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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지식인
토포스명(프랑스) intellectuel
토포스명(러시아) интеллигенция
정의 1. 지식을 정의를 위해 사용할수록 더 지식인에 가깝다.
2. 지식을 비판적으로 사용할수록 더 지식인에 가깝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지식인을 뜻하는 프랑스어 ‘앵텔렉튀엘 intellectuel[ɛ̃te[εl]lεktɥεl]’의 어원은 라틴어 intellectualis(지성, 정신적 활동에 관여하는 사람)이며, 이는 ‘사이’를 뜻하는 접두어 inter-와 ‘선택하다(choisir)’ ‘읽다(lire)’를 의미하는 동사 legere가 결합된 intellĭgĕre (‘식별하다’, ‘파악하다’)와 연관된 어휘이다.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폭넓게 지시하는 ‘지적인’, ‘지능의’, ‘정신적인’이란 뜻의 형용사로 사용되던 앵텔렉튀엘이 육체노동자(manuel)와 대립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1821년 생 시몽의 『산업체계론』에서이다. 그러나 정신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의 의미 외에 근대적 의미, 다시 말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분석과 견해를 알리려고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는,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문인, 학자, 언론인 들이 이기적 국가주의와 인종주의에 맞서 정의를 지키기 위해 하나의 전선을 구축했던 1898년이다(조셉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참조). 드레퓌스 사건 이전에 정신 활동에 관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어휘로는 학문을 독점했던 성직자(clerc), 학식이 풍부한 석학(érudit) 또는 박사(docte), 학문에 조예가 깊은 학자(savant), 계몽주의자들이 자칭했던 철학자(philosophe) 등을 들 수 있다. 
  오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성직자는, 성서를 교회보다 우위에 두고 ‘만인사제’를 표방하는 신교와 달리, 오랫동안 신도들과 신의 대화를 매개하는 중요한 소임을 수행했다. 특히 가톨릭의 지배력이 강했던 구체제 하의 프랑스에서 성직자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이끌어가는 집단이었다. 17세기 지적 생활이 가능한 귀족과 대 부르주아지의 교육을 담당한 것도 예수회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제3공화국이 들어서며 공교육이 확립될 때까지 교육체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안의 제시라는 근대적 지식인의 사회적 소임과는 거리가 멀다. 근대적 지식인의 보다 직접적인 조상은 세속화가 본격화되고 지식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사회 체계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팽배해진 18세기에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철학자’라 할 수 있다. 
  18세기에 철학자들은 가톨릭 교권을 비판하고 기존 정치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며 사회의 혁신과 자유, 공익, 관용과 같은 근대적 가치들을 주창한 의식의 새로운 지도자였다. 특히 신교도라는 이유로 무참하게 처벌된 장 칼라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재판에 개입하고 칼라스의 복권을 이루어 낸 볼테르는 이후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18세기의 ‘철학자’가 근대적 의미의 지식인의 소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 시기에 국가 권력과 그 토대를 비판하는 견해를 밝히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공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문, 아카데미, 클럽 등 공권력에서 벗어난 이 공간들을 통해 처음으로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철학자들은 그 공간을 활성화하고 확장시키면서 여론 형성을 주도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1894년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철학자이든 작가이든 언론인이든 자신의 직업과 무관하게 그 직업에서 획득한 권위의 힘을 빌려, 국가적 사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공적으로 표명하는 사람들이 집결해, 기존의 여론에 맞서 최전방에서 새로운 여론 형성을 이끌어가는”(오영주, <행동하는 지성, 앙가주망>,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현대적 지식인을 탄생시켰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지식인’, ‘지식인 계층’을 뜻하는 ‘인텔리겐치아 интеллигенция[intelligentsiya]’의 어원은 라틴어 intelligentia(‘이해, 지적 능력’)이며 18세기 전반에 라틴어나 프랑스어 ‘엥텔리장스 intelligence’의 번역어로서 러시아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애초에 인텔리겐치아는 라틴어,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의미로 굳어지게 되는 것은 1860년대 이르러서이다(비노그라도프, 『러시아 단어의 역사』 참조). 인텔리겐치아의 현대적 의미는 이미 1840년대부터 이 의미의 inteligencja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는 폴란드어의 영향으로 공고해진 것으로 추정된다(비노그라도프, 위의 책).
  1860년대 이전에도 지식인 계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 지칭할 만한 특별한 용어가 없었다. 가령 흐라네비치는 도스토옙스키가 당시 이들을 지칭할만한 단어가 없어서 ‘귀족’이란 말로 지칭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당시에 ‘인텔리겐치아’라는 단어가 아직 러시아 문학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까닭에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에서) 불가피하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귀족’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며 또한 그 당시에 ‘귀족’과 ‘교양인’은 거의 동의어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흐라네비치, 『폴란드인 유형수가 기억하는 도스토옙스키』, 1910)
일반적으로 ‘지식인 계층’으로서 인텔리겐치아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작가 보보리킨으로 간주된다. 보보리킨 스스로도 인텔리겐치아란 말을 1866년에 자신이 최초로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보보리킨, <몰락한 ‘베히’>). 투르게네프의 『이상한 이야기』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문학 작품 속에서 인텔리겐치아란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1860년대이다.

“내일 귀족 모임에 큰 무도회가 열릴 거요. 한번 가 봐요. 미인이 없지는 않을 거요. 우리의 인텔리겐치아도 볼 수 있을 테고.” (투르게네프, 『이상한 이야기』, 1869)

“피에르는 그곳(안나 파블로브나 살롱)에 페테르부르크의 인텔리겐치아가 죄다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9)

  19세기 말 무렵에는 인텔리겐치아가 학술 분야뿐만 아니라 문학작품과 일상 언어 속에서도 활발히 사용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인텔리겐치아는 러시아에서 서유럽 언어들로, 이후에 세계의 수많은 언어로 흘러들어 가 독특한 러시아적 지식인 계층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인텔리겐치아가 태동하게 되는 19세기는 강력한 억압과 다소간의 해방의 정치적 분위기가 반복되던 때였으며 이와 동시에 서유럽의 다양한 철학과 사상이 폭넓게 유입되던 시기였다. 표트르 대제(1689~1725)의 서구화 정책 이후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여제(1762~1796), 알렉산드르 1세(1801~1825) 시대를 거치면서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계몽철학, 독일의 관념 철학에 대한 사유가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문화사에서 흔히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맞먹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12년 조국전쟁(나폴레옹 전쟁)의 승리와 파리로의 진군을 통해 젊은 장교들이 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발달된 사회상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후 러시아 사회에서는 전제 정권과 농노제가 옥죄고 있는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조국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운동의 시초로 간주되는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봉기(1825)로 폭발하게 된다.


 
  데카브리스트 봉기에 이어 1830년 폴란드 지역의 소요 등 유럽의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자 니콜라이 1세(1825~1855)는 강력한 반동적, 억압적 정책을 시행하였다. 많은 연구가들은 바로 이때를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태동한 시기로 간주한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도 개별적 지식인은 존재했으나 하나의 집단으로서 지식인 계층의 형성은 바로 ‘니콜라이적 반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20세기 문화 백과사전> 참조). 우스펜스키(1997) 역시 인텔리겐치아 현상을 ‘합법적 차르’와 ‘차르의 유형학’을 확립한 니콜라이 1세 시대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니콜라이 1세 시대의 반동 학자 우바로프가 러시아를 이끌어 갈 정신으로 주창한 ‘정교, 전제 정권, 민중성(Православие, Самодержавие, Народность)’이 프랑스 혁명 정신 ‘자유, 평등, 박애’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이 시기 인텔리겐치아의 사상적 토대였던 ‘정신성, 혁명성, 세계주의(Духовность, Революционность, Космополитизм)’는 바로 우바로프의 친 전제 정권적 이념에 대한 명백한 반대 선언이었다. 정권, 권력에 대한 저항, 권력의 상징 차르에 대한 비판과 적대성은 다양한 세대의 인텔리겐치아를 묶어 주는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된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인텔리겐치아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이상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열정적으로 체제와 싸우면서 19세기 말~20세기 초 격동의 러시아 사회를 이끌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20세기 프랑스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상가 장-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애초부터 지식인이라는 집단은 지성에 관계되는 일(정밀과학, 응용과학, 의학, 문학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기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 - 그 개념이 모호하건 명확하건, 또는 도덕주의자이건 마르크스주의자이건 상관없이 - 을 내세워,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장-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1965.)

  흔히 프랑스 지식인의 전성기는 1945년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라고 말한다. 이 시기는 사르트르가 지식인의 대명사로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때이다. 특히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의무라고 규정한 사르트르의 주장은 참여를 뜻하는 프랑스어 앙가주망(engagement)을 전 세계에 알렸다. 사르트르가 주장한 지식인의 참여는 프랑스 사회의 지적 전통과 결부된 것으로서, 멀리는 18세기에 발생한 칼라스 사건의 볼테르,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말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의 에밀 졸라를 떠올리게 한다. 
  ‘지식인’이 명사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8년경으로, 1894년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894년 9월 유태인 출신 장교 드레퓌스가 독일에 국가 기밀을 넘긴 첩자라는 혐의를 받고 군사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몇 년 뒤 피카르 소령이 우연히 드레퓌스의 재판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의를 제기했고 그 결과 진범이 에스테라지 소령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초기에는 시인이자 사상가인 샤를 페기(1873~1914)를 비롯하여 몇몇 작가들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주장했지만 별다른 여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1898년 재심을 청구한 피카르 소령이 오히려 구속되고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재판을 주도한 군국주의자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사정이 달라졌다. 에스테라지 소령의 무죄가 선고되고 48시간 이 지난 뒤 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에밀 졸라(1840~1902)는 『오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항의의 글을 기고했다. 바로 그날 『오로르』지가 30만 부나 팔려 나가면서 사건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시점에 대대적인 여론이 일어났다. 

“내가 취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실현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조치입니다. 그토록 많이 참아 온, 행복할 권리가 있는 인류의 대표로서, 내겐 단 하나의 열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빛에 대한 열정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입니다. 나를 법정으로 끌고 가십시오. 다만 심문은 백일하에 공명정대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 1898)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의 이 기사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많은 교수, 작가, 학자들을 참여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아나톨 프랑스(1844~1924),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와 같은 작가, 사회학자인 에밀 뒤르켕(1858~1917), 화가인 클로드 모네(1840~1926)뿐만 아니라 중등교원과 대학 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들 등 491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연달아 신문에 발표되었다. 이들은 ‘지식인’이라 불리며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 베르사유 중죄재판소가 졸라에게 징역 1년, 벌금 3천 프랑을 선고하고 정부가 그의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도 박탈하는 등 졸라에 대한 당국의 노골적인 탄압이 이어지자 이 새로운 집단은 더욱 결집하게 된다.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는 재심을 받고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유죄인 채 사면의 형식으로 석방되자 졸라는 다시 한 번 신문 기고를 통해 “이것이 정상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에 대한 정상참작이 아니라 심판관들에 대한 정상참작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정상 참작을 한 것이다. 이 결정은 그들이 규율과 양심 사이에서 타협을 했다는 고백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다시 재심을 촉구했다. 드레퓌스는 영국 망명에서 돌아온 졸라가 사망한 지 4년 뒤인 1906년 7월 3일 마침내 12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고 복권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에밀 졸라의 유해는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전 세계가 졸라의 투쟁을 지켜보고 그를 사회 참여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추앙하였다. 인종 문제까지 뒤얽힌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넘어 세계 지식인의 역사에 초석을 놓은 사건으로 간주되었다.(니콜라스 할라즈,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재인용 및 참조.) 
  그러나 사건 당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한 이 새로운 집단을 가리키는 ‘지식인’이란 명칭은 드레퓌스 파의 반대편에 있는 군국주의자와 반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경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유태인 장교의 결백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지도부의 권위와 국가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 새로운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지식인’이라는 명칭을 통해 표출했다.

“소위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자들 사이에 청원서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연구소와 도서관에서 사는 자들을 마치 귀족 계급인 양 일컫는 지식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 시대가 얼마나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작가, 학자, 교수를 초인의 대열에 올려 놓으려는 오만하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 (페르디낭 브륀티에르, 1898, 오영주, <행동하는 지성, 앙가주망>에서 재인용) 

“그들은[=대학 교수들] 다음과 같은 일종의 말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주목하시오. 우리는 하나의 단체이고 단체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사유의 보고이고 지적 관심의 수호자들입니다.” (샤를 페기, 『산문집』, 1909-1914)

  전통을 강조한 작가 모리스 바레스(1862~1923)는 “대학을 감시해야 한다. 대학은 프랑스의 원칙을 파괴하고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우리를 인류의 시민으로 만들겠다는 구실로 대학은 우리의 대지와 이상으로부터 우리의 뿌리를 파내고 있다.”라는 말로 청원서에 서명한 교수와 학자, 작가들, 즉 ‘지식인들’의 양성소인 대학을 비난했다. 반 드레퓌스 파에게 이른바 지식인들은 군사 법정의 판결을 문제 삼아 군의 권위를 무시하고, 개인의 대의를 절대시함으로써 국가적 합의에 타격을 가하는 불순분자들이었다.(오영주, <행동하는 지성, 앙가주망> 재인용 및 참조.) 
  프랑스 지식인들이 다시 한 번 정치 문제로 주목을 받게 되는 시기는 전 유럽에 파시즘이 창궐했던 1930년대이다. 1919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주창하고, 1933년 독일에 히틀러의 나치 단독 정권이 수립되자, 프랑스에서도 파시즘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934년 3월 좌파 지식인들은 “파리의 파시스트 준동에 맞서 민중이 단결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반 파시스트 지식인들의 감시위원회’란 조직을 창설했다. 앙드레 말로, 알랭, 조르주 캉길렘, 앙드레 브르통, 폴 니장, 폴 엘뤼아르, 장 게노, 로맹 롤랑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상황은 국내외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할지, 레옹 블룸의 반 파시즘 인민전선내각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 등 복잡한 정치적 문제들이 얽혀 있었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좌파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는 있었지만 이념적, 국가적, 정치적 관점에서 상당히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당시 위원회에 가담했던 알랭은 ‘지식인’이 실무적으로 정치 영역에 가담하는 데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지식인들은 주요 사안에서 상인이나 노동자들보다 더 양식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성마르고 거들먹거리며 살기 어린 말들을 쏟아내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그 결과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파리 이공대학 출신이든 고등사범학교 출신이든 혹은 변호사 협회 소속이든, 과거에 공부벌레라 불리던 사람들이 꾸리는 정부는 루이 14세의 야심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을 양산했다.” (알랭, 『어록 II』, 1933) 

  쥘리앙 방다는 『지식인들의 배반』(1927)에서 지식인을 가리키는 어휘로 ‘엥텔렉튀엘’이 아닌 ‘클레르(성직자 clerc)’를 사용하여 ‘엥텔렉튀엘’이라 불리는 자들의 사회적 참여를 비판했다. 비판의 핵심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이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지식인들처럼 진리와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는 소임을 저버리고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가 성직자라는 어휘를 택한 것은 보편적 가치의 수호가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신성한 임무라는 점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정치적 참여가 아니라 비판적 의식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지식인의 사회적 소임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입장과 별개로 오래전부터 계속 논의 되어온 주제이다. 이 논쟁은 먼저 지식인들의 신분을 문제 삼았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지식인을 비난했던 바레스에 따르면, 지식인은 자신의 영역인 학문과 문화에 전념할 때 칭송받지만 사회적 또는 정치적 대의를 옹호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지식인’이란 ‘소박한 프랑스인들’의 처지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처지와 삶의 방식을 가진 특권계층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지식인은 그들이 시험과 경쟁에 가치를 부여하는 교육 체계의 산물로서 사회의 엘리트층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지식인은 그의 사회적 출신과 성분으로 볼 때 자신을 먹여 살리는 체계를 비판만 할 줄 아는 무책임한 몽상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알랭 레, 『프랑스어 문화사전』 참조.) 

“정치 용어로서 지식인이란 단어는 일종의 욕이었다. 그것은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민과 단절된 사람을 지시했다.”(밀란 쿤데라, 『웃음과 망각에 관한 책』, 1978.) 

  피에르 부르디외가 <남성의 지배>(1990)에서 “지식인은 부르주아의 눈으로 볼 때 비현실주의, 정신적 순수주의, 무책임함과 같은 여성적 속성들을 갖춘 존재이다.”라고 말한 것도, 남성 지배 사회 체제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폄하되는 속성이 곧 지식인과 결부된다는 주장을 통해 지식인의 행동력 부재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지식인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논의와 별개로, 드레퓌스 사건 이후 현실 사회의 문제에 대해 인권과 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프랑스 지식인의 전통을 계승한 사례들은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가령 앙드레 지드는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자였지만 1920년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뒤 당시로는 드물게 식민지 원주민의 참상을 공개적으로 폭로했다(『콩고 여행』, 1926). 또한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가톨릭 신도이자 왕정주의자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코주의자들에 동조했지만, 1934년~1938년에 걸쳐 교회의 이름으로 시민을 학살한 마조르크 사태를 목격하고 인권의 이름으로 프랑코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달빛 아래 공동묘지』, 1938).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한 시몬 베유도 국제 사회주의 조직인 인터내셔널이 스페인의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저지른 폭력을 목격하고 인권의 이름으로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오영주, <행동하는 지성, 앙가주망> 참조).
  1945년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프랑스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사회 현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고 토론을 이끌어 나간 시기이다. 그 중심에 1947년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과 글 역시 강력한 무기일 수 있음을 주장한 장-폴 사르트르(1905~1980)가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주 짧은 글로도, 침묵으로도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르트르의 주장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때만큼 지식인의 참여 의무가 강조된 적이 없었다. 1960년대 후반 사르트르는 『르 몽드』에 실린 선언문과 청원서에 서명을 가장 많이 했고, 정부가 신문 『인민의 대의』 판매를 금지했을 때는 직접 거리에 나서 그것을 직접 배포했다. 또한 68혁명 당시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들과 만나 토론을 벌인 사르트르는 실천적 지식인의 대표자였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사르트르가 미친 영향은 “사르트르의 의견을 알아야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어느 독자의 말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현실 공산당과 거리를 두고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을 가하기는 했지만 사르트르의 지식인 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시기의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를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발판으로 보고 그것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유토피아를 꿈꾼 이른바 좌파 지식인이었다. 독재정치와 강제수용소로 상징되는 자유의 탄압, 제국주의적 야망을 소련의 정체로 보고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결론 내린 레몽 아롱과 사르트르의 논쟁은 유명하다. 1950년대 프랑스 사회를 분열시킨 이 유명한 이데올로기 논쟁을 기록한 아롱의 대표적 저서 『지식인의 아편』(1955)은 제목부터 사르트르의 지식인 개념과 그들의 이념적 토대인 마르크스주의를 겨냥하고 있다. 
  그러나 알제리 전쟁(1954~1962)이 일어났을 때 사르트르와 아롱은 이념을 벗어나 함께 1957년 6월 알제리 평화를 위한 가두 행진에 참여했고 <121인 지식인 성명>에 서명했다. 그리고 1970년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스탈린 체제와 소련의 체코 침공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은 ‘이성적 지식인’ 아롱의 승리를 확인해 주었지만, 사르트르를 비롯한 참여적 지식인들의 자유와 정의와 미래를 위한 인간적 투쟁의 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1989) 소련이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포기(1991)한 1990년대에 지식인에 대한 논의는 지식인의 종말, 새로운 지식인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옮아간다. 1983년 미테랑 사회당 정부가 사회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지식인들에게 토론회를 제안했을 때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1924~1998)는 <지식인의 무덤>이라는 짧은 글로 제안에 응답했다. 여기서 ‘무덤’이란 표현은 보편적 주체로서 진실과 정의를 수호하는 책임을 지던 지식인 볼테르-졸라-사르트르가 구현했던 체제 비판적 지식인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리오타르의 주장을 보여주는 비유이다. 리오타르는 사르트르의 지식인, 즉 자신의 실존 상황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 자체가 이미 사회적 참여이고 의견의 표명이 되는 ‘총체적 지식인’과, 푸코가 제시한 지식인 즉 특정한 분야에서 습득한 자신의 전문 지식을 무기로 사회 비판 운동에 참여하는 ‘전문적 지식인’의 개념을 대비시킨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리오타르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지식인의 모색이었다.

  1995년 총파업 때 적극적으로 사회문제에 뛰어든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전문적 지식인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프랑스 사회에 지식인에 대한 기대를 다시 한 번 일깨운 학자로 여겨진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인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 언론 기자들을 비판하고, 실업자들을 지지하였으며, 문명 파괴 반대 운동에 참여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들에 저항하기 위해 범세계적인 지식인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인종차별적 이민법 강화에 맞서 최대 5만 명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반대 시위와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여 법안의 일부 수정을 얻어냈던 1997년에 프랑스 사회는 지식인의 앙가주망 전통을 두고 새롭게 논쟁을 벌였다. 드레퓌스 사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6년에 발간된 『프랑스 지식인 사전 : 인물, 장소, 사건』은 지식인의 시대는 끝났는가, 새로운 지식인 시대가 오는가, 프랑스 지식인은 지적 사기꾼인가, 지식인은 여전히 인류 보편적 대의에 헌신하는 대항 권력인가 등의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지식인 사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던 미셀 위크노는 『지식인의 세기』(1997)에서 예언자적 지식인의 시대는 갔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응시하는 새로운 지식인을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인은 개인이나 한정된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회적 윤리와 정의를 모색하고 구현하려는 익명의 지식인들이다. 1997년 처음 시위를 주도한 영화감독 59명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를 움직이기 위해서 더 이상 사르트르나 푸코가 필요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셀 위크노의 주장과 상통하는 발언이다. 
  2000년 레지스 드브레는 『지식인의 종말』을 통해 대중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강력한 부상 속에서 투사적 지식인이 사라지고, “방송 매체에 집착하고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고 공격을 받으면 그만큼 집요하게 반격하며 특별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 대중 스타로서의 지식인”이 만연하는 사태를 비판했다.

“과거의 지식인은 시대를 명료하게 해석해 주었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시대의 어둠에 어둠을 더할 뿐이다. 과거의 지식인은 미래를 내다보는 견자였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거미처럼 사방에 발을 뻗쳐 주목을 끌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 우리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지식인! 그 소임과 이름에서 더 이상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지식인의 종말』, 2000)

  드브레는 이들의 병명을 “집단 자폐증, 현실감 상실, 전망 부족, 도덕적 나르시시즘, 즉흥성”으로 진단했다. 그리고 “상원과 양원, 시민, 군사력, 주요 언론, 그리고 주요 언론에 세뇌된 여론...... 내 편은 내 사유뿐이다.”라고 말하며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끝까지 지킨 졸라의 진정성과 치열함을 다시한번 일깨우고 지식인의 의미 있는 소임이 여전히 필요함을 역설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인텔리겐치아란 용어가 러시아 언어와 문화의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과연 누가 인텔리겐치아인가, 그 시초를 누구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인텔리겐치아의 근본적 속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 문제는 러시아 지성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 특히 인텔리겐치아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시초에 대한 해석도 달리 나타난다. 러시아 사상가 베르댜예프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시작을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의 작가 라디셰프에게서 찾는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시초는 라디셰프이다. 그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근본적 특성을 예고하고 정의해 주었다. 라디셰프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나의 영혼은 인류의 고난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라고 썼을 때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태동한 것이다. […] 라디셰프는 농노제의 부당성에 상처 입고 그것을 폭로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최초의 러시아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베르댜예프, 『러시아 이념』, 1946)

  반면 오브샤니코-쿨리콥스키(1906)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시작을 차아다예프로 본다. 게르첸이 “어둠을 꿰뚫는 한 발의 총성”이라고 평한 차아다예프의 『철학 서한 1』(1829)이야말로, 세계사에서 러시아의 소임에 대한 서구주의자들과 슬라브주의자들의 격렬한 논쟁에 불을 지핌으로써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시각은 이른바 ‘1840년대 사람들’을 최초의 인텔리겐치아로 보는 시각이다. 아직 인텔리겐치아란 용어가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이지만 1840년대 사람들은 1860년대 인텔리겐치아와는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지식인 집단을 이루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이 발표된 이래로 184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흔히 ‘아버지 세대’로 불리고 186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아들 세대’로 불린다.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인텔리겐치아의 차이가 연령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사상적인 측면과 구성원의 차이, 그리고 급진성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1840년대 인텔리겐치아는 셸링, 피히테,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1860년대 이후의 인텔리겐치아는 알렉산드르 2세 시대의 다소 자유로워진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로 생시몽, 푸리에 등 프랑스식 사회주의 사상에 더욱 경도되었다. 계급적 차이도 존재하는데 초기의 인텔리겐치아는 주로 귀족계급이 중심을 이루었던 반면, 19세기 중, 후반의 인텔리겐치아는 상인, 하급 관리, 성직자, 농민 출신 등 이른바 ‘잡계급’으로 구성원이 확대되었다. 이들 잡계급 출신 인텔리겐치아는 이전 세대와는 달리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판에 있어 훨씬 더 적극적이고 과격했다. 벨린스키에 의해 그 규준이 마련된 예술과 사회 비평, 1860년대 절정을 구가하였던 허무주의, 바쿠닌의 무정부주의, 게르첸에 의해 불붙게 되는 나로드니키 사상(인민주의)은 이른바 “1860년대 사람들”이라 불리는 급진적 인텔리겐치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운동의 전통을 마련해 나갔다.
  한편 이들 급진적 인텔리겐치아를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시초로 보면서 인텔리겐치아라는 용어 자체를 부정적,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진영도 있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혹독한 비평서이자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첨예한 논란의 정점에 서 있는 『베히(방향표지)』(1909)의 저자들, 이른바 ‘베히(방향표지)파’라 불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 저서는 이후 수많은 반대 및 찬성 저술들을 뒤따르게 하는 위력을 발휘하면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논란에 불을 지폈다. 베히파는 19세기 중, 후반 잡계급이 출현하면서 인텔리겐치아도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바쿠닌, 벨린스키, 게르첸 등을 러시아 최초의 인텔리겐치아로 간주한다. 베히파는 인텔리겐치아를 무신론적 급진주의에 경도되어 창조성도 철학적 기반도 결여된 집단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러시아 지식인 계층이 종교를 통해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특히 러시아 민족 문화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들 중 ‘전형적인’ 인텔리겐치아(좌파 급진주의자들)와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인 지식인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베히파의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베히』의 저자 중 한 명인 스트루베의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난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정신적 태동은 바로 러시아의 선도적 지성이 서유럽의 무신론적 사회주의를 흡수함으로써 시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첫 번째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바쿠닌이다. 바쿠닌 없이는 벨린스키의 ‘좌익화’도 없었을 것이며 체르니솁스키의 과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식 계층과 인텔리겐치아를 갈라놓는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비코프, 라디셰프, 차아다예프를 바쿠닌, 체르니솁스키와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노비코프, 라디셰프, 차아다예프 쪽과 바쿠닌, 체르니솁스키 쪽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는 단순한 역사적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 라인의 고리들이 아니라 그 본질상 결코 화해할 수 없으며 그 발전 과정 중에 끊임없이 투쟁하는 두 개의 정신적 흐름인 것이다.” (스트루베, <인텔리겐치아와 혁명>, 『베히』, 1909)

  이처럼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정의와 그 태동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가 서로 엇갈리지만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세대를 초월하여 그들을 묶어주는 근본적 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서유럽의 지식인과 구분하여 인텔리겐치아를 러시아의 고유한 문화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서유럽의 지식인이 지적 영역과 더 근본적으로 관련된다고 한다면,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윤리적 영역, 이데올로기적 영역에 더욱 정초된 집단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서유럽의 사상과 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 형성된 집단이기는 하지만 러시아 땅에서 독특한 변화를 겪으며 러시아 고유의 현상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현상은 러시아 문화 모델의 ‘자’와 ‘타’의 대립 범주 중 하나라는 로트만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요컨대 인텔리겐치아 현상은 ‘남의 것’, 곧 타 문화가 러시아 땅으로 들어와 고유한 변화와 변형을 거쳐 소중한 ‘나의 것’이 된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로트만, <인텔리겐치아와 자유>).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유한 속성으로 ‘이념성(идейность)’과 ‘토대의 결여(беспочвенность)’를 들고 있는 페도토프도 이러한 속성의 원인을 타문화의 유입과 관련시킨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과업의 ‘이념성’과 이념의 ‘비토대성’이라는 특성으로 묶을 수 있는 그룹, 운동, 전통이다. [...]

18세기는 러시아에서 인텔리겐치아가 발생하게 된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이것은 사상의 문화가 없어 그것에 목말라하던 나라에 서유럽 문화가 유입된 결과이다. ‘비토대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문화가 교차하면서 태동한 것이다. ‘이념성’은 자기 나라를 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남의 것을 동화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서 비롯된다.” (페도토프, <인텔리겐치아의 비극>, 1991)

  또한 많은 연구가들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으로 체제 ‘비판성’, ‘적대성’을 들기도 한다. 가령 우스펜스키는 역사적 시기에 따라 인텔리겐치아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대상은 달라질 수 있어도 적대성의 속성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근본적 속성 중 하나는 사회의 지배적인 제도에 대한 적대적 태도이다. 이 적대성은 무엇보다도 정치제도, 종교 및 이데올로기적 방침과 관련해 나타나지만 윤리 규범과 행동 원칙 등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 기준점이 달라짐에 따라 특성과 지향성은 바뀔 수 있어도 적대성의 속성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바로 이 반대, 대립의 전통이 상이한 세대의 인텔리겐치아를 결합시켜 준다. 인텔리겐치아는 항상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권력과 전제 정권과 지배세력에 반대한다. 가령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제정 러시아 시대처럼) 종교 사회에서는 무신론적이며 (소비에트 사회처럼) 무신론 사회에서는 종교적이다.” (우스펜스키, <러시아 문화의 고유한 현상으로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1997.) 

  이러한 적대성 혹은 대립성은 역설적이게도 인텔리겐치아가 그토록 가까워지고자 노력했던 민중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고골에게서 『죽은 혼』의 초고를 들은 후 “아! 우리의 러시아는 얼마나 슬픈가?”라고 외친 푸시킨의 절규는 19세기 모든 인텔리겐치아의 절규였다. 인텔리겐치아는 억압적인 전제 정권과 힘없고 초라한 민중 사이에 낀 소수의 중간 계층으로서 민중에 대한 죄책감, 집단적 죄의식을 지닌 자들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나로드니키 인텔리겐치아의 사상적 교과서라고도 불릴 만한 라브로프의 『역사서한』(1905)을 통해 더욱 발전한다. 인텔리겐치아는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자신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로, 민중에게 빚을 지고 있으며 이 빚을 청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소수의 교육 받은 계층은 (다수의) 노동과 고통을 이용함으로써 존재한다. [...] 이 소수의 교육 받은 계층은 그들의 모든 고통에 대해 책임이 있다.” (라브로프, 『역사서한』, 1905.)

  인텔리겐치아의 이러한 죄의식, 민중에 대한 의무감은 민중에게 봉사하고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인텔리겐치아의 근본적 과업으로 설정하게 만들었다. 베르댜예프(1946)의 지적처럼 서유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유한 러시아적 주제, 즉 ‘인텔리겐치아와 민중’이라는 주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제, ‘인텔리겐치아의 이중성’이라는 주제도 나오게 된다. ‘베히파’와 같이 인텔리겐치아를 비판하는 쪽에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부분이 바로 인텔리겐치아의 친민중적 지향성과 이에 반하는 근본적 속성에 대한 것이다.

“민중에게 복무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은 인텔리겐치아는 민중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친민중성과 정신적 귀족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항시적으로 요동칠 수밖에 없다. 친민중성의 요구는 인텔리겐치아적인 믿음의 토대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그와 반대되는 것도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즉 구원해야 할 대상이자 ‘의식’의 양육을 위해 유모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들로서 민중, 지적으로 계몽되지 못한 자로서 민중에 대한 오만한 태도도 나오는 것이다.” (세르게이 불가코프, <영웅주의와 고행성>, 『베히』, 1909.)

  베르다예프는 인텔리겐치아가 민중에 대한 복무를 숙명적 과업으로 삼음으로써 진리로부터, 이로써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음을 비판한다.

“철학은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인텔리겐치아는 철학에 사욕 없는 태도를 취할 수 없다. 진리를 사회적 변혁과 민중의 이익, 인간의 행복을 위한 무기로 삼음으로써 진리 자체에 사욕 있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객관적 사상이나 보편적 규범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상과 규범은 전제정권과 투쟁하는 것을 방해하며, 민중이라는, 그 행복이 전 우주적 진리와 선보다 더 우위에 있는 대상을 위해 복무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숙명적 특성이다.” (베르댜예프, <철학적 진리와 인텔리겐치아적 진실>, 『베히』, 1909.)

  한편 소비에트 시대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논의에서는 소비에트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체제 내의 긍정적 평가와 선전, 이에 반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에서 인텔리겐치아는 하나의 계급을 이루지 못한 채 노동자 계급과 착취자 계급의 사이에 낀 중간층으로 취급된다. 인텔리겐치아는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때만 의의가 있다. 이러한 긍정적 인텔리겐치아는,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사라져야 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와는 구분되는 노동 인텔리겐치아이다. 스탈린은 소비에트 사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노동자, 농민, 그리고 노동 인텔리겐치아를 들고 여기서 노동 인텔리겐치아의 임무가 작지 않음을 강조한 바 있다(1936년 제 8차 비상 회의).
  반면 솔제니친, 코르메르 등과 같은 반체제 작가들은 소비에트 시기에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유한 속성이 변질되었음을 개탄한다. 솔제니친은 소비에트 시기에 ‘사회적 참회, 민중에 대한 죄책감, 개인적 고행, 희생정신’ 등과 같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고유한 특성이 사라졌음을 지적하며 이 시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인텔리겐치아가 아니므로 새로운 명칭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인텔리겐치아란 말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이제 이 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교육 받은 계층 전체를, 학교 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인텔리겐치아에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 

현재 인텔리겐치아라 경솔하게 사칭되는 모든 교육 받은 계층은 ‘오브라조반시나(먹물들)’이라 불려야 한다.” (솔제니친, 『오브라조반시나』, 1974.)

  이 시기의 인텔리겐치아는 ‘무위도식’, ‘육체적 연약함’, ‘공허한 철학적 사색’과 같은 부정적 속성과 관련하여 논의되곤 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기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논의는 이전 시기만큼의 중요성을 띠지 못하고 다소 주변으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들어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속성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제기된다. 가령 <스테파노프 문화사전>에서는 현대 인텔리겐치아의 고유한 속성으로 ‘불안’과 ‘시에 대한 태도’를 추출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문화에서 거의 하나의 용어로 자리 잡은 개념인 ‘불안’의 특성이야말로 정신적으로 늘 동요하는 지식인의 고유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사전은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한 페도토프가 ‘소비에트 인간’에 대해 언급한 말을 인용하면서, 이처럼 내적으로 평온한 상태에서 외적으로만 끓어오르는 것은 인텔리겐치아의 고유한 속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심장도, 사고도 깊이 동요하지 않는다. 우리 러시아인은 정신적 순례라 부르고 프랑스인들은 inquiétide(‘불안’)이라 부를만한 것이 전혀 없다. 외적으로는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그 뒤에 내적인 평온이 있다.” (페도토프, <러시아와 자유>, 1991.)

  ‘시에 대한 태도’는 최소한 1940~1960년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오쿠드자바, 옙투센코, 보즈네센스키 등과 같은 러시아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낭독하고 이를 듣기 위해 수천의 사람들이 모이는 시 모임이 성행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시탐 역시 ‘시에 대한 태도’를 20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독특한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그의 아내가 쓴 『회상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아마도 서유럽에는 낯설 듯한 하나의 특별한 속성을 지닌다. [...] 오시프 만델시탐은 그 결정적 속성으로 ‘시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들고 있다. 우리의 시는 특별한 소임을 수행한다. 이것은 인간을 깨우고 인간의 의식을 형성한다. 인텔리겐치아가 태동한 이래로 지금껏 전례가 없었던 시에 대한 강한 끌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가치 체계의 소중한 기반이다. 시는 삶을 추동하고 양심과 사고를 깨운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나데즈다 만델시탐, 『회상록』, 1970.)

  ‘시에 대한 태도’를 좀 더 넓은 의미로 ‘문학에 대한 태도’로 확장한다면 이 특성은 세대를 초월하여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를 묶어 주는 속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특히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논의에서 전형적 인텔리겐치아를 말할 때 실제 인물이 아니라 작품 속의 등장인물을 예로 드는 독특한 전통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오브샤니코-쿨리콥스키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역사를 다룬 자신의 저서의 방법론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 저서는, 특히 러시아 문학 작품 속의 자료들을 통해서 본, 19세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심리학에 대한 연구이다. 차츠키, 오네긴, 페초린, 루딘 등, 이른바 ‘사회-심리학적’ 유형들이 가장 전면에 대두된다.” (오브샤니코-쿨리콥스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역사』, 1910-1911.)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문학에 대한 태도는 전통적으로 문학의 소임을 사회적 양심으로 보는 시각의 연장선 상에 있다. 사회적 양심으로서 문학은 기득권을 비판하고 학대 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자신의 소임을 수행한다. 러시아 문학의 특성으로 언급되곤 하는 강한 교훈성과 도덕성 역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문학의 끈끈한 유대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에 대한 정의, 그 시초, 그들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해석 주체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그들을 묶어 주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는 점만은 일반적으로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체제 비판성, 민중에 대한 의무와 죄의식,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소임과 그에 대한 자각 등, 이들 속성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세대적 차이,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는 공통된 속성이며 러시아 사회에서 인텔리겐치아의 소명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지식인을 뜻하는 프랑스어 ‘앵텔렉튀엘 intellectuel[ɛ̃te[εl]lεktɥεl]’의 어원은 정신적 활동에 관여하는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intellectualis이며, 이는 intelligentia(이해, 인식 능력)에서 파생되었다. 러시아어 ‘인텔리겐치아 интеллигенция[intelligentsiya]’의 어원도 라틴어 intelligentia이며 18세기 전반에 라틴어 또는 프랑스어 ‘엥텔리장스intelligence’의 번역어로서 러시아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식인을 뜻하는 용어로는 러시아어 인텔리겐치아가 더 널리 사용된다. 
  프랑스에서 국경과 인종을 넘어 정의를 위해 지식을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지식인’은 드레퓌스 사건 때 탄생했다. 이후 프랑스는 전체주의와 제국주의,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 지식인들이 결집하는 전통이 만들어졌고 특히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주장한 사르트르에 의해 지식인론이 이론적으로 확립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에 기반을 두었던 지식인의 사회 참여 활동은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약화되고 지식인의 위상과 소임에 대한 논의도 많이 퇴색하였지만, 볼테르-에밀 졸라- 사르트르를 통해 근대적 지식인의 개념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 프랑스의 지식인 전통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 필요한 지식인은 무엇인가를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인텔리겐치아가 ‘지식인 계층’의 의미로 개념이 확립되는 것은 19세기이다. 18세기에 활발히 유입된 서유럽의 다양한 사상을 토대로 철학적 관념적 사유가 깊어지는 가운데 데카브리스트 봉기, 그리고 이어지는 니콜라이 1세의 강력한 반동 정책을 경험하면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태동하게 된다. 초기 인텔리겐치아는 독일 관념론에 더 심취하였고 귀족계급이 주를 이루었다면 1860년대에는 프랑스식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되면서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텔리겐치아가 형성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제가 들어서면서 인텔리겐치아는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 인텔리겐치아와,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사라져야 할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로 구분된다.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인텔리겐치아에 관한 논의는 노동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적 기능으로 집약되면서 프랑스적인 지식인의 개념은 다소 주변으로 밀려난다. 20세기 러시아 혁명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는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많은 지식인을 양산하며 ‘인텔리겐치아’라는 용어를 전파시켰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지식인의 상징적 가치는 다르지 않은 듯하다. 프랑스의 엥텔렉튀엘과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모두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비판과 약자의 보호를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사회적 양심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엥텔렉튀엘이 지성의 영역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사회를 위해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고 진실을 밝힐 것인가에 논의의 초점을 둔다면,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는 윤리적, 이데올로기적 영역에 더 기초를 두고 있는 집단이라 말할 수 있다. 
연관 토포스 계몽; 농민; 봉기; 양심; 영혼; 이데올로기; 자유; 자-타; 정의; 진보;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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