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장례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장례
토포스명(프랑스) funérailles
토포스명(러시아) похороны
정의 1. 죽음이 의례적일수록 슬픔이 완화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에서 장례 혹은 장례의식을 일컫는 명사로는 가장 일반적인 것이 ‘퓌네라이유 funérailles’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엄정한 어투로 말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리트 퓌네레르 rite funéraire’라고 쓰기도 하는데, ‘의식, 의전’을 일컫는 명사에 부가어를 붙인 것이다. 간략하게 어원을 찾아보자면, 복수 명사는 중세의 교회 라틴어 및 후기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록된다. 
  또한 조금 더 일상적인 용어로는 ‘앙테르망 enterrement’도 널리 사용되는데, 이것은 땅, 흙, 대지 등을 의미하는 명사에 접사들을 붙여 ‘땅에 묻다’라는 의미로 동사화한 enterrer의 명사형이다.
  어감상으로는 ‘퓌네라이유’가 조금 더 격식을 갖춘 공식적인 것이라면 ‘앙테르망’은 조금은 일상적이고 편안한 발화 정황에서 사용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장례, 장례의식을 가리키는 단어 ‘포호로니 похороны[pokhorony]’의 어근 -хорон-은 원시슬라브어 *хоrnа로부터 기원한다. 동일한 어근의 단어들이 슬라브어들에 널리 나타나는데 대체로 ‘보존’, ‘보호’의 의미를 드러낸다(<파스메르 어원사전> 참조). 러시아어의 경우 교회슬라브어 형태인 ‘흐라니티 хранить[khranit']’는 ‘보존하다’의 의미로, 순수 러시아어형태 ‘호로니티 хоронить[khoronit']’는 ‘매장하다’의 의미로 의미 변별이 이루어졌다. 그 어원을 보건대 ‘시체를 보존하다’에서 ‘매장하다’의 의미로 의미 발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중세 이래로 가톨릭적 전통과 의식에 매우 충실해 온 프랑스에서 한 인생이 마감되는 중요한 순간에 교회가 매우 엄숙하고도 신성한 형태로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할 것이다. 
  임종에 가까워진 것으로 판단되는 때에 연락을 받은 사제가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종부성사를 집전한다. 원래는 종부성사는 환자의 회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행해진 것이었으나 후대로 오면서 그 성격이 약간 달라졌다. 12세기 이래로 이 의식은 기도, 기름 붓기, 안수 등의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한편,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지금 막 숨을 거두는 중인 자에게는 종부성사는 집전되지 않는다.
  1963년 교황 요한 23세 시절에 열린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 이래로 종부성사는 ‘환자들의 성사’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리게 되었으며 중병에 걸린 신자가 요청을 할 때 죽음의 준비 또는 환자의 쾌유를 위해 이 성사가 집행될 수 있다고 의결되었다. 
  환자가 숨을 거두면 가족 및 친지들은 교회에 모여 미사를 올리는 것으로 장례 의식은 시작되는데, 그 때 사용될 성가와 기도문은 유족이 선택할 수 있도록 제시되며 종종 유족 중의 한 사람이 추도사를 읽는 형식으로 미사의 집전에 참여하도록 권유받는다.
  장례의 예식과 절차가 사실 시대의 변화에 비해 그 변화 폭이 매우 제한적이긴 하였지만 대혁명 이후 프랑스 당국은 일정한 정도 내에서 반교권적인 성향을 내세우며 가능하면 전통적 장례식으로부터 특히 공동묘지에서 기존의 종교적 색채를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가령, 1887년에 공포된 법률은 고인과 가족에게 매장 혹은 화장 등의 장례 형식이나 묘소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돌려준 것이 그 예이다. 
  사실 장례의 토포스는 죽음의 그것과 매우 가까운 곳에 놓여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토포스의 부차적 외연인 셈인데 굳이 구분을 하자면 죽음이 당사자 본인의 주제라면 장례 혹은 상은 살아남은 타인들의 주제이다.
  프랑스 문화 및 문학은 그것과 관련하여 많은 발현의 사례들을 남기는데 우선,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20세기 초 발표한 작품 『신들은 목마르다』에서 funérailles라는 말을 ‘끝장’, ‘종말’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로베스피에르여, 당신은 여기 잠들어 있구나, 분노와 공포에 취한 범죄자들이 당신의 죽음과 자유의 종말(funérailles)을 명상하고 있는 이 순간에.”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전기소설 『베토벤의 일생』을 쓴 소설가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장례식의 장엄함을 그의 소설 속에서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은 만인의 슬픔의 폭발이었는데, 그 규모와 자발성은 일찍이 독일 지방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문학이 기록한 가장 유명한 장례는 역설적으로 가장 초라한 매장이었다. 바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땅에 묻고 한참동안을 페르라셰즈 묘지를 떠나지 못한 파리의 청년 라스티냑이 참석한 그 장례였다. 
  평생에 걸쳐 알뜰하게 모은 재산을 고스란히 두 딸에게 갖다 붓고 나서 쓸쓸히 죽음을 맞은 고리오를 묻는 순간에 두 딸은 그 자리를 지키기에는 자신들의 실존이 너무나 바빴다. 친구 크리스토프와 단 둘이 남은 라스티냑은 삽을 들고 땅을 파는 인부들의 칭얼대는 팁 요구에 주머니를 뒤졌지만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없이 20 수를 크리스토프에게서 꾸는 순간 그의 심정은 프랑스 문학사상 처음으로 느껴지고 표현된 쓰라린 비참함이었다. 그 분노의 연민은 고리오를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혼자 남은 라스티냑은 공동묘지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이제 막 불을 밝히며 탐욕과 비정으로 스멀거리는 파리를 한 눈에 내려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그리고 소설은 끝난다.

“그래, 이제 너와 나 둘 뿐이야. 어디 한번 해 보자구!”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의 장례의식은 긴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서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정교적 장례의식이지만 정교 전파 이전의 전통을 많은 부분 유지하고 수용한 모습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물론 사회 계층에 따라 장례 절차가 다소 상이하게 나타났지만 적어도 19세기에 그 차이는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정교를 수용하기 전까지 러시아의 전통적 장례 풍습은 주로 화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화장하고 난 시신의 뼈를 옹기에 담아 ‘쿠르간’에 매장한 흔적이 흑해 북쪽의 유적지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다(이덕형, 『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 참조). 이때 내세를 믿었던 민간 신앙에 따라 내세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인의 소장품도 같이 매장하였다. 그러나 정교에서는 죽은 자를 화장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장례문화도 화장에서 매장으로 점차 바뀌게 된다. 
  전통적인 러시아 장례 절차는 임종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군가의 임종이 가까워오면 먼저 가까운 지인들과 친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친지들에게 둘러 싸여 죽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러시아인들은 죽어가는 이가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여 그들 각각에 축복을 해주고 참회를 한 후 죽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겼다. 외딴 곳에서 죽는 것이나 참회할 시간조차 없이 갑자기 죽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여 매일하는 기도문에는 “신이시여, 참회하지 못하고 죽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고향에서 죽을 수 있게 해주소서”라는 말을 꼭 넣었다고 한다.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한다면 그의 영혼은 천국에 갈 것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면 그의 죄가 그만큼 크다고 믿었다. 죽어가는 자의 영혼이 육신을 버리고 떠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옷의 여밈을 풀어주기도 하고 문이나 창문을 모두 열고 지붕 혹은 천장을 일부 떼어내기도 했다. 또한 고인의 머리맡에 물이 든 그릇을 놓았는데 물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영혼이 육체를 떠났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장례의식은 사망 직후에 몸을 물로 씻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세 명의 시신을 씻기면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이며, 40명의 시신을 씻기면 스스로 순결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신을 씻기는 일은 경건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다음 수의를 입혀 머리맡에 촛불을 켜 놓은 탁자위에 시신을 안치한다. 이때 ‘아름다운 구석(이콘이 위치한 곳)’ 쪽으로 머리가 향하고 문 쪽으로 다리가 오도록 했으며 그 다음 사제들이 기도문을 읽기 시작한다. 장례의식을 시작하는 이러한 절차는 푸시킨의 『벨킨이야기: 장의사』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고인은 밀랍처럼 노란 얼굴로 탁자 위에 누워 있는데 시신은 아직 사후 부패의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친척들과 이웃들과 하인들이 붐비고 있었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졌고 촛불이 타고 있었으며 사제들이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푸시킨, 『벨킨이야기: 장의사』, 1830)

  다음 날 시체를 관에 넣는 입관 절차가 진행된다. 입관은 사제가 주관하는데 입관 직전에 향을 피워 관 속을 정화하고 고인의 넋을 기리는 기도(리티야)를 하고 성수를 뿌린 후 입관이 이루어진다. 출관은 보통 그 다음 날 이루어지며 출관할 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농가 안을 가득 메운 채 큰 소리로 우는 전통이 19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배웅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는 소리가 클수록 더욱 명예로운 장례식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출관한 관은 교회로 이송되어 교회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사후 3일째 되는 날 아침 교회에서 정교의 ‘장례예배(отпевание)’가 거행된다. 장례절차 중 가장 성대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의식으로서 고인이 세상과 마지막으로 이별하는 의식이다. 흔히 러시아 문학 작품 속에서 장례식이라고 하면 이 의식을 가리킨다.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 속 백작 부인의 장례식에 대한 언급도 이 의식에 대한 것이다.

“저 운명의 밤으로부터 사흘 뒤 게르만은 아침 아홉 시에 *** 수도원으로 출발했다. 그곳에서 죽은 백작 부인의 장례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푸시킨, 『스페이드의 여왕』, 1834)

  단테스와의 운명적 결투로 치명상을 입은 푸시킨은 이틀 후인 1837년 1월 29일에 숨을 거두게 되며 장례식은 정교전통에 따라 사후 3일째 되는 날(1837년 2월 1일) 교회에서 치러졌다. 민중의 소요를 두려워 한 니콜라이 1세의 지시에 따라 교회에서의 장례식은 일반인들의 참여가 엄격히 금지된 채 거행되었다.

“(푸시킨이 죽은) 다음 날 우리, 친구들은 우리 손으로 그를 관에 눕혔습니다. 그 다음 날 저녁 때 관을 교회로 옮겼지요. 이틀 간 푸시킨이 누워있었던 곳은 민중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은 2월 1일에 거행되었습니다. 수많은 지인들과 외국 인사들이 교회를 메웠지요.” (주콥스키, , 1837. 2. 15)

  장례예배 후 바로 관을 봉합하고 매장을 위해 묘지로 운구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관을 옮길 때 러시아에서는 예전부터 썰매가 이용되었다. 장례식에 썰매가 이용된 기록은 1015년 경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의 장례식을 기술하는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17세기까지 대공이나 황제 가족의 장례식 때 썰매를 사용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특히 농촌 사회에서는 이 풍습이 오래도록 보존되어 19세기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농민의 이 장례 풍습은 러시아 화가 페로프의 붓끝을 통해 슬프고도 아름답게 형상화된 바 있다. 가장의 관을 썰매로 운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페로프의 <장례식>은 가장을 잃고 남겨진 가족의 슬픔을 잘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시신을 매장한 후에는 추모 식탁이 차려진다. 이 전통은 슬라브 장례의식에서 이어져 온 것으로 여기에 정교적 관습이 접목되어 9일째와 40일째 되는 날에도 추모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정교적 관점에 따르면 영혼은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육체와 헤어져 천상으로 인도되고 그곳에 6일간 머무른 후 9일째 되는 날부터 40일째 되는 날까지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에 따라 3일째(매장하는 날), 9일째, 40일째 되는 날에도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의 장례문화 중 ‘곡(哭)’과 유사한 ‘프리치타니예(причитание)’를 부른다. ‘프리치타니예’는 고인을 애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곡을 하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이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가령 곡하는 자가 과부인 경우 남편의 가족들이 얼마나 자신을 박대하는지 하소연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낸 딸이 계모의 악행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곡의 전통은 수세기에 걸쳐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가령 표트르 대제는 황제 가족들의 장례식에서 곡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하기도 하였다) 오늘날까지 농민 계층에서 보존되고 있는 관습이다.
  오늘날 화장 문화가 점차 퍼져나가고 있고 장례 절차도 더욱 간소화되는 추세이지만 지금도 장례 이후 추모식 식사를 마련하는 관습이나 9일째와 40일째 되는 날, 그리고 매년 기일에 추모식을 올리는 관습을 보존하는 가정이 많다. 또한 연중 정해진 시기 특히 부활절과 성령 강림절에 가족이 묘지를 찾아 음식을 차려 놓고 추모식을 올리는 관습도 보존되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장례는 사실 부차적인 토포스이다. 상(喪)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2세를 억울하게 보낸 경우가 아닌 모든 장례는 하나의 통과의례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례, 혹은 상의 토포스는 산자들의 토포스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이나 미안함의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로하는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장례는 뜻을 가질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아니, 곧 죽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을 당한 자가 이승을 향해 바랄 수 있는 마지막 기원은 애도일 뿐이다. 
  장례의 토포스는 죽음의 토포스의 한 변용(變容)이니만큼, 프랑스나 러시아에서나 사람들이 피해가고 싶은 토포스일 것이다. 묘비에 뭐라고 새기느냐, 무슨 꽃을 드리우느냐는 부차적이다. 특정한 종교 시스템에 속해 있거나, 어떤 신을 믿거나하는 것은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연관 토포스 슬픔; 신앙;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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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자료(프랑스) 로맹 롤랑, 『베토벤의 생애』, 이휘영 역, 문예출판사.
추천자료(러시아) 푸시킨, 『스페이드의 여왕』, 김희숙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7.
______, 『벨킨 이야기』, 석영중 옮김, 열린책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