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영화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영화
토포스명(프랑스) cinéma
토포스명(러시아) кино
정의 1. 재미와 감동을 추구할수록 영화는 더 번성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일정한 의미를 갖고 움직이는 대상을 촬영하여 영사기로 영사막에 재현하는 종합예술”(국립국어원, 『표준국어 대사전』)로 정의되는 영화는 프랑스어로 ‘씨네마 cinéma[sinema]’이다. 이 어휘는 필름에 연속으로 기록한 피사체를 광학적 방법으로 영사막에 투영함으로써 움직이는 영상을 보여주는 장치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을 뜻하기도 한다. 이 어휘는 그리스어 κίνημα(움직임)이 어원인 cinéma와 γράφειν(쓰기)가 어원인 graphe의 합성어로,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기계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1895)의 축약어이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현실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나라이다. 1824년에 조셉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사진을, 1832년에 조셉 플라토가 망막의 잔상현상을 이용해 페나키스티코프(Phénakisticope)라는 장치를, 1887년 에밀 레노가 최초의 만화영사기인 프락시노스코프(Praxinoscope)를, 그리고 1888년에는 에티엔 쥘 마레가 연속 필름을 이용해 최초의 동체사진기 크로노포토그라프(Chronotographe)를 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탄생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였다. 키네토스코프는 이전의 발명품들의 단점을 보완하여 현실의 움직임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 보여준 기계였다. 그러나 그 역시 ‘페니 아케이드’라는 좁은 칸에 들어가 동전을 넣고 작은 구멍으로 혼자 보는 단점이 있었다.(크리스티 톰슨 외, 『세계영화사, 영화의 발명에서 무성영화 시대까지』 참조). 이 점을 간파한 뤼미에르 형제는 에디슨의 성과에 ‘필름 영사’ 기능을 첨가한 시네마토그라프를 출시하고 작품을 상영함으로써 영화의 아버지로 공인받게 된다. 영화사가들 사이에 영화의 시조가 에디슨인지 뤼미에르 형제인지를 두고 의견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가 프랑스를 영화의 종주국의 위상에 올려놓은 것은 분명하다. 뤼미에르 형제는 영사막을 통한 영사 기능을 영화에 부여하여 영화를 혼자가 아니라 수백 명 이상이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만들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영화에 대중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이후 영화가 신생 장르의 한계를 넘어 중요한 현대 예술의 한 장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김호영, 『프랑스 영화의 이해』, 참조 및 인용) 
  최초의 영화는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중심가에 있는 ‘그랑 카페’에서 문화예술인 33명을 초대한 가운데 상연한 10편의 활동사진이다. 그 중 뤼미에르 사진건판공장 노동자들의 퇴근 모습을 촬영한 <뤼미에르 공장의 퇴근>은 50초 남짓 되는 활동사진으로 그 해 3월에 열린 파리 국립산업진흥회에서 최초로 영사되기도 했다. 
  영화의 대중성에 주목하고 영화를 자신의 마술극장의 상연 목록에 포함시키며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사람은 로베르 우댕 마술극장의 주인인 멜리에스였다. 뤼미에르의 최초의 영화 이후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나온 영화들은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멜리에스는 처음으로 영화에 허구적인 이야기를 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우연히 발견한 정지동작기법(촬영을 멈추고 피사체를 없앤 뒤 다시 촬영하는 기법을 말한다) 덕분이었는데, 이 기법을 이용하여 멜리에스는 1896년 9월에 <로베르 우댕 극장에서 사라진 귀부인>을 제작했다. 그리고1897년부터는 ‘재구성된 뉴스영화’를 만들어 유행시켰고, <푸른 수염>에서는 특정 샴페인 병을 등장시켜 간접 광고가 포함된 영화를 개척하기도 했다. 멜리에스의 대표작은 공상과학영화의 원조로 인정받는 <달나라 여행>(1902)이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영화는 현실의 단순 기록에서 벗어나 현실을 재구성하거나 현실보다 더 재미있는 허구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예술 장르가 되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영화산업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송기형, 「일차대전 직전까지의 프랑스 영화사 개관」 참조) 
  이 무렵에 영화는 신기한 활동사진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길이가 매우 짧고 내용도 단조로워서 지식인이나 문화예술인들은 영화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화는 주로 시장 장터에서 상영되는 서민층의 오락거리였다. 이런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영화산업과 영화작품이 전시되면서부터였다. 이 박람회에는 역대 최고의 관람객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각종 영사기와 필름, 초대형화면 등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박람회 기간 동안 150만 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을 정도로 영화는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이때부터 다른 구경거리들 사이에 영화를 끼어 넣는 장터의 상영관 외에 영화만 전문적으로 상용하는 전용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샤를 파테(1863~1957)와 레옹 고몽(1864~1946)의 영화사 창립은 프랑스 영화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같은 해(1896)에 설립된 파테 영화사와 고몽 영화사는 필름 생산, 카메라와 영사기 제조, 영화 제작, 극장 상영 등 영화산업 전 분야에 관여하면서 급성장했다. 1910년까지 두 영화사는 미국의 영화사들이 제작한 영화를 모두 합한 편수보다 두 배가 넘는 영화를 제작했고 전 세계에 지사를 둘 정도였다. 이 시기에 영화는 황당하고 소란스런 코미디 영화나 모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그것도 대부분 졸속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제작 현실에 맞서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계기가 된 것이 1908년, 재력가인 피에르 라피트가 파테 영화사의 투자자본과 자신의 재산을 합쳐 창립한 ‘예술영화사’였다. 라피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들에게 시나리오 집필을 의뢰하고 코메디 프랑세즈의 연극배우들을 데려와 영화에 출현시키는 등 영화의 예술성을 높이려 노력했다. 고전문학에 충실한 교양층을 겨냥하여 제작한 예술영화사의 첫 번째 작품은 당대 유명 문인과 예술가들이 총동원된 <기즈공의 암살>(1908)이었다. 이 작품은 역사적인 소재를 진지하게 다루었고, 회화적 아름다움을 갖춘 무대 미술과 카메라 효과를 통해 상당히 높은 예술적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김호영, 『프랑스 영화의 이해』, 송기형, 「일차대전 직전까지의 프랑스 영화사 개관」 참조) 
  이처럼 발전하고 있던 영화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이었다. 반면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의회가 독점 규제법을 승인함으로써 영화산업에서의 에디슨의 독점권이 해지되자 할리우드에 모여 있던 독립영화사들의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1910년대 후반부터 찰리 채플린과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등 미국 영화의 선두주자들이 프랑스 영화시장을 장악한다.
  그러나 곧이어 유럽 전역에서 이른바 ‘예술영화’의 황금시대가 열리면서 미국이 쥐고 있던 세계 영화시장의 패권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러시아에서는 쿨레쇼프에서 아이젠슈타인에 이르는 ‘몽타주’ 학파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는 이미지의 변형과 화면의 조형적 구성으로 의미를 전달하려는 표현주의 영화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도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영화라는 신생 장르에 관심을 보이고 진보적인 예술정신을 영화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920년대 프랑스의 실험영화들은 “순수한 예술적 욕망이 상업적 계산을 누르고 한 시대를 휩쓸었던 마지막 시기”이자, “서로 다른 예술 장르간의 상호텍스트적인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김호영, 『프랑스 영화의 이해』, 참조 및 인용) 
  이 시기에 프랑스가 미국 영화에 맞서 예술영화를 선보일 수 있었던 데는 ‘파리의 러시아 영화파’의 기여가 크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으로 대부분의 영화사의 운영 여건이 열악해졌다. 1919년 레닌이 영화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자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망명을 선택하고 파리의 몽트뢰이에 몰려들었다. 이 때 파리로 건너온 에리몰리에프 영화사와 1922년 설립된 알바트로스 영화사가 1차 세계대전 전후 침체되어있던 프랑스 시장에 영화를 공급했다. 처음에는 러시아 영화의 상영과 제작을 고집했지만 차차 프랑스적 취향을 가미한 영화를 제작하고 젊은 프랑스인 감독들을 영입했는데, 이들 가운데 이른바 ‘전위 1세대’라고 불리는 인상주의 영화파를 구성한 마르셀 레르비에와 르네 클레르 등이 포함되어 있다.(송기형, 「무성영화 시대 프랑스와 러시아의 영화 협력」 참조) 프랑스 영화의 명맥을 유지해준 파리의 러시아 영화파가 아니었다면 1920년대 프랑스 영화예술의 탄생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 예술영화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당시 초현실주의가 주장한, 전통과 기존 가치의 전복을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을 통해 영화작품에 충실히 반영하려 한 초현실주의 영화이다.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안달루시아의 개>(1928)와 <황금시대>(1930)가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은 봉건적인 가톨릭 가치관과 부르주아 사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는데, 특히 <황금시대>는 1980년대까지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치열한 실험정신을 지향하는 ‘전위 영화’들이다. 르네 클레르가 감독하고 멘 레이와 에릭 사티, 프랑시스 피카비아, 앙드레 브르통 등 쟁쟁한 예술가들이 제작에 참여한 <막간극>(1924)은 카메라의 이동과 렌즈의 조작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전위영화의 대표작이다. 그밖에도 극작가이자 시인인 앙토냉 아르토, 화가인 페르낭 레제와 마르셀 뒤샹 등이 자신의 영역을 넘어 독특한 실험영화들을 만들었다. 이 영화들은 난해하여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영화의 표현 영역을 넓히는 데 공헌한 점은 인정받는다. 세 번째로 화면의 미적 표현이나 조형적 구성에 치중했던 ‘인상주의’ 혹은 ‘탐미주의’ 영화가 있다. 대표적 감독인 아벨 강스는 특히 화려한 빛의 조화와 여러 가지 시각적 효과로 뛰어난 영상을 보여준 <나폴레옹>(1927)으로 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나폴레옹> 촬영 첫날 “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라는 거대한 문을 열고 예술의 궁전에 온전히 들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뱅상 피넬 외, 『프랑스 영화』 에서 재인용)고 선언했을 정도로 아벨 강스는 예술영화에 대한 강한 열정을 품었던 감독이다. 1920년 영화 동호인 모임인 ‘씨네 클럽’을 창시한 영화비평가 리치오토 카뉘도(1877~1923)는 영화를 ‘일곱 번째 예술’이라고 명명했다. 
  1920년대의 예술영화들은 유성영화의 등장(<재즈 싱어>, 1927)으로 1930년 이후, 영상의 아름다움보다 극적 전개와 절묘한 대사에 관객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급격히 퇴조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지금까지도 세계 영화의 판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는 데는 영화의 탄생지라는 사실 외에도, 전위 예술인들의 치열한 실험정신과 영상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탐구로 세계 영화를 주도했던 1920년대 프랑스 예술영화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서 프랑스는 1950년대에 작가주의라는 새로운 영화이론으로 영화의 혁신을 시도했고, 이어서 ‘누벨바그’라는 새로운 경향을 선보이며 영화의 현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키노 кино’로 불리는 영화라는 신생장르는 19세기 말에 뤼미에르가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에 ‘필름 영사’ 기능을 첨가한 시네마토그라프를 내놓고 작품을 상영하면서 첫 걸음을 내디딘다. 이후, 영화는 제작자, 배급자, 극장주에게는 이윤을 낳는 상품으로, 영화감독에게는 예술의 표현 수단으로, 관객들에게는 재미있는 오락거리로 기능해왔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에게는 지배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선전선동 수단이, 억압받는 피지배계급에게는 지배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고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했다. 
  영화를 처음 러시아에 도입한 사람들은 새로운 영화시장으로 러시아를 주목한 영화 산업가들과 장사꾼들이었다. 러시아 최초의 영화촬영은 1896년 5월 14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거행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여름 극장인 아쿠아리룸에서 공연된 연극 『페테르부르크의 알프레드 파샤』의 3막과 4막 사이에서,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가 러시아 최초로 영화를 상영했다. 며칠 뒤인 1896년 5월 19일에는 뤼미에르 사단이 네프스키 프로스펙트 46번 가에 러시아 최초의 영화관을 개장하였다. 또한 그 달의 마지막 날에 모스크바 에르미타쥐 미술관에서 ‘에디슨 키네토스코프’가 첫 선을 보였다. 뤼미에르가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 지하에서 자신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처음으로 상영한지 다섯 달 후의 일이었다. 
  영화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신기한 볼거리였고, 영화업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돈벌이 수단이었다. 1896년 6월 22일 볼가 강 근처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사람들은 50코페이카를 내고 영화 <시골 역에 도착한 기차>를 관람했다. 뤼미에르 순회 상영단은 시네마토그라프의 성공에 힘입어 모스크바에 6개의 회사를 설립하였고, 1897년 3월부터는 러시아 각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스스로 오락거리를 만들어 즐길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영화는 매우 중요한 볼거리였다. 비슷한 발명품들이 늘어나면서 위기감을 느낀 뤼미에르 형제는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의 경관과 프랑스의 풍경을 담은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니콜라이 2세가 영화광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사진’인 영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1899년에 뤼미에르 영화사는 러시아에서 퇴각해 파리로 돌아갔다. 
  영화산업의 전망을 감지한 최초의 흥행사는 ‘구츠만’이었다. 그는 1903년 모스크바 중심가에 두 개의 ‘전기극장’을 개관했다. 이후 수많은 새로운 극장들이 생겨나면서 영화산업은 번창하기 시작한다. 1904년에서 1906년까지는 러시아에서 영화의 대중적 인기가 폭발했던 시기이다. 1907년에 고몽 영화사는 러시아 전역을 광범위하게 촬영하여 다음 4편의 필름을 만들었다. <회기 중인 제3차 두마>, <차르스코예 셀로에서의 황족의 군대사열>, <동궁 광장에서의 군대사열>, <키예프에서의 장엄한 순례자 행렬>. 이 작품들은 광범위한 배급을 목적으로 러시아에서 만든 최초의 영화들이다. 
  


  러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사진가였던 알렉산더 드란코프가 1907년에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였다. 드란코프가 최초로 만든 영화 <돈 강의 카자크인들>은 파테 영화사가 제작, 보급하였지만, 1908년 2월부터 드란코프의 영화사는 17편의 영화를 만들어 파테 영화사 등 경쟁사를 앞서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법대 재학 중 파테 영화사의 지사에 입사하여 1911년에 파테 영화사의 지사장이 된 예르몰리예프는 1913년 예르몰리예프 영화사를 설립한다. 1910년대 초반에 여러 러시아 제작자들이 군소 영화사를 세우고 영화상영도 확대되면서 영화는 더욱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다. 당시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들도 열렬한 영화팬인 동시에 유행에 민감한 관객이었다고 한다. 
  1914년 7월 1일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외국의 많은 배급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틈을 타 러시아 국내 영화사들이 새로 설립되면서 1916년경에는 그 수가 30여개에 달할 정도로 러시아 영화산업은 성장을 계속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은 예브게니 바우어와 야코프 프로타자노프였다. 바우어는 1912년 세트 디자이너로 영화에 입문하여,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화가가 변심한 발레리나를 교살하는 내용의 <죽어가는 백조>(1917)를 남겼다. 예르몰리예프 영화사에서 일했던 프로타자노프는 푸시킨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스페이드의 영화>(1915), 톨스토이의 원작을 영화화한 <세르기우스 신부>(1917~1918)를 제작했다. 이 작품들에는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이반 모주힌이 출연하였다. 이후 모주힌은 프랑스로 망명하여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영화배우로 자리 잡았다. 프로타자노프는 파리에서의 짧은 망명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20년대 대표적인 영화감독이 된다. 
  1913년경에 형성되어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확립된 러시아 영화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11년부터 파테와 고몽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들이 러시아에서 사라지면서 러시아 영화는 이탈리아와 덴마크의 멜로드라마의 영향을 받아 심리극이 주류의 위치를 점하였다. 
  둘째, 1914~1916년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영향으로 러시아 감독들은 내면을 느리게 묘사하는 연출방식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이 영화 전문지를 통해 국가적인 미학적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이 방식은 예르몰리예프 스튜디오에서 팜므 파탈, 희생적인 여인, 신경증적인 남자 등과 같은 전형화 된 인물, 그리고 사색에 빠진 인물을 담은 정적이고 회화적인 장면과 같은 전형화 된 연출방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셋째, 이러한 심리극들은 할리우드 영화와 달리 ‘해피엔딩’보다 비극적인 결말을 선호하였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 관객의 정서와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넷째, 푸시킨과 톨스토이 같은 대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가들의 문학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는 티에만-라인하르트사를 위해 자신의 희곡 『안피사』(1910)를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이것을 1912년 프로타자노프가 영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존코프 영화사는 표도르 솔로구프, 알렉산더 쿠프린과 같은 작가들과 계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영화 산업은 잠시 정체기에 접어든다. 이와 함께 그 동안 발전해온 영화양식들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새로운 영화양식들이 등장하게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930~1940년대 프랑스 영화를 주도한 것은 ‘시적 현실주의’를 표방한 작품들이었다. 이 영화들은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을 반영하려는 현실주의적 의지와 서정적인 대사 및 영상을 통해 몽환적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시적 시도를 양립시키려 했다. 자크 프레베르, 앙리 장송, 샤를 스파크와 같은 시나리오 작가들과 장 가뱅, 루이 주베, 미셸 시몽, 미셸 모르강 같은 배우들을 탄생시킨 시적 현실주의 영화들이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 작품들은 거리를 주 무대로 서민의 고달픈 삶과 부랑자, 탈영병, 창녀 등 주변부 사람들의 인생역정을 보여주려 한 독일 거리영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거리 영화와 달리 점차 서민의 거리를 영롱한 불빛과 안개를 동원해 서정미 넘치는 공간으로 장식함으로써 아름다운 시적 정서가 비참한 현실을 압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장 비고, 마르셀 카르네, 쥘리앙 뒤비비에, 장 르누아르를 들 수 있다. 
  장 비고의 <라탈랑트>(1934)는 센 강의 어느 뱃사공 부부의 단편적인 일상들을 사실적인 동시에 환상적이고 시적인 영상으로 표현한 시적 현실주의의 효시로 여겨진다. 시골 중학교 기숙사 학생들의 반란을 44분 안에 담아낸 <품행제로>(1933)의 사실적 묘사와 충동적 감정이 뒤섞인 충격적인 화면은 당시 파문을 일으켜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주변인들의 소외된 삶에 대한 세심하고 애정 어린 시선과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정제된 서정적인 대사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마르셀 카르네의 작품들(<안개 낀 부두>(1938), <북호텔>(1939), <천국의 아이들>(1943) 등)은 시적 현실주의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인들에게 프랑스 영화를 각인시켰다. 또한 예리한 사회비판 의식을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디프 포커스’와 같은 화면기법을 개발한 장 르누아르 감독은 <랑주 씨의 범죄>(1935), <위대한 환상>(1937), <게임의 규칙>(1939) 등을 통해 프랑스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예술가들 중 하나로 남았다. 

“영화예술은 관객들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장 르누아르, 1894~1979)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또 한 사람의 영화감독은 20세기 전반 프랑스 예술을 대표하는 전방위 예술가 장 콕토이다. <시인의 피>(1930), <미녀와 야수>(1946). <오르페의 유언>(1960) 같은 작품을 통해 콕토는 기존의 영화제작 관행을 무시하고 뜻이 맞는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함께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일구었다. 콕토는 “현실과 꿈, 죽음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이미지와 언어에 대한 치열한 실험”(김호영, 『프랑스 영화의 이해』, 참조 및 인용)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를 일종의 새로운 글쓰기로 보았다. 

“영화는 잉크를 대신하여 빛으로 쓰는 현대의 글쓰기이다.” (장 콕토, 1889~1963)

  프랑스 영화의 제 2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적 현실주의 영화들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시적 현실주의 영화는 사회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비참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 점점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상징적인 수사적 표현에만 치우침으로써 오히려 현실 도피적인 인상을 주게 된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 영화계의 변화를 주도한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 주창된 작가주의 이론이다. 작가주의라는 용어는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1954)이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 트뤼포는 이 글에서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 프랑스 영화를 비판했다. 당시에는 과도한 제작비를 들여 서투르거나 과장된 배우들의 연기, 인위적인 대사들과 장식들, 판에 박힌 전개와 영상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트뤼포는 촬영대본보다 문학 작품의 의미를, 원래 각본보다 각색을, 현지 촬영보다 스튜디오-세트 제작을, 그리고 한 사람의 작가-감독보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을 선호하는 당시의 영화제작 관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영화의 전체 제작과정을 지휘하고 책임질 수 있는 한 사람의 작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그 작가에 의한 작가영화만이 진정한 예술 영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작가의 역할은 감독이 맡을 것을 주장했다.(프랑수아 트뤼포,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 1954) 
  작가주의 이론은 프랑스 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세계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트뤼포를 비롯하여 클로드 샤브롤, 자크 리베트, 장-뤽 고다르와 같은 신예 감독 겸 영화비평가들은 당시 비주류로 치부되던 알프레도 히치콕(1899~1980), 존 포드(1894~1973) 같은 영미 감독이나 장 르누아르, 장 비고, 마르셀 파뇰(1895~1974, 동시 녹음을 선호하며 서민들의 일상을 희극적 요소와 냉정한 시선을 뒤섞어 사실적으로 묘사한 감독) 같은 프랑스 감독들을 발굴하거나 새롭게 조명하여 작가주의 감독의 모델로 삼았다. 
  작가주의 이론이 영화사에서 갖는 의의는 감독을 영화라는 장르의 주도적 존재로 확립시킨 점, 영화의 의미는 만들어진 작품보다 제작과정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점, 대중적인 영화와 지적 영화의 결합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영화를 자본과 시스템의 원리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함으로써 단지 대중적인 문화상품이 아닌 치열한 예술적 작업의 산물로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김호영, 『프랑스 영화의 이해』 참조) 
  이들 작가주의 감독들은 ‘누벨바그’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이 명칭은 잡지 『렉스프레스』에서 시나리오 작가인 프랑수아 지루가 작가주의 감독들을 묶어 ‘누벨바그(새로운 물결)’라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다.(뱅상 피넬 외, 『프랑스 영화』 참조) 프랑스 영화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누벨바그의 시기는 대체로 1959부터 1965년까지이다. 이론적 토대가 되어준 작가주의, 젊은 영화인들이 자유롭게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1940년대 말에 설립된 국립 예술 전용극장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누벨바그를 탄생시킨 주요 요인들이다. 한편 세트를 거부하고 거리로 나가 영화를 찍으려했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운동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으며, 당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실존주의 철학이 주장한, ‘부조리한 세상에 부조리한 방식으로 맞서는’ 현대인의 운명은 누벨바그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들은 욕망을 속이지 않고 기존 질서와 도덕에 모순된 행동을 감행하며 인생을 판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 누벨바그 영화들은 기존의 영화를 지배해온 수많은 관습과 규범에 반기를 들고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영화 창작기법의 타당성과 유효성을 입증해보였다. 
  최초의 누벨바그 작품은 클로드 샤브롤의 <미남 세르주>(1958)이다. 샤브롤은 현지 촬영과 저예산 제작을 추구하며 사회적 비판의식을 견지했다. 다음으로 트뤼포가 자신의 비평 이론을 그대로 적용시켜 만든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1959)는 1959년 칸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누벨바그를 널리 알렸다. 그러나 누벨바그의 대표 감독은 장-뤽 고다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특히 그의 <네 멋대로 해라>(1960)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과 기존질서의 전복을 상징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의 영화를 ‘고전영화’, 이후의 영화를 ‘현대영화’로 구분하게 만든 <네 멋대로 해라>는 누벨바그의 특징인 작가주의 정신과 장르 변형 기법을 실현해보였다. 그리고 ‘소격효과’라는 새로운 영화 기법을 제시했는데,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소격효과’의 취지는 의도적으로 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과 동일시를 차단하는 것이다. 의미망을 짜지 않고 되도록 편집을 피하여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영화를 통한 이데올로기 주입 현상을 거부하고 순응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목표였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말을 하는 배우, ‘점프 컷’, ‘평면적 몽타주’라고 불리는 기법들이 이러한 효과를 자아냈다. 인과론적 연관성이 느슨한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두서없고 반복적인 대사도 이러한 효과에 기여한다. 

“나는 영화 얘기만 하고 싶다. 왜 다른 것에 대해 말하는가? 영화로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모든 것에 다다를 수 있다.” (장-뤽 고다르, 1930~) 

  이 밖에도 누벨바그 감독으로 행동보다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담아내는 데 주력한 에릭 로메르(대표작,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1969)와 예술로서의 영화 장르를 꾸준히 탐구한 자크 리베트(<파리는 우리의 것>, 1961)를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디드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리베트의 <수녀>(1966)는 수녀들의 성생활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어 상염금지 되기도 했다. 또한 연극의 리허설 과정을 배경으로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미치광이 사랑>(1968)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깊은 사유와 집요한 탐구 정신을 보여준다. 
  누벨바그 감독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이 시기에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던 이른바 ‘좌안파’ 감독들도 주목해볼 만하다. 알랭 레네는 <히로시마 내 사랑>(1959), <지난 해 마리앙바드>(1961)에서 세련된 형식미와 뛰어난 기술을 보여 가장 현대적인 감각을 가진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아프리카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장 루슈는 1960년대에 ‘시네마 베리테’ 운동을 일으키며 다큐멘터리 영화 장르의 형식과 개념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뮤지컬 영화 <쉘부르의 우산>(1962)으로 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자크 드미 감독, 과감한 형식적 일탈과 성적표현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영화적 자유로움 그 자체를 유감없이 실현해보인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와 <연인들>(1958)의 루이 말 감독이 이 시기에 속한다.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 영화계는 오랜 침체기를 겪는다. 1970년대 중반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면서 영화관의 관객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도 꾸준히 관객들을 끌어들인 것은 코미디 영화와 범죄 영화, 그리고 정치 영화들이었다. 비판 정신이 가미된 정치적 주제에 대중적 요소들을 가미한 코스타 가브라스의 <제트>(1969)와 <고백>(1970)이 성공을 거두었다. 고다르는 68혁명의 학생운동가 출신인 장 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1920년대 러시아에서 ‘키노 프라우다’라는 기록영화 운동을 이끌었던 실제 인물의 이름)라는 그룹을 만들고 비판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몇 편 제작했지만, 지나치게 실험적이고 난해하여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1980년대에 프랑스 영화는 텔레비전의 지배, 비디오 시장의 확산, 미국 영화의 세계 석권, 프랑스 정부의 과도한 제작비 지원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더욱 더 침체의 길을 걷게 된다. 이른바 ‘네오 바로크’ 혹은 ‘누벨 이마주’라고 불린 일련의 영화들만이 프랑스 영화의 명맥을 유지했다. 이 사조의 대표적 감독인 장 자크 베넥스, 뤽 베송, 레오스 카락스의 공통점은 미국 팝 문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이고 대중문화의 다양한 요소들을 영화에 수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모던하고도 강렬한 이미지와 화려한 볼거리로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들은 화려한 볼거리와 몽환적인 화면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판적이기보다는 자아도취증에 빠진 1980년대의 프랑스 젊은이들을 대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감독은 마티유 카소비츠이다. 그는 <증오>(1995)를 통해 동시대 사회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영화 형식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병행하여 프랑스 영화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감독으로 여겨진다. 
  아놀드 하우저는 20세기를 영화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영화가 재구성하는 시간과 공간은 이전의 어떤 장르보다도 자유롭고 무한 변신이 가능하며, 영화의 관람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강점을 강조했다. 

“영화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 다수 대중인 관객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 한 최초의 기도이다.”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951)

“만일 생의 한 단편이 아니라 생의 전체가 포착된다면 그리고 그 생이 우리의 후손들의 경의에 찬 눈앞에서 움직이고 전개된다면, 우리의 기쁨은 더할 나위없을 것이다.”(1845, 뱅상 피넬, 『프랑스 영화』에서 재인용)는 샹플뢰리(1821~1889, 소설가, 언론인, 사실주의 이론가)의 말은 현실이 된 듯하다. 여전히 영화가 진정한 예술인지 한 순간 소비하고 마는 오락거리에 불과한지에 대한 논란은 분분하지만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문화 요소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영화는 우리 꿈에 봉사하는 새로운 임금 노동자이다. 우리는 그를 살 수 있고, 매춘부처럼 한 시간 또는 두 시간 동안 그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 『밤의 끝으로의 여행』, 1932) 

“영화는 꿈이고 음악이다. 어떤 예술도 영화처럼 우리의 낮의 의식을 직접 가로질러 영혼의 어둑어둑해진 방 깊은 곳에서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지 못한다.” (잉마르 베리만, 1918~2007)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혁명과 내전 과정을 거치면서 러시아-소비에트 영화는 두 갈래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는 기존의 영화사들이 외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 국내에서 이전과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대부분의 스튜디오들은 파괴되고 생필름이 부족해졌다. 이어서 1919년 8월에 레닌이 영화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자 많은 제작자들이 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예르몰리예프는 1918년 얄타로 영화사를 이전했다가 1920년 2월에 러시아를 떠나 4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이 때 그를 따라 파리로 간 러시아 영화인들은 감독 프로타노프와 볼코프, 배우 모주힌, 림스킨, 리센코, 세트 디자이너 로차코프였다. 그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예르몰리예프 영화사를 설립하고 몽트뢰이의 파테 영화사를 임대했다. 예르몰리예프 영화사는 초기에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영화들을 리메이크하고 신비하고 매력적인 동양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하여 파리의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여기에는 로차코프의 화려한 세트와 빌린스키의 의상이 한 몫을 했다. 
  예르몰리예프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1922년에 독일로 이주하자, 그와 함께 활동하던 영화제작자 카멘카가 알바트로스 영화사를 설립하였다. 프랑스 영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알바트로스 영화사는 기존의 러시아적인 영화에 프랑스적 요소를 가미하고 비극적 신비주의에 희극적인 요소들을 도입하였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알렉산드르 뒤마의 동명 희곡을 볼코프가 각색하고 모주힌이 주연한 <킨>(1924)이었다. 또한 제작자 카멘카는 엡스텐, 레르비에, 르네 클레르 같은 젊은 프랑스 감독을 영입하였는데, 이들은 이후 프랑스 영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알바트로스 영화사는 영세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프랑스 영화계가 미국 영화의 지배에 대항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바트로스가 제작한 거의 모든 영화에서 주연을 담당한 모주힌의 인기도 상당했으며, 로차코프, 미어슨, 빌린스키가 담당한 세트와 의상 역시 알바트로스의 흥행에 큰 몫을 했다. 1920년대 후반 유성영화 시대가 오면서 알바트로스 영화사는 모주힌이 러시아 억양 때문에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한 유성영화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재정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쇠락하게 된다. 
  한편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과 내전으로 물질적인 조건이 황폐화되고 이전의 주요 제작자들이 망명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소비에트 영화를 만드는 일이 추진되었다. 이는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서고 스탈린의 강압적인 문화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진행되었는데, 이 기간에 다양한 영화 형식과 문법이 실험되었다. 영화사에서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로 분류되는 여러 영화 창작자들이 다양한 영화적 실험과 이론들을 통해, 이제 막 걸음마를 띠고 있던 영화의 새로운 문법들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해외로 망명한 영화사들이 제작 장비와 생필름을 모두 가져간 탓에 제작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제작된 영화는 단 몇 편에 불과한데, 그 마저도 대부분 당대 주요 사건을 필름에 담는 기록영화와 선전물이었다. 
  1919년 레닌은 영화산업을 국유화했고, ‘교육인민위원회’는 1919년에 국립영화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22년에 레닌은 소비에트의 영화제작과정을 결정짓게 될 두 가지 중요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하나는 오락과 교육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소위 ‘레닌의 조화’였고, 다른 하나는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였다. 1922년 말 정부는 ‘고스키노’라는 중앙 배급 독점사를 만들어 영화정책을 통제하려고 하였지만 개인수입업자들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 기간 동안 소비에트의 영화산업은 점점 더 수입영화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중앙배급사인 ‘고스키노’가 영화산업을 제대로 운용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자, 정부는 1925년 1월 1일 새로운 회사인 ‘소브키노’를 설립하였다. ‘소브키노’는 정부가 요구하는 정책을 수행하였으며 소련 곳곳에 영화를 상영하는 일을 담당했다.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는 이런 여건에서 탄생하였다. 몽타주 기법을 발견한 사람은 전선에서 돌아와 모스크바 영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쿨레쇼프였다. 그는 필름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에서 한 숏의 의미는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숏과의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었다. 이른바 ‘쿨레쇼프 효과’였다. 유명한 배우 모주힌의 얼굴 숏을 스프 한 접시 숏, 관에 누워 있는 여인 숏, 곰 인형을 갖고 노는 어린이 숏과 연결하면 관객들은 모주힌의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적 반응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쿨레쇼프 이외에도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등이 자기 식으로 ‘몽타주’ 기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실험하고 발전시켜나갔다. 
  


  에이젠슈타인은 <전함 포템킨>(1925)이라는 영화로 전 세계 영화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연극 연출가 메이예르홀드의 영향을 받은 그는 숏과 숏의 변증법적인 충돌과 대립을 통해 몽타주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보았다. 이른바 ‘충돌의 몽타주’ 이론이었다. 반면 사실주의 연극 연출가 스타니슬랍스끼의 영향을 받은 푸도푸킨은 숏과 숏 사이의 유기적인 통일을 강조하는 ‘연결의 몽타주’ 이론을 지지하였다. 미학적으로 에이젠슈타인이 모더니즘에 가까웠다면, 푸도푸킨은 ‘사실주의’를 지향하였다. 푸도프킨의 대표작은 고리끼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어머니>(1926)였다. 이 영화는 평범한 프롤레타리아 계급 여성인 닐로브나가 아들 파벨의 영향으로 계급적으로 각성되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가 베르토프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극영화를 비판하고 사실적인 기록 영화를 지향하여, 1924년부터 몽타주 양식을 사용한 장편 기록영화들을 만들었다. 대표작으로 <카메라를 든 사람>(1929)이 있으며, 그가 주창한 ‘영화-진실’ 이념은 이후 68혁명 당시 장 뤽 고다르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 세 사람은 자신의 이론을 글로도 남겨 영화이론과 영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 당시 활동한 대표적인 영화감독은 그리고리 코진체프,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 세르게이 유트케비치 등이었다. 그리고 비러시아 공화국에서 몽타주 운동을 펼친 대표적인 감독은 우크라이나의 민족 설화에 바탕을 둔 <즈베니고라>(1927)를 만든 알렉산더 도브첸코였다. 이들이 이 시기에 한 창조적인 실험의 결과로 나온 영화와 글들은 이후 영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 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27년에 소비에트 영화산업에서 영화 수입에 지출한 돈보다 국내영화로 벌어들인 돈이 더 많아지자, 외국과의 무역량을 감소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이와 함께 몽타주 영화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에 대해 ‘형식주의’라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이들 감독들은 시나리오를 승인받거나 제작비를 조달하기가 힘들어졌다. 1929년에 영화에 대한 통제권은 ‘교육인민위원회’에서 소련영화위원회로 이관되었다. 1930년에 여러 공화국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영화를 감독하고 모든 영화의 배급과 상영을 통제하는 ‘소유즈키노’가 설립되면서 영화산업에 대한 통제는 더 심화되었다. 스탈린의 직접적인 대리인 격으로, 몽타주 감독들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공산당 관료 보리스 슈미야츠키가 ‘소유즈키노’의 대표가 되자, 소비에트 몽타주 운동은 더욱 위축되었다. 
  1934년에 소비에트 작가동맹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공식적인 미학으로 채택하면서 이제 작가와 예술가들은 이 노선을 따를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어서 1935년 1월에 열린 ‘전(全)소비에트 영화창작노동자회의’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소비에트 영화의 공식정책이 된다. 이 회의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차파예프>(1934)가 거듭 인용되었다. 반면 에이젠슈타인은 불려 나와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았고, 다른 ‘형식주의’ 영화감독들도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해야만 했다. 검열기관은 통과될 때까지 반복해서 영화각본을 심사하였고 촬영 후에도 어느 단계에서든 영화를 수정하거나 보류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1930년대에는 해마다 수백편의 영화가 기획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상영된 영화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결과 1930년에 94편 제작되었던 영화작품이 1936년에는 33편에 불과하게 된다. 
  <차파예프>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내전을 다룬 영화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영화의 주요 장르로 떠올랐다. <우리는 크론슈타트 사람>(1936), <발트해의 대의원>(1937)이 이 장르의 대표적인 영화이다. 에이젠슈타인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교의에 맞추어 <알렉산더 넵스끼>(1938)를 만들었지만, 그의 몽타주 기법의 실험은 여기서도 계속 이어졌다. 도브젠꼬는 우크라이나판 <차파예프>를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받고, 우크라이나 내전의 영웅인 니콜라이 쉬코르스를 다룬 영화 <쉬코르스>(1939)를 만든다. 푸도프킨은 러시아 제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수보로프 장군이 1794년부터 1799년까지 겪은 여러 일화들을 다룬 영화 <수보로프>(1941)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인기가 있었던 또 다른 영화 장르는 뮤지컬 희극영화였다. 이 장르의 대표적인 작품은 인기 있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쓰기도 하는 어느 여자 우편배달부의 이야기를 다룬 <볼가-볼가>(1938)였다. 이 작품은 에이젠슈타인의 조감독이었던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가 연출했다. 스탈린이 이 영화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이 장르의 또 다른 대표적인 감독은 이반 피리예프였다. 집단 농장에서의 삶을 찬양하는 ‘트랙터-뮤지컬’의 전문가로서, <돈 많은 신부>(1938), <트랙터 운전사들>(1939)을 감독하였다.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은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된다. 모스크바의 영화제작활동은 아직 점령되지 않은 공화국들 내의 스튜디오로 옮겨졌다. 전쟁 초기에는 장편영화 제작이 중단되고 <전투영화 앨범6>과 같이 보도와 기록영화, 풍자극, 뮤지컬 등을 결합시킨 영화가 만들어졌다. 1942년에는 전쟁을 다룬 장편 극영화들이 나타나는데, <조야>(1944), <무지개>(1944), <한 소녀가 있었네>(1945) 등을 들 수 있다. <쿠투조프>(1944), <이반 대제 1부>(1944)와 같은 전기 영화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1956년 제 20차 전당대회 이후부터 흐루쇼프가 실각할 때까지 이른바 ‘해빙기’가 이어진다. 1956년 2월 1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제 20차 전당대회에서 전쟁불가피론의 부정과 평화공존,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사회주의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 등 세 가지 노선이 제안되고 제6차 5개년 계획(1956~1960년)이 채택되었다. 이 대회의 마지막 날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권력 남용을 비판하면서 소련사회의 이른바 ‘해빙기’가 시작되었다.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난 이후에도 1~2년 동안은 스탈린 시대처럼 영화에 대한 강압적이고 직접적인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의 영화역사에서 해빙기는 1956년부터 1966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장편영화의 경우 1948년에 17편, 1949년에 15편, 1950년에 13편, 1951년에는 단지 9편만이 제작되었다가 1954년에는 40편, 1950년대 말에는 다시 100편으로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의 주된 미학적 이념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다루는 미학과 예술창작방법이 부상하였다. 
  1957년 알렉산드르 알로프와 블라디미르 나우모프 감독은 오스트롭스끼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새롭게 해석하여 영화 <파벨 코르차킨>을 만든다. 이 영화는 기존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성향의 영화가 가지고 있던 규범을 탈피하여, 혁명 건설기의 공산주의자들을 엄격하고 절제된 금욕주의자로 설정하고 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 1957년 미하일 칼라타조프 감독의 <학은 날아가고>의 등장은 소련에 본격적으로 해빙기가 도래했음을 확인시킨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인간 내면에 대한 다양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작품은 해빙기 이전에 존재하던 많은 영화의 도식과 수법을 뒤엎었다. 이 영화의 등장으로 그동안 소련 사회와 창작 문화에서 주저하고 있던 모든 테마와 형식의 금기들이 단숨에 사라졌다. 이 영화는 소련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영화와 함께 인간의 내면을 빼어나게 묘사한 영화는 배우인 본다추르크가 숄로호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인간의 운명>(1959)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전쟁영화인 <병사에 관한 발라드>(1959)는 이전의 전쟁영화와 달리, 전쟁영웅 대신 파괴되어가는 인간을 직접적이고 서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끼는 데뷔작 <이반의 어린 시절>(1962)에서 전쟁을 통해 한 가족과 순수한 한 어린 아이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그렸다. 이 영화에서는 즐겁고 평화로웠던 이반의 어린 시절과 전쟁의 잔혹성을 대비시키는 새로운 영화적 수법이 사용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스승이었던 구세대 감독 미하일 롬은 극영화 <1년 중 9일>(1962)와 다큐멘터리 <일상의 파시즘>(1966)같은 수작을 내놓았고,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첫 번째 선생>(1965), <아샤의 행복>(1966)과 같은 신사실주의 작품을 선보였다. 소설가이자 배우인 바실리 슈크쉰은 자신의 첫 영화 <이런 녀석이 살고 있다>(1964)를 통해 농촌의 삶 속에서 러시아인들의 삶의 가치와 정신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1964)에서 우크라이나 민속의 색채가 담긴 시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렇듯 해빙기는 여러 가지 영화 양식과 여러 세대의 영화인이 공존한 시기였다. 하지만 타르콥스끼의 두 번째 작품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알렉산드르 아스콜도프의 <인민 위원>(1967), <아샤의 행복>의 상영이 금지되면서 해빙기도 끝이 난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1966~1982)는 ‘해빙기’ 이후에 찾아온 새로운 ‘결빙’의 시기였다. 영화계에서는 매년 약 130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영화 창작방법은 ‘교육적 사실주의’로 명명되었으나 이는 사실상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의 회귀였다. 강화되는 검열과 억압적인 정치상황을 피하기 위해 콘찰로프스키는 투르게네프의 <귀족의 둥지들>(1969), 그리고리 코진체프는 셰익스피어의 <햄릿>(1964), <리어왕>(1971)과 같은 문학작품을 영화화하였다. 그리고 체호프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브레즈네프 시대의 지루하고 부패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바냐 외숙>(1970), <자동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곡>(1977)이다.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인 세르게이 본다추르크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1965년에서 1967년까지 4부작으로 영화화하였다. 대표적인 농촌문학 작가이자 배우겸 감독인 바실리 슉신은 <붉은 까마귀밥나무>(1974)에서 생명력과 도덕적 순수함이 살아있는 농촌을 그렸다. 또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아르메니아 시인 사야트 노바의 생에 기초한 영화 <석류의 빛깔>을 만들었지만 1971년 상영이 제한되었다가 이후 곧 금지된다. 
  이 시기에 파라자노프와 함께 소련의 공식적인 영화미학에 반대하고 시적인 영화를 만든 또 다른 사람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다. 그의 대표작인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예술가와 권력층 간의 갈등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1966년에 상영이 금지되었다. 이 작품은 1969년에 프랑스의 파리에서 첫 상영되고, 이후 1971년에야 겨우 소련에서 상영될 수 있었다. 그는 소련에서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잠입자> (1979)를, 외국으로 망명하여 이탈리아에서 <향수>(1983)>, 스웨덴에서 <희생>(1986)을 만들었다. 타르코프스키는 잉마르 베르만, 로베르 브레송 등과 함께 20세기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또 다른 작품은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블라디미르 멘쇼프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79)와 콘찰로프스키의 <시베리아다>(1979)이다. 두 영화 모두 7000만에서 8000만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와 같은 동시대의 사회 문제를 다룬 코미디와 멜로드라마가 1970년대와 80년대의 극장가를 지배하였다. 특히 70년대에는 관객동원과 영화의 흥행가능성이 소련 국가영화위원회(고스키노)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 시기 소련영화는 이야기 중심의 사실적이고 가벼운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1985년 젊은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소련 서기장이 되자, 소련 사회는 ‘글라스노스치’(공개)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의 시대, 즉 ‘새로운 해빙기’로 이행하게 된다. 이 시기에 영화인들은 전례 없는 자유를 누려 스탈린 시대를 비판하는 영화들을 제작했다. 일종의 ‘소비에트 웨스턴’인 <1953년의 서늘한 여름>(1987), 발레리 오고로드니코프의 <프리쉬빈의 종이 눈들>(1989), 세르게이 솔로비요프의 <슬픔에는 검은 장미, 사랑에는 붉은 장미>(1989)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영화들은 스탈린주의의 유산인, 소련 사회에 뿌리박힌 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금기를 모조리 깨트리며, 어둡고 답답한 공동주택, 깨어진 가정, 무차별적이고 의미 없는 폭력, 강간, 마약, 매춘, 범죄, 젊은 층의 소외 등을 주제로 다루었다. 
  1986년 5월 제5차 소비에트 영화제작인 회의에서 전쟁의 무자비함을 가차 없이 보여준 영화 <컴 앤 씨>(1985)의 감독, 엘렘 클리모프가 대표로 선출되고, 상영 금지된 작품들의 중재를 맡을 ‘분쟁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모든 영화 활동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고스키노가 재편된다. 분쟁위원회 덕분에 1987년까지 금지된 대부분의 영화들이 해금되었고, 1986년에 타계한 타르코프스키도 다시 복권되었다. 1990년에 이르면 고스키노는 영화의 통제권과 검열권을 사실상 상실한다. 그리고 감독이 영화에 필요한 재원을 직접 마련해야 하는 반관반민의 새로운 제작형태가 만들어졌다. 그 전에는 고스키노가 배급권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이때부터 독립적인 제작자들이 작품을 스스로 배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부패한 도시와 비도덕적인 인물들을 묘사한 <택시 블루스>(1990), 일종의 ‘검은 영화’인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1990)이었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또 다른 감독은 타르콥스키의 영적인 후계자로 평가받고 있는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이다. 1987년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로 데뷔한 그는 이후 여러 세계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면서 소련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가연합(CIS)이 구소련을 대체하면서 소련 영화는 포스트 페레스트로이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비교문화적 설명   영화의 역사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에 영사막을 통한 영사 기능을 첨가하여 시네마토그라프를 출시하고 이 기계를 통해 작품을 상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영사기능 덕분에 영화는 많은 사람이 함께 감상할 수 있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의 한 장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혁신적인 영화 실험가들 때문에 영화는 신생 장르의 한계를 넘어 중요한 현대 예술의 한 장르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점차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 시장을 장악해온 영화의 역사에서 프랑스와 러시아는 양국 모두 독특하고 실험적인 영화 양식과 기법을 시도하고 영화미학을 창출함으로써, 세계 영화계에서 각기 나름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분야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의 교류 또한 눈여겨 볼만 하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 지하에서 자신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처음 상영한지 5개월 뒤인 1896년 5월 19일에,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 넵스끼 프로스펙트 46번가에 뤼미에르 형제는 러시아 최초의 영화관을 개장했다. 1896년 프랑스에서 설립되어 초기 세계 영화 산업을 주도한 파테 영화사와 고몽 영화사는 러시아에서도 지사를 설립하여 초기 러시아 영화 산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한편 1910년대 후반부터 미국 영화가 프랑스 영화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영화계는 이에 맞서 ‘예술영화’를 내세웠다. 당시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내전, 레닌의 영화 국유화법으로 인해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예르몰리예프 영화사와 이후 1922년에 설립된 알바트로스 영화사, 즉 ‘파리의 러시아 영화파’는 프랑스 영화가 미국 영화에 맞서 예술영화를 선보이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되어 있던 프랑스 영화 시장에 영화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생 장르인 영화가 볼거리와 오락거리에 그치지 않고 20세기의 대표적인 예술장르로 자리 잡는 데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소련 두 나라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예술적인 실험과 이론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30~1940년대에는 서민들의 일상과 풍경을 사실적인 동시에 환상적이고 시적인 영상으로 표현한 ‘시적 현실주의’를 표방한 작품들이 그랬고, 세계 대전 이후 프랑수아 트뤼포 등에 의해 주창된 ‘작가주의 영화’ 이론이 그러했다. ‘누벨바그’로 명명된 이 영화 운동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이어지면서 기존의 영화 규범과 관습, 문법을 바꾸어놓았다.
  1920~30년대의 러시아/소련에서는 쿨레쇼프,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등의 감독들이 ‘몽타주’ 개념과 이론을 창안하여 영화 이론을 발전시키고 영화 창작을 진행했다. 이후 이들은 세계 영화사에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라고 불리게 된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가 베르토프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극영화를 비판하고 사실적인 기록 영화를 지향하면서, 1924년부터 몽타주 양식을 사용한 장편 기록영화들을 만들었다. 그가 주창한 ‘영화-진실’ 개념은 이후 68혁명 당시 누벨바그의 대표 주자인 장-뤽 고다르 감독에게 영향을 주어 ‘지가 베르토프’라는 그룹을 만들어 비판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타르콥스키와 파라자노프는 1960년대부터 활동하면서 소련의 공식적인 영화미학에 반대하고 시적이면서 예술적인 영화들을 만들어, 전 세계인들에게 오락이 아닌 예술로서의 영화의 가치를 일깨어주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일어난 이러한 흐름들 덕분에 영화의 예술적 문법은 더욱 다양해지고 확장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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