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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영혼
토포스명(프랑스) âme, esprit
토포스명(러시아) душа
정의 1. 육체가 덧없다고 느낄수록 더 인간의 본질이 영혼에 있다고 믿는다.
2. 진실을 갈구할수록 더 영혼에 집착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영혼을 뜻하는 프랑스어 ‘암므 âme[aːm]’는 라틴어 anĭma(바람, 공기, 호흡)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 운동, 사유의 원칙을 가리킨다. 라틴어 anĭma는 그리스어 프쉬케psukhê를 번역한 것인데, 프쉬케 또한 ‘바람이 분다.’, ‘숨을 쉬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용어로서 서구 영혼 개념의 기원에 놓여 있다. 이러한 어원은 사람이 죽을 때 호흡이 멎는 현상 때문에 영혼이 인간의 의식, 생명의 본질을 뜻하는 어휘로 확립되었으리라고 짐작하게 해준다. 프시케는 오늘날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의식의 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인 psychologie의 어원이다. anĭma는 기독교의 신학적 성찰을 거치면서 13세기경에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데, 프랑스어 ‘암므’에는 그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서구 사회에서 영혼의 개념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영혼의 기원, 영혼의 상태나 경험, 영적인 삶, 영혼의 구원과 불멸 등의 주제를 통해 거론되어 왔으며, 이 모든 쓰임에서 영혼은 인간의 의식적인 삶 전체나 삶의 정신적 원칙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한편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지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비육체적, 비물질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정신, ‘에스프리 esprit[εspʀi]’ 또한 ‘호흡’을 의미하는 라틴어 spīrĭtus를 어원으로 한다. ‘암므’와 더불어 ‘에스프리’는 인간의 의식 영역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프랑스어이다. 모두 호흡의 의미에서 비롯된 만큼 두 어휘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에는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은 물질에 대비되어 인간의 지적 인식 능력과 관련된 함의가 강한 반면, 영혼은 죽은 뒤 육체와 분리되는 존재의 실체, 윤리적 능력을 갖춘 인격의 본질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지혜는 영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영혼에는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폴 발레리, 『어록』, 1894)

  영혼의 개념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오랜 철학적 사유에서 육체와의 상관관계를 고찰하면서 형성되었다. 고대 그리스 최초의 문헌인 호메로스(기원전 800?~기원전 750년)의 서사시에는 영혼 개념에 바탕이 된 신화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영혼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시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영혼의 여러 기능들 중 하나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현상과 사물에 특정한 방식으로 혼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도 하나 이상의 영혼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다. 호메로스는 인간이 죽거나 실신하면 그의 입이나 죽음의 원인이 된 상처를 통해 프시케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다. 가령 『일리아스』에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살해하자 헥토르의 영혼-프시케가 육체를 떠나 지하 죽음의 세계인 하데스로 들어갔다는 묘사가 나온다. 또한 『오디세이아』에도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가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모두 죽이자, 헤르메스가 나타나 죽은 자들의 영혼을 황금 지팡이로 깨워 데리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영혼들은 하데스로 내려가 의식도 기억도 없는 유령-프시케로 떠돌아다닌다. 
  육체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소마(sôma)와 호흡을 뜻하는 프시케가 육체와 영혼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종교적인 사유를 거치면서이다. 기원전 6세기경에 전파된 오르페우스교는 인간이 디오니소스를 먹은 티탄 족 신들의 재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오르페우스교는 인간을 비합리적 측면인 티탄과 합리적 측면인 디오니소스의 결합으로 생각하고, 디오니소스 신이 부활하듯 육체 속에 갇힌 영혼이 죽음을 통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영란,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 참조) 한편 오르페우스교는 영혼윤회설을 통해 사후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했는데, 이러한 사상의 영향으로 영혼-프시케는 호메로스가 생각했던 것 같은 무력한 유령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윤회과정을 기억했다고 전해지는 피타고라스 또한 윤회하는 자아-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했다.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으로 프시케는 차츰 인간의 정서와 감정 나아가 사유의 기능까지 포괄하고 거기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원리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6세기 말)가 프시케에 대해 “영혼은 그 자신을 증가시키며 인간의 본성은 그 자신이 신과 같이 되는 것”(디오게네스 라에르스, 『고대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594) 이라고 말했을 때, 프시케는 신적인 것에 기원을 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다. (반 퍼슨, 『몸, 영혼, 정신』 참조)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와 비극 작품에서 이러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메데이아』(기원전 431)에는 “남자는 괴로울 때 친구에게 갈 수 있지만 여자는 오로지 하나의 영혼만 보고 있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영혼은 욕망에 사로잡혀 아버지인 아이에테스 왕을 배반하고 오로지 이아손에 대한 사랑만 지키려는 메데이아 자신을 가리킨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기원전 440 년 경)에서 오이디푸스가 테베 시민들이 역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만큼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자신의 영혼-프시케가 슬퍼하고 있다고 말할 때 영혼은 슬픔에 빠져있는 그의 자아를 가리킨다. 비극 작가들이 영혼이라는 낱말로 지시하는 ‘자아’는 대개 이성적인 자아라기보다 용기, 격정, 연민, 불안, 욕구에 사로잡힌 감성적인 자아이다.(장영란,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 재인용 및 참조)
  반면 모든 것의 근원을 물질이라고 본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이라고 추정되는 현상을 물리적인 작용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인간의 숭고한 측면들조차 고도로 발달한 물질의 우연적인 산물이라 주장했다. 이 우월한 특징들의 총체를 영혼이라 정의한 그들은 영혼을 하나의 실체로 보기보다 물질 즉 신체의 부수적인 특징으로 보았다. 모든 것의 원리를 원자로 본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세기)는 원자와 공간 이외에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아서 영혼도 원자들의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다만 가장 운동이 민활한 화성 원자 또는 영성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디든 관통하고 다른 원자들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죽은 뒤에는 영혼을 구성했던 원자도 소멸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영혼의 불멸성을 거부했다. 
  영혼의 개념을 활발히 논의한 분야는 육체와 영혼이 어떻게 일원화되어 한 인간을 구성하게 되는지를 연구하는 인간학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이 철학적으로 체계화되고, 영혼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논의의 토대가 마련되는 것은 플라톤(기원전 428~기원전 348)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에 이르러서이다. 플라톤은 존재의 세계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누고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을 체계화했다. 또한 영혼이 육체와 더불어 생기고 육체와 더불어 사라지는 부수적인 물질에 불과하다고 보는 자연철학자들의 견해를 통렬히 반박하고 영혼을 독립적인 실체로 확립시켰다. 그리고 자연의 물질적인 현상만으로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정신적인 영역에서 그것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정신적인 것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우위, 곧 영혼의 육체에 대한 우위가 확립되었다.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는 이후 기독교의 인간관과 결합되어 서구의 인간관에서 보편적 요소로 자리 잡는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영혼을 뜻하는 ‘두샤 душа[dusha]’는 러시아인의 가치관, 세계관, 민족성 등 러시아인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주는 문화 키워드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두샤’는 종교적 측면에서의 ‘영혼’의 의미와 인간의 감정, 심리, 성격 등 ‘내면세계’, 그리고 지성의 측면을 보다 활성화하는 ‘정신’의 의미까지 모두 포괄하는 단어이다. ‘두샤’는 ‘호흡, 냄새’를 뜻하던 고대 슬라브어 дъхъ로부터 기원하며 인도유럽어 어근 *dheus-/*dhus-(‘불꽃, 먼지, 연기, 호흡 등이 퍼지다, 흩어지다’)과 닿아있다(스테파노프, <러시아 문화 사전> 참조). 현대 러시아어에서 공기나 호흡과 관련된 단어들(дух, воздух, дыхание 등)에도 이 어근의 흔적이 남아있다.
  ‘두샤’처럼 ‘호흡’과 어원적 연관성이 있는 단어들이 ‘영혼’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경우는 여타 언어들에서도 나타난다. ‘영혼’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시케 ψυχή’, 라틴어 ‘아니마 anĭma’와 이로부터 연원한 프랑스어 ‘암므 âme’, 그리고 히브리어 ‘네페시’ 등도 모두 ‘호흡’, ‘숨’과 어원적 연관성을 지니는 것들이다. 이처럼 많은 언어에서 ‘영혼’과 ‘호흡’의 의미적 관련성이 나타나는 것은 고대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살아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무엇으로 구분하는지, 인간 존재의 근본은 무엇인지에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살아있는 존재는 가지지만 죽음의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서 ‘숨’에 주목하였다. 죽음을 의미하는 한국어의 ‘숨을 거두다’나 러시아어의 ‘마지막 숨을 내보내다(испустить последний вздох)’와 같은 표현은 바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지표로서 숨의 속성을 보여준다. 
  성경의 창세기에서도 ‘숨’은 인간 창조의 마지막 단계를 장식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러시아어로는 ‘살아있는 두샤 живая душа’)이 되니라.”(『구약성서』, <창세기 2장 7절>). 기독교적 교리 안에서 이렇게 신의 입김이 불어넣어짐으로써 ‘살아있는 두샤’가 된 인간에게 ‘두샤’는 단순히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본질이자, 인간의 육체와 분리 가능한 영적 존재로 사유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육체와 분리되어 사유되기 시작한 영혼은 육체가 사라져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태동하게 된다. ‘영혼 불멸설’은 기독교에 의해 정립된 것이지만 영혼에 대한 사유는 기독교 이전부터 대다수의 종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령 애니미즘에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살아있으며 살아있는 존재는 영혼을 가진다고 보는데 바로 애니미즘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종교가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에드워드 타일러, 『원시문화』)도 있다. 이렇게 가시적 사물 안에 존재하는 비가시적 존재의 상정은 인간의 육체 안에 있지만 인간의 육체를 일시적으로 또는 영원히 떠날 수 있는 자아 분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인간의 그림자, 혹은 거울이나 물에 비친 인간의 모습에서 영혼을 연상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고방식도 영혼을 또 하나의 자아로 파악하려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 슬라브 신화에서도 영혼이 분열된 자아의 형상과 밀접히 관련된다. 영혼은 인간의 육체 안에 거하며 평생 동안 인간을 따라다니는 일종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이다.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인간처럼 추위, 더위, 고통, 기쁨을 느끼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잠을 자거나 기절했을 때 잠시 인간을 떠나기도 하다가 죽음의 순간에 새, 나비, 바람의 형상이 되어 영원히 인간의 몸을 떠나게 된다.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의 영혼은 비둘기가 되고 악하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의 영혼은 까마귀나 뻐꾹새가 된다. 부활절에 새들을 위해 무덤에 계란을 두는 슬라브인들의 풍습도 이러한 신화적 상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마슬로바, <슬라브 신화 사전> 참조).
  이처럼 예로부터 또 하나의 자아로 생각되던 영혼 ‘두샤’는 점차 인간의 내면세계 전체와 관련된 특수한 기관이자 내적 자아 자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의미 확대가 이루어진다. 많은 문화권에서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은 심장으로 간주되지만 러시아에서는 심장과 함께 ‘두샤’도 감정과 관련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며 특히 이것은 더 심오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인 감정 기관으로 여겨진다. 또한 ‘두샤’는 지적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다. 지적 활동의 주관소인 머리(이성)가 분석적, 논리적 지식을 담당한다면 ‘두샤’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지적 활동을 주관한다고 여겨진다. 이로써 이것은 감정이 일어나는 곳(‘심장’)이나 지적 활동과 관계된 곳(‘머리’)으로서의 신체의 일정 부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총체에서 육체를 뺀 나머지 전체를 가리키는 기능까지 수행하게 된다. 또한 ‘두샤’는 사람마다 하나씩 지니는 고유한 것으로서 각각의 개인은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두샤’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되는 까닭에 이제 이것은 인간 자체를 대표하는 기능까지 획득하게 된다. 이는 사람 수를 셀 때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문화권에서 ‘머리’가 그 기준이 되는 것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예로부터 ‘두샤’가 그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per capita가 한국어로는 ‘두(頭)당’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러시아어로는 ‘두샤 당(на душу населения)’이 되는 것이다(시멜료프, 『러시아어와 언어외적 실제』 참조). 
  ‘두샤’의 이러한 의미화는 정교 교리 안에서 육과 영, 혹은 육체와 정신 중 비물질적인 것, 정신적 영적 가치를 더 중요시하게 된 러시아인들의 ‘인간관’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기능은 몸, 심장, 머리 등과 같은 인간의 물질적 부분이 아니라 ‘두샤’라는 비물질적 부분이 담당하는 기능인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인이 인간을 개념화하는 방식을 담고 있는 영혼 ‘두샤’는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 속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러시아 문화의 핵심적 토포스로서 자리매김 되어왔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영혼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파이돈』(기원전 383)에서 플라톤은 몸을 영혼의 도구나 매개물이 아니라 영혼을 방해하고 심지어 오염시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생각은 육체와 결합된 상태를 “영혼이 육체의 방해를 받아 술에 취한 것처럼 자신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운 상태”, “육체라는 감옥에 갇히거나” 또는 “무덤에 묻혀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 “영혼이 육체에 못 박힌 것과 같은 상태”로 비유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몸을 갖고 있고, 우리의 영혼이 그런 결함 있는 것과 한데 엉겨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열망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플라톤, 『파이돈』, 기원전 383)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철학의 목적을 도출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와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으며 다른 세계를 지향한다. 영혼은 지상의 현실보다 먼저 존재했기 때문에 지상의 몰락 과정과 무관하며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와 닿아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의 감옥인 몸의 속박을 풀고 해방의 순간인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의 목적이다. 이처럼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주장한 플라톤의 인간관은 이후 기독교의 인간관과 결합되어 유럽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천상의 존재인 영혼과 동물적 방식인 육체, 매우 대립적인 이 둘 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집합체, 일종의 기괴한 생명체이다. 육체로 볼 때 다른 짐승들을 능가하기는커녕 우리 인간은 모든 능력에서 그들보다 열등함이 확실하다. 그러나 영혼에 의해 우리는 신성에 소속될 수 있고 천사보다 높이 올라가 신과 하나가 될 수도 있다.”(에라스무스, 『기독교도 군인의 단검』, 1503) 

“나는 손이나 발, 머리가 없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그러나 사유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돌이거나 짐승일 것이다.”(파스칼, 『팡세』, 1669) 

“영혼은 육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가령 육체가 불안에 떨 때 달아나기를 거부하는 것. 육체가 화를 낼 때 폭력을 거부하는 것, 육체가 목마를 때 마시기를 거부하는 것, 육체가 욕망을 가질 때 그것을 충족시키기를 거부하는 것, 육체가 공포에 떨어도 단념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거부들이 인간의 행동이다. 전적인 거부가 신성이다. 이 아름다운 단어는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행위를 지시한다.” (알랭, 『정의들』, 1933) 

  플라톤의 인간관은 『파이드로스』(기원전 349)에 나오는 두 마리 말이 끄는 수레와 수레꾼의 비유에서 더 체계적으로 나타난다. 수레꾼에 비유된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를 보기 위해 신들이 다니는 길로 수레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한 말이 고집스러워 다른 말과 수레꾼을 넘어뜨리자 결국 지상으로 넘어오게 된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여 인간으로 탄생했다. 추락한 영혼은 가장 무거운 요소인 흙으로 만들어진 신체의 감옥에 갇혀 창살을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다시 영혼의 날개를 달고 천상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신체를 거치며 떠돌아다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플라톤이 이렇게 육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이유는 육체로 인해 발생하는 지나친 욕망을 경계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은 영혼의 불멸성, 육체를 감옥에 비유하는 부정적인 시각, 육체적 욕망인 성을 죄악시하여 금욕을 강조하는 기독교 교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혼과 몸의 이원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곧 ‘영혼’으로 보는 사고는 기독교에서 본격화되었다. 영혼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페쉬(nèphèsh) 또한 호흡하다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구약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으며, 인간은 하느님의 호흡으로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다.(『구약성서』, <창세기>) 인간을 곧 영혼으로 보는 기독교의 관점은 인간을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합성물로 보지 않고 몸도 곧 영혼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모든 몸은 풀과 같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이사야 서>)에서 보듯이 기독교는 육체를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몸도 하느님을 갈망한다.”(<시편>)라고 말함으로써 육체를 물질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시성을 벗어나 인간 존재의 본질로 승화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지상의 삶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오직 육체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려 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영혼에 따른 삶은 곧 하느님의 영혼과 전능함이 구현되는 새로운 미래를 소망하는 삶으로서, 그 때 인간의 육체는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자연적인 몸’이 아닌 ‘영적인 몸’이 된다.(<고린도 전서>)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영혼을 “이성을 소유하며 육체를 다스리는 일에 적합한 실체”로, 인간을 “죽음을 겪는 지상의 육체를 사용하는 이성적인 영혼”(『가톨릭교회의 관습과 마니교도의 관습』)으로 정의하고, 영혼을 말을 탄 기수에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를 지배하고 그것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전혀 다른 실체인 육체와 영혼은 하나로 결합하여 작용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본질적으로 존재에 적합한 통합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신앙뿐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것은 아담의 육체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와 영혼은 처음부터 함께 인간을 이루었으며 육체 또한 인간 본성의 일부분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영혼의 본성과 기원』) 이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숨 쉬게 하는 육체, 영혼을 숨 쉬게 하는 신의 관념, 그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영혼을 구분하여, 내부로부터 육체를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질서와 보존의 힘인 영혼이 하느님의 원리인 사랑 안에서 육체와 통합된다는 결론을 끌어낸다.(『신국론』, 427, 레이, 『프랑스어 문화사전』 참조) 

“당신의 영혼의 영혼, 그것은 신앙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레이, 『프랑스어 문화사전』에서 재인용)

  영혼의 근대적 개념은 인간을 개별적인 자아로 만들어주는 불멸의 존재나 능력이 실재한다는 믿음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영혼을 생명의 원리로 보는 철학적 전통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데카르트(1596-1650)에 이르러서이다. 데카르트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계승하여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고 영혼을 이성과 의지로 이분하지만, 정신을 생명과 분리하고 생명의 근거를 심장의 열에서 찾음으로써 영혼에 대한 종교적 해석을 거부한다.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자아를 탐구한 끝에 데카르트가 도달한 결론은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명증이다. 의지와 판단, 감정 등 의식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자아의 본질은 사유이며, 인간은 사유의 자율성에 의해 “그 자체로 참된 존재자”가 된다. 여기서 ‘인간의 독특하게 우월한 형상’으로 묘사되는 영혼은 사유하는 실체인 영혼 전체, 곧 정신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인간을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로 규정함으로써 신을 배제하고 육체와 영혼을,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분리시켰다. 그 결과 한편에는 세계 없는 의식 주체가, 다른 한편에는 사유 능력이 없는 물질세계만이 남게 되었다. (데카르트, 『방법서설』, 1637) 데카르트 이후 인간학은 이 근본적인 이원론을 해결하고 영혼과 육체를 일원화하여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론적 모색들로 이루어진다.
  이원론적 전통과 달리 영혼을 육체와 분리된 독립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육체에 형식을 부여하여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영혼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유기적 통일체로 보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비롯된다.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이 불가분의 관계로 융합되어 있다고 믿었다. 

“복합적 실체란 생명을 부여받은 자연물을 말하며 이 생명의 원리가 영혼-프시케라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기원전 330)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를 부인하고 오히려 육체와의 결합은 영혼을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오직 육체와의 결합을 통해서만 영혼은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혼과 육체는 질료와 형상처럼 두 개의 불완전한 실체로서 함께 협동해서 비로소 인간이라는 단일한 완전 실체를 형성한다.

“영혼은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자체가 육체의 일종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옳게 믿은 것이었다. 그것은 육체가 아니지만 육체와 관련된 어떤 것이며, 따라서 육체에 즉 어떤 특정한 종류의 육체에 속한다. […]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분명한 것은, 영혼은 어떤 것으로 될 ‘가능태’를 가진 것의 일종의 현실태 또는 형식이다.”(『영혼론』, 기원전 330)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을 수용하여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유대적 인간관을 완성시키는 사람은 중세 최대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도입하는 동시에 그것을 발전시켰다. 13세기, 영혼과 육체의 통일성에 대한 논쟁에서 쟁점이 된 것은 ‘어떤 종류의 통일성이 인간에게 속하는가?’였다. 이 논쟁에서 아퀴나스는 기존의 입장들을 극복하기 위해 ‘지성적 영혼’의 개념을 정립했다. 지성적 영혼이란 “육체의 형상을 띠고 있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경계, 비물질적 실체”(『이교도들의 오류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에 관한 책』, 1256)로 정의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를 필요로 하거나 사용하기만 하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생물이고 자연적인 존재다. 인간의 모든 작용은 지성적 영혼과 육체가 형상-질료로서 결합하여 일원화된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사유 작용의 주체가 될 수도 없고 그 결과 윤리적, 신앙적 주체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지성적 영혼의 개념은 인간이 오로지 육체를 통해서만 본질을 구현할 수 있다는, 근대 이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간관의 토대를 이룬다. 

“인간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영혼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인간의 조건은 놀랍게도 항상 육체적인 인간이다.”(몽테뉴, 『에세』, 1580)

  17세기, 데카르트의 기계적 인간관은 영혼의 개념과 기독교적 의미를 결정적으로 분리시킨다. 생물체도 본질적으로 시계 장치와 다르지 않은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자동기계라고 본 데카르트 이후, 신체 기관의 운동과 작용을 화학적, 물리적 속성들과 결부시키며 영혼의 개념을 부정하는 유물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신학자들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으며 물의를 일으켰던 퐁트넬(1657-1757)의 저작 『영혼의 자유』(1699)는 그러한 변화를 확실히 보여준다. 『영혼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은 뇌이며 뇌에 의지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영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뇌에 있다고 여겨지는 균형의 문제에 기인한다. 뇌의 성향 중 하나가 다른 성향을 이기지 못하면 영혼은 결코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할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한 선택을 결정하는 영혼이 갖는 힘은 절대적으로 뇌의 성향(체액)에 속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은 결정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하며 영혼에게 선악을 결정하게 하는 것은 뇌의 성향이다.”(퐁트넬, 『영혼의 자유』, 1699)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사상을 더욱 밀고가, “인간의 신체도 동물과 같이[…]자극에 따라 운동을 하는 살아 움직이는 자동기계”라고 규정한 의사 라메트리(1709-1751)의 영혼 개념은 더욱 극단적이다. 데카르트가 인체를 기계에 비유하면서도 정신의 사유 작용은 별도로 제외한 반면, 라메트리는 사유조차 육체의 작용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체 해부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라메트리는 실제 경험과 관찰만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해 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영혼의 정체를 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 기계론』(1747)에서 그는 실제로 영혼이 뇌와 신경 조직의 각 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영혼은 물질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심지어 물질조차도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유물론적 일원론은 현대의 과학적 성과에 힘입어 인간 생명과 본질 그리고 외부세계를 과학적으로 규정하고자 한 오귀스트 콩트(1798-1857)의 실증주의로 이어진다. 실증주의는 검증 가능한 자연 과학적 사실들을 근거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상이다. 인간에 대해서도 신경구조가 더 발달하고 뇌세포가 좀 더 복잡할 뿐 다른 고등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영혼 개념을 ‘뇌 기능의 도식’ 다시 말해 정신심리학적 분석으로 대치했다. 콩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열 개의 정감적인 동인들, 다섯 개의 지성적인 기능들, 그리고 세 가지의 실천적인 특성들”(『실증주의 강의』, 1830)로 나뉜다. 이는 곧 인간의 본성이 영혼 혹은 인간의 고차원적인 육체적 기능(신경과 두뇌 활동)의 체계적 종합이고, 물리적 생명현상의 한 결과물임을 의미한다. 유물론적 인간관은 영혼이 감각적인 영역을 벗어나면 존재하지 않는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 즉 영혼이 몸을 벗어나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니체는 철학이 영혼의 매력에서 해방되기 쉽지 않았으나 그 해방으로 받은 보상은 그보다 더 흥미롭고 신비로운 인간의 육체성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육체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나는 육체이고 영혼이라고 어린아이는 말한다. 왜 사람들은 이 아이들처럼 말하지 않을까? 그러나 의식과 인식에 눈뜬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나는 온전히 육체이고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은 육체의 한 부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실증주의적 사고는 19세기 후반 자연주의라 불리는 문학사조의 출현에 영향을 미쳤다. “정신해부학 개론”의 성격을 띠고 “인간과 자연의 진실을 그리는 것”을 소설의 목적으로 삼은 자연주의 소설의 대가 에밀 졸라는 자신의 창작 작업을 “외과 의사가 시체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테레즈 라캥』에서 나는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려고 했다. 내가 택한 인물들은 신경과 피에 의해서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자유의지가 결핍되고 인생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그들의 육체의 숙명성에 끌려가는 그러한 인물들이다.”(에밀 졸라, 『테레즈 라캥』의 <서문>, 1867)

현대 과학은 사랑, 심미, 종교적 체험 등 흔히 고차원의 정신적 삶이라 여겨지는 현상들을 점점 더 생리 작용이나 신진 대사로 환원시켜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추세이다. 인간의 영혼 자체를 부정하는 기계론적 사고와, 뇌 과학이나 생물학 분야에서 인간을 생화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 인간의 몸을 생리학자가 해부대에서 분석 연구할 수 있는 대상 그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대두된다. 생기론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견해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분명 육체적인 존재이지만, 육체를 매개로 하여 타인과 주변 세계로 상호관계의 장을 확장시키고 이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확립될 수 있는 인간은 결코 자연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 생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생명현상을 물리-화학적 현상으로 설명하는 실증주의적, 자연과학적 관점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비 질료적인, 혹은 본질적으로 지성과 다르지 않은 어떤 힘이 작용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이 비 질료적인 것을 영혼이라 명명했다.(『창조적 진화』, 1907) 

“모든 인간의 형상 안에서 지성은 질료를 자극하는 영혼의 노력을 통찰한다. 이 영혼은 무한히 부드럽고 영원히 움직이며 무게로부터 벗어난 그러한 영혼이다. 왜냐하면 영혼을 산출하는 것은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의 가벼움으로부터 영혼은 질료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어떤 것을 전달한다. 질료 안에서 질료를 초월하는 이러한 비 질료성, 이는 사람들이 선물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 『웃음』, 1899)

  한편 영혼을 의미하는 아니마-아니무스는 20세기 분석 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에 의해 인간의 내부에 있는 반(反) 성적인 요소를 가리키는 분석 심리학 용어로 널리 알려졌다. 융은 꿈을 분석하면서 남성 환자의 꿈에 특징적인 여성상이 자주 출현하는 것에 주목하여, 여성상의 원형이 남성의 보편적 무의식 내에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아니마로, 여성의 꿈에 나타나는 남성상의 원형을 아니무스(아니마의 남성형)로 명명했다. 인간은 사회에서 승인받기 위해 남자다움 또는 여자다움이라는 페르소나(‘가면’, ‘외적 인격’)를 갖고 살지만, 내적으로는 그 반대인 아니마(아니무스)의 작용에 의해 심리적 보상을 얻으려 한다는 융의 이론에서 영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영혼은 무의식과의 관계 또한 무의식적 내용의 인격화를 가리킨다. 영혼은 언제나 내부에 지상의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칼 구스타프 융, 『심리유형들』, 1921) 

  『영혼』(1997)의 저자 엘리 듀링은 “이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의 영혼을 믿지 않는다. 인간에 대해서 사유하는 계획 자체를, 영혼의 개념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 자체에 대해 이 시대는 경멸을 던지고 있다.”라고 선언했다. 이제 영혼에 대한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은 시효가 만료된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인들은 영혼을 ‘나’와 동일시한다. 이는 신학이나 철학과는 무관하게 ‘영혼’이란 어휘가, 특히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된 근대 이후 문학과 예술에서 감성, 서정성, 범신론적인 종교성, 물질적 가치에 대한 거부 등의 뉘앙스를 복합적으로 내포한 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데서 확인된다.

“영혼은 가슴에 있다.” (미슐레, 『민중』, 1846) 

“모든 것이 말한다....
귀 기울여 들으라. 바람이, 물결이, 불꽃이
나무가, 갈대가, 바위가, 모든 것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 
(빅토르 위고, <어둠의 입이 말하는 것>, 『명상』, 1856) 

“사유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진정한 승리이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862)

  20세기 서구 사회의 정신적, 윤리적 가치가 붕괴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은 영혼이라는 어휘와 개념이 의미와 가치를 잃어가는 현상에 대해 한탄하는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한다. 영혼에 관한 이론적 논의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서구의 뿌리 깊은 종교적 사유의 영향 하에 여전히 ‘정신’보다 인간 존재에 대해 더 포괄적이고 윤리적, 가치지향적인 이해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으로 남아 있다. 영혼은 여전히 육체로 상징되는 물질적 가치보다 우월한 정신적, 도적적 가치와 연관되며 인간의 초월성을 상상하게 하는 개념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 : 숨결이라는 이 낡은 명사에 의미를 부여할 것.” (발레리, 『내면일기』, 1943)

“이상과 도덕은 영혼이라 불리는 이 커다란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인간』, 1930) 

“오직 영혼에만 전 인류의 희망과 감정이 담겨있다.” (칼릴 지브란, 『영원한 지혜의 목소리』, 1963)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문화에서 ‘영혼’은 ‘운명’, ‘양심’ 등과 더불어 상당히 빈도 높게 나타나는 개념으로서 흔히 ‘러시아적’ 테마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러시아어 빈도 사전>(1977)에 따르면 ‘영혼(두샤)’의 빈도수는 백만 단어 당 378회(파생 형용사와 부사까지 포함하면 450회)로서 이는 다른 언어권의 상응하는 개념보다 훨씬 더 높은 빈도에 해당한다(베즈비츠카, <영혼과 정신> 참조).
  러시아에서 ‘두샤’로 표현되는 영혼은 항상 긍정적인 가치로 인식된다. 이는 지혜나 지성, 이성을 나타내는 ‘움 ум[um]’이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과 대비된다. ‘두샤’는 ‘순수함, 솔직함, 선량함’을 본질적 속성으로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어에 “영혼이 없는 사람”이란 표현이 있는데, 정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인 이상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성분인 영혼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표현이 뜻하는 바는 영혼의 긍정적 특성이 없는 사람, 다시 말해 ‘냉혹한 사람, 비정한 사람’인 것이다. 반면 ‘광기’의 러시아어 표현인 ‘베주미예 безумие[bezumie]’는 직역하자면 ‘움의 부재’가 되는데 ‘움’이 부재함은 때로는 하나하나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 열정을 부각시킴으로써 긍정적 평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내적 자아로서의 영혼은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는 내부 활동을 관장할 수도 있다. ‘(음식이나 술 등을) 속에서 안 받는다’는 의미의 러시아어 표현인 “영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와 같은 관용 표현이나, “영혼이 공기방울을 내보낸다(‘딸꾹질하다’)”, “영혼이 신과 담소를 나눈다(‘트림하다’)”와 같은 구어적 표현에는 영혼을 바라보는 민중의 재치가 담겨있다.
  러시아인들이 영혼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은 이것의 위치에 대한 생각에서 두드러진다. 러시아 민중들은 고대로부터 목젖 아래 어딘가를 이것의 전형적 위치로 생각하였다고 한다(달, <러시아어사전> 참조). 러시아어에 “영혼이 열어젖혀진 채(душа нараспашку)”란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열어젖혀진 채’란 표현은 셔츠의 목 부분을 채우지 않고 가슴을 드러낸 모습을 가리킨다. 목 쪽에 위치한 영혼을 열어젖힌 채 보여준다는 이 표현은 거리낌 없이 다 보여주는 사람, 솔직한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또한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задушить)의 어근도 바로 ‘두샤’인데 이 동사에는 영혼의 목 안쪽 위치에 대한 표상뿐만 아니라 영혼과 호흡의 밀접한 연관성까지 반영되어 있다. 영혼이 목에 위치한다는 민중적 인식은 20세기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의 작품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 내 목 좀 기저귀끈으로 꽁꽁 묶어 주오! 거기서 내 온 영혼이 흘러나오고 있소.”
“- 두바일로 놈의 목에서 영혼까지 추가로 제거해 버렸소! - 피유사가 말했다.
- 잘했네. 영혼은 바로 목에 있지 않은가! - 라고 말하다가 체푸르니는 생각이 났다. 
- 자네 왜 카데트 놈들이 우리를 목매달아 죽이는지 아는가? 바로 같은 이유야. 영혼을 밧줄로 태워 버리는 거지. 그래야 정말로 완전히 죽는다니까!” (플라토노프, 『체벤구르』, 1929)

  이처럼 러시아 민중들의 인식 속에서 영혼은 고유한 ‘자기’ 위치를 지니며 그 위치에 있을 때는 안정적이고 평온하지만 그 위치를 벗어나면 인간에게 심한 정서적 동요를 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생각은 심한 불안감, 초조함을 표현하는 “영혼이 제 자리에 있지 않다”(‘안절부절 못하다’)란 표현이나 극도의 두려움, 놀람을 나타내는 “영혼이 발꿈치로 도망갔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타인의 영혼은 알 수 없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말해주듯, 인간의 가장 고유하고 심오한 영혼을 타인이 이해하기란 결코 녹록치 않다. 그렇기에 이것을 타인에게 솔직히 보여주려 노력하는 것은 진정한 소통과 교감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다. 이로부터 ‘열린 영혼’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강한 지향이 나타난다. 영혼을 여는 것은 곧 자신의 내면세계를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영혼은 ‘프라브다(‘진실’)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제기된다. ‘열린 영혼’을 가지고 임하는 교제는 진정한 교감이 되며 이 안에서 진실이 꽃을 피우는 반면 진실을 감추고 양심을 속이는 행위는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프라브다’와 그 반대말 ‘크리브다’의 관계에 잘 반영되어 있다. 러시아어로 “영혼을 구부리다 кривить душу”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표현은 양심을 속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바로 이 ‘구부리다(кривить)’라는 단어로부터 진실의 반대, 곧 거짓을 뜻하는 ‘크리브다(кривда)’가 파생된 것이다. 이러한 개념화 과정은 ‘영혼’와 ‘진실’을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는 러시아인들의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자신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를 그대로 말하고 싶어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베즈비츠카, <러시아 문화 스크립트와 그것의 언어적 반영> 참조). 러시아 언어학자 샤투놉스키(1991)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생각하는 것, 아는 것을 말하는 과정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진리의 왜곡 과정보다 더 적은 노력을 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결코 세계의 어느 민족에게나 나타나는 보편적 경향은 아니다. 여타의 많은 문화권에서는 생각한 그대로를 말하는 솔직함보다, 이 솔직함이 초래할 수도 있는 부정적인 영향에 더 주목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러시아인들이, 솔직함이 초래할 수도 있는 부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는 두 가지 근본적 지향이 담겨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진실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함께 이 진실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다 내어 보이고 있음을 알리고 이를 토대로 진정한 소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이 ‘열린 영혼’을 높이 평가함은 진정한 교감, 소통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수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영혼을 쏟아내다(‘속마음을 털어놓다’)”, “영혼을 열다(‘마음을 열다’)”, “영혼으로 대화하다(‘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다’)”와 같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러한 솔직함이야말로 영혼이 열려지는 전제 조건이며 영혼이 열려져야만 진정한 교감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의 이러한 성향을 철학자 로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한다.

“‘마음에 따라 사는 삶’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겉치레적인 예의바름은 없지만 러시아인이 지니는 영혼의 개방성, 사람들과의 교제의 용이성, 교제의 순수성과 같은 특성을 만들어냈다.”(로스키, 『러시아인의 민족성』, 1957)

  이러한 측면에서 “드넓은 영혼”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높은 평가와 “드넓은 러시아적 영혼”에 대해 말하기를 즐기는 그들의 성향을 이해할 수 있다. ‘드넓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마음이 넓고 너그러운 사람이자 타인의 견해나 관점에 열려있는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러시아적인 ‘드넓은 영혼’은 종종 러시아인들의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하는 극한성, 최대주의와 같은 특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계산 없이, 
[...]
논쟁을 하려거든 용감하게,
용서를 하려거든 온 영혼을 다해,
주연을 열려거든 최대한 성대하게” (알렉세이 톨스토이, <사랑을 하려거든...>, 1854)

  영혼을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독특한 시각은 영혼을 민족적, 집단적, 공동체적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영혼은 종종 “다양한 삶의 조건들 하에서,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수세기에 걸쳐 싸여온 민족적 특성의 총합”(콜레소프, 『언어와 텍스트에 나타난 러시아적 멘탈리티』)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른바 “러시아적 영혼(русская душа)”이라는 표현은 러시아 문학, 철학, 문화 관련 연구에서 지금까지 수많이 반복되면서 거의 상투어로 자리매김된 표현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드넓은 러시아적 영혼’과 러시아적 광활한 공간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우리는 광활한 공간의 지리적 산물일 뿐이다”라는 차아다예프(1854)의 유명한 말에서도 잘 드러나 있듯이, 러시아의 드넓은 자연 환경이 러시아적 영혼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는 것이다. 특히 베르댜예프는 광활한 공간 속에서 드넓은 영혼을 품게 된 러시아인들이 이로 인해 부정적 속성도 가지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러시아의 이 거대한 공간은 외적 관점에서는 러시아 역사의 지정학적 요인이 되겠지만 좀 더 심오한 내적 관점에서는 러시아 운명의 내면적, 정신적 사실로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적 영혼의 지정학이다.
러시아인은 러시아의 땅, 러시아의 평야만큼이나 넓다. 러시아인에게는 유럽인처럼 자신의 에너지를 영혼의 좁은 공간에 집중시키는 협소함이 없다. 계산성, 시공간을 절약하는 정신, 문화의 집약성이 부재하다. 넓은 공간이 러시아인들의 영혼을 지배함으로써 수많은 러시아적 특성과 단점들도 태동하였다. 러시아적 게으름, 무사태평, 주도성의 부족, 덜 발달된 책임의식이 모두 이와 관련이 있다.” (베르댜예프, <러시아의 운명>, 1914~1917)

  러시아인들은 자신의 내적 자아이자 윤리적 이상이며 신과의 소통 통로인 영혼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며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이를 정화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러시아인들이 주로 찾은 곳이 바로 수도원이다. 1917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인들은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여 신과의 연결고리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수도원 순례를 즐겼다고 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조시마 장로는 수도원이 어떻게 러시아인의 영혼을 양성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신의 진리를 찾기 위해 수도원으로 오게 되고 수도원의 장로(수도사)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신의 진리에 다가갔음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젠콥스키, <러시아 정교의 정신> 참조). 
  수도원들의 중심에는 옵티나 푸스틴 수도원이 있었다. 영혼의 정화를 갈망했던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이 수도원을 찾았으며 그들 중에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도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1878년에 막내아들이 죽는 참담한 사건을 겪은 후 이 수도원을 찾았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훗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곳곳에서 나타나게 되며 특히 당시 이 수도원에 거하던 암브로시 장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의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인간의 오묘하고 복잡한 내면세계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어 “영혼의 변증법”(체르니솁스키가 1856년 『동시대인』에 게재된 논문에서 최초로 사용한 명칭)의 작가로 불리는 톨스토이도 이 수도원을 종종 찾곤 하였다.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기 전, 정처 없이 길을 떠난 톨스토이는 그 마지막 여행 중에 이 수도원에 들러 영혼의 안식을 구했다고 전해진다.

  이 수도원을 자주 찾은 러시아 작가 중에는 고골도 있다. 그는 영혼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이곳을 찾아 영혼의 정화와 평화를 간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골의 작품 중에는 ‘영혼(두샤)’를 제목으로 하는 『죽은 혼』이란 작품이 있다. 이 제목에 사용된 ‘두샤’는 중의적 표현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노’를 가리킨다. 종교적 함의가 들어있는 ‘죽은 혼’의 의미는, 몸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가리킴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저속하고 타락한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함께 제정 러시아 시대에 ‘두샤’란 말은 농노를 지시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도 주인공 치치코프가 죽은 농노를 매매하는 사기 행각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왜 ‘두샤’가 농노를 가리키게 되었는가라는 점이다. ‘두샤’와 ‘호흡, 숨’과의 어원적 연관성에 주목한다면 인간과 동물이 공유하는 특성으로서 호흡의 표상, 즉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동물처럼 ‘그냥 숨만 쉬는 존재’로서의 표상이 느껴진다. 이와는 반대로 ‘두샤’와 연상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방점이 간다면 비록 인간답지 못한 삶의 환경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영혼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긍정적 의미로도 해석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많은 문화권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신체기관으로서 ‘머리’가 기능하는 것과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이 기능을 ‘두샤’가 담당함으로써 이것이 ‘납세 의무자’로서의 인간의 머릿수, 곧 ‘농노’를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처럼 ‘두샤’로서의 영혼은 근현대 러시아의 일상생활과 언어, 그리고 러시아 사상가, 작가들의 저술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중심적 토포스였다. 이와 함께 영혼은 미술계에서도, 특히 초상화가 유행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훌륭한 초상화는 실제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인물의 영혼까지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널리 퍼져있던 생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초상화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친 화가가 바로 세로프이다. 현재 세로프의 초상화들은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대형 홀 두 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시인 브류소프는 세로프의 초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로프의 초상화들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고 얼굴 뒤에 감춰진 생각을 드러내 준다. [...] 세로프의 초상화들은 거의 항상 동시대인들에 대한 심판, 그것도 최후의 심판이 되었으며, 화가의 재능은 이 심판을 이의제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브류소프,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세로프>, 1911)

세로프의 초상화 중 가장 문제작으로 손꼽히는 것이 <미하일 모로조프 초상화>이다. 예술작품 수집으로 명망이 높았던 모로조프가의 일원이자 모스크바 대학의 강사였던 그의 모습을 거의 잔혹한 고리대금업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초상화를 보고 세로프가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의 약점까지도 전혀 감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세로프에게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말까지 돌았다고 한다(이진숙, 『러시아 미술사』 참조).
  한편, 영혼의 종교적 의미도 현대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여전히 활발히 나타나는 의미이다. 이것이 지니는 종교적 함의가 19세기와 현대 러시아에서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교 문화는 현대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교적 세계관 안에서 영혼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인간 생명의 원리로서 인간을 신과 연결시켜주는 본질로 사유된다. 이러한 신과의 연결고리로서의 영혼의 의미는 현대 사회에서도 그 위력을 상실하지 않고 있다. 
  또한 영혼을 윤리적 이상으로 간주하던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도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통제 불가능한 감정이 일어나는 ‘심장’이나 이성적, 논리적 정신 작용과 보다 관련이 있는 ‘머리(이성)’과는 달리 도덕성이라는 가치 기준에 따라 인간의 행동을 조율할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인들의 도덕적 가치 판단에 대한 집착, 선악의 구분에 대한 과도한 기울어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영혼을 도덕, 양심의 조율자로 바라보는 시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인들이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곳 또한 영혼이라는 생각까지 제기된다. 자유와 행복과 같은 지고의 가치는 결코 ‘심장’이나 ‘머리’로는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으며 오로지 영혼으로만 느낄 수 있는 가치로 생각되는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플라톤의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이 체계화된 이래로 인간 존재의 이원적 구성에 대한 생각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프랑스어에는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어휘로 ‘암므’와 ‘에스프리’가 있다. ‘암므’는 사후 육체와 분리되는 존재의 실체, 곧 ‘영혼’을 의미하는 반면 ‘에스프리’는 인간의 지적 인식 능력과 더 밀접하게 관련된다. 러시아어로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을 대표하는 단어는 ‘두샤’라 할 수 있다. ‘두샤’는 초월적 영적 존재의 의미에 머물지 않고 지적 능력을 포함하여 인간의 내면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기능까지 담고 있다. 
  프랑스어 ‘암므’와 ‘에스프리’ 그리고 러시아어 ‘두샤’는 모두 ‘숨’, ‘공기’와 어원적 연관성을 지닌다. 이는 비단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암므’의 기원인 라틴어 ‘아니마’, 그리스어 ‘프시케’, 히브리어 ‘네페시’ 등에서도 이러한 연관성이 드러난다. 많은 언어에서 ‘영혼’이 ‘숨’, ‘공기’와 의미적 관련성을 가지는 이유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죽을 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음을 알게 된 인간은 숨이 생명의 본질임을 깨닫게 되고 이로부터 숨이 인간 존재의 근본인 영혼의 의미로 개념이 발전하게 되었으리라 추정해 볼 수 있다.
  플라톤에 의해 정립된 영혼과 육체의 분리, 육체에 대한 영혼의 우위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에 의해 계승 발전되면서 영혼불멸설 사상으로 이어져 왔다. 영혼은 인간 생명의 원리이자 인간을 신과 연결시켜주는 초월적 본질로서 현세와 물질에 구속받는 육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해석을 거부한 데카르트는 영혼을 생명의 원리라고 보는 철학적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 데카르트에게 영혼은 사유하는 실체, 곧 정신이다.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 이후 영혼 개념에서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고 육체에 대립되는 인간 정신의 능력이 강조되면서 ‘암므’와 ‘에스프리’를 구분하거나 ‘에스프리’가 ‘암므’를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의 합리적, 실증적 사고의 전통은 인간의 비물질적 부분의 본질을 가리키는 어휘로 ‘에스프리’를 널리 퍼트렸고, ‘암므’의 영혼 개념은 주로 종교적, 철학적 성찰 안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으로 축소된 듯하다.
  반면 러시아에서 ‘두샤’로 대표되는 영혼 개념은 종교적 측면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세계의 본질이라는 의미까지 포함함으로써 종교적 철학적 사유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생활과도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발전한다. 영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으로서 진실한 인간관계의 필수적 요소로 이해되기도 한다. 영혼이 인간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러시아적 영혼’이라는 표현이 러시아인의 민족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는 현상도 영혼을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독특한 시각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프랑스나 러시아에서 영혼의 개념은 과거만큼 위력을 떨치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현대인의 피폐해진 심신을 치유하고 전통적인 종교적, 윤리적 가치를 일깨우는 것으로서 그 의의를 잃지 않고 있다. 영혼은 물질적인 가치보다 우월한 정신적, 도덕적 가치와 연관되며 인간의 초월성을 상상하게 하는 개념으로서 여전히 그 위상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연관 토포스 가톨릭; 도덕; 몸; 신앙; 욕망; 이성; 자유; 정교; 죽음;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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