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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유대인
토포스명(프랑스) juifs
토포스명(러시아) еврей
정의 1. 유대인은 폐쇄적인 선민의식이 강해서 숙명적으로 타 민족의 증오를 초래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유대인을 뜻하는 프랑스어 ‘쥐이프 Juif’는 히브리어 ‘יְהוּדִים 예후딤[yehoudim]’, 또는 고대 희랍어 ‘Iουδαῖοι 유다이오이’ 에서 유래한다. 어휘의 변천의 과정에서 라틴어 ‘Iudaei 유데이’를 거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초로 간주되는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족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 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가나안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 으로 정착하여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그 후 그들을 히브리 민족이라 일컫게 되었다. 
  히브리 민족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에 이르러서 12명의 아들이 이른바 ‘12지파’를 이루게 되면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다. 12지파 중 네 번째 지파인 ‘유다’ 지파가 가장 왕성한 정치적 영향력과 실권을 장악하고, 이방 민족들과 혈통적으로 섞이지 않으면서 순수한 히브리 민족의 피를 이어 받은 정통성을 유지하면서 히브리 민족이라는 말보다는 ‘유대인’, ‘유대민족’으로 불리게 된다. 사가들은,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유대 왕국이 멸망하고 주로 지도층 주민들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끌려가게 된 사건을 유대인들의 특별한 운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그 후 서기 2세기 초에 로마 제국의 압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발한 전쟁에서의 유대인들은 패배하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잃고 전 세계를 전전하는 떠돌이 삶으로 내 몰리게 된다.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의 이러한 유랑의 생을 오늘날 ‘디아스포라’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들의 일부는 북아프리카와 아시아로까지 흩어졌으나 초기에는 주로 유렵과 중동으로 이주하게 된다.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는 동안 이들은 생존을 위해 멀리 영국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중국에, 그리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까지 거주 영역을 넓히게 된다. 
  거의 이천 년에 이르는 디아스포라, 즉 떠돌이 삶은 이들의 정체성 자체가 되었다. 유대인은 그 흩어진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고 이름 붙여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인데, 전자는 주로 프랑스, 독일 등의 서유럽과 체코, 폴란드, 러시아 등 동유럽으로 퍼져나간 일군을 지시한다. 이들의 숫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증가하여 전체 유대인의 4 분의 3 이상에 이른다. 그리고 후자는 주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하나 이란을 비롯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남은 이들을 포함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아슈케나짐은 히브리어로 ‘독일’ 지방을 뜻하는 말이므로, 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주로 그곳에 많이 정착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독일계 유대인들은 점차로 퍼져나가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헝가리, 폴란드,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로 이주하여 비독일어권 지역에서도 많은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준 것은 토라와 탈무드였다. 구약 성서의 첫 5권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 조합을 일컫는 ‘토라’는 그 의미를 넓혀 구약 성서 전체를 가리키기도 했는데, 그들에게는 ‘신이 내려주신 계율’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로 구분되는 탈무드는 그들의 피곤하고 긴장된 일상을 지켜주는 일종의 생활 규범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조건 짓는 가장 큰 변수는 그들을 지리적으로 둘러싸고 있던 주위의 다른 민족들 혹은 국민들이었다. 유럽의 어느 마을 어귀에 자리 잡든 간에 그들 자신이 우선 ‘타자들’로 간주되었다. 그들이 정착한 곳에서 그들은 늘 우선 ‘이방인’이었다. 이들과 이민족들 간의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긴장과 이질감이 가로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러한 독특한 이질감의 형성에는 일정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조건들이 작용하였다. 약 이 천 년 간에 걸쳐 집적되고 응축된 그 긴장은 급기야 1940 년경에 이르러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대 학살극을 빚기도 하였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유대인을 뜻하는 러시아어 ‘예브레이 еврей [ebrei]’는 고대 그리스어 ‘Ἑβραῖος[hebrajo]’를 기원으로 한다. 영어로 보통 ‘Hebrew’, 우리말로는 ‘히브리’로 표기하는 고대 그리스어 ‘Ἑβραῖος’의 어원적 의미는 ‘강을 건너온 사람, 이주자’를 뜻한다. 유대인을 지칭하는 또 다른 러시아어인 ‘이우데이 иудей [iydei]’는 ‘유다’의 후손, ‘유대왕국’의 후손을 의미하는 고대 희랍어 ‘Ἰουδαῖος’에서 유래한 말로서 주로 ‘유대민족’을 통칭하여 이를 때 사용되곤 한다. 
  유대인을 뜻하는 또 다른 러시아어로는 ‘지드 жид [zid]’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단어는 유대인이 실질적으로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용된 단어로서 주로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과 모욕의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이후 동유럽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아슈케나짐’ 분파의 유대인들이며, 이들은 키예프 루시 시대부터 러시아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그들을 주로 ‘지드’라고 불렀는데, ‘지드’는 이탈리아어의 ‘giudeo’ (유대인을 뜻하는 라틴어 ‘judaeus’에서 유래)를 차용한 것으로 유대인을 뜻하기는 하지만 주로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을 경멸한 이유는 서유럽과 유사하다.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은 예수에 대한 핍박과 십자가형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고, 이러한 전통은 988년 동방 정교를 받아들여 기독교 국가로 출발한 키예프 루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새로운 이스라엘’ 표방하였던 키예프 루시는 예수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자 예수의 존재를 부정한 유대인들을 극악한 범죄자들로 취급하는 동시에 신에 의해 버림받고 저주받은 민족으로 인식하여 적대감과 멸시의 태도를 보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고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을 의미하는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예브레이’, ‘이우데이’, ‘지드’라는 세 가지 단어가 존재하지만, 일상에서 러시아인들은 ‘지드’라는 단어를 주로 많이 사용하여 유대인에 대한 경멸의 태도를 드러내곤 한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도 이러한 현상은 유지되었으나, 1787년 예카테리나 2세가 당시 유대인의 집단 거주지였던 쉬클로프 시를 방문하였을 때, 당시 유대인들이 국가 공식 문서에서 ‘지드’라는 단어를 금지해달라고 탄원하였고, 여제가 이를 받아들여 한동안 제정 러시아의 공문서에서는 ‘예브레이’라는 단어만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세기에도 공문서에서 ‘지드’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공문서를 제외한 문학 작품들과 일반 대중들의 어휘 속에서는 여전히 폭넓게 사용되었고, 19세기 말까지 ‘지드’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19세기 말에 ‘예브레이’, ‘지드’, ‘이우데이’에 대한 공식적인 규범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예브레이’는 일반적인 유대민족, 유대인을 의미하였고, ‘이우데이’는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로서 사용되었고, ‘지드’는 보다 직접적인 인종, 혈통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의미도 존재하였다. 
  한편, 1912년 간행된 블라지미르 달의 『러시아어 해석 사전』의 네 번째 간행본 에는 ‘지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민중에서 불리는 ‘유대인의 옛 명칭’, 두 번째 의미는 ‘유대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 세 번째 의미는 ‘수전노, 탐욕적인 사람, 구두쇠’로 설명되어 있다.
  혁명의 기운이 만연했던 20세기 초에는 이처럼 ‘지드’가 지니고 있었던 부정적인 의미가 사회 전반적으로 많이 약화가 되긴 하였지만 여전히 이중적인 인식이 남아 있었다. 특히 당대의 유대인들과 긴밀한 연관 관계에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은 ‘예브레이’를 썼고, 민족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혐오의 의미로 ‘지드’를 쓰곤 하였다. 
  1917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는 볼셰비키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유대인들을 위해서 ‘反유대인운동’을 박멸시키려고 노력하였고, 그 배려의 일환으로 1918년 채택된 반유대인 차별 금지 법령에 의해 ‘지드’라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고, 이를 어길 시에는 형사상의 처벌을 명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5년 발행된 『러시아어 해석 사전』의 일곱 번째 간행본에는 ‘지드’라는 단어 자체를 아예 삭제시켜버리기도 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뉴질랜드인’, ‘중국인’, ‘케냐인’ 혹은 ‘캐나다인’이 문화 토포스 사전의 한 항목을 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대부분의 서구인들 그리고 세계사에 관한 기초적 교육을 받은 동양을 포함한 전 지구인들은 일정한 정서적 혹은 지적인 환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말하자면, 지구촌을 형성하는 여러 국민들 혹은 민족들 가운데서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특히 서구의 많은 국민들 혹은 민족들에게 남다른 의미로 관계한다. 그 관계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일 수 있으며 때로는 본질적인 어떤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다분히 심리적이며 문화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남다른 역사적 삶의 궤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그 민족의 이름이 하나의 문화 토포스로 자리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복수의 개별자들 중 하나가 나머지 개별자들에게 일정한 정도로 공통된 정서적 함의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개별자가 나머지들에게 어떤 공통된 모습과 의미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것은 아니나, ‘유대인’이라고 했을 때의 모습을 유럽 대륙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재현하는 문화적 생산물로서, 16세기 말에 셰익스피어가 발표한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을 떠올릴 수 있다. 극의 말미에 상인 안토니오가 샤일록의 기독교로의 개종을 그리고, 재산을 딸에게 분할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되는 이 희극은 근대 유럽인들의 유대인 인식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기존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우선, 호기심어린 이질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존재와 그 실존들이 프랑스, 영국,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이라는 주체에 의해 어떻게 다루어지고 또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대상화될 것인지를 결정적으로 알게 되기 위해서는 20세기를 기다려야할 것이다. 
  그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우선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후예들이며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느새 마을의 돈줄을 쥐고 있는 전주들로 여겨졌다는 점이다. 
  한 지역에 전통적으로 거주해 오지는 않은 이 외지인들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임대하여 농업에 종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들은 생존을 위한 방책으로 주로 대부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모두가 모이는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대신 이들은 자신들만의 폐쇄된 장소에서 자신들만의 의식에 따라 신에게 기도하였다. 이러한 모습이 현지인들에게 불러일으킨 경계심 혹은 반감은 그 어떠한 역사적 계기로도 쉽게 변하지 않고 꾸준히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오늘날의 역사적 상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세 시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직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관리가 될 수 없었으며 길드에서 배제되었으며, 종교단체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도시 어귀에 머물면서, 기독교인들이나 이슬람교도들에게는 금지된 활동들, 가령 교역이나 대부업 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서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유대인’의 토포스에 ‘탐욕’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너무나도 자주 그들은 ‘수전노’, ‘경제의 흡혈귀’, ‘살쾡이’로 표상되었다. 대표적으로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두 유대인 곱섹과 뉘생장을 일별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전자는 동명의 제목을 단 소설 속에서 고리대금업자로 등장하여 일생에 걸쳐 재물과 황금을 축적해 가며 그 과정에서 주변의 경제주체들은 어느새 피를 다 빨아 먹히고 만다. 후자는 아예 ‘금융의 살쾡이 ’라는 별칭으로 묘사된다. 
  프랑스어로 앙티세미티슴 (유대인혐오, 반유대정서)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정확하게는, 1860년에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지식인 모리츠 슈타인슈나이더가 “반유대인 편견”이라는 표현을, 유대인을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민족”이라고 말한 프랑스 민족주의 작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발상을 규정하기 위해 썼다. 그러한 정서의 발현 일반을 일컫는 “-isme”이 붙은 말은 1879년에야 등장하는데, ‘반유대인 연맹’의 창설을 계기로 독일의 언론인 빌헬름 마르가 썼다.
  언어는 실체가 실재한 후 그것을 지시하고 뜻하기 위해서 사후에 온다. 이러한 증오의 연대의 뿌리를 혹자들은 기원전 이집트에서 찾는다. 이집트 문명시대의 출애굽, 로마 제국 시대의 핍박 등은 그러나 특정한 정치 역사적 조건의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역사학자 쥘 이삭의 고증에 의하면, 근대적 의미의 반유대정서의 출발은 4세기의 기독교 교부들에게서 싹튼다. 그리스 시대, 로마 제국 시대의 유대인 핍박은 정치적이었을 뿐 문화적인 것은 아직 아니었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기념비적 저작 『백과사전』에 “유대인” 항목이 등장한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책임진 그 담론의 질서 하에서 유대인은 특정 종교를 믿는 특정 민족으로, “남다른 역사를 가진 민족 ”이라고 매우 건조하게 기술될 뿐이다. 그러나 그 백과전서에, 특이한 모든 민족들과 국가들이 언급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역사의 한 가운데서 유대인이 어떠한 지평에서 표상되었는가는 독일계 유대인 미국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조사한 바 있다. 그녀에 따르면 드니 디드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유대인들을 당연히 멸시했으며 이들을 중세적 몽매주의의 후예들로, 귀족들의 재정담당관 쯤으로 간주하였다.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유대인들을 옹호한 자들은, 18세기의 주요 (철학적) 명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유대인을 향한 반감이라면서 비판한 보수주의적 작가들이었다.” (아렌트, 『반유대주의』, 1973)

  이렇듯 유대인 토포스는 서양 근대사의 정론적 질서로부터 삐져나간다. 다시 말해 반유대인 정서의 문제는 프랑스를 중심한 근대 이성의 민주주의적 전개의 틀 속으로도 결코 포용되지 못하는 듯하다. 볼테르의 『관용론』이 말하는 똘레랑스 역시 구교와 신교 사이의 화해와 공존이었다.
  타자에 대한 집단적 증오의 발현으로서의 ‘유대인’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것은 1984년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 의해서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밀 졸라 는 1898년 1월 오로르 지에 유대인 프랑스 장교 드레퓌스의 재판과 관련하여, “나는 규탄한다”를 기고하여 게재하게 됨으로써 ‘유대인’ 문제를 공동체 윤리에 관련될 수 있는 하나의 민감한 시금석으로 제기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지식인들과 문인들을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나누어 버린 이 사건은 세기말의 대중적 국수주의와 군사주의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내내 대자본가의 입장에 선, 역사적 반동 세력으로 비쳐지던 금융 유대인 세력에 대한 프랑스 민중들의 일차적 정치 감각과도 맞서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계기임에 틀림없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상식적 차원의 사회 경제적 담론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윤리적 인류학적 질문인 셈이었다. 그것은 마치 ‘남’과 ‘우리’를 가르는 손쉽고도 이기적인 기준의 반문명적 야만성을 폭로하려 든 시도였다.
  졸라의 이러한 노력 이전에도, 프랑스 19세기의 많은 작가들은 카톨릭적 전통의 권위와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채 자신들의 작품들을 위해 유대교적 영감에 기대었다. 샤토브리앙은 『기독교의 정수』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유하는 유일신 신앙의 기본 정신을 강조하며 『파리에서 예수살렘까지』에서는 유대인들의 전통이 갖는 근원적 성격을 찬양한다. 그리고 구약 성서의 웅혼한 역사성은 시인 라마르틴로 하여금 희곡 『사울』을 쓰게 하며, 절친인 알렉상드르 베이유의 영향 때문이었던지, 빅토르 위고는 작품 속에서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와 에스켈을 칭송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역사가 쥘 미슐레는 그의 『프랑스사』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동양과 서양을 연결 짓는 유일한 고리로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것이 아님을 역사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와 그 의미들 속에 형성되는 토포스들로 일상을 메워가는 민중들, 그들의 불안과 염원 시기와 희망들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아이에게 먹일 빵 한 조각을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하는 역사의 한 순간이 도래했을 때, 사진에서 보듯 “유대인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마시오”라고 쓰인 팻말의 유치함은 별로 부끄러운 것이 못된다.
  그리고 익명의 일상인들의 취약한 틈 속으로 파고든 나치라는 이름의 한 줌의 광인들이 그 역사를 손아귀에 넣는 일도 있었다. 2000년간의 질시와 증오는 예기치 않게 폭발하였다. 600만의 개인들이 희생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제 토포스 ‘유대인’은 복합적이 되었다. 혐오의 토포스가 죄의식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사실은 그 두 토포스는 쉽게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혐오의 토포스는 사실은 ‘선망’과 ‘경외’의 감정반응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그 경외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질시의 감정으로 바뀌기 쉽다. 
  2012년 5월, 50% 유대인이었던 사르코지를 이어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는 같은 해 7월 파리의 벨디브에서 다음과 같이 프랑스의 죄의식을 고백하였다.

“정확히 70년 전 오늘, 칠만 명의 유대인들을 프랑스가, 프랑스 경찰이 색출하여 이곳 벨디브에 모아서 당시 점령 독일군에게 넘겼으며 그들 중 2000 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좌우파를 막론한 거의 모든 프랑스 정치인들이 지체 없이, 올랑드의 발언은 과도하다고 힐난하여 들었다. 그 프랑스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건 우리 프랑스가 아니다. 그건 독일이며 나치이다. 그리고 독일 점령군에게 협력한 비시정부 당국일 뿐이다”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정치인들의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은 아우슈비츠를 감행한 혹은 침묵 속에서 지켜본 20세기 후반을 사는 서유럽 일상인들의 역사적 죄의식을 또한 역설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르클레지오의 『떠오는 별』은 언제 내려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 별은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를 비롯한 모든 서구인들의 자의식과 기억을 비추기 때문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로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된 것은 크게 두 시기를 걸쳐서이다. 첫 번째는 18세기 말인 1770년대에 러시아의 1, 2차 폴란드 분할에 의해 폴란드를 점령한 러시아가 당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수백만 명의 폴란드 아슈케나짐 유대인을 강제로 유입한 경우이며, 두 번째는 1939-40년에 히틀러와 스탈린의 밀거래, 즉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소련이 분할 받은 폴란드 동부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 120만 명이 유입된 경우이다. 
  러시아로 유입된 유대인들의 삶의 조건들은 매우 혹독하였다. 18세기 말에 제정 러시아는 유대인들을 일정한 지역에 머물게 하면서 그들의 거주를 제한시켰다. 1791년에 러시아는 법령을 제정하여 유대인들의 거주지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흑해 연안 지역으로 한정하였고, 농지를 소유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농촌 지역에도 거주하지 못하게 하였고 소규모의 상업과 수공업만 허락하였다. 거주 지역을 벗어날 경우 반드시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했으며 그 대상 역시 1급 상인(거부), 의사, 지식인등으로 한정시켰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인해 18세기 말까지 실제로 러시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직접 접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에게 유대인의 형상은 매우 낯설었다. 
  러시아인들이 유대인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된 계기는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을 방문하게 된 러시아 장교들에 의해서이다. 러시아 군대는 폴란드,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전쟁 첩자로 활동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유대인-첩자’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되었고, 전쟁 이후 러시아 사회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초반의 러시아 문학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당시 문학에 등장한 유대인의 형상은 주로 스파이, 배신자, 밀고자의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레르몬토프의 서사시 『사쉬카』(1835)에 등장하는 유대인 티르즈와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유대인』(1846)에 등장하는 유대인 기르쉘이며 이들은 실제로 나폴레옹과의 전쟁 시 스파이로 활약한 유대인들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유대인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푸시킨의 시 『검은 숄』(1820)이다. 푸시킨은 시에서 유대인을 직접적으로 ‘경멸스런 유대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의 내용은 푸시킨이 우연히 만난 그리스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친구들을 불러 축연을 베풀고 있을 때, 유대인이 그에게 다가와 그리스 여자의 배신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어느 날 떠들썩한 손님들 청했더니, ‘경멸스런 유대인’이 그 속에 끼어들었지. / 유대 인의 속삭임 <벗들과 술 마시는 동안 당신의 그리스 처녀가 배신을 했소. / 나는 그자에게 금화와 저주를 같이 주었다…….” (푸시킨, 『검은 숄』,1820)

  푸시킨의 희곡 『인색한 기사』(1830)에서도 역시 배신자, 이간자의 형상을 지닌 유대인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로 나오는 유대인은 ‘지드’로 표기 되어 있으며 작품 속에서 고리대금업자이자 전당포 주인인 유대인은 아버지를 독살하려는 아들 알베르의 계획을 돈을 받고 도와준다. 그의 첫 등장에 알베르는 “저주 받을 유대인이여!”라고 말하면서 그를 경멸하기도 한다.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토포스는 당대 러시아 사회의 정책과도 맞물려 있었다. 19세기 초 러시아를 통치한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그의 통치 시기(1825-1855) 동안 유대인 억압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독실한 정교 신자였던 니콜라이 1세는 유대교의 전통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혐오하여 민중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부추기면서 유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유대인 거주지 내의 랍비의 사법권을 폐지시켰고, 할례 금지, 유대인 전통복장 착용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니콜라이 1세는 유대인들을 12살에 군대에 의무적으로 복무하게 했으며, 입영 시 정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이를 거부하는 유대 어린이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러한 억압은 알렉산드르 2세의 통치시기에 와서(1855-1881) 다소 완화되는데, 알렉산드르 2세는 유대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일련의 법을 폐지시키고 집단 거주 지역을 벗어나 대도시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것은 유대 청년들이 전통적인 유대인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러시아에 동화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러시아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형상은 거의 일관되게 유지가 되는데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언제나 탐욕적인 인간, 수전노, 구두쇠, 배신자, 도둑, 비겁자등의 모습으로 비쳐줬다. 레르몬토프의 『에스파냐인들』, 『악마』, 고골리의 『타라스 불리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작가일기』, 체호프의 『초원』, 『아뉴타』 등에서 그러한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토포스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발생했던 이른바 ‘유대인 포그롬’이라 불리는 유대인 집단 학살사건이다. 1881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직후 발생한 사건들이 최초의 포그롬으로 여겨진다. 황제의 암살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고, 4월 15일에 우발적인 유대인과 러시아인의 다툼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적인 폭행, 약탈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1차 포그롬은 대략 1881년 4월에서 1882년 5월까지 수도인 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하여 인근 도시는 물론, 키예프, 오데사 지역까지 번져 총 224건의 포그롬이 발생하여 수많은 유대인의 생명과 재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1903~1905년에 발생한 2차 포그롬은 어린 소년의 시체가 발단이 되었다. 시체가 발견된 후 반유대주의 신문인 ‘베사라베츠’는 이 사건을 유대인들이 희생제를 위해 소년을 살해했다고 기사를 실으면서 러시아 전역에 또 다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폭행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1차 포그롬과 달리 2차 포그롬 당시 유대인들은 집단 자위대를 조직하여 러시아인들의 공격에 저항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키게 되었다. 특히, 고멜, 키시네프, 오데사 지역에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격전이 벌어져 약 3000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주목할 점은 2차 포그롬은 러일전쟁 시기와 맞물려 발생했는데, 러시아에서 억압당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해외에 거주하는 거부 유대인들이 일본에 전쟁 자금을 지원하여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많은 유대 청년들은 제정러시아에 큰 반감을 가지게 되어 사회주의자로 전환하게 된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혁명에 참가하여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고, 혁명을 주도했던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혁명 후 레닌은 유대인을 포용하는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유대인 탄압을 엄격하게 금지시키기도 했으나, 뒤이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은 또다시 소련 사회 내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스탈린은 히틀러식 유대인 탄압 정책을 모방하여 학계, 예술계, 공직 등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한편 유대인 학교를 파괴하고 히브리어 사용 등을 금지 시켰다.
  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유대인과 별도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은 물질에 집착하는 부정적인 형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는데, 1920년대 대표적인 소비에트 풍자 소설인 일프와 페트로프의 『열두 개의 의자』에서 나타난 다음과 같은 일화 속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늙은 유대인이 죽어가고 있었다네. 마누라와 자식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 ‘모냐가 여기 왔니?’ 유대인은 겨우 물어보았다네. ‘예, 여기 있어요.’ ‘그럼 브라나 숙모도 왔니?’, ‘예, 오셨어요.’, ‘그럼 할머니는 어디 계시니? 아직 보지 못했구나.’, ‘여기 서 계시잖아요.’, ‘그럼 이삭은?’, ‘이삭도 여기에 있어요.’, ‘그럼 아이들은?’, ‘아이들 모두 여기에 있어요.’, ‘그럼 대체 누가 가게를 보고 있는 거야!’ (일프와 페트로프, 『열두 개의 의자』, 1928)

  1948년에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설하게 되자 소련 내의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이 친미 성향을 보이자 소련 내의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소 양국의 냉전이 시작되자 소련 내의 유대인의 탄압은 극에 이르렀다. 
  현재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은 약 1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그들은 타민족과의 결혼 허용, 유대 전통 교육 부재로 인해 선조들에 비해 민족 정체성이 많이 약화되었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러시아 내의 반유대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데, 오랜 기간 내려온 역사적 편견과 현재 러시아에서 불고 있는 민족주의, 그리고 경제 위기로 인한 유대인 기업가들에 대한 반감이 그 주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토포스로서의 ‘유대인’이 지니는 문화 심리적 의미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에서 사뭇 다르게 드러난다. 프랑스어 ‘쥐이프’와 러시아어 ‘예브레이’가 갖는 말의 차이는 아무래도 지리적인 이유에서 먼저 설명되어야 할 듯하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고향으로부터 러시아는 프랑스보다 훨씬 더 먼 곳이었다. 
  그러니 만큼, 러시아의 경우, 18세기 말에 정치적 이유에서 인위적으로 대규모로 유대인들이 유입되기 전까지, 그 이방인들은 러시아인들의 일상 속에서 쉽사리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소규모로 거주하였다. 
  그에 비해 서유럽의 중심에 위치한 프랑스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해 현지인들이 느끼는 존재감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물론 소수의 낯선 이방인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의 모습은 훨씬 더 자주 눈에 띄었으며 그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삶과 문화와 종교를 살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관찰되었을 것이다. 
  중세 이래로, 프랑스인들의 심성 속에서 유대인들의 존재가 느껴지는 방식과 그 변천 과정은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이다. 즉, 서유럽의 프랑스인에게 있어, 새롭게 출현한 일군의 낯선 자들은 우선 경계와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며 이후에는 학문과 금융 등의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그들의 비범한 재능을 선망과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또한 현지인들의 삶의 방식에 녹아들기를 거부하는 이질적 집단에 대한 혐오가 있었을 것이며, 윤리적으로 떳떳치 못한 그 혐오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그들을 향해 경멸의 이미지 덧씌우기 위한 과정도 거쳤을 것이다. 나치의 학살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리 학살이었으며, 그 와중에 600 만 명을 희생시킨 끔찍한 죄의식을 침묵 속에서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유럽인들이 역사적으로 경험한 그러한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하기에는 너무 멀고 추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경계심, 선망, 질시의 은밀한 감정들을 러시아인들은 상대적으로 덜 느껴도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지배 권력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 반유대인 정서에 기반을 둔 사회적인 정책을 펴기도 하였던 것이다. 가령, 19 세기 전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반 유대인 정책을 공식적으로 내걸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인을 향한 경멸의 감정도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작가들도 그들의 작품 속에서 유대인을 향한 경멸의 감정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었다. 반면 프랑스의 경우, 가령 ‘수전노’ ‘살쾡이’로 일컬어지는 발자크의 곱섹과 뉘싱겐 남작도 소설 속에서 정작 ‘유대인’이란 명시적 규정은 작품의 초입에서 한두 번만 언급되면 충분하였다. 프랑스 독자들은 소설 한 권을 읽는 내내 그들이 유대인들임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관 토포스 관용; 신앙; 죄의식; 증오(혐오); 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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