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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죽음
토포스명(프랑스) mort
토포스명(러시아) смерть
정의 1. 삶에의 본능이 질길수록 죽음의 공포는 끈덕지다.
2.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한 생물학적 유기체의 생명 현상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죽음’을 뜻하는 프랑스어 명사들 중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모르 mort’이다. 인간의 삶에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는 이 원초적이고도 거대한 토포스는 때로 프랑스어의 다른 명사에 담기기도 하는데, ‘데세(décès)’ 또는 ‘트레빠(trépas)’ 혹은 ‘트레빠쓰망(trépassement)’ 등이 그것들이다. 앞의 하나가 행정과 법률의 용어라면 뒤의 둘은 시문학에 주로 등장하는 문어라는 차이는 있다. 그 외에도 ‘크레브(crève : 식어버림)’, ‘팽(fin : 끝, 종말)’ 등 많은 어휘들이 죽음을 지시하는 데에 동원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의미하기 위해 두 세 단어가 기꺼이 조합되기도 한다. 가령 ‘nuit éternelle (영원한 밤)’, ‘nuit du tombeau (무덤의 밤)’, ‘grand saut (커다란 점프)’, ‘sommeil éternel (끝없는 잠)’, ‘dernier sommeil (최종의 수면)’ 등의 표현들이 있으며, 심지어 ‘chandelle bénite (성스러운 촛불)’같은 말도 죽음에 대한 에두른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은 결국 이 토포스의 규모와 그것이 점하는 차원들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모든 표현들 중의 대표주자인 ‘모르’의 어원을 살피자면, 결국은 라틴어 mors(모르스)에서 비롯한다. 그것의 대격 혹은 목적격인 mortem(모르템)이 인도-유럽어로 유입되고 유포되는데, 프랑스어 ‘모르’는 이것의 적자인 셈이다. 죽는 행위 혹은 동작을 일컫는 프랑스어 동사 ‘무리르(mourir)’ 역시 그에 대응하는 라틴어 어원을 갖는데, 동사 ‘모리오르(morior)’가 그것이다. 
  동사의 영역에서 살피자면, ‘소멸하다’ 또는 ‘죽어 없어지다’의 의미를 갖는 ‘뻬리르 (périr)’가 이채로운데, 다른 동사들과는 달리 이것은 그 명사형으로 ‘데뻬리쓰망 (déprissement)’ 만을 갖는다. 접두어 ‘dé-’ 가 붙어 만들어진 이것은 정작 죽음 자체를 가리키지는 않고 그것의 전 단계 즉 ‘쇠약’, ‘조락’의 의미만을 생산한다. 
  고대의 모든 문명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 혹은 그것을 감추고 위무하려 노력하였다. 그 흔적은 우선 각 지역 문명들의 신화 체계에서 잘 드러난다. 서유럽 대륙의 모든 지역들의 상상력에 정신적 문화적 젖줄을 대 주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죽음의 신은 주로 ‘하데스’와 ‘타나토스’에게서 구현된다. 지하세계를 관장하던, 그래서 지하세계에 머무르는 것으로 여겨진 하데스와는 달리 타나토스는 훨씬 더 그 문화-상상적 울림의 폭이 큰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 욕망, 육체 그리고 탄생의 신 ‘에로스’의 그림자 혹은 짝패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종교로 넘어오면서 죽음은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된다. 소멸에 대한 사람들의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공포를 더욱 구체적인 언어로 달래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저 죽음을 오만하게도 말하려 드는 담론체계가 바로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 제국 후기에 공식화되기에 이른 기독교는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죽음을 다룬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처하는 서사 구조를 대단히 공세적으로 구축한다. 이천년이 넘게 서구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삶의 주적으로 선포한 유일한 종교일 것이다. 십자가에서 신이 직접 죽어감으로써 죽음을 이겨낸다는 그 스토리라인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반전과 환호는 다른 어떤 종교적 담론도 산출하지 못한 환상성일 것이다. 그 환상성은 ‘부활’의 대단원으로 완성된다. 즉, 신을 따라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죽지만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천국-현세-지옥’으로 도식화되는 중세의 삼 단계 세계관은 그러한 믿음의 시각화로 이해될 수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고대 신화에서 죽음이 인격화되어 나타남으로써 삶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동반자로 그려진 것에 비하면, 기독교의 대처는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공포, 어떠한 상상적 재현체계로써도 달래지지 않는 근원적이고도 실질적인 그 공포에 정면으로 맞섰다는 덕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에는 ‘죽음’을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개 존재한다. ‘끝’, ‘종료’를 의미하는 ‘코네츠 конец[konets]’와 ‘콘치나 кончина[konchina]’가 ‘죽음’을 뜻하는 데에는 인간 생명이 다하고 삶의 여정이 끝난 것을 죽음으로 보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삶의 자연스러운 종말을 의미하며 이 중 ‘콘치나’는 고인에 대한 존경과 공경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에 반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전사, 재해사, 타살과 같은 죽음을 지칭하는 단어로는 ‘기벨 гибель[gibel']’이 사용된다.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들 중 가장 의미폭이 넓은 단어는 ‘스메르티 смерть[smert']’이다. ‘스메르티’는 구체적 사건으로서의 죽음뿐만 아니라 철학적 담론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의학적 용어로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포괄적이고 널리 사용되는 단어이다. 두 개의 어근을 지니는 ‘스메르티’의 ‘스’는 고대인도어 su(‘좋은’)와 관련되고 ‘메르’는 인도유럽어에 널리 나타나는 mъr(‘죽음’)로부터 온 것으로, 이것은 애초에 ‘좋은 죽음’, ‘자신의 죽음’을 가리켰다. ‘자신의 죽음’이란 곧 자기 생명이 다하여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좋은 죽음’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전 생애 동안 경험하는 통과의례 중 가장 급작스럽고도 두려운 변화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겪게 되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낀다. 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자하는 노력은 다양한 철학적 담론과 종교적 성찰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 문명 속에서 죽음의 역사를 추적한 필립 아리에스(『죽음 앞의 인간』)에 의하면 인간이 애초부터 죽음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느꼈던 것은 아니다. 공동체라는 끈으로 견고히 묶여있었던 중세 초기까지 죽음은 공동체 전체가 함께하는 일상적이고도 공개적인 것으로서, 그 안에서 개인은 외롭지 않게 죽을 수 있었으며 또한 신앙공동체가 보장하는 영생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자체라기보다는 특정한 죽음으로, 공동체 밖에서의 ‘객사’나 회개할 틈조차 없이 급작스럽게 맞이하는 ‘급사’였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공동체 사회가 점차 해체되고 사회가 더욱 개인화되면서 이제 죽음은 점차 개인의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외롭게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개인은 영생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채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 민중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중세 초기의 죽음관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러시아 민중들의 죽음관은 정교적 전통 아래 형성된 것이지만 예로부터 내려오는 러시아 민간 신앙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민간 신앙에서 죽음은 단지 ‘지상의 삶’이 끝났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또는 근원으로의 회귀로 간주되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태어나지만 삶을 향해 죽는다’고 믿었던 그들에게 죽음은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다만 자연적이지 못한 죽음은 극히 경계했는데 자살 혹은 교수형이나 물에 빠져 죽는 것 등은 부정한 죽음으로 간주하여 시신을 땅에 묻는 것조차 금지했다고 한다. 이런 시신은 “땅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를 지키지 않는 경우 시신이 썩지 않고 밤마다 무덤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0세기 말 정교를 수용한 이래로 러시아인의 죽음관은 정교적 세계관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죽음에 대한 정교적 관점이 러시아 민간 신앙의 그것과 현격히 차이가 났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 수용 이전의 민간 신앙에서나 정교적 관점에서나 죽음이란 것은 단순히 변화일 뿐이라는 생각은 동일하다. 민간 신앙에서 육체의 요소들이 공통의 보관소 혹은 원래의 곳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정교적 관점에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삶, 새로운 발전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개념 발전한다. 죽음이란 신이 정해준 지상에서의 삶을 완수하고 신의 계획에 따라 영혼이 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이 늘 지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에서 죽음의 토포스는 다양한 사조와 경향의 유입 속에 큰 변화를 겪게 되며 전쟁과 혁명이라는 역사적 급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채로운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죽음의 토포스의 문화적 발현을 프랑스라는 인위적인 영토분할의 틀 안에서 찾아 기술하는 것은 조금은 부적절한 느낌을 준다. 그 주제는 너무나도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것이어서, 적어도 서유럽 대륙으로 그 지역 단위를 키울 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지역적 변별성 혹은 단위가 협소하면 그 토포스의 차원을 다 담아낼 수 없을 우려가 생긴다. 왜냐하면 삶 앞에 우뚝 서있는 토포스 죽음은 도처에 편재(遍在)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편재성은 거의 신의 그것과 맞먹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의미가 전혀 없는 전제이긴 하지만, 만약에 죽음이 존재 혹은 실재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모든 문학과 예술적 문화적 표현이 생겨났을까하는 억측이 가능할 정도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중세의 말미에 공포로서의 죽음은 사건으로 발생하여 유럽 사람들을 직접 찾아온다. 여러 기록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최대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구를 죽인 대재앙 ‘페스트’가 그것이다. 한 집 건너 한 사람씩 죽어나간 참담한 현실 앞에서 죽음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혹은 종교적 담론 체계들은 급속하게 그 설득력을 상실하였을 것이다. 
  몇몇 역사가들은 15~16세기 남서 유럽에서 피어오른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물결을 일으킨 여러 동인들을 얘기하는 가운데, 그 물결이 결국은 페스트가 가져다준 죽음의 거대한 목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나는 살아 있구나”라는 감각적이고도 현실적인 지각은 역설적으로 삶의 일회성에 눈뜨게 하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기쁨과 가치에 주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즉, 죽음의 공포를 이러저러한 궁리와 언설 속에서 달래느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차라리 살아있음을 누리도록 사람들을 유도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휴머니즘은 ‘살아있는’ 인간들 끼리의 잔치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프랑스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한 16세기의 화가 피터 브뤼겔의 그림 <죽음의 승리>는 그러한 점에서 매우 역설적인 제목과 시각적 재현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 속에 보이는 수많은 시신들을 수습하는 산자들의 바쁜 손길들과 그것을 묘사하는 화려한 노란색 색채가 보는 눈에 따라서는 매우 분주하고도 생동적으로 비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의 제목은, 죽음을 이기겠다고 또는 이겼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담론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회화적 재현들 중 가장 먼저 기억되는 것은 신고전주의 화가 장-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들끓는 소용돌이 속에서 온건파와 급진파들 투쟁의 와중에 발생한 마라의 죽음은 문화적 토포스로서의 죽음으로부터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으로 우리의 시선을 유도한다.

  말하자면, 하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 왕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야반도주하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어이 찾아내어 파리의 대 광장으로 끌고 와서, 끝내 기요틴으로 두부와 몸통을 분리시키고야만 프랑스인들의 냉혹함의 경험은 단순한 역사적 경험으로 그칠 리 없다. 세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왕 죽이기’의 기억은 그들의 감정과 의식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매김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이를테면, 그 사건은 ‘죽임-죽음’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집단적 문화 토포스의 형성에 하나의 실질적 핵으로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평가하건데, 기요틴이 상징하는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내는 구체적 장치로서의 죽임-죽음의 토포스일 것이다.
  프랑스가 경험한 역사적 죽음-죽임의 사례로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두 사건은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과 파리코뮌의 총질이다. 하룻밤 새 삼천 명에게 죽음을 안긴 그들의 명분은 ‘다름’ 혹은 ‘이질감’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저 ‘인조인간’ 신교도들을 향한 공포와 경계는 결국 증오와 제거로 실현되었으며, 사회경제적 혹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빚은 극단적 대치를, 파리 시민군에 대한 프랑스 국방군의 일제 사격으로 끝내버린 19세기 마지막 살육의 경험 또한 오늘날 프랑스인들의 가슴과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문학은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을 망라하여, 조금 과장을 무릅쓰자면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라신의 비극 『페드르』에 제대로 몰입한다면 그녀의 비극적 종결은 운명의 필연이었다는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저 무한한 우주의 끝없는 침묵은 나를 떨게 만든다’라고 노래한 파스칼의 단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에 대한 단상일 것이다. 그가 호소해 마지않는 그의 신은 저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계실 것이며 그와 함께 죽음이라는 헤아릴 길 없는 심연 역시 그 어디쯤엔가 입 벌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의 『고백』은 죽음을 예감한 한 비범하고도 분열된 영혼의 마지막 항변이었다. 그의 고백을 따라가다 보면 그 죽음은 몰지각하고 부조리하고도 미성숙한 시대가 저지른 가해라는 점에 수긍이 갈 때도 있다.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의 죽음은 꽤나 어렴풋하다. 결투의 결과로 찾아온 죽음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 혹은 자살은 유혹의 스킬과 정념의 진정성 사이에서 서성대는 물음표로 기억된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쥘리엥과 레날 부인의 주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히 정형화된 죽음을 보여준다. 그 정형화를 소설적 성취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문화 대중들 속에 편안히 자리잡은 토포스로서의 죽음을 대변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발자크가 자신의 『고리오 영감』을 라스티냑의 손으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묻게 만드는 과정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문화적’ 혹은 ‘문학적’이라는 느낌을 제거할 정도이다.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죽음은 워낙 현실적이어서 실제로 우리들이 앞으로 맞게 될 죽음과 흡사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에 반해 빅토르 위고의 『가난한 사람들』의 자베르 경감의 자살은 너무나 웅혼한 나머지 독자가 혹은 관객이 그 결단의 비현실성을 잊게 만들 정도이다. 위고가 왜 위대한 낭만주의 작가로 남는지를 잘 말해주는 실례들 중 하나이겠으나, 조금 지나서 생각해보면, “내가 자베르였다면, 정말로 자살할까?”라고 반문하게 된다. 
  자살은 고통을 피해서 스스로 찾아가는 최후의 피난처일 수 있다. 소멸을 택할 것인가 고통을 견딜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모든 자살은 내몰린 죽음이다. 
  그 극단을 보여주는 것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다. 몇 시간에 걸쳐 뒤틀려 꼬이는, 비소 머금은 몸통, 그리고 그 위로 간간히 쏟아내는 토사물들은 고통과 죽음이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몇 안 되는 예술적 형상화이다. 그 형상화는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형상화라는 느낌을 지워주는 데 작가는 성공한다.
  음악에서도 죽음은 그 그림자를 어김없이 드리운다.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의 5악장은 ‘형장으로 걸어가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팀파니 소리인지 큰북인지 분명치 않은 발자국 소리는 서양의 저승사자 ‘죽음의 신’이 다가오는 소리일 것이다.
  이 곡을 탁월하게 해석하여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락에게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은 독일의 지휘자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젊은 시절 연주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1악장에는 죽음이 가장 죽음답지 않은 배음으로 숨어있다. 모차르트의 장송곡을 굳이 듣지 않아도, 에셴바흐가 들려주는 그 청아한 피아노 음색 속에 언뜻 비치는 서녘 햇살이 감지된다. 한국의 80년대 초 신군부에 끌려가 난데없는 고문을 당하고 절필했던 소설가 한수산에게서 눈물과 함께 체념과 용서의 가능성을 뽑아낸 그 곡조를 들으면 프랑스의 20세기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왜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 공감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애초에, 40을 못 넘길 (요절할) 팔자였다 ”

  프랑스의 것은 아니지만,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사랑하는 두 주인공이 저 앞에 빤히 보이는 죽음을 향해 하릴없이 걸어갈 때 관객의 귀를 채우는 음악 역시 그의 협주곡 21번이다.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조금은 기이한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 주인공은 삼백년이 넘도록 살아남아 죽음에 저항하는 기행을 보임으로써 죽음은 한편으로는 ‘시간’의 문제이기도 함을 환기한다. 실존과 비실존 사이의 엇갈림을 느끼게 해준다. 
  죽음이라는 언어적 토포스의 가장 극적이고도 해괴한 발현은 ‘돈-화폐-금융’과 관련된다. 프랑스어권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말 ‘모기지 mort-gage’가 그것이다. 앵글로색슨 언어권의 이 말은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돈 앞에서 그 공포는 어떻게 증폭되는지 웅변한다. “죽음으로써만 저당 혹은 담보가 풀린다”는 뜻이든, “죽을 때 까지 따라붙는 담보”라는 뜻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18세기의 러시아는 죽음에 대한 독특한 관념이 일상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 이전 시기까지 삶의 완수이자 자연스러운 경계로 받아들여졌던 죽음이, 18세기 후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의 강력한 유입과 맞물려, 이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이러한 선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이로써 자살에 대한 태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혁명적 계몽철학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라디시체프는 몽테스키외나 여타의 계몽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라디시체프가 주장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에 기반을 둔 폭군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삶을 마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최상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라디시체프에게 있어 자살은 삶으로부터 무기력하게 떠나는 것 혹은 차디찬 절망이 아니라 그 어떤 행동보다 용감하고 강인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행동이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용감하게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여전히 보고 있다. 스스로가 파괴되는 것을 결연한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진실로 과감함과 굳건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라디시체프,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우샤코프 전기』, 1789)

  이와는 달리 18세기 말부터 또 다른 유형의 자살도 급증하였는데 이는 감상주의 문학의 유행과 보다 관련이 깊다. 가령 러시아 감상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카람진의 『가련한 리자』(1792)와 같은 소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형성에 일조하였다. 귀족 청년에게 버림받은 농부의 딸 리자가 호수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의 소설을 읽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당시 사람들은 비극적 사랑과 극단적인 결말이 난무하던 감상주의 소설에 매료되었으며 희망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젊은 남녀의 자살이 잇달았다. 자살의 방식도 다양해져서 주로 목을 매거나 총, 칼로 자살하던 고전적 방식에 그치지 않고 감상주의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강이나 호수에 몸을 던지는 방식이 유행하였다. 네바 강에 몸을 던지는 자살 방식이 유행하면서 ‘물에 빠져 죽다’라는 표현 대신에 ‘아름다운 네바의 품에 안기다’라는 완곡어법이 나타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페테르부르크의 지역 민담도 당시 자살의 유행과 물에 몸을 던지는 자살 방식의 유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러시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불리는 이 전설은 페테르부르크주 비보르크 지역에 위치한 독일인 마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칼과 에밀리야는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지만 결혼을 반대하는 양가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여 20년이 넘게 기다리다가 50세가 된 어느 날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호수에 몸을 던졌고 다음날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숭고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순종을 기려 그 지역에 ‘칼과 에밀리야 거리’(1952년에 토스넨스카야 거리로 변경)가 지정되기도 하였으며 페테르부르크 부틀레로바 거리에 세워진 ‘칼과 에밀리야 동상’은 애절한 사랑의 상징으로서 여전히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한편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자살은 당시 유행하던 ‘허무병’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푸시킨의 작품 속 구절은 인생의 의미를 잃고 ‘허무병’에 걸린 젊은 귀족들 사이에 권총 자살이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권총자살이라는 것을, 다행히도, 
해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생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23~1831)

  당시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자살을 ‘영국병’이라 부르며 ‘영국식 행동’의 특성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있었다(로트만,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참조).

“원로원 의원 비루보프는 실로 불행한 아버지요. 어제 포병장교인 다른 아들이 권총 자살을 했소. 두 달 사이에 두 아들이 그토록 수치스럽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오. 이 영국병이 우리나라에 유행할까 두렵소.” (반트이쉬-카멘스키, <쿠라킨에게 보내는 편지>, 1772)

  19세기 초 러시아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1812년 조국전쟁(나폴레옹 전쟁)까지 계속 되는 전쟁의 포화 속에 변화를 겪게 된다. 그 당시의 세대는 자연사로 생을 마감할 확률이 낮은 가운데 이제 죽음은 노화나 질병이 아니라 오히려 젊음이나 공적과 더 강하게 연상작용하는 개념이 되기에 이른다. 또한 혁명적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가던 러시아 사회에서 죽음의 이미지 위에는 새로운 상징적 의미까지 덧입혀졌다. 데카브리스트 일원이었던 오도옙스키가 외친 강렬한 구호 “죽자, 형제들이여! 아, 영광되게 죽자!”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데카브리스트 봉기(1825년)를 거치면서 죽음은 조국을 위해 바치는 자발적 희생으로서 주창되기에 이른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눈을 뜬 러시아 지식인들은 여전히 전제정권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는 러시아 사회의 슬픈 현실을 직시하며 죽음을 황제의 권력에 맞서는 개인의 권리이자 자유의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시기 죽음에 대한 숭배는 죽음을 자유와 권리의 신호로 간주하였던 라디시체프식의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결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투가 가지는 사회적 함의는 다양하겠지만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황제의 포악한 열망으로부터 귀족들의 독립성과 자유 의지를 실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폭군의 절대적 힘이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음에 있다고 할 때 결투는 바로 명예를 위해 그 목숨을 가벼이 버릴 수도 있음을 의미하며 이렇게 죽음이 권리가 된 곳에서는 황제가 휘두르는 칼날이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카브리스트 봉기의 실패 이후 니콜라이 1세(1825~1855)의 반동 정치가 지배하던 시기에 또다시 죽음의 관념에 매료되고 죽음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의 죽음에 대한 숭배는 혁명기의 죽음의 상징적 의미와는 다소 상이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죽음 자체가 미화의 대상이 되어 시적 수사법으로 치장되고 죽음이 회피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서서히 동경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이렇게 낭만주의 시대에 죽음은 시인의 펜을 통해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는 것으로 미화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죽음을 숭배하고 미화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러시아 전 역사를 관통하여 유지되는 죽음의 이미지, 그리고 현대에 가장 강력하게 남아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죽음일 것이다. 현대인은 ‘메멘토 모리(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의 격언을 알고 있지만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오히려 사교상의 규칙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인간의 통과의례들 중 죽음의 의례가 출생이나 결혼의 의례보다 더 긴 시간에 걸쳐 더 정성스럽게 치러지는 것과는 상반되게 죽음과 관련된 표현이나 관용구는 상당히 빈약하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죽음이라는 주제의 금기성, 죽음을 직접 지칭하는 것을 위험하게 여기는 뿌리 깊은 관념은 계속되고 있다. 죽음과 관련된 독특한 완곡어법이 널리 나타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일 것이다. 가령 ‘죽다’의 의미를 ‘영혼이 떠나다’, ‘신에게 영혼을 맡기다’와 같이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자기 고향으로 갔다’, ‘자기 조상들에게로 갔다’와 같이 인간이 온 곳으로 돌아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죽음이란 말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꺼리던 현상은 19세기 러시아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널리 발견된다. 작가 고골은 ‘죽음’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하면 그로 인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편지에 결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성애를 숨기려고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차이콥스키도 죽음에 대해 심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친구들은 이러한 심각한 공포증을 알고 있었기에 그 앞에서 죽음과 관련된 말을 입에 올리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올랜도 파이지스, 『나타샤 댄스』 참조).
  이렇듯 그 말조차 금기시할 정도로 인간을 두렵게 만드는 죽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 공포라 할 만하다. 죽음의 공포와 그로부터의 해방의 문제는 죽음에 관한 사상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해왔다. 죽음의 불가해함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공포를 러시아 철학자 로자노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죽음은 수학마저 극복한다. ‘2×2=0’인 것이다. 
[...] 나는 죽음이 두렵다. 나는 죽음이 싫다. 죽음이 끔찍하다.
[...] 영원한 철학자인 인간이 이것에 ‘죽음’이란 단어를 생각해냈다니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이것에 무언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이것이 이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름이란 것은 정의이며 이미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지 않은가!” (로자노프, 『낙엽, 첫 번째 바구니』, 1913)

  도스토옙스키는 키릴로프(『악령』)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의 문제를 파헤친다. 죽음 자체보다 죽음의 공포를 더 두려워했던 키릴로프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살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선택한다. 키릴로프의 논리로는 죽음의 공포가 만든 허상이 바로 신이며 따라서 스스로 생명을 제거함으로써 이 공포를 극복하는 자는 그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죽음의 공포이다. 통증과 공포를 극복하는 자는 신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새로운 삶,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며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원치 않기에 [...] 나의 생명을 제거하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악령』, 1872)

  이처럼 인간을 억압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함으로써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던 키릴로프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바로 자살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죽음관은, 폭군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살의 권리를 주창했던 라디시체프의 사상과도 맞닿아있는 듯하다.
  “고골과 톨스토이,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을 준비하였고 그것에 대해 근심하고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으며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는 『닥터 지바고』의 구절처럼 러시아 작가들은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세계문학사에서 톨스토이만큼 죽음의 문제에 깊이 고뇌하고 죽음의 장면을 그토록 자주,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톨스토이가 전 생애 동안 죽음의 문제에 집착하였던 것은 어린시절부터 주변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난 가족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어려서 부모와 할머니의 죽음을 겪었고 성년기에 형들의 죽음, 결혼 후 잇따른 자식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인간의 연약함, 죽음의 공포를 뚜렷하게 각인시켰을 것이다. 『세 죽음』,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 죽음을 주제로 다룬 작품에서부터 『전쟁과 평화』의 수많은 죽음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의 자살과 니콜라이 레빈의 죽음 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죽음의 주제와 죽음을 묘사하는 생생한 장면이 등장한다. 특히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은 죽음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의 백미로 손꼽힌다. 주인공 이반 일리이치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평범한 가장이다.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악하지도 남에게 심하게 잘못한 일도 없는 보통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병을 얻게 되고 심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은 ‘메멘토 모리’의 격언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한다. 죽음은 반드시 닥쳐올 미래지만 육체적 죽음이 어떤 것인지 사후 세계가 무엇인지, 이 미래에 대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죽는다는 사실 뿐이다. 이 미지의 미래는 인간을 죽음의 공포로 떨게 만든다.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죽기까지 4개월 동안 이반 일리이치를 강하게 사로잡고 괴롭혔던 것은 죽음의 과정에서 겪는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강력한 죽음의 공포 그 자체였다. 

“ ‘나는 이곳에 있었으나 이제 저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가? [...] 내가 없어지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된단 말인가? 죽음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 그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이런 끔찍한 공포가 인간의 운명이라니.” (톨스토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1886)

  한편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이반의 심리 상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톨스토이가 찾고자 했던 해답을 주는 듯하다. 

“‘그런데 죽음은 어디에 있지?’ 그는 오랫동안 친숙했던 죽음의 공포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죽음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죽음이 없기에 그 어떤 공포도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아, 정말 기쁘다!” 그가 돌연 소리 내어 말했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1886)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고뇌와 관점은 『참회록』(1884), 『인생론』(1887), 『인생의 길』(1910)과 같이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 녹아있는 저서들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톨스토이가 죽기 직전까지 교정쇄를 놓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인생의 길』(1910)에서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 까닭은 영적인 삶이 아니라 육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정원을 사랑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며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죽음과 함께 이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때문에 나는 죽음이 두렵다. [...] 그러나 만일 나의 세속적인 온갖 욕망이 신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하나의 소망으로 완전히 바뀐다면 나에게는 생명 이외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즉 죽음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세속적이고 일시적인 욕망을 영원한 소망으로 바꾸는 것이 참된 인생의 길이며 행복의 길이다.”
“죽음은 영혼을 완전히 해방시켜준다. 그러므로 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기쁜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의 길』, 1910)

  이처럼 톨스토이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신앙 속에서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가 죽음의 문제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어쩌면 죽음을 그 누구보다 두려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집을 떠나 아스타포보의 어느 역장 집에서 죽어가면서 톨스토이는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는가!”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죽음에 순응하는 농민들의 태도는 신앙의 증거로 보였으며 톨스토이 역시 농민들처럼 죽고 싶어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죽음을 대하는 농민, 민중의 두려움 없는 태도를 자주 보여준다.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이치의 하인 게라심의 “우리 모두 죽게 될 텐데 사소한 번거로움이 뭐 대순가요?”라는 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들에게 죽음은 일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특별히 두려움을 느낄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중 <죽음> 편에는 러시아 농민의 죽음을 묘사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불쌍한 막심의 죽음으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러시아 농민은 참으로 놀랍게 죽지 않는가! 죽음을 앞둔 그의 심리 상태를 무관심이나 어리석음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농민은 마치 의식을 행하듯, 그렇게 냉정하고 단순하게 죽는 것이다.” (투르게네프, 『사냥꾼의 수기』, 1852)

  죽음을 대하는 농민의 이러한 태도가 문학적 창작이었던 것만은 아니며 민속학 문헌이나 의학 보고서 등에 문서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올랜도 파이지스, 『나타샤 댄스』 참조). 농민 계층의 죽음에 대한 관조적 태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농노제 사회를 견뎌내야 했던 러시아 농민에게 죽음은 곧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을 수도 있으며 또한 농촌에서 죽음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흔한 일이어서 이것에 어느 정도 둔감해지지 않고서는 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농민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신앙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우주는 지상과 내세가 연속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으로서, 이승에서의 고난은 ‘자유의 왕국’인 내세에서 보상받게 된다. 또한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내세에서의 삶이 결정된다고 믿었던 까닭에 죽음을 잘 준비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평화롭게 내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장례를 잘 치러 주는 것 또한 극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유럽의 고대 신화에서 죽음이 인격화되어 나타남으로써 삶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동반자로 그려진 것에 비하면, 기독교의 대처는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공포, 어떠한 상상적 재현체계로써도 달래지지 않는 근원적이고도 실질적인 그 공포에 정면으로 맞섰다는 덕목을 갖는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서구 기독교 문명 속에서 죽음은 애초에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공동체라는 끈으로 견고히 묶여있었던 중세 초기까지 죽음은 공동체 전체가 함께하는 일상적이고도 공개적인 것으로서, 그 안에서 개인은 외롭지 않게 죽을 수 있었으며 또한 신앙공동체가 보장하는 영생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공동체 사회가 점차 해체되고 사회가 더욱 개인화되면서 이제 죽음은 점차 개인의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외롭게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개인은 영생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채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죽음은 지리적 편차에 따라, 혹은 역사적 경험에 따라 그 정서적 함의가 미세하게라도 달라지는 수많은 토포스들과는 다소 상이하다. 토포스이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절대적이다. 그런 만큼, 프랑스와 러시아 두 언어-문화권에서 죽음의 토포스가 의미 있는 차이를 드러낼 것이라 기대하기는 사실 힘들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회적인 것, 개인적인 것, 역사적인 것 등은 끝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면, 그리고 양국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관계를 굳이 찾자면 18세기에 러시아에 퍼졌던 죽음에 대한 독특한 관념을 언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의 강력한 유입과 맞물려, 이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자 이러한 선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러시아 계몽철학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라디시체프는 몽테스키외나 다른 계몽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라디시체프가 주장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에 기반을 둔 폭군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혁명적 분위기가 맞물리며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눈을 뜬 러시아 지식인들은 여전히 전제정권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는 러시아 사회의 슬픈 현실을 직시하며 죽음을 황제의 권력에 맞서는 개인의 권리이자 자유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죽음의 토포스가 갖는 이러한 일시적 함의는 프랑스의 기요틴이 대변하는 바, 특정한 역사적 정황에서 발생하는 ‘죽임’의 급격한 증가 현상과 맞물린다. 모든 죽음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죽임’은 집단적 요구 혹은 욕망이나 분노가 반영된 공동체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관 토포스 1812년 전쟁; 결투; 공포; 농민; 신앙; 자살;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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