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악마(악)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악마(악)
토포스명(프랑스) diable, démon, mal
토포스명(러시아) демон, дьявол, сатана, чёрт, бес
정의 1. 욕망은 통제되지 않을수록 악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2. 금기가 많을수록 더 많은 악이 생겨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악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말 mal[mal]’은 불행, 재앙, 질병, 고통을 의미하는 라틴어 mălum에서 파생된 것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야기하는 해롭고 파괴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판단되는 행위나 상태를 가리킨다. 어원에서 볼 수 있듯 악은 인간의 숙명인 삶과 죽음의 고통, 타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기적 본성이 초래할 수 있는 폭력과 그 결과를 반영하는 개념이다. 악의 개념이 갖는 주된 특징은 그것이 언제나 악의 실체가 무엇이며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의 실체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으로 세계와 우주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의 가치 있는 삶과 행복에 대한 오랜 철학적 성찰에서도 악은 선의 반대, 또는 선의 결핍으로 규정되면서 핵심적인 문제를 구성해왔다. 일반적으로 판단과 행동에서 전통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온 도덕적 가치 관념에 따르는 사람은 선하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덕적 지평은 “평등한 개인들의 권리와 의무를 규범의 형태로 정함으로써 인간 공동체가 인간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선”에 근거하여 형성되고, 행동에 대한 규범의 규제력은 신학적 또는 윤리적으로 뒷받침되는 도덕률에서 비롯된다. (안네마리 피퍼, 『선과 악』, 참조) 
  프랑스를 포함하여 유럽에서 악의 개념은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을 밝히고 악의 현상을 분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 중세 말 이후 교회와 국가에 권력이 집중되는 시기에 제도적으로 본격화된 것을 고려할 때, 서구사회가 동질적인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회구성 원리와 갈등을 빚는 이질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는 노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악의 개념에 대한 유럽의 전통적인 견해의 두 뿌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계의 근원을 카오스 즉 혼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신통기(神統記)』에서 세계 탄생의 드라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태초에 혼돈의 신 카오스로부터 밤과 낮이 나눠지고 가이아(땅)가 에로스와 합쳐져 우라노스(하늘)를 낳았고,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제 2세대 신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우라노스는 자신과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싫어해 그녀의 몸속으로 다시 몰아넣었고 이에 분노한 가이아는 크로노스에게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명령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다. 
  크로노스는 누나인 레아와 관계를 갖고 신의 3세대인 데메테르,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를 낳았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로부터 자신이 아들에게 맞아 죽을 것이란 저주를 들었기 때문에 아들이 태어나면 바로 집어삼켜버렸는데, 막내인 제우스만 살아남아 아버지 크로노스를 찾아와 삼켜버린 형제들을 토해내라고 협박했다.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제우스는, 그러나 아버지를 비롯한 적들을 제거하지 않고 그들에게 권력을 분배하여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평화의 시대가 오고 신들의 세계에 인간이 등장하며, 그 속에서 인간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대가로 고생과 고통과 슬픔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차차 신들의 과도한 요구와 횡포에 반항하면서 점점 거칠고 호전적이 된 인간은 마침내 전쟁과 살육을 일삼으며 인간의 역사를 펼치게 된다. (김헌,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참조) 
  이 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악은 근원인 카오스(혼돈)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발생한 크로노스의 아버지 거세이고, 이 악의 발생은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그리고 살해와 전쟁이라는 악의 재생산을 권력의 분배체계라는 제도를 통해 통제한 제우스는 무질서와 살육이라는 인간 사회의 악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덕적 체계를 확립한 세속의 권력구조를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악에 대한 성찰은 고대 철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악의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우주를 완전하고 조화로운 전체로 이해하여 불쾌하고 나쁘고 무질서한 것, 즉 악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악의 유일한 근원을 인간에게서 찾았다. 플라톤은 우주형성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 악의 세 가지 유형 즉 인간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악, 미덕의 실천과 관련된 도덕적 악, 삶과 죽음의 고통이라는 육체적 악을 제시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 속의 삶은, 영혼이 물질적 욕망과 결별하고 순수한 이성의 수행과 수련을 통해 덕망 높은 품성을 함양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린 데 대한 형벌이므로 악에 대한 책임은 인간의 육체에 있다. 플라톤은 인간을 두 마리 말과 마부로 이루어진 마차에 비유하여, 영혼의 이성적 부분인 마부가 욕망의 부분인 사나운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욕망이 승리를 거두게 되면 물질적 성향의 욕망이 영혼을 덧없는 물질적 세계로 끌어내림으로써 타락하여 악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파이드로스』, 기원전 4세기) 인간의 참된 행복이 인간에게 고유한 이성의 능동적인 활동에서 비롯된다고 설파한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행복 즉 “인간의 선은 결국 미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생각하여 이성의 완전한 실현이 불행이나 고통과 같은 악을 근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유에서 짐작되듯이 기독교 이전 그리스인들에게는 악의 관념이 없었던 듯하다. 그들은 인간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착오 즉 선에 대한 무지 때문이며 착오를 깨닫게 해주면 인간은 즉시 스스로 선을 행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 또한 이러한 선악의 개념과 연관된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 때에만 우리는 무엇이 자신에게 좋고 나쁜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 
  한편 악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의 관점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인식의 나무 비유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문제와 함께 제시된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신은 계획에 따라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에덴동산에 살게 하며 모든 열매를 양식으로 주신 신은 다만 선악을 인식하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낙원은 본래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 그 자체를 나타내는 곳으로 그곳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었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빠져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고, 낙원 밖의 세상에서 생존투쟁에 맞닥뜨린 그들은 온갖 불안과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이라는 육체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 신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이들의 원죄는 두 아들에게 대물림되어 카인이 아우인 아벨을 살해하는 악으로 이어지고, 만연해진 인간의 악에 분노한 신은 대홍수를 일으켜 노아의 방주에서 살아남은 생명체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다. 기독교의 낙원의 신화에는 이처럼 악의 근원인 원죄가 놓여 있다. 
  악의 근원을 인간의 원죄에 두는 기독교적 관점은 신의 존재와 악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신은 전지전능하여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 존재이다. 그런데 신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금지시켰을까? 금기를 통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은 금기를 지킬 것인지 어길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였다. 그런데 이 금기에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 이미 그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을 때가 아니라 그 금기가 발설된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낙원에서의 삶을 잃어버린 셈이고, 신은 애초에 인간에게 선과 악의 개념을 심어준 것이다. 신이 악을 허용한 것인가, 아니면 신이 준 자유라는 최고의 선물을 잘못 사용한 인간에게 악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는가? 그렇다면 신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기독교는 도덕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며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아우구스티누스(4~5세기)와 토마스 아퀴나스(13세기)의 호교론, 종교적 회의주의가 팽배했던 18세기 초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변신론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들이다. 라이프니츠는 선의 관념적 원인인 신의 이성은 동시에 불가피하게도 악의 관념적 원인이기도 하다는 전제 하에, 악은 선을 불러일으키거나 아니면 더 큰 악을 막는 데 기여하며, 악의 기여가 없었다면 선은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리로 신의 완전성과 악의 존재를 양립시키고자 했다.(『변신론, 신의 자비, 인간의 자유 그리고 악의 근원에 대하여』, 1710) 도덕 법칙, 도덕적 질서의 원천으로서 신의 존재는 그것이 인간의 실천이성에 의해 요청되기 때문에 증명된다는 칸트의 주장도 그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단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1793)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악에 대한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논의 옆에서 기독교의 사제들은 악의 대표적 상징 악마를 만들어냈다. 프랑스어로 악마는 ‘디아블diable[djɑːbl]’이고 이는 라틴어 diabolus를 어원으로 갖는데 이는 짐수레를 뜻한다. 짐수레에 달린 두 개의 손잡이가 악마의 뿔을 연상시켰으리라고 추측한다. 또한 악마를 뜻하는 다른 프랑스어 ‘데몽démon[demɔ̃]’은 ‘신, 신의 능력’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δαίμων(daimōn)가 어원이다. 
  루시퍼, 악마 또는 사탄은 서구 문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악의 이미지이다. 기독교가 서구의 의식과 문화를 지배한 중세 천년 동안, 성직자와 지배계층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악마의 모습을 구체화하여 일반 민중에게 보급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맡아왔다. 
  한편 인간의 행복과 불행, 특히 사람이나 가축의 질병, 상해, 죽음, 흉작을 데몽(démon, 정령의 의미, 오늘날 타락한 천사, 악마 같은 사람의 의미로도 쓰인다)이 관장한다고 믿었던 고대 말에는 주술적 방법으로 데몽을 움직이는 마법이 성행했고, 그러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마법사나 마녀라 불렀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생활공간 바깥에 영이나 미지의 힘이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가 있고 신들이 그 곳에 살고 있다고 믿었으며 미지의 것들을 괴물의 모습으로 상상했다. 그들에게 데몽은 곧 신적인 것을 의미했는데, 이 때 신적인 것이란 특정 신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좋고 나쁜 모든 우주의 일을 주관하는 영적인 힘을 의미했다. 그것은 초자연적 세계와 죽음을 뛰어넘는 지속성을 믿는 일종의 민중 신앙이었다. 또한 그러한 힘을 인식하고 조정할 수 있는 마법사 또는 마녀는 악을 상징한다기보다 초자연적 세계와 소통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데몽이 악으로 규정되고 거기에 『성서』에 나오는 사탄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악마의 모습이 신학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12~15세기이다. 16~17세기에는 그들과 교류한다는 죄목을 씌워 수천 건의 마녀재판과 화형식이 거행되면서 악마의 지배력이 절정에 달했고 악마주의(사타니즘)와 비극적인 세계관을 전파하였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에는 ‘악마’의 개념을 표현하는 어휘가 풍성하다. 러시아 문학, 예술작품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는 ‘데몬 демон[demon]’은 그리스어 ‘다이몬(δαίμων)’으로부터 기원한다. 다이몬은 애초에 악한 존재나 악마라기보다는 신보다 열등한 영적 존재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자, 중재자로 생각되었으며, 때로 탄생 이전 혹은 사후의 인간 영혼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악한 정령들이 다이몬이라 지칭되면서 다이몬은 기독교적 악마의 속성도 획득하게 된다. 러시아어에 ‘데몬’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기독교 전파 이후인 11세기로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 문학과 예술에서 저자들이 악마를 지칭하기 위해 ‘데몬’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협의의 기독교적 악마 개념보다는 그리스어 다이몬의 애초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악마 개념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짙다.
  기독교 전통의 악마 개념을 표상하는 러시아어 단어로는 ‘사타나 сатана[satana]’와 ‘디야볼 дьявол[d'yavol]’을 들 수 있다. 사탄의 러시아식 음역인 ‘사타나’는 고대 히브리어 sāṭān에서 온 그리스어 ‘사타나스 σατανᾶς’로부터 차용되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탄은 교만과 반역의 죄로 천상에서 쫓겨난 천사이며 천사였을 때의 이름은 루시퍼이다. 신의 타락한 창조물인 사탄은 결코 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사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는 신이 아니라 대천사장 미카엘이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뱀처럼 사탄은 신 앞에서 인간을 비방하는 자이자 인간 앞에서 신을 비방하는 자로 등장한다. ‘디야볼’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로부터 기원한다. 원래 ‘비방자’, ‘법정의 고발자, 반대자’의 의미였던 ‘디아볼로스’가 악마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대척자, 방해자, 적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의 ‘사탄’을 디아볼로스로 옮기면서부터였다(러셀 제프리 버튼, 『악마의 문화사』). ‘사타나’와 ‘디야볼’은 악마들 중 최고의 악마, 그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한다.
  ‘사타나’와 ‘디야볼’은 기독교적 전통의 악마 개념과의 상관성이 짙다고 한다면 기독교 전파 이전 민속적 전통의 악한 영들을 가리키는 말로는 ‘베스’와 ‘쵸르트’가 사용되었다. 원시슬라브어 *cъrt(‘저주받을’)로부터 기원하는 ‘쵸르트 чёрт[chyort]’는 고대 슬라브 신화에서 모든 악한 정령들(물, 숲, 집의 정령 등)을 포괄하는 대표어였으며, 기독교 전파 이후 디아블로나 사탄이 지니는 기독교적 악마의 특성도 흡수하게 된다. 민담과 신화 속의 ‘쵸르트’는 인간을 닮은 형상에 검은 털로 뒤덮여 있고 뿔과 발굽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беда(불행)’, ‘бояться(두려워하다)’와 동일한 어원을 지니는 ‘베스’는 어원적으로 ‘공포, 불행을 초래하는 자’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였다. 고대 슬라브 신화나 민간 신앙에서 ‘악한 정령’을 의미하다가 기독교 전파 이후 사탄을 추종하여 반역을 일으킨 천사들을 일컫게 되었다. ‘쵸르트’나 ‘베스’는 데몬, 디야볼, 사타나보다 위계상 하위에 존재하는 것들로, 인간을 따라다니며 여러 가지 자잘한 불행을 유발하는 악귀들, 악령들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악마 개념을 표현하는 어휘의 폭넓은 스펙트럼은 러시아 작가들의 어휘 선택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작가 푸시킨, 레르몬토프, 화가 브루벨 등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선택한 악마는 ‘데몬’이고,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를 따라다니는 악마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쵸르트’였으며 『악령』의 작품명으로 사용한 단어는 ‘베스’였다. 악마라는 개념을 표현할 때 기독교적 전통에 보다 가까이 서 있었던 톨스토이는 주로 ‘디야볼’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물음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악의 개념과 그것의 인격화된 상징으로서의 악마 개념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서 끊임없이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토포스였다. 러시아에서 악마 개념과 이를 지칭하는 어휘들의 의미가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많은 변화를 겪어온 것처럼, 서구의 악마 형상은 기독교 교리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 발전해왔다.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악마는 천상의 세계에 속하던 천사였으나 신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천상에서 쫓겨난 뒤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드는 형상으로 등장한다. 
  악마 개념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중세 시대에 악마의 존재와 그 능력에 대한 문제는 중세 신학의 중심 문제였다.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이신론에서는 세계 악의 존재를 선한 신과 악한 신이라는 두 개의 동등한 신의 존재로 설명한다. 가령 보고밀교에서는 악한 신을 ‘사타나일(사타나(‘사탄’)+일(‘신’))’, 곧 ‘사탄의 신’이라 불렀다. 그러나 유태교나 기독교와 같은 일신론에서는 악의 원천이 신과 동등한 위치에 자리매김될 수 없다. 바로 이로부터 모순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절대적으로 선하다면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악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한 데서 기인한 인간의 원죄이다. 그리고 악마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의 의인화이자 신의 단죄를 수행하는 대리자로서,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인간에게 고통과 질병을 초래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기독교 초기부터 중세 시기까지 악마의 형상은 재미와 교화를 목적으로 성직자들이 지은 종교 문학 속에서 부정적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며 성자전, 교부전과 같은 문학 장르를 통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령 14세기 작품인 단테의 『신곡』(1321) 속의 악마는 원래 가장 높은 천사, 여섯 날개가 달린 세라핌이었다. 오만이라는 죄로 인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천상에서 쫓겨난 악마는 가장 무거운 죄들이 가라앉아있는 세상의 중심에 얼어붙어 있다. 악마의 부동성은 천상의 자유에 반대되며 그의 증오는 신의 사랑에 반대되고 그의 무지몽매함은 신의 현안에 반대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악마의 힘이 온 천하를 지배하고 악마 앞에서 인간이 무기력하다는 자각은 16세기에 절정에 다다랐다. 극심한 종교적 긴장 속에 악마의 위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인간 위에 군림했다. 악마의 힘은 막강하며 그의 수하는 도처에 깔려있다고 생각되었다. 마녀와 마법사, 외국인, 때로는 여자도 악마의 수하로 여겨졌으며 악마에 대한 공포는 ‘마녀 사냥’, 유태인 학살, 유혈의 종교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 악마는 문학 작품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수 세기에 걸쳐 소설, 시, 연극, 그림, 영화 속에서 새롭게 재현되었던 파우스트 전설이 많은 관심을 받았던 때도 이 시기였다. 특히 독일의 무명 개신교도가 쓴 『파우스트 이야기』(1587)나 말로의 『파우스트 박사』(1588~1599)는 악마주의 문학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파우스트는 신의 은총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지식을 얻으려 하며 이로써 교만의 죄에 연루된다. 마술 지식을 완전히 터득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파우스트는 이를 얻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파는 계약을 맺는다. 16세기 작품인 『파우스트 이야기』와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와 신 혹은 악마와 성자의 대립이 아니라 악마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죄인들이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다. 18세기 말 괴테에 의해 되살아난 파우스트 전설은 구약의 <욥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성서에서 여호와가 욥을 의롭고 선량한 인간의 표본으로 사탄 앞에 제시하였던 것처럼, 괴테는 파우스트를 진리 추구에 충실한 자로 메피스토펠레스 앞에 내세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신의 허락 하에 파우스트를 타락시키기 위해 유혹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는 언제나 악을 추구할지라도 신의 섭리 때문에 도리어 선을 행하게 되는 존재로 등장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은 이후 수세기 동안 러시아를 포함해 많은 나라의 악마 형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이르러 악마의 형상은 네덜란드 작가 본델의 『루시퍼』(1654)와 밀턴의 『실낙원』(1667)을 통해 새로운 심리적 특성을 부여받는다. 대천사였던 루시퍼는 신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오만함과 신의 아들 아담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 신에 대한 반란을 획책한다. 이러한 악마의 이미지는 이후에 낭만주의적 반란자의 형상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17세기 초를 정점으로 유럽에서 악마의 토포스는 하향세를 걷게 된다. 사람들은 악마와 마녀 재판에 지쳐있었으며 악마의 주제는 이미 유행에 뒤쳐진 느낌이 들었다. 이 시기 악마의 이미지는 종종 인간의 성적 타락과 연결되었으며 악마의 성적 측면(난교, 악마에 대한 성적 복종)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서구 문화 속의 악마의 이미지는 17세기 러시아로 번역된 서유럽 작품들을 통해 러시아 문화 속으로도 유입되었다. 악마와 인간의 성적 관계, 악마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악마의 자식과 같은 요소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러시아 문학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낯설었다. 고대 러시아 문화에선 선과 악의 대립이 현대보다 훨씬 명확하게 드러났다. 선악의 명확한 구분은 절대적 선의 상징으로서 신과, 절대적 악의 상징으로서 악마의 이분법적 구도로 나타나곤 하였다. 선과 악의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고대 러시아 문학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다. 악마는 부정한 이를 단죄하거나 의인을 유혹하기 위해, 의인이 마침내 그 유혹을 이겨내고 신의 뜻에 더 가까워지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존재였다. 성자와 악마의 투쟁, 악마에 홀린 자들을 치료해주는 성자의 이야기 등은 고대 러시아의 연대기나 성자전, 교부전 등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야깃거리였다. 
  러시아 문화 속의 악마는 기독교 전파 이전의 민간 신앙, 민담 속에서 여러 부정한 정령들로 존재하다가 기독교 전파와 함께 러시아로 유입된 비잔틴 성자전과 이것에 영향을 받은 러시아 성자전을 통해 구체적인 악마의 형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악마의 테마가 처음으로 등장한 11세기~12세기 네스토르의 『보리스와 글렙의 이야기』, 『동굴 수도원 페오도시의 생애전』에서 17세기 아바쿰의 『생애전』(1672)에 이르기까지 성자전 속의 악마는 보편적 악의 체현으로서 더욱 구체화되고 세밀해지기에 이른다. 성자전에서는 선의 화신인 성자와 악의 상징인 악마의 투쟁에서 성자의 승리, 악마에 홀린 자들에게서 악마 쫓기라는 모티브가 전면에 등장하며, 여기서 악마는 성자의 의로움과 신앙을 드높이기 위한 조연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한편 고대 러시아 문학 속의 악마의 형상이 기독교적 관점만을 대변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러시아 민간 신앙과 민담 속의 다양한 악한 정령들의 형상까지 덧입혀져 독특한 러시아 민속적 악마의 형상이 마련되어갔다. 악마는 거짓과 야비함, 자만심, 허영심, 증오, 혐오스러움 등 모든 부정적 속성들의 총체로서 무서우면서도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등장한다. 성자전 속에서는 성인이 신앙과 선으로 악마를 쫓아내는 진지한 장면이 주를 이룬다면 민담 속에서는 수녀원장이 악마의 따귀를 때린다거나 주교가 악마를 속여서 쫓아내는 것과 같은 다소 코믹한 상황도 나타나곤 한다. 
  정통 신학에서는 악마의 그 어떤 명료한 모습도 제시되지 않은 채 단지 메타포로 형상화될 뿐이다. 그러나 민간 신앙과 민담 그리고 회화에서는 악마의 구체적 형상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를 묘사하려는 시도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초기의 악마의 형상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뱀의 형상으로 등장하곤 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목신과 사티로스의 모습이 반영된, 인간과 동물의 혼합으로서의 악마의 형상도 널리 퍼져있었으며 또한 이교적 신들의 모습도 악마의 형상에 겹쳐지곤 하였다. 단테의 『신곡』 속의 루시퍼가 6개의 날개를 지닌 세라핌으로 묘사된 것처럼 이전의 천사로서의 본질을 상기시켜주는 박쥐의 날개도 악마의 표상 중 하나로 기능하였다. 악마는 보통 검은색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빛과 선이 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러시아 성상화와 민담에 널리 퍼져있는 악마의 형상은 검은색에 뿔과 꼬리, 날개가 있으며 발굽이 있는 모습이다.

  이렇듯 절대적 악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악마는 점차 다채로운 이미지를 덧입으면서 입체적인 형상이 되어간다. 단순히 주인공 성자를 빛나게 하는 보조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문학이나 예술작품 속의 창조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등, 러시아 문화에서 악마의 토포스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물려 독특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나간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가 이해하는 악의 근원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인 욕망이 끝끝내 충족되고자 할 때 세계의 질서를 위협하고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욕망은 영혼이 아니라 감각적 실체인 육체에 깃들어 있다. 선한 신적 의지에 대한 영혼의 지향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육체이다. 육체의 고통에 대한 묘사와 그것이 갖는 악의 뉘앙스는 고대로부터 많은 예술작품의 주된 테마가 되어왔으며 그것은 악마와 연관되었다. 
  프랑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고딕 양식의 오랜 성당에는, 문자를 모르는 민중에게 『성서』의 내용을 교육시킨다는 목적 외에, 종교적 복종심을 만들어내고 엄격한 도덕성을 고취시켜 사회질서를 세우고 교회와 국가의 권력을 인식시킬 목적으로 많은 종교화와 조각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악마의 도상이 성직자들에 의해 구체화되기 시작한 12세기 중엽부터 유행한 고딕 양식의 성당에서 악마의 형상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지옥과 악마의 형상에는 신도들을 고해성사로 내몰기 위해 죄의 목록을 자세히 기록해두었으며,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의 끔찍함을 명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성서』에는 히브리어로 ‘신의 적’을 뜻하는 사탄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욥기>에는 본래 천국에 살고 있는 사탄이 욥의 정의로운 삶을 신이 칭찬하자 욥이 물질적 대가를 노리고 선하게 살았을 뿐이라고 신에게 반박하는 일화가 나온다. 사탄은 다시 말해 인간을 유혹해 악으로 이끄는 존재라기보다 본래는 인간의 결함이나 약점을 신에게 고발하는 존재였다. 악마를 뜻하는 프랑스어 le diable은 ‘분리하는 자’ 또는 ‘비방하는 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Diabolos에서 파생되었다. 또한 <이사야서>에 나오는 악마를 뜻하는 루시퍼는 ‘횃불의 운반자’로 사탄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루시퍼는 단테의 『신곡』(1321)에서 지옥의 왕으로 등장했다.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1667)은 루시퍼가 신에게 반역하고 천국에서 쫓겨난 뒤 이름이 사탄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루시퍼는 아담과 이브를 죄로 이끌어 신의 계획을 망치고자 하는 한편 “천국에서 신을 섬기기보다 지옥에서 권세를 누리겠다.”고 생각하는 자의식 강하고 반항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결국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파멸하지만, 여기서 루시퍼의 역할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여 사탄에 대해 근대적인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사탄의 속성인 악의 본질은 바로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유혹하고 그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데 있다.

  악마의 이러한 본질적 속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은 악마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마저 유혹하는 <마태복음>이다. 사탄은 온 세상을 한 눈에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말로 하나님을 배신하라고 예수를 유혹한다. 이 모두를 물리친 예수가 지상에서 완수해야 할 사명에는 악마의 왕국을 파괴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요한복음>). 이 의무는 기독교의 사제들에게도 부과되어 오늘날에도 마귀에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는 일은 특히 신교에서 사제의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진다. 
  『성서』에서 사탄의 형상이 묘사되는 유일한 대목은 <요한계시록>으로, 사탄은 뿔이 달린 붉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후 붉은 색과 뿔은 사탄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이처럼 성서에 별다른 언급이 없는데도 교회 건축물에 온갖 종류의 다양한 악마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침투와 함께 억압받고 배척된 이교도 신들의 형상이 자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447년 톨레드 종교회의는 “악마는 키가 크고 검은 색이고 뿔이 나고 날카로운 발톱과 당나귀의 귀를 가졌고 번쩍이는 눈과 무서운 이빨, 커다란 남근을 가지고 있고 유황냄새를 사방에 퍼트린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기독교 신학과 중세의 민중 신앙이 뒤섞여있는 이 진술에서 우리는 기독교가 악에 대한 공포심을 극대화하여 신앙심을 부추기는 목적 외에, 민간 신앙이나 이교에 대한 숭배를 근절시키기 위해 중세인이 믿고 있던 미지의 영적인 힘의 상징, 괴물의 형상을 의도적으로 교회 벽이나 입구에 배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들은 곧 악마의 상징이 되었고, 이는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의 고통을 상기시키는 효과 외에도, 그 괴물들이 기독교 교회 내부에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기독교가 모든 이교의 신들을 제압한다는 강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베 긴야, 『중세유럽 산책』, 참조)

  교회가 더 세속화되고 교권과 정권의 결탁이 강화되는 15세기에 이르면 마녀라는 악의 화신이 만들어진다. 13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고 사회적으로, 특히 종교적으로 불안감이 조성되자 위기 극복 수단으로 교회는 악마와 교접하고 악마의 마력을 행사하는 마녀와 사바트라고 불린 마녀집회를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 몰두했다. 대대적인 마녀사냥은 1484년 교황 이노센트 8세의 교서에서 시작되었다. 교서는 “마녀가 요사스런 마술로 농작물과 과일을 시들게 하고, 태아나 가축을 죽이고, 남편을 성적 불능으로 만들어 아내를 불임하게 하여 재난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신문관이 마음대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누구라도 교정하고 투옥하고 처벌하는 권한을 가질 것을 명한다.”(아베 긴야, 『중세유럽산책』) 이 교서로부터 300년 동안 마녀로 지목되어 처벌된 사람은 수백만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15~17세기는 악마학 관련 저서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1487년 마녀를 정의하고 체포에서 판결에 이르기까지 마녀재판 방식을 상세히 기술한 악마학의 고전 『주술의 해악』(도미니크회 수도사 인스티토리스와 슈프랭어 저)을 비롯하여, 보단의 『마술사의 악마광』(1580),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의 『악마학』(1597), 보게의 『마녀론』(1602) 등이 그것이다. 
  악마학은 종교개혁이후 루터의 신학에 의해 더욱 성행하는데, 16세기 후반 독일에서 악마를 전문적으로 다룬 문학이 유달리 성행한 데서 확인되듯이, 서로를 종교적 적으로 간주한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경쟁에 나섰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 말 유럽을 휩쓴 종교전쟁이 가져온 악마주의의 암울한 분위기는 루이 13세 치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비극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가장 성공한 출판물 중의 하나라 할 만큼 애독된 프랑수아 드 로세의 『우리 시대의 비극 이야기들. 여러 명의 음산하고 애통한 죽음에 대하여』(1614)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여동생과의 근친상간, 부모살해, 동성연애, 주술로 고발된 사제, 악마와 관계를 가진 수녀 등을 소재로 불길한 운명과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죽음, 때로는 두려움과 고통, 회한으로 인한 죽음을 묘사하는 이 이야기들은, 끔찍스런 종교전쟁에 의해 피로 물든 자기 시대를 “모든 추악한 것들의 시궁창”이라고 부르며 당시 세태의 비열함을 비난하려 한 작가 로세의 의도에서 창작되었다. 특히 악마와 사랑을 나눈 남자의 이야기는 악마학 학자들의 이론과 소녀의 몸을 죽음의 이미지에 연결시켰던 당시 유럽 작가들의 상상력을 종합하고 있다. 사탄에게서 세상을 구원하기에 종교는 타락했고 이에 환멸을 느낀 당시 사람들은 이런 유의 비극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덧없음과 삶의 고통에 대한 위안을 얻고 삶의 교훈을 얻고자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악의 개념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이다. 이 시기부터 악마는 차츰 종교적인 악의 세계보다 환상의 세계에 속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 오면 더욱 두드러진다. 1772년에 발표된 자크 카조트의 『사랑에 빠진 악마』는 악이 신앙의 영역에서 환상의 영역으로 전이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악마 벨제부트는 호기심 많고 심심한 스페인 출신의 청년 알바르에게 여러 가지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 그를 속이고 유혹한다. 처음에는 낙타로 둔갑하고 이어서 암캐로, 마지막엔 예쁜 비옹데타의 모습으로 그를 농락하는데, 염소나 뱀 같은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을 탈피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 소설이 갖는 새로움은 악마가 자기의 피해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진다는 사실에 있다. “악마가 당신을 유혹했고, 그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그는 당신을 타락시키지는 못했고(…) 그러므로 그의 승리라는 주장도 당신의 패배도 모두 환상일 뿐이오. 참회가 당신의 죄를 씻어줄 것이요”라는 저자의 말은 악마를 문화적인 영역에 제한시킴으로써 악마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악마를 믿는 사람들 모두를 안심시키고 환상의 세계로 독자를 성공적으로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오늘날 환상 장르의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을 제시했다. 
  19세기이후 악의 개념은 기독교 교리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여러 종류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화가 진행되며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이 시기 이후 20세기까지 나타나는 악마의 이미지 변화를 관찰하여 막스 밀너는 그것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악마를 유행에 따라 단순한 소재로 쓰는 경우, 경향이나 사상 혹은 악을 구현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경우, 인간 조건의 특성으로 보는 경우, 저자의 개성이 개입되어 고유한 형태를 창조하는 상징으로서의 악마가 그것이다.(Max Milner, Le Diable dans la littérature française de Cazotte à Baudelaire, 참조 ) 
  이와 더불어 두드러진 또 하나의 현상은 악을 인간 내면과 관련하여 규정하려는 경향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계몽주의와 그 후예인 19세기 사회적 이상주의자들이 전파한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술과 과학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최고의 삶을 추구하려는 근대인들이 그런 만큼 복잡해진 내면의 감정과 심리를 들여다보며 인간 본성에 대해 불안하지만 풍부한 질문을 제기하게 된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 

“개인은 각자 자신을 작은 우주로 여겼다. 그리고 개인의 가장 깊은 의식 속에서 운명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진다. 이렇게 개인은 더 이상 인류 전체의 드라마를 구현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힘들의 충돌은 내부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싸우고 악령은 인간 속에 있다.” (P. Francastel, Le Démoniaque dans l'art. Sa signification philosophique, 『악마 천년의 역사』에서 재인용)

  샤를 노디에가 1821년 ‘열광주의’라고 명명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공포에 기반을 둔 문학이 처음 나타난 것도 이처럼 변화된 분위기 속에서였다. 이 미학은 프랑켄슈타인(1821), 지킬 박사(1886), 드라큘라(1897) 같이 영국에서 들여온 괴물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처음에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괴물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간희극』(1842) 전편에 등장하는 사탄이나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1831)에 등장하는 악마는 영국에서 들어온 저 괴물들과는 차이를 보인다. 가령 『파리의 노트르담』에 등장하는 꼽추 콰지모도는 악령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형이상학적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며, 발자크의 초인 보트랭의 냉정함과 잔혹함도 악마적인 힘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사회적 악에 대항하려는 의지로 만들어진 인간적 속성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자들에게서 유행처럼 번진 악마주의(diabolisme)는 악마에 대한 프랑스 특유의 해석을 더욱 잘 보여준다. 스스로를 악마적이라고 선언하고 자신들의 모습과 얼굴을 악마적 스타일로 다듬고 그런 분위기의 작품을 쓴 낭만주의자들이 이 시대를 풍미했다. 루이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1830) 다섯 번째 악장은 ‘마녀 집회의 밤에 있었던 꿈’을 묘사하고 테오필 고티에는 『오노프리우스』(1832)에서 젊은 댄디 악령의 특성을 만들어낸다. 옷을 잘 입고, 붉은 수염에 초록 색 눈동자, 창백한 피부색을 가진 그의 입가의 냉소적인 주름은 자기에게 바쳐진 제물을 조롱하는 그의 성격을 암시한다. 조르쥬 상드는 루시퍼를 “가난하고 약하고 핍박받는 자들의 신”이며 “정당한 반항의 천사”로 묘사하고 『초월마법교회』(1855)의 저자로 성직자이자 신비술사였던 알퐁스-루이 콩스탕은 루시퍼를 혁명과 자유의 상징으로 여겼다. 

  악의 문제에 대해 의미있는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작품으로 위고 사후에 출간된 인류구원의 대서사시 『사탄의 종말』(1886)이 있다. 성서의 창세기 신화를 차용하여 ‘지상 밖에서’와 ‘지상에서’라는 두 테마를 교차로 제시하며 역사에 출현한 현실악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둠이 만들어졌다”라는 첫 이야기의 제목이 암시하듯 어둠으로 추락한 천사 사탄이다. 추락하는 천사의 날개에서 깃털 하나가 떨어져 심연의 가장자리에 머무르자 신은 그 깃털을 심연에 던지지 말 것을 명하고 그 깃털은 ‘자유 천사’라는 이름을 얻는다. 1789년 혁명까지 세상을 지배하는 온갖 악이 기술된 후, 마지막 ‘지상 밖에서’는 신의 사랑을 호소하는 사탄의 이례적인 모습과 ‘자유 천사’가 신의 허락을 받고 심연으로 내려가 사탄의 구원을 돕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침내 사탄은 용서를 받아 루시퍼로 태어난다. 

“사탄은 죽었다. 천상의 루시퍼여 다시 태어나라
오너라. 이마에 오로라를 달고 그림자 너머로 나타나라” (위고, 『사탄의 종말』, 1886) 

  저주 받은 시인, 『악의 꽃』(1857)의 저자 보들레르의 루시퍼에 대한 찬양은 강렬하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성향이 동시에 존재하며, 하나는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루시퍼에게 향한다(『일기』)고 말하는 보들레르는 자기 상실감과 악을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현실로 생각했다. 악은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이고 악령은 자유의 수호자이자 기만의 화신으로, “악마의 가장 큰 계략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신이 믿게 하는 것이다.”라는 보들레르의 말에서 우리는 이제 악의 개념이 인간 내면 깊숙이 스며들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를 조종하는 끄나풀을 쥔 것은 악마구나! 
지겨운 것에서도 우리는 입맛을 느끼고, 
날마다 한걸음씩 악취 풍기는 어둠을 가로질러 
혐오도 없이 지옥으로 내려가는구나.”(보들레르, 『악의 꽃』, 1857)

  온갖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것들로 넘쳐나는 현실의 악 중에서도 가장 ‘추악 간사하고 치사한 놈’은 권태이다. “오, 나의 친애하는 벨제부트(악마들의 왕), 너를 사랑한다.”(<사탄에게 바치는 시>)라는 보들레르의 고백은 여기서 연유된다. 여기서 악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범주를 벗어난다. 로트레아몽은 『말도로르의 노래』(1868)에서 악이 지닌 끔찍한 모든 형태에 맞서 싸울 것을 부추기고, 잔인함이 천재성과 정직함의 표시라고 확언하며 자기 영혼의 가장 어둡고 복잡한 곳들을 탐구한다. 
  한편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에서 20세기 중반 악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계승하는 일련의 작가들도 등장했다. 본능의 힘에 이끌려 타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치열하게 묘사하며 타락의 나락에 비치는 신의 은총을 암시한 프랑수아 모리악(『사랑의 사막』(1925), 『테레즈 데케루』(1927), 『밤의 종말』(1935) 등)이나, 살아있는 악마와 성성(聖性)의 싸움을 추적하여 악마와의 치열한 싸움을 구원의 가능성으로 제시한 『사탄의 태양 아래』(1926)의 작가 조르쥬 베르나노스가 대표적인 가톨릭 작가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정통 교리가 아닌 개인의 생생한 종교적 체험, 즉 현실의 고통과 죄의식과 구원의 드라마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정념에서 비롯된 신과 인간의 갈등, 남녀의 갈등, 자기 자신과의 갈등의 희생물이 되어 악의 표상이 되거나 악에 대적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악의 문제를 정통적인 가톨릭의 견해와 분리시키고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세기 말 이후 작가들을 사로잡았던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어둡고 모호한 악의 심연은 20세기에 이르러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 의해 무의식의 영역이라 명명된다. 프로이트는 이 영역을 매우 현실적으로 탐색하면서, “악령은 억압된 충동에서 나오는 비난받는, 나쁜 욕망이다. 우리는 중세가 이 심리적인 창조물을 가지고 외부세계에 만들어낸 이미지들을 배제한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창조물이 환자의 내면에서 생기도록 내버려둔다.”(『17세기의 악마적인 신경증』,)라는 말로 악의 문제에서 신성을 제거해버렸다. 악령이 불가사의하고 무의식적이며 억제된 힘을 표현한다고 생각한 프로이트는 악령이나 마녀의 주변에 유아적이고 퇴폐적인 성의 문제가 있다고 보고, 신화적 상상력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유혹하는 아버지의 상징을 악마-마녀와 연결 지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관련하여 최초의 사건, 즉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겪는다. 도덕과 선악의 범주가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죄책감은 원죄가 아니라 금지된 대상을 욕망했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악의 근원은 쾌락의 추구 자체가 아니라 성욕을 충족시키는 무분별한 방식에 있다. 프로이트에게서 악은 인간의 욕망의 문제로 환치되며 프로이트는 그것을 도덕적 차원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악의 문제가 사회 속에서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향락주의와 개인주의, 행복의 추구가 심화된 현대에 악의 개념은 법률이 정한 범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한 긍정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탈종교화의 과정을 통해 악의 개념, 악마의 이미지는 대중문학, 광고, 영화, 만화에 의해 유희적이고 창의적인 상상 속에 동화되면서 사악한 악마의 신화는 종결된 듯하다. 프랑스의 경우 완벽한 선인 신보다 인간의 편에 서려는 악마의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선의 결핍이라는 악마의 약점을 더욱 친근하게 만드는 데 앞장 선 것은 특히 영화와 만화 장르이다. 1960년에 출판된 에르제의 『티벳에 간 탱탱』에서 늘 탱탱과 함께 하는 개 밀루는 자신을 닮은 천사와 악마에 의해 우스꽝스럽게 꾸며지기도 하고, 장 샤키르가 그린 신문의 삽화 <조종사>(1962~1969)도 악마와 천사를 함께 데리고 다니는 트라카생의 모험을 그려보였다. 이 주제는 1995년 제라르 데파르디외와 크리스티앙 클라비에가 상징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악마에 맞서기 위해 그들의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는다는 줄거리의 코메디 영화 <수호천사>(장 마리 프와레 감독)에도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천사와 악마는 선악이분법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다.(로베르 뮈상블레, 『악마 천년의 역사』 참조) 

  1972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악령을 퇴치하는 구마사수도회를 없애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내에서 악령에 대한 집착은 여전하다. 그러나 악은 인간에게 두려움과 죄의식을 일으키는 퇴치의 대상만이 아닌, 억압적인 사회와 권력에 맞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을 가능케 하고 일상의 굴레를 잠시나마 벗어나게 하는 돌파구로도 기능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인들이 선, 악과 같은 윤리적 개념에 유난히 천착함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러시아 언어사학자 콜레소프는 러시아 민중의 근본적 특성으로 “종교성” 및 “종교성과 관련된 절대적 선의 추구”(『이야기들 속 러시아어사』)를 들고 있다. 러시아어에서 선과 악은 두 대립되는 가치를 표현하지만 그 성격이 다소 상이하다. 선은 절대적인 것만 가능한 반면 악은 그 성질과 규모에 따라 나뉠 수 있는 개념으로 인식된다. 러시아어로 선을 나타내는 단어 ‘도브로 добро[dobro]’는 단수로만 사용되는 반면 악을 나타내는 ‘즐로 зло[zlo]’는 복수로도 사용되는데 가령 “두 개의 악들 중 더 작은 것을 택하라”와 같은 속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러시아적 ‘악’은 성질과 규모에 있어 다양하게 구분될 수 있는 개념이다. 절대적 선의 상징으로서 신은 하나이지만 악의 상징인 악마는 그 근원과 속성, 힘의 크기에 따라 ‘데몬’, ‘쵸르트’, ‘디야볼’, ‘사타나’, ‘베스’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러시아적 악마의 토포스에서 선, 그리고 선의 상징으로서 신의 ‘절대성’과 악과 악마의 ‘상대성’에 대한 인식을 하나의 특성으로 꼽는다면,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는 이와는 또 다른 측면의 독특한 특성도 발견된다. 이시기 러시아에서는 악이나 악마를 미지의 것, 추상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악의 표상으로서 악마, 혹은 적그리스도를 구체적인 인간과 관련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종교 분열로 인한 적대적 세력들 간의 분쟁과 종말론의 만연, 그리고 표트르 대제의 급진적 서구화 정책과 1812년 조국 전쟁까지 이 격동의 세월 동안 러시아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표상들로 넘쳐났다.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를 적그리스도라 부르는가 하면 구교도들은 개혁파의 수장이었던 총대주교 니콘을 적그리스도라 불렀으며 표트르 대제와 나폴레옹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악마에 대한 관점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주를 합리적인 힘의 작용으로 파악하던 자들에게 악은 적어도 악마가 초래하는 것은 아니었다. 악이 사회구조의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생각은 악마의 영향력을 급격히 쇠퇴시켰으며 중세에 불타올랐던 악마의 토포스는 18세기 말까지는 다소 사그러드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악마의 형상은 낭만주의의 부흥과 맞물려 전혀 새로운 국면의 발전을 맞이하게 된다. 유럽에 만연했던 진보적 낭만주의는 자유에 대한 사랑과 반항의 정신을 노래했으며 이러한 낭만주의는 악마에게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반란자’, ‘자유를 사랑하는 폭동자’의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에 악마는 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 질서를 허물려고 시도하며 그 경계를 넘어서려 노력하는 자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 자체를 ‘자유가 부재한 공간에서의 낭만주의적 일탈’이라는 긍정적 행위 유형으로 간주하기에 이른다,
  러시아 문학에서 악마가 중심적 테마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낭만주의 시대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학과 예술 속의 악마의 형상은 서구의 낭만주의적 악마들의 영향 아래, 이제 정교적 틀을 벗어나 고뇌하는 주체, 고독한 영혼, 반항적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악마는 성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연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작품 전면에 나서서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된다. 푸시킨의 『악마(데몬)』, 레르몬토프의 서사시 『악마(데몬)』, 도스트옙스키의 『악령(베스)』, 톨스토이의 『악마(디야블)』, 솔로구프의 『작은 악마들(베스)』, 레미조프의 『악마(베스)에 홀린 자들: 사바 그루드친과 솔로모니야』 등 수많은 작품의 제목에서 악마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악마는 세상의 모순에 대한 절망과 환멸, 여기서 오는 우울과 권태에 고뇌하는 주인공이 된다. 러시아 낭만주의는 프랑스, 독일, 영국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당시 러시아의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 독특한 러시아적 특성을 만들어갔다. 1812년 조국 전쟁으로 고양된 민족해방 의식은, 1825년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경험하고 이후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를 겪으면서 현실에 대한 좌절, 변화에 대한 회의,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순에 대한 생각으로 점차 변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한 푸시킨의 『카프카즈의 포로』(1821), 『집시들』(1824), 『예브게니 오네긴』(1823~1831) 속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낭만주의적 악마성이 어떤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환멸, 삶의 가치에 대한 부정으로 스스로 고독하고 우울한 추방자가 되어버린 동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다.

“나는 그(포로)의 모습 속에서 19세기 젊은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버린 삶에 대한 무관심, 삶의 즐거움에 대한 무관심, 영혼의 때 이른 노화 현상을 표현하고 싶었다네.” (푸시킨, <고르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 1822)

  푸시킨적인 악마의 형상은 그의 시 『악마』(1823)에서 잘 드러난다.

“고상한 감정/ 자유와 명예와 사랑/ 영감에 찬 예술이/ 강렬하게 내 피를 끓게 하던 시절,/ 희망과 즐거움의 시간들 속에,/ 어떤 사악한 정령이 갑작스런 우수의 그림자를 던지며/ 남몰래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만남은 슬픈 것이었다./ 그의 미소, 기이한 눈길,/ 그의 독설은/ 내 영혼에 차가운 독을 부어 넣었고/ 그는 끝없는 비방으로/ 신의 섭리를 시험하였다./ 그는 아름다움을 환영이라 불렀고/ 영감을 경멸하였다./ 사랑과 자유도 믿지 않았으며/ 삶을 조롱으로 대하였으니/ 자연의 어느 것도/ 그는 축복하려 들지 않았다.” (푸시킨, 『악마』, 1823)

  푸시킨에 의하면 그가 이 시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나는 영원히 부정하는 혼이다”라고 말했듯이 청춘의 희망과 열정을 파괴하는 부정과 회의의 영혼이었다. 푸시킨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관련된 일련의 시들(『파우스트의 한 장면』(1825), 『파우스트에 관한 구상 스케치』(1825))을 쓰기도 했는데 푸시킨이 그린 악마는 괴테의 그것보다도 더욱 ‘부정과 회의’에 가득 찬 형상으로 구현된다. 악마는 삶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신의 섭리를 비방하며 모든 것을 냉소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만든다. 
  푸시킨의 악마 테마는 레르몬토프의 시들을 통해 더욱 발전해나간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쓴 『나의 악마』(1829)와 『나는 천사들과 천국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소』(1831), 그리고 푸시킨의 것과 동일한 제목의 서사시 『악마』에 이르기까지 악마는 레르몬토프 작품 세계에서 중심적 화두였다. 특히 서사시 『악마』는 1829년부터 1840년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개작될 정도로 평생 작가의 관심 영역 속에 머물러있었다. 이 작품이 러시아 문화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다. 이후 악마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담론을 자아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작품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흔히 러시아 문학 속 악마적 주인공들의 형상은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표도로프에 의하면 레르몬토프의 작품 세계에 나타난 바이런의 영향은 바이런의 직접적 수용이라기보다는 프랑스 낭만주의를 통한 러시아식 수용과 더 관련이 깊다.

“레르몬토프의 초기 작품들은 바이런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1810~1820년대 바이런의 러시아식 수용과 보다 밀접히 관련된다. 바이런은 세계적 비애의 시인이자, 세상에 환멸을 느껴 불행해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이국적 환경에 처하게 되는 멜랑콜리한 주인공의 창조자로서 수용된다. 이는 라마르틴과 샤토브리앙을 통해 수용된 바이런이다.” (표도로프, 『레르몬토프와 그 시대의 문학』, 1967) 

  레르몬토프의 『악마』 속 주인공은 밀턴의 『실낙원』과 바이런의 『카인』에 나오는 악마, 무엇보다도 푸시킨의 악마의 형상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파생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더 이상 악의 상징이 아니며 그의 사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악이라기보다는 권태감이다. 악마적 주인공들의 본질적 속성인 이 권태감이 어떠한 것인지는 페초린(『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의 말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책을 서투르게 모방한 것을 읽을 때 그러하듯이 (삶은) 따분하고 역겨웠다.” (레르몬토프, 『우리시대의 영웅』, 1840)

  삶이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흥분할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권태로운 것이다. 이 권태를 없애기 위해 악한 행동을 해보지만 이 역시도 무료함과 고독감을 걷어내지 못한다. 레르몬토프에게 있어 선과 악은 서로 상반되고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있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감정이란 것을 모르고 모든 것이 권태로웠던 악마에게 사랑이 찾아왔을 때, 즉 악마가 “사랑, 선, 아름다움의 성물”을 다시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경쟁자인 타마라의 약혼자에게 죽음을 초래한다. 여기서 악은 타마라에 대한 사랑, 즉 선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으로부터 분출된다. 선과 악은 셸링식으로 표현하자면 “동일한 근원”을 지니는 것으로서, 레르몬토프에게 나타난 선과 악의 개념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레르몬토프의 젊은 시절 작품들의 사상적, 언어적 중심을 이룬다. 그는 스스로를 ‘악의 택함을 받은 자’라 부른다. (죄악으로서의) 악을 정당화하고자 하여서가 아니라, 고통과 연관된 숭고한 악(악마주의)은 본질적으로 선의 불충분성, 불완전함, 무기력함의 결과이며 선과 동일한 근원에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헨바움, <레르몬토프의 문학적 입지>, 1941) 

  레르몬토프의 악마는 시인의 내밀한 자화상이자 19세기 중반의 젊은 인텔리겐치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악마의 형상에는 지식인의 속성, 세계 구조에 대한 철학적 회의, 절대적 자유의 추구, 잃어버린 이상에 대한 깊은 슬픔이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그 시대 지식인들의 고민과 내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에 당대 문화계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네크라소프의 『한밤의 별을 걸고 맹세하오』, 미나예프의 『새해의 판타지』, 『악마』, 세베랴닌의 『악마』, 마야콥스키의 『타마라와 악마』 등과 같은 시들에서부터 루빈시테인의 오페라와 나프라브닉의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레르몬트포의 『악마』를 모방하거나 중심 테마로 삼은 수많은 후속 작품들이 이어졌다. 특히 레르몬토프의 『악마』는 화가 브루벨의 <앉아있는 악마>(1890), <레르몬토프의 시 『악마』의 일러스트레이션, 타마라와 악마>(1891), <상처입은 악마>(1902) 등에서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바 있다. 
  예술사에서 문학과 회화가 만나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레르몬토프-브루벨-블로크’로 이어지는 문학과 회화의 만남만큼 두 장르의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주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화가 브루벨에게 있어 악마는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적 테마였다. 레르몬토프의 시에서 악마는 남성으로 묘사되지만 브루벨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는 양성적 특성을 악마에게 부여한다. 브루벨 자신이 단호하게 부정하였듯이, 브루벨이 심취했던 악마의 테마는 데카당적 경향의 상징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현실 도피적이고 염세주의적 세계관과는 다른 것이었다(이형구, <미하일 브루벨의 양성적 악마> 참조). 데카당주의자들이 악, 고통, 죽음과 같이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현상의 하나로서 악마에 심취했다면 브루벨은 전통적인 러시아적 접근 방식으로, 즉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로서 선과 악의 문제에 다가선다. 
  브루벨의 작품들은 상징주의 시인 블로크를 강하게 매료시켰다. 1910년 브루벨의 장례식에서 블로크는 레르몬토프의 악마와 브루벨의 악마의 상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신비한 석양이 푸른 보랏빛 산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이것은 아직 ‘이름이 없는’ 세 가지 색에 대한 우리의 명칭일 뿐이며 타락한 악마 속에 녹아있는, “악도 그에게는 따분했다”는 생각의 기호(상징)일 뿐이다. 레르몬토프의 거대한 생각의 흐름이 브루벨의 세 가지 색 조합에 녹아있는 것이다.” 
“브루벨은 광기의 얼굴로 왔지만 성인이었다. 브루벨은 세상의 푸른 보랏빛 밤 속에 먼 옛날 저녁의 황금이 녹아있음을 알려 준다. 브루벨의 악마와 레르몬토프의 악마는 우리 시대, 곧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며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시대의 상징인 것이다. 우리는 선명한 저녁의 타락한 천사처럼 이 밤을 물리쳐야만 한다.” (블로크, <브루벨의 회상에 부쳐>, 1910) 

  블로크는 또한 자신의 시 『낯선 여인』(1906)과 브루벨의 <앉아있는 악마>와의 상응성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다.

“낯선 여인. 이는 단순히, 타조 깃털 모자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 여인이 아니다. 이는 여러 세계들, 특히 푸른색과 보라색의 세계로 이루어진 악마적 합성이다. 내게 브루벨의 재능이 있었다면 나도 악마를 창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다.” (블로크, <러시아 상징주의의 현 상황에 대하여>, 1910)

  이처럼 낭만주의 시대의 악마의 형상 속에서는 기존의 가치체계가 전복됨으로써, 이제 악마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개인,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항하는 반란자의 상징이 되어간다. 악마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이미지화는 기독교 사상가와 작가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그들은 낭만주의를 ‘악마학파’로 간주하고 낭만주의 작가들을 악마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가령 푸시킨을 가리켜 “바이런과 같은 악마주의적 천재”(알렉산드르 표도로브나, 『보브린스카야에게 보내는 편지』, 1837)라 부른 이들도 있었다. 
  반면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은 악마와 악의 개념에서 그 초점을 현저하게 이동시켰다. 악마는 점차 인간의 내적 목소리로 변하고 지옥은 영혼의 상태가 되면서, 악마의 속성으로서의 악이 아니라 인간 내면을 관통하는 악에 관심의 초점이 돌려지게 된 것이다. 
  이미 푸시킨 후기 작품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인간 본성 속의 악마성, 욕망의 문제는 도스토옙스키에 이르러 보다 심오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거하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며, 악마의 모습은 이제 다채로운 악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세상의 악과 그 발현으로서 범죄는 인간의 자유와 의지의 상관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인간의 자유가 자기 의지로 타락하고, 자기 의지는 다시 악에 이르고 악은 범죄를 낳게 되는” 것이다(베르댜예프,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1923).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악령』의 스타브로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 카라마조프가 보이는 악마성은 인간 내부의 악이 별개의 자아가 되어 분열된 상태, 악이 악마로 인격화된 상태를 보여준다. 

“이 악마는 도스토옙스키가 그린 분열된 인물들 누구에게나 따라다닌다. 분열해버린 인간의 제 2의 자아는 허무의 영이며 인격 그 자체의 상실을 나타내준다.” (베르댜예프,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1923)

  이반 카라마조프가 악마에게 하는 아래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악마는 인간 영혼이며 분열된 자아 자체인 것이다. 

“너는 나 자신의 화신이지만, 다만 나의 한쪽 면의 화신이다‥‥‥. 나의 사상과 감정, 그 중에서도 가장 추하고 어리석은 것의 현현이다.” 
“너는 별개의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냥 나이며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880)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내면 속의 악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그 악의 체현으로서의 악마의 실체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악과 악마의 힘이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그 보다 더 위대한 것, 곧 사랑과 신앙의 힘이 있음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사나 조시마 장로와 같은 긍정적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비관론은 구원의 은총에 대한 희망과 결부되어 있었고, 악에 대한 인식은 진리에 대한 심원하고도 극히 실제적인 확언 속에서 선에 대한 직관과 통합되어 있었다(러셀 제프리 버튼, 『악마의 문화사』).
  선과 악에 대한 현대적 이해에서는, 이미 레르몬토프에게서도 보여진 바 있던 선과 악의 절대적 구분의 모호함, 선과 악의 양면성, 선과 악의 통합 가능성이 점차 두드러지고 있는 듯하다.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속의 악마의 모습도 그러하다. 악마 볼란드는 전혀 새로운 타입의 악마 상을 보여준다. 볼란드가 속해 있는 마법과 환상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개념이 서로 대립적이거나 양립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세계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인간에게 해를 미치는 존재라는 악마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 뒤집어진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따온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에피그래프 “나는 영원토록 악을 원하지만 영원토록 선을 행하는 힘의 한 부분이다” 속에는 악마라는 본질의 근원적 모순성과 함께 선과 악의 화해 가능성도 깃들어 있는 듯하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널리 퍼져나간 유물론적 사상도 악과 악마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흔들어 놓았다. 다윈,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등은 그 사상은 각기 상이하더라도 신과 악마 둘 다 환각에 불과하다는 지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일조했다(러셀 제프리 버튼, 『악마의 문화사』). 오늘날 악마는 여전히 악하고 파괴적인 근원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악마의 부정적 속성은 권력, 성공, 미, 자유 개념과의 상호관계 속에 현대 문명의 상징이라는 새로운 특성도 획득해 가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악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말 mal’은 불행, 재앙, 질병, 고통을 의미하는 라틴어 mălum에서 파생되었으며, ‘악마 diable’는 짐수레를 뜻하는 라틴어 diabolus를 어원으로 갖는다. 러시아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악마 ‘데몬 демон’은 그리스어 ‘δαίμων(다이몬)’에서 기원하며 이는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중재자를 의미했다. 또한 ‘사타나’는 그리스어 ‘사타나스 σατανᾶς’로부터, ‘디야볼’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로부터 기원한다. 
  토포스로서 악의 개념은 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에서 언급되지만, 유럽에서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악의 근원을 밝히고 악의 현상을 분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이 중세 말 이후 교회와 국가에 권력이 집중되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을 고려할 때, 악의 개념은 서구사회가 동질적인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회구성 원리와 갈등을 빚는 이질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는 노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 문명권에서 악 또는 악마의 개념과 형상은 절대 선인 신에 대립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신교의 영향이 약하고 반교권운동이 치열했던 프랑스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잇따라 혁명을 겪으면서 악의 개념이 급격히 세속화, 현실화된다.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정신이 강한 프랑스는 근대 이후 신에 대항하는 악마의 개념이 권력과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자유와 저항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완벽한 선인 신보다 인간의 편에 서려는 악마의 이미지, 선의 결핍이라는 악마의 약점을 인간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선, 악과 같은 윤리적 개념에 유난히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러시아 민중의 근본적 특성으로 여겨지는 종교성 및 종교성과 관련된 절대적 선의 추구와 관련이 있다. 러시아어에서 선과 악은 대립되는 가치이지만 그 성격이 다소 상이한데, 선은 절대적인 것만 가능한 반면 악은 그 성질과 규모에 따라 나뉠 수 있는 개념으로 인식되어, 절대적 선의 상징이 신 하나인데 비해 악의 상징인 악마는 그 근원과 속성, 힘의 크기에 따라 ‘데몬’, ‘쵸르트’, ‘디야볼’, ‘사타나’, ‘베스’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독교 전파 이후 러시아는 성자전을 통해 구체적인 악마의 형상이 자리 잡게 되는데, 이는 다른 기독교 문명권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유럽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는 1812년 조국 전쟁으로 고양된 민족해방 의식과 1825년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경험하고 이후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를 겪으면서 현실에 대한 좌절, 변화에 대한 회의,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순에 대한 생각으로 점차 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후 인간에 내재된 악마적 속성의 주제는 인간의 욕망과 어두운 충동, 구원의 은총에 대한 희망 등의 주제와 맞물리며 러시아 문학의 주된 테마를 이루는데, 이 시기의 러시아 문학은 역으로 유럽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걸쳐 널리 퍼져나간 유물론 사상과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선 소비에트 체제가 악과 악마에 관한 기존의 생각을 뿌리째 흔들어, 신과 악마 둘 다 환각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일정하게 작용한다. 더불어 악마의 부정적 속성은 권력, 성공, 미, 자유 개념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현대 문명의 상징이라는 새로운 특성도 획득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관 토포스 공포; 권태; 도덕; 선; 신앙; 이성; 자유;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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