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시골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시골
토포스명(프랑스) campagne
토포스명(러시아) деревня
정의 1. 도시가 발달할수록 시골은 마음의 고향으로 남는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1536년 노르망디-피카르 지방에서 ‘Campaigne’는 “삼림이 없이 툭 트인 넓은 평원”을 의미했고, 1671년에 ‘campagne’는 “도시와 대조적으로 경작을 하는 땅과 들판”을 가리켰다. 이러한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어 ‘캉파뉴 campagne[kɑ̃paɲ]’는 시골, 전원, 농촌을 가리킨다. 또한 1587년에 캉파뉴는 “부대가 옮겨 다니며 전투하는, 요새가 아닌 야전장”의 의미로 사용된 예를 볼 수 있으며 지금도 야전장, 원정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16세기에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군사 용어에 미친 영향으로 볼 때, 이는 이탈리아어 ‘campagna’에서 차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노르망디-피카르 지방의 고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는 모두 고대 라틴어 ‘campus’(밭, 농촌, 야영지, 야전장)를 어원으로 한다.(http://www.cnrtl.fr/definition/campagne 참조)
  시골은 도시에 비해 인구 밀도가 낮고, 높은 산이나 계곡이 아닌 들판이나 초원, 논밭으로 이루어진 자연을 환기시키며, 시골 사람 대부분이 농사나 목축 일에 종사하여 생명 또는 생산이라는 땅의 상징성과 결부되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시골은 곧 전원이나 들판을 배경으로 한 농촌과 이미지가 중첩된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혁명이라 할 신석기혁명은 농경의 시작을 일컫는다. 농경은 이전까지 자연에 철저히 순응하며 수렵이나 채집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인류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급격히 바꾸어 놓았다. 목축 또한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 먹을거리를 인위적으로 배양한다는 점에서 농경과 같은 범주에 포함된다. 
  농촌 즉 시골은 인간의 삶의 기본 형식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태생, 즉 자기 존재의 뿌리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시골에서 찾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인류문명은 본질적으로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변화 내지 발전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땅에서 식량을 공급받는 외에 다른 산업 활동이 미진했던 시기에 시골 또는 농촌이라는 용어가 지역의 현실 그 자체를 가리켰다면, 도시가 등장하고 도시의 생활방식과 삶의 정서가 시골과는 확연하게 달라지면서, 시골 또는 전원은 물리적 현실을 가리키는 한편 나름의 문화적 상징성을 갖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도 정치와 교역의 중심지인 도시와 농경의 중심인 농촌은 대조되었다. 그러나 15세기부터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인구가 밀집하고 엄청난 부가 집중된 대도시들이 성장한 이후, 시골과 도시의 대비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문화적, 정서적 측면에서도 특정한 함의를 강하게 지니게 된다. 땅과 밀착된 시골은 인류 역사의 유위변전에 휩쓸리는 도시와 달리 영원성을 담보하는 세계로 여겨지며 신성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농경의 신들과 친밀한 행복한 자여! […] 국민이 쥐어준 속간(束杆) (고대 로마에서 도끼 둘레에 채찍을 다발로 엮어 만든 것으로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도, 왕의 자주 빛 망토도[…] 로마의 공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왕실도 그를 흔들어놓을 수 없다.” (비르질리우스, 기원전 70~기원전 19, 『농경시』 ) 

  16세기의 대표적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시골과 도시에 대해, 학문과 문화의 공간인 도시와 인간에게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게 해주는 시골을 대비하며 상반되는 두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티모데우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시골보다 도시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강했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배울 것이 있지만, 시골에는 나무와 밭, 샘과 강뿐이다. 이것들은 눈을 만족시키지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다.
에세비우스 : 혼자 시골 길을 산책한다면, 소크라테스의 말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자연은 벙어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전체가 말을 하며, 자연을 관조하는 사람에게, 그가 사려 깊고 배울 준비가 되어있는 자라면,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에라스뮈스, 『대화집』, 1518) 

  17세기 프랑스 우화작가 라퐁텐이 그의 『우화집』(1668~1694)에 수록한 『시골 쥐와 도시 쥐』는 도시와 시골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본래 고대 그리스의 우화 작가 이솝(기원전 6세기 초~기원전 564)이 지은 『들쥐와 집쥐』 이야기를 라퐁텐이 제목을 바꾸어 자신의 우화집에 수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골 쥐는 배고픔도 잊고 한숨을 내쉬며 도시 쥐에게 말했다. - 여보게! 친구, 잘 있게! 자네는 실컷 먹고 마음껏 먹을 것을 누리지만 수많은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해야 하는군. 나는 가난해서 밀과 보리를 갉아먹으며 살아가겠지만 두려워하거나 의심할 자는 없다네.” (라퐁텐, 『우화집』, 1668~1694)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늘 두려움에 떨고 마음 졸이며 사는 도시의 삶보다 소박하지만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시골 쥐의 말은 시골 생활과 도시 생활에 대한 고전적인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도시와 영혼의 평안을 상징하는 시골의 대립, 거칠지만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골과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겉모습에 치중하는 도시의 대립은 중세 라틴의 속담, “도시에서 남을 위해 사는 대신 시골에서 너 자신을 위해 살라.”에도 나타나있다. 
  유럽최대의 농업국인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농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쳐왔다. 오랫동안 다른 산업은 보조적인 역할을 했을 뿐, 쉴리 지방의 한 공작이 “경작과 방목은 프랑스를 부양하는 두 젖줄이다”(16세기)라고 말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프랑스인들은 땅을 모든 부의 근원으로 여겼다.(Charles Debbasch, La Société française, 에서 재인용) 18세기 말까지도 프랑스 국민의 85% 이상이 농촌에 살았고 그 중 4/5가 농민이었다.(Pierre Goubert, Ancien Régime, 1, 참조) 
  중세 때 지주인 영주에게 종속되어 있던 농촌은 경제적 공동체였을 뿐만 아니라 출생에서 사망까지 사생활 전체를 교회가 통제한 종교적 공동체이기도 했다. 고립된 이 생존의 공간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완전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며 강한 유대감을 형성시켰다. 한편 늘 부족한 생산량으로 굶주리고, 지주와 교회가 부과하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렸던 농민의 삶은 거주할 집이 있을 뿐 매우 비참했다. 또한 대부분이 문맹인 농민들은 인습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미래나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교회는 중세적 세계관에 따라 미신과 악령을 믿는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방식으로 그들의 심성을 지배하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는 신앙 뿐 아니라 세속적인 부분까지 관장하여 행정과 사법에 관련된 온갖 업무를 주관하였다. (George Duby, Histoire de la civilisation française, 참조) 이러한 교회의 지배력은 농촌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강한 유대감에 기반을 둔 농촌공동체의 이미지가 친자연성과 더불어 시골 또는 농촌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시켰다면, 물질적, 정신적으로 낙후된 채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농민의 삶은 시골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부된다. 19세기 후반 도시가 발달하고 산업화가 진전된 이후, 시골은 도시에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자연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는 고향 즉 향수의 대상으로, 도시의 세련된 문화와 물질적 풍요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정체되어 낙후된, 쇠퇴해가는 삶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시골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단어는 ‘데레브냐 деревня’이다. 데레브냐는 국내에 번역된 러시아 문학작품들에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골과 농촌에 있는 집들이 목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деревянные(‘나무로 만든’, ‘나무의’라는 뜻)에서 데레브냐가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널리 알려진 이와 같은 견해와 달리, 이 단어가 ‘황무지, 처녀지를 개간하다.’, ‘숲에서 땅을 정돈하다.’라는 고대 러시아어 ‘деру, драть’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다. 러시아에서 ‘데레브냐’의 의미는 ‘크지 않은 경작지’, ‘농촌의 거주지 형태 중 하나’이다. 이 어휘는 14세기 북동부 루시에서 사용되다가 중부 러시아의 다른 지역들로 확산되었다. 17~18세기에 데레브냐는 ‘농민 거주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전에는 농가를 의미했고, 훨씬 이전에는 ‘경작지’를 가리켰다. 16세기의 문헌 『도모스트로이(Домо-строй, 사제장 실베스트르가 지은 가훈집』에서 ‘пахать деревню’라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데레브냐’의 가장 오래된 의미는 숲을 정리하여 경작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장소이다. 
  러시아어 ‘데레브냐’의 우리말 역어인 농촌, 시골, 마을은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라는 사전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농촌’은 농업이라는 산업 형태에 의해 정해진 이름이다. 그리고 ‘도시에서 떨어진 지역’, ‘고향을 떠나 도시에 나와 사는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이르는 말’, ‘서울에서 서울이 아닌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정의를 통해, ‘시골’은 도시의 대립항으로 정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은 ‘주로 시골에서 여러 사람들이 묘여 사는 곳’이라는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적 공간이라는 의미 결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에는 ‘데레브냐’와 구별되는 ‘셸로(село)’라는 거주지 형태도 존재한다. ‘셸로’는 ‘데레브냐’와 달리 규모가 크고 많은 경우에 지주의 저택이나 교회를 포함하고 있었다. ‘데레브냐’는 혁명 전에는 교회가 없이 대개 30가구 이상의 농가로 구성된 시 골마을을 의미했다. 20세기 초반에 ‘데레브냐’와 ‘셸로’의 주된 차이는 거주 규모 와 교회의 존재 유무에 있었지만 현재는 이러한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다비도프 데레브냐’의 규모는 도시에 육박하고, 레닌그라드 주의 셰노 제 레브냐에는 세 개의 교회가 있다. 이외에도 주거 형태를 가리키는 러시아어로, 데레브냐보다 좀 더 작은 규모인 выселок, починок, хутор, заимка 등이 있고, 지역에 따라 станица(남쪽 농업지역인 돈과 쿠반의 큰 농업 거주지, 까자끄 거주지역), Аул(산악지대인 북부 까프까즈의 주요한 거주 형태), гюх 혹은 шэн(아르메니아), кишлак(중앙 아시아, 투르께스딴 지방의 촌락) 등의 어휘들이 있다. 그러나 농민 거주 지역을 가리키는 이와 같은 명칭들을 대신하여 러시아 문헌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데레브냐’이다. 
  넓은 의미에서 ‘데레브냐’ 는 거기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도 가리킨다. 물론 이 거주민들 속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농촌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또한 ‘데레브냐’는 농촌의 사회와 경제, 문화와 풍습, 자연과 지리적 특수성들을 포괄하는 복합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류는 오랜 기간 1차 산업인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농촌은 인류의 주된 주거공간이었고 농업은 인류의 주요 생존 수단이었다. 농업 중심 사회에서 산업 사회 단계로 이동하면서 농촌은 도시와의 대립적인 관계 속에 여러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그것들은 세대를 거치며 사람들에게서 사고되고 표상되어 시골의 토포스로 형성되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의 농촌에는 ‘미르 мир’라는 마을공동체뿐만 아니라 ‘옵시나 община’와 같은 의사결정단위도 존재했다. 지주와 농노의 지배와 예속 관계, 즉 ‘농노제’가 오랫동안 러시아 농촌을 지배했는데, ‘농노제’는 오랜 시간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러시아의 고유한 농촌 문제, 더 나아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였다.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의 지식인과 인민들에게 최악의 제도로 지탄받아온 농노제의 법적인 기초를 마련한 것은 이반 3세였다. 그는 1497년 키예프 시대의 『루스카야 프라브다』와 프스코프의 『수데브니크』를 참조하여 만든 법전 『수데브니크(재판법규집)』를 통해 러시아 농노제의 기초를 만들었다. 또한 당시 지주계급에게 점점 예속되어 가던 농민들의 이주를 제한함으로써 농노제를 완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법전에 따르면, 농노들은 ‘유리의 날’(구력으로 11월 26일)’ 전후 2주 동안만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고, 그것도 채무를 완전히 청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1861년 2월 19일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였던 농노제는 러시아 정치와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 예술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산업화와 공업화의 길을 걸으며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1830년대에 방적공업에서 시작된 러시아의 산업혁명은 1860년대 개혁 이후 본궤도에 올라 1890년대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농노제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농노제와 자본제가 공존하던 사회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1892년 재무장관에 취입한 비테는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러시아의 산업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890년대 10년 동안 철도의 총연장은 두 배로 늘었고, 선철, 철강, 석탄 생산량이 모두 두 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면방직 공업도 영국 수준으로 성장했다. 이런 공업화와 산업화, 근대화가 도시의 성장을 가져옴에 따라 농촌의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농촌, 시골, 마을에는 차츰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 
  도시가 자유, 합리성, 근대성, 문화 등을 표상했다면, 농촌, 시골은 무지몽매, 미개함, 낙후성, 정체성, 후진성, 무질서, 폐쇄성, 전근대성과 구속의 이미지로 표상되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변화를 갈망하는 지식인들에게 농민은 계몽의 대상이었고, 1900년대 스톨리핀의 농업 개혁 정책에서 농촌 공동체는 해체되어야 할 낡은 잔재로 규정되었다. 소련 국기에 나오는 ‘망치와 낫’이 각각 노동자와 농민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서조차 근대의 생산주의와 발전주의 패러다임 속에서 중공업 정책은 강하게 장려되고 농업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농촌, 시골은 교양 없는 사람들, 속물들이 모여 사는 곳, 희망이 없는 곳, 낡은 기득권이 몰려 있는 곳, 러시아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곳, 정체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다른 한편으로 도시의 수가 늘어나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농촌, 시골은 반대되는 이미지도 가지게 되었다. 도시가 혼란함, 형식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인간관계, 인간성의 상실, 개인주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 경쟁과 소비 등의 이미지를 부여받는 동안, 그 대립항으로서 농촌은 자연, 순수함, 평화, 공동체, 사랑, 신뢰, 인간성, 정서적 유대의 공간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런 현상은 후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인 현재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산업화 초기에 형성된 시골의 토포스는 자본주의와 산업주의의 폐해가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생태적인 위기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까지 ‘오래된 미래’와 ‘구시대의 잔재’라는 상반된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이어져오고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7세기까지 시골에 대한 관심은 열악하고 폐쇄적인 농촌의 삶보다는 자연과의 친화성에 초점이 두어졌다. 뒤벨레와 롱사르, 몽테뉴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많은 작가들에게 전원은, 존 밀턴의 『실낙원』(1667)에서처럼, 도시의 오염된 공기에 시달린 심신을 회복시켜주는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었다.

“오랫동안 빽빽한 집들과 하수구로 공기가 더러워지는 사람 많은 도시에 갇혀있던 사람처럼, 어느 여름 날 아침 그는 쾌적한 마을과 근처 농가의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게서 그는 기쁨을 얻는다. 베어놓은 풀과 밀 내음, 암소와 우유 냄새, 시골의 모든 것 모든 소리 모든 것이 그를 매혹시킨다.” (존 밀턴, 『실낙원』, 1667) 

  그러나 18세기 진보적인 도시가 후진적인 농촌을 계몽시키려 들며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구체제의 농민 착취를 종결짓는 1789년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거치면서 도시와 시골의 대조적인 이미지는 더욱 함의가 다양해진다. 관조의 대상인 전원이 도시에서와는 다른 삶을, 인간의 본성에 적합하고 본래의 순수성과 건강함을 회복시켜주는 삶의 공간으로 제시되는 것은 장 자크 루소에 의해서이다. 도시와 문명의 폐해를 혐오하며, 그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루소는 이전까지 오로지 인간의 이성과 내면에만 몰두하던 문학과 사상의 세계에 자연을 끌어들였다.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관계를 확립한 루소가 없었다면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자연 예찬과 전원소설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 엘로이즈』에서 루소가 이상적인 사회로 구상한 클라랑은 일종의 농촌공동체로, 루소는 그곳의 통일성과 조화를 전원에 견주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곳의 모든 것은 유쾌하고 아름다우며 풍성하고 청결한 기운을 호흡하면서도 부와 사치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느 방이나 전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장 자크 루소, 『신 엘로이즈』, 1761)

  루소에 따르면 클라랑의 경관을 구성하는 “들판, 은둔, 휴식, 계절, 눈앞에 펼쳐진 방대한 호수, 산들의 야생적인 모습”(장 자크 루소, 『신 엘로이즈』. 1761)은 자연 속에 구현된 이상적인 인간 공동체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또한 루소는 『에밀』에서 아기를 키울 장소로 도시보다 농촌을 권유하는데, 그 이유는 농촌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인류의 파멸을 초래하는 심연이다. 몇 세대만 지나면 도시에 사는 족속들은 결국 망하거나 쇠퇴하고 만다. 그들을 되살려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시골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아이들을 그곳에 보내, 말하자면 스스로 소생할 수 있도록, 그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의 유해한 공기 속에서 잃어버린 활력을 들판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장 자크 루소, 『에밀』, 1762) 

  산업혁명 이후 시골과 도시의 대조에서 새롭게 나타난 양상은 지방과 중앙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구도이다. 이는 무엇보다 구체제 하에서 프랑스가 궁정과 도시, 지방(농촌)으로 삼분되어 있었다면 혁명 이후에는 파리와 지방으로 양분되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정치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측면에서도 파리 집중도가 높아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달리 수도와 지방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19세기에 시골 또는 농촌의 변화된 모습을 매우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한 작가는 발자크라 할 수 있다. 발자크는 지방 도시들의 생활 전경을 묘사한 『지방생활( la vie de province) 전경』과 『전원생활(la vie de campagne) 전경』을 통해, “대도시 또는 중앙을 대변하는 파리와 시골 또는 지방을 포괄하는 전원”을 대조하며, 1789년 혁명 이후 격변과 혼란의 시기에 시골이 겪는 크고 작은 변화를 묘사했다. 발자크가 전원이라 지칭한 공간은 실제 시골이라기보다 땅에 토대를 둔 “국부의 원천이자 심원한 프랑스의 토대”이면서, 달라진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선거권 유보의 장소 또는 사회정치적 대치의 장소”로 개념화되었다. 또한 모든 권력이 집중된 파리에 비해 시골을 포함하는 지방은 “친숙함과 일상, 비속함과 무한히 작은 것들의 영역”이기도 했다. (이철, 「발자크 소설에서의 공간 이데올로기」에서 인용 및 참조)
  발자크는 전원을 배경으로 하는 낭만적 우수나 민속에 관심을 갖기보다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전원을 관찰하며 현실적인 관점을 견지했다. 발자크에 따르면, 19세기에 시골 또는 전원은 한편으로 “지방도시나 파리에서의 정념에 사로잡힌 삶, 냉혹한 이해타산에 따라 투쟁을 치른 사람들”과 “세상과 갖은 혁명들에 의해 상처를 입고, 전쟁의 피로에 반은 부서지고 정치에 혐오를 느낀 사람들”에게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쓸쓸한 휴식처였다. 『시골 의사』(1833)에서 전원은 “평온하고 평화로운 장소”, 순수함을 간직한 장소로 묘사되며, 파리의 고급 사교계와 앵드르 강 골짜기를 지속적으로 대조시키는 『골짜기의 백합』(1836)에서 시골은 유배지이지만 안식을 가능하게 한다. 

“전원, 그것은 의사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치료약이다.” (발자크, 『골짜기의 백합』, 1836)

“자연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희망을 속이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발자크, 『시골 의사』, 1833)

  반면 『농민들』(1844)에서 전원은 휴식의 장소가 아니라 투쟁의 장소로 제시된다. 혁명 이후 봉건제가 폐지되면서 농촌의 땅은 부르주아지와 귀족, 그리고 농민들의 갈등과 투쟁을 야기하는 주된 요인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공간인 카바레 ‘그랑티베르(Grand-i-Vert 위대한 초록)’는 “(토지를 둘러싼) 농촌의 비밀들이 밝혀지고 농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자라나는 장소이다. 또한 그것은 “농민들의 삶의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고 토지 이익을 둘러싼 격렬한 사회적 갈등이 준비되는 장소이기도 하다.”(이철, 「발자크 소설에서의 공간 이데올로기」) 

  도시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전원이 아닌, 고달픈 노동과 거친 환경의 농촌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는 혁명 이후에 달라진 시골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이다. 대지의 위대함을 환기시키는 농부의 모습을 웅장하게 그려낸 ‘농촌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그림들 또한 얼핏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농부들을 등장인물로 내세워 자신이 본 시골의 삶을 환상 없이 그렸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에 포함된다. 보들레르는 “농부들이 그들을 증오하고 싶어질 정도로 어둡고 숙명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보들레르, 『1859년 살롱』, 1859)는 말로 밀레의 그림을 평가했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는 것이 괴롭다. 그런데 나 자신과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시골을 떠나는 것도 괴롭다.” (조제프 주베르, 1754~1824)

“시골은 거기에 살아야 할 의무가 없는 사람들에게만 매력이 있다.” (에두아르 마네, 1832~1883) 

  19세기 전원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는 30대 중반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노앙의 착한 마님’ 조르주 상드이다.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상드는 1848년 2월 혁명 이후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중을 위한 ‘인간 목가’를 쓰기로 결심하고 고향 시골에 정착했다. 그녀에게 시골은 “인간사의 어두운 현실보다 자신들의 풍속과 땅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건강한 농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박흥순,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 

“전원생활에 대한 꿈은 언제나 도시의, 그리고 심지어 궁정의 이상이었다.”(조르주 상드, 『악마의 늪』, 1846)

  상드에게 시골은 할머니의 보살핌과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운명적으로 만난 쇼팽과 9년간 행복한 시간을 가졌으며, 작품을 집필하면서 가족과 지인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말년을 보낸 고향 베리 지방이었다. 상드는 시골을 평등과 박애를 통해 인간 사회에 필요한 관용, 부자와 가난한 자의 융합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 공간으로 보았다. 이처럼 19세기를 거치면서 ‘캉파뉴’는 농촌과 지방, 시골, 전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랑스 사람들에게 지방은 1982년 새롭게 재편된 행정구역 레지옹(région)이기보다 자신의 출생과 관련하여 역사적, 심리적, 문화적 함의가 더 풍부한 프로뱅스(province)인데, 이는 시골과 농촌, 전원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20세기에도 시골-전원은 여전히 상실된 고향에 대한 향수와 결부되고, 도시생활이 주는 불안감과 소외감을 치유해줄 것 같은 영원한 안식처로 프랑스인들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황폐해진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려 비시 정부가 최우선 과제로 채택한 ‘흙으로의 귀환’ 운동은 전원이 갖는 이러한 함의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현재에 대한 반발, 과거에 대한 향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도시인들이 갖는 복합적인 열망을 반영한다. 이 시기 많은 지방 출신 작가들이 자신의 고향을 영감의 원천으로 제시하며 고향을 묘사한 작품을 발표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Charles Debbasch, La Société française, 참조) 
  자신의 고향인 랑드 지방과 보르도 지방을 배경으로 작품을 쓴 프랑수아 모리악에게 고향인 시골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랑드와 보르도는 시골이 아니지만, 모리악은 프랑스의 지리를 수도 파리와 시골로 이분하고 파리와 시골의 삶을 대비시켰다. 모리악에게 시골이 갖는 의미는 “시골과 소통하지 않는 예술가는 인간관도 소통이 없다.”(『시골』,1926)라는 그의 말에서 짐작이 된다. 모리악은 파리와 시골을 쾌락과 윤리의식, 퇴폐와 가톨릭의 대립구도 속에서 묘사한다. 파리에 온 모리악의 주인공들은 시골을 지배하는 가톨릭의 윤리의식과 가치관에 따라 엄격한 도덕과 형식주의에 길들여진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파리는 익명성 속에 자유롭게 쾌락을 구가할 수 있는 곳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을 일으키는 공간이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리악의 주인공들에게 시골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자기 존재의 뿌리이다. (손정숙, 「모리악과 소설공간의 상관관계」, 참조) 작가 모리악의 영감의 원천도 고향인 지방이었다. 

“보르도의 역사는 내 몸과 영혼의 역사다. 보르도 그것은 나로부터 떨어져나가 화석화된 나의 어린 시절이고 청년시절이다.” (프랑수아 모리악, 『어느 인생의 시작』, 1932)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 감춰둔 비밀스러운 장소가 하나 있다. […] 땅이 우리를 알고 우리가 땅을 아는 그런 친근한 장소가.” (프랑수아 모리악, 『새로운 내면의 기억들』, 1964)

  그러나 시골은 온화하고 정이 깃든 평온한 고향으로만 남아있지는 않는다. 점차 도시만큼 인위적으로 변해가는 시골 앞에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프랑스 사람들은 마음대로 함부로 하여 […] 프랑스적인 삶의 수려한 경관을 훼손하고 더럽히고, 현대화시키고, 미화시키고, 변형시키고, 결국엔 죽여 버렸다.”(F. Nourrissier, Les Français, 1968) 

“농부는 아마도 전원을 사랑하지 않고 결코 쳐다보지 않는 유일한 인간일 것이다.” (쥘 르나르, 1910)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푸시킨의 시 『시골』(1819)은 이후에 전개될 ‘데레브냐’의 양상들을 잘 보여준다. 이 시에서 푸시킨은 농촌/시골을 “평안과 노동과 영감의 안식처/ 내 지난날의 보이지 않는 물결이/ 행복과 망각의 품속에서 흘러가는 곳”으로 표현하고, 자신에게 창조적인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전반부에서 농촌/시골을 권태롭지만 휴식, 안락, 안식, 평안의 공간으로 묘사한 반면, 후반부에서는 농노제 하의 비참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농촌의 양면성을 부각시켰다. 

“여기서 사람들의 불행을 위해 태어난
야만적인 귀족들은 인정사정없이,
눈물도 못 본 척 신음도 못 들은 척
강제의 채찍을 휘두르며
농부들의 노동과 수확과 시간을 빼앗는다.
여기서 초췌한 농노들 완고한 지주의 재갈에 물려
남의 쟁기를 끌며
채찍 아래 허덕인다.
여기서 마음속에 희망도 취향도 키울 길 없이
모든 이가 죽는 날까지 참혹한 멍에 끌고 간다.” (푸시킨, 『시골』, 1819)

  시에 묘사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시골’의 풍경은 1861년 2월 19일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농노제가 폐지될 때까지 19세기 러시아 농촌/시골의 고달픈 현실이었다. 이 시의 말미에는 러시아가 민중이 억압에서 풀려나고 황제의 칙령으로 농노제가 무너지는 개화된 자유의 조국이 되기를 바라는 푸시킨의 염원이 나타나 있다. 농노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모순의 집약이었다. 18세기 중엽 전체 러시아 인구는 약 6,700만 명이었는데 5,000만 명이 농민과 그 가족이었고, 그 중 4,000여만 명이 농노로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농노제 문제를 러시아의 후진성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야기하는 주된 요인으로 여겼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농노제의 모순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지만,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한 귀족계급의 반대로 농노제 폐지는 여러 번 무산되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사냥꾼의 수기』(1852)는 농노제의 모순을 폭로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투르게네프는 대지주였던 어머니가 자신의 영지에서 농노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폭압적인 모습을 보고 ‘죽을 때까지 농노제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고 농노제와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 소설에서 농노들을 각자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풍성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중편소설 『무무』(1854)도 농노제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귀머거 리이자 벙어리인 농노 게라심은 세탁부 타티야나를 사랑하지만, 늙은 여지주의 변덕과 횡포로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다. 이후 그는 불쌍한 강아지 무무와 평온하게 여생을 보내려하지만, 여지주는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강아지 무무를 죽이려든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직접 무무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주인집을 떠나버린다. 이 두 소설은 알렉산드르 2세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그가 농노제 폐지를 결심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농촌/시골’을 억압, 수탈, 착취의 공간으로 만든 것은 비단 농노제뿐만이 아니었다. 농노제 폐지 이후에도 농촌은 여전히 억압과 수탈의 공간이었는데, 농노제 폐지는 여러 측면에서 불완전한 것이어서 절반 이상의 토지가 계속 지주의 소유로 남아 있었고 농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농노제 폐지 이전의 경작지보다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지주에게 주는 배상금의 20%는 농민이, 80%는 국가가 부담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은 농민공동체의 연대책임 때문에 49년에 걸쳐 토지상환금에 이자까지 국가에 분할상환 해야만 토지의 공동 소유자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농노해방과 더불어 농민공동체의 구속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종래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촌이 만들어지고 몇 개의 촌이 모여 향이 조직되었으며 촌에는 경제적 기능이, 향에는 행정기능이 부여되었다. 거기에 덧붙여 종전에 영주가 갖고 있던 권리 중 징세, 징병, 재판 등의 권한이 공동체에 위임되었다. 공동체가 지게 된 연대책임은 농민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공동체에 종속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독립 자영농이 될 수도,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로 변신할 수도 없었다. 설령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자기 몫의 의무와 상환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게다가 농촌인구가 늘면서 분여지가 계속 줄어드는 바람에 농민들의 생활은 농노해방 이전보다도 더 악화되었다. 결국 농노들은 농노제에서는 해방되었지만 공동체에의 예속과 늘어난 경제적 부담, 더 심해진 궁핍으로 고통 받으며 첨예화된 계급의식을 갖게 된다. 이와 더불어 빠르게 진행된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는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농촌을 점점 홀대받게 만들었다. 
  톨스토이의 말년작인 『시골의 노래』(1909), 『시골에서의 사흘』(1909)이 잘 보여주듯이, 러일 전쟁(1904~1905) 당시 러시아 농촌은 사람과 물자, 돈이 필요했던 정부의 대표적인 수탈 장소였다. 러시아 농민들은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 받았고 강제징집으로 슬퍼했다. 『시골에서의 사흘』은 러일전쟁 당시 징집 때문에 한 마을이 겪는 슬픔을 다루고 있다. 

“얼마 후 자리로 돌아온 책임자에게 세금 미납자들에 대한 엄격한 조치에 대해 질문했다. 우선 어떤 종류의 세금을 걷는 것이냐고 물었다. 책임자는 지금 농민들에게 걷는 세금은 일곱 가지 종류라고 설명했다. 1)국세, 2)토지세, 3)보험, 4)식량으로 인한 빚, 5)여유분의 식량에 대한 세금, 6)농업관리청에 대한 세금, 7)농촌의 주민세. 책임자는 마을의 관리인과 같은 말을 할 뿐이었다. 이토록 엄격하게 세금을 걷는 이유는 높은 곳에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책임자는 가난한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일이 어렵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마을의 관리인과는 달리 가난한 이들에게 조금의 동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정부를 철저히 믿고 있었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무런 죄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톨스토이, 『시골에서의 사흘』, 1909)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농촌은 억압과 착취의 공간이었다. 전시 공산주의 시기(1918~1920)에는 내전과 외국에 의한 간섭전쟁으로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농민에게서 징발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에 농민들은 혁명의 방어가 대다수 농민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잉여곡물을 국가에 바쳤다. 하지만 내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1920년부터 농민들은 식량징발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잉여곡물을 생산하지 않으려는 농민도 있었고, 남는 농산물을 숨기거나 빼돌리는 농민도 생겨났다. 충분하지 못했던 농업생산은 더욱 줄어들었으며 여러 지방에서 부농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농촌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는 공업화를 당의 일반노선이라 선언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수입에 의존하던 기계와 설비를 자체 생산하는 국가로 변화시키는 것을 주요과제로 공식화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 대회에서는 제1차 5개년 지침이 마련되면서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게 된다. 부하린을 중심으로 한 우파가 급속한 공업화정책이 농민과 농업에 주는 압박을 감안하여 농업발전을 토대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1928년 스탈린은 신경제 정책을 포기하고 농업 집단화를 동반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은 농산물을 시장가격 이하로 수매하는 것을 통해 공업화의 재원을 얻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부농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강제수매가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중농에게까지 확대 시행되었다. 농업 생산량이 계속해서 감소하고 국가의 비상식량마저 바닥나면서, 1929년에는 곡물 강제수매와 집단화 정책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농촌에서는 유사 이래 최대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 소농경제가 사회주의적 집단농장으로 재편되었다. 부농인 쿨라크를 상대로 투쟁이 벌어졌고, 전 농가의 4~5%에 해당하는 백만 호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희생되었으며, 농촌은 공업화를 지원하기 위해서 국가의 통제 하에 싼 가격으로 농산물을 공급해주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농촌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억압과 수탈의 장소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한편 시골이 도시, 문명화, 산업화, 자본주의화의 대립 항으로서 진실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원시공산주의, 공동체, 순수한 영혼과 진정한 노동이 살아 있는 곳, 순수성, 자연성, 모성 등의 의미망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산업화와 도시화,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많은 나라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것인데, 특히 20세기 중반 생태주의가 대두되면서 시골과 연관된 이러한 의미망은 더욱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러시아 농촌사회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한 것은 러시아의 사회개혁 세력이었다. 19세기 당시 러시아의 개혁과 발전 방향을 고민하는 러시아 지식인들은 개혁 방법이나 발전 모델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졌던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로 나뉘어졌다. 서구주의자들이 러시아의 발전방향을 서구의 사상, 합리주의와 법치주의에서 발견하고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에 호의적이었다면, 슬라브주의자들은 정교제도, 미르와 같은 농민공동체, 가부장제와 가족제도 등과 같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원칙과 문화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찾으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은 표트르 대제가 행한 러시아의 서구화 정책에 비판적이었으며, 오히려 질병에 걸린 서구사회를 러시아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사이의 논쟁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농촌과 농민에게서 긍정적인 가능성을 발견한 또 다른 사회변혁세력은 ‘인민주의자’로 번역되는 ‘나로드니크’였다. ‘인민주의’는 러시아가 비인간적이고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농민공동체를 통해 농민과 소생산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변혁사상이다. 이 사상은 186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학생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1873년부터 1875년 사이에 ‘브 나로드’ 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중 속으로’, ‘인민 속으로’라고 번역되는 ‘브 나로드’ 운동은 인민들의 노동과 고통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천 명의 인텔리겐치아와 학생들이 “인민들에게 진 빚을 갚자.”라는 주장에 공감하며 러시아 각지의 농촌으로 들어가서 벌인 농촌계몽운동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민들에게 러시아의 현실을 고발하고, 차리즘에 대한 저항과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하였다. 또 일부는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농민들의 계몽과 교육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들은 농민들의 무관심, 냉대, 불신을 경험하였고, 심지어 농민들에 의해 당국에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1876년까지 4천 명의 청년들이 체포되면서 ‘브 나로드’ 운동의 열풍은 가라앉았지만, 러시아의 사회운동은 이후 이 운동의 실패를 교훈 삼아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민주의’와 ‘브 나로드’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혁명 발전 단계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러시아의 농촌 현실과 농촌 공동체에 착목하여 러시아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시기에 농촌과 농민을 이상화하고 농촌에서의 노동과 생활을 찬미하는 흐름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작가가 톨스토이이다. 톨스토이에게 도시가 허례허식, 무위도식, 도덕적인 타락의 공간이라면, 농촌은 자연스러움, 노동과 땀, 도덕적인 고양의 공간이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도시=악’ 대 ‘농촌=선’이라는 대립구도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쁜 일과 나쁜 사람은 도시에 있고, 좋은 일과 좋은 사람은 농촌에 존재한다. 그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1878)에서 ‘브론스키-안나’ 커플이 도시형이라면, ‘레빈-키치’커플은 농촌형이다. ‘브론스키-안나’ 커플이 악에 빠져 파국으로 빠져든다면, ‘레빈-키치’ 커플은 결혼 후 귀농하여 영혼의 각성을 경험하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그는 유명한 레빈의 풀베기 장면을 통해서 농촌에서의 육체적인 노동과 땀의 소중함을 찬양하였다.

“레빈은 오랫동안 풀을 베어나감에 따라 더욱더 자주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이미 손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낫 자체가 자기 배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요술에 걸리기라도 한 거처럼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8)

  톨스토이 이후 농촌을 찬미한 대표적인 작가는 시인 예세닌(1895~1925)이었다. 스스로를 ‘최후의 농촌 시인’이라고 말했던 그는 자신의 시에서 농촌을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 지상의 낙원으로 묘사한다. 그에게서 농민적 우주인 ‘농민의 러시아’는 조화와 행복의 세계이다. 그리고 농촌은 도시의 술집과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쉴 곳,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그는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던 러시아의 농촌 문화, 농민 문화를 시를 통해 찬양했다. 예세닌은 죽기 직전인 1924년에 쓴 시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에서 삶에 지쳐 허덕이고 있는 자신이 돌아가 쉴 곳은 어머니, 즉 러시아의 농촌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하얀 뜰이
봄처럼 가지들을 펼칠 때.
다만, 어머니께서는 8년 전처럼 새벽에 저를 깨우지만 마세요.
사라진 몽상을 깨우지 마세요,
이루지 못한 일을 자극하지 마세요,
너무도 일찍 상실과 피로를
저는 인생에서 겪어야 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기도를 가르치지 마세요, 필요 없어요!
당신만이 제게 도움이자 기쁨이에요,
당신만이 제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빛이에요.” (예세닌,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 1924) 

  20세기 내내 철도가 상징하는 산업화, 근대화, 자본주의화로 인해 망가진 농촌을 아쉬워하고, 잊고 있던 상실된 모성, 자연성, 인간성을 농촌에서 찾으려는 시도,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농촌/시골/마을의 부정적인 가치가 아닌 다른 긍정적인 가치들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이어졌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같은 수용소 문학으로 ‘반체제 작가’로 알려진 솔제니친은 러시아 농촌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적인 농촌소설 『마트료나의 집』(1963)에서 화자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탈로보 마을의 낡은 오두막집에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오두막집의 주인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마트료나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라는 뜻의 러시아어 ‘마티(мать)’에서 유래한 마트료나는 산업화, 근대화, 자본주의화로 인해 망가진 〮조국 러시아를 상징한다. 여기서 그녀의 허름한 오두막집은 근대화와 산업화에 대한 부정이다. 한없이 순수하고 착한 마트료나는 재산을 탐하는 주위 친척들의 욕심에 의해 망가지며, 그녀의 오두막집은 해체되고, 결국 그녀는 철도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솔제니친은 이 소설에서 산업화와 근대화가 어느 정도 완료된 소련 사회에서 아직 남아 있는 농촌과 농민의 순수성에 주목하고,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해 망가져가는 농촌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려냈다. 
  시골이 갖는 세 번째 문화적 의미는 ‘정체된 공간’, ‘후진적인 공간’ ‘미개한 공간’, ‘전근대적인 공간’, ‘야만적인 공간’이다. ‘억압과 착취의 공간’, 농노제 때문에 농민들이 지주에게 박해를 받는 불쌍한 공간인 동시에 신성화되고 이상화된 낙원의 공간이기도 한 시골은 마지막으로 순박하고 착한 농민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아내를 때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야만적이고 무지한 존재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 시골은 사람들의 온갖 욕망이 들끓는 모순의 공간으로서 후진적인 러시아의 축소판이 된다. 러시아의 농촌은 우리가 다시 되돌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가 아니라, 낡은 잔재와 구습을 안고 있는 청산의 대상인 것이다. 특히 이런 관점에서 러시아 농촌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이들은 서구주의자들이었다. 
  부닌은 자신의 소설 『마을』(1910)에서 러시아 농촌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톨스토이가 이상적으로 묘사한 농촌과 농민의 모습과 달리, 부닌의 소설에서 농민들은 비도덕적이고 추악하고 탐욕적이다. 그리고 그곳의 일상과 삶은 더럽고 암울하고 빈곤하다. 소설에서 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이 농촌의 민중을 묘사한다. “민중이라! 그들은 입이 더럽고 게으르고 거짓말쟁이이며, 그리고 파렴치한 놈들이라 어느 한 사람도 서로 서로를 믿는 법이 없지!”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 쵸르나야 슬라보다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잔혹함과 무지몽매 속에서 죽도록 치고받는 권투를 즐기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은 1억의 문맹자가 있는 러시아의 상징이다. 
  체호프가 1890년대 쓴 농촌소설에 나타나는 농촌과 농민들의 모습도 부닌의 소설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편 『농부들』(1897)에서 주정뱅이 키리약은 술을 마시고 집에 오는 날이면 아내 마리야를 두들겨 팬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도 반복한다. 농부들은 화재가 나면 현장에 몰려오지만 무슨 일부터 해야 하는지 모른 채 구경만 한다. 정작 화재는 먼 곳에서 온 근처 대학생들의 영지 관리인들에 의해 진화된다. 이처럼 농민들은 무기력하고 무지한 존재로 그려진다. 
비교문화적 설명   시골을 뜻하는 프랑스어 ‘캉파뉴 campagne’는 ‘밭, 농촌, 야영지, 야전장’을 뜻하는 고대 라틴어 ‘campus’를 어원으로 하고, 러시아어 ‘제레브냐 деревня’는 ‘나무로 만든, 나무의’라는 뜻을 가진 ‘деревянные’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촌 즉 시골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삶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터전이었고, 그래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뿌리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시골에서 찾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인류문명의 발달은 곧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농업 외에 다른 산업 활동이 미진했던 시기에 농촌이 지역의 현실 그 자체를 가리켰다면, 도시가 발달한 이후 농촌은 시골, 마을, 전원의 의미를 포괄하면서 나름의 문화적 상징성을 갖기 시작했다. 유럽최대의 농업국인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농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펼쳐왔고, 프랑스인들은 땅을 모든 부의 근원으로 여겼으며 18세기 말까지도 프랑스 국민의 85% 이상이 농촌에 살았다. 러시아 또한 오랜 농업국가로서 일찍부터 마을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러시아어 ‘제레브냐’의 경우도 ‘주민 대부분이 농업을 생업으로 삼는 마을’, ‘도시에서 떨어진 지역’, ‘도시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고향을 이르는 말’, ‘주로 시골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의미하며 도시의 대립항으로 정의된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19세기 들어 본격화된 산업화와 도시화, 자본주의화는 프랑스와 러시아 모두에서 시골에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부여했다. 
  프랑스에서 1789년 이후 일련의 정치혁명을 거치고 산업혁명의 영향이 확대되면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시골을 포함한 지방과 수도 파리로 집약되는 중앙의 대립을 들 수 있다. 구체제 하에서 궁정과 도시, 지방(농촌)으로 삼분되어 있던 프랑스는 혁명 이후 정치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측면에서도 파리 집중도가 높아지면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유달리 수도와 지방의 대립이 두드러졌다. 19세기 이후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시골은 도시와 대비되어 매우 다양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도시가 정념에 사로잡혀 냉혹한 이해타산에 따라 매일 투쟁을 치러야 하는 곳, 잦은 혁명과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사람들의 영혼에 피로와 상처를 남기는 곳이라면, 시골 또는 전원은 평온하고 평화로운 안식처, 순수함을 간직한 장소였다. 그런 한편 혁명의 여파로 농촌의 땅이 부르주아지와 귀족, 농민들의 갈등의 대상이 되면서 시골은 돈을 위한 투쟁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전원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 이면에 있는, 고달픈 노동과 문명에서 배제된 거친 환경이라는 농촌의 현실 또한 간과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20세기 이후 시골은 대체로 상실된 고향에 대한 향수와 결부되고, 도시생활이 주는 불안감과 소외감을 치유해줄 것 같은 영원한 안식처로 프랑스인들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 시골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반발, 과거에 대한 향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도시인들의 복합적인 열망을 반영하는 곳인 듯하다. 
  러시아의 시골을 특징짓는 가장 주된 역사적 요인은 농노제라 할 수 있다. 15세기 말에 확립되어 1861년에 폐지된 농노제는 오랜 시간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러시아 고유의 농촌 문제이자 러시아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였다. 농노제가 폐지된 이후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도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와 공업의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러시아의 농촌은 자유, 합리성, 근대성, 문화를 표상하는 도시에 비해 무지몽매, 미개함, 낙후성, 후진성, 무질서, 폐쇄성, 전근대성, 러시아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정체된 공간의 이미지로 표상되면서 오랫동안 계몽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한편 도시의 수가 늘어나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도시의 혼란, 형식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인간관계, 인간성의 상실, 개인주의, 경쟁과 소비 등의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자 그 대립항으로서 자연, 순수함, 평화, 신뢰, 러시아의 전통과 정서적 유대가 유지되는 곳이라는 농촌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연관 토포스 게절; 도시; 별장; 파리; 평야; 혁명
참고자료(프랑스) Charles Debbasch, C. & Pontier, J.-M. La Société française, Editions Dalloz, 2001.Lanson, G. Histoire de la littérature française, Hachette, 1894.
Duby, G. & Mandrou, R. Histoire de la civilisation française, Armand Colin, 1968.
Duby, G. & Wallon. A. Histoire de la France rurale, Seuil, 1975.
Goubert, P. Ancien Régime 1, Armand Colin, 1969.
Nourrissier, F. Les Français, Rencontre, 1968.
Rey, A. dir. Le dictionnaire culturel en langue française, Le Robert, 2005
Roupnel, G. Histoire de la campagne française, 1932, rééd. Plon 1975,
손정숙, 「모리악과 소설공간의 상관관계」, 『프랑스 어문교육』, 2008.
박흥순,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 『프랑스 어문교육』, 2010.
이철, 「발자크 소설에서의 공간 이데올로기」, 『프랑스 어문교육』, 2009.
참고자료(러시아) Есенин. С.А., 〈Письмо матери〉(1924),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семи томах. Москва: Наука, 1995 – 2002.
Пушкин. А.С., 〈Деревня〉(1819), Сочинения в трех томах.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Зо -лотой век, Диамант, 1997.
Тургенев. И. С., 〈Записки охотника〉(1847),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тридцати томах. М.: «Наука», 1978.
Тургенев. И. С., 〈Муму〉(1854),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тридцати томах. М. «Наука», 1978.
문석우, 「체홉과 현대 러시아 농촌소설」, 『러시아어문학 연구논집』, 10권, 2001.
박주희, 「러시아문학에 구현된 농민유토피아-차야노프와 톨스토이의 유토피아 상을 중심으로」, 『외국문학』, 1998.
브라운 에드워드 J., 『현대 러시아 문학사-침묵과 저항』, 김문황 역, 충북대학교출판부, 2012.
석영중,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예담, 2009.
안드레이 발리츠키, 『계몽사조에서 마르크스주의까지』, 장실 역, 슬라브연구사, 1988.
에이브러햄 에셔, 『처음 읽는 러시아사』, 김하은, 신상돈 역, 아이비북스, 2012.
윤용선, 「19세기 후반 러시아 인텔리겐챠 운동의 특성에 관하여」, 『서양사연구』, 34권, 2006.
이무열, 『러시아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6.
http://dic.academic.ru/
http://ru.wikipedia.org/
추천자료(프랑스)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화영 역, 민음사, 2000.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전원 교향곡』, 이동렬 역, 을유문화사, 2009.
오노레 드 발자크, 『골짜기의 백합』, 정예영 역, 을유문화사, 2008.
______________,『시골 의사』, 최병곤 역, 새미, 2004.
조르주 상드, 『사생아 프랑수아』, 이재희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프랑수아 모리악, 『떼레즈 데케루, 밤의 종말(외)』, 전채린 역, 범우사, 1999.
추천자료(러시아)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이철 역, 범우사, 1999.
____________,『중단편선 Ⅳ』, 강명섭 역, 작가정신, 2011.
세르게이 예세닌, 『예세닌 시선』, 김성일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0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외, 『러시아 현대소설선집1』, 게오르기 쯔베또프 편, 최선 외 공역, 열린책들, 1997.
이반 부닌, 『마을』, 김경태 역, 삶과꿈, 2003.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이항재 역, 민음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