다. ‘플루트, 호른, 천상의 소리’라고 표기된 서랍들이 꺼내져 작업을 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데 제쎙트는 여기저기에서 한 방울씩 따라 마셨고, 그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교향곡들을 연주하였으며, 자신의 목구멍에서 음악이 귀에 흘려 넣는 감각들과 유사한 감각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견해로는 각각의 술은 그 맛에 있어서 하나의 악기의 음색과 일치하고 있었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1884)

  이 인물은 술들을 조합하여 입 안에서 현악 사중주도 연주하고, 술들이 만들어내는 음조의 차이도 고려하면서 유사한 결합, 대조, 혼합을 통해서 작곡가들의 음악 작품도 미각의 세계로 옮겨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파리로 오랜 만에 외출한 데 제쎙트는 주점 ‘보데가’에서 이번엔 술을 통해 문학적 상상세계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술잔들을 가득 채운 포르토 포도주의 자줏빛 앞에서 이 술을 그토록 즐겨 마시던 디킨스 소설의 인물들을 떠올리고, 상상 속에서 이 술집을 새로운 인물들로 채웠다. 이쪽에서는 윅필드 씨의 백발과 불그레한 얼굴을, 저쪽에서는 블릭하우스의 음침한 소송 대리인인 털킹혼 씨의 냉정한 표정과 준엄한 눈을 보았다. 모든 인물이 그의 기억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들의 행동거지를 보여주면서 보데가 주점에 정말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는 아몬티야산 포도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 단맛이 없고 희끄무레한 포도주 앞에서 영국인 소설가의 부드러운 무궁화 꽃과 같은 차분한 이야기는 한 잎 두 잎 꽃잎을 떨구었고, 에드가 포의 냉혹한 유도제, 고통스러운 피부 발적제가 솟아올랐다. 아몬티야 포도주 통과 지하실에 갇힌 사람의 서늘한 악몽이 그를 괴롭혔다. 홀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인과 영국인 손님들의 선하고 평범한 얼굴들이 그에게는 무의식적인 잔혹한 생각들, 본능적이고 혐오스러운 계획들을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거꾸로』, 1884)

  데 제쎙트는 술을 통해 소설의 공간과 인물을 연상하여 실제 세계를 상상의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에게 술은 가히 몽상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주인공의 몽상을 빌어 작가인 위스망스는 다양한 맛의 감각세계를 음악과 문학의 공간으로 바꾸어놓는 창조적 상상력을 펼친다. 
  보리스 비앙과 같은 20세기 젊은 작가들은 랭보가 그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썼듯이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포도주들이 흘러다니는 하나의 축제”처럼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리스 비앙은 ‘피아노 칵테일’이라는 것을 상상해내었는데, 이것은 음표 하나하나마다 그에 해당하는 술, 리쾨르, 향료를 대령하는 놀라운 시스템이다. 
  술이 창조적 영감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더 나아가 감각적 상응, 착란, 일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은 분명 낭만주의 이후 프랑스 작가들이 만들어낸 토포스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감각과 상상이 술과 가장 형이상학적으로 결합된 예는 시어를 가장 극단적인 표현 방식으로 밀고나갔던 말라르메에게서 볼 수 있다. 그가 1893년 1월 『라 플륌』지의 새해맞이 향연에서 낭독했던 시 <축배>는 예술적 모험을 향해 떠나는 모든 시인들과 예술가들에게 바쳐진 것이다. 이때 술은 술잔의 형상을 표시하던 순수시를 암시하면서, 그와 동시에 결국은 사라져 오직 도취감이라는 효과로만 남을 시어의 내용으로 환기된다. 언어와 시적 효과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면서 말라르메는 술의 토포스를 시적 모험의 형이상학과 결합시킨다. 

무, 이 거품, 순수한 시
오로지 술잔만을 가리키는 것.
저 멀리서 거꾸로 뒤집히며 
사이렌들 무리 수없이 가라앉는다.

오 나의 다양한 친구들이여, 우리 항해하누나.
나는 이미 선미에 있고, 그대들, 
천둥소리로 부딪혀오는, 겨울의 차디찬 
물결 가르는 화려한 선두에 서서.

멋진 도취감에 젖어 나는
흔들림에도 두려움 없이 
서서 이 축배를 드니,

고독, 암초, 별
우리의 돛에 담긴 하얀 근심에
걸맞은 것이라면 그 무엇에라도 건배. 
(말라르메, <축배>, 『시』)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프랑스에서는 시와 예술의 도취적 감흥을 술과 자주 비유하였으며, 아폴리네르는 그의 시집을 아예 『알콜』이라 명명함으로써 시 자체를 술이라고 보았다. 이상의 사례를 종합하건대 프랑스에서 술의 토포스가 특히 19세기 이후부터 시와 예술의 문화지형 속에서 또 다른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는 시적, 예술적 상상세계와 결합하면서 하나의 중요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술에 대한 좀 더 일상적인 의미부여는 역시 술을 통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쉽게 세상사에 관하여 논쟁을 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일상적인 진실과 결합된 술의 토포스는 민중들의 삶을 다루는 소설 속에서 쉽사리 찾아낼 수 있다.

“전쟁 이전에는 포도주와 정치가 서로서로에게 의지해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포도주는 정치 위에, 정치는 포도주 위에 무럭무럭, 새록새록, 쑥쑥 자라갔다. 그러나 포도주의 정기가 떠받쳐주지 못하는 오늘날의 정치란 신문지상에서나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었다.”(마르셀 에메, 『파리의 포도주』, 1947)

  마르셀 에메는 단편소설 『파리의 포도주』에서 포도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진 전쟁(2차 세계대전) 직후에 포도주를 못 마셔서 결국은 주변의 사람들이 포도주병으로 보일 정도로 미쳐가는 듀빌레 씨를 묘사하면서 포도주가 민중들에게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언어의 축제, 대화의 만개를 포도주가 돕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앞에서 열거한 속담에서도 “진실은 포도주 속에 있다”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발자크의 소설 『마법 가죽』에서 주인공 라파엘이 우연히 참석한 만찬회 풍경은 술이 만들어내는 갑작스런 향연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돌자 사람들의 마음은 후끈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모두가 얘기를 하면서 먹고, 먹으면서 얘기했다. 술이 얼마나 흥청망청 넘쳐나는 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럴 정도로 술은 사방에 넘쳐났고 향기로웠으며, 술 마시는 분위기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염되었다. 연회의 주인은 손님들의 흥을 돋운다고 신이 나서, 론 강 유역에서 생산된 포도주며 루시용 지방의 오래 묵은, 사람을 홀리듯 취하게 하는 포도주를 내오게 했다. 그러자 소포짐을 싣고 역참에서 떠나는 말들처럼 고삐 풀린 상태가 되어 안절부절 못하며 기다리다, 풍성하게 부어진 샴페인의 콕콕 찌르는 화살을 맞은 이들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이성적 추론의 빈 공간 속에 정신을 풀어놓아 마구 뛰놀게끔 했다. 그리하여 듣는 사람도 없는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고, 아무 대답도 없는데 누군가를 백 번쯤 부르고 또 불러댄다.” (발자크, 『마법 가죽』, 1831)

  그런데 프랑스 19세기에는 ‘문 밖 술’이라는 흥미로운 표현도 있다. 파리 시에서 술에 비싼 세금을 부가하자 가난한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파리 시의 문밖에 나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성문이 닫히면 성문을 여는 다음날 아침까지 술을 마신 후에 보란 듯이 입성을 하면서 술에 비싼 세금을 부가한 것에 항변하는 몸짓 시위를 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무엇을 하겠는가? 당연히 뜨거운 열정과 과감한 추론이 뒤섞인 웅변과 토론이 오갔을 것이고 더 나아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여론도 형성되었을 테니, 술이 웅변과 저항의 정신을 불어넣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빅톨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도 이에 관한 언급이 있으니 인용해 두겠다.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묘사 속에 여러 번 되풀이해 나온 ‘앙뜨완느 성 밖’의 술집들은 역사상으로도 유명한 집들이다. 혁명 시절에 사람들은 거기서 술에 취하기보다 말에 더 취했다. 예언자 같은 정신과 미래의 청신한 바람이 떠돌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고 영혼을 살찌게 했던 것이다.”(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862)

  그렇지만 음주가 지나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자신만의 이야기만 풀어놓는 술주정뱅이에게 술은 이미 소통의 향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풍요로운 상상과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하는 ‘깊은 웅덩이’와 ‘암흑’의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마약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빅톨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술 좋아하는 대학생 그랑떼르를 등장시키면서 음주 상태에 대한 짧은 평을 남긴다. 

“그랑떼르는 정오쯤부터 차츰 포도주라는 몽상의 인색한 샘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포도주란 진정한 술꾼에게는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다. 술에 취하면 희고 검은 환상들이 보인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은 흰 환상이다. 그랑떼르는 그런 환상들을 겁도 없이 탐했다. 환상의 끄트머리에 무시무시한 암흑이 얼핏 모습을 드러냈지만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그랑떼르는 포도주병을 내던지고 커다란 맥주 조끼를 집어 들었다. 커다란 맥주 조끼, 그것은 곧 깊은 웅덩이와 같았다. 아편도 마약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머릿속을 황혼의 어스름으로 채우기 위해, 그는 저 무서운 혼수상태를 빚어내는 브랜디와 스타트와 압쌩뜨의 독한 혼합주의 힘을 빌렸다. 영혼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드는 것은 맥주와 브랜디, 압쌩뜨, 이 세 가지가 발산하는 증기이다. 그것은 세 가지 암흑이어서 천상을 나는 나비도 거기에서는 빠져 죽게 된다. 또한 어렴풋이 박쥐의 날개로 응결된 피막의 연기 속에 ‘악몽’과 ‘밤’과 ‘죽음’의 말없는 복수의 세 여신이 잠든 프시케 위를 날아다니면서 모습을 나타낸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862) 

  시적 영감도, 상상력의 발산도, 세상사에 대한 토론도, 축제의 해방감도 아닌 것을 위한 음주 행위는, 예를 들어 의도적인 일체감을 위하여 기획된 술판이나 현실도피를 위한 피신처로서의 알콜 중독은 술의 토포스적 의미를 상투적으로 고착시킨다. 술이라는 물질의 생물학적 효과와 의례화된 의미부여에 기대어 어떠한 문화적 정당화를 기획하는 것은 술이 지닌 풍부한 상징체계를 자칫 왜소하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상투적인 인식과 행위의 결과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결국 “술은 우리의 적”이라는 경고성 문구를 되새기게 할 뿐이다. 술에 반사회적인 의미가 덧붙여질 때는, 술에 의한 소통과 도취와 창조적 상상을 부정적으로 상투화하여 타인에게 강압과 폭력을 유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경우에 한정될 따름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인들은 보드카에 대해 이중적이고 대립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편으로는 일상적으로 몹시 애용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보드카를 찬미하지는 않는다.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우리끼리’ 마신다는 일종의 동아리 의식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정부와 정교회가 공식적으로 음주 행위를 악덕으로 규정해왔기 때문에 그런 의식이 내면화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드카에 관련해서 부정적인 문헌이 훨씬 많다는 점이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에서 포도주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확연히 구별된다. 부정적 문헌의 공식성에 반해 민중의 보드카 애호는 은폐된 형식으로 언표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공동체에서 집단으로 술을 즐겨 마시고 손님 접대에 술이 빠지지 않았다는 많은 역사적 증언들은 러시아 민족의 술 사랑이 각별했음을 말해준다. 10세기 초반 러시아를 여행한 아랍의 여행가 이븐 파들란은 "그들은 비이성적으로 포도주를 마셔댄다. 밤낮으로 마신다"고 기록하였다. 금주 문화권의 이슬람 여행가의 눈에 러시아인들은 너무 많이 마시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또한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비치는 이슬람 사절단을 맞이하여 “루시는 마시는 것을 즐긴다. 그런 생활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가 당시 세력이 강하던 이슬람교가 아니라 쇠약해가는 동로마제국의 정교를 수용한 것이 술 때문이라는 속설이 유통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 러시아 민족이 일상생활에서 술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폭음을 즐긴 것은 아니다. 대공의 말은 술을 허용하지 않는 무슬림 사절단에 대해 공손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사였다. 
  고대 러시아 인들의 음주 문화는 영웅서사시에서도 종종 확인되는데, 여기서 음주는 개인과 집단, 집단과 군주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는 일종의 제의적 행위와 연관된다. 이를테면 영웅서사시 속의 한 주인공 일리야 무로메츠는 삼십여 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가는데 두 명의 순례자가 찾아와 그의 사명을 일깨워준다. 예의 이 장면에서 꿀술이 등장한다.

“순례자들은 경건히 성호를 긋고,
정중히 인사하고,
잔에 꿀술을 따라,
일리야 무로메츠에게 가져오네.
잔에 담긴 꿀술을 쭉 들이키자,
그의 심장이 용기백배하여 뜨겁게 달아오르고,
그이 흰 몸뚱이가 땀에 젖어든다.
순례자들이 엄숙히 물었지.
“기분이 어떠시오, 일리야?”
일리야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올렸네.
“내 몸 안에 위대한 힘이 느껴집니다.”
순례자들은 말했네.
“일리야, 자네는 위대한 영웅이 될 걸세.
죽음도 자네를 위협하지 못하지.
싸우고 대적하게, 세상 모든 영웅들과
용맹스런 모든 이들과[…]”

  이렇게 고대 러시아에서 사용된 전통적인 발효주 꿀술은 시골 구석의 농사꾼 앉은뱅이 일리야 무로메츠를 괴물과 이민족으로부터 러시아 민족을 지켜내는 영웅으로 만들어준다. 개인의 잠재된 능력을 일깨워주는 민중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영웅서사시에서 술이 긍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괴물이나 적은 ‘포도주’를 한 양동이씩 게걸스럽게 먹고 취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영웅서사시가 후대에 문자로 채록된 것임을 고려하면 러시아 전통술과 외래의 포도주를 대비시키는 상징적 가치체계가 언제부터인지 거기에 개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러시아에서 음주는 종교적 규범에 따라 공동체의 행위로 잘 통제되고 관리되었다. 러시아 정교는 음주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날에만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엄격하게 음주 행위를 관리하였고 폭음과 만취를 죄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는 기독교 축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술이 등장했던 ‘선조 공양일’, 결혼식, 수확일 등과 같은 전통적인 러시아 축일을 기독교 축일로 수용하여 민중적 전통과 결합하였다. 그런 날에는 당연히 술이 준비되곤 했다. 이때까지의 술은 매우 약한 도수의 술이었고 심지어 포도주조차 몇 배로 희석하여 마셨다. 대체로 보드카로 불릴 만큼의 강한 도수의 알코올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식량인 곡류로 만들어야 하는 술은 일상적으로 마시기보다 특별한 날에 마실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보드카가 널리 보급되면서 공동체의 공동 행위로서의 음주는 술집이나 가정에서 개인이나 지인들끼리 마시는 사적인 행위로 성격이 변화한다. 이와 더불어 술을 경고하는 속담과 경구도 많이 생겨난다.

“그리스도 축일을 대비하여 술을 마시는 죄를 저지르지 마라.”(즉 평일에도 술을 마시는 것은 죄악이다.)
“한 잔은 건강을 위해, 두 잔은 즐거움을 위해, 세 잔은 한 숨을 위해.”
“바닥까지 마시면 선을 볼 수 없다.”
“일은 돈을 벌어주지만 술은 돈을 밟아준다.”
“첫 잔에는 막대기가 되고, 두 번째 잔에는 매가 되고, 세 번째 잔에는 아주 작은 새가 된다.”

  15세기부터 많이 출현하는 술에 대한 다양한 ‘말씀’들도 술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다. 『지극히 지혜로운 음주와 어리석고 무분별한 폭음에 대한 말씀』, 『철학자 키릴이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말씀』, 『음주에 대한 성자 철학자의 말씀』, 『음주에 대한 고대 선현의 경이로운 이야기』, 『지극히 지혜로운 음주에 관한 이야기』 등등 저자 미상의 ‘말씀’들이 다양하게 변주되며 출현하였다. 이들 ‘말씀’들은 당연히 지혜로운 음주를 권하고 과음과 폭음이 가져오는 불행을 경고한다. 
  본격적으로 독주가 제조되고 유통되면서 개인이 보드카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증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규제가 강화되면서 음주 행위가 음성화됨으로써 폭음과 알코올 중독이 매우 만연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도덕규범이나 풍속이 문란해지고 노동 생산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1551년 황제가 소집한 ‘스토글라브이 사보르’는 “신의 영광을 위하여 포도주를 마실 것, 폭음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물론 이 당시 러시아에서 포도주를 뜻하는 비노는 말 그대로 포도주를 말하기보다 보드카를 포함한 모든 알코올음료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당대의 『생활규범집』에는 음주에 대해 이렇게 경계한다. “술을 마시되 너무 많이 마시지 마라. 즐거울 정도로 포도주를 조금 마셔라. 하지만 취해서는 안 된다. 술에 취한 자는 신의 왕국으로 가지 못한다. 아내에게는 결코 어떤 식으로도 술을 주어서는 안 된다, 포도주도 꿀술도 맥주도. 술이 들어가지 않은 브라가나 크바스는 집안에서나 사람들 있는 바깥에서 마셔도 된다.” 이런 문헌들은 러시아에서 이제 음주 행위가 단순히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 그 이면에 개인들이 상당히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 그것도 폭음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처럼 실제로는 많이 마시지만 공식적으로는 엄격히 통제되는 이중적 상황은 보드카에 대한 러시아인의 이중적 태도를 형성한다. 
  술과 관련하여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자 이반 4세는 모스크바에서 보드카를 비롯한 술 판매를 금지하고 황실 친위대에만 허용하였다. 황제는 술의 주정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밀주 제조를 금지했다. 1533년, 황제는 음식과 술을 팔며 마을의 모임방 역할을 했던 기존의 전통적인 선술집 코르츠마를 폐쇄하고 카바크를 설치한다. 카바크에서는 안주나 음식의 제공은 엄격히 금지되고 오직 술만 판매하고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음주를 제한하려는 이 정책은 국가 세원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와 결합되어 오히려 러시아 음주 문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가에서 금한다 해도 귀족이나 부자들은 집안에서 얼마든지 술을 만들어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농민이나 도시 평민들은 카바크에서 안주도 없이 오직 술만 마셔야 하고 그래서 더욱 신속하게 취해버렸다. 더구나 세원을 확보하려는 정부의 의도 하에 카바크가 전국적으로 수없이 생겨남으로써 러시아 음주 문화는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의 세원 증대 정책과 정교회의 금주주의는 술의 제조와 판매, 음주에 대한 통제를 둘러싸 대립하기도 했지만 정부의 재정 조달이 우선시됨으로써 러시아 정부는 폭음과 만취의 문화를 방조하였다. 게다가 정부는 폭음을 막는다는 이유로, 그러나 실제로는 세금을 증대하기 위해 보드카 가격을 두 배로 인상하는가 하면, 질 낮은 보드카를 유통시킴으로써 농민들은 카바크에서 질 낮은 술을 비싸게 마시는 부조리의 희생자가 되었다. 결국 카바크에서 술을 마시다가 파산하거나 폭음으로 노동력을 상실하는 극단적인 현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7세기 중엽 모스크바와 주변 도시들에서 많은 농민들이 술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났는데, 특히 부활제 기간 동안 폭음에 빠져 파종기를 놓치는 일이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생하자 황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농민들을 진압하고 처벌한다. 1648년의 소위 ‘카바크 폭동’이다. 이후 알렉세이 황제는 러시아 술집을 개혁하기 위해 1652년 의회 격인 젬스키 사보르를 소집하였는데 이를 ‘카바크 사보르’라고 부른다. 여기서 술집 수를 제한하고 보드카 가격을 높이며, 일인당 판매량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음주가 가능한 날을 엄격히 제한하는 등의 칙령이 채택된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정책은 일관되게 지속될 수 없었다. 주류세가 당시 재정의 25%를 차지할 정도였다고 하니 정부로서는 마냥 음주를 억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18세기 표트르 대제나 예카테리나 여제 통치기에 주류 국가 독점 정책이 실시된 것 역시 음주량을 줄이고 근로 의욕을 높인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음주를 조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통계에 의하면 카바크는 19세기 중엽 전국에 50만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 보드카를 예찬하는 문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폭음을 악덕으로 규정하고 금주를 종교적 가치로 설교하는 종교적 문헌과 음주 행위를 규제하는 법적 행정적 규제와 관련된 문헌이 대부분이다. 종교적 금지와 행정적 규제 이면에는 규제해야만 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공식적으로 언표화되거나 텍스트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러시아인의 음주 애호를 보여주는 문헌은 오히려 외국인 관찰자들의 글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17세기 초반 러시아를 방문했던 독일계 학자 아담 올레아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러시아인들은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 폭음에 빠져 있다. 그들은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짐승처럼 무한정 술을 마시고 욕망이 일어나는 대상에 무작정 몰입해버린다. 폭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농민이나 성직자나 고관대작 등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의 러시아인들에게 만연해 있다. 이곳에서는 술에 취해 진흙탕을 뒹구는 일이 일상이다.”

  17세기 스웨덴 대사였던 표트르 페트레이 드 예를레준다는 또 이렇게 증언한다.

“쉬지 않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러시아인 사이에 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연회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은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는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적게 마시는 사람에게도 몹시 불만을 표한다. 대신 부어주는 대로 마시는 사람은 몹시 환대하고 최고의 친구처럼 대하곤 한다.”

  유럽인들이 슬라브 민족과 문화를 경시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상당히 일관된 이런 증언들은 러시아인이 얼마나 음주를 좋아했는가를 말해준다. 
  보드카로 인한 피해를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들 정도라고 판단한 여론에 따라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국가독점법을 부활시킨다. 새 국가독점법은 카바크를 폐쇄하고 대신 국영상점을 통해 마개로 봉인한 술을 살 수만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법은 다시 한 번 러시아의 음주 문화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국영상점 근처에는 술을 개봉하여 마실 수 있는 잔을 제공하는 잔술집들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보드카를 병 채로 들이키거나 여럿이 함께 둘러앉아 잔 하나로 돌려가며 마셨다. 저명 법학자 코니는 이렇게 증언한다. “술의 국영 판매가 도입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제 폭음의 원천인 카바크가 소멸할 것이라며 반겼다. 그리고 이제 집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바크는 사라지지 않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경우[…] 음주 습관과 방탕함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아내와 아이들까지도 보드카를 마시도록 만들었다. 카바크는 […]독버섯처럼 거리에 넘쳐났다.” 의사 베흐테레프는 이렇게 한탄했다. “러시아 민족은 40도 보드카를 마시는 불행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주로 포도주와 맥주를 마시는 서유럽 민족들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마신다. 문제는 독주가 특히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점과 한 잔 가득 한 번에 마신다는 점, 게다가 안주도 없이 빈속에 그렇게 마신다는 점이다. 이 경우 알코올은 다른 조건에서 동일한 양을 마실 때보다 훨씬 해롭다.” 이런 사회문화적 영향 하에 19세기에 이미 독주를 폭음하는 습관은 러시아의 민족적 전통으로 국내외에 널리 인지되기에 이른다. 1911년의 한 통계에 따르면 이미 보드카는 술 소비량의 90%를 차지한다.
  1914년 일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사상 초유의 금주법을 도입한다. 보드카를 비롯한 독주 판매가 금지되고 이어서 포도주와 맥주까지 금지된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강력한 금주법은 소련 시절인 1985년-1987년에도 시행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과격한 방법은 일시적으로 알코올 소비량을 감소시켰지만 사람들은 곧 각종 밀주와 화학 물질, 심지어 광택 니스와 래커 등 독성 알코올이 함유된 물질을 보드카 대신 마시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알코올 관련 질병이 만연하여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또한 이것은 러시아 음주문화에 또 한 번의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1990년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고 첫 취항한 러시아 비행기 조종사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알코올을 잘못 음용하여 사망한 사건은 러시아인의 악화된 음주 습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보드카에 대해 엄격히 통제하였지만 역시 세금 수입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음주를 허용하고 조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도덕적 규제와 재정 수입 사이에서 갈등하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자본주의 자본을 끌어들이기보다 주류세 수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러시아인들은 보드카를 상당히 비싸게, 상당한 법적 규제 속에, 그러나 다양한 자리에서 자주 마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드카는 귀하고 비싸고 어느 자리에도 빠질 수 없는 것이지만 공식적으로는 통제되고 금기시된다는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인식이 러시아인들의 의식 속에 더욱 깊이 자리 잡았다. 
  20세기 초에 형성된 음주 습관, 즉 독한 보드카를 안주 없이 단숨에 삼키듯 마시는 ‘북방 스타일’의 음주 습관과 길거리에서 병 채로 술을 마시는 풍경은 외국인들에게 러시아인이 술을 사랑하다 못해 알코올 중독 민족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보드카의 역사에서 보듯이 애초부터 러시아에서 음주가 널리 성행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교회는 음주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금주를 도덕적 가치로 설교했다. 그러나 폐쇄적인 정교회와 전제주의 정치, 정체된 사회구조, 엄혹한 자연환경, 불안정한 국내 정세와 이민족과의 전쟁 등과 같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그리고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세원을 늘리려는 정부의 주류 정책과 맞물려 건강한 러시아 민족이 폭음과 알코올 중독으로 내몰렸고 그 과정에서 보드카에 대한 러시아적인 특수한 가치체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근대 문학이 발전하면서 보드카는 개인의 성격과 사건의 전개와 관련하여 자주 문학적 형상화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문학작품에 보드카는 푸시킨의 『대위의 딸』에 처음 등장한다. 주인공이 ‘아니스 보드카’(아니스는 북아프리카 원산의 미나리과 식물로 그 열매의 기름으로 만든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러시아 보드카’라는 단어가 출현한다. 하지만 보드카가 특정한 문학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 시기 귀족들 사이의 회합과 연회에서 포도주가 많이 사용되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푸시킨은 포도주를 뜻하는 ‘비노’라는 단어를 예술혼을 일깨우는 뮤즈처럼 자주 사용한다. 

“시인을 위하여 차갑게 얼린
고귀한 포도주
[…]
그 매혹적인 액체가 흘러 흘러
정말 어리석은 짓을 많이도 하게 했었지.
정말 얼마나 많은 농담과 시구들,
논쟁들, 그리고 유쾌한 공상들을 일으켰는지!”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가득 찬 술잔을 끝까지 마시지 않고
삶이라는 축제를 일찌감치 끝내고
떠난 사람은 축복받은 자이다. 그리고
삶의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고
[…]
소설과 작별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자이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푸시킨의 시에서 ‘매혹적인 액체’는 즐거움과 예술적 상상을 자극하고 ‘가득 찬 술잔’은 ‘삶이라는 축제’로 비유된다. 물론 푸시킨은 포도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보드카를 포도주에 준해 표현하는 러시아어 용례를 고려하면 굳이 ‘비노’를 포도주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고 보드카를 포함하여 술에 대한 일반적 표현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술에 대한 낭만주의적 찬미는 19세기 리얼리즘 소설에 이르면 보다 구체적인 문학적 모티프로 활용된다. 술의 본질적 기능은 마시면 취한다는 것이다. 취하지 않는 것은 술이 아니다. 취한다는 것은 현실 속의 여러 제약과 한계를 망각하거나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문학 작품은 술의 바로 이런 기능을 활용하여 현실의 논리적 인과성과 도덕적 규범의 경계를 넘어 예술적 상상이나 환상, 즉 비현실적 현실상을 창조하고자 한다. 물론 단순히 술 취한 자의 악덕을 묘사하거나 현실적 무능함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술의 보다 본질적인 문학적 기능은 바로 현실의 경계 넘기, 비현실적 현실의 창조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는 알코올 중독자이다. 그는 자신의 무능함으로 창녀가 되어버린 딸에게 술값을 얻어내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워지기 위해서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무능과 죄악을 잊기 위해 그는 더욱 고통스럽게 술을 마신다. 어쩌면 그의 음주는 현실을 개조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달리 더욱 현실의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 몰락해가는 러시아의 전통적 현인의 형상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끝나고 나면, 그때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거다. <나오너라 너희들도! 주정뱅이들아, 나약한 자들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아, 너희들도 나오너라!> 우리들 모두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나가 서면, 말씀하실 거야. <너희들, 돼지 같은 것들! 짐승의 형상과 인이 쳐진 놈들! 그렇지만 너희들도 오너라!> 세상에서 제일 현명한 사람들과 합리적인 사람들이 소리를 치면서 말하겠지. <주여, 왜 이들을 받아들이십니까?> 그러면 말씀하실 거다. <지혜로운 이들아,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노라, 합리적인 이들아, 내가 받아들이노라, 이들 중에서 자신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내가 이들을 받아들이노라......> 그리고 우리에게 두 팔을 내미시면, 우리는 땅에 엎어져서...... 울면서......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때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거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해하게 되겠지.”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1866)

  때로 술은 현실을 도피하고 현실에서 아무런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모티프가 된다. 막심 고리키의 후기 단편 「에피소드」(1924)에는 현실 속에서 아무런 출구를 찾지 못한 당대 러시아 부르주아의 음주 기벽이 소개된다. 

“티토프 씨의 음주벽이 발동하면 그는 기사 발티스키를 불러서 열흘은 족히 술을 마셨는데 아주 기이하게 마셨지요. 어떻게 하느냐면 우선 점원 흐리스토포르를 시켜서 저녁에 숲 속 여러 곳에 스무 병도 넘는 술을 파묻어 놓으라고 시키는 겁니다. 병 꼭지가 보이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러고 나서 아침 일찍부터 두 사람은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 버섯을 찾으러 숲으로 나갑니다. 작대기로 땅을 파다가 술병을 찾아내겠지요. 보드카 술병을 찾아내면 좋아서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 하얀 버섯 있다! 그리곤 정자에 앉아 술을 다 비우고는 또 다시 버섯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 붉은 포도주는 붉은 버섯이고 샴페인은 샴피니온 버섯이고 코냑은 송이버섯, 리큐어는 갓 버섯입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찾는 순서대로 술을 마셔댑니다. 어떤 때는 리큐어부터 마시고 다 마시고 나면 다른 걸 찾아가죠. 티토프가 술에 만취하면 나부후도노소르 황제처럼 풀 위를 네발로 기어 다니며 오페라 ‘악마’를 읊으며 울부짖었지요.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
모든 산 것들이 저주하는 사람이로다...

하지만 발티스키는 땅바닥에 누워 땅에서 이빨로 술병을 끌어내지 못했다고 슬피 울어댔어요. 그렇게 울면서 한탄했지요. ‘내 힘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
(고리키, 「에피소드」,1924)

  불라트 아쿠자바를 비롯하여 1960, 70년대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던 음유시인들은 저자 노래시에서 러시아 청년들의 좌절과 희망을 보드카와 연관시켜 표현한다. 

“숲에서 탱크들이 나오며,
힘없이 눈길을 헤집는데,
저 집요한 우수
우리 뒤에 헛소리를 하네.

승리는 우릴 피해가지 않았고,
우릴 완전히 불태워 버렸어,
우린 추도식에서 보드카를 마시네,
마셔도 취한 자는 아무도 없네.

우린 정신없이 덮어놓고 마셔댄다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다섯 잔, 열 잔
쓰디쓴 술을 투하한다.”
(불라트 아쿠자바, 『엔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승리는 했지만 정작 러시아 현실은 희망을 노래하기 힘든 상황. 죽은 자들을 위해 보드카를 절망적으로 털어 넣는 모습에서 당시 러시아인들을 사로잡는 시대의 우수가 절절히 묻어난다. 
  베네딕트 예로페예프의 현대 소설 『모스크바발 페투슈키행 열차』는 주인공 베니치카가 끝없이 보드카를 마셔대다가 술에 취해 중언부언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의 복잡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와 사건은 전혀 논리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풍자와 알레고리로 현대 러시아의 부조리한 삶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여기서 보드카는 역시 현실을 벗어나 오히려 비현실 속에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예술적 모티프로 작용한다.
  보드카가 인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은 영화 『운명의 아이러니』에 극적으로 그려진다. 모스크바에서 새해를 앞두고 사우나에서 친구들과 보드카를 마시고 난 뒤 만취한 상태로 택시를 탄 주인공은 새해를 함께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약혼녀의 집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가 그곳에서 다른 집 초인종을 누른다. 거기서 다른 여자와 새해를 맞이하면서 벌어지는 운명의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술은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매우 보편적인 음료이다. 술의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고양시키는 음료로서 어떤 도취감과 관련된다. 여기에 사회적인 통념이 덧붙여지면 사회적 관계의 증대와 더불어 갖게 되는 진실의 토로를 통한 소통이나 현실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해방감과 연관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친 음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와도 연관된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를 넘어 프랑스와 러시아에서는 술에 대한 특수한 문화가 형성되어 온 것도 알 수 있다. 특히 양국의 술을 대표하는 주종이 서로 다르며, 이를 둘러싼 의미부여 역시 매우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프랑스의 술이라면 포도주이며, 러시아의 술이라면 보드카라는 식이다.
  게다가 프랑스에서 술은 특히 포도주 종류와 연관되어 시적 영감을 일깨우는 수단이거나 시적 감흥 자체로 비유되기도 할 정도로 예술적 감성과 자주 결합되는 데 반하여, 러시아에서 술은 특히 보드카의 경우처럼 남성적 힘과 주로 결합된다. 그래서 프랑스의 포도주는 예술적 감성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의 술처럼 인식되고, 러시아의 보드카는 민중이나 대중의 감성을 공유하는 계층의 술처럼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인식이 토포스에 반영된 배경에는 포도주가 유용한 과일로부터 만들어지고 과일의 부가가치를 높임으로써 보다 생산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점, 반면 보드카는 주식인 곡류로 만들어짐으로써 기호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포도주가 생산적인 의미로 수용되고 일상 문화 속에 적절히 관리됨으로써 문화 예술적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반면, 보드카는 부족한 식량을 술로 만들어 마신다는 점에서 금지와 부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술의 토포스로서 보드카는 공식적인 금지와 통제의 성격과 비공식적 민중적 애호의 성격이라는 모순적인 양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포도주와 보드카는 지중해의 문화와 대륙의 문화가 지닌 서로 다른 감성들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사회 계층들이 습득한 문화적 역사적 관념들과 결합하면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술의 토포스를 대조적으로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연관 토포스 귀족; 포도주; 폭력; 민중;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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