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정원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정원
토포스명(프랑스) jardin
토포스명(러시아) сад
정의 1. 정원은 인위적인 자연이다.
2. 실용성과 미학이 조화를 이룰수록 정원의 가치가 높아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정원(庭園)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단어들 중 대표적인 것은 ‘자르댕 jardin’이다. ‘자르댕’의 가장 오래된 문헌학적 흔적은 12세기에 발견되는데, 후기 라틴어 ‘gardinium(가르디니움 : 울타리 쳐진 정원)’이 그것이다. 더 거슬러 오르면 이는 고대 프랑크어, 즉 서방게르만어의 ‘가르트 gart’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기록된다.
  고대 프랑스어의 가르동(gardon)은 당시의 독일어 가르텐(Garten), 네덜란드어 가르트(gaard) 그리고 영어의 야드(yard)와 연결된다. 물론, 이와 함께 가든(garden)도 함께 파생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의 심성 속에 자리 잡은 가장 오래된 시원의 정원은 그들의 신화적 조상이 거닐었던 ‘에덴정원’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주인이었던 그 정원, 그리고 그곳에 있던 한 나무의 열매에 얽힌 어떤 사건으로써 세상과 모든 인간사가 시작한 그 정원과 관련하여 프랑스어 성서는 다음의 기록을 남긴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성서, 창세기 2장 8절)

  그러니까 인간은 애초에 집이나 들판 혹은 논과 밭이 아니라 정원에 살았다. 그곳에서의 그 사건이 있은 후 인간은 살기 위해 노동하고 거래하였으며 또 사랑과 욕망, 환멸과 좌절의 생로병사를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이제 정원은,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어쩌다 여유 있을 때 들르는 곳이 되었다. 되돌아와 찾은 그곳에서 그들은 일상의 피곤한 연속을 잠시 내려놓고 간만의 평화와 휴식을 맛보면서 거닐 수 있었다. 
  이러한 필요 때문이어서인지 정원 혹은 공원은 그들의 거주 환경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2008년 현재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는 연면적 207헥트아르 위에 16개의 공원들, 그리고 203헥트아르의 총면적 위에 무려 137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정원(parc)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것들을 일일이 거명하는 것은 자체로 큰 의미가 없겠지만,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그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것들만 언급하자면, 룩셈부르크 공원, 샹젤리제와 콩코르드광장을 잇는 튈르리 공원, 몽소 공원 등이 있을 것이다.
  ‘정원’ 혹은 ‘공원’에 해당하는 ‘자르댕’과 ‘파르크’의 의미외연을 조금만 더 확장하면, 흔히들 ‘불로뉴 숲’ 혹은 ‘뱅센느 숲’으로 칭하는 ‘숲’ ‘bois’ 역시 ‘매우 큰 정원’으로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 더 작은 것들로는 파리 시내에만 274개가 있는 소공원(square)들 역시 정원의 하위개념일 것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정원을 뜻하는 ‘사드 сад[sad]’의 어원은 공통슬라브어 sedti(‘심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어에는 정원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단어 ‘오고로드 огород[ogorod]’도 있다. ‘울타리를 치다(городить)’라는 의미의 동사로부터 나온 ‘오고로드’는 애초에 ‘울타리 쳐진 장소’를 가리켰으며 오랜 시기에 걸쳐 ‘사드’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현대러시아어에서는 주로 채소를 재배하는 텃밭 형태의 정원을 ‘오고로드’라 부른다.
  정원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단어 ‘파르크 парк[park]’는 영어로부터 차용되었다. 이 단어가 러시아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식의 풍경 정원이 러시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18세기 무렵이다. 당시에 ‘파르크’는 풍경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후에 ‘휴식을 위한 넓은 공간, 조각상들로 장식되고 녹음이 우거진 공간’, 곧 ‘공원’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고대의 러시아인들은 땅에서 자라나는 것들에 대해 특별한 태도를 취하였다. 나무를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하고 나무나 숲에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원시 시대 자연은 야생 그 자체로서 늘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는 집근처의 자연은 익숙하고 친숙한 곳으로 생각되었고 이곳에서 자라나는 것들을 울타리나 장벽을 쳐 야생 자연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다. 울타리 쳐진 이곳에 사람들은 차츰 좋아하는 것 혹은 필요한 것들을 심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정원이 탄생하게 된다. 
  고대 러시아에서 정원은 주로 실용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정원이라 함은 과실수나 채소를 재배하는 텃밭 같은 곳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함께 고대 러시아인의 세계관에서 정원은 우주만물의 지고한 가치를 지니는 것 중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정원의 형상은 고대 러시아의 미학적, 영적 가치체계에서 늘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리하초프, 『정원의 시학』, 1982). 정원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인류가 추구해 온 정원의 이상 곧 ‘에덴’의 이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태초의 정원 ‘에덴’은 인류가 끊임없이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온 정원의 이상이다. 이는 중세 서유럽과 러시아의 수도원 정원이 추구했던 이상향이기도 했다. 
  바로 이들 수도원 정원을 통해 텃밭의 의미를 벗어나 실용성과 미학성의 조화를 지향하는 정원들이 등장하게 된다. ‘천국’이라 불리기도 했던 수도원 정원들은 지상낙원으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수도사들은 과실수뿐만 아니라 미적 목적에 부합하는 식물들도 심었으며 또한 ‘천국’의 이미지에 걸맞게 포도나무를 심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고대 시기의 러시아 정원들은 실용적인 목적의 정원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도원 정원을 통해 시작된 미학성의 추구는 17세기를 즈음으로 하여 정원의 역할에서 중심적인 것이 되어간다. 정원을 차지했던 과실수들이 향기로운 식물이나 라일락, 장미, 튤립과 같은 장식용 식물들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원들에서는 미적 감상을 위한 망루나 정자와 같은 장치들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이렇게 실용성보다 미학적 측면을 우위에 둔 러시아 정원의 전통은 황실과의 깊은 연관성 속에서 확립되어 나간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크게 보면 시민들을 위한 녹지공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 정원에는 그러나 그것을 정원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두어 가지 요건이 내재해 있다. 우선 가장 물리적이고 일차적인 요건으로 ‘식물’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즉 정원이기 위해서는 그곳에 반드시 나무와 꽃이 있어야 한다. 분수나 벤치 또는 오솔길은 없을 수 있으나 심어진 나무들이 없으면 정원이 아니다. 인간이 그곳에서 평화와 안온한 감정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 공간의 다름 아닌 ‘식물성’이 주는 선물일 것이다.
  정원을 정원이게끔 하는 또 하나의 요건은 바로 관리와 정비의 개념이다. 그리고 정원이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오산이다. 태초에 신이 에덴에 ‘꾸미’셨듯이 모든 정원은 기획되고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점과 관련하여 서유럽 내에서 두 가지 상이한 접근이 존재한다. 즉, 아름다운 식물들이 있는 이 쾌적한 휴식과 산책의 공간을 조성하고 정비하는 방식들 중에는 인간의 손길이 작용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하는 방식과, 그러한 인위성의 흔적을 가능하면 지워서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를 프랑스식 정원, 후자를 영국식 정원이라고 나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였겠지만 17세기에 이미 그 차이는 뚜렷해진다. 프랑스식 정원의 대표적인 실례는 오늘날 관광 명소로 남아있는 베르사유의 정원들이다.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그 정원은 널리 알려진 바, 태양왕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조성되고 기획된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왕이 고용한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의 작품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뚜렷한 기하학적 대칭의 미, 완벽한 구도아래 구현된 질서와 균형, 아무리 작은 풀이나 나무 하나라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인상을 허락하지 않는 촘촘한 가위질의 전지(剪枝)작업이 두드러진다.
  프랑스식 정원 양식은 조금 시야를 넓혀 생각하면, 태양왕의 절대 권력 하에 드디어 완성되어가는 유럽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 시스템, 거기에서 뿜어 나오는 권위와 자신감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는, 질서와 통일 그리고 균형의 아름다움을 핵심적 요소로 구축된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 미학과도 그 양식은 잘 어울린다. 

  이에 반해 영국식 정원의 제 1 모토는 ‘자연 그대로’이다. 정원을 조성하는 최소한의 인간의 손길마저 감추고, 그곳에 들어선 이들로 하여금 그저 뜻밖으로 아늑하고 쾌적한 들판이나 숲을 만난 정도의 인상을 주려는 것이 그 취지일 것이다. 그래서 영국식 정원은 그곳을 들어선 자들에게, 무정형한 나무와 숲, 그리고 구불구불하다가 의외의 곳으로 뻗어간 오솔길, 그곳을 따라가다가 마주치는 야생 그대로인듯한 공간 등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쨌든 프랑스식 정원의 관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정원을 꾸미도록 이끌었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의 제 1 취미활동으로 통계되고 있는 브리콜라쥬(bricolage 집단장) 바로 곁에 자르디나쥬(jardinage 정원가꾸기)가 있을 것임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프랑스에서 문화적 또는 언어적 발현으로서의 정원의 토포스는 일찌감치 16세기의 두 거장 라블레와 몽테뉴에게서 찾을 수 있다. 『팡타그뤼엘』의 제 9장에는 “나는 프랑스라는 정원에서 태어났답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서유럽 대륙에서 지리학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땅 프랑스를 은유하는 정원일 것이다. 
  『수상록』에서 몽테뉴가 언급한 정원이 속한 문맥은 꽤나 깊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내가 (정원에) 배추를 심고 있는 중에 죽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찾아온 죽음을 본듯 만듯 할 것이며 또 (채 마무리하지 못한) 미완의 정원에도 미련을 두지 않으리라.”

  이 말의 정확한 내포를 언급하는 것은 또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하겠으나, 흥미로운 것은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인문학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이 ‘미완의 정원(jardin imparfait)’라는 표현을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토도로프는 이 책에서 몽테뉴로부터 시작하여 루소를 거쳐 콩스탕에 이르는 프랑스 사상가들을 검토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그 반대편에 있는 책임 혹은 공동체의 가치라는 대척하는 두 근대적 개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의 시문학 역시 정원의 토포스를 놓치지 않을진대, 대표적으로 폴 베를렌은 그의 첫 시집 『우울한(사투르누스풍) 시편들』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겨 정원의 포근한 감미로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흔들리는 작은 문을 밀치고 나와
나는 거닐었네
촉촉한 반짝임으로 꽃잎들을 물들이는 오전의 태양이
부드럽게 내리 비추는 작은 정원을.”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정원 토포스의 가장 뚜렷한 발현은 다른 모든 것들에 앞서 볼테르의 저 유명한 ‘우리네 정원(텃밭)’이 아닐 수 없다. 볼테르는 자신의 철학적 소설 『캉디드-낙관주의』를 “우리네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일갈로 마감한다. 매우 소박한 듯 보이는 이 결론은 그러나 꽤 오래된 맥락에서 나온다. 어떤 의미에서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모든 투쟁과 성취를 요약하고 있는 이 말은 우선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의 초입에 이르도록 서구인들의 심성 위에 드리워진 저 형이상학적 구름을 혹은 신학적 아우라를 걷어내려는 의도를 갖는다. 내세에는 저 잃어버린 꿈의 정원 에덴에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신앙을 이제 그만 내려놓고, 또 그를 위한 기도와 묵상을 실재를 증명할 길 없는 신에게 바치는 대신, 바로 우리 눈앞에 놓인 이 땅의 우리들의 삶의 터전과 조건들을 일구고 가꾸자는 선언이다. 
  이렇듯 충분히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이며 인간적이고도 매우 공동체적인 프랑스의 정원에서 무슨 살인 사건 같은 것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피터 그리너웨이의 1982년 작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원제 : The draughter's contract’).
  그리고 물론 프랑스인들도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을 마련하여 내밀한 영역을 간직하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비밀의 정원(영국작가 프랑시스 허드슨 버넷이 1909년에 쓴 소설, 후에 뮤지컬과 영화로 각색됨)’의 토포스는 오히려 영국적 감성에서 더 발현된다. 프랑스의 정원은 이보다는 분명 더 일상적이고 온화한 공간인 듯하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민중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속담 중에는 정원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정원수가 훌륭해야 정원도 그러하다’, ‘정원은 울타리로 아름답고 포도밭은 포도로 아름답다’, ‘정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안의 사과도 결정 된다.’ 특히 마지막 속담은 러시아 민중들이 정원을 실용적 성격의 것으로 인식했음을 드러내 주기도 하다.
  고대 시기 러시아 민중들에게 있어 정원은 ‘오고로드’ 곧 채소를 재배하는 텃밭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면, 미학적 측면이 강조되는 정원의 발달은 중세의 수도원 정원과, 그 이후의 군주와 황제의 정원이 주도하게 된다. 13세기에 쓰여진 <러시아 땅의 패망에 대한 이야기>에는 러시아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목록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이루는 것이 수도원 정원이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러시아 땅이여! 너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구나. 수많은 호수와 깊은 강, 험준한 산과 높은 언덕, 수많은 참나무들과 아름다운 들판, 다양한 들짐승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새들, 큰 도시들과 훌륭한 마을, 수도원의 정원과 사원들, 무서운 공후, 명예로운 귀족과 수많은 고관대작들, 너는 이 모든 것으로 충만하구나.”

  러시아 정원 역사에서 수도원 정원들이 담당했던 특별한 의미와 역할은 16세기까지 이어진다. 러시아의 수도원 정원들은 중세 서구의 수도원 정원들과 마찬가지로 천국의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구의 수도원 정원들에는 성모의 상징인 장미가 반드시 있었지만 러시아 수도원 정원들에는 거의 16세기까지 장미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과 러시아에서 성모를 상징하는 꽃은 백합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서구의 수도원 정원들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행과 인간의 복잡한 삶을 상징하는 미로가 널리 나타나는 것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17세기까지 미로를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수도원 바로 앞에 조성되었던 러시아 수도원 정원들은 14세기부터는 차츰 수도원 안을 벗어나 숲, 강변, 호숫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수도원 정원의 장소로 자연이 선호되었던 이유는 고대 러시아에 널러 퍼져있던 세계 인식, 곧 신이 최초로 만든 자연, 인간의 손이 아직 닿지 않은 자연만이 죄로 물들지 않았으며 신의 지고한 섭리와 질서로 충만한 장소라는 인식과 잘 부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러시아 정원 역사에서 중심적 역할은 수도원 정원에서 군주와 황제들의 정원으로 이동해간다. 국립역사박물관의 필사본 홀에 전시되어있는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근교의 궁중 정원 목록>(1705)은 모스크바 군주들이 정원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당시 군주들의 정원의 수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17세기 러시아 정원의 대다수는 당시 유럽의 지배적인 건축 양식인 바로크 양식에 기반한 것으로, 기하학적 정원의 특성뿐만 아니라 바로크적 특성, 곧 농담과 알레고리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모스크바 크렘린궁 안의 정원들과 이즈마일롭스키 공원의 정원들은 모두 이러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옆에 모스크바 강이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인공 연못, 그것도 모스크바 강의 수위보다 높게 만들어진 연못과 그 위에 띄워진 소형 배들처럼 정원 안에 인위적이고 오락적인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크 정원들에 요구되었던 ‘비현실성’, ‘인위성’의 느낌과 잘 부합하기 때문이었다(리하초프, 『정원의 시학』 참조).
  17세기 러시아 정원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공중정원’이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17세기에 만들어진 크렘린의 공중정원도 그 중 하나이다. 궁전의 위층 테라스에 만들어진 공중정원은 나팔꽃 모양의 창이 있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원 주변에 모스크바 강에서 물을 끌어다 연못에 물을 대는 물탑이 있고 연못과 정원 곳곳에 분수가 배치되어 있다. 이 공중정원의 연못 위에서 어린 표트르가 배를 타고 놀곤 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1689~1725)는 강력한 절대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정원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모스크바의 정원들 속에서 자라난 표트르 대제는 다른 절대군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정원의 의의와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당시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것으로서 정원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정원은 왕이 자연까지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기호로 생각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만들면서 정원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도 이러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의 유명한 정원들 중 많은 것들이 표트르 대제 때 만들어졌다. 페테르부르크 관광 코스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페테르고프 궁전의 정원과 여름 정원이 모두 표트르 대제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흔히 페테르고프 궁전과 정원은 베르사유를 본떠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주가 사회, 정치, 예술 전반에 절대 권력을 행사했던 17세기 프랑스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베르사유 정원은 그 거대한 규모와 그 안에 조화롭게 배치된 식물들, 조각상과 분수가 내뿜는 웅장한 통일감으로 군주의 위엄과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전에 유럽의 도시들을 탐방했던 표트르 대제는 베르사유 정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표트르 대제가 직접 쓴 아래의 서한에서 드러나듯, 실제로 표트르 대제는 베르사유의 정원과 분수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편지를 받는 대로 즉시 책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프랑스 왕의 베르사유에 있는 분수 관련 서적과 정원 관련 서적을 찾는 대로 우편으로 스몰렌스크로 보내시오. 프스코프에서 1706년 6월 13일 Piter.” (『표트르 대제의 서한과 문서들』, 1900)

  실제로 페테르고프는 ‘발트해의 베르사유’라는 별명만큼이나 베르사유를 닮아있다. 베르사유처럼 운하가 궁전 건물과 발트 해를 연결하고 있는가 하면 베르사유 정원처럼 화려한 분수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서유럽의 수도 파리를, 그리고 유럽 문화의 상징 베르사유를 러시아의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옮겨 오고 싶었던 표트르 대제는, 이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화려하게, 그리고 자신의 미적 취향까지 충분히 가미하여 그 뜻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까닭에 페테르고프 정원이 베르사유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으며 결코 베르사유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시각이 제기되기도 한다. 가령 <예술 세계>의 편집자이자 화가인 베누아는 그 자신이 어린시절을 보낸 페테르고프를 ‘발트해의 베르사유’라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페테르고프는 베르사유와 자주 비견된다. ‘러시아의 베르사유 페테르고프’라는 말이나 ‘표트르 대제는 베르사유와 비슷한 것을 만들고 싶어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 하지만 페테르고프는 베르사유와 결코 비슷하지 않다. 페테르고프의 중요한 예술적 장식인 분수들은 정원의 기교에 대한 전유럽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을 뿐, 그 배치나 성격에 있어 베르사유의 것들과 유사하지 않다. 오히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영향이 더 느껴지며 이러한 영향도 표트르의 개인적 취향과, 페테르고프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이후의 러시아 황제들의 취향에 따라 상당히 변형된 채로 반영된 것이다.” (베누아, 『나의 추억』, 1980)

  표트르 대제에게 있어 정원은 단순히 미적 대상이자 오락과 휴식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교육과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까지 가지는 것이었다. 정원은 러시아인들에게 유럽의 상징체계를 교육하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며 정원의 교육적 장치를 통해 러시아인들이 서구 유럽인들과 공통의 문화적 토대와 상호 교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1704년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인 여름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하면서 표트르 대제는 정원 안에 배치할 조각상에 대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두뱌고, 『여름 정원』 참조). 그리스 신화의 조각상들, 베르사유의 미로를 본떠 만든 미로들, 그리고 미로들 곳곳에 배치된 이솝우화를 주제로 하는 조각상들에는 정원예술의 역할에 대한 표트르 대제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정원은 유럽의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코드를 접촉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이곳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스스로 이솝우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즐기곤 했다”(슈빈스키, 『과거의 삶과 일상생활에 대한 소고』)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일종의 교육의 장으로서 정원의 기능은 ‘리체이의 정원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리체이는 19세기 차르스코예 셀로(지금의 ‘푸시킨 시’)에 있었던 귀족학교로서 푸시킨이 교육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리체이의 정원’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리체이에 소속된 정원 정도로 이해되지만 리체이 자체를 대신하는 환유적 표현이기도 하다. 정원이 교육기관으로 기능했던 것은 멀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정원에서 제자들과 산책하며 철학적 담론을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복잡한 인간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독서하고 사색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곳으로서 정원의 역할은 중세의 수도원을 거쳐 리체이의 정원들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리체이의 정원’이 위치한 차르스코예 셀로는 18~19세기 러시아 정원예술의 백미로 손꼽힌다. 애초에 황제의 교외 거처로 마련된 이곳은 예카테리나 궁전과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예카테리나 1세(1725~1727)가 조성하기 시작한 이곳의 정원들은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러시아에서 기하학적 정원에서 풍경식 정원으로의 이행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예카테리나의 정원들 중 기하학적 정원은 러시아에서 이 정원 양식이 유행하던 18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들로, 주로 궁전과 접하는 곳에 남아있다. 궁전에서 다소 떨어진 위치에는 18세기 말 무렵부터 인기를 끌게 되는 풍경식 정원이 나타난다.

‘회화를 통한 자연의 재발견’이라고도 불리는 풍경식 정원은 철학과 회화에 대한 관심이 충만해있던 18세기 영국에서 탄생했다. 17세기 중반 클로드 로랭이나 푸생의 풍경화가 흔히 풍경 정원의 근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하학적 정원에서 풍경식 정원으로의 이행이 그리 급격히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예카테리나 정원들에서 알 수 있듯, 18세기 말~19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집과 접하는 공간은 여전히 기하학적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풍경식 정원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선호되었다. 주로 산책을 위한 장소였던 풍경식 정원에는 길게 늘여진 산책로가 필수적으로 마련되었다. 또한 양이나 사슴이 방목되어 목가적 분위기를 띠도록 조성되는 등 풍경화의 요소들이 풍경 정원의 미학적 요소가 되었다.
  풍경식 정원 양식이 잘 드러나는 러시아 정원으로 파블롭스키 공원의 것들을 들 수 있다. 예카테리나 2세가 아들 파벨에게 준 차르스코예 셀로 근처의 땅에 파벨의 아내였던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주도하에 정원이 조성된 것이 오늘날의 파블롭스키 공원의 시초이다. 파블롭스키 공원은 도스토옙스키의 『백치』(1868)에서 미시킨 공작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라고도 할 만한 아글라야와의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은 정원에서 새로워지고 정원에 의해 올바르게 된다. 이것은 공식이다”(『작가의 일기』, 1876)라고 말하는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러한 정원의 대표적 예가 바로 파블롭스키의 정원이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들, 특히 그 안에서 인류의 원초적 이상향을 본 <아시스와 갈라테아>(1657)에 강력히 매료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이상향은 로랭의 풍경화 속 장소, 그리고 이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파블롭스키 정원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스타브로긴(『악령』)의 고백을 통해 <아시스와 갈라테아>를 보았을 때의 감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드레스덴의 미술관에는 클로드 로랭의 <아시스와 갈라테아>라는 그림이 있다.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항상 ‘황금시대’라 부른다. [...] 이 그림 꿈을 꾸었는데 그림이 아니라 현실 같았다. [...] 애무하는 듯한 푸른 파도, 섬들과 바위들, 꽃이 만발한 해변가, 저 멀리 놀라운 파노라마가 펼치지는 곳, 손짓하여 부르는 듯한 낙조,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 이곳에 지상의 낙원이 존재했으며 신들이 천상에서 내려와 인간과 교류하고 이곳에서 신화의 최초 정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악령』, 1872)

  러시아 정원예술이 정점에 달하던 18세기 말~19세기 초에는 저택과 저택에 딸린 정원이 소유주의 부와 명성의 척도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원은 주인의 훌륭한 취향을 드러내주는 것이었던 까닭에 주인은 정원에 쏟아 붓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이 시기 정원의 가격은 궁전의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정원은 귀족계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사이에서도 휴식과 오락을 위한 장소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다양한 볼거리와 오락거리까지 갖춘 정원은 쉼을 얻고 산책과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더욱 각광받았다. 
  정원을 가꾸고 그 안에서 사색을 즐기고 창작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러시아 작가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은 정경이다. 고골은 정원을 직접 가꾸고 정원을 어떻게 꾸밀지에 대한 구상을 수첩에 스케치해 두곤 하였고, 시인 데르자빈 역시 정원 전문가라 불릴 만큼 정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의 시구는 당시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었던 시인의 일상을 잘 보여준다. 

“오늘 우리 향기로운 공기를 쐬러 정원에 가자, 친구여! 
하얀 느릅나무와 검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서있는 곳,
소중한 친구들, 마음의 친구들과 
우리 스스로 심고 가꾼 그곳으로.” (데르자빈, <친구에게>, 1795)

  투르게네프가 플로베르에게 보내는 다음의 편지는 러시아 정원의 목가적 풍경을 잘 보여준다.

“우리 함께 러시아를 여행하면 꽤 유익할 것이오. 오래된 시골 정원의 가로수길을 산책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니오. 시골의 정원은 농촌의 향기로 충만하고 산딸기와 새들의 노랫소리, 나른한 햇빛과 그늘이 가득 차 있소. 주변에는 수백 헥타르의 호밀밭이 살랑거린다오. 정말 멋지지 않소!” (투르게네프, <플로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1872)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은 톨스토이에게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곳으로서 정원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1881년 자연속의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모스크바로 이주한 이후의 시기는 톨스토이에게 더 없이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한 달을 보냈다”라고 말할 정도로 도시 생활을 힘들어한 톨스토이는 도시 근교 하모브니키에 ‘우사디바’를 구입하기로 마음먹는다. 이 독특한 러시아 단어 ‘우사디바 усадьба[usad'ba]’는 조어적 형태에 따르면 정원 옆의 집, 곧 정원이 딸린 저택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정원과 저택이 있는 영지를 의미한다. 1882년 4월의 어느 저녁에 이 저택을 보러 온 톨스토이에게 집주인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보일 거라 말하는데 이에 톨스토이는 “집은 볼 필요 없소. 나는 정원만 보면 되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저택을 구입한 이유가 정원 옆의 집이 아니라 정원 자체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저택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1921년에 11월에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 하모브니키>로 개관하였다. 

 

  20세기의 러시아 여류시인 아흐마토바의 시에는 유난히 정원이 많이 등장한다. 아흐마토바의 시에서 정원은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은 곳, 연인과 함께 있고 싶은 곳, 진정한 행복과 사랑이 있는 곳으로 등장하곤 한다.

“나는 장미꽃들에게로, 그 정원으로 달려가고 싶다. 
[...] 그곳에선 나의 백야가 누군가의 숭고하고도 비밀스러운 사랑을 속삭여준다.
모든 것이 조가비처럼, 옥처럼 빛나지만
그 빛의 근원은 비밀스레 감춰져 있다.” (아흐마토바, 『여름 정원』, 1959)

“축복받은 이 기적의 순간에,
여름 정원 위로 장밋빛 달이 떠오른 이 순간에
우리가 나란히 서있기에,
이제 창가에서의 지겨운 기다림도
고통스러운 만남도 나에겐 필요치 않다. 
사랑은 완전히 충족되었으니까.” (아흐마토바, 『페테르부르크에 관한 시』, 1913)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도 정원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수백 년 전 황제의 거처로 마련된 오래된 정원들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은 숨 가쁜 일상을 잠시 벗어나 쉼과 사색의 시간을 즐긴다. 또한 실용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러시아 정원의 특성은 현대 러시아의 별장 문화에서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별장은 단순히 자연을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 건물 개념으로 머물지 않고 정원이 딸려 있고 그 안에서 채소나 과실수를 재배하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러시아 정원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정원 양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기하학적 정원이나 풍경식 정원 어느 하나가 아니라 혼합된 양식이 주종을 이루어왔다. 특히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과실수를 중요시한다는 점은 러시아 정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반드시 실용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러시아에서 과실수는 전 역사를 걸쳐 정원의 미학적 요소 중 하나로 간주되었으며 열매는 꽃만큼이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정원 예술은 서유럽의 정원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일지라도 러시아 땅에 펼쳐진 것으로서 러시아 풍경과의 조화로운 결합 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러시아어로 정원을 뜻하는 ‘사드’는 ‘심다’를 의미하는 공통슬라브어로부터 기원하며 또 다른 단어 ‘오고로드’는 어원적으로 ‘울타리 쳐진 장소’란 의미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원을 뜻하는 프랑스어 ‘자르댕’ 역시 ‘오고로드’와 마찬가지로 ‘울타리 쳐진 정원’을 뜻하는 후기 라틴어 ‘가르디니움’으로부터 기원한다. 이처럼 프랑스어나 러시아어에서 정원을 뜻하는 단어들의 어원적 의미가 ‘울타리 쳐진 곳’이란 의미인 것은 정원의 최초의 형태 및 기능과 관련된다. 두려움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야생 자연과 달리 인간의 손이 닿는 집근처 자연은 익숙하고 친숙한 곳으로 생각되었으며 이곳에 울타리를 쳐서 야생 자연으로부터 분리하고 좋아하거나 필요한 것들을 심게 되면서 정원도 시작된 것이다. 
  세계 정원의 역사에서 인위적이고 기하학적 형태의 정원은 프랑스 정원을 통해 활발히 전파되고 보급되었다. 러시아에서도 프랑스식 정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17세기까지는 이러한 기하학적 정원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원이 자연의 일부 혹은 풍경화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풍경식 정원이 영국에서 태동한 이래로 풍경 정원의 파급력은 프랑스보다는 러시아에 더 강하게 미쳤다. 이후 러시아 정원들은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이 혼합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프랑스 정원이 러시아 정원에 영향을 미친 것은 그 형태적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원이 가지는 정치 사회적 함의 또한 프랑스의 사례를 통해 러시아로 적극 수용되었다. 절대 왕정 시대 유럽에서는 정원이 절대군주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기호로 작용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조성되고 기획된 베르사유 정원이 있었다.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유럽식 도시로 만들고자 고심했던 표트르 대제도 정원이 가지는 정치 사회적 역할에 주목하였으며 유럽 문화의 상징인 베르사유를 모방하면서도 그보다 더욱 화려하게 러시아식 베르사유 정원 페테르고프 정원을 조성하였다.
프랑스 정원과 러시아 정원의 큰 차이점도 발견된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들의 제 1 취미활동이라 할 수 있는 집단장의 일환으로서 정원의 장식적 기능이 부각된다고 한다면 러시아에서 정원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실용성의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 러시아인들에게 정원은 단순히 집을 아름답게 하는 수단으로 머물지 않고 채소와 과일을 가꾸는 실용적인 공간으로서의 의의도 크다.
  이처럼 정원의 형태와 정원의 주요 기능에 대한 생각은 다소 상이할지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프랑스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바쁜 일상에서 탈피하여 휴식과 평온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서의 정원의 의미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연관 토포스 별장; 산책; 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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