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진실
범주명 관념과 가치
토포스명(한글) 진실
토포스명(프랑스) vérité
토포스명(러시아) правда; истина
정의 1. 우리의 인식이 대상의 본질에 더 가까워질수록 더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참, 진실, 사실(임)’이라는 뜻을 지니는 ‘베리테 vérité[veʀite]’는 ‘진리, 진실, 실제, 법’의 의미를 지니는 라틴어 veritas로부터 기원한다. 인식이나 판단의 차원에서 베리테의 반의어는 ‘오류’이며 진술의 차원에서는 ‘거짓’이 그 반의어가 될 것이다. 
  고대어에서 베리테는 신의 영역에 속하는 절대적 ‘진리’의 개념이었으나 점차 이러한 의미에서 멀어져, 어떤 인식이나 판단 혹은 진술이 실제 대상이나 현실과 다르지 않고 그것에 일치하고 상응하는 상태를 일컫게 된다. 즉, 현대어에서 베리테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발화 활동과 관련되며 실제 현실의 올바른 재현 또는 실제 세계에 상응하는 생각을 의미한다. 이처럼 베리테는, 신의 영역에 속하고 신만이 지각할 수 있는 현실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작용에 주목하는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 되기에 이른다. 
  베리테의 이러한 의미적 변화 과정은 서유럽 대륙의 중심 국가였던 프랑스의 역사적 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으로부터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근대적 인식을 획득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결부되어 있다. 주시하다시피, 중세의 서유럽 인들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늙어 병들어 죽기까지의 삶의 모든 매듭들에 마을 신부님이 오셔서 신의 이름으로 확인해 주어야만 실존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에게 진리란, 우리의 오성이 모든 오류를 피하여 찾아가는 참 명제라기보다는 신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규범 혹은 철리(哲理)이자 모든 실존과 가치들의 정신적 울타리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천년 동안 이어진 중세라는 이름의 신의 세계에서 일찍이 ‘교회의 맏딸’이라는 칭호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부여받았던 프랑스가 천상에 늘 드리워져 있던 형이상학적 ‘진리’의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밟아온 전철은 1570년대부터 1870년까지 지속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의 프로테스탄트 대학살, 낭트칙령, 칙령의 폐지, 위대한 고전주의 이성의 수립, 계몽주의 투사들의 투쟁, 혁명 그리고 공화국, 왕정복고, 다시 공화국, 난데없는 제정(帝政), 포위망에 갇혀 쥐를 잡아 연명했던 파리 시민들의 코뮌, 드디어 제 3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구체적이고 실로 사회적인 프랑스의 ‘진실’은 실상 저 본질적인 ‘진리’를 광장으로 이끌어내어 단두대에 넘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토포스였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프라브다 правда[pravda]’는 고대 슬라브어의 어근 ‘*prav-’(‘곧은, 옳은’)에서 파생된 고대 러시아어의 추상명사 ‘프라비다 правьда[prav'da](옳음, 정의, 법, 재판)’로부터 기원한다. 
  ‘이스티나 истина[istina]’는 고대 러시아어 ‘이스터 истъ[istə]’로부터 기원하는데 이스터는 ‘바로 그것’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대명사 *is-to, 혹은 ‘공정한, 양심적인, 정직한’의 의미를 지니는 라틴어 형용사 iūstus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러시아에서 ‘프라브다’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법과 정의와 개념적 관련이 있었다. 만일 고대 러시아어에서 프라브다가 ‘참’이나 ‘진리’의 개념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아주 제한적으로 ‘신이나 그 대리인의 정의와 심판은 곧 진리’라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참’이나 ‘진리’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는 ‘이스티나’였다. 가령, 성서와 같은 고전 그리스어 텍스트의 번역에서 ‘디카이오쉬네’(δικαοσύνῃ 옳음, 정의)와 ‘디카이오마’(δικαίωμα 심판, 재판, 법령)는 프라브다로 번역되는 반면, ‘알레쎄이아’(ἀλήθεια ‘참, 진리’)는 이스티나로 번역되었다. 이처럼 프라브다의 의미 중심에는 하늘의 심판권과 심판의 공정성을 염두에 둔 정당한 신의 심판이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프라브다는 ‘신의 진리’ 즉, 신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대 러시아에서 나타난 프라브다의 이러한 개념화는 근대로 이행해가면서, 불변성, 절대성, 영원성의 가치 체계가 신(神) 중심에서 자연과 인간 중심으로 옮겨감에 따라 인간 세계에 속하는 ‘참’과 ‘옮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영원불변의 진리치의 기준이 ‘신의 심판(신의 프라브다)’, ‘하늘의 법(하늘로부터의 프라브다)’에서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참(땅으로부터의 이스티나)’으로 중심을 옮기는 가치 체계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그 결과, 근•현대의 러시아어에서는 고전 형이상학의 삼위일체적인 최상의 가치인 ‘진(眞)•선(善)•미(美)’ 가운데 ‘진(眞)’이라는 가치 개념을 표현하는 두 개의 상이한 단어, 즉 프라브다와 이스티나가 공존하면서 부분적으로는 동의적이지만 그러나 미묘하게도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범주적 지향성을 갖게 된다. 이 때 프라브다는, 초월적인 진리의 개념을 표현하는 이스티나와는 달리, 인간적인 진실의 개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보다 러시아적인 ‘진’의 가치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프라브다는 주어진 대상에 대한 우리 각자의 인식이 구체적으로 혹은 실체적으로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즉 우리 각자가 경험적으로 올바른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실제 대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정당하게 되며, 이 ‘정당성’은 객관성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보다는 대상에 대한 보다 더 많은 ‘이해심’을 동반하게 됨에 따라 보다 더 옳은 것이 됨을 함의한다. 
  이와 같이 프라브다의 개념 안에는 인식론적 가치와 실천-윤리적 가치가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프라브다의 상대주의적 특성이 나온다. 즉 절대적 참으로서 유일성을 특징으로 하는 이스티나와는 달리 프라브다는 ‘나’의 프라브다와 ‘너’의 프라브다가 다를 수 있으며 다수의 프라브다가 서로 경쟁하는 상대적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프라브다에 내재한 이러한 상대성만을 과도하게 추구할 경우, 즉 자신의 프라브다만을 독단적으로 내세우는 경우 프라브다의 정당성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때 프라브다의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이것의 또 다른 근원적 속성이 바로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심인 것이다. 이처럼 ‘진(眞)’의 가치를 추구하는 러시아적 인식으로서 진실의 토포스 안에는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밑바탕으로 하여 인간적 ‘참’과 ‘정당성’의 개념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토포스로서 베리테와 관련하여 근현대 프랑스에서 생산된 수많은 담론들 가운데 의미 있는 것들 중 하나는 베리테의 프랑스적 특성을 지적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진술일 것이다. 베리테를 인격화하는 일을 삼가야할 것이다. 즉, 그걸 무슨 특정한 객관적인 실체로 여겨서는 안 된다. 베리테는 하나의 ‘성질’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프랑스의 베리테는 어떤 초월적 진리, 절대적 진리 혹은 실제의 현실 자체가 아니라, 실제 세계와의 일치, 상응성을 지시하는 하나의 성질인 것이다. 
  실제 세계와의 일치라는 베리테의 이러한 의미는 1960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영화 운동을 ‘시네마 베리테 Cinéma vérité’라고 부른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영화 운동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말과 자연스러운 행동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을 지향한다. 즉 인물, 순간, 사건을 재배열하지 않고 카메라로 포착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영화가 예술적 장르를 벗어나 지나치게 르포르타주를 지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영화 운동으로서 기록 영화 제작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네마 베리테의 표본이라고도 불리는 <어떤 여름의 기록>에서 감독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은 파리 젊은이들의 일상과 그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개념을 조사하기 위해 거리에서 젊은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이들의 대답을 카메라에 그대로 담는다. 두 감독은 몇 달간에 걸쳐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삶의 변화를 추적하여 보여준다. 
  베리테의 의미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절대적 진리의 개념에서 인간의 기능과 작용을 중시하는 개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의 목적은 단순했다. ‘오류 없는 앎’을 인간의 오성이 확보할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의 수립이 그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우선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간주하는 것, 일체의 실재를 부인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 아무리 보아도 ‘거짓’일 수 없는 것, 분명히 실재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는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뭔가를 ‘거짓’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는 ‘나’였다. 

“나는 지금 뭔가 의심을 하고 있다, 이 의심하고 있는 주체가 감지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있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 『방법서설』, 1637)

  이성이, 혹은 오성이 하나의 ‘기능’이듯 프랑스의 베리테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기능이다.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기 위한 인식의 기능이다. 물론, 현실의 모순의 절박함에 뒤쫓길 때 가령, 에밀 졸라가 『베리테』(1902)라는 소설로써 베리테를 정의와 진리로 향하게 만든 경우도 있었고, 2차 대전 전 프랑스 공산당이 <프라브다>를 본받아 <라 베리테>라는 기관지를 발행한 적도 있으나, 프랑스의 베리테는 어쩔 수 없이, <앙팡 테리블>의 장 콕토가 보여주는 저 가볍고도 날렵한 일상성의, 개인성의, 자유의 토포스 안에서 기호작용하고 있다. 

“난 진실을 말하고 싶다. 난 진실을 사랑한다. 근데 그것은 날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 이건 진짜 사실인데, 진실은 날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진실은 낯빛이 싹 달라지면서 내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나는 거짓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모두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거짓말쟁이>, 장 콕토의 일인극)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고대 러시아 시기에 프라브다가 갖고 있던 의미적 특징은 11~12세기의 법규와 판례를 담은 러시아 최초의 법전의 명칭이 <루스카야 프라브다>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여기에서 프라브다는 ‘정당한 신의 심판’을 상징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슬라브 국가들의 법규와 판례 등을 기초로 하는 <루스카야 프라브다>는 이후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리투아니아 법전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법전의 명칭으로 프라브다가 종종 사용된 것은 프라브다의 초기 개념인 ‘법, 권리, 도덕’의 의미적 연장선에서 발현된 것이다. 러시아어 표현에 “프라브다를 직시하다”라는 표현이 ‘법 처리를 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프라브다에 따라 판단하다”라는 표현이 ‘법에 따라 재판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것 또한 여기서 프라브다가 법의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프라브다는 애초의 의미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인간과 세상의 구체적인 현상에 보다 근접하는 개념으로 자리매김되면서 프라브다의 개별성과 상대성, 다수성이 부각되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예컨대, “누구에게나 각자 자신의 프라브다가 있는 법이다”와 같은 속담이나 “어제의 프라브다들로부터”와 같은 츠베타예바의 시구(<그러나 둘이서..>, 1922)는 프라브다의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은 용례들에서 프라브다는 바로 우리말의 ‘진실’에 상응하는데, 그것은 듣기에 거북하고 인정하기 힘든 것일 수 있지만 (가령, “쓰디쓴 프라브다”), 아무리 토로하기 힘든 뼈아픈 진실일지라도 적나라하게 밝혀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령, “프라브다를 적나라하게 밝히다”). 바로 프라브다의 이러한 성격이야말로 러시아의 수많은 신문과 잡지의 명칭에 이것이 선호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현대 러시아에도 <프라브다>,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모스프라브다>등과 같은 신문이나 잡지명을 흔히 접할 수 있는데 이는 프라브다라는 단어에 의해 ‘진실’의 추구와 그것의 토로, 폭로로의 지향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프라브다로 표현되는 러시아적 진실의 토포스에 담겨 있는 러시아 고유의 민족의식은 프라브다가 정당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때 더욱 잘 드러난다. 가령, “농노제의 비(非)프라브다(=부당성)”, “혁명의 프라브다(=정당성)”과 같은 표현들은 프라브다가 정당성에 대한 평가에 토대를 둔 개념임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프라브다는 거기에 내재된 개념적 복합 중에서 정당성만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양상으로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운동들의 핵심적 개념으로 대두된다. 러시아 사상에 대한 저서나 구호, 선동 등에 “민족적 프라브다”, “프라브다의 추구”, “사회적 프라브다”, “프라브다의 승리”와 같은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게 된다. 1910년 트로츠키가 비엔나에서 창간한 잡지 명칭을 <프라브다>로 한 것이나, 1912년 레닌에 의해 페트로그라드에서 발행되기 시작하여 볼셰비키의 공식 기관지가 된 신문의 명칭도 <프라브다>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적군(赤軍)의 ‘붉은 별’도 바로 프라브다의 빛을 상징한다는 사실 등에서도 그 당시의 프라브다가 단순히 ‘진실’의 추구를 뛰어 넘어 ‘정당성’을 근거로 사회 선동과 구호의 역할까지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프라브다로서의 러시아적 진실의 토포스, 그 독특한 특성은 러시아 문학 작품이나 작가들의 사상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러시아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 목적을 프라브다에 기여하는 것에서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가령, 투르게네프는 <이스티나와 프라브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티나로 최상의 행복을 성취할 수는 없지만 프라브다로는 이것이 가능하다. 프라브다는 인간의 일, 우리의 세상사인 것이다 […] 프라브다와 정의여! 프라브다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 (투르게네프, <이스티나와 프라브다>, 1882)

  도스토옙스키도 프라브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언급하면서 러시아인은 오로지 프라브다만이 필요한 사람들이며, 가장 우선적으로 프라브다를 추구하며 이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20세기 초에 러시아 사상가 베르댜예프는 프라브다를 향한 러시아인의, 특히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이처럼 과도한 기울어짐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철학적 진리 혹은 초월적 진리, 즉 이스티나 그 자체가 갖는 인식적으로 독자적인 가치도 중요함을 역설한다.
  프라브다를 추구한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톨스토이를 들 수 있다. 그는 『5월의 세바스토폴』이란 작품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맺고 있다. 

“내가 온 영혼을 다해 사랑하고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재현하고자 했으며 항상 훌륭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내 작품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바로 프라브다이다”. (톨스토이, 『5월의 세바스토폴』, 1855)

  베르댜예프는 톨스토이가 항상 자연에 근접한 삶의 프라브다를, 노동의 프라브다를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 위대한 작가에게 있어 프라브다는 자연적․무의식적인 것으로서, 문명적․의식적인 것의 허위와 대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교문화적 설명   ‘진(眞)’이라는 가치 개념에 대응하는 단어가 프랑스어에서는 베리테 하나이지만 러시아어에서는 프라브다와 이스티나로 구분된다는 점은 이 개념에 대한 러시아적 인식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티나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초월적,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프라브다는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심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진실’와 ‘정당성’이 결합된 상대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베리테는 초월적, 객관적 진리로서의 이스티나보다는 인간적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프라브다의 개념과 더 유사하다. 베리테와 프라브다는 둘 다 인간이 배재된 채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작용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베리테와 프라브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도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프라브다에 내재된 이해심과 정당성의 특성이 베리테에는 부재하거나 최소한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19세기 프랑스의 러시아 문학 연구자였던 드 보귀에는 러시아 문학작품에 ‘진리’와 ‘정당성’라는 두 방향의 모티브가 있으며, 이는 서구적, 프랑스적 이해에서는 두 가지 지향이지만 러시아적 인식에서는 프라브다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 융화되어 있는 단일한 지향임을 지적한다. 이처럼 러시아 사회에서 프라브다는 특히 정의의 구현과 맞물려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고 이로써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베리테에서는 이러한 이념적, 윤리적, 실천적 지향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프랑스의 베리테 개념에 사회적 차원의 의미가 빈약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진실을 추구하고 그것의 사회적 실현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러시아의 프라브다와 내용적으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에밀 졸라의 경우 『베리테』라는 제목의 사회적 소설을 시도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드레퓌스사건에서 적극적인 진실의 옹호라는 사회적 참여 활동으로 이어진다. 또한 러시아의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브다>를 본떠서 프랑스에서는 <베리테>라는 좌파 단체의 기관지도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에게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 앞에서 수동적 역할만을 하게 되는 절대적인 것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직접 구현하고 실천하는 것으로서 진실이라는 점에서 두 개념은 상호 수렴될 여지가 있다. 
연관 토포스 거짓; 도덕; 이성; 정의(정당성)
참고자료(프랑스) René Descartes, Discours de la méthode(1637), O.C. III, Gallimard, 2009.
René Descartes, La Recherche de la Vérité par la Lumière naturelle(1701),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2010.
Spinoza, Pensées métaphysiques (1663), trad. R. Caillois, Gallimard,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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