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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운명
토포스명(프랑스) destin
토포스명(러시아) судьба
정의 1. 운명에 순종할수록 신의 뜻에 가까워진다.
2. 운명이란 우연들이 필연으로 엮어 있는 삶, 그 자체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운명’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낱말 중 대표적인 것은 ‘대스탱 destin [dεstɛ̃]’이다. ‘대스티네 destinée’라는 명사도 쓰이긴 하는데, 전자보다는 조금 더 개인적인 경우에 쓸 수 있는 명사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뜻으로 ‘소르 sort’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 이것들보다 더 개념적인 어휘로는 ‘파탈리테 fatalité’가 있다. 흔히 ‘숙명’으로 옮겨지는 ‘파탈리테’는 ‘팜므파탈 femme fatale’ 할 때의 형용사 ‘파탈 fatal(e)’에 추상명사화 어미인 ‘-테 -té’가 접붙은 것이다. 파생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숙명’도 좋지만 그 어휘의 개념성을 감안하여 ‘숙명성’이나 ‘피해 갈 수 없음’ 정도로도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어휘 ‘대스탱’의 어원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조금 이색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은 동사 ‘대스티네 destiner’에서 파생되었는데, ‘예정하다’, ‘지정하다’의 의미를 갖는 이 동사에서 동사화 어미 ‘에 –er’를 떼어내어서 만든 명사가 ‘대스탱’인 것이다.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즉 대스탱/대스티네의 관계라면 으레 전자에 동사화 어미 ‘에 –er’가 붙어 파생된 동사가 후자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래서 ‘대스탱’에서 ‘대스티네’로 우선 거슬러 오르고 다시 ‘대스티네’의 어원을 추적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고전 라틴어 동사 ‘데스티나레 destinare’로 귀결된다. 물론 그 뜻은 ‘정하다, 지정하다, 예정하다’로 프랑스어 동사와 비슷하다. 
  프랑스어 ‘대스탱’의 사전적 정의는 “모든 일과 사건들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게끔 정해 놓음으로써 우주를 지배한다고 믿어지는, 인간의 의지 바깥에 있는 힘”으로, 우리 말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거나 조건 짓는 여러 사상을 대리 표현하곤 했다. 가령, 사랑의 신, 죽음의 신, 바다의 신 등이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파르카(프랑스어로는 Parques 파르크) 자매들이 있는데, 이들은 ‘운명’의 뜻을 받들어 전달하는 사자들이다.
  제 아무리 힘 센 제우스라도 그것을 이기지는 못했다. ‘운명’은 마치 모든 신들의 이야기와 인간사의 뒷면에 숨어 있으면서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는 듯하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떠올려도 그렇다. 운명이 정해놓은 이치를 전달해주는 신탁이 나오고 그 신탁의 말대로 살다 죽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등장하지만 정작 그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듯 운명의 토포스는 고대 서양에서부터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인간의 이성으로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지니지만 삶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며 이렇게 진행되도록 하는 데 어떤 필연성이 작용하는 듯 느껴진다. 인간 이성은 바로 ‘운명’이라는 개념을 형성하여 이 필연성의 본질과 그 발현 형태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왔다.
  고대인들이 인간을 포함하여 전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믿었음은 다양한 신화와 종교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힘은 고대 신화들에서 신 혹은 정령으로 신격화되어 나타난다. 운명에 대한 관념을 활발히 발전시켜온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운명은 ‘모이라’라 불렸으며 이것의 옛 의미는 ‘할당된 지분, 몫’이라는 의미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이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세 명의 여신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탄생을 주관하는 클로토는 생명의 실을 뽑아내고, 라케시스는 실타래를 꼬아 모든 인간들의 생애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며, 인간의 죽음을 관장하는 아트로포스는 그 실타래 끊어버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운명이란 이를 주관하는 신들의 손 안에 있으며 인간에게 주어진 ‘몫’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변경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초월적 힘이 정령으로 신격화되는 것은 슬라브 신화에서도 반복된다. 슬라브 신화에서는 세 명의 운명의 여신이 아기의 출생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수데니치(суденицы)’라 불리는 세 운명의 여신은 아이가 태어난 후 삼일 째 되는 날 자정에 찾아온다. 가장 나이 많은 운명의 여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중간의 여신은 아이의 육체적 장애나 인생의 갖가지 난관에 대해 말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운명의 여신이 결혼과 그 밖의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예언해 준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예언을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 없으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운명이라 믿었던 것이다(톨스타야, <운명 동사와 문화 언어에서의 상관개념> 참조). 
  이처럼 인간의 운명을 포함하여 전 우주를 관장하는 초월적 힘의 존재는 고대 그리스 신화나 슬라브 신화를 포함하여 고대 신화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표상이지만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태도는 문화권마다 다소 상이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운명에 대한 태도는 운명의 테마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BC 402)에서도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듣게 된다. 궁극에는 이것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임이 판명되지만, 그 과정에서 오이디푸스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길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BC 700년경)에서 ‘증오받는 자’란 뜻의 이름을 가진 오디세우스의 운명은 그의 이름처럼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오디세우스는 이에 맞서 싸우고 승리를 쟁취하는 자로 그려진다. 이밖에도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때로 패하기도 하고 때로 승리하기도 하지만 운명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반면, 슬라브 신화 속 주인공들에게는 운명에 대항한다는 생각 자체가 낯선 것이었다고 한다(골로바닙스카야, 『언어에 반영된 정신세계』 참조). 
  이렇듯 어떤 초월적 힘으로 운명을 바라보는 시각은, 특히 이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고대 시기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러시아적 운명의 토포스가 다소 독특한 특성을 드러내는 지점은 바로 운명에 대한 인간의 태도라는 측면에서이다. 이러한 특성은 운명을 뜻하는 러시아어휘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리스어의 운명 ‘모이라(μοίρα)’의 옛 의미가 ‘할당된 지분’의 의미인 것처럼, 러시아어의 ‘운명’ 단어들(доля, участь, удел 등)도 대다수가 ‘나누다’, ‘배분하다’, ‘몫을 정하다’ 등의 동사들로부터 온 것이다. 이를 통해 운명 개념의 시초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삶의 몫, 행복의 배분이 이루어진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라틴어의 운명 ‘파툼(fatum)’의 애초의 의미가 ‘이야기 된 것’인 것과 유사하게 러시아어 운명 ‘로크 рок[rok]’도 ‘말해진 것’이란 의미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처럼 운명 개념의 형성은 예언, 말의 마력에 대한 믿음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편 빈도수로 보나 포괄하는 의미 영역으로 보나 러시아적 ‘운명’의 대표어라 할 수 있는 ‘수디바 судьба[sud'ba]’는 ‘심판하다, 재판하다’를 뜻하는 ‘수디티 судить[suditi]’로부터 파생한 것으로 이것의 애초의 의미는 ‘심판’이었다. 따라서 고대 러시아어에 자주 등장하는 ‘신의 수디바’는 ‘신의 운명’이 아니라 ‘신의 심판’을 뜻하는 표현이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수디바’)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성경 시편 36:6)
  이처럼 러시아 ‘운명’ 어휘들은 모두 동사 파생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몫을 나누다’, ‘말하다’, ‘심판하다’ 등 다소 상이한 의미의 동사로부터 온 것들이지만 동사 파생어로서 운명 어휘들은 독특한 동사적 의미를 포괄하며 종료된 행위의 결과로서 ‘완료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곧 운명은 이미 ‘나누어진 것, 배분된 것, 말해진 것, 심판받은 것’으로서, 이것은 되돌리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동사성’으로부터 이것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문제, 곧 ‘나누고, 심판하고,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기독교 전래 이전에 민간신앙 속에서는 초월적 힘으로서 운명 자체 혹은 이를 관장하는 정령이 그 주체였다면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 자리를 신이 차지하게 되지만 인간이 그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생각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언어들에 비해 러시아어에서 ‘운명’ 어휘들이 주어 위치를 차지하는 구문, 가령 ‘운명이 이끌다/가져다주다/갈라놓다/만나게 해주다’ 등이 활발히 나타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운명의 능동성은 반대로 인간의 역할을 수동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은 운명이 이끌고, 가져다주고, 갈라놓고, 만나게 해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겪고 감내할 따름이다. 이처럼 운명의 능동성․적극성과 인간의 수동성․소극성의 대비가 러시아어 운명 어휘들을 통해 드러나는 러시아적 운명 토포스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위대한 태양왕의 시대가 프랑스에 열렸을 때, 수도 파리에서는 연극이 성행했었다. 많은 극장들이 관객을 유치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 연극들을 분류하려는 차분한 말들도 있었다. 희극과 비극이 그것들이었다. 문학사는 몰리에르는 희극작가이고 라신과 코르네이유는 비극작가라고 기술한다. 전자는 웃겨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극화하고 후자는 끔찍하게 슬프지만 왠지 모르지만 아련하게 우리를 위무하는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고대의 신화에서 이야기를 따와서 에우리피데스가 연극으로 만든 『페드라』를 프랑스말로 다시 극화시킨 라신의 무대에 우리들의 모습은 없다. 대신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그 존재를 들었던 것 같은 한 요소가 등장한다. 바로 운명이다.
  나는 초혼이고 왕인 남편은 재혼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 남편과 전처의 아들인 이폴리트를 욕망하는가? 이 정염의 불길은 누가 지핀 것인가? 말이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드는 힘. 그 힘은 저 먼 곳으로부터 나를 찾아와서 지배하고 파멸시키는 힘이다. 페드르는 유모에게 고백하는 장문의 대사를 아래의 문장으로써 시작한다.

“내 죄악/불행/고통은 더 멀리서부터 오는 것이라오.”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로 하여금 “뭐... 페드르가 잘못했네.”라고 되뇌지 못하게 만드는 그 아우라가 연극의 힘인지, 운명의 그림자인지 우리들 어두운 욕망의 명령인지는 모호하다. ‘비극과 희극의 차이는 운명이 등장하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던 누군가의 구분을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극문학은 잘 그려내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 밖의 이러한 힘 대신 우리가 소유한 내부의 힘을 한 번 믿어보자고, 우리에겐 자유와 의지와 이성이 있다고, 어깨 걸고 외치던 시대가 프랑스에 있었다. 1789년의 시민혁명을 준비하던 이른바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이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운명을 비웃을 언어와 논리를 찾아 절치부심하면서 구체제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해 야유와 풍자의 칼을 갈고 그 합리적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축적된 인류의 지식을 차곡차곡 모아 이른바 『백과전서』를 편집하던 시기였다.
  당시 지식인들의 수장 격인 드니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의 자크는 툭하면 “아! 그건... 저 높은 곳에 그렇게 되라고 씌어있으니 그렇지”하고 깔깔댄다. 비교적 긴 디드로의 그 소설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도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한 장면은 없었다. 운명에 대한 말들만이 계속 오고갈 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운명의 토포스를 희화화하려 들었던 서구 역사의 거의 유일한 시대였다.
  19세기 전반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가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어디서건 언제건 인간의 존재란 그저 운명이 들었다 놨다하면서 갖고 노는 가련한 피조물일 뿐이다. 단지 드물게도 몇몇 힘세고 잘난 자들만이 운명에 맞서고 그걸 자기들 뜻대로 만들어 나간다.”

  인간과 역사에 대한 비극적인 세계관으로 알려져 있는 비니이지만 그의 비관주의는 결코 철저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음을 잘 보여주는 구절일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운명의 신은 사회의 상위 0.3%에 해당하는 인간들 앞에서는 뒷걸음질 친다는 말처럼 들린다. 터무니없다. 프랑스 낭만주의의 낭만주의로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명민한, 사회적으로 정의로울 수 있는 대목에서만 정치적으로 열광하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전통은 예컨대 빅토르 위고의 시와 소설에도 고스란히 담긴다. 이웃나라 독일의 깊은 숲 속에서 질풍과 노도의 시커먼 낭만적 마성과 환상성이 피어오르는 동안 시인과 예술가들도 그 속에 끼어있는 프랑스 군중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와 갑론을박하기에 바빴다. 도망가다 국경 수비대에 붙잡혀 끌려온 왕과 왕비를 꿇어 앉혀 놓고 기요틴으로 보낼 것이냐 말 것이냐. 아마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중 마리 앙트와네트만이 거의 유일하게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라고 울먹이면서 ‘운명’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공화정과 왕정 사이에서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았던, 봉기와 시위 폭동으로 점철된 19세기 내내 프랑스 사회와 언어권에서는 운명의 토포스는 조금은 희미해 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어디까지 자유로우며 주체적인가? 그에게 과연 ‘자유의지’는 있는가? 세계 내에서 우리의 말과 선택과 행로는 정말 예정된 그 무엇에 따라 시간의 축을 타고 그대로 진행될 뿐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문인과 예술가들이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아마도 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을 기다려야 했던 것 같다.
  카뮈는 오래된 시지푸스 얘기를 다시 꺼낸다.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이라는 걸 뻔히 알지만 우리는 오늘도 바위를 굴려 올려야만 한다. 마치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즐겨라, 너의 운명을”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던 카뮈이지만 때로는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필연적 운명의 손바닥 위에 놓인 하릴없는 인간 존재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이방인』의 주인공이 감옥의 침대 밑바닥에서 우연히 찾아낸 빛바랜 신문지 조각 하나였다. 사회면 사건 사고 기사였을 것이다. 
  20년 넘게 타지에 나가 있으면서 한 밑천 모아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친과 누이에게 아들은 장난삼아 방 하나 달라고 말한다. 그녀들은 옛 여관을 여전히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숙객을 망치로 때려 영원히 잠재우고 그 돈을 가로챈 모녀가 다음날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들의 선택은 밧줄과 우물이었다. 
  그래도 카뮈는 그의 책 『반항하는 인간』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끝까지 버티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과 세계의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양차대전을 겪는 20세기 전반 서구의 역사의 ‘운명’은 많은 작가들을 ‘행동’하게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카뮈 외에도 대표적으로 생텍쥐페리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대지』의 비행 조종사는 안데스 산맥 고지에 홀로 불시착했지만 기지국에서 자신의 생환을 기다릴 동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산 아래쪽을 향해 사력을 다해 걷고 또 걷는다. 마치 남성적 우정과 ‘의리’로써 얼마든지 운명에 맞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흰 눈 속에 포근히 파묻혀 그대로 잠들고 싶은 육체의 유혹에 저항하여 다시 일어서면서 혼자 중얼대는 말은 마치 운명을 향해 외치는 듯 들린다. 

“(그래, 내가 살아 돌아오기를 네가 기다리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내가 다시 일어나서 걷지 않는다면 난 쓰레기지!”

  이처럼 ‘운명/자유의지’ 대립항은 프랑스 예술과 문학에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람들의 성찰에 늘 자양을 공급한 유의미한 토포스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운명에 대한 생각은 종교관과 밀접히 관련되며 따라서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러시아에서 운명의 의미도 변화를 겪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운명의 주체에 대한 생각도 다소간의 변화를 겪었다. 기독교 전래 이전 민간신앙 속에서는 인간을 비롯해 전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운명의 주체로 간주하였다면, 운명을 관장하는 초월적 힘이 정교 교리 안에서는 신의 섭리로 설파된다. 
  운명에 대한 정교적 관점은 예정설과는 다소 상이하다. 예정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하고 신이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해 놓았다고 보는 예정설은 기독교 교리 안에서 캘빈에 의해 주창되었으며 이슬람식 예정설도 이와 상당부분 유사하다. 이슬람식 예정설이 러시아의 기독교, 곧 정교적 관점과 다소 배치된다는 생각은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운명이 하늘에 적혀있다는 식의 이슬람적 신앙이 기독교도인 우리들 사이에서도 추종자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우리의 사망 시간을 기록해 두는 명부를 보았다는 믿을만한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만일 예정이 정말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유로 의지와 이성이 주어졌겠나?” (레르몬토프, 『우리 시대의 영웅』, 1840)

  정교적 관점에서 운명은 섭리주의와 보다 관련이 깊다. 인간의 삶과 우주 만물은 이를 다스리는 신의 뜻으로서 섭리에 의해 진행되지만 여기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의지와 신의 자비가 협업함으로써 우주 만물이 굴러간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에서 운명은 맹목적인 운이 아니라 신의 명령과 인간 의지의 비밀스러운 협업이자, 신의 계획을 인간이 자유롭게 수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스투루베, 『오시프 만델시탐』, 1982)

  이처럼 민간신앙 속에서 인간의 삶을 비롯해 우주의 질서는 초월적인 힘으로서의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 좌우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만물을 주관하는 것은 신의 계획과 의지이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의 인식 속에서 운명에 대한 생각이 정교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전파 이후 운명 개념은 오히려 민간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독특한 결합을 토대로 발전해 나간 듯 보인다. 그 흥미로운 예를 고골의 『외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탄생은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최초의 순간이다. 앞서 언급된 슬라브 신화에서도 인간의 운명을 결정해주는 운명의 여신이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이 탄생의 순간이었다. 『외투』는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탄생과 그의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지어지게 된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이의 출산과 이름 짓기 그리고 세례의식이 정교 관행에 따라 이루어진다. 아이의 탄생을 대부와 대모가 함께 하고, 이들이 아이의 이름을 짓고 난 후 아이가 세례를 받는 순서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 민간신앙에서 금기시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민간신앙에 따르면 세례 전에 대부모를 제외하고는 부모조차도 아이의 이름을 알아서는 안 된다. 세례 전에는 아직 아이의 운명을 돌보는 수호천사가 없는 까닭에 아이의 이름을 발설하면 불행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모와 어머니가 함께 이름을 짓고, 하물며 대부모가 세 번에 걸쳐 제안한 이름들을 모두 거절해버린 어머니는 아이의 아버지 이름인 ‘아카키’를 아이 이름으로 선택한다. 이 또한 민간신앙에서 금기시되던 사항이었다고 한다. 수호천사는 사람의 이름에 따라 부여되는데 한 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여럿 있으면 그들을 한꺼번에 보호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최행규, <러시아 민간 속신을 통해 본 러시아인의 의식구조 연구> 참조). 이러한 민간신앙적 금기를 위반한 이름 짓기 장면은 아카키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해 준다. 인간의 운명에서 극히 중요시되는 이름 짓기가 정교적 관례에 따라 세례 전에 진행되지만 그 안에 민간신앙적 금기가 여전히 개입되고 있음을 통해 운명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과 민간신앙의 독특한 결합을 읽을 수 있다.

“ ‘이게 이 아이의 운명인 것 같네요. 그렇다면 아이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겠어요. 아버지가 아카키였으니 아이도 아키키로 하겠어요.’ 이렇게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 다음 아이가 세례를 받았고 이때 아이는 9등 문관이 될 것을 예견이나 한 것처럼 우거지상을 하고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일어났다.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이 일이 전적으로 필연성에 따라 일어났으며 다른 이름을 짓는 것이 결코 불가능했음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서이다.” (고골, 『외투』, 1842)

  아카키의 이름 짓기, 삶의 목표이자 활력소가 된 외투의 장만, 그 목표가 성취된 후 찾아든 죽음,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 다가오는 일들이지만 모두 운명이란 필연성에 의해 짜이고 엮인 우연이다. “민간신앙 속에서 운명이란 우연성과 엮인 필연성”(콜레소프, 2007)이라고 할 때, 운명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도 일반 민중의 의식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기독교적 요소와 혼재되면서 그 자리를 계속하여 유지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독교 수용 이래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운명의 본질과 주체에 대한 시각은 다소간의 변화를 겪었을지라도 운명의 힘, 그 막강함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을 변경하거나 그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은 자주 회자되는 아래의 속담에서도 잘 드러난다. 

“운명은 비껴 갈 수 없다.”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운명에 반항할 수 없다.”
“운명을 속일 수 없다.” (러시아 속담)

  운명을 거부하거나 뿌리칠 수 없으며 운명을 피하고자 하는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궁극엔 운명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러시아 민담과 문학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테마이기도 하다. 가령 ‘운명’이 소설의 주요 테마로 부각되고 있는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의 <페초린의 수기-운명론자>에서 인간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있는 숙명인지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인지를 놓고 흥미로운 논쟁이 벌어진다. 이 논쟁에 불이 붙자 도박광 불리치는 자기를 놓고 시험해보라는 내기를 제안한다. 러시안 룰렛으로 인간이 자기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각자에게 운명의 순간이 미리 정해져 있는지를 실험해보자는 것이다. 이 내기에서 페초린은 숙명이 없다는 데 걸지만 실제로 페초린이 숙명을 믿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 같다. 장전 된 총이 불발함으로써 불리치는 목숨을 건졌지만 페초린은 불리치가 그날 밤 죽을 것 같다는 예언으로 그의 숙명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피력하는데 실제로 불리치는 그날 밤 살해당하고 만다. 불리치는 그날 밤 죽을 운명이었으며, 러시안 룰렛은 피해갔어도 죽을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막심 막시미치의 마지막 말처럼 “그는 이미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예정된 운명에 따라 인생이 흘러간다는 생각은 푸시킨의 작품 곳곳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예브게니 오네긴 속 타티야나와 오네긴 사이에 오가는 사랑의 편지에서 그러하다. 두 편지가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고 두 사람의 상황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주도성이 인간이 아니라 운명에 있다는 생각은 꽤나 비슷하다. 먼저 첫사랑의 격정에 휩싸인 타티야나가 오네긴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간이 많이 흘러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여왕이 된 티티야나에게 오네긴이 편지를 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부질없는 짓, 순진한 영혼의 기만일지도! [...]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제 제 운명을 당신께 드립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더 이상 제 자신을 거역할 힘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의 처분만 기다리며 운명에 복종하렵니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두 편지에서 반복되고 있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но так и быть)”라는 표현은 러시아적 운명관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특성, 이른바 ‘운명에의 순종’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러시아적 운명의 토포스가 다른 문화권의 것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운명의 의미 자체라기보다는 운명에 대한 태도에서 그러할 것이다. 운명의 위력, 그것을 피할 수 없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은 운명에의 순종 사상으로 귀결된다. ‘수디바’의 어원이 신의 ‘심판’인 것에서도 드러나듯, 이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은 이미 고대 시기부터 존재하였으나, 이를 더욱 추동한 것이 정교적 운명관이다. 기독교 수용 이래로 기독교적 세계관이 러시아 운명관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부분도 이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운명에 대한 순종에서 그 가치적 측면이 두드러지게 부각된 것이다. 운명은 신의 뜻으로서 이를 거부하지 않고 따르는 것은 신앙적 의무이며 따라서 이는 신의 뜻에 대한 ‘거룩한 순종’인 것이다.
  운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스토아학파나 니체가 주창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와도 유사한 듯하다. 니체의 ‘운명애’는 운명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이에 단순히 순종하는 것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인간의 위대함이 발휘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운명에 대한 러시아적 태도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껴안고 사랑하는 능동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신의 뜻 앞에 순종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거룩한 체념’에 보다 가깝다. 이는 또한, 러시아인들의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복종’과도 다소 상이한 것이다. 러시아 사상가들은 러시아적 ‘복종’을 차르들이 휘두르는 서슬 퍼런 칼날의 위력으로, 그리고 교회의 협력 하에 진행된 차르의 신성화 작업의 결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두려움에 기반한 ‘맹목적인’ 복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운명에 대한 태도는 ‘아모르파티’와도 다르고 ‘맹목적인 복종’도 아닌, 러시아 정교의 이상이 농축된 ‘순종’ 사상과 더 관련이 깊어 보인다.
  한편 현대 러시아에서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이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인식보다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제어하고 조절해나갈 수 있다는 인식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다는 견해도 나타난다. 가령 시멜료프(2002)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운명에 대한 관점 변화는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손 안에 있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다”,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키다”, “인간은 자기 운명의 대장장이이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솔제니친의 로스토프 대학 강연도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운명관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외적인 상황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성격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신은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하기 때문이다. [...] 이런 저런 선택들에 따라 당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솔제니친, 1994, 시멜료프(2002)에서 재인용)

  골로바닙스카야(2009)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의 의지로써 운명에 대항하고, 싸우고,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식의 운명관, 곧 인간과 운명의 관계에 있어 인간의 주동성, 적극성은 18~19세기 유럽문화, 특히 프랑스 문화의 영향으로 퍼져나간 인식이라고 한다. 그 이전까지 러시아적 운명의 토포스에서는 인간의 주도적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 러시아인들 중에는 운명에 순종하는 것보다 대항하는 테마를 더 선호하고 운명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의지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일상 발화에서 인간의 의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주는 표현들, 또는 인간의 의지나 행동이 운명에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속담들이 여전히 널리 사용된다. 

“자기 의지는 가혹한 운명으로 이끌 뿐이다.”
“의지가 강할수록 운명은 가혹해진다.”
“빨리 가면 불행을 잡게 되고 천천히 가면 불행에 잡히게 된다.”

  이처럼 현대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운명에 맞서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라는 측면이 생소하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명에의 순종보다 여전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적 운명의 토포스가 그 독특함을 드러내는 것은 운명에 대한 순종적 태도로 한정되지 않는다. 러시아적 운명 곧 ‘수디바’가 드러내는 의미범주가 다른 언어권의 상응어보다 훨씬 폭넓다는 데서도 러시아인들의 운명관이 드러난다. 다른 언어들의 유사 어휘와의 비교 연구에 따르면 ‘수디바’가 여타의 유사어들과 다른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 빈도수에 있다. 영어의 fate, destiny 등과 달리, 또한 러시아어 내 유사어들과 달리 ‘수디바’는 러시아 일상 발화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학 작품에서 상당히 빈도 높게 나타나는 단어 중 하나에 속한다. “‘수디바’를 만나지 않고 러시아 소설, 회상록, 편지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베즈비츠카, 『의미, 문화, 그리고 인지』)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인들이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있고 러시아인들이 운명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수디바’의 이러한 높은 빈도는 이것에 반영되어 있는 ‘삶’, ‘인생’의 의미와 보다 관련이 깊어 보인다. 

“너는 내 운명(‘수디바’)에서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별이 찾아왔다. (파스테르나크, <여명>, 1947)

  베즈비츠카(1992)는 이때 ‘수디바’가 영어로 종종 destiny로 번역되지만 여기서 ‘수디바’가 뜻하는 바와 destiny의 그것은 다소 상이하며 오히려 life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life와도 또한 다른데 ‘수디바’로서의 인생에는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독특한 러시아적 방식이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 ‘인생’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을 ‘운명’이라 이름 붙이는 데에는, 인간의 전 생애를 운명으로 바라보는 인식, 삶이란 인간에게 ‘우연’으로 보이는 것들의 연속이지만 이 우연들이 ‘필연’으로 엮어있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세르게이 본다르츄크가 주연, 감독한 영화 <인간의 운명(‘수디바’)>(1959) 속에서도 발견된다. 영화는 『고요한 돈 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하일 숄로호프의 동명 소설(1957)을 원작으로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안드레이 소콜로프란 인물을 통해 인간의 삶이란 것이 척박하고 억센 운명에 다름 아님을 보여주고 이와 함께 이를 감내하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희망도 담아내고 있다. 작품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원작과 영화가 모두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이를 ‘인생’이 아니라 ‘운명’이라 이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을 운명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운명 개념을 빈도높고 일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이와 함께 ‘운명의 일상성’을 강화시킨 또 다른 상황도 존재한다. 종종 러시아 담화의 특징으로 간주되곤 하는,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에 대한 체념적 표현, 혹은 현실과의 화해라고도 볼 수 있는 표현들 속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운명’이다.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러시아인들이 종종 하는 말 “즉, 운명이 아니란 말이지(Значит, не судьба)”라든가, 반대로 바라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 하는 말 “이게 내 운명이니 어쩌겠어(Такая уж у меня судьба)”란 표현이 그러하다. 고골의 『검찰관』에서 느닷없이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읍장 안톤 안토노비치가 하는 말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 안톤 안토노비치, 도대체 왜, 무엇 때문이지요? 왜 검찰관이 오는 거죠? 
- 왜라뇨! 운명 아니겠습니까.” (고골, 『검찰관』, 1836)

  이렇게 운명은 삶의 예측불가능성, 세상만사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감을 인정하고, 우리가 바라지 않은 일이 일어나거나 바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순응하는 편리한 수단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운명이니 어쩌겠어”, “운명이 아니란 말이지” 등과 같은 이른바 운명 구문에 담겨 있는 운명의 의미는 우리말의 ‘운명’이라는 어휘가 주는 무게만큼의 진중한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맥락에서 보다 쉽게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운명(‘수디바’)을 아주 심각하거나 중대하다기 보다는 다소 가볍고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러시아 운명 토포스의 독특한 특성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운명’을 뜻하는 프랑스어 ‘대스탱’은 ‘예정하다, 지정하다’라는 뜻의 동사 ‘대스티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고전 라틴어 동사 ‘데스티나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디바’를 포함하여 러시아 ‘운명’ 어휘들도 모두 동사 파생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몫을 나누다’, ‘말하다’, ‘심판하다’ 등 다소 상이한 의미의 동사로부터 온 것들이지만 프랑스어와 러시아어 모두 동사 파생어로서 운명 어휘들은 독특한 동사적 의미를 포괄하며 종료된 행위의 결과로서 ‘완료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곧 운명은 이미 ‘예정된 것, 나누어진 것, 말해진 것, 심판받은 것’으로서, 이것을 되돌리거나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예정하고, 나누고, 심판하고, 말하는 자’가 누구인가, 곧 운명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기독교 전파 이전의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운명의 주체는 어떤 초월적 힘, 필연적 힘의 작용으로 생각되었다면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그 자리를 신이 대신하게 된다. 이렇게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에서 운명의 토포스가 형성되는 과정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이후 두 나라에서 운명의 토포스는 전혀 상이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프랑스에서는 계몽의 시대 18세기와 프랑스 혁명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의 힘이 천명되고 공화정과 왕정 사이에서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았던 19세기를 거치면서 운명의 토포스는 다소간은 희미해져갔다. 운명 자체보다는 운명과 자유의지의 대립항이 프랑스 예술과 문학,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에 자양을 공급한 유의미한 토포스였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기독교 전래 이후에도 운명의 막강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의 위력,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은 운명에의 순종 사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교적 세계관이 기여한 바도 크다. 운명은 신의 뜻으로서 이를 거부하지 않고 따르는 것은 신앙적 의무이며 신의 뜻에 대한 ‘거룩한 순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한 운명을 아주 심각하거나 중대하다기 보다는 다소 가볍고 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도 러시아 운명 토포스의 독특한 특성이다. 러시아적 운명의 의미는 우리말의 ‘운명’이라는 어휘가 주는 무게만큼의 진중한 것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 맥락에서 보다 쉽게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는 운명을 인간의지로써 적극적으로 제어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는 듯도 보인다. 인간과 운명의 관계에 있어 인간의 주동성, 적극성은 18~19세기 유럽문화, 특히 프랑스 문화의 영향으로 퍼져나간 인식이다. 
  이렇듯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에서 운명의 토포스는 상이한 방식으로 발현되어왔으며, 합리적 이성의 나라 프랑스에서보다는 러시아에서 더욱 활발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연관 토포스 영혼; 자유; 정교; 죽음
참고자료(프랑스) Jacques Monod, Le Hasard et la nécessité. Essai sur la philosophie naturelle de la biologie moderne. Paris, Le Seuil,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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