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음식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음식
토포스명(프랑스) aliment; cuisine
토포스명(러시아) еда; пища; кухня
정의 1. 잘 먹는 법을 알면 알수록 삶이 행복하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음식과 관련된 프랑스어로는 생명체에게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할 수 있는 모든 먹거리를 가리키는 ‘알리망 aliment[alimɑ̃]’과 ‘누리튀르 nourriture[nuʀityːʀ]’, 음식을 조리하는 장소인 부엌을 가리키기도 하고 요리를 뜻하기도 하는 ‘퀴진 cuisine[kɥizin]’, “사람이 먹는 것과 관련된 체계적 지식의 총체”(장 브리야사바랭, 󰡔맛의 생리학󰡕, 1825)라고 정의된 바 있는 ‘가스트로노미 gastronomie[gastʀɔnɔmi]’를 들 수 있다. 알리망은 ‘키우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lere를 어원으로, 누리튀르는 ‘양육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nutrire를 어원으로 한다. 퀴진은 ‘익히다, 삶다’를 의미하는 동사 cuire에서 파생된 것으로 조리과정 전체를 지시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동일한 의미의 라틴어 cŏcīna이다. 요리는 각 지역의 자연적 차이뿐만 아니라 종교적, 사회적 차이를 반영하고 또 지역들 사이의 교류의 영향도 크게 받기 때문에 문화적 함의가 상당히 크다. 
  ‘가스트로노미’는 그리스어 가스트로(‘위’)와 노미(‘규범, 학문’)가 합쳐진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르케스트라토스가 쓴 시 『가스트로노미아』(4세기 초)에서 유래되었다. 이 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가스트로노미’란 어휘가 처음 사용된 것은 1623년경이다. 이후 프랑스 시인 조제프 베르슈(1765~1839)가 쓴 『가스트로노미 또는 식탁에 앉은 전원의 사람』이 1801년에, 브리야사바랭의 『맛의 생리학』이 1825년에 출간되면서 이 어휘는 1835년 정식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에 수록되었다. 특히 『맛의 생리학』은 프랑스를 맛에 대한 관심과 추구가 유별난 나라로 각인시키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앞의 두 단어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먹거리 전체를 가리키는 반면 요리와 미식은 인간의 식생활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 음식을 문화의 측면에서 접근할 때 적합한 어휘는 퀴진과 가스트로노미라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생존과 관련된 필수요소인 먹거리는 한 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폭넓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음식 문화라는 넓은 차원에서 이 모두가 고려될 수 있겠다. 
  농업은 음식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가히 혁명이라 할 만한 역사적 사건으로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를 지탱하는 기초였다. 밀, 포도, 올리브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대표하는 중요한 상징이었으며, 특히 빵은 호메로스(기원전 800~기원전 750)가 인간을 ‘빵을 먹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피타고라스(기원전 580~기원전500)가 “온 세계는 빵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할 만큼 유럽인의 삶에서 본질적인 것이었다. 밀과 포도와 올리브가 갖는 상징성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8)에서도 확인된다.

“내 딸들의 손길이 닿는 것마다 모든 물건들이 밀가루와 포도주와 미네르바의 녹회색 기름(올리브기름)으로 바뀌었다.”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8)

  이 세 가지 상징은 곡물을 재료로 한 빵, 죽을 비롯하여 포도주, 올리브기름, 채소 등 채식 위주의 음식에 약간의 육류, 특히 치즈를 곁들이는 지중해식 음식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켈트족과 게르만족은 수세기 동안 경작보다 사냥과 어로, 과일의 채취, 방목으로 키우는 가축(특히 돼지) 등이 주된 식량원이었기 때문에 빵이나 죽보다 고기가 중요한 음식이었다. 켈트족의 음식이 로마에 전해지면서 5세기 이후에는 로마에서도 고기를 중요시하는 발언들이 나타난다. 가령 『섭생론』을 쓴 의사 안티무스(511~534)는 자신의 책에서 “프랑크 족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맛있는 음식”인 라드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돼지고기의 조리법을 자세히 소개했다. 프랑크 족은 고기를 권력의 상징이자 전쟁에 필요한 강한 신체를 만들어내는 주된 음식으로 여겼다. 이는 프랑크 족의 법령집이 무장해제와 육류의 금식을 같은 차원에서 언급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세력이 확고해지면서 중세 동안 절대적 상징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성찬식의 기적을 상징하는 신성한 음식, 빵과 포도주였다. 빵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처녀에 심어져 살 속에서 발효되고 수난 속에서 반죽되고 무덤의 오븐 속에서 구워졌으며 교회 안에서 숙성된 성찬식 빵이 신도들에게 천상의 음식으로 날마다 제공되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380~450) 설교, 『유럽의 음식문화』에서 재인용)

  로마와 프랑크 족의 음식 문화의 차이는 음식에 대한 태도 전반에서 드러난다. 채식 위주의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절제가 최상의 미덕이었다. 크세노파네스(기원전 560~기원전 470)는 검소한 식사를 “모든 남녀의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했고, 수에토니우스(69~130)는 한 연회에서 항아리 째 포도주를 비워버린 어떤 사람을 재무관으로 승진시킨 황제 티베리우스(기원전 42~37)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르만과 켈트 문화에서는 대식가를 긍정적으로 보고 폭식과 폭음을 신체적 우월성, 남성다움을 보여주는 자질로 여겼다. 특히 불에 직접 구운 고기는 물에 삶은 고기에 비해 폭력, 격정, 호전성, 즉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자연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제국 멸망 후 유럽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프랑크 족의 왕 샤를마뉴 대제(742~814)는, 전기 작가 아인하르트에 의하면,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음식의 절제, 중용을 권유받았지만 고기를 먹는 강한 왕을 고집했다고 한다.

“(통풍에 걸린) 샤를마뉴 대제는 의사들의 충고에 따르기보다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했다. 그는 의사들이 구운 고기를 먹지 말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싫어했다. 그는 구운 고기와 삶은 고기에 모두 익숙했다.” (맛시모 몬타나리, 『유럽의 음식문화』에서 재인용) 

  또한 엄청난 양의 고기를 발라먹고 그 뼈들을 조각내어 골수까지 빨아먹고는 뼛조각들을 식탁 밑에 쌓는 한 사나이를 보고 그를 ‘진실로 강한 용사’라 칭송하며 그가 “사냥감을 잡아먹는 사자처럼 음식을 먹는” 롬바르디아 왕의 아들 아델키스로 짐작한 이야기는 당시 고기가 남성다움의 상징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맛시모 몬타나리, 『유럽의 음식문화』, 참조)
  기독교가 전파되고 절제와 중용이 가치로 주입되었지만 언제 기근이 덮칠지 몰라 두려워하던 이 시기에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음식을 엄청나게 먹었다고 한다. 수도사들조차 금식 기간이 아닐 때는 “비이성적으로 또 과도하게” 먹었다고 하는데, 프랑스 르네상스기의 최고 걸작이라 여겨지는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수도사들의 폭식을 다음과 같이 조롱하고 있다.

“기록된 적은 없지만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온 고대의 어떤 신비철학의 관습에 따르면 우리의 종교적 조상들은 아침기도를 하러 일어나서 교회당에 들어가기까지 중요한 예비절차를 일정하게 거쳤다고 하네. 침 뱉는 곳에서 침 뱉고 토하는 곳에서 토하고 꿈꾸는 곳에서 꿈꾸고 소변보는 곳에서 소변보고 말일세. 이렇게 하는 것은 성스러운 예배에 부정한 것을 지니고 있지 않기 위해서였지. 이런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그들은 경건하게 성 교회당(이것이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부엌에 붙인 특수한 이름이라네)으로 가서, 주님 안에서 형제들인 성스러운 수도사들의 아침식사로 쓸 쇠고기를 불에 얹는다네. […] 아침기도는 9시간 동안 계속되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 일어나야 했고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식욕과 갈증도 심해졌지. 아침기도를 두세 시간만 진행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 아닌가. 신비철학에 따르면 일찍 일어날수록 쇠고기는 일찍 불에 놓이고 […] 쇠고기가 푹 삶아질수록 더 연해지고 씹기도 좋고 맛도 좋으며 위장에도 부담이 덜 가서 훌륭한 수도사에게 영양을 제대로 공급해준다는 게야. 이것이 바로 그 수도원을 설립한 이의 유일한 목적이고 일차적 목표였으니, 그는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삶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걸세.” (라블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1534)

  기독교가 폭식을 7가지 대죄에 포함시키고 악마들이 한평생 먹은 음식을 토하게 하는 지옥도를 보여주며 금지시켰지만 성찬의 관습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은 듯하다. 
  중세에 귀족과 성직자의 식탁에만 놓인 육류의 종류와 조리법은 샤를 5세의 수석 요리사였던 타유방(1310~1395)이 쓴 최초의 요리책 『음식계보(Le Viandier)』에 소개되어있다. 가축인 송아지고기, 돼지고기, 가금류 외에 귀족들만 할 수 있었던 사냥에서 잡은 공작, 백조, 황새, 가마우지, 두루미 등이 언급되어있는데, 이들 야생 동물들은 귀족처럼 자유롭게 태어났으므로 당연히 자유로운 신분인 귀족에 의해 소비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더불어 유럽에 도입된 향신료의 사용도 중세 요리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멀리 동방에서 가져온 향신료는 건강에 좋으며 고기의 냄새도 잡아주고 소화 작용을 돕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쌌고, 이 때문에 향신료의 사용은 지배계층의 전유물로 권력을 과시하는 효과도 있었다. (김복래, <프랑스인의 식습관과 문화에 대한 역사적 기행> 참조) 
  르네상스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요리 자체보다 식탁 예절에 변화가 일어난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하여 프랑스로 올 때 함께 들여온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와 요리사들은 프랑스 궁정의 식탁에 일종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요리 뿐만 아니라 유리잔, 도기, 자수 식탁보, 은제 식기, 그리고 손가락을 대신한 포크가 프랑스 궁정의 식사예절을 크게 변화시켰고,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또 대식가였던 루이 14세 시대에 식탁 예법의 발달은 절정에 이르렀다. 절대왕정 시대의 정책이 모두 그러했듯이 루이 14세는 식탁을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 프랑스 식 식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느냐하는 것은 그의 궁정 내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매우 중요했다. 루이 14세가 각자의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또한 식탁에서의 대화술이 중요해진 것도 이 무렵으로, 음식에 대한 평가와 묘사가 대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프랑스인들의 유별난 음식비평의 전통이 여기서부터 비롯되었을 듯하다. 이후 프랑스 요리와 식사 예절은 빠르게 유럽으로 퍼져나간다. 
  맛에 대한 관심과 추구가 유별난 나라라는 프랑스의 이미지가 형성된 데에는 루이 14세 시대에 발달한 식탁예법이 상당한 기여를 하기는 했지만, 본격화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에 레스토랑이 처음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동안 요리와 맛에 대한 수많은 책자와 비평이 등장했고 많은 작가들이 연회와 식탁을 묘사하는 데 지면을 할애했다. 또한 19세기는 귀족이나 왕족만 누릴 수 있었던 풍요로운 식탁과 다양한 요리가 부르주아 가정의 식탁으로 옮겨가면서 프랑스의 고급 정통요리가 근대화되고 유럽 전역으로 보급된 식도락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음식’을 뜻하는 단어로 ‘예다 еда[eda]’와 ‘피샤 пища[pishcha]’가 있다. 공통슬라브어 *edti(‘먹다’)로부터 기원하는 ‘예다’와 교회슬라브어로부터 온 ‘피샤’는 의미적으로 큰 차이 없이 쓰이기도 하지만 음식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음식을 그 맛과 모양의 관점에서 이야기할 때나 식탁에 차려져 있는 ‘요리’라는 의미로는 ‘예다’가 사용된다면 음식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의 측면을 논할 때, 혹은 인간이 섭취하는 것 일반을 가리킬 때는 ‘피샤’가 사용된다(우리손, <러시아어 동의어 사전> 참조). 러시아어에는 ‘음식’ 혹은 ‘요리’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단어 ‘쿠흐냐 кухня[kukhnya]’도 있다. ‘쿠흐냐’의 첫 번째 의미는 ‘부엌’이지만 이것이 ‘요리’를 뜻하기도 함은 이것이 애초에 ‘부엌’과 ‘요리’의 뜻을 모두 지니는 프랑스어 ‘퀴진(cuisine)’으로부터 차용되었기 때문이다.
  생활문화의 제 영역 중 변화의 속도가 비교적 느리게 감지되는 분야가 음식 분야이지만 러시아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궤를 같이하며 러시아 음식의 종류, 특성 그리고 음식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도 상당한 변화를 겪어 왔다. 
  고대 러시아인들은 주로 농업 경작, 과일과 채소의 채집을 기반으로 생활하였으며 따라서 곡물과 채소 중심의 식생활 문화를 영위하였고 고기와 유제품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대 러시아에서부터 천년이 넘게 러시아인의 식탁에 오른 대표 음식 빵, 죽, 수프도 모두 곡물과 야채를 주재료로 하는 음식들이다. ‘카샤(каша)’라 불리는 러시아식 죽은 각종 곡물로 만든 전통 음식 중 하나로서 러시아의 옛 풍습과 관련이 깊은 음식이다. 애초에는 결혼식, 세례식 등을 위한 의례용 음식이었던 ‘카샤’는 결혼식 피로연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었으며 신혼 첫날밤을 지낸 신랑신부에게 ‘카샤’를 대접하는 전통은 황실에서도 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럅체프, 『러시아 문화사』 참조). 이와 같은 전통으로 인해 ‘카샤’라 불리기도 한 중세 러시아의 결혼식 피로연은 매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다고 한다. 이는 ‘죽을 끓이다(варить кашу)’란 러시아어 표현이 ‘번거롭고 성가신 일을 하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 배경을 이룬다. 또한 옛 러시아에는 적대적이던 사람과 화해의 표시로 죽을 끓여 나누어 먹던 풍습도 있었다. 러시아어 관용 표현, 누군가와 ‘죽을 끓일 수 없다(каши не сварить)’란 표현이 그 사람과 함께 화합하여 일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발전하게 된 것도 이 풍습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처럼 오랜 시간동안 죽은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러시아인들의 일상적 언어관용에는 “시와 카샤는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카샤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시(щи)’는 러시아식 수프를 가리킨다. 수프는 고대로부터 러시아인들의 식탁을 장식한 기본 음식으로서 “말 잘하는 이가 주부가 아니라 수프를 잘 끓이는 이가 주부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수프를 잘 끓이는 것은 주부의 기본 덕목으로 생각되어 왔다. 전통적인 러시아식 수프는 신선한 양배추나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고기 국물에 넣어 끓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전통 음식, 곧 빵, 죽, 수프 중에서 빵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 일상생활에서 빵의 중요성은 빵과 관련된 수많은 속담이나 격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빵은 만물의 으뜸이다.” “빵이 없다면 초라한 식사.” “빵과 물은 농부의 음식이다.” “빵이 있는 상은 수라상, 빵 한 조각 없는 상은 나무판자.” “소금 없이는 맛이 없고 빵 없이는 배부르지가 않다.” “메밀죽은 우리의 어머니이고 호밀빵은 우리의 아버지이다.” 

  또한 빵의 근본성, 대표성은 우리의 밥이 그러하듯 빵이 식사 일반을 지칭하는 제유적 기능을 지닌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손님을 맞이할 때 소중한 빵과 소금을 쟁반에 받쳐 내놓던 풍습에서 유래하는 ‘빵과 소금(хлебосольство)’이라는 표현은 ‘극진한 대접’, ‘환대’를 뜻하는데, 그 안에는 손님맞이를 즐기고 손님 대접을 중요시하는 러시아인들의 특성과 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담겨있다. 빵은 일상의 음식일 뿐만 아니라 모든 길흉사에도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결혼식에서는 다산을 상징하는 빵을 내놓고, 장례식에는 사다리모양의 빵을 구워 이승과 저승의 매개역할을 하도록 하였으며, 봄에는 종달새 모양의 빵을 구워 새봄을 맞이하였다(이덕형, 『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 참조). 애초에 빵은 호밀로 만든 흑빵을 가리켰으며, 오늘날 주식으로 이용되는 밀가루로 만든 흰빵은 훨씬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서 주식이라기보다는 도시 상류층의 식탁이나 특별한 날에 만날 수 있는 축제 음식이었다.
  전통적으로 빵이 가지는 의미에 더하여 정교 수용 이후에는 종교적 의미가 가미된다. 성찬의 전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빵은 그리스도 몸의 상징으로서 영적 양식의 의미도 지니게 된다. 혁명기에도 빵은 혁명의 이유이자 목적으로서의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1917년 망명지였던 스위스로부터 귀국한 레닌이 무장 혁명을 선동하며 내세운 슬로건도 그러하였다.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노동자에게는 빵을, 농민에게는 토지를, 병사들에게는 평화를!”
  농민들은 어려서부터 빵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음식을 성스럽게 대하였으며 농가의 식사는 성스러운 의식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농민들은 단정하게 식탁에 앉아 웃음이나 잡담을 삼갔다. 농민들에게 식탁은 교회 제단과도 같은 것으로서, 식탁 앞에서의 몸가짐 또한 교회에서의 그것과 같이 정결한 것이어야 했다(코발레프, 마길니이, 『러시아 음식: 전통과 풍습』 참조). 러시아를 포함해 동슬라브문화에서 식사 의식은 엄격히 정해진 식탁의 배치 순서로부터 시작된다. 성, 연령, 지위 등을 일목요연하게 반영하는 식탁 배치에서 상석은 위쪽과 오른쪽이며 가장 명예로운 자리는 이른바 ‘아름다운 구석’이었다. ‘아름다운 구석’이란 각 농가에 마련된 이콘(성상)의 바로 아래 자리로서 이 자리는 집안의 가장의 몫이었다. 

  나머지 구성원들도 성별과 연령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 앉게 되며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식탁 예절을 지키며 식사를 해야 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식탁 예절 중 많은 것이 정교 수용 이전의 민간 신앙과 관계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식사 시간에 선한 영과 악한 영들이 따라다닌다고 믿은 고대 러시아인들은 식사를 할 때 바른 몸가짐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가령 악한 영이 좋아하는 행동이라 생각된 까닭에 숟가락을 두드리는 행동이 금지되어 왔으며, 숟가락의 손잡이 쪽이 아래로 가도록 그릇에 기대 놓는 행동은 숟가락을 다리삼아 악한 영이 그릇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금기시되었다(플로토노프, <러시아 문명 백과사전> 참조). 
  988년 정교가 국교로 채택된 이후 정교는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하면서 음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음식의 절제와 금지를 수반하는 재계 기간이 일 년에 200여일에 이름으로써 재계 기간과 관련된 다양한 재계용 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재계 기간 동안 육류의 섭취가 금지됨으로써 합법적으로 기름기를 섭취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고안되기에 이른 것이다. 러시아에 버섯류, 채소와 생선 요리가 발달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13세기 초반 몽골의 침략과 그로부터 250여 년에 걸친 몽골 지배 기간 동안 샤실릭(양고기 꼬치구이), 절인 양배추, 요구르트 등의 음식이 러시아로 유입되어 점차 러시아의 전통 음식으로 자리매김 되어갔다. 
  서유럽의 영향보다는 동양적 요소가 더욱 많이 가미되었던 러시아 음식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영향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전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온 러시아 음식문화가 빠르게 서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음식문화의 급격한 서구화는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기보다는 주로 귀족 사회에 한정된 현상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이 농민의 음심문화에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이로써 전통적인 농민의 음식문화와 귀족의 유럽화된 음식문화가 분리되면서 러시아 음식의 토포스의 전개 양상은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요리와 식탁을 칭송하고 시의 힘으로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겠다는 조제프 베르슈의 『가스트로노미 또는 식탁에 앉은 전원의 사람』(1801)은 1789년 혁명 이전 왕실과 귀족의 음식문화에 대한 향수와, 혁명 이후 음식문화에 스며든 평등의 정신을 동시에 보여준다. 혁명 이전 수도원 등에서 볼 수 있었던 풍성한 식탁을 그리워하는 한편,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면 손님의 지위에 따라 고기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식탁의 평등도 말하고 있다. 
  18세기에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기여하는 동시에 그 변화를 반영한 현상이 레스토랑의 등장이다. 레스토랑은 몇 세기에 걸쳐 세련되게 다듬어진 요리와 식탁 장식, 서비스를 포함한 궁정의 음식문화의 정수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키면서 요리의 근대화를 초래했다. 
  레스토랑이 생기기 이전 일반 대중들의 외식 장소는 타베른이나 카바레라 불린 선술집 또는 여관, 타블 도트(table d'hôte)라 불린 정찬 테이블이었다. 타블 도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식사를 정해진 가격으로 제공하는 대중식당이다. 

“긴 식탁의 중앙(주 요리 접시가 놓인 부근)은 늘 단골들에게 점령되었는데, 이들은 (흔히 짐작하듯이) 그 자리에 진을 치고 앉아 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전하며 흥겨운 시간을 갖지는 않는다. 결코 지치지 않는 턱으로 무장하고 최초의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식탁으로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루이 세바스티안 메르시에, 『18세기 파리정경』, 1781~1788)

  파리에 레스토랑이 등장한 것은 1789년 혁명이 발발하고 귀족들이 처형되거나 망명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그들의 요리사들이 거리로 나와 개업하게 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레스토랑이 급증한 것은 분명하지만 혁명 이전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외식 사업을 시도한 선구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레스토랑이라는 용어의 기원도 이와 관련이 있는데, 레스토랑이란 체력을 회복시킨다는 뜻의 프랑스어 레스토레(restaurer)에서 파생된 말이다. 당시 레스토랑은 1765년 파리의 루브르 궁 근처 한 가게에 내걸린 “불랑제는 훌륭한 레스토랑을 팝니다.”라는 간판에서 볼 수 있듯, 힘을 내게 해주는 음식, 특히 고기를 고아서 우려낸 진한 국물인 부용(bouillon)을 가리키는 어휘였다. 또한 간판에는 “위장이 약한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 내가 그대들을 치유하리라.”라는 라틴어 문구도 붙어 있어서 레스토랑을 파는 가게는 ‘건강의 집’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차츰 레스토랑을 판매하는 가게가 레스토랑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선술집이나 타블 도트에 비해 가격이 비쌌지만 좋아하는 요리를 고를 수 있고 굶주림에 정신없이 먹어대는 군중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레스토랑은 큰 인기를 얻었다. 19세기에 레스토랑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레스토라퇴르(restaurateur)란 언제든지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준비해서 장사를 하는 사람을 말하며, 요리는 손님의 요구에 맞춰서 1인분씩 정해진 가격에 판매한다. 이러한 가게를 레스토랑이라 부르며 가게를 꾸려가는 사람이 레스토라퇴르이다. 요리의 이름과 가격을 쓴 목록을 메뉴라 하며 제공된 요리의 양과 가격이 적힌 문서를 계산서라고 한다.” (브리야사바랭, 『맛의 생리학』, 1825)

  1789년에 100여개였던 레스토랑은 나폴레옹 제정시대에 이르면 다섯 배로 늘어난다. 이는 혁명이후 바뀐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혁명의 혼란 속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삶의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혁명에 의해 특권계층이 폐지되면서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된 점을 주목할 수 있다. “15~20프랑의 돈을 자유롭게 쓰면서 일류 레스토랑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왕후 귀족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접대를 받을 수 있게”(브리야사바랭, 『맛의 생리학』, 1825) 된 것이다. 
  1814년 왕정복고 시 루이 18세에 즉위한 프로방스 백작의 요리사 보빌리에가 팔레 루아얄 근처에 레스토랑을 세운 것은 1782년이다. 궁정에서밖에 맛볼 수 없었던 궁정음식과 그 식탁을 상품화한 그의 레스토랑은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15년간 군림했다. 신흥 부자나 귀족들만이 아니라 혁명의 주역들인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당통 등도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을 드나들었다고 하니 가히 혁명은 형식적으로는 식탁의 평등을 가져왔음이 분명했다.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 요리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마리 앙투안 카렘이 등장한다.
  천민에 고아 출신인 카렘이 제과장인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요리 역사상 최대의 거장이 된 카렘은 피에스 몬테(대형 장식과자)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폴레옹 황제, 나폴레옹 패배이후 파리에 입성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영국의 조지 4세,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랑수아 1세의 요리사를 지냈다. 마지막으로 신흥 부르주아 은행가인 제임스 로스차일드의 요리사로 일했는데, 신흥 부르주아에게 굳게 닫힌 상류계층의 문을 열기 위해 로스차일드는 최고의 권력자들의 요리를 담당했던 카렘의 식탁과 요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의 요리에 대한 애정과 정성은 “예술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회화와 조각, 시, 음악, 건축이다. 그리고 건축의 주요한 한 부분에 제과가 있다.”라는 그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요리사로서 카렘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렉상드르 뒤마가 1873년에 쓴 『요리대사전』의 다음과 같은 찬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33년 1월 22일에 카렘이 죽은 뒤로 수많은 대공이 그의 공국을 잃고 다수의 왕이 왕좌에서 내려갔지만 천부의 재능이 있어 요리의 왕이 된 카렘의 지위는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 그리고 그 영광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어떤 라이벌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 『요리대사전』, 1873)

  이른바 오트 퀴진(haute cuisine), 즉 고급요리는 카렘에게서 정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엄청나게 공을 들여 과장되게 장식한 카렘의 연회 요리는 혁명 이후 요리의 평등화, 대중화와 역행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현대의 요리는 단순하고 우아하며 예전만큼 돈이 들지 않는다.”(『프랑스의 메트르 도텔(호텔의 수석 요리사)』, 1822) 또는 “기술이나 손으로 하는 일에서는 낡은 방식을 뒤흔들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아함이나 완성도는 도저히 바랄 수 없다.”라는 진술에서 볼 수 있듯, 카렘은 전통을 계승하고 이상적인 요리를 추구하는 한편 현실을 직시하고 요리의 새로운 경향과 혁신을 도모했다고 여겨진다. 19세기 후반이후 근대 프랑스 고급요리의 발전은 분명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1년에 네 번 건성으로 친구를 부르기보다 두 번 훌륭하게 대접하는 편이 상대방을 기쁘게 할 것이다. […] 파리의 당당한 부르주아는 새로운 접대 형식을 시험해보기 바란다. 그런 관습이 결국은 파리 사람들의 위에 아니 맛있는 나라 프랑스 전체의 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카렘, 『19세기 프랑스 요리법』, 1833) 

  “우리나라의 위대한 요리”라는 카렘의 말에서 느껴지듯 프랑스 요리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믿음은 강했다. 또한 “영국과 러시아, 독일에서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이 우리의 근대 메뉴를 풍부하게 했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외국요리의 뛰어난 점을 받아들여 프랑스 요리에 동화하려한 그의 노력은 요리를 계급의 요리에서 국민의 요리로 확립시키는 한편 프랑스 요리의 국제화를 가능하게 한 발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프랑스 요리에서 셰프의 상징이 된 높은 모자도 카렘이 원래 두건 모양이었던 모자를 요리사의 긍지를 표출하기 위해 윗부분에 팔각형 골판지를 넣어 높은 모양으로 변신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요리의 발달에서 미식의 나라 프랑스의 이미지를 굳힌 데는 먹는 쪽과 만드는 쪽의 중간에서 요리 또는 미식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낸 비평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 선구자라 할 그리모 드라 레니에르(1758~1837)가 『미식연감』(1803~1812)을 썼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미식연감』은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그리모 레니에르가 레스토랑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최신 음식정보를 제공하는 연감을 출간하려는 발상을 하면서 1803년 1월에 처음 발간되었다. 『미식 연감』의 머리말은 혁명 이후 세태의 변화를 음식문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혁명을 계기로 부를 거머쥔 파리의 졸부는 심장이 위장으로 바뀌어 육체의 쾌락을 따라 식욕을 채우는 일만 생각한다.” (그리모 레니에르, 『미식연감』, 1803)

  레스토랑의 성행과 맛있는 음식에 돈을 쓰는 사람들의 새로운 행태를 간파한 그리모 레니에르의 예상은 적중하여 『미식연감』은 1812년까지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그리모 레니에르의 미각과 예술적 감각, 신랄하지만 아름다운 문체로 다듬어진 미식 안내 책자는 단순히 상업적 가이드북의 형태를 넘어 음식 비평 담론의 장을 형성시키며 음식 저널리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매주 화요일 그리모 레니에르의 집에서 정례 식사회가 열렸고 그곳에서 위원들이 배달된 요리나 레시피를 재현한 요리를 한 가지씩 시식한 후 토의를 거쳐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를 『미식연감』에 공표했는데 『기드 미슐랭』이 채택한 별점 형식의 선구적 모델이라 할 만하다. 요리를 한 가지씩 차례로 내오는 일명 러시아식 서비스는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인 클라킨 대공에 의해 1808~1812년경에 프랑스에 처음 도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1804년에 그리모가 이미 보기에만 그럴 듯하게 요리를 한꺼번에 늘어놓아 나중에 먹는 음식이 식어 맛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요리를 한 가지씩 내올 것을 권장한바 있다. 
  한편 가톨릭 전통이 강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식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던 19세기 초에 『미식연감』에 대한 비판의 시선도 적지 않았다. 『미식연감』의 저자를 밝히지 않고 ‘늙은 호사가’라고 편집자를 소개한 것을 조롱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니 편집자 늙은 호사가와 그 일동이 소화불량으로 모두 절명한 줄 알았다.”라는 말로 시작해 “진정한 미식가를 방탕한 물질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에게 하는 대답으로 이 책을 엮었다고 말하지만 대식에 대해 칭찬할 것이 뭐가 있으며, 언제부터 그것이 악덕이 아닌지 […]”라는 비판의 글이 『가제트 드 프랑스』(1813) 문예란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음식문화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방식과 예법을 지키면서도 달라진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음식문화를 정립하려 한 카렘과 그리모 레니에르는 18세기까지 축적된 프랑스의 음식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새롭게 지켜야할 규범을 제시한 프랑스 근대요리의 교두보로 인정받는다. 
  인생과 음식의 긴밀한 관계를 본격적으로 묘사한 미식문학의 결정판은 『맛의 생리학』이다.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맛과 음식에 관한 수많은 상투어들이 브리야사바랭에게서 비롯되었다. 

“치즈 없는 후식은 외눈박이 미녀다.”
“짐승들은 먹이를 삼키지만 사람은 먹는다. 지성 있는 사람만이 먹는 기술을 안다.”
“창조주는 인간을 살기 위해 먹도록 만들었지만 식욕이 그를 먹도록 이끌고 먹는 즐거움으로 보상을 준다.”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인류의 행복에 있어서 어떤 별을 발견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소화시키지 못하거나 취해버리는 사람은 마실 줄도 먹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브리야샤바랭, 『맛의 생리학』, 1825)

  800쪽에 달하는 『맛의 생리학』은 ‘미각’, ‘식욕’ ‘수면’, ‘꿈’, ‘죽음’ ‘요리의 철학적 역사’, ‘신부의 오믈렛’ ‘여로의 행운’ ‘망명시대의 추억’과 같은 소제목들이 보여주듯, 생리학적 관점으로 인체에 접근하면서 음식의 세계를 밝히는 요리책이면서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음식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하는 일종의 문학작품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자칫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그가 양민증과 자유통행증을 발급받기 위해 담당자인 프로 의원을 찾아간 일화는 브리야샤바랭의 미식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맛의 생리학』에서 브리야샤바랭이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프로 의원을 만나러 가는 길에 허기를 채우려고 들른 어느 여인숙에서 그는 주인이 준비하고 있던 맛있는 요리를 본다. 주인이 “그것은 다른 사람 것이니 당신에게는 맛있는 부이와 감자 수프, 양 어깨고기에 까치콩 곁들인 음식을 주겠소.”라고 말하자 그는 맛있는 음식을 주문한 이들에게 자기 몫을 계산하겠다고 말하고 그들의 연회에 참석하여 즐겁게 마시고 먹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즐긴다. 브리야샤바랭은 “생사를 가르는 위험한 처지에서도 즐길 줄 아는 것이 프랑스인의 정신”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이 에피소드에 ‘여로의 행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때가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기였다. 미국 망명 시절 그를 초대해준 농장주 뷰로와의 따뜻한 추억도 콘비피나 거위 스튜, 양의 허벅지살, 근채류, 사과주 등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브리야사바랭은 식사를 개인의 생리적 욕구를 채우는 데 머무르지 않고 더불어 즐김으로써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리야사바랭 이후 프랑스인들은 음식을 통해 어떻게 행복을 실현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요리는 문화의 세련됨의 증거이며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문화의 한 요소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효모 역할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먹을 것인지를 숙고한 브리야사바랭은 위대한 계몽주의자로 여겨져야 마땅하다.” (퀴르농스키, 『프랑스의 요리와 포도주』, 1927년에 창간된 잡지) 

“브리야사바랭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인간에 관한 책이다. 인간을 차별화시키는 것이 바로 식욕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 1915~1980)

  19세기 내내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지닌 이른바 가스트로놈, 즉 미식가의 음식비평 활동은 많은 문인, 저널리스트들의 관심을 끌어내며 맛에 관한 담론을 창출해냈다. 알렉상드르 뒤마, 고티에, 테오도르 드 방빌 등 문인들이 기고한 일요신문 『구르메Gourmet』(1858년 창간)의 머리말은 “모든 정열은 이성에 의해 이끌어질 때 예술이 된다. 그런데 다른 어떤 정열보다도 이성에 이끌리는 것이 가스트로노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레니에르가 간행한 『미식연감』의 제목을 그대로 따와 먹거리를 테마로 한 시나 희곡, 일화, 조리법을 소개한 『미식연감』이 1862년부터 1870년에 걸쳐 간행되기도 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1857)에서 건축물을 방불케 하는 결혼식 피로연 케이크의 상세한 묘사도 19세기 요리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허리 고기, 닭고기 프리카세, 송아지고기 지짐, 양의 넓적다리 고기, 참소리쟁이를 넣은 순대 네 개를 곁들인 예쁜 새끼돼지 통구이가 놓여있었다. […] 디저트로는 자기가 제작한 케이크를 직접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우선 제일 밑에는 푸른색 네모꼴의 마분지로 신전을 만들고 그 주위에는 기둥들과 회랑들을 만들었으며 금종이로 된 별들이 자욱이 뿌려진 오목한 벽감들에는 석고상이 늘어서있었다. 이어 둘째 단에는 사부와 지방 케이크로 된 종탑이 세워져 있고 안젤리카 졸임, 편도, 건포도 및 오렌지 조각 등으로 만든 요새가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맨 꼭대기 옥상은 녹색의 초원이었는데 바위들, 군데군데 잼으로 채워진 호수, 그리고 개암나무 껍질로 만든 배들이 있고 조그마한 사랑의 신이 초콜릿 그네를 타고 있는 것이 보이며 그네의 양쪽 기둥 끝에는 둥근 구슬 대신에 생화로 된 장미꽃 봉우리가 꽂혀 있었다.”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1857)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현상을 널리 알린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에 나오는 마들렌 과자 이야기도 인생과 음식에 관한 브리야사바랭의 철학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음울하게 보낸 하루와 내일도 서글프리라는 생각에 짓눌린 채 무심코 나는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이 말랑하게 녹아 있는 차 한 숟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원인을 생각해볼 새도 없이 감미로운 어떤 기쁨이 나를 엄습했고 나는 곧 혼자가 되었다. 그 기쁨은 사랑이 그리하듯 귀한 정수로 나를 가득 채워 나는 이내 삶의 부침에 무관심해지고 삶의 역경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짧은 생이 허망하게 느껴졌다.”(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13~1927) 

  한편 『기드 미슐랭』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음식문화의 또 다른 측면은 도로와 교통망의 발달로 자동차 시대가 열리면서 1912년에 탄생한 백인클럽에서 비롯되었다. 이 클럽은 자동차 여행을 전제로 맛있는 음식점을 발굴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파리 등 대도시의 틀에 박힌 요리에서 벗어나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지방의 맛있는 요리를 지키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자동차 타이어 회사인 미슐랭 사가 『기드 미슐랭』이라는 음식정보지를 발간하게 된 배경이 여기 있다. 미슐랭 사와 인연이 있던 퀴르농스키는 시인이자 미식가인 친구 마르셀 루프와 함께 프랑스 전역을 돌면서 맛있는 요리를 발굴하고 그것을 소개할 목적으로 가이드북 『가스트로노미의 프랑스』를 발간했다. 이것이 절판되자 퀴르농스키는 민속학과 요리에 정통한 문필가 오스탱 드 크로즈와 손잡고 지방요리를 한 권으로 소개하는 책자를 냈다. 1933년 간행된 『프랑스 미식의 보물』의 머리말은 프랑스 요리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대한 예찬으로 채워져 있다.

“프랑스의 풍부한 가스트로노미를 망라한 목록을 만들어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모든 프랑스인이 그것을 잘 알고 활용할 의무가 있다. […] 프랑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그저 만족하고 상찬을 구하려 하지 않는 소극적인 미녀와 같다. […] 지금이야말로 프랑스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매우 다채로운 관광의 즐거움이 있으며 다른 어떤 곳보다도 맛있는 요리와 술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알려야만 할 때이다.” (퀴르농스키, 『프랑스 미식의 비밀』, 1933)

  1923년 가을 미술축제인 ‘살롱 도톤’에 아홉 번째 예술로 요리가 등장한 것도 퀴르농스키의 작품으로, 전시장인 그랑 팔레의 한 모퉁이를 차지했던 지방요리 부문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요리는 대중화, 상품화, 예술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예전의 명성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듯하다. 1960년 폴 보퀴즈는 『시장의 요리』(1976)를 발간하여 ‘가벼움’, ‘재료의 존중’, 그리고 ‘창의성’을 키워드로 한 누벨 퀴진의 붐을 일으켰다. “저장된 식재료를 사용하여 정해진 메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료가 불러일으키는 발상에 따라 자신이 만들고 싶은 요리를 만든다.” 누벨 퀴진은 일종의 사회현상으로까지 발전하면서 단숨에 세계적인 조류가 되었다. 보퀴즈는 소수 엘리트층을 위한 고급 요리로 세계에 군림하던 프랑스 요리가 일반 서민들에게 주는 위압감과 거리감을 해소하고, 맛의 즐거움을 위해 엄격하고 까다로운 식탁 규범을 간소화할 것을 주장했다. 누벨 퀴진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었다. (야기 나오코, 『레스토랑의 탄생에서 미슐랭 가이드까지』 참조) 

“누벨 퀴진,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셰프 자신이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창조적인 요리이다.” (앙리 고, 크리스티앙 미요, 『고-미요 누보 가이드』, 1973) 

  해마다 미각 주간을 시행하며 많은 행사를 기획하고 학교에서도 ‘미각수업’을 실시하여 아이들에게 미식을 권장하는 프랑스가, 이탈리아인은 옷에 독일인은 집에 프랑스인은 음식에 평생을 바친다는 통설이 말해주듯, 음식과 인생의 관계에 유독 관심이 많은 미식의 나라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당신이 어떤 것을 먹는지 말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혀보겠다.” (브리야사바랭, 『미의 생리학』, 1848)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18세기 귀족 사회의 음식문화는 빠르게 변화해 갔다. 서유럽의 다양한 요리들이 러시아 귀족의 식탁 위를 장식하고 서유럽에서 초빙된 요리사들이 러시아 요리사들을 밀어내고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독일에서 소시지 제조법이 전수되고 이탈리아에서 마카로니가 유입되는 등 서유럽 여러 나라의 음식 문화가 러시아 음식의 서구화에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18세기 후반 귀족들 사이에서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하는 것이 유행일 정도였으며 훌륭한 프랑스 요리사는 집주인의 높은 취향을 드러내는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프랑스 요리와 더불어 이를 지칭하는 프랑스 어휘도 함께 유입되었다. 커틀릿, 오믈렛, 소스, 마요네즈 등이 프랑스어로부터 차용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식 요리를 소개하거나 프랑스 요리책을 모방한 다양한 요리책들도 등장하였다.
  서구 음식 문화의 유입이 단순히 음식의 종류, 식자재 등 물질적인 측면으로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전까지 러시아 음식 문화에 다소 낯설었던 ‘미식’, 음식의 ‘우아함’과 같은 개념이 귀족들의 식탁에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전 시기의 러시아에서는 음식의 양적 측면이 보다 중요시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음식의 질적 측면으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한 것이다. 즉 과거의 러시아에서는 황제의 권력, 귀족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 음식의 가짓수, 긴 식사시간, 거대한 규모 등이었지만 이제 그 역할은 음식을 내오는 식기, 내오는 방식, 식탁의 우아한 장식, 이국적 취향 등이 수행하게 된다. 러시아 음식 문화에 ‘미식’ 개념의 유입은 이를 지칭하는 용어의 유입과 함께 이루어졌다. ‘음식에 있어 우아하고 섬세한 취향’을 가리키는 러시아어 ‘가스트로노미야 гастрономия[gastronomiya]’는 프랑스어 gastronomie로부터 차용된 단어이다. 러시아어 ‘가스트로노미야’는 20세기까지 이 의미를 유지하다가 20세기 초 고품질의 식료품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 확장이 이루어졌다.
  서유럽의 다양한 음식들이 유입되고 외국인 요리사들, 특히 수많은 프랑스 요리사들이 초빙되었으며 이들 요리사들에게 개인과외를 받는 러시아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로써 수도 페테르부르크에는 ‘페테르부르크식 음식 스타일’이라는 독특한 음식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러시아와 유럽 음식의 독특한 결합이면서 프랑스 음식에 대한 근본적인 지향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작가이자 음악평론가 오도옙스키는 <음식>이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구상의 각양각색의 사람들 중 가장 멋드러지고 우아하게 미식가의 식탁을 준비하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프랑스인들이다. 가장 단순한 재료로 값싸고 정갈하게 그러면서 맛있게 요리하는 자는 누구인가? 독일인이다. 바로 이것이 대다수 유럽인들의 위를 양분하고 있는 두 음식 진영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요리 시스템은 이 두 가지 근본적인 흐름의 변형이자 다양한 결합이다.” (오도옙스키, <문학 신문> no.46, 1844)

  1825년 파리에서 출간된 브리야사바랭의 전설적인 미식에 관한 책 『맛의 생리학』은 러시아에서 미식 개념이 널리 확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식에 관한 여러 명언을 남긴 바 있는 푸시킨도 이 책에 심취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맛의 생리학』은 푸시킨의 서재에 늘 꽂혀 있던 것으로서 이 책의 여러 군데에 남아있는 푸시킨의 글귀는 러시아인들에게 사랑받는 음식 관련 명언이 되었다.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것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 
“문명화된 인간의 위장은 선량한 마음보다 더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즉 섬세함과 고마워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당시 귀족들의 식탁 위를 장식하던 다양한 외국 요리 목록은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에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예브게니 오네긴』에 등장하는 ‘탈롱의 레스토랑’은 작품이 쓰여진 1830년대 페테르부르크에 실제로 존재했던 레스토랑이다. 프랑스 요리사 탈롱이 경영했던 이 레스토랑은 귀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그가 달려간 곳은 탈롱의 레스토랑,
벌써 카베린이 와 있으려니 확신하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병마개가 천장으로 치솟고
술병에선 혜성 포도주가 철철 흐르고
식탁 위엔 피투성이 roast-beef며
프랑스 요리의 결정판
젊은 날의 사치인 송로 과자며
스트라스부르 산의 썩지 않는 파이가
신선한 람부르흐 치즈와 황금빛 파인애플에 
둘러싸여 놓여있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세련된 음식 중 하나로 간주되던 것이 바로 생굴이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의 8장으로 구상되었다가 이후에 폐기된 <오네긴의 여행> 편에 나타난 굴에 대한 묘사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오로지 굴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굴은 어떻게 됐지? 왔구나! 아, 정말 기쁘구나!
젊은 먹보들이 달려든다.
껍질 속 기름지고 신선한 바다의 은둔자,
레몬을 살짝 흩뿌린 굴을
맛보기 위해.”

  굴의 유행도 프랑스로부터 전파된 것이다. 러시아 사학자 라스토르구예프는 페테르부르크 식도락가들이 굴에 푹 빠진 모습을 다음과 같이 풍자한 바 있다.

“페테르부르크 식도락가들이 진귀하고 비싸고 유행하는 것들, 이를테면 굴의 소비에 있어 아무리 파리사람들을 모방하려고 해도 안타깝게도 그들에게 한참을 뒤쳐진다! 파리에서는 매일 만 짝의 굴을 먹어치운다. [...] 거기선 부자든 가난하든 고관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굴을 먹는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그러한 계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모든 죄는 계몽의 성과가 미미하다는 데 있다. 지금도 페테르부르크에는 굴이 가장 최고급이라는 말을 납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 양파나 청어처럼 굴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장사치들이나 의사들은 얼마나 큰 수입을 챙길 수 있겠는가.” (코네츠니 외, 『푸시킨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일상생활』에서 재인용). 

  이처럼 수도 페테르부르크 귀족들의 음식문화가 급속도로 서구화된 데 반해 시골의 식생활은 많은 부분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령 라린가(『예브게니 오네긴』)와 트로예쿠로프가(『두브롭스키』)는 관등순으로 음식을 제공하던 옛 지주귀족의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

“그들은 평화로운 삶 속에
그리운 옛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
손님을 대접할 때는
관등순으로 요리를 돌렸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홀에 80인분의 식탁이 차려졌다. [...] 하인들은 관등순으로 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잘 모르겠는 경우엔 라파테르식의 추측에 입각해 거의 실수 없이 하였다.” (푸시킨, 『두브롭스키』, 1833)

  이렇듯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상류층의 음식문화는 상당부분 변화를 겪었지만, 지주귀족을 포함하여 시골의 음식문화, 특히 농민 계층의 음식문화는 1917년 혁명 전까지 큰 변화 없이 전통을 유지하였다. 도시 귀족의 음식문화는 서구적인 것, 타 문화 지향적이었다면 농촌의 그것은 러시아적인 것, 전통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으로써 귀족의 음식문화와 농민의 음식문화 사이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게 된다. 음식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러시아 문화에 특징적인 ‘자와 타’의 대립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랍샤파’와 ‘마카로니파’의 대립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극명히 드러나기도 하였다. ‘랍샤(лапша)’는 애초에 보통의 국수를 뜻하는 단어였지만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러시아에 마카로니가 유입되면서 ‘서구적인’ 마카로니와 대립하며 ‘러시아적’ 국수를 뜻하는 단어가 된다. 러시아인들의 일상적 음식 ‘랍샤’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점차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으로서의 마카로니와 대비되어 러시아적인 것, 시골풍, 값싸고 촌스러운 것을 상징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음식 영역으로 한정되지 않고 19세기 초 러시아인들의 정신영역으로 들어가 ‘랍사파’와 ‘마카로니파’란 용어를 합성해 내기에 이른다. 즉 ‘랍사파’는 러시아적인 것, 러시아 문화와 전통을 옹호하였다면 ‘마카로니파’는 서구적인 것에 대한 지향을 담고 있었다(석영중,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참조).
  18세기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문화의 다른 영역에서의 서구화는 서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의 일방향적인 영향이 주로 관찰되었다면 음식문화만큼은 러시아의 역방향의 영향도 두드러졌다. 1812년 조국 전쟁 이후 애국주의가 눈을 뜨고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하면서 음식 영역에 있어서도 러시아 전통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 보존을 위한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구의 강력한 영향 하에 발전하였던 러시아 음식은 조금씩 역방향의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서유럽 국가들에서 들어온 이국적 음식이 러시아적 토양에 접목되어 색다른 러시아 음식을 창출해내고, 이것이 다시 서유럽 국가들에 유입되어 그곳에서 이국적인 외국 음식으로서 각광받는 사례도 드물지 않게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프랑스 요리사들이었다. 프랑스 요리 애호가로 알려져 있는 알렉산드르 1세가 초빙한 프랑스 요리사이자 음식학자 앙투안 카렘을 비롯하여 러시아로 초빙된 프랑스 요리사들은 러시아 음식에 프랑스적 변형을 가미한 독특한 프랑스식 러시아 요리를 창조해냈다. 이들이 창조해낸 프랑스식 러시아 요리가 훗날 다시 프랑스로 역 유입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가령 프랑스인들이 즐겨먹는 ‘러시아식’ 푸딩인 ‘샤를로트 뤼스(Charlotte russe)’는 애초에 앙투안 카렘이 알렉산드르 1세를 위해 고안해 낸 음식으로서 이후에 프랑스로 들어가 이국적 음식으로 사랑받았다. 러시아로부터 프랑스로 유입된 음식 문화 중 무엇보다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음식을 내오는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프랑스식 서빙 방식은 음식을 한꺼번에 모두 내오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들에게 러시아식 코스 요리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찬 음식과 뜨거운 음식을 따로 내가는 서빙 방식은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이후에 나올 음식에 대한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대다수 프랑스 귀족들이 러시아식 코스 요리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음식 영역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문화의 영향 관계는 일방향적이 아니라 상호적이었다. 요컨대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도입된 프랑스의 음식 문화가 러시아 음식 문화와 충돌하고 변용되면서 독특한 문화적 융합물로 재탄생되고 이것이 다시 프랑스로 유입되는 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프랑스로 유입된 러시아 음식 중에는 전통적인 러시아 수프 ‘시’도 있었다.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는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러시아 ‘시’의 매력에 푹 파지게 된다. 프랑스로 돌아간 뒤마는 말년에 쓴 요리책(『요리대사전』, 1873)에 ‘시’의 레시피를 싣기도 하였다. 러시아 ‘시’를 얼려서 큰 나무통에 담아 직접 파리로 가져가는 여행가들도 있다고 전해진다(럅체프, 『러시아문화사』 참조). 
  러시아 음식의 토포스는 러시아 문화의 특성 중 하나로 간주되는 특유의 도덕주의, 엄숙주의와도 관련된다. 음식을 쾌락, 욕망, 더 나아가 윤리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경향은 러시아 작가들 사이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가령 고골과 톨스토이를 예로 들 수 있다. 고골은 유명한 대식가이자 식도락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골이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음식에 조예가 깊었으며 음식을 즐겼다. 그러나 1840년대 신경쇠약으로 두 번에 걸쳐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고골은 거의 광적인 신앙생활에 돌입하게 되고 음식을 포함해 모든 육신의 만족을 죄악시하게 된다. 젊은 시절 그토록 대식가이자 미식가였던 고골은 10일간의 단식으로 굶어 죽었다.
  톨스토이 역시 음식을 포함해 육체적 쾌락을 위한 모든 것들을 죄악시 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른바 ‘정식적 위기’ 이후의 톨스토이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는데 그 밑바탕에는 동물 애호, 금욕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육식을 정욕과 동일시하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동물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사냥이나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잃게 되는 쾌락을 몇 배나 보상해 준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우리가 각자 800그램 가량의 쇠고기와 야생 새고기, 그리고 열량이 풍부한 온갖 음식과 술을 먹어대니 그게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정욕이 넘치는 거죠.”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1889)

  톨스토이는 음식 섭취가 쾌락으로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으로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쾌락 추구는 끝이 없는 바 이에 굴복하다보면 욕망의 덫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따라서 정신적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었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생각은 『인생의 길』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각의 향락을 위해 섭취하는 음식은 억제했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는 말하길, 필요이상의 음식 섭취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롭다고 했으며, 조금 더 먹고 싶을 때 그곳을 떠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사람들이 배고플 때만 먹고, 단순하고 순수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면 질병이란 것을 모를 테고, 욕망과 싸우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지 먹기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배는 손과 발의 족쇄이다. 배의 노예는 영원히 노예일 수밖에 없다. 자유롭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과 싸워야 한다. 배고픔을 다스리기 위해 먹되 쾌락을 얻기 위해서 먹지는 말아야 한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그러나 음식과 윤리 문제의 상관성에 대한 인식은 극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간다. 음식의 절제, 금욕은 절제하고 삼갈 게 있는 상황에서만 그 도덕적 가치가 빛을 발한다. 생존을 위한 음식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에 정신적 완성을 위한 금욕, 그 방법으로서 음식의 절제에 대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혁명과 내전 등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있었던 러시아에서 음식의 의미는 이전 시기와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국제적 경제 불황과 맞물려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미식’이라든지 ‘식도락’, 그리고 음식의 ‘절제’와 같은 개념은 사치일 뿐이었다.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음식은 생존을 위한 일차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되돌아갔다. 소비에트 정권은 공산주의 이념에 부합하도록 식사의 국영화 정책을 폈으며 국가가 운영하는 공동식당이 다수 생겨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처럼 이 시기 러시아 음식문화는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귀족의 음식문화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의 식탁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 혁명과 뒤따르는 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인들의 음식문화는 계층의 구분 없이 전반적인 변화의 소용돌이를 거쳐야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음식, 옛 음식과 외래 음식, 새 음식의 구분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 음식문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를 겪어왔지만 혁명 전까지는 ‘자-타’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다. 즉 무엇이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전통 음식 곧 ‘내 것’이자 ‘옛 것’이며, 무엇이 서구로부터 들어와 귀족의 식탁을 장식하는 세련된 음식, 진귀한 음식 곧 ‘남의 것’, ‘새 것’인지를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1917년 혁명과 소비에트 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구분이 점차 흐려지고 심지어 역전되는 현상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러시아적인 것과 연상되던 전통 음식 중 많은 것들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소비에트 시대에 값비싸고 진귀한 음식, 심지어 이국적인 음식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고가였던 이크라는 물론이거니와 농민의 싼 식자재였던 말린 버섯, 산딸기 쨈 같은 것조차 러시아 식자재가 아닌 이국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즉 과거에는 보통 사람들도 향유하던 평범한 음식들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값비싸고 이국적이며 거의 신화적인 것으로 변모해간 것이다(석영중,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참조).
  이처럼 긴 시간동안 다양한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 음식문화는 러시아 문화의 독특한 특성이라 불리는 것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자-타의 대립, 귀족사회-농민사회의 대립, 러시아 전통문화와 서유럽 문화의 대립과 융화와 같은 러시아 문화의 근본적 특성이 드러나며 또한 러시아 문화 특유의 도덕주의, 엄숙주의도 발견된다. 토속적이고 투박한 러시아 전통 음식 문화에 세련되고 실용적인 서유럽 음식 문화가 가미되어 현재의 러시아인들의 식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러시아의 식탁은 물론 과거와는 많은 부분 달라져 있다. 음식의 종류와 양념, 향신료도 과거의 것과 다르며 사용하는 식기류도 그러하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현대 러시아 사회에까지 이어져온 특성도 관찰된다. 고대러시아에서부터 이어져 온 세 가지 기본 음식 빵, 수프, 죽이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식탁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이들이 가지는 의미나 위상이 과거만큼의 독보적인 것은 아닐 테지만 여전히 주식으로서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족이나 지인들이 모여 소통하고 교제하는 기회로 여기고 천천히 오랫동안 식사를 즐기며 특히 손님 접대를 중요시하는 관습 등의 음식 문화는 오늘날에도 상당 부분 간직되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는 르네상스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미식의 나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나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음식문화와 요리사들이 프랑스로 유입되면서 프랑스 궁정의 식탁에 음식문화의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절대왕정 시대에 식탁은 권력 과시 수단이자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기호로도 기능하였다.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 프랑스식 식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느냐하는 것은 궁정 내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대화술도 중요해졌으며 음식에 대한 평가와 묘사가 대화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프랑스의 풍성한 미식 담론, 음식 비평의 전통이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후 프랑스 음식문화와 식사예법은 빠르게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러시아도 프랑스 음식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나라 중 하나이다. 식자재나 요리 등 물질적인 측면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전까지 낯설었던 미식의 개념이 확산되고 각광받게 된 데서도 프랑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미식문학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브리야사바랭의 『맛의 생리학』은 세계에 미식의 나라 프랑스를 각인시키는 역할도 수행했지만 러시아에서 미식 개념이 확산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러시아 귀족사회의 음식문화가 빠르게 서구화되면서 전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던 농민의 음식문화와의 간극이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18세기부터 19세기초반까지 프랑스로부터 일방향적인 영향관계가 주로 나타나던 음식 영역에서 차츰 반대 방향의 영향도 관찰되기 시작한다. 프랑스 요리사들이 러시아 요리에 프랑스적 변형을 가미하여 독특한 프랑스식 러시아 요리를 창조해내고 이것이 다시 프랑스로 유입되면서 이국적 음식으로 사랑받게 된 것이다. 또한 한꺼번에 모든 음식을 차려놓고 먹는 프랑스식 식사 방식이 러시아식 코스요리를 접하면서 큰 변화를 맞기도 하였다.
  두 나라에서 혁명은 음식의 토포스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는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음식문화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혁명은 19세기 귀족이나 왕족만 누리던 풍요로운 식탁과 다양한 요리를 부르주아 가정의 식탁으로 옮기는 데 일조했다. 또한 혁명 후 출현하기 시작한 레스토랑은 맛에 대한 관심과 추구가 유별난 나라라는 프랑스의 이미지를 각인시켜나갔다. 러시아에서도 두 번에 걸친 혁명은 계층의 구분 없이 음식문화의 전반적인 변화를 초래했으며 음식이 갖는 사회적 의미도 변화시켰다. 음식에 있어서 ‘자-타’의 구분, 곧 옛 음식과 새 음식, 전통 음식과 외래 음식의 구분이 흐려지고 미식의 개념보다는 생존의 필수요소로서 음식의 의미가 부각되기도 했다. 
연관 토포스 귀족; 농민; 도덕; 미; 애국심; 자-타; 정교;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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