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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이성
토포스명(프랑스) raison
토포스명(러시아) разум, рассудок
정의 1. 올바른 이성을 지닌 자일수록 진리의 길에 이르기 쉽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서구 역사에서 근대의 도래와 더불어 그 효용과 가치를 확고히 증명한 ‘래종 raison’의 직접적 어원은 라틴어 ratio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는 ‘측정’ 또는 ‘계산’을 의미하고 나아가 ‘수를 세거나 조리 있게 생각하는 능력’을 뜻하기도 하며 나아가 두 숫자 사이의 ‘관계’ 또는 비교와 측정을 통해 그 관계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을 지칭하는 데까지 그 의미 외연을 넓히기도 했다.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결국, 이성 또는 합리성을 갖춘 정신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사유할 줄 알며 사물들과 개념들 사이에서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는 정신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어 로고스(logos)와 관련하여 흔히 이성 개념을 말하기도 하는데, 로고스는 오히려 라틴어 vervum, 즉 ‘언어’ 혹은 ‘말(Verbe)’로 직접적으로 번역될 수 있다. 물론 로고스 자체에 ‘이성’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는 일정 부분 ‘정의(情義)적’ 차원이 포함된다. 바로 그 점에서 앞서 언급된 ratio와 차별성을 갖는다. 측정, 비교, 관계 등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인식을 지칭하는 ratio와는 달리 로고스는 오류를 걸러내고 참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자체로 수반한다. 
  어원적 수준에서 위와 같이 정리될 수 있으나 프랑스어 ‘래종’은 위의 두 개념 즉, ratio 및 logos를 엄밀하게 분리하기 보다는 그 둘을 함께 아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역사적으로 17세기의 파스칼에서 확인되는 바인데, 그가 보기에는 “심정(마음)은 이성은 알지 못하는 근거들(이성들)을 갖고 있다.” 아래의 인용에서 읽을 수 있는 이성 개념은 비단, 동시대인들에게는 우선 뛰어난 수학자였으나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일에 평생을 몸부림친 파스칼 혼자만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기나긴 중세를 살아온 유럽인들이 신과의 밀착된 정신적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나마 공유했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정신에 대한, 인간의 지적 심리적 기능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심정으로도 진리를 인식한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을 바로 이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원리들은 합리적 추론이 아무리 무너뜨리려 해봐야 소용이 없다.” (파스칼, 『팡세』)

  위대한 ‘이성의 시대’인 프랑스 고전주의 시대에 데카르트가 수립하는 이성의 개념이 그 위용을 프랑스뿐만 아니라 근대의 서유럽 전체를 비추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모든 명제들 앞에서 참된 것들과 그릇된 것들을 분간해 내려는 인간 정신의 이 새로운 시도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및 휴머니즘 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그러한 역사적 관점을 갖고 본다면 16세기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의 이성의 가치부여 및 합리적 정신의 발현은 결국은 중세적 신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이의제기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근대인들에게 가져다 준 ‘자기 존재의 확인’은 외부의 은총의 선물이 아니라 사유하는 정신 내부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여기에는 근대적 합리성의 확립이라는 지성적 문화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도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봉건적 경제 질서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는 부르주아지의 성장이 그러한 정신적 변화의 토대가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즉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자기 존재의 사회적 실현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의 차원이 아닌 다른 정신적 차원에서도 그 논리적, 윤리적 정합성을 스스로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성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와 규율의 시대였던 17세기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로 들어오면 이성은 개인적 및 사회적 차원에서 그 효용성을 더욱 뚜렷이 주장하고 또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철학적 문학적 발현을 볼테르의 『이성의 역사적 찬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성이 진리에게 말하였다 : 나의 딸이여, 오랫동안 우리가 비록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이제 비로소 우리의 세상이 도래하기 시작하는 것 같구나.” (볼테르, 『이성의 역사적 찬가』)

  볼테르가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 감옥은 교회와 신앙의 감옥이었다. 프랑스와 서유럽에서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진리는 언제나 신앙의 딸이었으며 인간의 정신은 신의 은총이 때로 진리를 보여줄 때 그것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자유롭고도 합리적인 비판정신이 형이상학적, 신학적 구름을 걷어내려고 노력하는 동안 이성은 급기야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세상에 자기를 실현하기에 이른다. 세계는 더 이상 귀족과 성직계급과 평민들로 삼단 구성된 ‘질서’가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합리적 사유능력을 가진 시민들이 모인 ‘사회’로 드러난다. 이성에 자연이 결부해준 ‘양심’을 따라 윤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사회와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개선할 수 있으며 그렇게 이루어진 진보의 행렬에 ‘행복’이 동참하게 될 것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이성의 개념을 표현하는 대표어로 ‘라줌 разум[razum]’을 들 수 있다. ‘라줌’은 ‘지혜, 지성’을 뜻하는 ‘움 ум[um]’에 접두사 ‘라즈 раз-[raz-]’(‘강화, 활성화, 다방면’)가 붙어 이루어진 단어이다. 공통슬라브어 umъ에서 연원하는 ‘움’에는 인도유럽어 어근 au-(‘지각하다, 이해하다’)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와 함께 이성을 뜻하는 또 하나의 단어 ‘라수도크 рассудок[rassudok]’도 있다. ‘раз-суд-ок’의 형태소 구성에서 어근을 이루는 ‘수드 суд[sud]’(‘재판, 판정’)는 공통슬라브어 *sǫdъ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성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태동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세계와 자연에 대한 지식이 미미했던 원시인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주로 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려고 했다면, 고대 사회에서는 인간 존재 자체에,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에 차츰 관심을 돌리기 시작함으로써 이성의 개념이 싹트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이성을 뜻하는 단어는 로고스였다. 어원적으로 ‘말한 것’을 뜻하던 로고스는 언어뿐만 아니라 이성, 진리, 그리고 종교적 개념까지 표현하는 단어로 개념발전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신학에서 파토스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로고스는 예측 불가능하고 어두운 카오스로부터 체계와 조화를 찾아냄으로써 조화로운 우주, 즉 코스모스를 밝혀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화로운 우주를 발견하게 해주고 이로써 진리에 이르게 해주는 고대 사회의 이성 개념은 중세 시대에 이르러 신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통로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축복으로서 현실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잡이이자, 신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통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가치 중심이 이동하게 되는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성 개념은 대부분의 철학적 사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특히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기대에 근거한 철학 이론을 발전시켜나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바로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 곧 이성의 능력을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진리로 천명한 것이다. 이렇게 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에 데카르트, 칸트로 대표되는 근대 철학자들에 의해 이성이 합리적인 세계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의 선험적인 능력으로 정립된 이후, 이성 개념은 여러 나라의 다양한 철학적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아간다.
  러시아에서도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에 걸쳐 서구의 계몽사상이 급속도로 유입되면서 이성의 가치가 급상승하였다. 특히 스스로 계몽군주이기를 자처했던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서구적 이성 개념의 전파에 앞장섰다. 18세기 프랑스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했던 사상가들을 일컫는 백과전서파는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인간 정신의 계몽을 주장한 자들이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자신의 겨울 궁전으로 백과전서파의 일원이자 프랑스 계몽주의를 선도했던 볼테르, 디드로를 초청해 토론회를 가지기도 했으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늘 곁에 두고 즐겨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저술이 러시아어로 활발히 번역되는 등,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계몽주의와 이에 기반한 서구적 이성 개념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렇듯 러시아에서 이성의 토포스는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 개념의 유입 및 확산의 직접적인 영향아래 형성되었지만 러시아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 속에서 서구 문화와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나간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7세기 중반,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을 찾아 나섬으로써 데카르트가 오류에 빠지지 않는 올바른 정신의 ‘방법’을 그의 『방법서설』에서 체계적으로 수립한 이후로, 이러한 이성적 능력 혹은 합리적 사유의 실천과 그 발현을 위한 노력들은 근대 프랑스 사회의 모든 문화적 정신적 영역에서 경주된다. 
  우선 그의 시대에 펼쳐진 문예사조인 고전주의와 그 모든 예술적 표현들은 이성의 토포스를 떠나서는 결코 설명되고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 주로 연극 장르에서 구현된 고전주의 미학의 주요 개념들과 원칙들, 가령 통일과 균형과 질서 등의 추구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였으며 세계와 삶의 제 요소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미학적 자신감의 산물이었다.
  고전주의 희극 또는 비극의 무대에서는 분열이나 모순 혹은 이질적인 것, 또는 기괴한 것이 올려져서는 안 되었다. 작가이든 관객이든 인간의 지적 능력과 미적 감수성은 모든 것을 통일된 체계 속에서 일정한 합리적 질서에 따라 표현할 수 있었으며 또 수용할 수 있었다. 프랑스 고전극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원칙이 된 ‘삼단일의 법칙(règle des trois unités)’ 혹은 ‘삼일치의 법칙’은 이러한 전제의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즉 연극의 시간, 장소, 사건이 지리멸렬하거나 가변적이지 않고 합리적인 균형과 통일 속에서 일치된 모습으로 재현될 것을 요구한 이 법칙은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라신, 부알로 등 17세기의 모든 주요 극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준수하였는데 고전주의 시대를, 위에서 언급한 바, ‘위대한 이성의 시대’로 불리게 하는 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로 넘어오면 이성의 토포스는 훨씬 더 강하고 전면적인 것으로 자리잡는다. 왜냐하면 계몽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를 ‘이성을 세계에 그리고 인간 정신에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과 ‘계몽’은 가장 인접한 두 토포스들일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 철학자들의 지적 성취의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항목 ‘이성’에, 다음과 같은 간결한 정의로써 시작하는 긴 글을 할애한다. 

“우리는 ‘이성’의 몇 가지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 있다.
1. (이성이란,) 어떤 빛을 비추어서건, 어느 분야에 있어서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도록 신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저 기능을, 아무런 제한 없이 그리고 단적으로, 의미한다.” 

  잘 교육받은 합리적 정신은 신이 혹은 자연이 부여한 사유 기능인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오류에 빠지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이렇게 축적된 인간의 인식 능력은 철학, 수학, 물리학, 미학, 역사학, 지리학, 천문학, 법학 그리고 심지어 신학에 이르기까지 어떤 지식 영역에도 적용되어 발휘될 수 있다는 믿음은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나가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이성의 이러한 기능은 특히, 구시대적 전통과 권위 및 그 질서에 대해, 그리고 이것들을 근거지우는 전근대적 종교관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가하도록 독려하고 훈계하는 정치적 윤리적 차원까지 겸비함으로써 볼테르나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시대의 거의 모든 철학적 투사들의 강력한 지적 무기가 되어 주었다. 특히 라메트리의 『인간 기계론』 같은 유물론적 저서들은 인간과 세계를 기계적인 합리성에만 입각하여 설명하고자하는 실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데에까지 나아가기도 하였다. 
  이성 혹은 합리성의 가치의 추구는 위의 유물론적 세계관 외에도 종종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가령 사드의 포르노 소설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성적 쾌락의 방법론적 가능성을 인간의 육체를 대상으로 끝까지 탐구하고 추론해 보려는 그의 시도들은,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18세기 말 혁명전야 프랑스 정신의 과도한 합리성 추구의 산물로 비치기도 한다. 『소돔에서의 120일』,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운』 등의 작품은 육체의 감각적 쾌락의 영역 마저도 인간의 정신과 언어가 기록할 수 있으며 그 쾌락의 최대치를 이성적으로 측정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의 산물로 읽히기 때문이다.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에 걸쳐 정치 사회적 혁명이 가져온 시민 사회에서 이성의 토포스 혹은 그 이데올로기는 철학을 비롯한 제 학문 분과 및 문예사조에서 그 문화적 영향력을 갖는다.
  서구의 근대사를 거치면서 꾸준히 입지를 굳혀온 과학적 합리주의는 우선 꽁트의 ‘실증주의’에 이르러 그 이론적 결실을 본다. 『실증주의 철학 강론』에서 꽁트는 인간 정신의 발전 단계를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 그리고 ‘실증적 단계’의 3 단계로 제시하는데, 이는 계몽의 과학적 이성이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리고 학문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현되어 나가는 단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알 필요가 전혀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몰라도 된다.”라고 냉정하게 선언하는 꽁트의 과학정신은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 후반 서구의 정신사를 지배하는 과학주의 혹은 과학적 객관주의의 극단을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개인의 주관적 감성의 차원과 종교적 신앙의 단계를 짐짓 미성숙한 것으로 규정하고 극복하여야 할 단계로 치부하는 이러한 합리적 객관주의의 성향은 문예미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데, 19세기 프랑스 소설사의 주류로 들어선 ‘사실주의’가 그것이다. 『적과 흑』에서 스탕달이 “소설이란 길거리를 따라 들고 다니며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발자크, 플로베르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일차적 임무는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 사회와 그 속의 인간 군상의 행태들을, 그 행동을 낳는 현실 세계의 제반 요소들과 힘들의 작용을 객관적으로 반영 혹은 재현해내어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하는 일이었다.
  문학에 작용한 이러한 실증주의적 태도는 19세기 말 졸라의 ‘실험소설론’에 이르러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심리가 갖는 주관적인 영역의 발현이나 개별적 영혼의 환상적 신화적 요소들의 개입을 경계하고 오직 인간 정신의 이성적 기능에 근거를 둔 과학적 합리성을 소설 문학에 그대로 적용해 보고자 한 졸라의 실험적 방법론은 그의 소설 세계인 『루공-마카르 총서』에서 방대하게 펼쳐진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대륙에서 정신사의 주된 흐름으로 전개된 이러한 합리주의의 전통에는 그러나 늘 반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엄정하고 가차없으며 일체의 일탈과 오류를 허락하지 않는 계몽주의적 이성의 지배에 맞서 많은 문학인들과 예술가들은, 인간 존재가 갖는 몽환적 낭만적 측면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분출하는 욕망에 제한없이 상상력과 정신을 맡기려 노력하였다. 
르  네상스 이후로 3~4세기에 걸쳐 서유럽에서 진행된 이성과 합리성의 일방적인 발현에 대해, 아도르노 등의 독일 비판이론가들은 20세기 초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그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합리적 경제행위가 새로운 질서와 덕목으로 공고해지는 근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회의 그리고 존재의 모호함에 대한 공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었다. 
  ‘비합리적’이라는 규정을 얻은 그 비이성적 환상의 목소리는 대륙의 합리주의의 종주국인 프랑스가 주춤거리는 사이 섬나라 영국에서, 그리고 깊고 어두운 숲의 나라 독일에서 먼저 들려오는 듯하다. 에드가 알랜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집안과 골목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으며 호프만의 『모래사나이』는 성인이 되고난 후에도 우리의 눈알을 위협하고 있었다. 명민한 이성의 표상인 총명한 눈알은 호프만의 그 소설 속에서 자동인형의 ‘눈깔’이었음이 밝혀진다. 
  프랑스에서는 그러한 음울한 기운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의 지울 수 없는 진실을, 소설가들이 아니라 먼저 시인들이 느낀다. 사람들은 보들레르, 네르발, 랭보의 시적 환상을 읽으면, 그들의 문화적 지평에서 이성이 아닌 비이성적 감성 혹은 환상의 토포스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착란을 통해서 비로소 견자가 된다”라고 말하는 랭보는 그러한 뒤틀기를 정신의 차원을 넘어 감각에로까지 내려가서 적극적으로 실현하라고 권한다. 
  영국과 독일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모파상의 많은 주인공들은 그 정체와 근원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기이하고 낯선 존재들에게 늘 시달림을 당한다. 
  그리고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가장 성공한 교향곡에 ‘환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음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균형과 통일과 이성적 질서가 아니라 어디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음표들의 무한 질주이다.
  또한 1차 대전을 거치면서, 프랑스의 일군의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화가들 그리고 스페인의 화가들은 ‘이성’의 지배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민다. 그들의 말들과 그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의 밑바닥을 자꾸만 내려다보게 만든다. 그 바닥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견디며 분석하는 일은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의 몫이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이성의 토포스는 그 인근 토포스인 ‘계몽’과 ‘진리’, 그리고 ‘진보’의 토포스들 옆에서, 그리고 그 반대편의 ‘감정’, ‘감성’ 혹은 ‘낭만’과 ‘환상’의 항목과 함께 프랑스의 문화적 지형도 속에서 자리매김해 왔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프랑스 계몽사상의 확산을 기반으로 러시아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 추앙받던 서구적 이성과 합리주의는 점차 새로운 해석과 평가를 받게 된다. 러시아에서 이성의 토포스의 전개 양상에서 두드러진 특성이라 할 만한 이성과 오성의 면밀한 구분 및 오성이라 지칭되는 서구적 이성 개념의 부정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추동하는 정치사회적 배경에는 프랑스 혁명과 1812년 프랑스와의 조국 전쟁(‘나폴레옹 전쟁’)이 있었다. 이들 사건을 거치면서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러시아가 세계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고민과 자각이 깊어져갔다. 특히 서구의 합리주의를 비판하고, 서구의 기독교, 즉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거부하는 동시에 러시아 정교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슬라브주의자들에 의해 서구적 이성 개념은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 사회는 서구주의자들과 슬라브주의자들의 격한 논쟁에 휩싸여 있었다. 서구 문화를 인정하고 지향하였던 서구주의자들과, 이와는 상반되는 정치 사회 철학적 견해를 견지했던 슬라브주의자들은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극명한 대립을 보였다. 푸시킨의 절친한 친구이자 서구주의자였던 차아다예프는 러시아인들에게 서구의 논리적 사고 방식과 합리주의가 부재함을 개탄하고, 특히 프랑스인들의 속성으로 언급되는 ‘경박함’이 실제로는 합리주의와 이성의 발현임을 주장한 바 있다.

“우리들에게는 확신, 사고의 정연함, 논리성이 부족합니다. 서구의 삼단논법은 우리에게 낯선 것입니다. [...] 인간은 연속성의 느낌을 상실하게 되면 세계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존재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인간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전체적인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언젠가 프랑스인들을 비난했던 경박함이 아닙니다. 그것(역주-경박함이라 비난 받던 것)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사물을 쉽게 인식할 줄 아는 능력이고 지성의 깊이와 지평을 배제하지 않으며 특유의 매력과 탁월함을 부각시키는 능력이었습니다.” (차아다예프, 『철학 서한 1』, 1829) 

  반면에 슬라브주의자들은 서구의 이성 개념과 합리주의 정신,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비판한다. 대표적 슬라브주의자였던 호먀코프는 서구적 이성 개념을 오성이라 지칭하고 이것을 ‘사랑도 모르고’, ‘빈곤하며’, ‘이기적’인 것이라 일갈한다.

“이성(‘라줌’)의 충만함, 완전함은 삶의 충만함을 요한다. 지식이 삶으로부터 분리된 곳, 지식의 담지자인 사회가 그 민족적 토대로부터 분리된 곳에서는 오로지 오성(‘라수도크’)만이 발달하고 지배적이 된다. [...] 얕고 피상적인 분석 안에서 오성은 연민도 교제도 형제애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빈곤하고 이기적인 정신의 사고능력만을 대표할 뿐이다.” (호먀코프, 『러시아 예술 학파의 가능성에 관하여』, 1847)

  호먀코프가 비판하고 거부했던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신앙과의 조화와 통합이 없는 ‘메마른’ 이성, 곧 오성이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사유능력의 두 형태인 ‘이성(Vernunft)’과 ‘오성(Verstand)’을 구분한 이래로, 칸트 저서의 러시아어 번역서들, 대표적으로 로스키의 번역(1907)에서 ‘오성’은 ‘라수도크’로, ‘이성’은 ‘라줌’으로 번역되면서 ‘이성’과 ‘오성’의 어휘 해석 전통이 확립되었다. 러시아에서 이성과 오성의 개념적 대립은, 특히 슬라브주의자들과 정교 철학자들 사이에서 칸트의 구분보다 훨씬 더 엄격한 양상을 보였다. 이성(‘라줌’)의 긍정성과 오성(‘라수도크’)의 부정성이 부각되는 양상으로 굳어진 것이다. 칸트는 직관의 능력인 감성과 대립시키는 경우, 사유 능력으로서의 이성과 오성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에 반해 러시아에서는 사고의 낮은 형태, ‘상대적’, ‘인간적’, ‘유한한’ 인식으로서 오성(‘라수도크’)과, 이에 반해 사고의 높은 형태, ‘절대적’, ‘신적’, ‘무한한’ 인식으로서 이성(‘라줌’)의 구분 전통이 확립된 것이다. 여기서 슬라브주의자들이나 정교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합리주의에 기반하여 신의 지혜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세속적이고 그 한계가 자명한 이성, 곧 오성이다. 반면 신앙과 결합한 완전한 이성은 인식 과정의 최고점을 이룬다고 본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이성과 오성의 구분과 대립, 그 중심에는 신앙이라는 중요한 매개변수가 자리잡고 있다. 슬라브주의자들, 더 나아가 20세기 러시아 정교 철학자들은 인간의 세속적 이성, 제한적 이성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완전한 이성, 곧 신앙과 대립시킨다. 러시아 철학자 일리인은 현대의 정신적 위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고는 그 일차적인 심오한 토대를 상실했다. 사고는 정신적 경험에 이르는 것을 강력히 차단당하고 감각적 경험에만 의존하며, 현상과 사건을 그 외적 측면에서 관찰하는 것에만 의존한다. 이로써 사고는 추상적이고 죽은 것이 되었다. 이것은 이미 이성이 아니라 벌거벗은 오성이다. 마음도 통찰력도 없는 이 추상적인 오성이 진실과 문화의 유일한 근원으로 변모하였다. 사려 깊은 이성과 신앙은 사라졌으며 위기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일리인, 『전집 6권』, 1997)

  정교 사상에 심취했던 톨스토이 역시 인간의 편협한 이성이 아니라 신앙과 결합한 이성, 곧 신의 이성에 대한 굳은 믿음을 피력한 바 있다.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신의 이성으로 살아가지 않고, 우리의 욕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에 조성된 일반적이고 왜곡된 이성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이 세상의 위험이 가로놓여 있다.”
“이성은 신이 그를 따르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성이 항상 진리와 거짓을 구분할 수 있도록 순수하고 깨끗하게 지켜내야 한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이렇듯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이성의 토포스는 이성과 오성의 뚜렷한 구분을 그 특성으로 하며, 이는 러시아 문화의 특수성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천상-속세’의 대립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성’이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에 국한된 속세의 낮은 능력이라면 ‘이성’은 절대적이고 무한하며 신적인 본질을 밝힐 수 있는 천상의 지혜이다. “우리의 모든 인식은 감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오성으로 나아가고 이성에서 끝이 난다”(칸트, 『순수이성비판』, 1781)고 할 때 바로 이 마지막의 완전한 이성은 천상의 지혜이자 신앙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러시아 문학 속 이성과 오성의 구분과 관련 있는 흥미로운 예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슬라브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는 작중 인물 중 한명에게 ‘이성’의 이름을 입힌다. 도스토옙스키가 인물들의 이름을 짓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작가임을 고려할 때, 『죄와 벌』의 라주미힌(←‘라줌’)이라는 이름도 결코 우연하게 나온 이름은 아닐 것이다. 루진이 그의 이름을 실수로 ‘라수드킨’(←‘라수도크’)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이름은 제한적이고 계산적인 오성 ‘라수도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좀 더 고귀하고 심오한 이성 ‘라줌’에서 나온 이름이다. 더 나아가 라주미힌 자신은 자신의 진짜 이름이 ‘다른 이에게 이성을 주다, 즉 계몽하다’를 뜻하는 ‘브라주미티’에서 나온 ‘브라주미힌’이라고 말한다. 피상적인 오성이 아니라 심오한 이성의 보유자 라주미힌은 “아주 유쾌하고 사교적인 젊은이로서 단순함에 가까울 정도로 선량하지만 이 단순함 속에는 심오함과 품위가 녹아있는”(『죄와 벌』)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러시아 민중적 시각에서 이성은 슬라브주의자들과는 다소 상이한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이성에 대한 민중의 태도는 러시아의 유명한 전래 동화 『바보 이반』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바보 이반』에는 모든 일이 다 자기운대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굳이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요행에 대한 기대와 같은 민중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바보 이반 동화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존재하지만 바보가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심지어 매력적인 인물로 찬양 받는 것은 러시아 버전의 특징이다. 바보가 매력적인 이유는 교활하거나 약삭빠르지 않아서이다. 바보의 임무는 자신의 행동, 외모, 운명을 통해 인간사의 그 무엇도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와는 무관함을 보이는 것이다(시냡스키, 『바보 이반』 참조).
  이성과 도덕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인식도 러시아적 이성 개념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이성이 도덕적, 윤리적 개념과 강한 상관작용을 하면서 때로는 양심의 동의어로, 때로는 진리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령 “이성의 빛”, “이성의 힘”이라는 표현은 이성의 지고한 가치를, 진리를 밝혀주는 것에서 찾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아래의 인용들은 이성과 진리, 그리고 양심이 거의 동일한 가치를 나타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때로는 이성이라 불리고 때로는 양심이라 불리는 그 정신적 근원에 바로 인간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인간은 진리 안에 있을 때만 자유롭다. 진리는 바로 이성에 의해 열리는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일반적으로 이성의 목소리를 믿었지요. 양심이 속삭이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지요.” (파스테르나크, 『의사 지바고』, 1955)

  서구적 이성은 종교나 윤리적 개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육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정신(mind)과 보다 밀접히 관련된다고 한다면, 슬라브주의자들이나 러시아 정교 철학자들에 의해 공고해진 러시아적 이성(‘라줌’)은 선, 악과 같은 윤리적 개념과 강하게 밀착되어 영혼(soul)에 보다 더 근접하는 개념으로 사유된다. 그래서 러시아적 이성은 도덕적 힘이자 이해심의 근간이 되며 때로는 양심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종교, 윤리적 개념과 밀접히 관련되던 러시아적 이성이 새로운 해석의 틀 속으로 편입되는 것은 러시아 혁명을 거치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면서이다. 이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 곧 합리주의적 이성에 대해 다시금 부활한 기대와 신뢰는 특히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형성되어 이후 유럽에까지 널리 영향을 주었던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러시아 구성주의는 세상을 이성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으며 예술 작품이 삶 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본 러시아 구성주의는 예술 전반에 걸쳐 일어난 운동이었지만 그 중 특히, 낡은 사회를 허물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건축이나 디자인 등의 조형 예술에서 두드러졌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대표 작품인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는 바로 이러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적 꿈을 잘 보여 준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에펠탑보다 훨씬 더 높은 400미터 높이의 건축물로 설계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는 세 개의 구조물이 나선형 형태로 서로 얽히며 돌아가는 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하단에 위치하고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는 육면체 모양의 구조물은 입법부가 들어서는 곳이고 한 달에 한 번 회전하는 중간의 피라미드 모양의 구조물에는 행정부가,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가장 위쪽의 실린더 모양의 구조물에는 선전부가 위치한다. 이것은 이성을 토대로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효율적으로 구현해보이고자 했던 타틀린의 열망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지만 당시의 기술적, 재정적 문제로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하고 모형으로만 축소 전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이성적인’ 이성은 유명한 <인터내셔널가>에서는 ‘감정적인’ 이성으로 변모하여 삶과 혁명을 추동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인터내셔널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애창된 곡 중 하나이다. 한때 소련의 국가로 채택되기도 한 러시아어판은 현재 공산주의 관련 정당들의 당가로 사용되고 있다. “일어서라! 저주 받은 자들이여! 전 세계의 굶주린 노예들이여! 우리의 성난 이성이 끓어올라, 이제 죽음의 투쟁도 불사할 각오가 되었다”로 시작되는 러시아어판의 이성(‘라줌’)은 프랑스 원곡의 ‘래종’을 번역한 것이다. 
  현대 러시아의 이성 개념에선 과거 슬라브주의자들이나 정교 철학자들이 뚜렷이 구분했던 세속적이고 제한적인 오성과 신적이고 지고한 이성의 구분이 점차 흐려지고 있는 듯하다. 이성은 인간 본연의 고귀한 가치이자 특성으로서의 긍정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의 제한적인 지성,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으로서 부정성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이는 러시아 언어관용을 보여주는 속담이나 격언에서 잘 드러난다. “새에게 날개가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빈약한 이성이 제일가는 해악이다.” “이성이 없는 아름다움은 헛된 것이다.”와 같이 이성은 인간 본연의 고귀한 특성으로 긍정적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현대 러시아인들에게도 여전히 사랑받는 튯체프의 시구에서처럼 심오한 이해를 담보해주지는 못하는 피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러시아란 나라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일반적인 척도로 측량할 수 없다.
그 안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곳,
러시아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튯체프, <러시아란 나라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1866)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에서 이성의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 ‘래종’은 ‘측정, 계산’의 의미를 지니는 라틴어 ratio에서 기원하고, 러시아어에서 이성을 나타내는 단어 ‘라줌’과 ‘라수도크’는 ‘지혜’, ‘판단’의 의미를 지니는 공통슬라브어 어근으로부터 만들어진 단어들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했던 중세 시기와, 러시아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적극 수용했던 근대 초기까지 두 나라에서 이성의 개념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시기의 이성은 신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도록 신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것으로서, 이 관계에서 인간의 역할은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가치 체계가 이동하는 중세 이후의 프랑스에서는 인간의 독립적 가치로서 이성과 합리적 정신이 더욱 각광 받기에 이른다. 또한 봉건적 경제 질서가 해체되고 부르주아지가 성장하면서 근대적 합리성과 이성은 그 위용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흔히 ‘이성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프랑스에서 이성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사회에서 그 효용성과 가치가 극에 달하였다. 근대 프랑스 사회의 모든 문화적 정신적 영역에서 이성적 능력 혹은 합리적 사유의 실천과 그 발현을 위한 노력들이 경주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은 구시대적 전통과 질서, 전근대적 종교관에 대해 자유로운 비판을 가하도록 독려하고 훈계하는 정치적, 윤리적 차원까지 겸비함으로써 계몽주의 시대의 거의 모든 철학적 투사들의 강력한 지적 무기가 되어 주었다.
  프랑스적 계몽주의를 황실에서부터 적극 수용하던 18세기 말은 러시아 사회에서 이러한 프랑스적 이성 개념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인간의 실용적인 지적 능력으로서 이성의 가치와 효용성이 극대화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철학적, 사상적 논의들에서 이성 개념의 발전은 오히려 근대에서 중세로 회귀하는 듯, 기독교적 세계관과 더욱 밀착되는 방향으로 개념 발전이 이루어진다. 러시아에서 이성은 인간의 제한적 인식 능력의 틀을 깨고 신앙과의 결합을 통해서만이 올바른 것이 되며, 이로써 그 본연의 임무인 진리의 길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이 무르익는다. 요컨대, 프랑스적 이성은, 차아다예프가 극찬했듯이, 합리주의에 기반한 재치와 기지로서의 긍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만, 정교 철학자나 슬라브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러시아적 이성은 단순히 인간의 사고 능력이 아니라 영혼이자 양심이며 도덕적 힘이 되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연관 토포스 1812년 전쟁; 계몽; 도덕; 부르주아; 양심; 신앙; 정교; 진리; 합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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