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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범주명 문학과 예술
토포스명(한글) 유토피아
토포스명(프랑스) utopie
토포스명(러시아) утопия
정의 1. 유토피아를 추구하면 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유토피아’를 일컫는 프랑스어는 “위또삐 utopie”이다. 이는 영어의 “유토피아 utopia”의 프랑스어 식 발음일 뿐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510년 경 영국의 인문학자 토마스 모어가 가공의 소설 『유토피아』를 쓰면서 생긴 이 말은 부정(否定)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ou-’와 “장소”를 뜻하는 명사 topos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즉 ‘없는 곳’이라는 뜻이 된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즉 이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곳에 대한 이상적 담론인 그 소설에서 모어는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체류하던 시기에 만난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라는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섬나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유토피아는 당시 유럽 사회가 지닌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측면과 대비되는 사회, 완전히 다른 원리에 의해 구축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영국의 현실에 대해서 라파엘의 통렬한 비판으로 이루어진다. 영주들이 양떼를 키우기 위해서 소작농들을 내쫓기 때문에 농민들은 땅을 떠나 떠돌면서 걸인이나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양떼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사회의 타락한 풍조로 인해 사람들을 술이나 도박 같은 향락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 땅을 잃은 부랑자들의 범죄를 가중시킨다. 그런데 당국은 이들을 범죄로 몰아세우는 사회구조를 개선시키기는커녕 가혹한 형벌로 범죄자를 처벌할 뿐이다. 
  라파엘은 이러한 불의와 비참은 궁극적으로 사유재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서 사유재산을 철폐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악덕을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모어가 사유재산이 없다면 사람들이 힘들여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하자, 라파엘은 사유재산이 없는 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여행했던 유토피아 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것이 소설의 2부를 이룬다. 
  유토피아는 대서양 신대륙 쪽 어딘가에 위치한 섬이다. 원래는 대륙에 붙은 반도였는데, 유토피아의 왕 유토푸스가 자족적이고 완벽한 도시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물길을 내어 섬을 대륙으로부터 고립시킨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유토피아에서는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자신의 경작지를 부여받고 노동에 종사한다. 사유재산이 없는 그들은 물자가 남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필요한 것을 관리들에게 신청하여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다. 그들은 과소비를 하지 않기 때문에 불필요한 물품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를 축적하는 수단인 화폐는 별반 필요하지 않다. 유토피아의 주민들은 적게 일하는 대신에 남는 시간을 학문이나 예술 등 정신적인 소양을 개발하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국가의 공공 업무에 참여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참여에 의해 운영되는 공화제이며 각 지역과 부족의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와 민회에 의해서 통치된다. 그에 따라 현실에서 발생하는 각종 범죄나 잔인한 처벌이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덕성을 소중히 여기면서 충분히 인간적인 삶을 누리고 공동체는 지극한 안정적인 평화를 구가하게 된다. 이는 1부에서 지적된 현실의 온갖 불의와 비참한 상황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어쨌든 모어의 소설에서 기원하는 ‘유토피아’라는 말은 결국, 인간의 실존에 대한, 그리고 그 터전이 되는 공동체에 대한 모든 인문학적 성찰과 논의에 하나의 지침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그 함의는 “이 땅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idéal)”으로서의 의미일 것이다. 그 토포스의 이중적 함의는 ‘이상향’ 그리고 ‘비현실성 혹은 비 실재성’이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지 않는 단어는 없다지만, 유토피아만큼 그 의미가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 개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유토피아의 통상적인 의미는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 개념의 역사적인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비현실성이나 이상성(理想性) 자체가 문제시 되는 경우도 종종 목도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적 불안정성은 결국, 이상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꿈이 갖는 근원적인 모호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은 모어의 소설 속에서 유토피아라는 섬의 위치가 명확히 지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렇듯 모어의 『유토피아』는 한편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합리적으로 구성하려는 진지한 정치적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유희적인 상상의 구조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어원적으로 ou + topia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eu + topia (‘좋은 곳’)이기도 하다. 토머스 모어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가 동시에 가능함을 언급하기도 했다. 유토피아 개념의 핵심적인 모호성을 은 바로 이러한, 비현실성과 이상성이라는 두 계기가 가져오는 이중성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유토피아 개념의 비현실성에 대해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신구논쟁을 거치고 계몽주의가 유행하면서 인간사회를 이성에 따라 개선할 수 있다는 신념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인류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기 시작한다. 과거에 단지 몽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많은 일들이 미래에는 가능하리라는 생각들이 생겨난 것이다. 즉 유토피아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대신에 그것의 미래적 지향성에 무게를 두려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는 공간의 담론으로부터 시간의 가능성으로 초점을 옮김으로써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미지의 지역에서 먼 미래로 이상 사회를 옮겨놓음으로써 새로운 장르의 유토피아 문학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이론가들은 유토피아(무-공간)에 비견하여 ‘유크로니아 u-chronia’(무-시간)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토피아 문학이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를 그리고 있다면, 유크로니아 문학은 단지 지금이 아닐 뿐 ‘우리’의 미래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화론적인 사유에 따르면 그것은 오히려 역사의 필연적인 결과로 이해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19세기 초반에 유토피아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비현실성이라는 특징을 급속하게 탈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시인 라마르틴은 유토피아를 “때 이른 진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아직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수밖에 없는 진리라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경험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기획을 직접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을 발생시켰다. 유토피아 문학이 상당부분 쇠퇴하면서 대신에 이상적인 사회를 설계하는 수많은 사회개혁 프로그램들이 등장한다. 대체로 사유재산을 부정하거나 제한하고 이성적인 원리에 따라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성하려는 사회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인 경향의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사회 운동 사상가 생시몽과 푸리에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구상은 훗날 독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비판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후자들의 사유체계의 빌미 혹은 씨앗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사회사상가들의 몽상적 성격을 향해 집중 비판하면서 자신의 이론에 현실성을 부여하게 되는데, 바로 경제적 관점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두 요소를 대립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사유재산이 없는 이상적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서 그는 노동운동과 혁명이라는 실제적인 행위를 요구하였는데, 생시몽과 푸리에의 사회주의를 ‘유토피아적’이라고 또는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그 ‘과학’ 기술이 종국에는 유토피아를 가장 끔찍한 악몽의 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기술과 자연과학의 발달은 많은 인문학자들과 문학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어쩌면 먼 훗날엔 유-토피아가 정말로 하나의 토포스(장소)로 구현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하게 만들었다. 소설가들의 이러한 꿈은 ‘0000년’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나타난다. 18 세기의 메르시에, 19 세기의 쥘 베른, 그리고 20 세기의 조지 오웰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앞의 두 프랑스 소설가에게 과학은 ‘꿈’과 ‘희망’이었지만 그러나,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목도한 조지 오웰에게 과학은 ‘끔찍한 억압과 통제의 기술’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늘날처럼 모든 엘리베이터에 CCTV가 설치되기 훨씬 전임에도 불구하고 오웰은, 모든 곳을 볼 수 있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모든 이의 생각을 읽고 감시할 수 있는 ‘빅 브라더’를 형상화 해 냈던 것이다.
  오웰과 함께 많은 작가들이 유토피아의 어설픈 구상이 어떻게 ‘디스토피아 dystopia (나쁜 곳)’으로 변질하는지를 문학적으로 구현하고 난 20 세기 후반에는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이원 대립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발상이 등장하는데,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푸코에 의해서이다.
  푸코는 1967년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한 한 강연에서 ‘다른 곳 Des espaces autres’을 말하면서 이를 ‘헤테로토피아 hétérotopie’라 부른다. 가령, 파리의 도심 한 가운데 버젓이 자리 잡은 가족공원묘지들 앞을 지날 때, 혹은 가끔 정색을 하고 거울을 들여 다 보는 순간에 우리들은 조금은 색다른 곳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 기분은 처음으로 홍등가에 들어서는 사춘기 청년의 야릇한 감정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구상에 없는 ‘없는 곳’이나 ‘매우 나쁜 곳’ 대신에 현실에 실재하는 ‘다른 곳’에 주목하는 이 새로운 사유 또한 토포스 ‘유토피아’의 한 변주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유토피아(утопия: utopia)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 “어디에도 없는 곳”을 의미하며, 통상 이상의 나라,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라톤이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자신의 저작 『국가』에서 설파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유토피아의 이념은 고대, 아니 그 이전 인류의 시초부터 있어온 바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유토피아라는 말은 16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 개념은 토마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원제: <가장 나은 사회 상태 또는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대해>)(1516)를 시작으로 해서, 이후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1627) 등이 나왔던 16-17세기 근대 유럽에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ου-τοπος)’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기원한다. ‘토포스(τοπος)’는 장소 또는 위치라는 의미인데, ‘아닌’ 또는 ‘없는’이라는 의미의 접두사 ου와 결합된 이 형용모순적인 단어는, 그러므로 인간의 일상적 시공간 인식의 틀 안, 즉 지상 세계와 역사에는 존재할 수 없는 곳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어는 말장난처럼 유토피아의 접두사를 '좋은(eu)'이라는 뜻을 연상하게 하는 이중적인 것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문학작품이나 철학 사상사에서 이야기되는 유토피아는 주로 역사의 종말이나 시작점에, 그리고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모어는 유토피아를 ‘Nusquama’, 즉 ‘어디에도 없는 곳’(영어로 nowher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상 유토피아는 ‘여기’라는 공간과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부정으로, ‘너머’의 세상에 대한 추구와 지향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유토피아는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혁명적 사유, 또는 미래의 과학기술의 발전 또는 원시낙원으로의 회귀 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유토피아가 현존하는 사회의 질서에 대한 의문과 그 극복에 대한 의지에서 시작되며, 보다 나은 상상된 시공간을 열망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인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집착과 실현 노력은 러시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전통이다. 문학과 예술, 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많은 예술가 사상가들과 더불어, 러시아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현실유토피아를 실현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러시아에서 유토피아의 토포스는 이 두 용어, ‘유토피아-토포스’ 가 지니는 ‘없음-있음’의 변증법만큼이나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고대 러시아에서부터 유토피아 사상은 ‘지상에 건설된 신의 왕국’, ‘지상 천국’ 등의 개념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표상되어 왔다. 원시 공산주의와 유사한 러시아 특유의 유토피즘은 정교 신앙과 결합되거나 농민 공동체 유토피아 개념과 결합되어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복잡 다양하게 발전했다. 유토피아의 현실화라는 명제에 충실했던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전통에 비추어 보면 어쩌면 당연한 역사적 결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 유토피아의 전통이 문학 장르나 사상으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국가 자체가 하나의 특수한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인식되어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런데 특유의 유토피즘에 침잠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까지도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천년 왕국’이나 ‘모스크바 제 3로마’, ‘범슬라브주의’가 유토피아라는 용어와 직접적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 유토피아 1세대 연구자인 스뱌틀롭스키는 “유토피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러시아의 유토피아는 모른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스뱌틀롭스키, 1922).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출판된 유수의 백과사전 ‘유토피아’ 항목에도 러시아의 전통적 유토피아에 관한 내용이 부재하다. 당시 연구자들은 러시아 혁명이 플라톤과 토머스 모어, 캄파넬라, 푸리에, 체르니셉스키의 전통을(즉 서유럽적인 사상으로서의 유토피아) 잇는다고 생각했지 러시아의 전통적 유토피즘(정교의 지상천국, 농민/민중 유토피아 공동체 등)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유토피아주의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상의 천국’ 개념과 연관된 유토피아 사상이 러시아에 적극적으로 나타난 것은 10세기 말 정교의 도입 이후인데, 러시아인 특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이상향’으로서 천국의 개념과 결합되어, 러시아 정교의 이념으로 녹아들게 된 것이다. <지나간 날의 연대기>에 기록되어있듯, 블라디미르 대공이 하필 동방 정교를 국교로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의식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정교 의식을 목격한 이후 대공은 “우리가 지상에 있는지 하늘에 있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는데, 아름다움을 통해 진리에, 즉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러시아 특유의 유토피즘이 이미 여기서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상적 유토피아로서 ‘성스러운 루시’의 이념을 내세웠는데, 러시아 역사에서 많은 차르들이 러시아라는 현실의 공간에서 이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러시아 고대나 중세의 스카스카, 성자전 등에서도 유토피아적인 요소들을 일관되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장르들에서 ‘유토피아’는 도달하기 힘든 먼 곳, 동방의 신화적 장소, 섬과 같은 곳이며, 이곳에는 악, 돈, 원죄, 성행위 등이 부재한다. 행복과 아름다움, 평화만이 있는 이곳으로 가는 길은 성자들만이 열어줄 수 있으며 고도의 정신적 종교 수양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모험과 고난을 다루고 있는 많은 스카스카나 성자전의 원형은 비잔틴이지만, 이 이야기들은 러시아의 교회 및 민중문화와 만나서 다양한 변이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성스러운 파벨에 대한 이야기>, <아가피야의 이야기>, <행복한 바라만들에 대한 이야기> 등 )
  타타르를 몰아내고 모스크바 공국이 발전하면서, 민중 스카스카, 또는 종교적 이념으로서 존재하던 유토피아가 현실의 왕국에서 실현되고자 하는 시도들이 펼쳐진다. 특히 이반 4세경우 교회와 거리를 두고자 했으며, 모스크바 공국이 지상에 건설된 유토피아임을 선언하고자 했다. 이는 투르크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인해, 이제 순수한 기독교적 전통은 오직 모스크바에만 남아있다는 “모스크바 제 3로마설” 등과 연관되며, 기독교적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유토피아와 연관을 지닌다. “모스크바 제 3로마”의 이념은 이후 ‘범슬라브주의’와 ‘제 3인터내셔널’ 등으로 발전해서 러시아인들의 선민사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이반 뇌제는 종교와 역사 등에서 타국이나 타민족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러시아만의 전통을 찾고자 했는데(예를 들면, 러시아만의 성자를 추대하는 등의 작업을 포함해서), 이와 같은 노력이 러시아라는 국가의 유토피아적 성격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종교를 약화하려는 황제의 노력으로 실현된 정교 개혁으로 인해, 과거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온갖 박해를 감내했던 구교도 분리파들은 러시아의 민중 유토피아의 발전에 커다란 촉매제가 된다. 이들은 이루어진 유토피아(러시아) 안에서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전 러시아를 떠돌며, 러시아 시골 마을에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와 종파를 양산한다. 이러한 종교 공동체는 향후 공산주의 코뮌과 대비되면서 러시아 유토피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들은 ‘형제애적 사랑’(공산주의 동지애와 비교)에 근거한 지상의 공간을 찾아낸 사람들이며, 유토피아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틀 안에 내재하고 있는 ‘신 예루살렘’으로, 죽음 이후나 세상의 종말에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 지금 건설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들의 초월적 유토피아가 1860년대 ‘브나로드’ 운동으로 야기된 현실유토피아의 실현 노력과 충돌하면서 서서히 와해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러시아에 (무신론적) 공산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종교에 기반한 전통적 농민 유토피아는 파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중들은 단순히 권력으로부터 은신처로서의 유토피아 공동체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반란이나 봉기를 통해서 러시아 전체를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해방자/차르’의 등장은 메시아의 출현과 유사점을 지니는데, 17-8세기 러시아 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푸가초프를 위시한 참칭자들은 ‘머나먼 곳’에서 러시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다는 민중의 전설을 등에 업고 있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가 버렸지만, 1861년이 되어서야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러시아 농민들에게 ‘유토피아’로의 도망이라는 희망만이 고단한 삶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되었음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수의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러시아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민중 유토피아가 다양한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특히 남 러시아, 자카프카스 지방) 이와 같은 나름의 자생적 유토피아는 1929년-30년 스탈린에 의한 집단화 정책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러시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 사실은 흔히 민중 유토피아의 체현으로 이해되는 톨스토이즘이나(브나로드 운동을 포함하여) 혁명을 통한 유토피아의 실현이 오히려 러시아의 민중 유토피아와 어떤 의미에서는 대립적 위치에 있었음을 설명해 준다. 
  톨스토이는 농민 슈타예프, 본다레프와의 소통을 통해, 공동 노동을 통한 농민 공동체의실현을 통해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사상을 제기한다. 이들 두 농민이 속한 공동체의 유토피아적 사상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라는 이념이었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은 성서적인 사랑과 그리고 태고적 공동 노동 사회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에 기대에 톨스토이주의자들은 러시아 내에서도 그리고 해외에서도 많은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런데 실제 톨스토이는 이른 바 “톨스토이 주의자”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셰비키는 이들 농민 공동체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1921년 레닌은 교서를 통해서 이들이 집단 농업경영 체제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으며, 그 대가로 온전한 종교적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런 유토피아적 농민공동체에 3500만 명이 속해있었으며, 그들 중 2500만 명은 구교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레닌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고, 스탈린 집단농장화 시기에 이들 중 대다수가 처형을 당하거나 유형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유일한 유토피아, 단일한 지상의 유토피아는 바로 공산주의 유토피아 단 하나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한편 서구적 개념으로서 유토피아 사상(또는 문학 장르로서의 유토피아)은 러시아의 종교적 민중적 유토피아와는 그 궤적을 달리하면서 발전한다. 그렇지만 18세기 이후 러시아의 현실 유토피아 운동과 유토피아 사상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 변화하게 된다. 현실 유토피아가 모스크바-유토피아-로마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새로운 유토피아 사상은 서유럽을 향한 창이었던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발전하며, 그들에게 이 도시는 그 자체로 서구주의자들의 유토피아이자 ‘새로운 에덴동산’이라고 할 수 있다. 표트르가 이 도시를 “나의 파라다이스”라고 언급한 사실은, 페테르부르크가 지니는 유토피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이후 엘리자베타 여제(제위 1741-1762)는 특히 프랑스식 모델을 모방하고자 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건설하고 유럽의 문화 예술 장르를 러시아로 도입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카테리나 여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그녀는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사상에 경도되었으며, 실제로 ‘황제’가 없는 민주공화정에 대해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금지되었던 몽테스키외의 급진적 이념에 몰두했던 그녀는 “유토피아와 개혁의 경계”에 있을 정도의 파격적인 개혁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여제와 친분이 있었으며, 그녀의 개혁안에 관심이 있었던 디드로는 여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이전에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라코니야, 이집트, 그리스를 다녀왔듯이, 이제 그들은 러시아를 다녀오기 시작했습니다. (.......) 스파르타의 제왕 리쿠르크는 무장한 승려들을 교육시켰죠. 그의 법은 엄격함이라는 위대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러시아 시스템의 근간”입니다. 디드로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는 많은 유럽인들에게 정치적, 철학적, 사회적 이념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실험실이었으며, 초반에 디드로는 여제의 유토피아적 구상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몰락을 목격한 여제 자신에 의해 폐기되며, 가장 급진적인 유토피아주의자는 가장 보수적인 반동주의자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 초 알렉산드르 1세의 신권정치를 통한 ‘반동적 유토피아’에 서구 유토피즘의 세례를 받은 데카브리스트들은 봉기로 답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위는 흡사 “새로운 알렉산더 대왕”과 유사하게 인식되었다.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와 같은 그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 대한 전쟁은 승리했지만,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오히려 당시 프랑스에 유행하던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다. 1820년 이후 이들은 비밀결사 조직을 형성했으며, 특히 페테르부르크 조직은 만 명이 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로 급진주의자로 발전하게 된다. 대다수 귀족 장교였던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민중들이 노예상태로 살아가는 체제임에 분노와 실망했던 사람들이었으며, 급진적 체제개혁을 추구하는 봉기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봉기를 통해 러시아 체제를 변혁시키고자 시도했는데,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변형된 유토피아적 플랜을 지니고 있었다. 1)러시아 전역에 대운하 건설 2)캄차트카 반도에 이상적 공화국 건설 3)우크라이나에 플라톤의 이념을 따르는 자유로운 이상 국가 건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들의 시도는 이후 러시아 인텔리겐차가 권력에 대해 항상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도록 하는 전통을 만들었으며, 혁명적 민주주의가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지성적 지향점이 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라틴어로 쓰여진 토마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는 16세기 당시에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동시대에 살았던 라블레는 자신의 작품에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등장시킨다. 그의 『팡타그뤼엘』 2권에서 팡타그뤼엘의 어머니 바베데크는 유토피아 땅의 왕 아마우로테스의 딸이라고 소개된다. 그리고 팡타그뤼엘의 아버지 가르강튀아는 아들에게 유토피아에서 행해지는 현대적이고 계몽된 교육을 받게 한다. 그런가 하면 나쁜 왕 디프소데스가 유토피아 왕국을 침략해 포위했을 때, 팡타그뤼엘과 그 친구들이 달려가 디프소데스를 물리치기도 한다. 이처럼 유토피아를 모어의 텍스트 바깥으로 끌어냄으로써 라블레는 유토피아가 고유명사에서 일반명사로 변화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초입에 ‘유토피아’라는 개념은 모어의 작품을 직접 참조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상적인 사회를 등장시키는 여행소설 장르 혹은 그 속에서 진행되는 사회정치적인 담론과 결부되어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경우 대체로 유토피아의 개념에서는 그것이 지닌 비현실적인 측면이 강조되곤 했다. 예를 들어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도 유토피아에 대해 언급하지만 스피노자가 유토피아를 ‘황금시대’와 나란히 열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몽상적인 구상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토피아의 비현실성보다는 그 이상적 지향에 집중하는 경향도 뚜렷이 존재한다. 이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유토피아 소설 작품이 루이 세바스티엥 메르시에의 『2440년』(1786년)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이 소설은 18세기의 프랑스인이 잠들었다가 2440년이라는 제법 먼 미래의 파리에서 깨어나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유토피아를 더 이상 알지 못하는 미지의 지역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로 이동시킨 최초의 시도이다. 물론 여기에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해 더 이상 미지의 땅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는 사정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은 영국의 오웬, 프랑스의 생시몽과 푸리에 등이었다. 이 시기에 유토피아는 더 이상 문학 장르에 결부되지 않고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조하려는 일련의 사회정치적 기획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일반화된다. 유토피아 문학 장르와 구별되는 이러한 사회 개혁의 청사진에 대해서 어떤 이론가들은 ‘유토피아주의’라는 별도의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는 종종 공동체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생시몽주의자들이 건설한 종교 결사체, 푸리에의 ‘팔랑스테르’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카베라는 프랑스 작가가 1840년에 영국에서 펴낸 『이카리아 여행기』라는 책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에서 착상된 이 책은 당시에 대중적으로도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세기 후반 과학기술의 발전과 진화론의 영향 아래 미래사회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들이 제시되기도 하는데, 그 문학적인 반영이 유토피아 소설의 변종이라 할 수 있는 SF 소설들이다. 이제 미래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토대로 인류의 오랜 문제들이 해결된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18 세기의 이단아 사드의 소설에서도 유토피아 토포스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데, <알린과 발쿠르>에서 꿈꾸지는 욕망과 에로스의 이상향은 현실에서는 쉽게 구현될 수 없는 유혹과 쾌락의 완성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이러한 낭만성은 19 세기 사실주의 이후 많은 지적과 비판에 직면한다. 국가의 통제와 과학기술의 발달에 근거한 행복한 인류 사회의 전망이 현실의 부정적인 양상에 의해서 비판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산업사회와 국가에 대한 낙관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일련의 상황이 전개된다. 서구에 엄청난 참상과 혼란을 야기한 세계대전, 그 이후에 전개된 경제 대공황, 그리고 그 와중에 형성된 전체주의 체제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미래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상응하는 일련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앨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1년)에서는 통제와 세뇌로 인해 인위적인 행복을 누리는 미래사회가 냉소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조지 오웰의 『1984』(1949년)는 ‘빅 브라더’가 통제하는 왜곡된 미래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다. 
  문학에서 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유토피아 담론의 위험성은 쉽게 그 소재를 제공한다. 장-뤽 고다르Godard가 만든 영화 <알파시티>의 장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적이지만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어서, 저 유명한 <트루먼 쇼>에 이르지 않아도 디스토피아란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 유토피아라는 용어의 본격적인 출현은 프랑스와 독일 등 서구 유럽국가에서 기원한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았던 18세기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러시아는 유럽 문화의 적극적 유입으로 당시 유럽 각국에서 유행했던 유토피아 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러시아 문학의 유토피아 장르도 최초로 이때 발생하게 된다. 수마르코프의 단편 『꿈. 행복한 사회』, 쉐르바토프의 장편 『오피리스크 땅으로의 여행』(1784) 등이 본격적인 러시아 최초의 유토피아 장르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유토피아적 사상의 특성은 이상향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그것을 반영하는 거울, 또는 안티테제로서 자기 시대를 반추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전 세기 유럽에서 모어나 캄파넬라의 유토피아 소설이 일으킨 만큼의 반향을 러시아 작가들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러시아 현실 유토피아의 영향?). 수마르코프의 소설은 미래 전세계 가장 부유한 국가인 러시아를 그려내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을 하며, 농민과 귀족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이 단편은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19세기 초반에 데카브리스트의 일원이었던 울릐브쉐프는 『꿈』(1819-29)이라는 중편 작품을 자신의 조직(푸른 램프) 동지들을 위해 프랑스어로 썼으며, 이 작품이 러시아어로 번역, 발표된 것은 1928년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꿈속에서 목격한 22세기의 페테르부르크를 그려내고 있다. 병영이 학교와 도서관을 대신하고, 종교는 사라지고, 다만 어떤 고상한 존재에 대한 프리메이슨적인 숭배만이 남아있는 이곳에서 러시아는 유럽 모든 나라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1820년대에서 40년대 러시아문학에서는 걸출한 유토피아 소설가 오도옙스키가 나타나는데, 이 시기가 러시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반동적인 시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프랑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가 러시아에 큰 영향을 미치는 1840년대 이후(특히 비평가 벨린스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속한 페트라셉스키 서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에는 본격적인 유토피아 문학 작품들, 철학적 사상적 관점에서도 주목을 끌 만한 작품들, 그리고 실제로 현실 유토피아의 실현과 긴밀히 연관을 지니는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고골의 유토피아는 고대 러시아의 신성한 제국, 천년 왕국의 개념과 결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고골리는 다른 나라들보다 강한 러시아를 이루기 위해서 “힘을 모아, 갑자기, 그리고 단숨에 우리의 모든 결함들을 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갑자기, 그리고 단숨에”라는 이 표현이 러시아인들의 유토피아적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리하초프). 하지만 고골의 유토피아주의 혁명적 성격과 더불어, 『죽은 혼』의 2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교적 신비주의와 결합된다. 소설 2부의 특이한 성격과 모순은 벨린스키와의 왕복서한에서 작가가 단언한 다음의 말을 증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왕국의 신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 한, 인간에게 지상의 천국과 질서는 오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에 고골은 유토피아로의 혁명적 일보를 거부하고, 현재에서 신성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조한다.

“이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모든 길과 대로는 이 어둡고 혼탁한 현재에,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바로 이곳에 숨겨져 있다” (고골, 『죽은 혼』, 1842) 

  소설 『죽은 혼』의 2부에서 작가는 서구적 유토피아를 러시아적인 유토피아와 대비시켜준다. 특히 『신 엘로이즈』의 볼마르의 유토피아와 비교할 만한, 콘스탄조글로의 작은 유토피아는 서구주의자 코쉬카료프의 관료적 유토피아와 대비된다. 실제로 고골의 『죽은 혼』의 2부는 발자크의 유토피아 소설들 『시골 의사』(1833), 및 『시골 성직자』(1842)와 비교가 가능하며 직접적 연관을 지니고 있다.
  고골의 유토피아적 개념이 중요한 것은 문학적 유토피아가 정치적, 국가적 유토피아의 개념으로부터 온전히 분리되었다는 점이다. 문학의 유토피아는 이제 더 이상 국가/황제에게 일종의 모델이나 전형, 거울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념을 논쟁하는 장, 또는 문학 예술적 실험의 장이 될 수 있었다. 고골의 유토피아는 고전적인 서구 유토피아의 모델과 거리가 먼,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반계몽주의적인 유토피아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 유토피아 소설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우스운 사람의 꿈』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본격적이고 가장 순수한 유토피아적, 또는 혁명적 작품은 체르니셉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 연구가 스뱌틀롭스키의 주장대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유토피아 전통의 발전은 특히 인텔리겐차의 의식이 발전하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이상을 지향하는 경향은 국가의 전체적 후진성의 국민의 침묵 아래서 발전했으며, 언제나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즉 정치적인 문제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었다.” 더불어 루소나 푸리에 등의 사상에 경도되었던 19세기 중반의 잡계급 지식인들의 이상적 사회에 대한 열망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바로 체르니셉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이며, 이 소설은 인텔리겐치아들의 혁명과 유토피아에 대한 이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세기말과 세기초, 러시아에는 유토피아 소설과 더불어 안티 유토피아 장르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표도로프는 『2217년 저녁』(1906)에서 인간성의 부정과 절대적인 집단화에 대립하여 자연스런 인간 감정, 가족 제도 등을 대립시킨다. 숫자로 분류된 개인, 규범의 준수 등.
  그런데 표도로프의 유토피아는 특히 불멸이나 부활의 이미지와 연관된 유토피아이다. “죽음을 극복하면서 그의 유토피아는 모든 다른 유토피아를 방해했던 요구들로부터 해방된다. 유토피아는 재생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인 충동, 육체적 쾌락, 자연히 도래하는 죽음과의 투쟁, 유토피아로 이끌어 주는 순수함, 바로 이것이 표도로프의 유토피아가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와 유사한 사상은 동시대 톨스토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크로이체르 소나타).” 표도로프는 모든 종교적, 과학적 민중적 유토피아를 통합했으며, 이 학설들을 19세기 말 유행하던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통합했다. 표도로프와 더불어 유토피아는 드디어 우주의 시대로 간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찌올코프스키는 표도로프 학설 중 우주론을 받아들여, 부활한 우리의 후세가 우주를 식민지화하여 그곳을 새로운 유토피아로 만들어내는 프로젝트를 생각해냈다. 로켓을 발명했기에 찌올코프스키는 1893년 『달에서』, 『지구와 하늘에 대한 꿈』(1895) 등을 통해, ‘우주적 일원론’에 근거한 유토피아 사상을 펼쳐나간다. 찌올코프스키의 사상은 우주의 뜻에 따라 모든 인류는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며,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며, 이 유토피아에는 악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죽음은 단지 환상에 불과한 유토피아를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20세기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유토피아를 이루어낸 것처럼 보인다. 특히 혁명 전후 러시아에서 다양한 종류의 유토피아, 또는 안티유토피아 문학이 유달리 유행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특히 1차 혁명을 전후로 해서는 샤라포프의 『반세기가 지나서』(1902), 브류소프의 『남쪽 십자가 공화국』(1907), 보그다노프의 『붉은 별』(1908) 등의 다양한 장르의 유토피아 소설이 쏟아져 나왔다. 
  2차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더 많은 유토피아 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은 예세닌의 『이노니야』(1918), 차야노프의 『나의 형제 알렉세이의 농민 유토피아로의 여행』 등을 들 수 있으며, 특히 소설 분야에서는 자먀틴의 걸출한 『우리들』(1920)이 등장했다. 
  특히 소비에트의 20년대는 현실 유토피아와 문학적 유토피아의 교묘한 충돌과 결합, 또는 갈등이 일어나는 특별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불가코프, 플라토노프의 작품들에서 유토피아는 그 토포스적 성격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플라토노프는 『체벤구르』와 『코틀로반』을 통해서 인간이 없는 유토피아, 시간이 정지된 유토피아의 불가능성과 현실과의 화해 불가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19세기 초, 중반에는 오도예프스키의 일련의 유토피아 소설들이 등장했으며,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대표적 작품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롯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과학 문명과 합리적 근대성이 가져다줄 ‘수정궁’에 대한 기대와 의혹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의 우화 『바보 이반』은 ‘군인’이 지배하는 국가도 아니고, ‘상인’이 거래하는 국가도 아닌, ‘바보’들이 일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진정한 유토피아임을 웅변하면서, 농민 공동체에 기반을 둔 러시아적 유토피아의 이상적 형태를 제시했다. 
  세기말 표도로프와 솔로비요프를 비롯한 사상가이자 문학가들에게서 독특한 형식으로 그려지던 문학 속의 유토피아는 20세기 초 마침내 현실 유토피아로 체현된다. 1905년과 1917년에 일어난 두 번의 혁명과 소비에트의 건설은 유토피아의 현전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오랜 열망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문학 속 상상력으로 이상화된 사회가 현실이 되었을 때, 현실과 유토피아가 전복되었을 때, 과연 문학은 어떤 형태의 유토피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유토피아를 상상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흥미로운 점은 1차 혁명과 2차 혁명을 전후하여 다양한, 거의 모든 가능한 형태의 유토피아/안티유토피아/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1905년을 전후하여 그려지는 브류소프와 보그다노프의 유토피아는 과학발전에 따른 미래의 모습과 남극, 또는 우주 공간이라는 먼 곳에 위치한 가상현실을 그리면서 과학기술과 인간 본성의 양가적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2차 혁명 이후 1920년대에 나타난 자먀틴과 차야노프의 유토피아적 흐로노토프는 비록 먼 미래를 그리고 있음에도 소비에트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고, 1920년대 말 소비에트의 현실을 그려낸 플라토노프 소설의 흐로노토프는 오히려 너무나 사실적이기에 그로테스크하게 여겨진다. 
  제임슨의 말처럼, 서구에서 유토피아적 충동은 1980년 이후 드문 것이 되어버렸다(프레데릭 제임슨). 인류사 미증유의 부와 과학기술의 발달은 상상 속 가능태의 다양성을 앗아가 버리고 세계화 과정에서 현실 민주주의의 확장은 억압된 현실에서 나타나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유토피아가 정치성을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오히려 더 진부한 것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유토피아 문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포스트 소비에트 시기에도 많은 작가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러시아 문학에서 ‘체현된 유토피아’와 유토피아의 관계는 여전히 새롭게 규명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18세기부터 포스트소비에트 시기까지 러시아 문학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유토피아 소설의 전통은 민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러시아의 기형적 권력구조와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유토피아의 현실화, 즉 소비에트 혁명은 러시아의 역사적 상황이 문학의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어떻게 실천적 힘으로 조우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예라 할 수 있다. 
  한편 세기 말과 세기 초 모더니즘적 유토피아들이 나타나고 있던 러시아에서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도 유토피아적 지향, 종종 통합적으로 나타나던 그와 같은 지향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크랴빈의 <미스테리야>는 음악과 시, 발레를 통합하고 빛과 색채를 음악과 결합시켰다. 작곡가는 이를 통해, “예술의 힘으로 인류를 최후의 엑스터시 상태로, 그리고 단일한 존재로 통합하기를” 꿈꾸었던 것이다. 
  칸딘스키와 같은 화가는 스크랴빈과 유사한 시도를 회화에서 했다. 이들의 특징은 말의 헤게모니로부터의 탈출이며, 음악과 무용 등을 하나로 결합시킨 것에 있다. 말레비치, 타틀린 등의 모더니즘 계열 화가들의 시도도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와 러시아는 유토피아에 특별히 큰 관심을 지닌 나라였으며, 두 국가 모두 유토피아 사상을 혁명이라는 현실적 사건으로 발전시켰던 공통점을 지닌다. 러시아에서 유토피아 사상이 이념적으로 정립된 것도 루소와 디드로 등 프랑스 유토피아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18세기에 시작되었고, 대표적인 러시아의 유토피아주의자들은 때론 봉기로, 때론 이념적, 문학적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이후 데카브리스트 봉기가 그러했으며, 1840년대 도스토옙스키가 연루되었던 페트라쉡스키 사건도 프랑스와 큰 연관을 지니고 있다. 장르로서의 유토피아 문학의 경우, 대표적으로 고골의 『죽은 혼』의 경우, 발자크의 작품들과 상호 연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점을 통해 특히 러시아의 유토피아가 프랑스의 진보적 사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토피아적 사유에서 두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러시아는 현실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지향이 강했으며, 이러한 경향이 농민 유토피아, 또는 정교적 유토피아로 일종의 공동체 형식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자생적, 종교적 유토피아는 프랑스에서 나타났던 이념적 유토피아 공동체인 꼬뮌과는 변별되는 점이다. 프랑스의 유토피아가 이념적, 서구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러시아의 유토피아는 자생적인 원시 공산주의 사상과 결합된 특수한 형태의 유토피아라는 점이 러시아와 프랑스 두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유토피아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연관 토포스 공산주의; 낙원; 미; 신세계; 신앙심; 진(진리; 진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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