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연극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연극
토포스명(프랑스) théatre; comédie
토포스명(러시아) театр
정의 1. 볼거리를 원할수록 연극은 더욱더 번성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연극’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프랑스어 ‘테아트르théâtre’는 고전 라틴어 ‘테아트룸 theatrum’에서 비롯된다. 이 라틴어는 또, 그리스어 ‘θεατρον’에서 왔다. 
  이것 말고도 ‘코미디 comédie’ 라는 어휘도 폭넓게 쓰여 왔던 것으로 관찰된다. 슬프고 불행한 이야기 ‘비극’이라는 의미의 ‘트라제디 tragédie’에 대비되는 우스꽝스럽고도 경쾌한 연극인 ‘희극’의 의미를 한편으로 갖는 ‘코미디’는 그러나 중세 이후의 유럽적 전통에서, 그보다는 더 폭넓게 연극, 또는 극장에서 공연되는 모든 종류의 ‘극’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테아트르가 시나 소설 따위의 문학예술 장르들 중의 하나인 ’연극‘ 또는 그것을 공연하는 장소인 극장을 전문적으로 일컬은데 비해 코미디는 때로 극문학이나 연극 장르를 넘어서 매우 넓은 의미 외연을 지닌 채 쓰여 왔음은, 14 세기 이탈리아의 단테의 『코미디아 Commedia』가 잘 예시한다.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100 편의 장엄한 시들로 구성된 그 운문은 결코 극장에서, 분장한 배우들이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하기 위한 희곡도 희극도 아니었다. 14 세기 말 보카치오가 ’신의‘ 또는 ’거룩한‘이란 의미의 이탈리아어 형용사 ’디비나 Divina‘를 앞에 붙인 것을 계기로 르네상스 이후 『신곡』으로 전해지게 된 이 작품은 훗날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 작품들 전체를 야심차게도 『인간극』이라고 칭하게끔 영감을 주었는데, 그 소설들 속에도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은 별로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프랑스어 ‘코미디’는 단순히 ‘희극’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 및 예술 분야에서 매우 확대된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 어원을 따라가면 당연히, 라틴어 ‘코매디아 comoedia’ 가 있으며 이는 역시 그리스어 ‘κωμωδια’에서 왔다.
  언급된 테아트르, 코미디 및 트라제디 외에도 ‘드람 drame’이라는 어휘 역시 빈번하게 사용된다. 후술하겠지만, 이 용어는 위대한 고전극의 시대인 17 세기가 지난 후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한 ‘드라마’는, 토포스의 차원에서 보자면 가장 폭넓은 용례와 울림을 갖는 말일 것이다.
  인간이 언제부터 일종의 ‘역할 놀이’를 구경거리로 즐겨왔는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는 듯하다. 그 일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의 권위에 기인한다. 그는 『시학』에서, 연극의 출발점을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제전으로 서술한다. 주신 디오니소스를 찬미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연극의 탄생 배경이다. 그러한 행사의 일환으로, 작가들은 각자의 후원자를 등에 업고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희극을 지어서 그 4부작을 하루 동안 공연함으로써 그들의 언어적 기량을 뽐내었는데, 이 연극들은 노천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계단식 원형 극장은 그리스 시대에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로마 시대에 와서야 설비된 것으로 기록된다.

  

  신화 속에서 디오니소스의 몸종인 사티로스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인데, 주인을 위기에서 구해준 공로로, 주색을 일삼는 모든 일탈 행위들이 허용된다. 결국 재미있는 놀이였던 연극의 시발점을 거기에서 찾는 학설도 있다. 
  초기에는 연극에 단 한 사람만이 등장하여 모든 역할을 다역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다가,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이 배경에 서고 두 명의 배우, 이어서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하여 스토리를 진행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론, 이때까지는 여성은 무대에 서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 시대에 와서는 복수의 배우들이 이전의 마스크를 대신해서 분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철학자와 극작가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로마 시대의 극작가는 세네카이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그리스 극작가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그가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적 소재들을 토대로 『페드라』, 『메디아』 또는 『오이디푸스』 등의 비극에 새로운 버전을 창조하여 후대에 물려준 공로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네카는 그가 남긴 “인생은 한편의 연극이다.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공연되는 것이 아니라 잘 공연되는 것이다”라는 말로써 기억되기도 한다. 실제로 황제 네로의 스승이었으며 또 그의 명령을 받아 자결로써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불운한 자신의 삶에도 해당되는, “인생은 연극”이라는 이 강렬한 은유는 실로 연극이라는 토포스의 기본 위치와 방향을 결정적으로 지정해 버린 것으로 서구인들의 심성에 남게 된다. 그것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 중의 한 대사의 형태로, “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네.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만 하면 되는 무대이니까”라는 말로 변주하기도 했다.
  연극의 문화 전통은 기독교가 유럽대륙에 정착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한 직후 현격하게 약화되기도 한다. 초기의 신학자들은 희극이든 비극이든 연극 공연 및 수용행위에서 인간의 심성을 타락시키고 악마의 유혹을 불어 넣는 사악한 측면 이외의 것을 보려 들지 않았다. 예컨대, 테르툴리아누스는 『공연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연극을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398년의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는 몇몇 배우들에 대해 파문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근본적으로 사람의 말과 몸짓의 놀이이며 축제인 연극 공연은 신에 대한 묵상과 기도와 수행을 말하는 종교적 요구와는 성격상 서로 잘 어울리지는 못하는 점 때문이었는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 전까지의 중세 유럽에서의 극작 및 공연의 문화에 대한 기록은 풍성하지 않다. 세네카와 테렌스 등의 로마 시대의 작가들의 작품들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 비극들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뿐 실제로 대중에게 공연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중세의 연극 공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영국 윈체스터의 주교였던 성 에텔월드의 저서 『베네딕셔널』 속에 채색 삽화로 그 장면이 그려진 것인데, 『무덤에의 방문』이라는 일종의 종교극, 혹은 예배극이 공연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또한 12 세기 중반 『아담의 행위』라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는데, 그러나 이러한 종교극들은 늘 교회 밖의 다른 장소로 나와서만 공연되었으며 예배당 내부의 경건한 공간은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러한 풍토에서 중세 후기의 곡예사들이 연극적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3세기에 이르러 도시가 형성되고 전에 없던 많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생활환경을 갖게 되면서, 공연물에의 요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때 등장하는 새로운 세 명의 극작가들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연극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뤼트뵈프, 아당 들라 알 그리고 장 보델이다. 뤼트뵈프와 보델이 각각 『테오필의 기적』, 『성 니콜라스의 행위』로써 이른바 ‘기적극’이라는 작은 장르를 형성하고 대표했다면 아당 들라 알은 『나무 그늘 아래의 놀이』로써 종교극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사례를 보여준다.
  르네상스시기에 이르러 재 발굴된 고대 희랍의 극작품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술한 세네카의 것들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즐겁게 웃고 또 시원하게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는 고대의 희극과 비극들이 공연되기 시작하면서 중세 후기와 말기에 명맥을 유지하던 종교적 색채가 짙은 ‘기적극’ 또는 ‘신비극’들은 점차 잦아들게 되는데, 1548년에 이르면 바티칸 당국에 의해 이 신비극은 오히려 금지된다. 그것들이 오히려 전통 교리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세속적이고, 교양 있고, 적법한” 대본들만이 공연될 수 있었다. 
  16세기 그리고 17세기 전반의 바로크 연극의 시대를 지나 1650년경에 이르면 프랑스에서 유럽 대륙의 그 어느 지역에서보다 더 활발하고 찬란한 연극의 시대가 꽃피게 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연극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테아트르 театр’는 프랑스어 ‘테아터 théâtre’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이 용어는 표트르 1세 시절부터 사용되었으며, 당시에는 ‘페아트르 феатр’로 표기되기도 했다. 
  러시아 연극은 여타의 문학,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서구에 비해 매우 뒤늦게 유입되어 발전하였다. 18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에서는 연극, 드라마, 희곡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였다. 
  ‘연극’으로서 ‘테아트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이전 러시아에서는 고대 루시 사회에서부터 유래된 연극과 유사한 형태의 ‘오락, 구경거리’등이 존재하였다. 서구의 근대극,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대극’이 유입되기 이전, 약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러시아의 초기 연극은 서구 연극의 기원이 되는 농경, 수렵 사회의 원시적 집단 제례 의식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집단 노동 과정, 축제나 제례 등을 재현하는 집단 윤무 형태의 공연들은 ‘포테하 потеха’ , ‘이그라 игра’, ‘이그리샤 игрища’와 같은 용어들로 불렸다. 이 용어들의 정확한 구분은 모호하지만, ‘오락거리, 심심풀이’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포테하’가 가장 널리 사용되었고, ‘놀이, 유희’를 뜻하는 ‘이그라’, ‘이그리샤’는 일정한 형태를 지닌 연극적 행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 세 가지 형태 중 오늘날까지 비교적 그 형태가 널리 알려진 것은 이그리샤이다. 이그리샤는 우리의 ‘강강술래’와 유사한 형태의 ‘호로보드 хоровод’로 불리는 집단 윤무가 중심이 되어 농경생활, 사랑, 사냥, 전쟁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이그리샤는 봄과의 만남, 축하, 송영 이라는 세 개의 ‘막’으로 이루어진 ‘봄의 이그리샤’이며, 그 외에도 ‘결혼 이그리샤’, ‘장례 이그리샤’도 민중들에게 널리 유행되었다. 
  이그리샤는 러시아 민중 연극 생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후 호로보드라는 춤의 형태에 노래(합창)와 언어(대화)가 첨가되면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노래가 들어간 이그리샤는 서정 드라마적인 특징을 가지면서 가장 오래된 민중 구전 드라마 중의 하나인 『나룻배』를 탄생시켰고, 대화가 들어간 이그리샤는 희극적인 특징을 가진 『페트루쉬카에 대한 희극』을 탄생시켰다. 
  근대극 이전, 러시아 연극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은 ‘스코모로흐 скоморох’라 불리는 일종의 ‘광대’들의 활동이었다. 스코모로흐의 어원은 ‘장난치다,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다’등의 의미를 지닌 고대 그리스어 ‘σκώμμαρχος’에서 유래되어 11세기 경 불가리아를 거쳐 러시아로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코모로흐는 궁정에 상주하면서 왕과 귀족들의 여흥을 돋우는 ‘궁정광대’, 한곳에 정착하여 민중들에게 공연을 한 ‘정착 광대’, 이곳저곳을 떠돌며 공연을 한 ‘유랑 광대’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유랑광대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다. 유랑광대들은 어떤 조건에서도 상연이 가능한 형태의 특별한 레퍼토리를 준비하여 공연하였는데, 특히 말 장사, 약장사, 군인, 악마, 죽음 등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페투루쉬카의 활약을 보여주는 2인 1조의 인형극 『페트루쉬카에 대한 희극』, 예수탄생에 대한 상자 인형극인 『베르체프』등이 유명하였다. 
  이그리샤와 스코모로흐는 민중들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근대극이 도입된 17세기 이후에는 거의 소멸된다. ‘유희와 놀이’를 악마의 전유물로 여긴 교회의 박해와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이후에는 서구의 연극을 고급한 것으로 여긴 사회 분위기가 그 대표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그리샤와 스코모로흐의 전통은 20세초 상징주의자들의 몇몇 드라마와 혁명 이후 집단 선동극 등에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연극 театр’, ‘드라마 драма’ 라는 용어들은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이후인 18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17세기 말에도 ‘희극 комедия’이라는 용어가 존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앞서 언급한 대로 주로 ‘오락거리’를 지칭한 ‘포테하’라는 용어를 쓰곤 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프랑스의 시대별 문화사조사가 보여 주듯이 17세기는 고전극의 시대였다. 소설은 아직 그 장르의 정체성과 효용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시는 예외적 언어 감성을 가진 소수의 고매한 영혼들의 놀이터였던 반면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와 내용의 스펙터클을 보기 위해 무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근대 이후의 프랑스를 연극의 나라로 만든 세 인물은 주지하다시피, 코르네이유, 라신 그리고 몰리에르였다. 17세기 전반의 바로크 연극의 시대와 약간 겹치는 코르네이유가 『르 시드』로써 고전주의 연극의 시대를 열자마자 두 후자는 각각 비극과 희극 장르에서 불후의 전범이 될 만한 ‘무대 위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페드르』, 『이피제니』, 『앙드로마크』, 『바자제』 등 그리스 신화에서 연원하는 인간의 영원한 주제들을 정제된 프랑스어로 재창조한 라신. 『타르튀프 그 사기꾼』, 『돌로 변한 동 주앙』, 『수전노』, 『귀족이지만 사실 평민』 등으로써 갑갑한 신분 질서 속에서 (비)웃음의 세속-카타르시스적 기능을 한껏 폭발시킨 몰리에르. 이 두 극작가의 이름과 함께 프랑스 고전 연극의 완성에 누락할 수 없는 이름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이다. 
  왕은, 지방귀족들의 저항을 제압하고(프롱드 난) 베르사이유에 화려한 궁전을 지어 그 자녀들과 친척들을 모셔 볼모로 유폐시키는 등, 자신의 통치 국가 프랑스를 ‘세상의 중심(배꼽)’으로, 대륙의 왕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던 노회한 정치 감각과 함께 감출 수 없는 문화 예술적 감각을 또는 가무를 즐기지 않으면 안 되는 기질을 타고났었다.
  <왕의 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상영된 바 있는 2000년 제작 프랑스 영화 <왕은 춤춘다>로 일반인에게도 알려진 그의 무대를 향한 열정은, 높은 연봉을 지불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초빙한 궁정 음악가 룰리 옆에 늘 라신 또는 몰리에르를 궁정 극작가로 두면서 새로운 공연을 주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몸소 분장을 하고 연기를 하기에는 아무래도 여의치 않다면 왕의 체면을 손상 받지 않고서 춤이라도 출 수 있는 발레 장르를 활성화한 그의 문화적 후원은 ‘발레 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몰리에르를 통해 창설하였다.
  베르사이유에서 공연되고 난 연극들은 이내 파리 시내의 극장들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몰려드는 인파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17 세기 후반에 개설된 극장 또는 기관이 바로 ‘코미디 프랑세즈’였는데, 교회의 신부들과 사제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교회로 몰리던 신자들이 극장으로 운집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트집이 잡히면 맹렬히, 이 새로운 문화 현상에 저항하곤 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타르튀프』이었다. 중세 이래로 대립해온 교권과 왕권의 기우는 판세를 그 연극이, 그리고 그것의 공연이 연출해 준 것이다. 태양왕이 내심 흡족해 하며 관람한 가짜 신앙인의 몰락 과정을 교회는 쉽게 감내할 수 없었기에, 그 연극은 3,4년이 지난 후에야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라신의 마지막 비극 『아탈리』는 생 시르 기숙학교의 주문에 의한 것이었는데,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 가톨릭 수녀원 학교에서 상연하기에는 너무나 험하고 지나친 것이어서 그 공연이 취소되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다. 이렇듯 프랑스의 고전극들은 그 시대의 ‘19금’ 이데올로기와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축적된 성취인 측면이 있다.
  시대가 지난 진보는 보수가 되는 것처럼, 프랑스 고전극은 새로운 작가 정신들에게 멀지 않아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17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극들은 기본적으로 12 음절을 한 행으로 구성하는 이른 바 ‘알렉상드랭’ 운문으로 구축되었다. 왕과 신하들은 한 시간 반 동안 들려오는 6/6 또는 3/3/3/3 단위의 음절들의 리듬을 귀로 즐기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했었다. 
  뿐만 아니라 왕실의 권위에 부합하고 당대의 점잖은 교훈에 부응하기 위해 모든 연극 공연에 두 개의 법칙이 부과되어 있었는데, ‘예절바름’과 ‘삼단일’의 법칙이었다. 무대 위의 장면들은 도를 지나쳐서는 아니 되며 희극이든 비극이든 단 하나의 장소에서, 단 하루의 시간 범위 내에서, 단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의 프랑스 극장에서는 이 규제 혹은 법칙들과 어떻게 타협하거나 어떻게 넘어 서거나의 싸움이 전개된다. 우선 18세기의 볼테르를 위시한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연극들은 그 법칙들의 보다 자유롭고도 대중적인 적용을 요구하며 싸운다. 그들은 ‘테아트르’, ‘코미디’, ‘트라제디’ 라는 종래의 어휘와는 다른 것으로 자신들의 연극을 칭하기 시작한다. ‘드라마’ 라는 새로운 용어는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하는 시민계급들의 볼거리를 위한 적절한 지칭이 되어 보인다. 
  연극사적으로 볼 때, 18세기의 극작품들을 일컫는 용어는 ‘시민극’이다. 18 세기에 제작된 많은 극작품들 중 삼단일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은 눈에 띠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가 들려주는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운명적 사건과 감정들을 다루기보다는 조금 더 일상생활의 차원으로 내려온 주제들을 선택하여 관객과 호흡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족’을 들 수 있다. 
  극예술에서의 가족 주제의 부상은 별도의 조명을 필요로 할 정도인데, 디드로의 『사생아』, 『가장』 그리고 보마르셰의 『잘못한 어머니』등의 극작품이 거명될 수 있다. 
  18세기 시민 연극의 또 다른 특징들 중의 하나는 바로 주인과 하인의 주종 관계를 연극의 주제로 올렸다는 점일 것이다. 보마르셰의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세습된 권위와 오래된 권력을 어떻게 비웃을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다. 연극 작품은 아니지만 소설적 요소보다는 극적 성격이 더 풍성하게 발현되는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에서 신분상의 상위자인 주인은 명민한 하인 자크의 끝없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연극이란 매체에 대해 사유하고 언급하기를 간과하지 않는데,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은 고전적 프랑스의 세계관 및 문화적 통념과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맞서거나 대응한다. 영국으로 망명하여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열광한 볼테르는 고전 시대의 법칙들을 큰 형식에서는 맞추어 주면서도 『자이르』, 『마호메트』 등의 비극에서 특유의 재치와 말솜씨로 기존의 기준에 젖은 문화적 지배세력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디드로는 『배우에 관한 역설』 등의 이론서를 써서 새 시대의 연극에 관한 요청을 역설하였다.
  이단아 루소는 당대에 새롭게 흐르는 분위기와 관행에 결코 호응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는 작금의 공연들이 사람들의 본성을 더욱 타락시키고 삶의 진실과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할만 한다고 불평했지만 그 자신 역시 극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1막의 모노드라마 외에도 노래로 하는 1막의 연극 『마을의 점쟁이』를 써서, 대본과 음악을 동일인이 지은 최초의 오페라(오페레타)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친 후 낭만주의의 세례를 받은 19세기의 소설가와 시인들은 역시 연극 작품에 도전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빅토르 위고이다. 위고는 그의 연극 『에르나니』에서 고전적 삼단일의 법칙들 중 행위(줄거리)의 단일만 남기고 시간과 장소의 단일성을 과감히 버린다. 당시의 보수적 문단은 이 작품의 파격에 분노하여 공연장으로 몰려와서 거세게 항의하며 논쟁을 일으킨다. 프랑스 연극사에서 ‘에르나니 전투’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낭만주의 드라마’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에르나니 전투는 연극사를 넘어 문학사 또는 문화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은 시대와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새로운 세대가 전 세대의 위엄을 이겨내면서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한 전범을, 17세기의 신구논쟁과 함께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위대한 정신들을 읽고 모방하고 본받아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은 영원히 그들보다 열등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당돌한 질문에 의해 촉발된 신구논쟁의 주제는 에르나니에 와서 “위대한 몰리에르, 라신의 연극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만이 능사인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된다.
  에르나니 싸움에서 낭만주의 연극의 투사의 일원으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 역시 몇 편의 드라마를 남기는데, 당국의 검열로 인해 그 제목들을 당시에 용인되던 속담 및 격언들로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갖고 장난치는 법 아니다”, “무엇에 대해서든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등이 그것들이다.
  낭만주의 드라마의 이러한 등극은 연극 및 공연 예술의 민주화 또는 통속화에 박차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을 계기로 멜로드라마, 보드빌 등의 가볍고도 일상적인 형식과 주제들의 연극이 19 세기 내내 시민들의 문화 소비 상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제 ‘테아트르’라는 말은 조금은 무겁고 고루한 것이 되었으며 그 대신, 단순한 논리의 대립 구도, 분명한 감정 및 선악의 편 가르기, 쉽고도 자극적인 대사로 가득 찬 멜로드라마들이 극장들을 점령하게 된다. 파리의 3구와 11구를 가르는 거리인 ‘불르바르 뒤 탕플’은 그곳에 밀집한 극장들이 매일 밤 연출해 내는 드라마들의 사건들로 인해 ‘범죄 불르바르’로 불리게 될 정도이다. 
  드라마의 대중화는 당대의 소설 속에도 빠질 수 없는 재재로 등장한다. 가령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의 주인공 뤼시엥 뤼방프레는 함께 지방을 떠나 파리로 떠나온 바르지통 부인과 연극장을 찾는다. 어렴풋한 연인의 관계인 두 사람은 관객석에서 많은 관계인들의 시선에 짓눌리는데, 싸구려 일층 객석에 앉은 이들을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지켜보면서 수군댄다. 그들은 2, 3 층의 룸 객석에 자리 잡아 연극을 보려고 가져온 쌍안경을 일층 객석의 관객들을 향해 초점 맞추어 관찰하며 담소를 즐기면서 소문을 생산하고 전파한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연주의 소설가 졸라는 이러한 대중의 문화적 관행과 수준에 아쉬움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의 삶과 세계를 가리는 이러한 재현물들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연극에서의 자연주의』라는 저서를 써서, 거짓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무대 위에 올릴 수 있는 극작가들의 출현을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역할 놀이로 출발하여 세속인들의 감정적 애환을 대리하는 것을 숙명의 본업으로 삼은 이 장르에서 진정하고도 성실한 방식으로 현실을 반추하여 보는 이들을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으로 몰아가는 데 성공한 극작품의 사례는 별로 보고되는 것이 없다. 20세기에 들어 그 대중적 지위를 움직이는 영상을 상영하는 영화에 점차 빼앗기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위대한 연극의 나라 프랑스는 조금은 괴상한 자괴에 빠져드는 듯하다. 이제 프랑스의 무대는 반으로 준 관객들 앞에서 무엇을 보여줄까 고민하며 삶과 예술과 문화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삼는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까지 참고 봐도 관객은 블라디미르와 함께, 누구를,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도 밝게 빛났던 고전주의의 광채는 21 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분명 그 형광을 발하고 있다.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가 생기면 거리 명 후보 제 1,2번에 언제나 ‘몰리에르 가’를 떠올린 공연 문화 강국의 위용이 결코 사라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와 카뮈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20세기의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들 및 작가들이 희곡 집필에 착수하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프랑스인의 가장 평균적인 일상이 제공하는 몇 개의 주제들을 구성하여 만든 1990년대 후반에 제작된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에서도 여자 주인공은 연극인 동호회에 가입하여 늘 연기하며, 연출로 부터 지적당하고 실망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사랑 고백 장면에서의 갑작스럽게도 자연스럽고도 깊은 연기로 극장의 관객들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을 아스라한 감동으로 감싸는데 성공한다. 
  프랑스인들의 일상적 언어생활에 있어서도 연극의 후광은 빛을 잃지 않는다. 대화 상대방이, 발생한 사건에 대해 과장되거나 과민한 반응을 보일 때, 즉 우리말로는 ‘소설 쓰지마! 또는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라고 말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드라마 쓰지마.” 라고 말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고대, 중세 러시아에서 토포스로서의 연극은 주로 민중들의 오락, 여흥거리의 의미가 두드러졌다. 그 반면에 교회와 국가는 이를 미개한 것, 반종교적인 것을 규정하여 활동을 억제시키려고 애를 쓰곤 하였다. 그러나 서구 근대극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18세기 이후 러시아에서 연극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러시아는 18세기에 이르러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유럽화 정책으로 유럽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인다. 특히 상류 귀족들은 고급문화와 여흥거리에 큰 관심을 보였고, 서구 귀족들이 향유하였던 무도회와 살롱을 비롯한 음악, 무용, 연극 등의 예술 장르에 열광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유럽으로의 여행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18세기 중엽 이후에, 유럽의 선진 예술 문화를 직접 체험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예술 장르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증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당대 문화적 욕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예술 장르가 바로 연극이었다. 
  근대화 초기에 러시아 연극은 아직 제대로 된 극작가, 배우, 연출가 등이 드물었기에 주로 외국 극단을 초청하여 황실과 귀족들 중심으로 연극을 관람하곤 하였다. 1672년 10월 17일 알렉세이 황제 영지의 야외 임시 무대에서 독일인 목사 그레고리가 이끄는 독일인 극단에 의해 10시간에 걸쳐 공연된 희곡 『아하수에로』의 공연이 최초의 근대 무대극으로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 연극의 발전에 표트르 대제의 딸인 엘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통치시기 1742-1762)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유럽 문물, 특히 프랑스 문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무도회, 살롱 등의 문화를 직접 수입하여 장려하였다. 특히, 귀족들의 여흥 거리로서의 연극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1756년 8월 30일 칙령을 통해 러시아 각처에 극장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756년 9월 30일 페테르부르크에 일반에게 허용된 최초의 황실 극장 (오늘날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건립한다. 이 극장에서 러시아 연극의 초기 선구자인 수마르코프(1717-1777)와 볼코프(1729-1763)가 활동하면서 러시아 근대극의 태동기를 열게 되었다. 이후 1824년 모스크바에서 말르이 극장이 개장되면서 귀족들의 여흥거리로서의 연극은 19세기 전반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19세기 전반 토포스로서의 러시아 연극은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은 여전히 귀족들의 여흥거리, 유럽 문물에 대한 애호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 중심에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보드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춤, 노래, 대구를 지닌 가볍고 경쾌한 희극’을 의미하는 보드빌은 프랑스 혁명기에 연극 장르로 성립되어 유럽에 전파되었고, 특히 19세기 전반, 1812년부터 1830년까지 ‘귀족적 보드빌의 시기’로 불리며 러시아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1826-27년에는 페테르부르크 극장에서 상연된 105편의 희곡 가운데 27편이 보드빌, 1828-29년에는 119편 중 41편이 보드빌, 1831-32년에는 90편 가운데 31편이 보드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확산은 이후에 더욱 심화가 되는데, 1839-40년에는 152편의 희곡들 가운데 93편이, 1844-45년에는 152편 가운데 85편이, 1850-51년에는 193편 가운데 117편이 보드빌이었다. 카보스, 베르스토프스키, 알라비요프, 흐멜리니츠키, 피사레프 등이 이 시기 활동안 주요한 보드빌 작가였지만, 그들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프랑스 보드빌의 번안이나 러시아식 개작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연극 평론가 파우쉬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때로 그것은 프랑스의 도식에 러시아의 내용을 삽입한다. 이것이 독창적인 보드빌이다. 때로 그것은 프랑스의 줄거리에 러시아의 형상들과 러시아의 현실을 집어넣으려고 애쓰면서 하찮은 프랑스의 전범을 개작하고 번역한다. 이것이 번역과 개작의 보드빌이다.”

  19세기 초반에 보드빌이 급속도로 확산 된 것은 귀족들의 문화적 욕구 이외에도 1825년 데카브리스트들의 봉기를 겪은 니콜라이 1세의 정치적 의도도 큰 역할을 한다. 사회 정치적 문제들로부터 대중들의 관심을 소시민적이며 가볍고 유쾌한 여흥거리인 보드빌로 관심을 돌리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종 보드빌에 대한 지식인들의 강도 높은 비판도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비평가 벨린스키였다. 대량으로 생산되어 웃고 즐기고 잊혀 버리는 보드빌에 대해 벨린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했다.

“보드빌은 순식간에 태어나고 단숨에 죽어 버린다. 그것은 지금 변덕스러운 대중을 즐겁게 하지만, 내일이면 그들에 의해 잊힌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기이한 점들이 있다. 내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가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몰리에르와 보드빌이다. 첫 번째 기이함의 원인은 나 자신도 놀랄 지경이어서 어느 땐가 나는 대중이 그것을 검토해 볼 수 있도록 문제를 제기할 생각이다. 두 번째 기이함, 즉 보드빌에 대한 증오에 관해서는 보드빌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증오의 원인도 러시아의 모든 보드빌과 꼭 마찬가지로 대중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19세기 전반 러시아 연극은 당대 러시아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데니스 폰비진은 희곡 『여단장』(1770)을 통해 당대 러시아인들의 프랑스 심취를 신랄하게 풍자하였고, 『미성년』 (1782)에서는 당대 귀족들의 무지와 전횡을 러시아의 구체적인 삶과 세태와 결부시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미성년』은 당국의 검열로 인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걸친 후 독일인 칼 크니페르가 페테르부르크에 세운 극장에서 상연되기도 하였다.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체험하고 돌아온 차츠키의 눈으로 구태의연한 모스크바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리보예도프의 희곡 『지혜의 슬픔』 (1824), 지방 귀족들의 탐욕과 무지, 전횡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 전체를 날카롭게 풍자한 고골리의 희극 『감사관』(1836) 역시 당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으로 인해 여러 번의 검열과 상연 불가 등의 판정을 받으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세기 전반 이러한 이중적 속성을 가진 러시아 연극은 19세기 중, 후반에 이르러 또 다른 형태로 속성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전반까지 러시아 극문학의 흥미로운 점은 희곡만을 전문적으로 창작하는 순수한 극작가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푸시킨, 고골리, 레르몬토프, 투르게네프 등 19세기 전반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희곡 작품을 창작하였지만, 그들의 주된 관심은 시와 소설 장르였고, 연극과 극장의 전문가들로 칭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들이 있다. 따라서 당대 극장들의 연극 레퍼토리는 여전히 서구의 희곡이 주를 이루었고, 러시아 대중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은 거의 드문 실정이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19세기 중, 후반 러시아 극문학의 아버지로 불린 오스트로프스키(1823-1886)의 등장은 러시아 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오스트로프스키는 이전 작가들과는 달리 총 48편의 희곡 작품만을 창작하였고, 내용 역시 러시아 민중, 대중들의 삶을 소재로 하여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불린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모스크바의 말르이 극장에서 공연하면서 연출, 제작에 직접 관여하여 ‘말르이 극장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특히, 오스트로프스키가 활동한 19세기 중, 후반은 이른바 ‘귀족의 시대’가 저물고 중인과 상인계층들이 중심이 된 ‘잡계급의 시대’가 도래한 시기였다. 따라서 연극은 이제 더 이상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도 그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대중들의 새로운 여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연극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욕구와 수요는 19세기말 극작가 체호프와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 그리고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건립되면서 한층 더 증가하게 된다.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장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연극에 대한 일반 대중의 욕구를 가장 충실히 반영한 극장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1898년 개설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최초의 명칭이 ‘일반에게 허용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이라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후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단센코가 합작하여 건립한 모스크바 예술 극장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문화 예술계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극작가 체호프의 4대 희곡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나무 동산』을 공연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연극은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을 통하여 이전의 연기, 연출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혁신적인 새로운 연극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이전의 연극들이 한두 명의 배우들에 의존하는 ‘스타시스템’으로 주로 공연이 되었다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극은 여러 명의 배우들이 조화를 이루는 ‘앙상블 시스템’에 의거하여 배우들의 내면과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추는 무대 사실주의를 지향하였다. 이에 대해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예술에서의 나의 삶』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작한 사업의 프로그램은 혁명적이었다. 우리는 낡은 연기 방법에, 연극성에, 과장된 억양과 웅변에, 배우들의 부자연스러운 연기에, 연극과 무대 장치의 쓸데없는 조건성에, 앙상블을 깨뜨리는 주역배우에, 모든 낡은 연극에, 그 당시 극장들의 하찮은 상연목록에 반대했다. 연기, 연극, 무대장치, 의상, 희곡의 해석 등에서 관례가 나타나지 않도록 파괴적이고 혁명적인 노력 속에서 우리는 예술의 혁신을 위해 극장에 있는 모든 관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 『예술에서의 나의 삶』, 1926)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혁명 정부와의 갈등을 빚은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그의 극단을 데리고 1922년-1924년까지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였고, 그의 연출기법을 확산시키면서 이후 세계 연극계의 흐름을 주도하게 된다. 따라서 20세기 초 러시아 연극은 ‘발레뤼스’와 함께 러시아의 문화 예술이 서구에 역으로 전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에 의해 러시아 예술의 자부심으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연극은 혁명 후 또 다른 형태의 양상을 보여준다. 혁명 후 러시아 연극은 그 양과 질에서 세계 연극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18년 1월에 혁명정부는 교육인민위원부 산하에 ‘연극부’를 창설하여 연극을 총괄적으로 관리하였으며, 1919년 8월에는 레닌의 서명으로 ‘연극업무통합’ 법령을 채택하여 모든 극장을 국유화시키면서 연극을 통해 인민 선전과 계몽에 전력을 다한다. 시와 소설에 비해 보다 즉각적인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연극은 새롭게 등장한 혁명정부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르였기 때문이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전까지는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노동자, 농민들을 포함한 대중들의 연극에 대한 관심과 호응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28년 모스크바의 연극 관람객의 수는 약 100만 명을 기록했으며, 1913년 러시아 전역의 전문적 연극극장의 수는 약 143개였는데, 1934년에 이르러서는 579개로 증가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 활동한 극작가의 수는 약 천명에 이르며, 해마다 적게는 100편에서 많게는 약 400편의 희곡이 발표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연극계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제자이자 경쟁자인 연출가 메이예르홀드였다. 그는 스승의 연출법과는 정반대로 무대 사실주의의 환상을 깨뜨린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연출법을 선보였는데, 메이예르홀드의 이러한 연출법은 당시 혁명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에게 쉽고 명확하게 전파하여 집단적인 선전 선동극을 대량으로 양산해내었다. 특히, 혁명 시인이자 극작가인 마야코프스키의 희곡 『미스테리야 부프』를 이러한 양식으로 연출하여 소비에트 혁명의 효시로 각광받기도 하였다. 
비교문화적 설명   연극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예술 장르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그리스 연극을 시작으로 부흥된 연극은 16세기 영국의 셰익스피어 시대를 거쳐 17세기 프랑스 고전극 시대에 절정에 이른다. 춤과 연극 애호가였던 루이 14세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고 프랑스 고전극은 코르네이유, 라신, 몰리에르를 통해 프랑스를 연극의 나라로 만든다. 프랑스로부터 많은 문화를 수입한 러시아는 연극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구에 비해 연극적 전통이 현저히 뒤쳐진 러시아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르러 비로소 연극 장르가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는데, 이때 대부분의 연극은 보드빌을 비롯한 프랑스 연극의 수입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 러시아는 스타니슬라프스키라는 저명한 연출가의 출현으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여 세계 연극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프랑스도 자연히 러시아 사실주의 연극,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을 받아들여 새로운 연극적 흐름을 전개한다. 연극의 이러한 현상은 발레와 더불어 러시아 문화가 프랑스로 역으로 전파되는 매우 흥미로운 토포스를 보여준다. 
  18세기 이전까지 연극은 기본적으로 일반 대중보다는 여흥을 즐기며 소일거리가 필요한 귀족들의 장르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19세기부터 이른바 ‘시민극’의 발전으로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문호가 개방되어 매우 성행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20세기에 사회주의 혁명 이후 연극을 통해 노동자, 농민을 계몽하려는 혁명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그 문호의 폭이 매우 확장되어 큰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연관 토포스 귀족; 돈 주앙; 발레; 모드; 영화;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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