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언어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언어
토포스명(프랑스) français
토포스명(러시아) русский язык
정의 1. 언어에 대한 자긍심이 높을수록 민족적 자부심도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를 가리키는 ‘프랑세 français[fʀ̃sε]’라는 어휘는 후기 라틴어 ‘프랑키아Fráncĭa’(‘프랑크족 Franci의 나라’)에서 유래한 이름 ‘France’에 어미 ‘–ais’가 붙은 형태이다. 이는 중세 라틴어 ‘프랑키스쿠스 franciscus’(‘프랑스와 관계되는’)와도 관계가 있다. 1100년경에 ‘franceis’라는 형용사와 명사가 사용되었으며, ‘français’는 18세기 말까지는 ‘françois’로 표기되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전기로 프랑스 사회가 갖은 사회 변화를 거치면서 프랑스어는 비로소 ‘프랑세’로 불리게 된다. 
  프랑스어는 로맨스어의 한 갈래로 인도•유럽 어족의 이탤릭 어파에 속한 언어로,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 등과 함께 라틴어에서 갈려 나온 언어이다. 유럽 및 세계의 주요 언어들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어는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 캐나다의 퀘벡 주, 북부 및 중서부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사용된다. 전 세계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약 2억 7천4백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2억 1천2백만 명은 프랑스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어 원어민은 7천 6,7백만 명이다. 특히 16~18세기의 프랑스 절대왕정 ‘앙시앵레짐(Ancien Régime)’ 시대에는 독일의 제후들을 포함하여 러시아 황제들에서 스페인과 영국의 왕들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언어로 사용할 정도로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세력의 부침을 겪었지만 프랑스어는 오늘날 여전히 국제적인 언어로서 확고한 위상을 누리고 있다. 국제관계 차원에서 국제연합의 여섯 개 공용어(公用語) 가운데 하나이며, 영어와 함께 직무(職務) 언어로 쓰이고 있다. 아울러 ‘유럽연합’ 등 다수의 국제기구의 공용어나 직무 언어로서, 또 ‘프랑스어권국제기구’의 언어로서 중요한 국제 외교 언어로 쓰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급격하게 팽창하는 영어의 세력에 맞서 위축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의 문화를 주도하는 문화 언어로서도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를 뜻하는 ‘루스키 야지크[russkii yazik]’에서 ‘루스키’는 ‘루시 Русь[rus']’로부터 파생한 어휘이다. 러시아의 고대 명칭 ‘루시’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루시의 바랑족 기원설을 주장하는 소위 노르만 이론에서는 스웨덴인 혹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핀란드어 Ruotsi와 루시의 관련성이 제기된다(비노그라도프, 『단어의 역사』). 가령 11세기말~12세기 초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6370(862)년. 슬라브족은 바랑족을 바다 너머로 쫓아낸 후 더 이상 공물을 바치지 않고 자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 그들 간 다툼이 일어났으며 ‘우리를 지배할 수 있고 법에 따라 우리를 재판할 수 있는 공후를 모시자’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다 건너 바랑족, 곧 루시인에게 갔다. 이 바랑족은 당시 루시인으로 불렸으며 다른 이들은 스웨덴인, 노르만족, 앵글족, 고트족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핀란드어 외에 에스토니아어 Rootś(‘스웨덴’), 아랍어 Rus(‘노르만족’) 등 여러 언어들에서 ‘스웨덴’, ‘노르만족’ 등을 뜻하는 어휘들과 루시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다. 정복된 지역에 정복한 부족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프랑스(프랑크족), 노르망디(노르만족) 등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언어’를 뜻하는 러시아어 ‘야지크’는 공통슬라브어 *jҿzykъ로 거슬러 올라가며 애초에는 ‘혀’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혀’를 지칭하던 단어가 ‘혀에서 나오는 것’ 곧 ‘언어’의 의미를 드러내게 되는 환유적 전이 현상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영어의 tongue, 프랑스어의 langue 등 여타의 언어들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고대 러시아어에서 ‘야지크’가 (주로 복수형으로) ‘민족’을 뜻하는 의미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 시기 이미 언어와 민족의 밀접한 상관성에 대한 인식, 곧 하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동일한 민족으로 보는 시각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정교 사회였던 러시아에서는 언어를 종교와 동일시하는 태도도 널리 관찰되는데 ‘야지크’에서 파생한 ‘야지츠니크(язычник)’가 ‘이교도’를 뜻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프랑스어의 역사는 기원전 2세기 중엽 로마 제국 세력이 오늘날 프랑스의 중남부에 해당하는 골Gaule 지방을 점령, 지배하면서 시작된다. 로마 제국이 로마의 행정 제도를 이식하여 골 지방을 지배하면서 골 사람들의 운명은 정치, 경제, 문화 및 언어 차원에서 결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들의 지배 정책은 이른바 ‘동화정책’으로, 언어 차원에서 볼 때 정복자들은 피정복 민족에게 자신들의 언어인 라틴어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라틴어를 사회적 지위 상승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어 이들이 라틴어를 배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골 지방의 귀족 계급은 매개어인 라틴어를 배우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임을 곧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골 지방은 라틴어와 켈트어가 함께 사용되는 ‘2개언어병용’ 시대를 맞게 되었고 이 상황은 몇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정치, 행정, 경제와 문화 차원에서 통일됨으로써 골 지방의 언어 상황은 ‘단일언어사용’으로 바뀌었지만, 이곳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시저나 키케로 시대의 라틴어가 아니었다, 이 지역에 들어온 많은 로마인들이 골 현지인들과 접촉함으로써, 또 3세기 말부터 이 지역에 몰려들기 시작한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들의 고전 라틴어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5세기에는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골 지방의 지배자는 게르만족으로 바뀌었다.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적 혼란과 함께 이미 2세기에 시작된 라틴어의 해체는 가속화되었다. 골 지방의 언어 상황은 극도로 복잡하게 되었으며 라틴어가 누리던 위상은 게르만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라틴어의 지위는 학문이나 문학 영역의 글말로 제한되었고 사람들은 이미 제2 언어로 내려앉은 라틴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로망어(roman)라 불리는 것이었는데, 지방에서 사용하는 라틴어(lingua romana rustica)를 뜻하는 ‘라틴 속어’로서 이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카탈루냐어 등의 뿌리를 이루는 것이다. 지역 간 접촉이 줄어들면서 언어 이질화는 가속화되었으며, 여러 로망어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골 지역 안에서도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에서 사용하는 로망어가 서로 달랐다. 정치적인 혼란은 언어적 이질성을 부추겼고, 라틴어 체계는 모든 면에서 변형을 겪어야 했다. 교회는 신도들과 소통하는 데 아직 라틴어를 고집하고 있었지만 신도들은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에 813년 투르 종교회의에서는 ‘신도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라틴 속어나 게르만어로 설교하도록 하였다.
  고대 프랑스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최초 문헌은 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 왕이 죽은 뒤 그의 세 아들은 영토를 두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샤를 르 쇼브와 루이 르 제르마니크는 다른 형제 클로테르에 맞서 842년 서로 동맹을 맺는다. 베르됭 조약으로 불리는 이 동맹 관계는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불리는 문서로 남아 있다. 이 문서는 서로 상대방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각각 로망어와 게르만어로 작성되었는데, 훗날 프랑스어가 될 일상 로망스어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문헌에서 게르만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듯이 서로 다른 언어들 간에 영향이 강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어휘 차원에서 볼 때 당시 로망어는 게르만어 어휘를 천여 개 차용하였다.
  10세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봉건 영주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언어 분열이 더욱 심해졌다. 이는 많은 방언들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크게 보아 북부의 랑그도일, 남부의 옥시탕(랑그독), 남동부의 프랑스-프로방스어로 나눌 수 있다.
  고대 프랑스어 시기는 11~14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11세기 들어 카페 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파리를 중심으로 국가를 안정시켜 나갔다. 왕국이 안정되면서 점차 언어의 통일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곧 프랑시엥(francien)이 왕국의 언어로 세력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이른바 ‘십자군운동’은 사람, 문화, 언어가 혼합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많은 아랍어 어휘가 프랑스어에 들어왔다. 한편 이 시기에 교회와 교황이 사회와 정치 차원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가 과거의 위상을 되찾음에 따라, 라틴어와 프랑스어는 한 사회에서 기능 분담을 하게 되었다. 라틴어는 다시 국제적 차원에서 매개어가 되었으며 공문서 등 모든 문서는 전적으로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반면 군주정치의 언어인 프랑스어도 상당한 위상을 확보하고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되었으며, 이 시기는 프랑스의 황금시대로 불린다.
  이어지는 중세 프랑스어 시기(14~16세기)의 전반부에는 프랑스 사회가 매우 혼란하였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에 따른 사회의 소용돌이는 프랑스어의 변화를 촉진했다. 정치적 혼란 상황이 고대 프랑스어 체계의 와해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영국 의회가 영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기욤이 영국을 정복(1066년)한 이후 영국 군주정치의 언어로 사용되던 프랑스어의 세력은 약화되어 그 위상이 외국어로 낮아졌다. 15세기 들어 루이 11세가 왕국을 다시 통합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한편 언어를 내세우면서 프랑스어의 위상은 다시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인쇄술은 왕궁의 언어가 방언들을 누르고 국가의 언어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는 데 필수 요소였다. 
  한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1539년 ‘빌레르-코트레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프랑스어의 발전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이 칙령은 모든 공문서에 ‘왕실의 방언’인 프랑스어만을 사용하도록 한 것으로 이에 따라 방언들과 라틴어는 추방되었으며 프랑스어는 국가의 언어로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192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칙령은 특히 프랑스 왕국의 공적 생활과 관련된 문서에서 프랑스어의 배타적인 우선권을 인정한 최초의 문서로 알려져 있다. 행정과 사법 문서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문서들은 프랑스어로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프랑스어는 라틴어를 대신하여 사법과 행정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법원에 의해 부분적으로 유효하게 인정되고 있다. 이는 13세기부터 시작된 언어의 중앙 집중 움직임을 가속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19세기까지 프랑스어는 본질적으로 궁정, 귀족과 성직자 등의 지배계급, 상인과 작가들의 언어였으며, 프랑스 일반 국민은 랑그도일, 옥시탕, 프랑코-프로방스어를 주로 사용하였고 소수가 ‘프랑스어’로 불리는 파리 지역의 지방어를 사용하였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는 안정을 찾지 못했는데, 당시의 기근, 종교전쟁, 농사 기술 부족 등으로 국민들의 빈곤 상태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불안정한데다, 철자법이 정해지지 않아 마로, 라블레, 롱사르, 몽테뉴 등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취향대로 ‘자유롭게’ 글을 썼는데, 특히 어휘 면에서 극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라블레 같은 작가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같은 작품들에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내보였다. 
  프랑스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블레( 1483/1494~1553)의 글쓰기를 들어야 한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작가인 라블레는 반교권주의 성직자이며, 기독교도이면서 자유사상가로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양면적인 성격은 그의 대표작인 『팡타그뤼엘』(1532)과 『가르강튀아』(1534)에 잘 드러나 있다. 『팡타그뤼엘』과 『가르강튀아』는 ‘거인 주인공들과 함께 전개되는 연대기, 이야기, 기사들의 장렬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패러디, 서사시이며 소설’이다. 동시에 ‘사실적이고 풍자적이며 철학적인 소설을 예고’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초기 형태’로 간주된다. 
  프랑수아 1세의 ‘칙령’이 규범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뒤에(1549년) 나오게 될 뒤 벨레를 비롯한 플레이아드의 움직임이 선언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라블레의 언어 사용은 실행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라블레는 풍부한 언어 창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는데, 이는 지역 언어들의 사용을 장려하는 르네상스의 언어 열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특히 고대, 중세 및 당대의 언어 표현들과 방언 및 속어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어휘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많은 표현들이 속담 형식으로 프랑스어에 나타나게 되었다. 가령 “corne d'abondance (풍요의 잔)”, “il ne faut pas clocher devant les boiteux (불구자 앞에서 그 흉내를 내면 안 된다)”, “l'appétit vient en mangeant (입맛은 먹을수록 생긴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라블레는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소르본 대학과 신학자들을 비롯한 기존 지배 계급의 위선을 고발하고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라블레는 ‘자기의 존엄과 자유에 눈뜬 르네상스인의 환희와 몽상, 구태의연한 정치, 사회, 사상의 왜곡에 대한 풍자와 비판’과 함께 당대를 웅변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이탈리아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미친 시기였다. 기술과 문화적으로 앞선 이탈리아의 문물은 르네상스라는 이름 아래 프랑스인들의 시각을 이탈리아 중심으로 바꾸어 놓았다. 언어도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여기에서 프랑스어의 위축 상황에 맞선 시인들의 움직임을 지적해야 한다.
  플레이아드 시파의 시인들은 프랑스어가 라틴어에 뒤지지 않는 문화 언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플레이아드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기에 롱사르 등 일곱 명의 시인으로 구성된 모임으로, 프랑스어를 옹호하고 그 위상을 드높이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프랑스어를 프랑스 사법 및 행정 언어로 규정한 프랑수아 1세의 빌레르-코트레 칙령 선포 10년 뒤인 1549년 플레이아드 시인 뒤 벨레는 <프랑스어의 옹호와 선양>을 발표한다. 이 선언문은 르네상스 시기 문학 이론 텍스트로 흔히 플레이아드 시인들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선언에서 뒤 벨레는 ‘상스럽고 저속한’ 프랑스어를 우아하고 품위 있는 언어로 만들고자 했다. 프랑스어의 옹호자로서 뒤 벨레는 프랑스어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같은 품격을 가진다고 주장했으며 프랑스어를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으로 고전 작가들을 모방하는 글쓰기를 권장한다. 하지만 너무 맹목적이고 원전의 풍요로움을 전해주지 못하는 번역은 비판하고 있다. 앞서 프랑수아 1세가 칙령에 의해 프랑스어를 정치적으로 지키려 했다면, 뒤 벨레는 프랑스인들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 
  사고와 언어의 관점에서 자유를 구가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어지는 17세기 고전주의 시대는 프랑스어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였다. 루이 14세와 그의 재상 리슐리외는 중앙집권과 절대군주제를 강화하였다. 리슐리외가 언어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프랑스어 가다듬기에 나선 것은 사실은 언어를 중요한 통치 도구로 간주해 온 전통적인 흐름에 합류하는 한 가지 보기였다. 리슐리외는 1635년 ‘아카데미프랑세즈’를 세우고 프랑스어 문법을 정비하고 사전을 펴내는 등 프랑스어 사용 규범을 마련하고 언어 사용 전반에 걸쳐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루이 14세의 왕권 강화와 함께 프랑스어의 위상도 높아졌으며 프랑스어는 다시 영국, 독일, 네덜란드, 북아메리카 등지로 전파되었다. 다음 구절은 고전주의 시대에 프랑스어가 이미 유럽 전역에서 사용되는 국제적 언어였음을 보여 준다. 

“유럽의 모든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들을 수 있고 또 프랑스어를 말한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전혀 드물지 않은 일이다.” (『퓌르티에르 사전』(1690) 서문, 리트레(Littré)에서 재인용.)

  하지만 왕실의 어법이 곧 이 언어의 규범이었으며, 이 언어는 귀족들의 언어였을 뿐 대다수 국민들의 언어는 아니었다. 부알로, 말레르브, 보줄라 같은 언어 이론가들은 ‘좋은 어법’의 이름으로 이성과 균제를 내세워 언어의 ‘가지치기’를 실행했다. 이로써 17세기의 프랑스어는 안정화되기는 했지만 어휘, 문법, 구문 면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 변동에 따라 언어 상황도 달라졌다. 자본주의가 출현하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사회적 가치관이 바뀌었으며, 왕실의 규범 대신에 새로이 부상하는 부르주아지의 생활 방식이 사회규범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어휘들이 새로이 나타났으며 영어의 영향도 점차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프랑스어는 유럽 전역에, 나아가 러시아 귀족계급에까지 전파되었다. 특기할 점은 프랑스어가 유럽 언어의 지위에 오른 것과는 달리 시골 지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프랑스어의 발전 과정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사회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으며,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쳐 발음, 문법 체계, 어휘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발음 변화의 경우 ‘왕’을 뜻하는 어휘 roi를 보기로 들면 부르주아지의 발음 [ʀwa]는 그때까지 사회에 통용되던 귀족계급의 발음 [ʀwɛ]를 밀어내고 표준 발음의 위상을 차하였다. 프랑스혁명은 ‘유일한 불가분의 공화국’을 지향했던 만큼, 이 공화국의 언어도 하나여야 했다. 언어 규범은 파리 중심의 엘리트보다 국가 전체에 걸쳐 적용되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의 언어 현실은 이상과 아주 달랐다. 혁명기의 언어정책을 주도한 그레구아르 신부는 1794년 혁명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30개의 사투리가 상존하고, 적어도 6백만의 프랑스인이 국어를 모르고, 같은 수의 사람들이 국어로 대화를 이어나갈 능력이 거의 없으며, 국어를 정확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의 수가 3백만을 넘지 못하고, 국어로 정확하게 글을 쓰는 사람의 수는 아마 더욱 적을 것이다.” (송기형(2004)에서 재인용.) 

  따라서 혁명정부는 ‘언어공포주의’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강제성을 띤 언어통제정책을 펼쳤다. 1794년에 공포된 법의 전문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제1조. 이 법이 공포된 날부터, 공화국 영토의 어디에서건 모든 공문서는 프랑스어만을 사용한다. 제2조. 이 법이 공포되고 1개월이 경과한 후에는, 사서(私署) 증서도 프랑스어로 작성해야 등기할 수 있다.” 이어지는 조항들에서는 위반에 대해 ‘6개월의 금고형과 파면’이라는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언어정책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성과를 올릴 수는 없었다. 자격을 갖춘 프랑스어 교사가 부족했고 특히 시골에 학교가 부족하여 표준화된 프랑스어 교육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이 혁명 프랑스를 경계했기 때문에 프랑스어의 외국 전파도 약화되었다.
  프랑스혁명에 이어 등장한 나폴레옹은 중앙 집중 전체정치를 바탕으로 국내 질서를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기할 점은 당시 언어의 쓰임을 감시하는 보수적 성향의 기구들이 여럿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미 고전주의 시대에 겪은 것처럼 프랑스어는 다시금 ‘절도(節度)’와 함께 ‘고정’ 상태를 강요받아야 했다.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보급하기 위한 조처들이 실행되었지만 여전히 자격을 갖춘 교사들이 부족하여 통일된 언어교육은 지지부진하였다. 한편 나폴레옹 군대의 잦은 원정으로 상이한 방언들을 사용하는 군인들이 뒤섞이게 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게 됨에 따라 차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나폴레옹 시대의 경직된 프랑스어는 이후 정치적 동요 발생, 산업혁명 시작, 낭만주의 이데올로기 대두 등의 요인들에 따라 ‘자유’를 되찾게 된다. 기술 개발, 갖가지 발명이 빠른 속도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영어가 유행하고 여러 영역에서 어휘가 확장되었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성향의 작가들은 기꺼이 대중의 언어와 은어에 가치를 부여하였다. 조르주 상드, 위고, 발자크, 졸라 등을 대표적인 경우로 들 수 있다. 예컨대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드 파리』와 『레미제라블』에서, 에밀 졸라는 『목로주점』에서 ‘은어’의 가치를 살려냄으로써 프랑스어의 사용 범위를 넓혀 놓았다. 이러한 성향은 무엇보다 노동 계층, 하층민 등의 민중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점은 ‘은어’를 뜻하는 프랑스어 어휘 ‘아르고(argot)’가 본디 ‘거지, 부랑자, 도둑들의 집단’을 뜻하는 것이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작가들은 현실에 가깝게 묘사하기 위해 은어를 사용하였다. 17세기에 극작가 라신이 ‘고상한 언어를 사용하는 귀족사회’를 노래한 것처럼, 19세기의 위고와 졸라는 ‘상스러운 진흙탕의 언어’를 도구로 각각의 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Rolland-Lozachmeur). 반면에 흥미로운 것은 국민들의 일반적인 언어 사용 성향과는 달리 국가는 철자법을 통제하였고 많은 문법서와 사전들을 펴냈다는 점이다. ‘보수 지향 세력’이 ‘자유화 지향 세력’과 강하게 충돌하였으며, 철자법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발음에는 보수주의가, 19세기 중반부터 매우 풍부해진 어휘에는 자유주의가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말에 이르면 프랑스어는 오늘날의 상태에 거의 가까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한편 근세에 들어서면서 프랑스는 세계에 프랑스어를 전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19세기부터 제도적으로 전개된 이 노력은 ‘알리앙스프랑세즈(Alliance française)’의 존재를 통해 잘 나타난다. 알리앙스프랑세즈 재단은 외국을 대상으로 프랑스의 언어와 문화를 장려하는 임무를 띤 공공 성격의 사설 재단이다.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프랑스 외무부와 협약을 맺어 외국 주재 프랑스 문화원들과 관계를 맺고, 프랑스 정부가 수립하고 외부무가 집행하는 프랑스 언어•문화 정책의 틀 안에서 활동한다.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1883년 파리에 처음 설립되었으며, 외국에 설치되어 있는 각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행정과 재정 차원에서 파리 알리앙스 프랑세즈와 독립된 기관들이다. 현재 130여 개 국가에 천여 개의 알리앙스 프랑세즈가 설립되어 있는데, 해마다 이 기관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50만 명에 달한다.
  한편 20세기 후반 들어 영어의 세력은 ‘영어제국주의’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강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 프랑스어는 1990년대 들어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우선 1992년에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은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다.”(제2조)라고 명시함으로써 비로소 프랑스어는 정식으로 프랑스 주권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의 사상과 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 ‘공식적’인 도구가 된 것이다. 또한 팽창하는 영어의 세력은 프랑스 안팎에서 프랑스어의 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의 언어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법을 만들게 된다. 프랑스 사회가 프랑스어에 대해 기울이는 특별한 관심은 1994년 ‘투봉법’으로 불리는 프랑스어 사용법이 공포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투봉법’은 당시 문화부 장관 자크 투봉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어 옹호 정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투봉법의 기본 목표는 ‘언어의 풍요화, 프랑스어 사용 의무화, 공화국의 언어로서 프랑스어의 수호’ 등이다. 투봉법은 영어식 표현(anglicisme)에 맞서 전통적인 프랑스어 용어를 우선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는데, 기본적으로 정부의 공식 간행물과 모든 광고, 상사(商事)계약, 일부 상업적 의사소통 상황’ 등에 적용된다. 특기할 점은 ‘감독과 처벌’ 규정을 명문화함으로써 법의 위반 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고자 한 것이다. 이 법의 입안과 집행 과정에서 여러 측면의 우려도 있었고 다언어주의를 지향하는 ‘유럽연합’의 반발을 야기하는 등 상당한 문제점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불가피한 변화도 있었지만, 이러한 법의 존재 자체가 프랑스 사회의 언어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인터넷 용어와 관련하여 영어 용어를 프랑스어 용어로 ‘순화’하는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무분별한 영어 사용에 제동을 걸고 있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오늘날 프랑스어가 누리고 있는 위상은 ‘프랑스어권국제기구’를 통해 잘 드러난다. ‘프랑스어권국제기구’는 1970년 발족한 ‘문화 및 기술 협력체’를 바탕으로 1997년에 발족하였다. 이 기구는 ‘프랑스어와 프랑스어권의 문화 및 언어 다양성 신장’ 등을 공동 목표로 삼고 있으며, 2014년 말 기준 80개 국가 및 정부(연방주 포함)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54개 정회원, 3개 준회원, 23개 참관회원). 과거에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모두 이 기구에 가입해 있는데, 알제리만이 신(新)식민주의의 위험성을 제기하며 가입하지 않고 있는 점도 이 기구의 성격과 관련하여 지적할 만하다. 한편 ‘프랑스어권국제기구’는 전 세계의 프랑스어 사용자를 약 2억7,400만 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국제적인 언어 조사 기관인 서머연구소(SIL)가 발행하는 『에스놀로그(Ethnologue)』(2015년 판)에 따르면 프랑스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51개 국 7,590만 명으로 프랑스어는 제1언어 사용자 수 기준으로 세계 14위에 올라 있다. 또한 프랑스어를 단일 공용어로 택한 나라는 13개, 다른 언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로 택한 나라는 16개에 이른다. 이 밖에 15개의 연방주나 자치령에서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 국가 등은 캐나다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다. 또 아프리카 13개 국가에서 프랑스어를 공교육의 교육 언어로 사용하고 있다.
  프랑스어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안팎에서 프랑스어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어는 그들의 ‘온전한’ 문화와 사상을 완벽하게 표현해 주는 최상의 수단이다. 다음 구절에서는 17세기 프랑스인들이 드러내는 자신들의 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로마제국과 라틴 교회의 수도인 로마에서는 라틴어가 사용되는 동안 다른 모든 언어들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할 때 두 사제가 서로 다른 설교단에서 한 사제는 라틴어로 다른 사제는 프랑스어로 발표하는 관습을 지켰다.” (『퓌르티에르 사전』 서문, 리트레 사전에서 재인용.) 

  리트레가 역시 18세기 뒤클로의 『문법서』에서 인용하는 다음 구절에서 프랑스어는 논리적 사고에 적합한 수단으로 제시된다.

“라틴어는 활발한 생략법과 다양한 도치 때문에 웅변술에 더 적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어는 구문 구성의 순서와 간결함으로 철학에 더욱 적합할 것이다.”

  1751년 디드로가 언어의 기능과 미학의 논점에 대해 언급한 『농아에 관한 편지』의 다음 구절도 프랑스어에 대한 우월감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민중에게는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이탈리아어로 말하시오. 그러나 현인(賢人)에게는 프랑스어로 말하시오.”

  볼테르는 1772년 아르장탈 백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부심과 함께 우려를 표현하고 있다.

“나는 단지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라신 이후 이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프랑스어의 ‘보편성’을 주장했던 리바롤의 시각을 들어야 한다. 리바롤은 1782년 <프랑스어의 보편성에 대한 담론>에서 다음의 간결한 표현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완벽함과 프랑스어의 우월함을 내비치고 있다(상세한 것은 ‘언어제국주의’ 항목 참조.)

“명확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다.”

  이밖에 프랑스어를 옹호하는 언급은 많다. 다음 경우는 현대 프랑스어에 이르는 과정에 담겨 있는 프랑스 사회의 언어관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보기이다. 프레데릭 미스트랄(1826~1888) 등 7명의 프랑스 작가들은 1854년 ‘펠리브리주(Félibrige)’라는 문학 단체를 결성하여 프로방스어 등 남프랑스 사투리와 관습의 보존 및 부흥 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미스트랄은 방언의 관점에서 “언어는 노예 상태에 빠진 민족이 자신들을 결박한 사슬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해 주는 열쇠다.”라고 말한다. 지배 언어인 프랑스어에 맞서 지역방언을 옹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20년쯤 뒤인 1873년 역시 남프랑스 출신인 작가 알퐁스 도데(1840~1897)가 미스트랄의 표현을 프랑스어 옹호의 관점에서 달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프랑스-프러시아전쟁을 배경으로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국민의 언어를 수단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 수업』에서 하멜 선생은 비장하게 말한다.

“한 민족이 노예 상태에 빠지더라도 자신의 언어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그는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움직임은 몽테스키외(1689~1755)가 한 세기 앞서 “한 민족이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그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한편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프랑스어를 살펴봄으로써 프랑스어의 이미지를 더 잘 그려 볼 수 있겠다. 프랑스어는 17,8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안팎에서) 특히 문화 측면에서 우월한 위상을 가지는 언어로 인식되고 있다. 프랑스어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등 세계의 모든 대륙에 걸쳐 찾아볼 수 있다. 이 증언들은 대부분 자유로움, 해방 등의 성격과 관련된다. 주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사이에 나타나는 견해들을 살펴보자. 
  유럽 지역의 경우를 보면 프랑스어는 우선 인간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언어로 인식되었다. 벨기에 출신 상징주의 시인 베르아랑(1856~1916)의 다음 진술은 프랑스어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보인다. 

“프랑스어가 누리는 가장 변함없는 영광은 프랑스어는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최상의 도구라는 것이다. 프랑스어는 세상의 감성과 지성을 완성하기 위해 세상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누군가의 것이기 이전에 모든 이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계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의 언급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자주 생각했다. 나는 대지의 정수를 바로 이 언어에서 느낀다.”

  또 많은 작가 및 철학자들에게 프랑스어는 ‘해방’의 도구였다. 불가리아 출신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 )에게도 그러하였다.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것은 나를 해방하는 일이었다. [...] 이 언어는 나의 유일한 영토가 되었다. 이제는 꿈도 프랑스어로만 꿀 것이다.”

  작가이며 문화이론가인 벨기에의 얀 배턴스(1957~ )에게 프랑스어는 역시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다. 

“나는 너무 편향적인 나의 특성들, 나를 제한하는 모든 것, 선입견, 너무 일찍 형성된 사고, 지니기에 너무 쉬운 확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또 루마니아 출신 철학가, 작가인 시오란(1911~1997)에게 프랑스어는 ‘치유력을 가진 언어’로서 자신의 ‘망상’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또 그는 프랑스어는 ‘정직한 언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로는 속임수를 쓸 수 없으며’ ‘지적인 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폴란드 출신 유대계 작가인 할테르(1936~ )의 관점도 같은 선상에 있다. 

“나는 오직 프랑스어로만 글을 쓰고 울고 웃거나 꿈을 꿀 수 있다. 프랑스어는 내가 어떠한 억압도 느끼지 못한 유일한 언어다.”

  또 다음 진술들은 언어의 표현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프랑코의 독재를 피해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첫 작품을 프랑스어로 쓰기도 했던 스페인 작가 호르헤 셈프룬(1923~2011)은 자신의 모국어와 프랑스어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그의 진술은 고전주의 이래 프랑스어가 확보한 ‘절제의 미덕’을 잘 보여 준다. 

“스페인어는 매우 아름답지만, 고삐가 풀리면 광적으로 변해 과장에 빠져드는 언어다. 시오란Cioran은 프랑스어를 절제된 언어라 말했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프랑스어는 내가 나의 스페인어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조각가 로댕의 비서였으며 로댕에 관한 책(『로댕 론(論)』)을 쓴 독일 시인 릴케는 자신이 프랑스어로 쓴 연작시 『과수원(Vergers)』을 두고 프랑스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피할 수 없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프랑스어로 글쓰기를 좋아한다. 내가 프랑스 시를 좋아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verger(베르제)’라는 이 감미로운 말에 전적으로 상응하는 어휘를 다른 언어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러시아 문화권과 프랑스 언어 및 문화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벨로루시의 루비치 밀로즈(1877~1939)는 “깨끗한 나라, 순수이성의 조국, 프랑스에 영광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자기 앞의 생』의 작가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 인물임은 이제 잘 알려져 있는데, 제정 러시아, 오늘날의 리투아니아 빌니우스 출신으로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중심 작가로 활동한 그는 자신의 문학적 뿌리가 문화의 혼효 안에 있음을 말한다. 
  이렇듯이 러시아 문화권은 프랑스 언어 및 문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점은 이미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통해 잘 보여 주었던 것이다. 작품 초반에 나폴레옹의 침공을 우려하면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는 러시아 사교계의 모습은 러시아 궁정을 비롯한 상류사회에 프랑스 언어 및 문화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러시아의 ‘국민문학’으로서 『전쟁과 평화』가 진정으로 보여 주었던 것은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외국 세력에 맞서 가지게 되는 러시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마킨(1957~)의 견해를 들어 보자. 1987년 프랑스에 정치 망명하여 파리에서 활동해 왔으며 1995년 공쿠르상과 메디치상을 수상했던 마킨은 2009년 1월 ‘르피가로’와 가진 대담에서 글쓰기 도구로서 언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당신에게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것은 필연적인 것인가 선택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프랑스와 러시아의 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한다.

“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는 아주 강한 문학적 유대가 있다. 프랑스어가 유럽 외교관들과 지식인들의 언어였던 광명의 세기(역주-프랑스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톨스토이가 생각을 다시 바꾸기 전에 『전쟁과 평화』의 첫 페이지들을 바로 프랑스어로 썼으며 저 위대한 도스토옙스키가 발자크의 『으제니 그랑데』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던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그의 문학적 사명을 결정해 준 것이다. 그런데 라스콜니코프, 그는 얼마간은 라스티냐크(역주-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 아니던가? [...]”

  그는 이어 투르게네프가 1870~1871년 프랑스-프러시아전쟁 무렵부터 파리에 거주하였고, 또 1933년 러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반 부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 후 프랑스에 망명하여 줄곧 파리에서 생활하면서도, 그들이 프랑스어 대신 모국어인 러시아어로 글쓰기를 계속하였다는 점 또한 다른 관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어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아프리카, 카리브 해의 앤틸레스 제도, 인도양 국가들에 이르면 절정에 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국가들이 과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한편으로는 당연해 보이지만 이 경우는 앞의 경우와 성격이 다른 것이다. 
  아프리카 작가, 시인들 가운데 돋보이는 인물은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1906~2001)일 것이다. 독립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을 지내기도 한 그는 ‘네그리튀드’(négritude) 운동을 통해 ‘흑인성 회복’을 지향하는 하는 한편으로 문화의 혼효에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편향적’으로까지 보일 정도로 친(親)프랑스어 성향을 보여 주었다.

“프랑스어는 가장 감미로운 부드러움에서 뇌우의 번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색과 모든 효과를 표현하는 데 알맞은 파이프 오르간이다. 그것은 차례차례 또 동시에 플루트, 오보에, 트럼펫, 탐탐, 그리고 대포에 이르기까지 변신한다. 그리고 프랑스어는 우리 모국어에는 정말 드문, 눈물이 보석으로 변하는 추상적인 어휘를 제공해 준다. 우리에게 프랑스어 어휘는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한 빛으로 반짝인다. 우리의 밤을 밝히는 불꽃들.”

  한편 과거에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의 경우 어김없이 글쓰기 도구 언어의 문제가 제기되어 프랑스어는 정체성의 문제와 함께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이에 대해 콩고의 작가인 쏘니 라부 탄지(1947~1995)는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사람들은 내가 문화 동화의 언어인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들이 나를 프랑스어로 비난하고 있고, 또 나는 그런 식으로 그들의 비난을 더 잘 이해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내가 아름다운 말레르브의 여죄수[프랑스어]와 결혼하기 위해 콩고어를 내던져 버린다는 뜻은 분명 아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본질적으로 혼효로 이루어진다. 다른 식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콩고 사람이며 콩고어를 말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쓴다. 나의 콩고인 속성은 바로 이 준엄한 현실을 벗어나서는 표현될 수 없다.”

  마다가스카르의 시인 라베마난자라(1913~2005)의 프랑스어 사랑도 지극하다.

“프랑스어는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는 프랑스어에 아주 매혹되어 바로 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제국주의적이며 지배하는 모든 암시적 의미에서 벗어나 프랑스어는 이상적 도구, 곧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쉽게 소통하고 우리 자신의 메시지를 세계 도처에 전할 수 있게 해 주는 전달 수단으로 삼기 위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와 아폴리네르 유형의 시 쓰기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리셔스의 시인 레이몽 샬(1930~1996)에게 프랑스어는 다시 한 번 치유의 수단이다.

“프랑스어는 내가 내적 긴장을 풀고 내 갈등상태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주었다. 온갖 묘미와 울림을 지닌 언어인 프랑스어는 내게는 기억, 의식과 투쟁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프랑스어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마그레브 지역 작가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특히 식민 피지배와 및 독립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프랑스어(문화)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알제리 출신 시인, 작가들이 보여 주는 태도는 흥미롭다. 시인 장 앙루슈(1906~1962)는 ‘알제리 공동체와 프랑스 공동체 사이의 가교’ 구실을 자처하면서 ‘프랑스어의 엄격함이 영혼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한다’고 말하고 있고, 시인 무함마드 디브(1920~ )에게 ‘프랑스어는 지역 현실을 통하여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관심사들에 합류하고자 하는 생각을 전달하는 이상적 매개체’이다. 아시아스 제바르(1936~ )는 ‘개념적인 프랑스어와 화려한 아랍어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아랍어로 글을 쓸 수 없는 것을 고통스러워 한 시인 말레크 하다드(1927~1978)는 “나는 프랑스어에 유배 중이다. 그러나 이 유배는 쓸모없는 것일 수는 없다. 나는 [프랑스가] 정말 사랑하는 나의 조국에 봉사하도록 [...] 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프랑스어는 과거의 피지배 민족에게 더 이상 식민 지배 언어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수용 경로가 된다. 알제리의 베르베르어를 모국어로 가진 작가 물루드 맘메리(1917~1989)의 다음 진술은 상징적이다.

“프랑스어가 내 모국어는 아니다. [...] 그런데 내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오직 이 언어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알제리 민족주의자이면서 프랑스 작가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나는 독립과 함께 프랑스어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어는 더 이상 강제 수단, 지배 표시가 아닐 것이다. 프랑스어는 현대 문화의 경로가 될 것이다. 나는 결코 다른 언어로는 글을 쓸 생각이 없다. [...]
내게 프랑스어는 해방과, 또 외부 세계와 일체가 되기 위한 비길 데 없는 도구이다. 나는 프랑스어가 우리를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988년 정교의 수용, 13세기 중반부터 200년 넘게 지속된 몽골-타타르의 지배,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과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붕괴 등은 러시아 문화에 큰 흔적을 남긴 역사적 사건들이다. 이중 언어 분야와 관련하여 더욱 주목되는 것으로 정교의 수용과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을 들 수 있다. 이들 사건은 러시아어 자체의 변화와 발전을 주도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러시아인들의 모국어에 대한 인식과 개념화에도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고대 러시아 사회는 10세기 말 비잔틴으로부터 정교를 수용한 이후 비잔틴의 정치 문화적 영향 아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언어 영역에서의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는데 기독교 전파와 함께 문자가 들어오고 이 문자로 그리스어를 원본으로 하는 성서, 전례서, 설교문 등 종교서적의 번역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러시아 문어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 언어문화,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화와 깊은 관련을 보존한 비잔틴 언어문화가 유입되면서 러시아 문어가 풍요로워지고 고대 러시아 문학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를 푸시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문학 자료로서 슬라브-러시아어는 다른 유럽어들에 비해 큰 장점을 지닌다. 바로 상당히 운이 좋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1세기 고대 그리스어가 갑자기 그것의 어휘들과 하모니의 보고를 열어주고, 잘 고안된 문법 규칙, 멋진 표현들, 훌륭한 문장을 공개해주었다. 한마디로, 그리스어가 우리 언어를 양자로 삼음으로써 시간에 따른 느린 발전을 피하도록 해준 것이다. 이미 그 자체로 낭랑하고 표현적인 이 언어는 그리스어로부터 유연함과 규칙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민중의 말은 문어와 불가피하게 분리되어야 했지만 이후에 이들은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푸시킨, <크릴로프 우화 번역서에 부친 르몽테씨의 서문에 관하여>, 1825)

  키릴 문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키릴과 메포지 형제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남슬라브어를 바탕으로 번역 작업을 하였으며 따라서 최초의 번역들은 자연스럽게 남슬라브어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 남슬라브어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최초의 문어를 고대 교회슬라브어라 부르는데 이 문어는 당시 고대 러시아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구어와는 어휘, 형태, 음운적으로 상당부분 차이가 났다. 그러나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어는 모두 공통슬라브어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인 바 이해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렇게 교회슬라브어가 문어로서 위상을 정립하면서 고대 러시아 사회는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어가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 기능적으로 상보적 분포관계를 이루는 양층언어(diglossia) 사회가 된다. 즉 밀접하게 관련된 두 언어가 서로 사용되는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교회슬라브어는 종교적이고 숭고한 일에 사용되는 보다 높은 지위를 지니는 언어로, 러시아어는 일상생활을 위한 언어로 자리매김 되었다.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어라는 이중 체계는 사회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현상이기도 한데 러시아어는 속세, 물질세계, 인간과의 소통을 위한 언어라면, 교회슬라브어는 영적 세계, 신과의 소통을 위한 언어라는 인식이 공고해져갔기 때문이다.

“루시에서 교회슬라브어는 단순히 정보전달 시스템 중 하나로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교의 상징적 표상 시스템으로, 즉 정교의 이콘으로 이해되었다.” (우스펜스키, 『역사의 기호학, 문화의 기호학』, 1994)

  이러한 인식은 언어에 대한 태도를 마치 종교에 대한 것처럼 규정하도록 만들었다. 언어의 규범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신앙의 방증이었고 그 실수는 죄로 간주되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7세기 니콘의 종교개혁과 교회분열 사건이 상당 부분 언어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음이 흥미롭다. 11~17세기, 교회슬라브어가 상징적 의미를 견고히 유지하던 시기엔 교리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이를 표현하는 언어 형태도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구두 혹은 문자 발화의 실수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서구 카톨릭 사회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던 현상이다. 그곳에서는 의도치 않은 실수를 내용의 훼손이나 죄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반면 러시아 정교에서는 언어에 대한 실수를 죄와 연결시키고 이단으로 간주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언어에 대한 논쟁을 마치 종교를 위한 투쟁처럼 하였던 것이다. 1653년 니콘의 개혁에 대한 구교도들의 저항이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니콘이 그리스 원본을 토대로 교회 서적의 수정을 단행하였을 때 이는 상당 부분 형식적인, 곧 언어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었다. 즉 내용과는 상관없이 정자법이나 강세, 통사구문의 변경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구교도들의 강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교리해설서에서 접속사 а를 없앤 조치에 대해 표도르 사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 모든 정교인들은 단 하나의 철자 а를 위해 죽어야 한다. 저주받을 적(니콘 주교)이 이것을 교리해설서에서 빼 버린 것이다.” (우스펜스키, 『역사의 기호학, 문화의 기호학』에서 재인용)

  성인으로 추앙받는 키릴과 메포지의 언어 교회슬라브어는 바른 신앙 곧 정교의 상징이며 여기에 가하는 그 어떤 수정도 이단의 증표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신앙이 다른 것을 의미하며, 언어의 다양성은 종교적 혼돈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가령 아바쿰 사제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에게 쓴 글에서도 그러한 생각이 드러난다. 

“많은 언어를 아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 신은 그리스인 못지않게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성자 키릴과 그의 형을 통해 우리 언어에 문자도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나은 것을 어찌 바라겠습니까?”(아바쿰, 『해설서와 교훈서』, 1670년대 중반~1677년 추정)

  이렇게 언어를 종교와 동일시하던 인식은 라틴어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라틴어는 그 본질상 기독교의 내용을 훼손하는 이단의 언어이자 악마의 언어로 간주되었다. 언어의 다양성은 신앙의 다양성으로 귀착될 수 있는 바 표트르 대제가 1701년 라틴어 교수에 대한 특별 지침을 공포하기 전까지 고대 러시아에선 황태자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악마의 언어 라틴어를 가르치도록 종용하고 자신의 서명을 라틴어로 하는 표트르 대제를 구교도들이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간주하였음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라틴어에 대해 표트르 대제가 견지한 태도는 그 이전 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언어에 대한 이러한 태도 변화는 이후 러시아어의 운명에 있어 결정적 방향 전환의 단초를 마련했다. 러시아 사회와 문화를 서구적 모델에 따라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은 러시아어의 변화와 그 가치적 표상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표트르 대제는 본인이 직접 지휘한 문자 개혁을 통해 복잡한 교회슬라브어 문자를 좀 더 간소화하고 라틴 문자와 유사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언어 모델이 러시아 사회에 정착하도록 유도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언어 개혁을 사회의 전방위적 개혁을 위한 초석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의 문물들과 함께 차용어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차용어가 귀족의 말을 품위 있게 만들어준다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이는 서유럽어, 특히 프랑스어가, 러시아 귀족이 유럽의 상류 사회에 속함을 보여주는 기호로 작용한 데에서 비롯된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이러한 분위기는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한정되지 않고 시골 귀족에 이르기까지 전 귀족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가령 18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타티야나의 어머니가 아가씨였던 시절의 묘사는 18세기 말 시골 귀족 사회에서 프랑스 이름의 유행, 프랑스적 모드의 유행, 그리고 프랑스식 발음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 프라스코비야를 폴리나라고 부르고 
노래부르듯 말을 하고, 
꼭 끼는 코르셋을 입고
러시아어의 N을 프랑스식으로
콧소리 섞어 발음하곤 하였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프랑스 문화와 프랑스어의 위력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어 19세기 즈음에는 차용어의 한정적 사용에 머무르지 않고 프랑스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심지어 모국어보다 더 용이한 소통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갔다. 러시아에 온 프랑스인이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는 차츠키의 말이나, 러시아어를 잘 몰라 프랑스어로 편지를 쓰는 타티야나의 모습은 당시 귀족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보르도에서 온 프랑스인이 [...] 어떻게 러시아로, 야만인들에게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시작했소. [...] 그는 마치 자기 나라, 자기 고향에 있는 것처럼 러시아어를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고 러시아적인 얼굴을 전혀 만나지 못했다는 거요. [...] 그는 기쁘다지만 우리는 기쁠 수가 없소. [...] 아, 프랑스여! 세상에 너보다 훌륭한 곳은 없으리!”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1825)

“타티야나는 러시아어를 잘 몰랐다. / 우리 잡지는 읽지도 않았고 
모국어로 생각을 표현하는 게 / 서툴기 그지없어
프랑스어로 썼다. / 어찌하랴 
지금껏 숙녀의 사랑이 / 러시아어로 표현된 적은 없다.
지금껏 우리의 자랑스러운 언어는 /
서한용 산문에 길들어지지 못한 것이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18세기 말~19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 속에는 프랑스어 단어라면 즉각적으로 이해 가능하지만 이를 러시아어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음을 토로하는 장면이나, 아예 프랑스어 문장 혹은 단락이 직접 삽입되는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여왕이 된 타티야나를 ‘코밀포’라는 단어로 묘사하고 있는 푸시킨은 이를 대체할만한 적절한 러시아어 단어가 없음을 토로한다.

“그녀는 소위 코밀포(comme il faut)의 
충실한 복사판처럼 보였다......(용서하시오, 시시코프 선생,
어떻게 번역해야할지 모르겠소)”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당시 귀족 사회의 언어 습관은 『전쟁과 평화』에서도 생생히 묘사된다. 프랑스어 단어나 문장의 빈도 높은 사용, 심지어 러시아어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하는 습관이 널리 퍼져있음을 아래의 짧은 인용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실리 공작에게 아들을 부탁하는 드루베츠카야 공작부인의 말 속에 계속하여 프랑스어 표현이 나타나고 있으며, 바실리 공작의 딸 엘렌은 ‘아빠’를 뜻하는 파파를 앞쪽에 강세가 떨어지는 러시아어 발음이 아니라 프랑스식으로 뒤에 강세를 넣어 발음하고 있다.

“‘예전처럼 부디 호의를 베풀어 주세요(프랑스어).’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으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빠(papá), 우리 늦겠어요.’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공작녀 엘렌이 고전미가 묻어나는 어깨에 아름다운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
공작이 나가려고 하자 그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잠시만요, 한마디만 더요. 그를 근위대로 보내게 되면(프랑스어)...’”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3~1869)

  프랑스어, 프랑스문화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하였는지는 러시아어 속 프랑스어 차용어의 규모에서뿐만 아니라 이를 통칭하는 ‘갈리치즘(галлицизм)’이란 단어와,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지칭하는 ‘갈로마니야(галломания)’, ‘페티메트르(петиметр)’와 같은 단어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갈리치즘’은 프랑스어로부터 차용된 단어나 표현, 혹은 프랑스어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 구문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로마니야’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귀족들 사이에 열병처럼 퍼졌던 프랑스 심취 현상,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페티메트르’는 18세기 러시아문학에 종종 등장하는 프랑스 멋쟁이들과 댄디들, 프랑스식 유행과 행동방식을 모방하는 러시아 젊은 귀족들을 풍자적으로 지칭하는 단어였다.
  갈리치즘은 원래 프랑스어로부터 차용된 언어 요소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어적 요소들까지 모두 아우르는 용어로 그 의미가 확대된다. 이는 러시아 사회가 차츰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유럽어와 유럽 문화의 대표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들의 도입과 러시아어에의 적용, 그 도입되는 표현들을 갈리치즘이라 불렀는데 갈리치즘을 유럽어법으로 이해한다면, 즉 프랑스어를 유럽 교양의 대표어로 이해한다면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뱌젬스키, <드미트리예프의 삶과 시에 관한 단상>, 1823)

  원래는 프랑스적 어법을 가리키던 갈리치즘은 올바르지 못한 외래어, 러시아어의 순수성을 손상시키고 그 본질을 훼손하는 요소라는 뉘앙스를 띠게 되면서 점차 논쟁적 성격의 단어로 자리매김된다. 이로부터 이후의 러시아어 순화 운동이 갈리치즘과의 투쟁처럼 전개된 이유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유럽어, 특히 프랑스어의 강력한 영향은 사회계층에 따른 언어 변이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 이전까지 러시아 사회는 언어에 있어 사회적 계층 분화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으며 17세기까지 러시아 귀족의 대화어는 다른 계층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귀족의 말에 유럽 차용어들이 널리 사용되고 자유로운 프랑스어 구사가 귀족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 되면서 귀족 사회는 프랑스어를, 일반 민중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bilingualism) 사회가 된 것이다. 이때의 ‘이중언어’ 현상은 러시아인의 인식 속에서 프랑스어가 외국어로 간주되었으며 두 언어가 명확히 구분되면서도 사용되는 영역은 일치한다는 점에서(둘 다 일상어로 사용) 교회슬라브어-러시아어 양층언어 현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차용어들이 대거 유입되고 프랑스어가 귀족의 일상 언어가 되는 등 유럽어, 특히 프랑스어의 영향은 당대 러시아인들의 언어생활에 직접적으로 드러났지만, 러시아어의 향후 역사에 더욱 커다란 흔적을 남긴 것은 다른 방식의 것이었다. 18세기동안 지속되었던 서유럽어의 영향은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어의 현 상황과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대한 문제의식을 첨예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서서히 불붙기 시작해 19세기 초 러시아 사회에 휘몰아친 언어 논쟁은 단순히 언어학적 측면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과 문학,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논쟁은 흔히 시시코프파와 카람진파의 논쟁으로 알려져 있는데, 두 진영이 주장하는 바는 전혀 달랐어도 러시아어의 현 상태에 대한 문제의식과 러시아 문학어 정립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유럽어, 특히 프랑스어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적극 수용한 쪽은 카람진 진영이다. 카람진은 서유럽 문학에 비해 러시아 문학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에 통렬한 문제의식을 느꼈으며 그 원인을 러시아 문학어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프랑스 작가들은 일상적 구어를 그대로 작품의 언어로 사용하나 러시아어는 구어와 문어가 현격히 구분되어 있는바 이것이 작가들이 좋은 글을 쓰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처럼 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언어의 구축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말하는 대로 쓰고 쓰는 대로 말하기’의 원칙은 바로 프랑스인들의 언어 환경에 직접 의거하여 프랑스 문학을 모범으로 한 것이다.

“우리 러시아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프랑스인은 몽테뉴, 파스칼, 루이 14세 시대에 활약한 대여섯 명의 작가들과 볼테르, 루소, 토마스, 마르몽텔만 읽어도 자신의 언어를 그 모든 형태에 있어 완벽하게 체험할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서적과 일반 서적을 아무리 많이 읽은들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많은 분량의 자료들 혹은 풍성한 어휘 목록뿐이다.” (카람진, <왜 러시아에는 재능 있는 작가가 적은가>, 1802) 

  지금의 러시아어는 너무 ‘거친’ 언어이며 이 언어로써 ‘부드러운 취향(нежный вкус, 프랑스어 goût délicat의 어의차용 형태)’을 표현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러한 취향을 표현할 수 있는 ‘부드러운’ 러시아어를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며 이 과제는 최고의 모범 답안을 제시해 주고 있는 프랑스어를 본보기 삼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류사회 여인들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듣거나 읽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고상한 취향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그들에게 던진다면 누구나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너무 거칠고 참기 힘들어요!’라고 대답한다. 한마디로 말해 프랑스어는 (그림에서처럼 갖가지 색상과 음영을 모두 지닌 채) 온전히 책 안에 다 들어있으나 러시아어는 일부만이 그러할 뿐이다. 프랑스인들은 말하는 대로 쓰지만 러시아인들은 능숙한 작가가 글을 쓰는 대로, 아직 여러 대상에 대해 충분히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카람진, <왜 러시아에는 재능 있는 작가가 적은가>, 1802) 

  카람진적 지향, 곧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모델로 한 ‘말하는 대로 쓰기’의 원칙은 구어가 러시아 문학어 안으로 유입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교회슬라브어가 문어로서의 권위를 공고히 유지하던 시기에 문학어는 곧 문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이제 문학어는 문어뿐만 아니라 구어까지 포괄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카람진파가 주창하는 새로운 러시아어, ‘말하는 대로 쓰기’의 원칙을 표방하는 러시아어가 지향하는 것은 러시아 사회의 일상적 구어가 아니라 귀족 엘리트들의 구어였다. 러시아 민중의 말, 속어 등의 문학어 유입은 철저히 제지당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카람진의 언어 개혁은 충분히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프랑스어를 모델로 하여 러시아어 개혁을 꾀하였던 카람진의 시도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카람진의 <왜 러시아에는 재능 있는 작가가 적은가>(1802)에 대한 논쟁적 대응이기도 한 <러시아어의 구문체와 신문체에 대한 고찰>(1803)에서 시시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태초의 언어,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언어, 풍요로운 언어를 버리고, 우리에게 맞지도 않는 남의 언어 프랑스어의 빈약한 규칙을 토대로 새로운 언어를 정립한다니, 대체 어디서 이런 해괴망측한 생각이 나왔단 말인가?” (시시코프, <러시아어의 구문체와 신문체에 대한 고찰>, 1803). 

  시시코프 역시 카람진 쪽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어의 현 상태가 불완전하다고 보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원인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금의 미천한 상태는 교회슬라브어가 쇠퇴한 결과이며 따라서 교회슬라브어를 부활하는 것만이 러시아어를 완전한 상태로 끌어올리는 길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서유럽어의 영향이, 이를 결사반대하고 이와의 투쟁을 선포하였던 시시코프파를 통해서도 러시아어의 역사에 또 다른 방식의 흔적을 남겼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대립으로 읽혔던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어의 구분이 서유럽어의 강력한 영향 하에서 점차 하나의 민족어로 수렴되어져 간 것이다. 다시 말해 애초에 남의 것이었던 교회슬라브어를 민족적 전통으로 수용함으로써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어가 ‘타’와 구분되는 ‘자’로 묶이게 된 것이다. 교회슬라브어에 대한 지향을 명시적으로 표방하였던 시시코프파의 모임 명칭이 ‘러시아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좌담회’라는 것도 이러한 인식을 드러내 준다. 또한 아래의 예도 교회의 예배 언어와, 성직자를 흉보는 데 사용하는 언어 곧 민중의 구어를 동일한 러시아어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로트만&우스펜스키, <러시아의 문화적 사실로서 19세기 초 언어 논쟁> 참조).

“우리는 독일어로 논의하고, 프랑스어로 농담하며 러시아어로는 신께 기도하거나 우리 성직자들을 욕할 뿐이다.” (카이사로프, <역사와 러시아의 고대문화 협회에서의 강연> 중, 1858, 로트만&우스펜스키 <러시아의 문화적 사실로서 19세기 초 언어 논쟁>에서 재인용)

  이렇게 교회슬라브어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온 민족어로 간주되고 민족문화의 전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외국어 영향과의 투쟁, 국어 순화 운동은 교회슬라브어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어의 개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좀 더 이후에 ‘슬라브주의자’의 의미 변화에도 반영된다. 이 단어의 최초의 의미는 언어학적 지침, 곧 교회슬라브어적 지향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점차 이데올로기적 개념을 함의하게 된다. ‘슬라브주의자’라는 단어는 시시코프의 <러시아어의 구문체와 신문체에 대한 고찰>이 발표된 이후 시시코프쪽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해 그 반대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카람진 진영과 시시코프 진영의 언어 논쟁은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논쟁을 예고해 주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서유럽어, 일차적으로 프랑스어의 영향은 이를 지지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모두를 통해 러시아어와 모국어 대한 인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카람진 진영처럼 그러한 영향에 우호적이며 이를 적극 수용했던 쪽을 통해서는 구어가 문학어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촉진하였으며, 반대로 서유럽어의 영향에 맞서 러시아어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던 진영을 통해서는 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를 하나의 민족어로 간주하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를 거치면서 러시아어 역사에서 핵심적 대립은 ‘교회슬라브어-러시아어’에서 ‘러시아어(교회슬라브어와 러시아 민중어)-유럽어(프랑스어)’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대립의 성질은 바뀌었을지라도 대립의 존재 자체와 그 대립에서 러시아어가 상위 개념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즉 11~17세기 교회슬라브어-러시아어 양층언어 사회에서 교회슬라브어가 상위 개념으로서 언어의 상징적 가치를 독점하였다면 18세기를 거치며 19세기 초까지 교회슬라브어의 권위와 상징성을 물려받은 것은 러시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그러나 서구의 강력한 영향을 경험한 이후 러시아 사회에 서서히 반 서구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특히 1812년 전쟁을 전후로 하여 사회에 애국적 물결이 고조되면서 조국의 언어, 민족의 언어로서 ‘러시아어’의 상징적 가치가 점차 강화되어 갔다. 차용어의 지나친 사용이나 바르지 못한 러시아어 사용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이를 애국심의 부족 혹은 부재와 연결시키는 시각도 팽배해져 갔다. 이전시기에 비해 19세기 러시아 사상가와 작가들의 글에서 러시아어는 러시아의 강대함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함, 그 문화적 저력을 드러내주는 것으로서 더욱 빈번히 그리고 더욱 직접적으로 그 가치가 언급되고 있다.

“러시아어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언어 중 하나이며 이러한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벨린스키, <‘러시아어에 대한 변호’로부터의 변호>, 1846)

“상응하는 러시아 단어가 있는 데도 외국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상식과 건전한 취향을 모욕하는 것이다.” (벨린스키, <1847년 러시아 문학에 대한 견해>, 1847) 

“우리의 이 평범하지 않은 언어는 여전히 신비롭다. 그 안에 각양각색의 톤과 뉘앙스가 담겨있으며 가장 딱딱한 소리에서부터 가장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리들이 넘나든다. 한계를 모르며 삶처럼 생동하는 이것은 한편으론 교회어에서 높은 단어들을 취하고 다른 한편으론 우리의 시골들에 퍼져있는 셀 수 없이 많은 표현들에서 적절한 명칭들을 골라냄으로써 하나의 발화 안에서 다른 언어는 이를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극히 우둔한 사람도 느낄 만큼의 단순함으로까지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고골, <러시아 시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1846)

“의심의 나날에, 조국의 운명에 대해 고통스러운 생각의 나래가 펼쳐지던 나날에 너 홀로 내게 의지하고 기댈 것이 되어주었구나. 오, 위대하고 강인하며 진실하고 자유로운 러시아어여! 네가 아니었다면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어찌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언어를 보유한 민족이 어찌 위대한 민족이 아닐 수 있겠는가!” (투르게네프, 『러시아어』, 1882)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는 기원전 시대에 골 지방의 방언에서 출발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사회와 프랑스인이 거쳐 온 우여곡절의 산물이다. 골 지방의 고유 언어와 로마 지배자들의 라틴어가 섞이면서 생겨난 새로운 틀의 언어를 바탕으로 다른 여러 방언들과 세력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어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된다.
  러시아어도 러시아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여러 사건들의 경험 속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어왔다. 문어가 없었던 러시아 사회에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문자가 유입되고 문어로서 교회슬라브어가 교회어, 상위어, 엘리트어로서 긴 시간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이후 서유럽과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서유럽어, 특히 프랑스어의 영향이 강력히 휘몰아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정부차원의 강력한 프랑스어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미 13세기부터 시작된 언어의 중앙 집중 움직임은 모든 공문서에 프랑스어를 사용할 것을 지시하는 프랑스아 1세의 칙령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언어를 주요 통치기구로 간주해온 전통과 맞물려 절대왕정시대 프랑스어의 위상 강화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포함해 주변국에서까지 폭넓게 관찰되었다.
  제정 러시아시대 러시아의 황제들 역시도 언어를 정책적으로 활용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표트르 대제는 언어를 사회개혁의 초석으로 삼았으나 그가 추진한 언어 정책은 프랑스 왕들이 추구했던 방향과는 다소 상이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모국어 강화 정책과는 달리 표트르 대제는 서구지향적 언어 정책을 기조로 삼았다. 서구화를 통해 러시아 사회의 발전방향을 모색했던 표트르 대제의 통치 시대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랫동안 프랑스어는 상류사회의 언어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해나갔다. 러시아인들의 모국어에 대한 인식변화, 러시아어의 가치에 대한 자각은 19세기 초반까지 강력하게 휘몰아친 서구의 영향을 경험한 후, 그리고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민족과 문화가 다르고 경험한 역사가 다르다 해도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에서 모국어가 가지는 함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어는 문화적 자부심, 예술적 우월감, 해방과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언어이고, 러시아인들은 모국어의 광활함, 풍요로움, 생동감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오늘날의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는 영어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 언어들 가운데 하나로서 국제 관계, 세계 문화를 이끌어가는 소통 및 관계의 도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연관 토포스 귀족;애국심; 언어제국주의(언어정책); 자-타; 정교; 지식인; 개혁
참고자료(프랑스) Charles BRUNEAU, , Cahier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études francaises, N°9, 1957.
Émile Littré et François Gannaz, Le Littré,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 par É. Littré, 1877.
Jacques LECLERC, Qu’est-ce que la langue ?, Laval, Mondia, 1979.
Jacques LECLERC, L’aménagement linguistique dans le monde, Québec, TLFQ, Université Laval. 2015.
M. Paul LEWIS, Gary F. Simons, and Charles D. Fennig (eds.). Ethnologue : Languages of the World, 18th edition. Dallas, Texas : SIL International, 2015.
Antoine RIVAROL, .
[www.bribes.org/trimegiste/rivarol.htm]
Paul ROBERT, .
[http://artsrtlettres.ning.com/profiles/blogs/temoignages-decrivains-sur-la-3]
Ghislaine ROLLAND-LOZACHMEUR, , Argotica, 1(1), 2012.
Walther von WARTBURG, Évolution et structure de la langue française, Editions A. Francke S.A. Berne, 1946, 1971(10e éd.).
http://www.francophonie.org/ <프랑스어권국제기구>,
http://www.lefigaro.fr/livres/2009/01/08/03005-20090108ARTFIG00410-ma-langue-grand-maternelle-.php <안드레이 마킨 대담>
http://fr.wikipedia.org/
송기형, 『프랑스어 사용법 연구』, 솔, 2004.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2015.
참고자료(러시아) Аваакум П., <Книга толкований и нравоучений>, Памятники истории старообрядчества XVII в., 1927.
Белинский В. Г., Взгляд на русскую литературу 1847 года.,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трех томах, Т.3. Статьи и рецензии 1843-1848, М., 1948.
Виноградов В. В . История слов, М., 1994.
Гоголь Н. В., <В чём же наконец существо русской поэзии и в чём её особенность>, Выбранные места из переписки с друзьями, 1847.
Карамзин Н. М., <Отчего в России мало авторских талантов>(1802), Избранные сочинения., Т.2, М., 1964.
Лотман Ю. М., Успенский Б. А. <Споры о языке в начале XIX века как факт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ы>(1975), Лотман Ю. М. История и типология русской культуры, СПб.:Искуссвто-СПБ, 2002.
Пушкин А. С.,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10-х томах. М. 1977-1979.
Успенский Б. А., Семиотика истории. Семиотика культуры,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Т.1, М.:Гнозис, 1994.
Шишков А. С., Рассуждение о старом и новом слоге российского языка, СПб., 1803.
추천자료(프랑스) 빅토르 위고, 『노트르담 드 파리』, 송면 옮김, 동서문화사, 2012.
에밀 졸라, 『목로주점』,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1.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유석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6.
추천자료(러시아) 고골, 『친구와의 서신 교환선』, 석영중 옮김, 나남, 2007.
『러시아 고대문학 선집 1 - 원초 연대기』, 조주관 편역, 열린책들, 1995.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박형규 옮김, 인디북, 2004.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러시아 희곡 1, 김혜란 옮김, 열린책들, 1998.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