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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애국심
토포스명(프랑스) patriotisme (patrie)
토포스명(러시아) патриотизм
정의 1. 애국심은 인류애와 조화를 이룰수록 그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한다.
2. 애국심은 과열될수록 전체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애국심을 뜻하는 프랑스어 ‘파트리오티즘 patriotisme[patʀijɔtism]’은 조국 ‘파트리partrie’에서 파생된 어휘이다. 파트리는 ‘조상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 patria를 어원으로 가지며, 이는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pater에서 파생되었다. 파트리오티즘은 1749년경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비교적 근대적인 용어이다. 18세기 말에는 본래 고대 로마에서 동향인, 동국인 또는 시민을 가리키는 ‘compatriote’라는 어휘를 원용하여, 당시 혁명파를 ‘파트리오트patriote’(‘애국자’의 의미)로 명명했다. 
  일반적으로 조국의 개념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자신이 속해있는 또는 속해있다고 느끼는 정치적 공동체를 가리키는 만큼 같은 공동체에 속해있지 않은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동반되기도 한다. 애국심은 일반적으로 조국에 대한 정서적 애착과 정치적 헌신의 의지로 드러나며, 무엇보다 외국군대의 공격에 맞서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려는 의지를 가리킨다. 

애국심은 공익에 대한 존중보다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려는 의지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시민정신(civisme)과 다르며, 국가에 대한 배타적 숭배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가주의(nationalisme)와도 다르다. 
(Rey, A., dir. Le dictionnaire culturel en langue française 참조) 

  자신이 태어난 마을 또는 지방, 때로는 나라 전체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페이pays'와 조국을 뜻하는 '파트리'가 구분되는 것은 국가의 개념이 확립되면서이다. 특히 18세기 말 이후에 ‘페이’는 지방을 나타내는 말로 축소되어 조국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혼용된다. 가령 쥘 르나르(1864~1910)가 “서너 채의 집, 대지와 나무를 적실 물, 우리의 부름에 순응하는 희미한 어린 시절의 추억만 있으면 된다. 조국(patrie)이란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라고 말할 때 조국은 여전히 ‘페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 알퐁스 뒤프롱(1905~1990)이 “사람들은 ‘고향(pays)’에 대해 아픔을 지니고 있다. 조국(patrie)은 영웅성이나 위대성을 함축하므로 다른 차원에 속한다. 과연 조국이 나약해질 수 있는가?”(『국민정서에 대하여』)라고 말할 때는 명백히 ‘페이’와 ‘파트리’는 구분된다. 그는 조국을 이렇게 정의한다.

“조국은 분명 아버지의 땅을 말하지만, 무엇보다 보호해야 하고 그 땅을 위해 목숨도 바쳐야 하기 때문에 아주 민감한 집단적 총체이다. 조국은 영토라는 물리적 기반을 가진 실체인 동시에 그 땅이 불러일으키고 또 정당화하는 영웅성을 지닌 정신적 실체이다” (알퐁스 뒤프롱, 『국민정서에 대하여』 )

  고대에도 조국은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대상으로 여겨졌다. 

“조국은 사람들을 신성한 끈으로 묶어둔다. 종교를 사랑하듯 조국을 사랑해야 하고, 신에게 복종하듯 조국에 복종해야 한다. 무엇보다 조국을 위해 죽을 줄 알아야 한다. 조국에 대한 사랑은 고대인들의 신앙이었다.” (퓌스텔 드 쿠랑쥬(1830~1889), 『고대의 도시』, 1864)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호라티우스(기원전 65~기원전8), 『서정시집』)

“부모, 자식, 친지, 친구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조국은 이들 모두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하나로 묶어준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조국에 도움이 되는데 목숨 바치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사회적 의무들의 등급을 매기고자 한다면 조국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제일 앞에 두어야 할 것이다.” (키케로(기원전106~기원전43), 『의무』)

  이러한 인용문들은 고대에도 조국이 고향, 부모, 선조를 넘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총체적으로 지시하는,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함축한 개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서적 함의가 강한만큼 조국의 개념은 ‘국가’ 개념과 달리 근대 이후 정치와 법 제도가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법률에 명시된 공식적인 용어로 정립되지는 않은 듯하다. 따라서 애국심이 시대별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고 애국심이 고무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조국의 개념과 조국에 대한 헌신을 의미하는 애국심이 공식적으로 재평가되고 어느 때보다 고무되었던 시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기이다. 조국은 주권의 담지자인 혁명적 국민과 거의 동일시되었는데, 이 개념은 프랑스 혁명의 성취를 와해시키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주변 국가들이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부터 ‘파리코뮌’이 있었던 1870년까지 애국자는 곧 공화주의자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후 1,2차 세계대전까지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국가주의의 발흥은 ‘조국’을 적과의 전투에서 국민을 단결시키는 배타적 연대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18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국 또는 애국심의 배타성에 대한 경고와 비판의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져온 것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반영된 또 다른 현상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애국심’을 뜻하는 ‘파트리오티즘 патриотизм[patriotizm]’은 프랑스어 patriotisme로부터 차용된 단어로서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대에 처음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다. 러시아 사전들은 애국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조국과 자국민에 대한 사랑, 충성심.”(<우샤코프 사전>, <오제고프 사전>, <쿠즈네초프 사전> 등).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의 애국심에 대한 정의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표준국어대사전>), “love of your country and willingness to defend it”()에서는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단어 ‘나라’나 ‘country’가 사용되는 것과 달리, 러시아어의 경우 대다수 사전에서 ‘나라’에 해당하는 ‘스트라나 страна[strana]’가 아니라 ‘조국’을 뜻하는 ‘오테체스트보 отечество[otechestvo]’나 ‘로디나 родина[rodina]’가 사용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버지를 뜻하는 단어로부터 유래한 ‘오테체스트보’는 라틴어 patria(‘조상의 땅’)의 어의차용(calque) 형태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영어의 fatherland, 독일어 Vaterland와 같이 유사한 어휘들이 인도-유럽어에서 폭넓게 발견된다. ‘로디나’는 슬라브어권 언어들에서 널리 나타나는 단어이지만 여타의 슬라브어에선 보통 ‘고향’, ‘가족’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과 달리 러시아어 ‘로디나’만은 ‘조국’의 의미도 가진다. ‘로디나’가 ‘조국’의 의미로 사용된 최초의 예는 18세기 말 시인 데르자빈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파스메르 어원사전> 참조). 
  ‘오테체스트보’와 ‘로디나’는 ‘스트라나’에 비해 좀 더 정서적 함의가 강하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차이점도 드러낸다. 특히 19세기 푸시킨과 데카브리스트들의 언어 속에서 ‘오테체스트보’는 정치 사회적 의미, 혁명적 의미를 함의하는 것이었던 반면 ‘로디나’는 그러한 함의 없이 사용되었다(비노그라도프, 『단어의 역사』 참조). 특히 이러한 정치적 함의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강화되었던 까닭에 파벨 1세는 1797년 칙령을 통해 ‘오테체스트보’를 ‘고수다르스트보 государство[gosudarstvo]’(‘국가’)로 교체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다른 언어 문화권보다 러시아의 경우 조국을 뜻하는 단어들이 법률과 관련된 공적인 용어 체계로 공고히 편입되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러시아 헌법을 포함하여 공적 문서들에서 조국이란 용어를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조국의 수호는 러시아 연방 국민의 본분이자 의무이다.”(러시아 연방 헌법, 제 58조). 또한 러시아 국가(國歌)의 후렴부에도 ‘조국’이 등장한다. 현 러시아의 국가는 소련의 국가와 많은 부분 달라졌지만 후렴부의 이 소절만큼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이다. “우리 자유로운 조국이여, 이름을 떨치어라.”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으로 여겨지는 두 개의 전쟁 곧 “조국전쟁”(1812년 나폴레옹 전쟁)과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 중 1941~1945년의 소련-독일 전쟁)에 조국의 명칭이 붙는 것도 이 단어가 러시아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깊은 정서적 반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오테체스트보’는 단어의 기원이 말해주듯 ‘아버지’와 연상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로디나’는 ‘어머니’와 강하게 연상작용을 하여 ‘어머니-조국’의 결합으로 널리 나타난다. 특히 대조국전쟁 시기 ‘어머니-조국’은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동적 구호의 역할을 톡톡히 한 바 있다. 
  그러나 애국심을 ‘아버지-조국’이든 ‘어머니-조국’이든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더 이후 세대의 몫이다. 고대 사회에서 애국심은 이와는 다소 다른 개념이었다. 카람진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적 자긍심에 관하여>(1802)에 따르면 애국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카람진은 인간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해 느끼는 애착을 자연적-물리적 애국심이라 칭하고, 함께 자라고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 즉 민족과 국민에 대한 사랑을 도덕적 애국심이라 부른다. 조국의 번영과 발전을 바라는 마음, 이를 위해 자신을 쏟아 붓고자 하는 의지로서의 애국심을 정치적 애국심이라 지칭한다. 
  첫 번째 의미에서의 애국심 개념은 고대 러시아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개념이었다. 인류가 소규모 집단 안 혈연관계를 토대로 유지되던 시절 자기 집단의 유지와 발전을 바라는 감정은 가족적 유대관계와 유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점차 농경생활이 정착되면서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감으로 이어졌다. 12세기 러시아 공후들은 선서나 맹세를 할 때 ‘러시아 땅’의 이름으로 하였으며(플라토노프, <러시아 문명 백과사전>), ‘남의 땅에서 우러름을 받고 사느니 내 땅에 뼈를 묻는 것이 더 낫다.’라고 이파티예프 연대기(13세기말~14세기초 추정)는 말하고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과 향수가 민족과 국민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개념 발전하게 되는 것은 국가 개념의 형성과 관련이 깊다. 15세기 바실리 2세와 이반 3세를 거쳐 16세기 이반 4세 시대에 이르러, 이전의 크고 작은 지방 공국들이 모스크바 공국 중심으로 통합되고 강력한 민족국가의 틀이 마련되면서 애국심 개념도 초기의 자연적-물리적 감정에서 정치적 덕목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에 이른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기독교적 유럽이 구현되었던 중세에 국민과 조국의 개념은 매우 미미하고 생소하게 여겨졌다. ‘신앙도 하나, 왕도 하나, 법도 하나(Une foi, un roi, une loi)’라는 지배 이념이 보여주듯, 기독교로 통일되어 있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유럽은 종교적 단일성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보편적 조국 - 세계 시민의 개념과 동일한 차원에서 - 의 개념을 잠재적으로 간직해온 듯하다. 시대에 따라 사상적 배경과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 조국의 개념이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귀족은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에스파냐인도 아니다. 그는 세계 시민이고 그의 조국은 도처에 있다.” (시라노 드 베르쥬락, 1619~1665)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개별 조국보다 인류라는 거대한 조국에 대한 의무가 훨씬 더 강하다.” (페늘롱, 『죽은 자들의 대화』, 1692~1696)

“영국인도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되지 말자. 유럽인이 되자. 더 이상 유럽인이 되지 말고 인간이 되자. 인류가 되자. 마지막 이기심인 조국을 버리는 일이 남아있다.” (빅토르 위고, 『보이는 것들』, 1887)

  ‘프랑스’라는 개념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하는 시기는 중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교황의 지배력이 막강했던 중세에 어느 나라도 교황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었지만, 프랑스의 왕은 유럽의 다른 군주들보다 교황권의 세속적 우월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스에 대한 교황의 간섭이 합법적인지 자주 이의를 제기했다. 프랑크족의 왕이 아닌 프랑스의 왕이라는 호칭이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시기는 1214년 카페 왕조의 7대 왕 필립 오귀스트가 발행한 외교문서에서이다. 무훈가요 『롤랑의 노래』(1098~1100)는 이 시기 자신을 ‘프랑스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낀 조국 프랑스와 기독교 신앙의 성스러운 결합, 즉 국가의 느낌과 종교적인 느낌의 혼재를 표현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여겨진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프랑스가 실재하기 전에, ‘프랑스’, 조국-프랑스, 하느님에 의해 하느님을 위해 봉사하도록 선택된 프랑스를 최초로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루이 레오, 귀스타브 코엔, 『중세의 예술과 프랑스 문명』, 1936)
  프랑스 국왕이 교황권에 맞서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사건은 아비뇽 유수(1309~1377)이다. 로마에 있는 교황을 프랑스 아비뇽의 교황청으로 데려와 이후 70년간 그곳에 머물게 한 이 사건은 교황권의 실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 특유의 갈리카니즘(gallicanisme) 전통의 토대를 마련했다.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에 반대하여 세속사회에서는 프랑스 왕이 자주권을 가지며, 교황의 내정간섭을 제한하기 위해 프랑스의 성직자와 왕이 연합할 것을 주장한 갈리카니즘은 19세기에 용어가 정립되었으나 그 원리 자체는 이처럼 14세기에 마련된 초기 프랑스 국가주의에 전통이 닿아있다. 이러한 전통은 17세기 ‘매우 가톨릭에 충실함“을 자처한 프랑스 국왕들이 국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국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펴는 데서 확인된다. 가령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톨릭 군주제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세력이나 터키인들과 동맹을 맺은 프랑수아 1세나 리슐리외 추기경의 정치적 선택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러한 국가 정서는 17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 코르네유의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슬픈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죽음을 통해 불멸에 이르는 것이다.” (코르네유, 『르시드』, 1636)

  프랑스라는 국가 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애국심이 강하게 형성된 시기로 또한 중세를 종식시키고 프랑스, 영국과 같은 국가 개념이 정착하기 시작한 백년전쟁을 주목한다. 특히 ‘조국 프랑스를 위하여’, ‘프랑스의 국왕을 위하여’를 내세우며 앞장 서 싸운 애국 소녀 잔 다르크의 등장은 프랑스라는 국가 개념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하느님이 선택한 프랑스와 프랑스의 왕을 영국의 침략자들에게서 지켜내야 한다는 잔 다르크의 소명은 이후 왕과 조국을 동일한 실체로 여기고 조국을 위한 헌신과 왕에 대한 복종을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의 원형이 된다. 1871년 마침내 안정적으로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부는 초등학교 역사 교육에서 잔 다르크를 침략자를 물리치고 프랑스 국민을 승리로 이끈 애국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잔 다르크는 당시 프로이센에게 패한 프랑스 국민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 있는, 조국과 애국심의 훌륭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잔 다르크는 프랑스 정치인들, 특히 극우파를 표방하는 국민전선 당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추대되고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9세기 내내 이어진 공화파의 투쟁은 왕과 조국을, 애국심과 왕에 대한 복종을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에 종지부를 찍고 조국과 공화국을 일체로 여기는 새로운 이념을 확립한다. 혁명기에 애국심은 공화국과 혁명을 지키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애국자, 공화주의자, 상-퀼로트는 모두 동의어로 이해되었고 이 시기만큼 애국자라는 말이 강한 울림을 가졌던 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이상한 논쟁에서 최초로 발설된 단어들을 듣고 나는 애국심이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미라보, <삼색기에 대하여>, 1790년 10월 21일 입법의회 연설) 

  1790년 7월 14일 혁명 기념일에는 ‘조국의 제단’이 세워졌고, 1792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두려워한 주변 국가들이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선포하자 국민의회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선언했다. ‘위기에 처한 조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드골 장군이 독일의 침략에 대항하여 프랑스인들을 규합하고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연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또 한 번 선포한 바 있다. 

“우리의 조국이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모두 조국을 구하기 위해 투쟁합시다! 프랑스 만세!”(샤를 드 골,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1940.6.18.)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도 1789년 혁명이 일어난 직후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라인강 군대의 군가’라는 제목의 군가였던 이 노래는 ‘조국’의 아이들에게 무기를 들라고 외쳤다. 이 곡을 하룻밤 만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 루제 드 릴은 “조국을 위해 죽는 것, 이는 선망의 대상,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존엄한 운명이다.”라며 애국심을 고무시켰고,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혁명을 이끈 당통은 1794년 3월 30일 회의에서 “우리는 조국을 신발 밑창에 끌고 다니지 않는다.”는 유명해진 말로 조국이 ‘땅’ 그 이상의 것임을 강조했다. 이 시기에 조국이란 어휘는 국가, 국민, 공화국과 같은 추상적인 법률 용어로는 불가능한 벅찬 감동과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1804년 프랑스에 제국을 세운 나폴레옹이 국민들에게 호소한 것도 무엇보다 이 애국심이었다. 

“모든 미덕들 가운데 으뜸은 조국에 대한 헌신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815, 『나폴레옹의 정치적 삶과 군인의 삶』, 1827)

  19세기 역사가 미슐레는 혁명기 애국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조국’에서 찾은 것은 민중 전체를 결합시키는 연대의식, 즉 우애(fraternité)라고 설명했다.

“조국이라는 진정한 명칭을 발견한 것은 프랑스의 오래 된 코뮌들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의미와 깊이를 소박하지만 충만하게 느끼면서 코뮌들은 조국을 곧 ‘우애’라 불렀다. 조국은 사실 모든 코뮌들을 포괄하는 위대한 우애이다. 나는 프랑스를 사랑한다. 그 우애가 프랑스이고, 프랑스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사랑을 담은 조국, 위대한 ‘우애’는 무엇보다 이 애착을 통해 드러난다. 다음으로 조국은 애착을 보편적으로 확장시키고 숭고하게 만든다. 민중 전체가 친구가 된다. 개별적인 우애는 이 위대한 입문과정의 첫 단계와도 같다. 여러 지점들을 거쳐 지나가던 영혼은 차츰 비상하여 더 우월한,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더 고귀해진 영혼- 그것을 조국이라 부른다 -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사랑하게 된다.” (쥘 미슐레, 『민중』, 1846)

  또한 조국의 어원인 ‘아버지(père)’를 환기시키며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파리의 여러 기념물들을 둘러보며 조국을 상기시키는 애국 교육의 장면에서도 조국의 이러한 함의는 잘 드러난다.

“자, 얘야, 보아라, 이것이 프랑스다! 이것이 조국이다! 이 모든 것은 한 인간과도 같다. 하나의 영혼, 하나의 심정이다. 모두가 이 한 존재를 위해 죽을 것이고, 또한 각자는 모두를 위해 살고 죽어야 한다.” (쥘 미슐레, 『민중』, 1846) 

  열렬한 공화주의자 빅토르 위고 또한 시집 『황혼의 노래』(1835)에서 “조국을 위해 경건하게 죽은 자들만이 그들의 장례식에 군중들이 몰려와 기도해주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다.”라고 조국의 숭고함을 노래했다. 이들 애국적 낭만주의자들이 갖는 조국 개념에서 주목할 점은 조국을 좁은 의미의 프랑스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계라는 보편적 조국의 개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이상주의적인 주장이다. 

“언젠가 지구 전체가 문명화되리라는 희망을 가집시다. 인간이 사는 모든 곳에 불이 밝혀지면, 그때 세계를 조국으로, 인류를 국민으로 갖는다는 지성의 원대한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 『성주들』, 1843)
19세기 후반 조국 프랑스에 대한 사랑과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열병처럼 프랑스인들을 사로잡은 데는 공교육을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주지시킨 공화국 정부의 정책적 의도가 크게 기여했다. 1877년에 출간되어 필독 교재로서 상당한 판매부수를 올린 두 권의 책, 『두 아이의 프랑스 일주』(G. 브뤼노)와 『프랑스 역사』(E. 라비스, 1880)가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두 아이의 프랑스 일주』에는 ‘의무와 조국’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사랑하라고 배웠던 위대한 이 두 가지, 의무와 조국에 언제나 충성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다.”(G. 브뤼노, 『두 아이의 프랑스 일주』, 1877)

  이 두 개념은 불가분의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서 두 아이 중 20살이 된 형은 곧 “프랑스 국기 아래 선 프랑스의 군인이 될 것이다.” 
  라비스가 중등 학생들을 위해 쉽게 기술한 『프랑스 역사』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이 있다.

“아이야, 책의 표지에 있는 프랑스의 꽃들과 열매들을 보아라. 이 책에서 너는 프랑스의 역사를 배울 것이다. 너는 자연이 프랑스를 아름답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역사가 프랑스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므로 프랑스를 사랑해야 한다.”(라비스, 『프랑스 역사』, 1880)

  『프랑스의 역사』 1912년 판본에는 “애국의 의무, 프랑스는 가장 정의롭고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인간적인 조국이다.”라는 글귀가 덧붙어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로이센에 넘어가자, 프러시아 교사로 대체될 암멜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알퐁스 도데, 『마지막 수업』, 1871)은 땅의 상실 앞에서 느끼는 프랑스인들의 상처를 통해 프랑스를 조국으로,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삼는 국민의 광범위한 공감대를 확인시키고 있다. 1883년 공교육 교과서는 그 국민적 정서를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공식화한다.

“국가에 봉사하는 것은 의무이자 명예이다. 위대한 가족인 조국은 우리의 애정과 충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 모두는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희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 태어났다. 국기는 조국의 상징이다. 국기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은 큰 수치이다.” (샤를 드바쉬, 장 마리 포이티에, 『프랑스 사회』에서 재인용) 
20세기 초 프랑스의 애국주의는 독일에 대한 적대감의 고조와 더불어, “조국은 보편적인 조국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입문이다.”(미슐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인도주의적 측면을 잃어버리고 국가주의로 변질되어간다. 국가(nation), 국민(peuple), 조국(patrie)은 모두 배타적 성격이 부각되며 외국과 외국인 및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의 근거로 작동했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국가란 무엇인가』(1882)에서 종족, 언어, 종교, 지리의 기준을 차례로 제거한 뒤 국가를 공동의 역사를 가지고 함께 살려는 의지로 규정했다.

"국가는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이다. 실제적으로 한 국가를 이루고 있는 다음 두 가지가 이 영혼을 구성하고 있다. 하나는 기억 속에 새겨진 풍부한 유산의 공유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함께 살려는 의지에 대한 현실적 합의와 공동으로 이어받은 유산을 계속해서 발전시키려는 의지이다." (에르네스트 르낭, 『국가란 무엇인가』, 1882) 

  여기서 국가 또는 국민성과 동일시된 조국은 국민의 개념과도 뒤섞여서, “위대한 일을 함께 이룬다는 것, 그것을 함께 이루고자 한다는 것, 이것이 하나의 국민이 되기 위해 본질적인 조건들이다.”로 표현된다. 국가주의를 표방한 애국심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예는 1882년에 창설된 ‘애국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국가주의를 내걸고 결성된 이 정당은 처음에는 온건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었으나 차츰 군부를 지휘한 불랑제 장군을 지지하면서 극우파로 진전되었다. 1889년 와해되었던 애국당은 1889년 반 드레퓌스 진영의 핵심 세력이 되어 복귀하면서 애국주의와 군국주의, 인종주의(특히 반유대주의)를 주창했다. 앙리 중령이 자신이 드레퓌스를 무고했음을 밝혔을 때, 우익단체인 ‘악시옹 프랑세즈’의 건립자 샤를 모라스는 『가제트 드 프랑스』 지에 「애국적 거짓」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앙리 중령을 영웅으로 추대했다. 드레퓌스를 비난하며 그를 경멸적으로 지칭한 ‘무국적자(apatride)’라는 어휘는 유대인을 조국이 없는 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조국의 배신자, 기독교 신앙이 없고 따라서 도덕적 원칙도 없는 비신자를 의미했다. 이 시기에 ‘애국적’이라는 말은 곧 ‘국가에 이익이 되는’을 의미하면서 공화국의 이념과는 결별하였다.

“공화주의자들은 공화국과 조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샤를 모라스, 『키엘과 탕제』, 1910) 

  격앙된 국가주의가 유럽에 몰고 온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는 그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조국의 개념과 애국심에 대한 회의를 불러오기도 했다. 

“나는 고대인보다 더 현대적이지 않으며 중국인도 프랑스인도 아닙니다. 조국의 개념, 다시 말해 붉게 또는 푸르게 표시된 한 귀퉁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의무, 그리고 초록색이나 검은색으로 표시된 다른 땅들을 미워해야 하는 의무는 내게는 언제나 협소하고 제한되고 잔혹한 어리석음으로 보였습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 1846, 8. 26)

  이처럼 근대적인 국가가 배타적으로 확립시킨 조국의 개념과 애국심의 과열은 그 옆에 나란히 그것이 초래하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경고의 담론들을 끊임없이 양산해왔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내 가족에게 유익하지만 조국에는 유익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조국에 유익하지만 유럽 또는 인류에 유해한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범죄로 간주할 것이다.” (몽테스키외, 1689~1755)

“훌륭한 애국자가 되기 위해 사람이 종종 나머지 사람들의 적이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 인간의 조건이 그런 만큼, 자신의 조국이 위대하기를 바라는 것은 곧 이웃들에게 불행을 원하는 일이 된다. 조국이 결코 더 크지도 더 작지도 더 부유하지도 더 가난하지도 않기를 바라는 자가 세계 시민이다.” (볼테르, 『철학 사전』, ‘조국’항목, 1764)

“이기주의와 증오만이 조국을 갖는다. 우애에는 조국이 없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 『조슬렝』, 1836)

“전쟁은 끔찍한데, 전쟁을 유지시키는 모-개념이 바로 애국심 아닌가?” (기 드 모파상(1850~1893), 『벨 프랑스』, 1900)

“조국의 개념은 곧 전쟁의 개념으로 연결된다.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을 볼 때, 전쟁은 조국의 개념을 즉시 가장 위협적인 힘으로 만들어 우리 사이에 유포시킨다.”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셀, 『제네바 또는 모스크바』, 1928) 

“전체주의국가들만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의무로 만든다.” (츠베탕 토도로프, 『야만인들의 두려움』, 2008)

  한편 현대에 들어 언어가 공동의 역사적, 정신적 유산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라는 점을 근거로 조국을 언어 즉 모국어와 동일시하여, 지리적,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할 때 초래되는 배타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나는 프랑스어라는 하나의 조국을 가지고 있다.” (알베르 카뮈, 『수첩』, 1942~1951)

“사람은 하나의 나라에 살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의 언어 속에서 산다. 조국 그것은 바로 언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에밀 시오랑, 『고백과 파문』, 1987)

  19세기 중반 이후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이념이 확산되는 분위기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1848)에서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말로 조국의 개념을 부정하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를 호소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무렵 국제 사회주의운동을 지지하며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평화를 호소했던 장 조레스는 국가주의와 애국심의 민감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약한 세계주의가 조국에서 멀어지게 하는 반면, 강한 세계주의는 다시 조국으로 데려온다.” (장 조레스, 『새로운 군대』, 1910)

“모럴리스트들이 인간에게 이기주의를 금지하면서 애국심은 승인할 때 그들은 모순적이다. 애국심은 국가 이기주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기심은 개인의 이기심이 개인들 사이에 불의를 저지르게 하는 것과 똑같이 국가와 국가가 똑같은 불의를 자행하게 만든다.” (생 시몽, 『전집』, 1839)

“평범한데도, 어떤 것보다 더 공허하고 치명적 히스테리인 애국심 이상으로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이 조국의 개념이다.” (루이 아라공, 『최우선이고 영원한 혁명』, 1921) 

  세계화를 주창하는 오늘날 애국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견해 또한 널리 일반화되고 있다. 

“국경과 국가의 개념은 부조리해 보인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르 몽드 디플로마틱』, 2001)

“애국심에 내재한 결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한 부분을 나머지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시민이 도덕과 보편성의 기본적인 원칙을 위반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진정한 도덕, 진정한 정의, 진정한 미덕은 보편성을, 따라서 권리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 (츠베탕 토도로프, 『우리와 타자들』, 1989 )

  오늘날 조국과 애국심은 시대에 뒤진 낡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럽연합이 구축되어, 여전히 불투명하긴 하지만, 유럽의 통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오늘날 국가들 간 경계에 기초하여 제기되었던 많은 문제들의 성격은 달라졌으며, 프랑스는 과거와 같은 형태로 ‘조국이 위험에 처해지는’ 위협에 직면할 일이 없어졌다. 20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학교는 더 이상 국민정서를 형성시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종교 교육이 폐지되고 공화주의적 애국주의를 다루는 도덕 교육이 축소되면서 시민교육의 내용 또한 빠르게 달라졌다.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슈벤느망(1939~ )이 ‘공화주의적 엘리트 의식’이란 표현을 내세워 프랑스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의무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애국심은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활발히 표출되는 듯하다. 

“좌파 지식인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지지하는 정치인까지, 무정부주의자에서 대 자본가까지, 무산자에서 백만장자에 이르기까지 운동선수와 함께 모두가 당당하게 프랑스 팀에게 갈채를 보낸다. 똑같은 말을 바보처럼 되풀이하며 세계주의를 주창하는 평화주의자조차도 우리의 삼색기의 승리를 바란다.” (J. 코, 『왜 프랑스인인가?』, 1975, 샤를 드바쉬, 장 마리 포이티에, 『프랑스 사회』, 2000에서 재인용)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애국심 개념은 국가 개념의 형성과 관련해 등장하게 되는 근대적 개념이다. 러시아 사회에서 근대적 애국심 개념이 형성된 시기는 표트르 대제 시  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애국심’, ‘애국자’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바로 표트르 대제인 것으로 알려진다.
  표트르 대제 시대의 중요한 가치체계는 한 마디로 ‘신, 차르, 조국’이란 말로 요약된다. 조국이란 지상에 마련된 신의 왕국이며 차르는 신으로부터 그 통치를 위임받은 자로서, 차르에 대한 충성은 이를 위임한 자 곧 신에 대한 신앙의 증거라는 논리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이는 스웨덴 군과의 폴타바 전투에 앞서 표트르 대제가 병사들에게 전하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조국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도래했다. 그대들은 표트르를 위해서가 아니라 표트르에게 위임된 국가, 그대들의 뿌리,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표트르 1세, 1709)

  정교 국가였던 제정 러시아에서 조국과 애국심 개념은 신앙과의 연계성 속에서 강력한 민족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차르는 곧 신의 대리자이고, 조국은 지상에 마련된 신의 왕국이라는 공식이 성립됨으로써 차르에 대한 충성심과 조국에 대한 사랑은 바로 신앙의 증거로서 주창되고 고무될 수 있었다.
  이처럼 이미 표트르 대제도 강대한 러시아를 꿈꾸며 벌인 수많은 전쟁에 앞서 애국심을 고취하고 조국의 의미를 각인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러시아 사회에서 애국심 문제가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화두가 되었던 시기는 단연 1812년 전쟁 전후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애국심’과 ‘애국자’ 개념이 국가 차원에서 강조될지라도 실생활과 크게 관련이 없는 피상적 개념으로 머물렀다면, 1812년 전쟁을 기점으로 애국심이 러시아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깊은 흔적을 남기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당시의 애국적 분위기 속에 애국심과 조국에 대해 논하는 문학작품들이 대거 등장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귀족의 일상생활에도 독특한 흔적을 남겼다. 애국심을 고무하고 선동하는 작품들의 등장은 특히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두드러졌다. 조국, 러시아군, 전시상황을 소재로 하여 조국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조국 수호를 촉구하는 시들이 많았다. 보예이코프의 『조국에게』(1812), 주콥스키의 『러시아군진영 안의 가수』(1812), 밀로노프 『애국자들에게』(1812), 라옙스키 『전투에 앞서 부르는 군사들의 찬가』(1812~1813), 릴레예프의 『조국에 대한 사랑』(1813)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등장한 작품들이다. 이 중 1812년 전쟁의 최고 수혜작은 단연 주콥스키의 시 『러시아군진영 안의 가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812년 전장에서 쓴 주콥스키의 이 애국적 서사시는 <유럽통보>에 정식으로 발표도 되기 전에 필사본을 통해 전장에 전파되었으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퍼져나가면서 시인의 이름을 전 러시아에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박선영, <1812년 조국전쟁에 바쳐진 19세기 러시아 시 연구> 참조).

“친구들이여, 이 잔은 조국에 바치세!
우리가 처음으로
존재의 달콤함을 맛보았던 나라,
고향의 들판과 언덕,
고향 하늘의 사랑스러운 빛,
익숙한 여울들,
어린 시절의 소중한 놀이들,
어린 시절의 가르침들,
그 무엇이 그대의 매력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오, 성스러운 조국이여,
그대를 찬송하며
그 어떤 가슴이 떨리지 않으리요.”

  전시 상황에 조국과 애국심에 대한 이러한 감성적 호소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마지막 두 행(‘그대를 찬송하며 그 어떤 가슴이 떨리지 않으리요’)은 관용표현으로 굳어지면서 오늘날에도 조국, 애국심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널리 애용되는 표현들 중 하나가 되었다.
  1812년 전쟁은 농민의 재발견이라는 측면에서도 러시아 사회에 큰 흔적을 남기는 사건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병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애국심이 단연 돋보였다. 그들의 애국심에 귀족 장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는 농민에게서 러시아의 미래를 보는 인민주의, 국가가 아니라 민중에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사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러시아에서 애국심이 ‘조국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나로드(민중, 민족, 국민)에 대한 충성심’의 개념을 포함하는 개념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812년 전쟁의 시기, 귀족 사회의 애국적 분위기는 비판적 사상가들의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전까지 프랑스적 유행 쫓기에 여념이 없었던 귀족 사회가 1812년 전쟁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일변한 현상을 푸시킨은 단편 『로슬라블레프』를 통해 예리하게 지적한다.

“모두가 다가오고 있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가벼운 이야깃거리였다. 당시 루이 15세 시대의 프랑스풍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불행히도 조국의 옹호자들은 꽤나 순박했다. 그들은 조롱당하곤 하였으며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 젊은이들은 러시아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경멸적 태도이거나 아예 무관심했다. [...]
그런데 갑작스러운 침략 소식과 황제의 호소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사교계 떠벌이들은 온순해졌고 부인네들은 벌벌 떨었다. 각종 모임들에서 프랑스어 박해자들의 지위가 수직 상승하였으며 홀은 애국자들로 넘쳐났다. 누군가는 담배 케이스에서 프랑스 담배를 쏟아 버리고 러시아 코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프랑스 책자들을 불태우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프랑스산 포도주를 거부하고 신 러시아 수프를 먹었다. 모두가 프랑스어로 말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푸시킨, 『로슬라블레프』, 1831)

  사회의 애국적 분위기는 귀족들의 일상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애국주의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귀족의 언어생활에서 두드러졌다. 프랑스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한다거나, 외래어의 사용과 러시아어의 잘못된 사용 등은 모두 애국심의 부족 혹은 부재를 드러내는 기호로 작용하였다. 1812년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전쟁과 평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수도 페테르부르크 살롱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은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귀족 자제들 사이에 러시아어 교육 열풍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애국주의는 또한 귀족들의 취미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유럽풍의 춤들이 주름잡던 무도회에서 차츰 러시아 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가 하면 프랑스식 고급 요리 대신 소박한 러시아 음식을 즐기는 귀족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귀족사회가 보여준 ‘남의 것’에 대한 선망과 추종이 갑자기 ‘내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으로 바뀌어간 현상은 러시아 지식인들의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은 1820~1830년대 귀족들의 이러한 애국적 태도를 지극히 겉치레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조소를 보냈다.

“어떤 이들은 조국의 명예나 불행은 전혀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 자기가 보트비니야(역주-크바스로 만든 차가운 수프)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또는 자기 아이들이 빨간 루바시카(역주-러시아 전통의상)를 입고 다닌다는 이유로 자기가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푸시킨, <편지, 사상, 논평들>, 1828)

  이처럼 형식적인 애국심, 겉치레적인 애국심은 조소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를 지칭하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푸시킨의 절친한 친구였던 뱌젬스키가 <파리로부터의 편지>에서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크바스 애국심’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을 애국심으로 여긴다. 튜르고는 이를 du patriotisme d'antichambre이라 불렀는데 우리말로는 크바스 애국심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뱌젬스키, <파리로부터의 편지>, 1827)

  러시아 전통 음료인 ‘크바스’를 앞에다 붙인 ‘크바스 애국심’, ‘크바스 애국자’라는 표현은 오래전부터 러시아 사회에서 존재해 왔던 관념, 곧 진정한 애국심과 구분되는 위선적이고 형식적이며 극히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언어로써 명확히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이 표현은 사회 교양 층에 빠르게 퍼져 나가 19세기 중반 러시아 사회의 유행어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애국심 개념이, 그중에서도 특히 애국심의 ‘진정성’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던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골의 글 속에서도 ‘크바스 애국심’, ‘크바스 애국자’라는 표현이 종종 발견되는데 고골은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조국에 대한 보통의 사랑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국에 대한 사랑은 위선적인 허풍의 느낌을 주는 듯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이른바 우리의 크바스 애국자들이다. 그들로서는 충분히 진심어린 것이겠으나 그들의 찬양을 들은 후에는 러시아에 침을 뱉게 될 뿐이다.” (고골, <우리 시인들의 서정성에 관하여>, 1846)

  한편 소비에트시기에 이르러 애국심 개념은 질적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조국의 개념이 민족을 초월한 사회주의 조국으로 바뀌었으며 이와 함께 애국심의 개념도 달라진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주창하는 애국심은 민족주의, 국수주의에 다름 아니며 사회주의 애국심, 소비에트 애국심은 자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타 민족들에 대한 존경심과 결합시키는, 그야말로 민족을 초월하는 진정한 애국심이라는 논리가 대두된다. 소비에트 시대에 발행된 백과사전에서는 소비에트 애국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소비에트 애국심은 소비에트 인간이 사회주의 조국, 공산당에 대해 가지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다. 소비에트 애국심은, 인종적 민족주의적 편견이 아니라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인민의 깊은 충성심과 신뢰를 토대로 한다는 데 그 위대한 힘이 있다.” (<브베덴스키 백과사전>, 1953~1955)

  진정한 애국심은 세계시민주의(Cosmopolitism)나 민족주의와 양립불가능하며 국제공산주의(Internationalism)와 긴밀히 연결되는 개념으로서 소련의 당면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힘으로 천명된다.

“이 애국심 없이는 소련을 지켜낼 수도, 사적 소유를 근절시킬 수도 없다. 이것은 지고한 혁명적 애국심이다.” (레닌, <제 8차 소비에트 대회> 연설, 1920)

  그러나 대조국전쟁 기간에(1941~1945) 소련 정부가 강조했던 애국심은 이와는 다소 상이한 것이었다. 전쟁의 시기 소비에트 정부의 애국심 고취 선전에는 공산주의가 빠지고 그 역할을 러시아와 조국이 수행하였다. 러시아의 이름으로 싸울 것을, 조국의 명예와 자유를 위한 성전을 치를 것을 촉구하는 성명들이 발표되었다. 1942년 6월 독일군이 소비에트 국경을 넘자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조국과 명예 그리고 자유를 위한 애국 전쟁”을 선포하였다(올랜도 파이지스, 『나타샤 댄스』 참조). 
  소비에트 애국심이 되었건 러시아 조국에 대한 사랑이 되었건 어쨌든 전쟁의 발발은 애국심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애국심이라 하면 거의 ‘크바스 애국심’과 동일시되고 조소의 대상이 되곤 하였던 러시아 사회의 분위기가 전쟁을 기점으로 조국과 애국심이란 단어에 피가 뜨거워지고 전율하는 분위기로 역전된 것이다.
  소비에트 시대에 활동한 셰프네르의 회상록 속 언급은 애국심 개념과 전쟁의 이러한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애국심’이란 단어가 꽤나 진지하게 발음되었다. 이전까지 이 단어는 전혀 인기가 없었으며 알맹이 없는 공허한 단어였다. 그런데 돌연 시민적 권리와 온전한 가치를 획득한 것이다. 그러자 엔지니어 로즈데스트벤스키는 “애국심에 대해 말할 때 조소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전쟁이 가까워졌다는 말이지.”라고 말했다.” (셰프네르, 『추억의 낙엽』, 2007, 사후출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스탈린 체제 하 탄압의 대상이었던 아흐마토바와 같은 작가들의 위상은 전쟁 초기 급속도로 달라졌다. 전선의 병사들로부터 수백 통의 편지를 받는 러시아 작가들의 위력과 상징성을 소비에트 정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에게 그야말로 큰 용기를 북돋아준 아흐마토바의 시 『용기』는 소비에트 공식 언론을 통해 발표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한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의 시계는 용기의 시간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용기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총알 세례 아래 죽는 것도 두렵지 않다.
은신처 없이 남는다 해도 슬프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그대, 러시아어를 지킬 것이다.
위대한 러시아어를!
우리는 그대를 자유롭고 순결한 이들에게 가져다주고,
후손들에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속박에서 구원하리라,
영원히.” (아흐마토바, 『용기』, 1942) 

  이 시기 러시아 작가, 음악가,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조국, 애국심이 중심 테마로 급부상하게 된다. 특히 음악 분야에서 애국심을 테마로 하는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원작으로 다비도프가 대본을 쓴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 <전쟁과 평화>(1943), 전쟁에 직접 참가해 전선에서 쓴 쇼스타코비치의 ‘전쟁 교향곡들’(<교향곡 제7번>, <교향곡 제8번>, <교향곡 제9번>)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음악의 애국적 힘이 음악가들의 창작 활동에서만 발휘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조국전쟁 시기 전쟁의 폭격 속 난방이 되지 않는 홀에서 열리던 음악회는 러시아인들에게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흘리도록 해 주었으며 러시아인들의 하나됨, 조국의 위대함, 애국심을 드높이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하였다.
  영화 분야의 활동도 이에 못지않았다. 소비에트 정부는 애국심을 고취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넵스키, 돈스코이, 쿠투조프와 같은 역사적 전쟁 영웅들을 찬미하는 전기 영화 제작을 적극 지원하였다. 특히 이러한 요구를 충족하는 에이젠슈테인의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은 스탈린도 크게 만족시켰다. 스탈린은 알렉산드르 넵스키라는 13세기 러시아 전쟁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가 전쟁의 시기 러시아 영웅의 지도력을 보여주고 애국심을 드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리라 확신하였다.

  애국심의 고취와 민족적 자긍심의 고무라는 측면에서 대조국전쟁의 가치는 전쟁의 시기로 국한되지 않았다. 전후 1960~1970년대 레닌그라드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 대조국전쟁을 기억하기 위한 전쟁 박물관, 기념관이 건설되었으며 소비에트 붕괴 이후에도 대조국전쟁의 신화화 작업은 계속되었다. 특히 소비에트 붕괴 이후 자존심의 추락과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한 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의 기억은 러시아인을 통합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에 효과적인 것이었다. 옐친의 국가 통합 이데올로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대조국전쟁의 신화화 작업은 푸틴 정부에서도 계속되었다.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가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푸틴 정부는 러시아 역사에서 러시아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기억할만한 사건으로 대조국전쟁에 주목하였으며 대조국전쟁의 승리를 주제로 한 애국적 전쟁영화의 제작을 적극 지원하였다(김성일,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러시아 전쟁영화의 특징> 참조). 이렇듯 애국심의 정치적 전략의 효용가치는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다.
  그러나 정부의 애국심 고취 전략의 본질과 잘못된 애국심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담론들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애국심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줄곧 피력해 온 톨스토이는 정부가 부채질하는 애국심 고취 전략의 이면에는 권력유지와 국민복종이라는 단순한 의도가 숨어 있음을 갈파한다. 

“애국심은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에서 정부에게는 권력지향적, 사리사욕적 목적을 위한 무기이며 피통치자에겐 인간의 존엄성, 이성,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을 권력자에게 노예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애국심이 설파되는 곳곳에서 인간은 그렇게 포교되고 만다. 애국심은 노예적 속성인 것이다.” (톨스토이, 『기독교와 애국심』, 1894)

  사무엘 존슨의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피난처다.”라는 말을 러시아에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했던 톨스토이(영미 작가들의 명언 모음집 『독서 범위』(1886~1910)에서 처음으로 언급)가 일갈했던 것은 점점 더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이 되어가는 애국심의 폐해와 위험성이다.
  톨스토이를 비롯해 러시아 사상가들의 애국심 담론에서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이 이처럼 잘못된 애국심에 대한 경고와 진정한 애국심에 대한 모색이다. 사상가들마다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소 상이할지라도, 겉치레적인 애국심,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식의 인식과 같은 ‘크바스 애국심’은 결코 진정한 애국심이 될 수 없으며 애국심의 진정한 가치는 인류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사랑의 통합 안에서 찾아진다는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세기 중반 벨린스키, 19세기 말 솔로비요프, 그리고 20세기 사상가 리하초프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의 통합적 가치에 대한 사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전체에서 부분이 나오듯, 조국에 대한 사랑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내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안에서 인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자 뜨겁게 열망하는 것이며 최선을 다해 이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애국심은 ‘자’라는 이유만으로 제 것은 모두 사랑하고 ‘타’라는 이유만으로 증오하는 마음이 되어버릴 것이다. 영국 작가 모리어의 소설 『하지바바(역주-이스파한에서 온 하지바바의 모험)』는 이러한 (뱌젬스키가 만든 훌륭한 표현인) ‘크바스 애국심’을 잘 보여준다. 가까운 것, 자신의 태생, 혈연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며 인간의 사랑은 이보다는 더 숭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벨린스키, <레르몬토프의 시>, 1840)

  민족주의를 ‘거짓 애국심’이라 부르는 솔로비요프도 진정한 애국심은 전 인류적 성격을 띠는 것이어야 함을 주창한다.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국제관계에도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민족을 내 민족처럼 사랑하라는 요구는 감정의 심리적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지적 관계의 윤리적 평등을 의미한다. 내 민족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다른 모든 민족들도 진정 잘 되기를 바라야 한다. 이 ‘호의적인 사랑’은 동등하다 할 만한데 진정한 선은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윤리적 사랑은 다른 모든 민족의 긍정적 특성을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과도 관련된다. 우리는 도덕적 의지에 의해 부조리하고 무지한 민족적 적대감을 극복함으로써 다른 민족의 특성을 알게 되고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되며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솔로비요프, 『선의 실증』, 1897)

  리하초프 또한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곧잘 동일시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고, 민족주의의 폐해, 그리고 민족주의와는 전혀 상이한 진정한 애국심의 가치를 말한다.

“민족주의는 인류의 불행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모든 종류의 악이 그러하듯 이것은 감춰져있고 어둠속에서 숨 쉬며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에 의해 태동되는 듯한 모습을 취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타 민족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민족주의적 견해를 함께하지 않는 자국민들에 대한 악의와 증오에 의해 태동되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에 대한 증오에 토대를 두고 애국심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에 토대를 둔다.” (리하초프, <러시아적인 것에 관하여>, 1981)

  이렇듯 러시아에서 애국심은 고결한 이상적 가치로 주창되기도 했지만 비하와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시대적 상황과 여러 사상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가치를 부여받아왔다. 특히 애국심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19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애국심에 대한 모색이 줄곧 이어져왔으며 애국심과 관련된 담론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시대를 막론하고 러시아의 애국심 토포스가 관통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 ‘파트리오티즘 patriotisme’은 ‘조상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 patria가 어원인 조국 ‘파트리 partrie’에서 파생되었고 이는 라틴어 pater(아버지)에서 나왔으며, 러시아어로 애국심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대에 프랑스어 patriotisme에서 차용된 ‘파트리오티즘 патриотизм’이다. 또한 러시아에서 조국 또는 나라를 뜻하는 어휘로는 ‘아버지’와 연상되는 ‘오테체스트보’와 ‘어머니’와 연상 작용을 하여 ‘어머니-조국’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로디나’가 있다.
  프랑스의 경우, 교황의 지배력이 막강했던 중세에도 프랑스의 왕은 교황권의 세속적 우월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황의 간섭에 자주 이의를 제기하며 갈리카니즘의 전통을 확립시켰다. 또한 백년전쟁 때는 프랑스라는 국가 의식이 확산되었고, ‘조국 프랑스를 위하여’, ‘프랑스의 국왕을 위하여’를 기치로 내세웠던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애국심이 강하게 형성된 바 있다. 프랑스에서 조국의 개념과 애국심이 어느 때보다 고무되었던 시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기이다. 이 개념은 혁명의 성취를 와해시키기 위해 동맹을 맺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고, 이 시기에 애국자는 곧 공화주의자를 의미했다. 애국심이 정의와 인권의 가치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배타적 연대의 개념으로 변질된 드레퓌스 사건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프랑스에서 과열된 애국심에 대한 경고와 비판을 늦추지 않게 하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과 향수가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는 시기는 크고 작은 지방 공국들이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민족국가의 틀이 마련되면서 애국심의 개념도 의미가 확대된 15세기이다. 러시아의 경우 조국을 뜻하는 단어들이 헌법을 포함하여 공적인 용어 체계로 공고히 편입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두 전쟁 “조국전쟁” (1812년 나폴레옹 전쟁)과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 중 소련-독일 전쟁)에 ‘조국’이 붙는 것도 이 단어가 러시아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깊은 정서적 반향과 관련이 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태어난 소비에트시기에 민족을 초월한 사회주의 조국의 개념이 형성되면서 애국심의 개념도 새롭게 정의되기도 했다. 민족주의, 국수주의와 동일시되는 애국심과 달리 소비에트의 애국심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타 민족들에 대한 존경심과 결합시켜 민족을 초월해야 한다는 논리가 대두되었다. 
  조국과 애국심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가장 문제시되었던 시기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에서 모두 국가들 간의 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인 19세기 후반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양국의 역사적 경험이 다른 데서 비롯된 차이점 또한 주목할 수 있는데, 프랑스의 경우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애국심은 공화주의 이념과 겹쳐졌고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배타적인 조국의 개념이 초래하는 비인간적 현상을 경험하며 진정한 애국심에 대한 모색이 일었다. 반면 러시아는 애국심을 뜻하는 어휘가 프랑스어 파트리오티즘을 그대로 차용한 데서 나타나듯이 18세기 이후에 애국심 개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국수주의를 초월한 사회주의 조국의 개념을 내세우며 러시아 특유의 애국심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린 이후 현대에까지 진정한 애국심에 대한 모색이 지속되고 있다.
연관 토포스 국가; 농민(민중); 민족; 신앙; 언어; 자-타; 전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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