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자유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자유
토포스명(프랑스) liberté
토포스명(러시아) свобода; воля
정의 1. 외부의 간섭과 억압이 적을수록 인간은 더 자유로워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외부의 어떤 구속에도 매어있지 않는 사람, 또는 사물의 상태’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리베르테 liberté [libεʀte]’의 어원은 라틴어 libertas이다. libertas는 ‘자유로운’을 뜻하는 형용사 liber(프랑스어로 libre)에서 파생되었다. 라틴어 liber는 ‘책’(프랑스어로 livre)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단어가 책과 자유의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된 것은 나무로 책을 만든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 종이를 만드는 나무껍질은 나무에서 분리되며 그것으로 만든 책은 이동이 자유롭다. 이로부터 나무껍질처럼 한 자리에 고정되어있지 않아도 되는, 즉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이라는 뜻이 생겨났고, 실제로 고대에 이 용어는 노예가 아닌 사람뿐만 아니라 ‘굴레’가 씌워있지 않은 짐승에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봉건제도 하에서 영주와 성과 땅에 매어있던 중세인은 거기서 벗어나 자유롭게 교역활동을 하던 중세의 도시 부르그(bourg)를 ‘자유로운 도시(ville libre)’라 불렀다. 
  서양문명에서 자유의 개념은 크게 윤리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각각 자유 개념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인간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발달 과정에도 상응한다. 프랑스는 자유의 정치적 개념화의 과정에서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통해 자유를 근대 시민사회의 기본 원칙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며, 또한 특유의 사회적 관심과 실증적 정신으로 개인의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탐색을 시도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나 장인처럼 노동하는 자들의 행동을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기원전 322)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의지적인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을 구분하고, 노예나 장인처럼 노동하는 자는 자유롭지 못하여 그의 활동이 육체를 왜곡시키고 그 결과 정신의 자질 또한 변질되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훌륭한 인간의 행동은 실천적 이성의 활동 즉 사유인데, 사유는 물질적인 구속에 매이지 않는 의지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이러한 의미는 자유인에게 필요한 7개의 교양 과목, 즉 신학을 제외한 문법, 수사학, 변증법,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가리켜 자유학예라 부른 데서 잘 드러난다. 이 과목들은 전문 직업으로 이어지는 의학이나 법학과 달리 생계와 무관한,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런 점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학예로 불렸고, 오늘날에도 교양교육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러한 자유의 개념은 인간의 의지가 전적으로 물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결정론에 맞서 자유를 인간의 행동과 도덕의 토대로 보는 관점을 확립하였다. 
  자유의 개념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기독교의 ‘자유의지’ 개념이다. 기독교의 신은 물질세계를 창조한 말씀의 구현이다. 이는 곧 신을 로고스와 창조의 의지로 규정함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라틴어 liberum arbitrium이 어원)라는 말은 악의 존재를 해명하고 정의로운 신을 보존하기 위해 변신론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악의 존재를 신에게 전가하지 않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죄를 연결시켰고, 이때부터 인간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 때문에 본래부터 죄인이 되는 원죄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인간의 자유의지가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둘러싼 논의는 기독교 내부에서 계속 이어지는데, 그것을 우선 일단락지은 사람은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이다. 그는 신의 의지가 오성보다 우위에 있어 신의 말씀 곧 진리도 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주지주의를 확립함으로써, 인간이 이성의 능력(실천적 이성은 의지의 차원)으로 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간학적 차원을 기독교에 부여했다. 원죄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원죄를 ‘내면화된 죄의 발명’이라 비난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나, 본질과 실존의 관계를 뒤집고 인간의 자유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등에 의해 새롭게 문제제기 된다. 
  개인 또는 정치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자의 억압적인 권력에 속박되지 않는 상태의 의미로 자유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풍부한 재화와 새로운 지식의 획득을 토대로 핵심적인 사회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르네상스 이후일 것이다. 프랑스는 17세기에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부흥기를 맞고 유럽의 중심세력으로서 위상을 굳혔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들은 성공적으로 귀족사회에 편입되고 정치적 입지를 준비함으로써 자신들의 시대가 본격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확립한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의 합리주의와 과학적 지식, 세계에 대한 풍부한 경험으로 부장한 부르주아들이 지배계층이 전유한 권력과 이득의 부당함을 깨달으며 자신의 권익을 찾기 시작했다. 존 로크(1632~1704)의 경험론이 마침내 신에게서만 발원되는 진리와 인간의 삶이 무관하므로 더 이상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행복을 추구하자고 말했을 때,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특권층의 지배와 부당한 이득을 비난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권리로서의 자유, 이것이 자유의 정치적 개념화의 출발이다. 그것을 획득하고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확장된 정치적 의미는 ‘해방’을 뜻하는 ‘리베라시옹(libération)’이라는 단어 속에서 적절히 표현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원시 슬라브어 *sveboda로부터 기원하는 ‘스보보다 свобода[svoboda]’는 ‘스보이 свой[svoi](‘자신의’)’와 어원적으로 관련된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신의 사람들 속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이 영역이 넓을수록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반대로 인간은 무언가가 옥죄고 압박해 온다면 자신의 영역이 좁아졌으며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러시아어 사전들은 ‘스보보다’를 ‘좁다’는 뜻의 어근을 지니는 ‘스테스네니예 стеснение[stesnenie](‘속박, 압박’)’을 통해 기술한다. 가령, 현대 러시아어 사전인 <우샤코프 사전>에서는 ‘스보보다’를 “주체가 자기 의지를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 제한과 속박이 부재한 상태”로 정의하고 19세기 사전인 <달 사전>에서도 “속박, 부자유, 노예상태의 부재,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러시아어에서 자유의 개념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단어 ‘볼랴 воля[volya]’는 인도유럽어 어근 *el-(‘원하다, 바라다’)으로부터 기원하며 인도유럽어들에서 동일한 어근의 단어가 여럿 발견된다(라틴어 volo-velle, 독일어 wollen, 프랑스어 vouloir 등). ‘볼랴’는 자유의 개념뿐만 아니라 의지의 개념도 담고 있는 다의어이다. ‘볼랴’의 이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복합적 의미의 상이한 발현이라 볼 수 있다. 무게가 물체의 본질이듯 자유가 의지의 본질이 된다는 헤겔식의 규정에서도 ‘자유’와 ‘의지’ 개념의 밀접한 관련성이 드러난다. 자유가 없는 의지는 있을 수 없고 자유는 의지를 통해 현실화되는 것이다. 곧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상태’가 ‘볼랴’가 드러내는 자유라 할 수 있다. 
  러시아어로 자유를 뜻하는 두 단어는 두 가지 자유 개념과 관련 있어 보인다. 이사야 벌린이 구분한 이래로 자유의 개념을 논할 때 종종 언급되는 이 두 자유 개념은 흔히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라 불리는 것들이다. ‘적극적 자유’는 라틴어 ‘리베르타스(libertas)’가 표현하는 자유 개념과 유사하다. ‘리베르타스’는 자유로운 상태, 어떤 구속에도 매어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며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관리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소극적 자유’는 외부로부터 간섭과 방해가 없는 상태를 일컬으며 이것은 전형적으로 영어의 freedom이 표현하는 자유 개념이라 할 수 있다(베즈비츠카, 『의미론적 보편성과 언어의 기술』 참조). 두 자유 개념이 명확히 정의되고 분리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둘의 차이를 다소 느슨하게 표현하자면 적극적 자유는 ‘~로의 자유’ 혹은 ‘~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는 ‘~로부터의 자유’ 혹은 ‘~를 안 해도 되는 자유’라 말할 수 있다. freedom은 ‘부재, 결핍, 결성’을 나타내는 from과 결합할 수 있는데 반해 라틴어의 libertas나 영어의 liberty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도 양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 중에서 역사적으로 더 오래된 자유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공동체적 가치의 핵심으로 중시되던 적극적 자유이다. 반면, 소극적 자유 개념은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확산되면서 태동하게 된, 보다 근대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freedom에 반영된 새로운 자유 개념은 노예적 상태나 박해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적극적 자유보다는, 간섭이나 방해로부터의 자유인 소극적 자유에 더 가까우며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둔 자유인 것이다. 나의 권리를 강조하는 ‘간섭이나 방해의 부재’로서의 자유는, 반대로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유의미하다. 즉 소극적 자유란 나의 자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도 인정하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이다. 따라서 소극적 자유와 제약, 제한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개념이 아니며 보편적 권리로서 자유의 보장은 합리적인 제약 없이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러시아어의 ‘스보보다’와 ‘볼랴’가 드러내는 자유도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개념과 상관지울 수 있다. ‘스보보다’는 freedom과 유사하게 외부로부터의 속박이나 방해의 부재에 초점을 둔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보다 근접하고, ‘볼랴’가 드러내는 자유는 자신이 자신에 대해 온전한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본래적 의지를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적극적 자유와 좀 더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자유를 기치로 내건 수많은 운동, 봉기, 혁명의 경험이 풍부하다. 그런데 이들이 주창한 자유가 동일하지는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전제 정권, 농노제의 사슬에 묶여있었던 과거의 러시아 사회에서 그 사슬을 끊고자 했던 농민 봉기의 목표는 ‘볼랴’로 표현되는 자유라는 것이다. 가령 현대 러시아 소설가 슉신의 『나는 당신들에게 볼랴를 주고자 왔다』(1969)라는 소설 속에 묘사되고 있는 스테판 라진의 농민 봉기가 목표로 하는 자유가 그러하며, 또한 푸시킨의 『푸가쵸프 이야기』(1834)에서 그려지는 푸가쵸프의 반란(1773~1775) 역시 볼랴로 표현되는 러시아적 자유를 꿈꾸고 있다. 속박의 가쇄를 끊고 자유를 얻고자 하는 몸부림이 농민 봉기의 본질이며 러시아 폭동은 ‘볼랴’의 극한적 발현이라는 것이다(페트로비흐, <러시아 언어 인식에서 볼랴와 스보보다의 개념> 참조). 이러한 생각은 1860~1870년대 인민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비밀혁명단체의 명칭이 ‘토지와 볼랴’라는 것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시초라고도 불리는 작가 라디시체프와 인텔리겐치아들이 염원했던 자유는 ‘스보보다’로 표현되는 자유라는 것이다. 라디시체프가 『페테르부르크로부터 모스크바로의 여행』(1790)에서 민중을 위해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였을 때, 이때의 자유는 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시민적 권리로서의 자유이다. 사회의 틀 안에서 법에 의해 보호되는 시민의 권리로서의 자유는 ‘스보보다’로 지칭되는 자유인 것이다. 이렇게 자유가 타자의 억압적인 권력에 속박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게 되면서 이로부터 그것의 정치적 개념화가 촉발된다. 개인 혹은 집단의 권리로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은 정당한 투쟁 곧 정의를 위한 투쟁이다. 이로써 ‘자유-법-정의’라는, 투쟁의 목표와 그 정당성을 가리키는 삼각구도가 형성되며 이때의 자유는 ‘스보보다’로 표현되는 자유이지 ‘볼랴’의 그것이 아니다(아루튜노바, <볼랴와 스보보다> 참조). 요컨대 똑같이 자유를 주창하였다고 할지라도 라진과 푸가초프는 ‘볼랴’에 대해 말하고 라디시체프는 ‘스보보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는 ‘스보보다’와 ‘볼랴’라는 다소 상아한 듯 보이는 두 단어를 통해 개념 발전해 왔다. 러시아어에 자유의 개념을 표현하는 두 단어의 존재는 그 자체로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스보보다’와 ‘볼랴’는 때로 서로 멀어지기도 하고 때로 서로 가까워지거나 혹은 상호 침투하면서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에서 자유의 토포스의 다채로운 전개 양상의 근간을 이루어온 것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서양에서 ‘자유’의 개념에는 인간의 존재를 자연 또는 신과 관련하여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가치와, 자기 존재의 실현이라는 윤리적 가치, 권력의 압박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인간의 기본 가치라는 정치적 차원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특히 근대 이후 프랑스에서 발달한 자유의 실천적 차원과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합리주의와 자유사상의 전통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사유하는 주체의 자유를 천명한 것으로, 그의 후예인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자유는 무엇보다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자유사상가를 의미하는 17세기 리베르탱(기성의 도덕적 종교적 규범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사람)의 후예를 자처하며 계몽주의자들이 스스로 ‘철학자’라는 명칭을 부여한 데서 우리는 프랑스 특유의 합리적, 비판적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시장경제체제가 발달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토대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시민 사상이 형성되었던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와 리베르탱의 후예답게 합리적으로 체계화된 사상을 통해 사회를 변혁하려는 계몽주의 운동이 대두되었다. 대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계몽사상가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은 시민이 개인의 자유를 일반의지에 전적으로 양도하겠다는 공공의 계약이다.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이러한 존중은 프랑스의 지적 전통의 특성을 이룬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이 대혁명을 야기하고 왕의 처형과 공화정의 확립이라는 전복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이처럼 기성의 도덕과 종교적 규범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합리주의와 자유사상의 전통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인이 추구하는 자유는 대체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이었다. 
  대혁명의 ‘인권선언’이 영국과 미국의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비해 인간에 대해 보편적 이해를 담지하고 있다고 믿는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념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길에 오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나라, 작가, 화가 그밖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위해 찾아가는 나라가 프랑스이다. 프랑스를 ‘자유의 나라’로 불리게 한 첫 번째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다. 전제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으로 행군하던 파리의 민중들이 외치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1830년 7월 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자유의 나라 프랑스의 으뜸 상징들이다. 
  삼색기를 들고 한 쪽 가슴을 내놓은 채 투창을 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뉴욕의 자유의 섬에서 ‘세상을 밝히는 자유의 여신’으로 거듭나있다. 미국의 독립선언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자유의 종주국’ 격인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이 자유의 여신의 원형은 왕을 대체하여 공화국의 상징이 된 이후 프랑스의 모든 공공장소에 조각상으로 세워진 ‘마리안느’이다. 그녀가 쓰고 있는 붉은 색 프리지아 모자는 자유를 의미하며 드러낸 한 쪽 가슴은 해방을 의미한다. 

“자유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데 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의 자연권의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동일한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한계가 없다. 이 한계는 법에 의해서만 정해질 수 있다.” 
(대혁명 때 선포된 <인권선언>, 1789)

  18세기 연구가 스타로벵스키는 프랑스의 18세기를 한 마디로 “자유를 발명한” 시기로 규정하였다. 이 시기에 자유는 쟁취해야 할 자유, 즉 해방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계몽이 되면 될수록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볼테르, 팸플릿, 18세기)

“자유는 법이 허용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이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1748)

“자유를 포기하는 것 그것은 인간의 특성과 인류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에게는 어떤 보상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한 포기는 인간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다.” (루소, 『사회계약론』, 1762)

  18세기에 계몽된 이성이 구체제의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의 족쇄를 풀어주는 정치적 해방을 추구한 사실 이면에 흔히 간과되는 또 하나의 해방이 있다. 그것은 18세기를 풍미했던 리베르티나주(자유연애풍속)가 추구한 한 성의 해방이었다. 계몽사상이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깨닫게 해주었다면, 금서였지만 대부분의 부르주아지 가정에서 몰래 읽히던 리베르탱 소설들은 외설적인 성의 묘사들을 통해 억압받던 육체를 기독교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자유에 관한 정치적 담론들 옆에 성적 담론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성이 인간의 정신에 빛을 주어 계몽시키듯, 리베르탱 소설들이 인간의 육체를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경험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육체를 해방시키려는 의도는 특히 성에 관한 온갖 육체적인 실험과 체험이 자행된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1740~1814)의 ‘소돔’ 성에서 잔인하고도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정치적 자유와 성적 자유의 상관성은 두 세기를 훌쩍 넘어 20세기 중반 산업사회와 시민사회가 누적해온 억압의 피로를 씻어내고자 했던 68혁명이 성적 금기를 폐지할 것을 외치는 구호들로 이어졌다. 인간에게 가하는 모든 억압은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언제나 육체에, 가장 본질적으로는 성에 상처로 남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즐기자,” “더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 (68혁명 당시 낙서들)

  프랑스에서 자유가 성의 해방과 동시에 표출되는 현상은, 앞서 리베르탱의 전통과 합리주의 전통에서 보았듯이,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고 일상의 삶을 통해 변혁을 일구어내려는 프랑스인들 특유의 정신과 감각에서 연유되는 듯하다. 인권선언을 초안한 미라보의 1793년 국회연설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자유는 철학적 추론을 통해 다듬어진 이론의 결실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경험과 사실들에 의거한 단순한 추론의 결실이다.” (미라보, <1793년 국회연설>) 

“자유는 단절이다. 자유는 용기가 아니라 사랑과 관련된다.” (프랑수아 미테랑, 『내 몫의 진실』, 1969) 

  혁명 이후 정치권력을 획득한 부르주아지가 민중을 외면하고 민중이 정치적 자유로부터의 소외를 의식하면서 19세기에는 정치적 자유의 불충분성, 또는 편파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가 시작하는 곳에서 멈춘다.”라는 속담에서도 볼 수 있듯이, 1789년 이후 일련의 혁명들의 성과를 부르주아지가 독차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정치적 자유가 갖는 한계 및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 이러한 자유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들까지 등장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공동체를 제외하고 어떤 제도적 장치도 거부하며 사유재산을 없앨 것”(프루동, 『소유란 무엇인가』, 1840)을 주장한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자유는 대혁명을 통해 정치적 권리로 확립된 권리로서의 자유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사유재산은 근대 자유주의가 획득한 개인의 자유의 근간이자 상징이다. 이것을 폐지하자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내세운 자유 개념과 단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유재산의 자유는 혈통보다 더 지독한 종속관계를 만들고 그로부터 더 심각한 자유의 억압을 초래하는 위선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산주의자들도 인간의 자유를 국가나 민중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민중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부르주아 독재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동안 자유는 없다. 자유가 지배하게 될 때 더 이상 국가는 없다.”(블라디미르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19세기에는 장 발장처럼 핍박받는 민중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공화주의자(위고, 『레미제라블』, 1862)가 등장했고, 특권층의 권력을 제 것으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었지만 이미 계급화된 부르주아지의 탐욕과 권력의 벽을 결코 넘을 수 없음을 확인하고 좌절하는 쥘리엥 소렐(스탕달, 『적과 흑』, 1830)도 등장했다. 하층민 출신이었던 쥘리앙 소렐에게 시민적 자유는 결코 부여되지 않았다. 이들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보여주는 개인의 자유와 시민 사회의 갈등이, 이후로 전개될 사회적 또는 인간적 자유의 달라진 패러다임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는 무질서를 낳고 무질서는 전제체제를 낳고 전제체제는 다시 자유를 데려온다.”(『상어가죽』, 1831)는 발작의 발언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자유가 겪는 파란 많은 여정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이후 자유의 개념은 새롭게 해석되는 경향을 보인다. 

“개인의 자유는 전혀 문화적 산물이 아니다.” (프로이트, 『토템과 터부』, 1913) 

  정치적 권리로서의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 진술에 의해 이후 사람들은 자유와 관련하여 내재화된 억압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적 사유와 관습에 얽매여있는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이로부터 자동기술, 데칼코마니, 콜라주 기법 등을 통해 의식의 두꺼운 표층을 뚫고 무의식의 세계를 탐사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모험적인 실험들이 비롯되었다. 결국 진정한 의식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끊임없는 충동들이다.

“마송이 다른 어디에서보다 […] 예술이 반드시 자유로운 채 남아 있으려는 또는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서만 자신의 자유를 양도하려는 존재의 활동들을 고려하는 한, 예술을 불신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혁명』, 9-10호, 1924) 

  초현실주의에서 자유는 언제나 초월 또는 창조와 연결되며, 이는 결국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의식의 끊임없는 모험이다. 
  반면 20세기 실존주의의 대가 사르트르는 이처럼 무의식을 통한 자유의 추구를 부인한다. 사르트르는 무의식은 인간의 절대 자유를 축소시킬 수 없으며, 인간에게는 본질이 정해져있지 않고 본질은 존재자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스스로 삶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 이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래의 기획에 의해 현재 상황을 넘어서는 것을 사르트르는 초월이라 불렀다. 개인은 언제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결정하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기 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그 경계를 알아야만 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 경계 내에서만 인간은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롭기를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에 처해진 것이다.” (사르트르, 『구토』, 1938)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자유에서 인간이 처해진 운명으로서의 자유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르트르는 이 자유의 개념을 통해 합리적 의미도 궁극적 목표도 없이 부조리할 뿐인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 그런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새삼 묻고 있는 듯하다. 자유롭기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선택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 선택의 범위와 기준을 알려주는 지표라곤 아무 것도 없는 이 세계에서 인간은 선택의 자유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라고 말할 때, 사르트르의 자유는 “개인과 그가 차지하는 공간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1955)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그리고 끝없이 추구해야 하는 관념으로서의 자유이다. 
  부르주아 도덕의 위선과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이 하나의 운동으로 표출된 68혁명이 외친 자유 또한 바로 이 연장선에 있다. “자유 그것은 모든 죄를 포괄하는 죄이며, 우리의 절대적 무기이다.” (68혁명 슬로건)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한 영화의 주인공의 대사 “자유는 프랑스의 모든 감옥에서 7시에 일어난다.”(앙리 베르네유, <지하의 멜로디>, 1963) 또한 현대인의 자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파란 색은 자유이고 자유를 위해 우리가 치른 대가의 역사이다. 우리는 어떤 정도로 진정 자유로운가?” (키에슬로브스키, <파랑>, 1993)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사회에서 ‘스보보다’와 ‘볼랴’로 표현되는 자유의 토포스가 전개되는 양상을 살펴보면 몇 가지 독특한 러시아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러시아에서 자유의 토포스는 다른 문화권의 그것보다 유독 속박, 압박, 강요와 같은 개념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점이다. 이는 러시아의 전통적 관습과 정치 사회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많은 연구가들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자유 개념은 아이를 천으로 단단히 싸 놓는 러시아 특유의 관습과 관련되며 이로부터 러시아적 자유는 어떤 속박이나 제약 없이 자신의 팔, 다리로 움직일 수 있음에 행복을 경험하는 싸개를 푼 아이의 형상과 잘 상응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때의 자유 개념은 단순히 압박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기쁨, 만족감을 내포하며 이것은 다른 문화권의 자유 개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특성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베즈비츠카, 『의미론적 보편성과 언어의 기술』 참조).
  이 전통적 관습에 대해서는 톨스토이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다. 톨스토이는 싸개에 단단히 싸여 있던 시절, 그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했다고 술회한다.

“싸개로 싸여진 그는 어둑한 곳에 누워 온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친다. 그는 어떻게든 싸개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그를 들여다본다. 그들은 동정하기는 하지만 싸개를 풀어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것(즉 나를 싸개로 싸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를 증명해 보이고 싶다. 나는 온힘을 다해 소리친다 [...] 나는 자유를 원한다’.” (폴네르, 『레프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2009)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가 다른 문화권, 특히 영미 문화권의 자유의 토포스와 다른 점으로 종종 제한의 부재라는 특성이 언급된다. 영미권에서 자유의 토포스가 외부로부터 방해 받지 않을 개인적 권리에 초점을 두며 나의 자유뿐만 아니라 타인의 권리로서의 자유도 인정하고 배려하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러시아에서 자유의 토포스는 타인의 권리로서의 자유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17년 6월 오데사에서 출간된 잡지 삽화는 자유를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각각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인: 아무도 날 때릴 수 없어. 우리에겐 자유란 게 있거든. 
러시아인: 난 아무나 때릴 수 있어. 우리에겐 자유란 게 있거든.”

  이처럼 러시아에서 자유의 토포스는 어떤 종류의 제약이나 강요도 부재하다는 생각과 긴밀히 연결되는 듯하다. 이는 ‘볼랴’가 드러내는 자유의 개념에서 더욱 그러하다. ‘스보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속박이나 방해의 부재에 초점을 둔 소극적 자유의 개념과 좀 더 유사하다고 한다면, 자신이 자신에 대해 온전한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본래적 의지를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볼랴’는 라틴어의 ‘리베르타스’처럼 적극적 자유에 보다 근접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볼랴는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인 것이다. ‘스보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의 권리이지만 나의 권리는 다른 사람들의 권리에 의해 제한 받으며 수많은 ‘스보보다’들의 공존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freedom과 유사하다. 그러나 ‘볼랴’에서는 제한이나 다른 사람의 권리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러시아 여류작가 테피는 시민 사회, 질서가 잡혀있는 사회, 법이 지배하는 사회 안에서의 자유인 ‘스보보다’와,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볼랴’를 대비시킨다. 

“볼랴는 스보보다와 전혀 다르다. 
스보보다는 liberté이며, 국가 안에서 법을 준수하는 시민의 합법적인 자산이다. 
스보보다는 모든 언어로 번역가능하며 모든 민족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볼랴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 
스보보다는 인간의 시민으로서의 자산이다. 
볼랴는 감정이다. 
우리 러시아인, 옛 러시아의 후손들은 바로 이 볼랴의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다.“ (테피, 『볼랴』, 1990)

  자유와 제한, 제약이 공존할 수 있는 개념인가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러시아 역사에서 ‘스보보다’와 ‘볼랴’가, 서로 연관되지만 상이한 두 현상을 지칭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농노제가 유지되던 시기에 자유농과 자유농이 거주하는 마을을 ‘슬로보다’(‘스보보다’의 음운적 변이형)라 지칭한 반면, 농노 해방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는 ‘볼랴’가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제한된 자유로서의 ‘스보보다’와, 제약이나 제한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린 개념으로서 ‘볼랴’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제약이나 제한을 모르는 ‘볼랴’는 감정을 표출하거나 행위를 할 때 절제되지 않는 자유를 지시하기도 한다. 가령 “자신에게 볼랴를 주다”가 ‘제멋대로 하다’의 의미를, “손에 볼랴를 주다”가 ‘함부로 주먹을 쓰다’를, “심장에 볼랴를 주다”가 ‘홀딱 반하다’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에서 ‘볼랴’의 무절제성이 두드러진다. 이 절제되지 않는 자유, 완전한 자유로서의 ‘볼랴’는 그 한계 없음으로 인해 종종 부정적 결과로 귀결되기도 하며 러시아어에는 ‘볼랴’의 이러한 부정적 특성을 강조하는 속담이나 격언이 많다. 

“볼랴가 많을수록 운이 나빠진다.”, “볼랴는 선량한 아내도 망친다.” (러시아 속담)

  이렇듯 ‘볼랴’로 대변되는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가 ‘제한, 제약’의 부재라는 특성과 상관되는 개념으로 발전한 데에는 러시아적 ‘공간’ 개념의 기여도 적지 않았을 듯하다. ‘스보보다’가 질서가 잡히고 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시민적 권리라고 한다면 ‘볼랴’의 참 의미는 사회로부터 일탈할 때, ‘드넓은 공간’으로 나아갈 때야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볼랴’는 끝없는 초원, 광활한 공간을 연상시키며 열린 공간 자체를 지시하기도 한다. ‘볼랴’와 ‘러시아적 광활한 공간’의 관계는 리하초프의 설명에서 잘 포착된다. 

“드넓은 공간은 항상 러시아인의 심장을 지배해왔다. 이것은 다른 언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과 표상에 녹아든다. 가령 볼랴는 스보보다와 무엇이 다른가? 자유로운 볼랴란, 광활한 공간, 그 어떤 방해물도 없는 공간 개념과 결합한 스보보다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리하초프, 『러시아적인 것에 대하여』, 1980)

  ‘볼랴’가 공간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 데에는 러시아의 정치, 역사적 상황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주거지역을 스스로 선택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았던 농노제가 수세기에 걸쳐 지속됨으로써 농민의 시각에서 진정한 자유는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공간적 자유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게 된 것이다(베즈비츠카, 『의미론적 보편성과 언어의 기술』 참조). 이처럼 광활한 공간과 연상 작용하는 ‘볼랴’는 러시아 낭만주의 시대에 ‘방랑자, 유랑자’의 전형으로서 “자유로운 카자크인”, “카자크의 볼랴”와 같은 표현을 태동시켰다. 이를 “카자크의 스보보다”라고 표현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성, 초원적 메타포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광활한 공간에서 만끽하는 자유 ‘볼랴’는 사회 안에서의 밋밋한 자유, 그래서 다소간은 무료한 자유가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신선한 자유이다. 이 자유의 상태를 리하초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볼랴, 이것은 내일에 대한 근심이 없는 상태, 무사태평, 현재에 행복하게 몰입된 상태이다.” (리하초프, 『러시아적인 것에 대하여』, 1980)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가 드러내는 또 다른 특성은 자유와 러시아성의 긴밀함에 대한 인식이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경험이 풍부하다는 사실은 자유를 러시아인의 민족성과 연관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러시아성을 부여받은 자유가 ‘스보보다’인지 ‘볼랴’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러시아 언어와 문화 관련 연구에서 ‘볼랴’는 ‘드넓은 러시아적 영혼’과 의미 작용하는 고유한 러시아적 인식인 반면, ‘스보보다’는 대부분의 문화권에 상응하는 단어가 존재하는 보편적 가치 개념으로 간주된다. ‘볼랴’와 ‘스보보다’의 관계를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관류해 온 ‘자’와 ‘타’의 이분법적 대립과 관련시키는 것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요컨대 ‘볼랴’는 예로부터 내려온 고유한 러시아적 개념인 반면 ‘스보보다’는 서구의 근대정신에 상응하는 서구적 자유 개념이라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테피의 『볼랴』나, 러시아적 자유 개념과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러시아 망명 작가 페도토프의 유명한 말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민중이 염원하고 찬양하며, 러시아인 각각의 심장이 반응하는 ‘볼랴’는 어떠한가? ‘스보보다’라는 단어는 지금껏 프랑스어 liberté의 번역어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볼랴’의 러시아성에 대해선 이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페도토프, 『러시아와 자유』, 1945)

  반면 19세기에는 ‘볼랴’가 현대 러시아어에서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스보보다’와 유사한 개념을 표현하기도 했다면 현대 러시아 언어-문화에서는 ‘스보보다’가 더 중심적 개념이라는 주장도 있다. 요컨대 다른 문화권의 자유의 토포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스보보다’만의 특성이 있으며 이로써 ‘스보보다’로 표현되는 자유도 독특한 러시아적 특성을 드러낸다는 주장이다. ‘스보보다’는 짓누르는 압박감이나 속박의 부재를 표현하며, 더 나아가 속박의 사슬을 끊음으로 해서 느껴지는 만족감, 행복감을 내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베즈비츠카, 『의미론적 보편성과 언어의 기술』 참조).
  그러나 ‘스보보다’나 ‘볼랴’, 그 어느 하나가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둘의 존재와 상호침투가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를 특징짓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역사 속에서 ‘스보보다’와 ‘볼랴’로 표현되는 자유 개념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왔다. 가령 러시아 역사에서 형태를 달리하며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억압적 정치 사회 형태들, 즉 오랜 시간 지속된 농노제와 차르들의 전제 정치, 그리고 이로 인해 수세기에 걸쳐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부재를 겪은 러시아인들에게 시민의 권리로서의 자유 곧 ‘스보보다’는 종종 ‘볼랴’에 근접해진다. 역사적으로 극심한 자유의 부재, 억압과 속박을 경험한 러시아 민중이 억압적 상황을 극복한 후 만끽하는 자유, ‘스보보다’는 종종 ‘모든 것이 허용됨’의 상태로 변질되며 이로써 러시아 민중의 의식 속에서 그 어떤 제약이나 제한도 모르는 무제한의 자유, 곧 ‘볼랴’에 가까워지는 양상으로 발전하곤 하는 것이다. 사회학자 소로킨은 2월 혁명의 결과 권리와 자유를 만끽한 러시아 민중의 심리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자유 만세! 자유가 있는 이상, 모든 것이 허용된다!” (소로킨, 『인간. 문명. 사회』, 1992)

  특히 소비에트 시기에 자유 개념은 이러한 무제한성이 부각되는 양상 속에서 전반적으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 민중들에게 자유는 일종의 ‘무질서’의 동의어로 간주되었으며, 반사회적이고 위험한 행동을 처벌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되기도 했다(아말릭, 『1984년도 까지 소련이 존속할 것인가?』 참조).
  반대로,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틀과 상관없이 인간의 내적 상태, 내적 가치였던 ‘볼랴’는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데 발휘됨으로써 ‘의지’와 ‘자유’의 의미적 연합 속에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곧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내 의지 하에 둘 수 있는 자유이며 이로써 자유의 권력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볼랴’는 곧 사회적 힘이며 권력이 된다. 이에 반해, 사회적 틀 안에서 인간의 법적 권리인 ‘스보보다’, 즉 사회적 개념이었던 ‘스보보다’는 오히려 외부에서 내부를 지향하면서 인간의 내적 자유, 내면의 자유를 표상화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가 지니는 독특함은 흔히 다른 언어로 번역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볼랴’라는 단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볼랴’와 ‘스보보다’로 대변되는 자유 개념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있다고 하겠다. 러시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스보보다와 볼랴는 끊임없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극명히 대립하기도 하면서 독특한 러시아적 자유의 토포스를 형성해온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자유’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리베르테’의 어원은 라틴어 libertas로, ‘자유로운’을 뜻하는 형용사 liber(프랑스어로 libre)에서 파생되었다. 자유를 뜻하는 러시아어 ‘스보보다’는 어원적으로 свой(‘자신의’)와 관련되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그리고 러시아어에서 자유의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로는 인도유럽어 어근 *el-(‘원하다, 바라다’)에서 온 ‘볼랴’도 있다. ‘스보보다’가 외부로부터의 속박이나 방해의 부재에 초점을 두는 개념이라면, ‘볼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한 주인이 되어 자율적인 본래적 의지를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프랑스어 ‘리베르테’는 ‘볼랴’보다는 ‘스보보다’와 좀 더 유사한 개념으로 보인다. 
  ‘리베르테’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전통에서 내려오는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로서의 자유의 개념을 표상한다. 이러한 자유 개념은 프랑스인들 특유의 합리적, 비판적 정신을 보여주는데, 프랑스에서 합리주의와 자유사상은 기존의 도덕과 종교적 규범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로 나타났으며 그 정점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를 ‘자유의 나라’로 불리게 했고,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으로 행군하던 파리의 민중들이 외치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는 프랑스가 가치로 추구한 자유의 첫 상징이 되었다.
  반면 러시아에서 자유의 토포스는 ‘스보보다’와 ‘볼랴’라는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범주를 지닌 두 단어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차르’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정치사회 형태 속에서 러시아 민중이 이 억압적인 상황을 극복한 후 만끽하는 자유 곧 ‘스보보다’는 종종 그 어떤 제약이나 제한도 모르는 무제한의 자유 ‘볼랴’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자유가 있는 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생각이 러시아 민중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의 자연 환경도 자유 개념에 영향을 미쳐, 드넓은 공간에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유의 개념 안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에서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서의 자유는 끊임없이 쟁취해야 할 투쟁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를 위한 투쟁은 사회정의를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이 혁명을 통해 쟁취한 자유는 점차 그 한계를 드러내고 정치적 자유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이 생겨나면서 19세기 이후로는 자유의 계급성 내지 편파성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대 프랑스 사회나 러시아 사회에서 자유로부터 소외된 개인, 정치적 자유의 한계,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과도한 개인주의의 창궐 등 자유와 관련되어 제기되는 문제들은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자유에 관한 담론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있다. 
연관 토포스 계몽; 공간; 봉기; 의지; 자-타; 지식인; 합리주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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