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토포스명(프랑스) maison
토포스명(러시아) дом
정의 1. 집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일수록 가족이고 나 자신이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로 집을 가리키는 단어 ‘메종 maison [mεzɔ̃]’은 ‘머물러있다’를 뜻하는 라틴어 manere에서 유래되었다. 어원적으로 집은 머물러있는,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장소, 즉 정착지이다. 프랑스어 메종은 지붕과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건축물과,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가정을 동시에 지시한다. 건축물을 house로, 가정은 home으로 분리시켜 사용하는 영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어에서 집을 의미하는 어휘들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는 듯하다. 집은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단위인 가족이 거주하는 주택으로서, 공적 공간인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확보하는 사적인 공간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장소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집을 의미하는 oikos는 무엇보다 가정 경제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생애』(기원전 8세기말)에서 “특히 집과 일을 할 두 마리의 소, 그리고 소들을 쫓아다닐 여인 한 명이 필요하다. 그 여인은 노예가 아니라 아내이다.”라는 말로 집을 삶의 첫 번째 조건으로 삼았다. 경제économie는 어원적으로 관리를 뜻하는 nomia와 집을 뜻하는 oikos를 결합한 용어이다. 집의 주된 기능은 가족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생필품을 확보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집을 가장 기초적이고 경제적으로 자율적인 공동체로 정의한다.

“일상을 위해 자연적으로 구성된 공동체는 가족이다. […] 먼저 집의 관리(oikonomia)에 대해 말해야 한다. […] 이 관리의 여러 부분들은 가정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과 정확히 일치한다. 완전한 가족은 노예와 자유인들로 구성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355년경) 

  여기서 oikos는 같은 집에 거주하고 동일한 경제적 공동체에 속한 개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가정의 의미를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공동체는 세 유형의 관계에 따라 조직된다. 그것은 부자관계, 부부관계,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가장으로서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에 대해 강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이 사적인 공간은 자유 시민들의 평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도시의 공적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다. 그리고 고대에는 도시가 중요성이나 가치 면에서 가정에 우선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공 영역과 분리된 사적 공간의 구축이라는 측면과, 위계질서에 따른 가족 개인들 사이의 관계 조직이라는 측면을 가정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지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이후 프랑스가 집에 대해 갖는 모든 개념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집은 인간의 생물학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모든 필요와 욕구에 상응하는 인생의 모든 요소들에 상응한다. 집의 경제적, 사회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장 자크 루소처럼 인간이 순전히 생존의 필요에 의해 다시 말해 악천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거나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피신하려는 목적으로 집을 지었고, 그것이 가족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곧 나무 아래서 잠들거나 동굴로 피신하기를 그만 두고 인간은 도끼라 할 만한 깨진 단단한 돌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나무를 자르고, 땅을 파내고, 오두막집을 지었고 거기에 점토와 진흙을 바를 생각을 했다. 바로 이때가 건물을 짓고 가족을 구분하고 재산이란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최초의 혁명의 시기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부터 분쟁과 싸움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 기원론』, 1755)
 
  루소의 견해에 따르면 최초로 인간의 감정이 발달하게 된 계기는 한 집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들이 모여 살게 된 바로 이 새로운 상황이었다. 함께 살게 되면서 인간에게 부부애와 부모애라는 사랑의 감정이 생겨났고 그것이 소유의 개념과 연계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족과 집의 긴밀한 연계는 분명한 듯하다. (Rey, A. dir. Le dictionnaire culturel en langue française, 참조) 
  한편 사회와 분리된 개인의 내밀한 공간으로서의 집은 담장 내지 울타리라는 건축 요소에 의해 명백히 표현된다. 유럽이 중세 시대에 영위하던 기독교적 공동체 생활에서는 사생활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었다. 따라서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관행들이 용납되지 않았으며, 한 장소에 모여 사는 대가족과 공동체의 종교적 의례 그리고 개인을 다른 사람과 공적으로 얽어매는 여타 관계에 따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복잡한 조직체계와 의무로 뒤엉켜 있었다. 아이의 출산까지 관장했던 사제에게 모든 구성원이 의무적으로 해야 했던 고해성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몸과 마음의 투명성을 내세워 개인의 비밀과 개인적인 행위가 결코 용납되지 않았고 공동체는 개인의 모든 생활을 감시했다. 
  철저히 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개인의 생활과 관행 및 그것을 떠받치던 이데올로기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에 여전히 공동체, 도시, 촌락 등이 규정하는 행위 규범을 통해 개인을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차츰 인간에 대한 종교외적 관심이 확산되고 개인의 자아에 대한 상상 영역이 넓어지면서 내밀성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집 공간에 밀폐된 정원, 침실, 침대 옆 작은 밀실cabinet, 규방, 기도실, 서재 등 오직 한 개인에게만 속하는 공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공동으로 생활한 최초의 주거 형태인 거실은 벽난로나 화로뿐만 아니라 조리 도구, 식탁, 의자, 수납을 위한 큰 통, 식료품 가방 그리고 침구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이 한데 널려 있었다. 모든 구성원이 거실이라는 한 공간에서 기거했고, 밭이나 퇴비 더미에서 행해지는 생리 작용을 제외하고 모든 행위가 거실에서 이루어졌다. 은둔과 내밀한 생활을 위한 공간으로서 유일하게 거실과 분리되어 문이 달려있던 공간 즉 침실이 생겨난 것은 16세기경이다. 가장은 그곳에 은화, 양탄자, 의류, 보석 등 귀중품을 보관했고, 그 방의 열쇠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책과 가계부, 그리고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문서들을 별도로 보관했고 그 또한 열쇠로 채워 아내가 볼 수 없게 한 서재도 등장했다. 
  16세기에 프랑스의 성과 도시의 대저택에서 서재는 흔히 탑이나 거실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했다고 한다. 가장의 전유공간이었던 서재는 사업이나 정치에 관련된 업무를 보거나 문학과 학문에 몰두하고 종교적 사색을 하는 경건하고도 고독한 장소였다. 보석이나 귀중품을 넣어두는 장식장 또는 열쇠로 잠글 수 있는 작은 방을 가리키는 카비네cabinet 또한 집의 주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적인 공간이었다. 가령 17세기 베르사유 궁을 설계하기 전에 보 르 비콩트 성을 지은 건축가 르 보와 실내 장식가인 르 브룅은 성의 주인인 푸케가 기거하며 거울을 보고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카비네를 가장 공들여 꾸미고 집안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 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 참조)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주인공 쥘리앵이 왕당파인 파리의 대귀족 라몰 후작 댁에서 처음 본 라몰 후작의 서재는 그곳이 후작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활동에 대한 구상이 이루어지는 집안에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은밀한 공간임을 잘 보여준다.

“후작의 서재에 당도하기까지 두 사람이 가로지른 2층의 거실들을, 오 독자여, 만약 당신이 보았다면, 그곳이 으리으리한 만큼이나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 이윽고 이 호사스러운 저택에서 가장 우중충한 방으로 들어섰다. 밝은 대낮인데도 햇살이 겨우 기어들고 있었다. (...)
잠시 후 쥘리앵은 화려한 서재에 혼자 있게 되었다. 행복한 한때였다. 들떠 있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일을 끝낸 후 그는 과감히 책들 가까이로 다가갔다. 볼테르 전집의 어떤 판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 누가 갑자기 들어오면 낭패다 싶어 달려가서 서재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고는 80권의 책을 설레는 심정으로 일일이 펼쳐 보았다. 런던 제일의 제본가가 공들여 제작한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었다.” (스탕달, 『적과 흑』, 1830) 

침실과 서재, 카비네는 집이 개인의 자유와 가족 간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선택된 공간으로서, 집을 울타리 너머 사회생활의 억압과 위계에 따른 사회규율 그리고 온갖 엄격한 신분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게 만들었다. 서재는 19세기까지도 가장의 도덕적, 종교적 사색과 정치적, 사회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경건하고 고독한 공간으로 유지되었다. 반면 카비네는 18세기로 넘어오면서 리베르티나주(자유연애)라 불리는 귀족들의 문란한 성풍속이 만연해지자 더욱 세속화되어 연애를 위한 사적 공간이 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집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돔 дом[dom]’은 ‘거주지, 가족’을 의미하는 고대 러시아어 ‘домъ’에서 파생되었다. 고대 러시아어 ‘домъ’은 ‘한 가족이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domus’, ‘집’을 의미하는 고대 인도어 ‘dáma’, ‘건축, 건설’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는 ‘domos’등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돔’이라는 단어는 러시아에서 11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어 ‘메종’과 유사하게 ‘주거를 위한 건물’이라는 의미와 ‘가정’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키예프 루시 시절 모든 가옥은 목재를 재료로 하였다. 고대와 중세 러시아에 여러 형태의 목재 가옥들이 등장하는데 가장 기본적이며 오래된 형태의 민중 가옥은 ‘클레티’이다. ‘격자, 무늬, 세포’등을 뜻하는 러시아어 ‘클레트카 клетка’에서 유래된 ‘클레티 клеть’는 10~12개의 커다란 통나무를 쌓아올려 만든 작은 규모의 가옥이며 주로 창문 없이 방 하나로 이루어진 매우 단순한 형태의 민중가옥이다. 
  9~10세기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클레티는 이후 러시아 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가옥인 ‘이즈바 изба’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이즈바와 가장 큰 차이점은 내부에 난방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이즈바의 등장 이후 클레티는 거주 공간보다는 주로 식량 저장고로 사용되었고, 그 의미 역시 ‘창고, 헛간, 광’으로 변화되었다. 난방시설조차 변변치 않았던 열악한 클레티의 삶에 관해 20세기 초 시인 샤샤 쵸르느이는 『후손들』(1908)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클레티에 누워서 다음과 같이 자주 말했지.
‘어휴, 형제들이여, 우리 자식들은 우리보다 편안한 삶을 살아야 될 텐데…….’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도 클레티에 누워 힘든 시간 속에서 한숨 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 시대 이후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야 될 텐데…….’ ”
(샤샤 쵸르니이, 『후손들』, 1908)

  러시아 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가옥은 ‘이즈바’이다. ‘따뜻한 장소, 목욕탕’을 의미하는 고대 독일어 ‘*stubа’를 차용한 교회 슬라브어 ‘*jьstъba’에서 유래된 ‘이즈바’는 어원에서도 나타나듯이, 난방시설을 갖춘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러시아 난방 시설로 잘 알려진 ‘페치’가 있는 클레티가 이즈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즈바는 클레티와 달리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이나 창문이 있다는 것이다. 
  이즈바는 페치가 사용되기 시작한 13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러시아 민중들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즈바는 종종 민담이나 전설 등에서도 등장하는데, 슬라브족 마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바바 야가’는 닭다리 모양의 다리가 달린 이즈바에 살며, 고대 영웅 서사시 ‘브일리나’의 주인공 일리야 무로메츠 역시 이즈바에서 생활하였다.

  이즈바는 주로 앞뒤로 경사진 초가지붕을 덮고 전면에 창을 낸 통나무 집 형태로 만들어졌다. 당시 러시아에는 돌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즈바는 소나무나 가문비나무를 사용해 지었다. 전형적인 이즈바는 주로 큰 방 하나로 이루어져있다. 방 가운데는 주로 식탁이 있으며, 벽면을 따라 선반을 설치해 물건을 수납하였다. 이즈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방시설인 ‘페치’이며 페치는 벽돌이나 진흙으로 지었고, 그 무게 때문에 집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따로 기단을 세웠다. 페치 기단 내부에는 식기와 조리 도구를 보관했다.
  토포스로서 이즈바의 매우 중요한 점은 슬라브 민간신앙과 정교신앙의 공존이라는 러시아인들의 이중적인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방과 요리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페치이다. 따라서 민중들은 페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으며 페치 내부에는 슬라브 민간 신앙에서 말하는 가정의 평화와 풍요를 지켜주는 정령 ‘도모보이’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즈바를 지을 때 민중들은 페치 옆에 빵을 두어 ‘도모보이’를 불러들이는 의식을 반드시 치르곤 하였다. 
  그런데 이즈바에서 페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러시아 정교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콘(성상화)을 모셔두는 장소인 ‘크라스느이 우골’이다. 우리말로 ‘아름다운 구석’ 혹은 ‘성스러운 구석’ (‘크라스느이 우골’의 러시아 원어는 ‘красный угол’인데, 현재 ‘붉은색’을 의미하는 ‘красный’ 는 중세에는 ‘아름다운, 성스러운’의 의미를 가졌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장소는 현대 러시아인들의 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크라스느이 우골’은 보통 이즈바 내부에서 문 입구와 반대되는 동쪽 부분, 그리고 페치와 대각선상에 있는 구석에 위치한다. 그것은 이 장소가 이즈바에서 가장 밝은 장소이며 방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 항상 이콘에 기도를 한다. 
  이즈바가 중세 러시아 민중들의 주된 거주 공간이라면, 중세의 귀족이나 공후들은 ‘호로므이 хоромы (건축물, 요새 등을 의미하는 고대 슬라브어 ‘*хоrmъ’에서 유래)’라는 가옥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공후나 귀족들을 위한 목조 대저택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호로므이’는 몇 개의 독립적인 공간으로 구성된 복합적인 가옥이었다. 호로므이는 세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는 거주 공간으로 이층에는 공후들의 방이, 아래층에는 하인들의 살림방이 있었다. 두 번째 부분은 손님 접대와 주연 등을 위한 홀이며, 세 번째는 마구간, 창고, 무기고와 같은 저장 공간이다.


 
  호로므이는 목재로 지어졌는데 이후 석재를 사용하여 보다 고급스럽게 지은 공후들의 주택을 ‘팔라트 палат’라고 불렀다. 팔라트는 그 재료가 석재라는 것 외에도 ‘테렘’이라 불리는 특별한 공간으로 인해 호르므이와 구별된다. 팔라트 3층에 위치하는 테렘은 주로 부인들을 위한 장소로서 이후에 다락방의 의미를 가진 ‘체르다크’와 ‘테라스’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개인의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으로 여겨지는 규방boudoir은 18세기에 등장했다. 1762년 아카데미 사전은 규방을 “혼자 있고 싶을 때 들어가 있는 작은 카비네”로 정의한다. 1771년 트레부 사전은 “작은 방, 거주하는 방 옆에 붙어 있는 대단히 좁은 카비네, 이렇게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혼자 토라져 있기 위해서 그 곳에 틀어박히곤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18세기에 유행처럼 퍼진 비밀스러운 관계들의 은신처 “프티트 메종” 또한 이러한 경향을 확인시켜 준다. 장 프랑수아 드 바스티드의 소설 『라 프티트 메종』(1763)에 의하면, 한적한 전원에 지어진 프티트 메종에는 아름다운 정원, 진기한 동물과 가축들이 사는 동물원, 마구간과 조마장, 맛있는 식재료들이 가득 쌓인 창고가 있다. 그리고 그 집에 있는 규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방은 규방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는 여자에게 방의 이름을 묻을 필요가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마음과 정신이 그곳에서 일치가 되기 때문이다. 사방의 벽에 거울이 붙어 있고 이들이 맞물리는 부분은 인조 나무들로 감추어져 있었다. 놀랄 만한 솜씨로 나뭇잎들이 달려 있었고 울창했으며 다듬어져 있었다. (…) 거기에 달린 촛대의 초들은 거울에 비추어져 빛을 조절하는 효과를 냈고, 방구석까지 이 투명체들 위에 베일이 두텁게 또는 얇게 펼쳐내도록 공을 들였다. (장 프랑수아 드 바스티드, 『라 프티트 메종』, 1763) 

  18세기에 유행했던 리베르티나주(자유연애) 소설들은 침실 옆 작은 방이나 이 규방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연애행각을 공공연히 소재로 삼았다. (마르키 드 사드, 『규방철학』, 이충훈 역, 「서문」에서 재인용 및 참조) 
  이처럼 18세기 프랑스 귀족문화에서 지극히 사적인 개인만의 공간이 유난히 확산된 이유로는, 루이 14세 시대에 절대왕정이 확립되고 권력이 강화되면서 개인에 대한 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심해진 것을 들 수 있다. 감시와 통제의 수단으로 귀족들의 사적인 일상생활이 왕실의 예법과 격식에 맞추어 철저히 의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사생활이 공권력에 종속되어 체계화되고 격식에 맞추어짐에 따라 감시의 눈길을 피해 개인의 내면을 보호하고 사생활을 방어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면서 사적 영역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 참조) 
  절대 권력이 확립되면 가정에서도 강한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가 강화되기 마련이다.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은 가장의 지배 아래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는 가족을 사회 질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조직으로 간주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더욱 강화했다. 사회적 신분서열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정은 가장을 중심으로 지배와 복종, 의무가 강압적으로 부과되는 공간이 되었다. 세습재산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가장의 엄격한 권위라는 강력한 응집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루이 14세 시기에 허용된, 아버지나 남편이 당국으로부터 봉인장을 발부 받아 품행이 부실한 딸이나 아내를 재판 없이 임의로 감옥이나 수녀원에 집어넣을 수 있게 한 가족 봉인장제도는 가장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한 대표적인 제도이다. 169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에서 가족은 “똑같은 우두머리를 모시고 같은 집에서 사는 모든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서울대 불어권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참조) 
  루이 14세의 절대왕정은 이러한 가부장제의 연장이었기 때문에 왕의 절대권위와 엄격한 규제에 종속되어 있던 귀족들은 거대한 성과 영지를 소유했지만 사생활이 전혀 없었다. 규방이나 프티트 메종, 울타리로 외부의 시선을 막은 작은 정원의 발달은 공적인 생활의 지나친 개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적 공간을 집 안에 확보하려는 심리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건축양식이 그러한 심리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당시 건축의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집안의 곳곳에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는 점이다. 미로로 구성된 아파트의 두 층은 헝겊으로 가려진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평형추에 달린 기계가 그 사이를 이동한다. 각 층마다 비밀 중이층이 마련되어 있는데, 널빤지를 타고 그 곳을 통해 원하는 방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또한 집안을 책임지는 사람이 한 눈에 집안을 살펴볼 수 있도록 두 층 사이의 중이층에 자그마한 밀실이 마련되어 있는 식이다. (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에서 재인용 및 참조)
  그러나 평민들의 집의 개념은 완전히 달랐다. 특별한 거주지 없이 거리생활을 하거나 겨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허술한 공간에서 한데 뒤엉켜 온 가족이 살아가던 평민들의 처지에서 집은 먹고 자는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공간이었을 뿐, 귀족들과 다른 의미에서, 그들의 사생활은 공공장소에서 개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가령 “툴루즈의 외곽 지역에 위치한 3층짜리 가옥에서는 16가구가 방을 한 칸씩 차지하고 함께 살았는데, 비좁은 공간과 편의 시설의 부족으로 여성들의 경우, 빨래터나 분수대, 빵 굽는 화덕, 또는 물레방앗간 같은 공공장소에서 공동생활”(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을 영위했다. 사적인 행위들이 집과 안마당, 정원, 계단 등 집에 딸린 부속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19세기 이후 도시 주거환경이 개량되고 법적 규제가 더욱 강화되면서부터이다. 
  한편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의 집에서 아버지가 사회의 공적 영역과 가정의 연계를 상징하는 존재라면, 전통적으로 자녀의 양육과 가족의 필수적인 일상이 이루어지고 그것의 관리를 주관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집과 더욱 강하고 친밀하게 연계되었다. 가장인 남편의 권위 아래 있었지만 자녀뿐 아니라 하인들과 손님, 방문객에 이르기까지 집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돌보고 지휘하며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안주인의 권한은 상당했다. 딸들을 엄격하게 교육시키고 정서를 함양시키는 어머니,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들이 불편하지 않게 세심하게 돌보는 안주인의 역할은 18~19세기에 출간된 많은 문학 작품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백과전서』 집필에 참여한 돌바크 남작(1723~1789)의 장모 엔느 부인의 성에 매년 초대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디드로는, “어떤 요리에 관심을 보이면 다음날 그 요리가 제공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매사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접받았다.”- 『사생활의 역사』에서 재인용)라며 그녀에 대한 찬사를 표했다.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완벽한 안주인의 모습은 『신 엘로이즈』(장 자크 루소, 1761)에 등장하는 쥘리 볼마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볼마르 부부와 자녀들, 하인들이 거주하는 클라랑의 대저택의 모습은 그녀의 솜씨로 완벽하게 관리되어 행복과 평안과 안락함이 구현된 가정을 상징한다. 

“밀로르 경, 질서와 평화와 순수함이 감돌고, 인간의 참된 운명에 부합하는 모든 것이 호화롭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소박하고 잘 정돈된 집의 모습은 얼마나 유쾌하고 감동적인 광경인가요? 들판, 은둔, 휴식, 계절, 멀리 눈에 들어오는 방대한 호수, 산들의 야생적인 모습 (…) 나는 여기서 제 취향에 맞는 생활을 영위하고, 제 마음에 드는 사회를 발견합니다.” (장 자크 루소, 『신 엘로이즈』, 1761)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더욱 엄격하게 구분된다. 남성은 집밖의 주인으로 여성은 집안의 관리인으로 보는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가장과 주부의 역할은 더욱 강하게 규제되고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여 1791년의 형법은 주택의 불가침권과 개인의 사적인 권리를 선언했다. 
  혁명에 뒤이은 19세기에는 혁명 후 혼란한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가정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이는 도시화, 산업화, 생활의 합리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주의가 두드러지고 그에 따라 부부와 자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부르주아적 가정 이데올로기가 확산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18세기 이후 유포된 남녀의 영역분리 이데올로기, 핵가족을 단위로 새롭게 강화된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경제생활과 자녀양육에서의 확실한 역할분담이 강조되었다. 19세기 이후 새로운 가정의 모델을 만들어낸 것은 부르주아 계층이다. 이는 그들의 생활양식을 모방하려 한 노동계층에게로 전파되면서 도시에서 지배적인 집의 이미지로 자리 잡는다. 이런 상황에서 거친 노동계층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모범적인 주부의 덕목과 권위적인 가장의 덕목이 강조되었다. 자본주의의 진행이 빨랐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들의 날개 아래 육아실에서 정원에 이르기까지 부드러운 손길로 집안을 관리하는 ‘집안의 천사’의 이미지가 대표적인 상징일 것이다.(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 참조)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전체에 빠르게 전파된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는 비시 정부(1940~1944)가 1941년 공식적으로 달력에 기념일로 표기한 ‘어머니의 날’을 제정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여성의 헌신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꾸려지는 훌륭한 가족을 국가의 초석으로 삼은 비시 정부는 주부를 미덕의 모델로 추켜세웠다. 
  19세기 내내 혁명 이후 정치적, 법적, 사회적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프랑스에서 ‘자연적 공동체’인 가족은 개인의 행복과 공공선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본질적인 요소로 간주되었다. 절대적 가부장제만이 문란해진 풍속을 바로잡고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믿은 전통주의자이든, 공화주의자이든, 또는 자유주의자이든 가정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지만 자연적 관계는 긴밀하게 한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을 분산시키지만 이와 동시에 친족들을 가깝게 만든다.”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1835~1840)

“가정은 혁명이 우리에게서 결코 뺏을 수 없는 유일한 장소이고 그곳의 즐거움은 유일한 행복이다.” (1849, 신문기사, 『사생활의 역사』에서 재인용)

“가족은 풍습을 요구하며 국가는 법을 요구합니다. 공적 권한의 자연적 요소인 가정의 권한을 강화시키십시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 사이에 완전한 의존 관계를 확립시키십시오. 그것은 민중의 변함없는 복종을 보장해줄 것입니다.”(루이 드 보날드, 1815년 12월 26일 하원 ‘이혼폐지를 위한 연설’, 『사생활의 역사』에서 재인용)

  여성의 해방과 가족 내 평등의 문제를 연계하여 가족의 근대화를 주장한 사회주의자들도 일부일처제 결혼을 토대로 한 가족의 중요성은 인정했다. 그러나 아들이 ‘부드러운 독재자’라 부른 공화주의자 빅토르 위고의 부인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이 집이라는 성소에서 신처럼 군림하는 가부장제에 내포된 권위주의적 지배 체계에 대한 반감과 비판의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당신 덕분에 존재하게 된 가족이 당신의 영예뿐 아니라 당신의 이미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속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 당신에게 복종하겠어요. 하지만 난 완전한 노예가 될 수는 없어요. 각자 자기 자신에게 자유를 부여해야 하는 상황이 있답니다.” (빅토르 위고의 부인, 1857년 편지, 『사생활의 역사』에서 재인용)

  그러나 19세기 이후로 훌륭한 가족은 국가의 초석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진 것은 분명하다 

“가족의 사랑, 수많은 모성이 합류하여 형성되는 조국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감정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쥘 시몽, 『의무』, 1878) 

  또한 가족은 하나의 이름, 하나의 핏줄, 물려받아 전해 내려오는 물질적, 상징적 유산(“아버지는 나를 하나의 개인이 아닌 가계를 이어나갈 아들로서 사랑하셨다.”(스탕달,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 1890)이고 시민 생활의 기본 형태로서, 자본주의를 위한 본원적 축적과 관리를 위한 탁월한 수단이기도 했다. 

“가족 정신과 사생활의 개념은 초기의 산업화가 요구하는 부지런하고 신중하며 여흥을 원치 않는 개미 같은 노동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었다.”(루이 베르주롱, 『프랑스의 역사』, 2006) 

  또한 가정은 건전한 성관계를 유지하는 데 가장 적절한 방식인 결혼으로 맺어진 것이므로 종족 재생산의 임무를 독점했고 그 외의 모든 성관계를 단죄했다. 가정은 하나의 도덕적 존재로서 총체적이고 신성한 어떤 것이 되었다. 피에르 라루스(1817~1875)가 편찬한 백과사전 『19세기 세계대사전』의 ‘디네dîner' 항목은 19세기 가정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할아버지부터 아이들, 높은 아기용 의자에 앉은 막내 아기까지 모두 함께 자리한다. 새하얀 식탁보 위에 놓인 깨끗한 병에는 포도주가 담겨 있다. 하녀가 아기의 목에 냅킨을 둘러준다. 그리고는 수영풀 수프, 모양내어 자른 종이로 손잡이 부분을 장식한 양고기를 가지고 온다. 엄마는 손으로 먹고 있는 르네, 여동생을 놀리는 에르네스트를 야단친다. 아기는 새끼 염소처럼 이리저리 뒤척대고 있다. 아버지는 아기에게 고기 한 점을 잘게 썰어주거나 아기의 코앞에서 포도를 흔들어 보이다가 먹으라고 건네준다.....”(『19세기 세계대사전』, 필립 아리에스, 『사생활의 역사』에서 재인용)

  19세기 말 가족사진의 유행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가장의 권위와 어머니의 사랑, 가족의 행복과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집, 그것을 유지 보존하기 위한 정기적인 가족 모임과 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 사실적으로 보존하는 역할을 사진이 맡았다. 가족 초상화의 전통을 이은 가족사진은 1914년 전쟁을 거치며 대중화되었다. 가문의 유래와 번성을 과시하는 가족 초상화 또는 사진을 집안에 전시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그것을 글로 기록한 자서전 내지 가족사가 넘쳐났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게 된 수공업자들이여, 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농민들이여, 죽은 이들을 잊지 마세요. 여러분 아버지의 생애를 아들들에게 알려주세요. 원한다면 직함을 만들고 가문을 만드세요. 어쨌든 여러분 모두 이렇게 하기 바랍니다. 민중도 왕들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있으니까요.” (조르주 상드, 『나의 인생 이야기』, 1855)

“오! 신이여, 나의 눈꺼풀에서 이 집을 지워주십시오.
아니면 지난날의 집과 비슷한 집을 내게 돌려주세요. 
집 전체가 마치 돌로 만든 커다란 심장처럼 떨리던 그때
지붕 아래 모든 심장이 즐거이 맥박 칠 때! (…)
벽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숨 쉬는 듯했고
싱그러움을 발산하며 기뻐하는 포도나무가지처럼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장밋빛 인생
집의 품안에 꼭 안긴 아이들의 아름다운 얼굴 아래.” 
(알퐁스 드 라마르틴, 「포도밭과 집」, 1857)

  20세기에 들어서면 관혼상제뿐만 아니라 가정의 모든 일상이 가족 단위로 의례가 되면서, 생일과 같은 개인적인 축제는 물론 공공 축제들 또한 가족들 간 친목을 도모하고 애정을 확인하는 가족 축제의 성격을 띠게 된다. 특히 성탄절과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 축제는 19세기 후반부터 종교나 풍속과 상관없이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확인하고 또 지켜주는 행사로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성냥팔이 소녀』(한스 안데르센, 1845)가 마지막 성냥 불빛에 비쳐본 행복한 부르주아 가족의 성탄전야는 19세기 유럽의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0세기에 이러한 집과 가정의 모습에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계기로 르코르뷔지에(1887~1965)의 공동주택 개념과 68혁명을 들 수 있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는 19세기 이후 도시화로 악화된 주거환경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기능주의와 사회정의 실현을 내세워 혁신적으로 공동주택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가 선보인 대규모 아파트 위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은 형식의 측면에서 전통적인 집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집은 사람이 사는 기구일 뿐만 아니라 가족의 성전이다.”
“과거에 대한 편협한 숭배 때문에 사회정의의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연대의식보다 미적인 측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야기하는 비참함과 잡거 생활, 전염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된 구역의 정취를 보존하기 위해 힘쓴다.”
(르코르뷔지에, 『건축을 향하여』 ,1923)

  형식이 아니라 내용 면에서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변화는 산업발달과 풍속전반의 변화, 개인주의에 의한 가치관의 변화와 더불어 1960년대 후반에 급속히 이루어진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68혁명이었다.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 강조, 성 풍속의 자유화 등을 기치로 내세운 68혁명은 가부장적 가족 문화와 전통 결혼관을 일시에 바꿔놓으며 결혼의 감소, 이혼의 급증, 출산율 급감을 야기하며 가족을 빠른 속도로 해체시켰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집은 과거나 현대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나만의 장소, 외부의 모든 간섭에서 벗어나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다. 16세기 몽테뉴가 공직에서 은퇴하고 자아에 몰두할 결심을 했을 때 그가 선택한 공간은 집이었다. 

“최근에 나는 집에 틀어박혔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 동안 가능한 한 홀로 휴식을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결심했다. 내가 보기에 완전한 무위 상태에 빠져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정신을 가라앉히는 것보다 더 정신에 이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몽테뉴, 『수상록』, 1580~1588)

  그리고 집은 자유에 대한 욕구, 즉 자아의 의지와 자아에 대한 관심을 표출할 수 있는 절대고독이 가능한 사적인 공간이다.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어떤 곳에 집을 한 채 갖는 희망이 늘 있었다. 폐허이든 초가집이든. 그곳에서 나는 때로 사라질 수도 있고 사람 목소리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작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르주 상드, 『나의 인생 이야기』, 1855) 

“인간은 언제든 피신할 수 있는 자기만의 영역, 자기 집으로부터 그 자신에게로 온 듯 세상 속에서 존재한다...... 세상을 관조하는 주체는 집이라는 사건..... 내밀한 집에서의 명상을 전제로 한다..... 자아는 자기를 성찰함으로써 존재하고, 경험적으로 집으로 도피하기 때문이다.” (엠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1961)

  프랑스인들의 강한 개인주의와 강한 사회적 연대가 공존하는 현상에 대해 로렌스 와일리는 집이라는 사적 공간과 결부하여 다음과 같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제시한다. 

“프랑스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이 두 개의 세계에서 동시에 굴러간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우친다. 하나는 거부하면 응분의 조치가 따르는 규칙, 코드,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고 존중하기를 요구하는 사회라는 세계, 다른 하나는 이런 세계를 벗어남으로써만 다다를 수 있는 자유와 꿈 그리고 환상이라는 개인의 사적인 세계가 그것이다. (…) 사회적 규칙을 존중한 대가로 오직 자신에게만 속하는 사적인 공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이 자유의 성전을 타인이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는다. 이 공간을 침범하고 허가 없이 들어가는 것은 기본원칙을 깨트리는 것이고 격렬한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로렌스 와일리, 『프랑스 사람들』, 1995)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문화에서 집은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집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호, 휴식 등의 기능은 다른 문화 영역 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혹독하며 척박한 자연 환경 속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야했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집의 기능은 보다 중요했다. 더구나 이즈바의 필수 요소인 이콘의 존재는 러시아 민중들에게 집을 보호와 휴식의 의미를 넘어 정교적 가치를 보호하는 특별한 장소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토포스로서 집은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의 부국화를 위해서 유럽화 정책을 시행했고, 그 중심은 1703년 네바 강 유역에 유럽 도시를 본떠 만든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이었다. 표트르 대제는 도시 전체 건축물들을 유럽식으로 건설하였고, 이것은 주택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여제를 거쳐 19세기 러시아의 주택들, 특히 도시 귀족들의 주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서구식 주택들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주택들이 서구식으로 건축된 또 다른 이유는 귀족들의 문화 생활 영역의 확장에 있다. 즉 18세기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 도입된 대규모 파티, 무도회, 살롱 등은 러시아 귀족들의 중요한 일상이 되었는데, 전통적인 주택 구조로는 이러한 행사들을 개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구에 비해 궁정, 귀족 문화의 발전이 매우 늦었던 러시아에서는 18세기 중엽까지 궁정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손님 접대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나 별도의 방, 즉 ‘응접실’이라는 공간 자체의 개념도 부재하였고, 귀족들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고, 춤추고, 대화하는 장소를 ‘큰 방’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괄적으로 진행하곤 하였다. 따라서 서구식 주택들이 러시아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귀족들의 저택에는 ‘응접실’, ‘홀’과 같은 특별한 장소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영향력 있는 일부 대귀족들은 이 시기에 서구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을 모방하여 큰 정원과 가로수길, 그리고 집이 공존하는 대저택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집들을 ‘드보레츠 дворец ’라고 불렀다. ‘드보레츠’는 일반적으로 보통 왕이나 왕족이 머무는 궁전을 의미하지만, 귀족들이 거주하는 화려한 대저택을 의미하기도 한다. 러시아 최초의 드보레츠는 표트르 대제의 최측근이었던 멘쉬코프 공작이 황제의 명에 의해 1720년 페테르부르크에 건설한 ‘멘쉬코프 드보레츠’이다. 이 드보레츠는 유럽 건축가인 폰타나와 쉐델을 초청하여 지은 페테르부르크 최초의 석조 건물이기도 하다.


 
  러시아 귀족들의 주거 형태는 19세기 초반에 급속도록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수많은 거주지가 생성되었고, 석재가옥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귀족들의 집 역시 서구식 주택으로 변환되었는데, 따라서 자연히 이전의 전통적인 형태의 집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푸시킨은 자신의 시 『콜롬나의 작은 집』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들에겐 평화로운 오두막집이 있었다. / 밝고 작은 방, 세 개의 창, 현관 계단과 문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 삼일 전 저녁 무렵에 나는 아는 사람과 그곳에 갔다. 
이제 그 오두막집은 없다. 그 자리에는 삼 층짜리 집이 있다.” 
(푸시킨, 『콜롬나의 작은 집』, 1830)

  대귀족들의 집의 형태가 주로 ‘드보레츠’였다면, 19세기 이후 일반 귀족들의 전형적인 집은 ‘오소브냐크 особняк’라고 불리는 저택이었다. 오소브냐크는 17~18세기에 프랑스에서 유행한 주거 형태인 ‘오뗄 파르띠퀼리에 hôtel particulier’의 영향으로 19세기 러시아 도시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오소브냐크의 어원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특별한, 사적인’을 뜻하는 프랑스어 ‘particulier’를 유사한 러시아어인 ‘오소브이 особый’를 토대로 파생시켜 만든 단어로 유추된다. 오소브냐크는 우리말로 ‘독립가옥’ 정도로 번역되고 있으나,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귀족들의 대저택을 의미하며 주로 2층짜리 건물이 많았고, 회랑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었다. 
  오소브냐크가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집 내부가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소브냐크는 기본적으로 홀, 응접실, 침실, 부인용 침실, 서재 등을 갖추었고, 2층짜리 건물일 경우, 주로 2층에 주요 시설들, 즉 손님 접대용 홀과 침실 등이 있고, 하인들은 주로 1층에 거주한다.


 
  19세기 들어 귀족들은 도시에 오소브냐크뿐만 아니라, 근교 도시나 시골에 오소브냐크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의 오소브냐크는 주택뿐만 아니라, 정원 혹은 영지 등이 혼합된 형태였다. 따라서 혁명 전까지 이러한 오소브냐크를 흔히 ‘우사디바 усадьба’라고 불렀으며, 우리말로는 주로 ‘귀족영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종 도시의 오소브냐크와 귀족의 오소브냐크를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도시 오소브냐크 городской особняк’, 후자를 ‘усадебный дом’ 혹은 ‘усадьба’라고 한다. 현재 도시 오소브냐크는 대사관, 박물관,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17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20세기 초까지 지속된 우사디바는 사실 개념 자체가 복잡한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조어의 형태로 본다면 ‘정원 옆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주로 주택과 여러 부대시설들, 즉 정원이나 영지 등이 딸린 귀족들의 저택을 의미한다. 우사디바는 주로 이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목재에 회반죽으로 덧칠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귀족들은 이곳에 항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름이나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거주하곤 하였다.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져온 귀족들의 시대가 저물고, 상인, 자본가가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는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러시아의 주택 형태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부를 축적한 상인과 자본가들은 당시 러시아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인구 밀집으로 인한 주택난에 편승하여 ‘도호드니이 돔 доходный дом’이라는 불리는 임대용 공동주택을 만들었다.

  ‘수입의, 수익성이 높은’이라는 뜻의 형용사 ‘도호드니이 доходный’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공동주택은 현재의 아파트와 유사한 개념으로 큰 건물 안에 여러 채의 개별 주거 형태를 만들어 일반인들에게 임대를 하는 형태의 주택이었다. 18세기 말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의 거의 모든 주택은 ‘도호드니이 돔’의 형태로 건설되었고, 혁명전까지 모스크바에는 800여개의 도호드니이 돔이, 19세기 말 페테르부르크는 전체 주택 중에 약 93%가 바로 이 도호드니이 돔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이후 도호드니이 돔은 소비이트 시절 공동 주택인 ‘코무날카’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극심하게 된 1880년대 중반이 되면 대도시의 거의 모든 주택들은 이런 도호드니이 돔의 형태로 전환되었고, 집주인들은 임대수입을 위해 자신의 집에 여러 가족을 들이고 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혹은 집 내부에 칸막이를 만들어 쪽방 형태나 다락방 형태로 세입자들을 받기도 하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하숙방이 바로 이런 형태의 집이다. 

“그는 다행이도 계단에서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작은 방은 높은 5층 건물의 지붕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방이라기보다는 작은 벽장 같은 곳이었다. 여주인은 그보다 한 층 아래에 있는 독립된 아파트에 살았고, 그는 그녀로부터 식사와 하녀를 제공받고 있었다. 그런데 청년은 거리로 나갈 때마다 항상 계단을 향해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여주인의 부엌 옆을 지나야 했으므로 그때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병적인 두려움이 느껴졌는데, 이로 인해 스스로 부끄러워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방세가 밀려 있었기 때문에 여주인과 만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867) 

  도시 귀족들이나 상인들의 주택이 서구식으로 완전히 변화된 것과는 달리, 시골에 거주하는 민중들의 집들은 여전히 이전의 이즈바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농민들의 이즈바는 귀족들의 우사디바 안에 소속되어 우사디바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사디바 안에 농민들은 독립적으로 가옥을 지어 생활하면서 귀족들의 영지를 개간하는 삶을 살았다. 
  이즈바는 중세 러시아 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보다 큰 규모의 형태로 지어졌다. 방 하나의 단순한 구조로 지어진 중세의 이즈바와 달리 19세기의 이즈바는 크게 본채와 외채로 나누어져 있었다. 
  본채는 이전의 이즈바처럼 주로 페치가 중심이 되는 주거 공간이며, 외채는 주로 곡식이나 사료들을 저장하는 저장고의 개념이 되는 건물인데, 주로 이것을 ‘클레티’라고 불렀다. 또 한편 ‘세니’라고 불린 별채 역시 농기구나 곡식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지만, 여름에는 수면을 취하는 장소로도 쓰이기도 하였다. 
  19세기 역시 토포스로서의 이즈바는 민간 신앙과 정교 신앙의 공존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여전히 이즈바에서 ‘크라스느이 우골’은 중요한 장소이며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이콘을 모시고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역시 러시아 주거 형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노동자와 농민으로 대표되는 무산계급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 정부는 최우선적으로 주택 정책에 집중하였다. 1918년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발의된 ‘무산자들의 주택 부족을 위한 유산자들의 주택 몰수’ 법안을 집행하여 제정러시아 시대의 귀족, 상인들의 저택들을 국유화하여 노동자, 농민들에게 거의 무상으로 주택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혁명 직후 주택 정책의 근본 방향은 이른바 ‘우플로트네니예 уплотнение’라 명명한 ‘밀집화’ 운동이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18년 8월 20일 지령 <도시 부동산 개인 소유법 변화에 대해서>를 발표하여 개인이 소유한 모든 건물들의 소유권을 지방소비에트로 이전시켜 주택 분배를 실시하였다. 당시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와 같은 대도시의 거의 모든 주택들은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소유였는데, 그들의 집을 몰수하여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배분하여 대중들의 ‘거주 밀집도’를 높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식으로 분배된 귀족들의 대저택에 입주한 노동자들의 주거 형태는 자연히 여러 세대가 한 집을 같이 사용하는 공동 주거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형태가 소비에트 주택의 가장 상징적이며 보편적인 ‘코무날카’로 발전되었다. ‘공동 주택, 공동 아파트’로 번역할 수 있는 코무날카는 여러 세대가 한 아파트에 살면서 공동으로 복도, 화장실, 목욕탕, 욕실을 사용하면서 사는 주거 형태이다. 보통 아파트에는 3~6개의 방이 있었고, 그 안에서 3-6 가정 정도가 생활하기도 하였다. 
  코무날카는 네프시기를 거쳐 1920년대 말에 거의 모든 소비에트 주거 양식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선은 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친 혁명 정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새로운 주택을 건설할 자금이 충분치 않아 심각한 주택난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좁은 공간에 여러 세대가 밀집하여 거주하는 코무날카는 당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한 매우 좋은 주거 형태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말 스탈린 독재 시대로 접어들면서 여러 세대가 밀집하여 거주하는 코무날카는 주민들을 감시, 통제하기에 매우 유효한 체계였다. 그러나 코무날카는 위생, 사생활 보호, 쾌적한 주거 환경에 불편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 종종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소비에트 삶의 풍자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일프와 페트로프의 소설 『열 두 개의 의자』에서는 코무날카에 사는 주민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동업자들은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따라 맨 위층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다락방은 합판으로 칸막이를 만들어, 각각 2 아르쉰의 넓이로 다섯 개의 방으로 길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렇게 나누어진 방들은 마치 연필통처럼 생겼는데, 연필통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안에 연필과 펜 대신에 사람들과 석유난로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콜랴, 집에 있는가?”
가운데 문 근처에서 오스타프가 조용히 말했으나, 다섯 개의 방안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여왔다.
“있어.”
문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 오스타프가 발로 방문을 밀치고 들어가려고 하자 모든 방의 칸막이가 흔들거렸다. 동업자들은 콜랴의 동굴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오스타프의 눈앞에 펼쳐진 방 안 광경은 끔찍했다. 방 안에 있는 가구는 네 개의 벽돌로 받쳐진 붉은 색 줄무늬 매트리스 하나 밖에 없었다.” (일프와 페트로프 『열 두 개의 의자』, 1928) 

  이후 소비에트 시대는 여전히 주택난에 시달리게 되는데,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러한 현상은 더 심화된다.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시쵸는 1959년부터 1985년까지 이른바 ‘흐류쉐브카 хрущёвка’라 불리는 주택을 대량으로 건설하여 일정부분 주택난을 해소하기도 하였다. 당시 흐류쉐브카는 주민들에게 매우 큰 인기를 얻었는데, 흐류쉐브카를 통해 비로소 코무날카를 벗어나 각 가정들이 독립적인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루시쵸프의 이름을 따서 불린 ‘흐류쉐브카’는 5층 이하의 건물로 각 세대마다 1~2개의 방을 가진 천장이 낮고 벽이 얇은 건물을 지칭한다.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전국에 대량으로 아파트를 건설하여 주택난 해소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으나, 낮은 천장, 얇은 벽으로 인해 거주민들에 적잖은 불편을 주는 주택으로 현재는 인식되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로 집은 ‘메종 maison’이고 이는 라틴어 manere를 어원으로 하며 머물러있는,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장소, 즉 정착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집은 건축물과, 가족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을 동시에 지시한다. 집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돔 дом’도 ‘거주지, 가족’을 의미하는 고대 러시아어 ‘домъ’에서 파생되었는데, ‘домъ’은 라틴어 ‘domus’와 고대 인도어 ‘dáma’, 고대 그리스어 ‘domos’ 등을 어원으로 한다. 집은 인간 생활의 삼대요소인 의식주에 포함될 정도로 인류가 생존하는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거친 자연 환경으로부터의 보호라는 본능적인 요구에,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 공동체의 기능과 공적 생활과 분리된 사적 생활공간의 의미가 부여되면서, 집은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해왔다. 
  집과 관련된 프랑스 문화에서 독특한 점은 16세기 이래 매우 정교하게 발달한 지극히 사적 공간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왕을 중심으로 중앙의 권력이 매우 강했던 프랑스에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 되었는데, 이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서 서재가 갖는 중요성은 상당히 컸다. 가장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자료와 정보가 보관되고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진 서재는 프랑스 귀족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또한 자유연애 풍속이 만연해진 18세기 이후로 귀족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반영한 규방 또한 프랑스 귀족문화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집의 내밀한 공간이었다. 점점 더 개인의 사생활이 강조됨에 따라 집의 건축 양식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와 더불어 근대 이후 프랑스에서 집의 개념과 형식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현상으로 부르주아적인 가정 개념의 확산을 들 수 있다. 18세기에 형성되고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며 더욱 확고해진 남녀영역분리 이데올로기는 19세기 후반 사회의 최소 단위이자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로 가정을 중요시하는 부르주아적인 가치관의 정립과 함께 프랑스에서 집-가정의 현대적인 모습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러시아 민중들의 가장 보편적인 가옥은 ‘이즈바’이다. 러시아의 기후를 반영하여 ‘따뜻한 장소, 목욕탕’을 의미하는 교회 슬라브어 ‘*jьstъba’에서 유래된 ‘이즈바’는 난방시설을 갖춘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즈바는 슬라브 민간신앙과 정교신앙의 공존이라는 러시아 특유의 이중적인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즈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방과 요리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페치로, 민중들은 슬라브 민간 신앙에서 말하는 가정의 정령 ‘도모보이’가 페치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집의 개념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후이다. 유럽화 정책을 시행한 표트르 대제는 건축물들을 유럽식으로 건설했고, 도시 귀족들의 주택은 완전히 서유럽 식 형태로 지어졌다. 이는 귀족들의 문화생활 영역이 확장된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18세기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 도입된 연회, 무도회, 살롱의 개념이 러시아 주택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상인, 자본가가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면서 러시아의 주택 형태에도 또 한 번 변화가 생긴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도호드니이 돔’이라 불리는 임대용 공동주택이 만들어졌는데, 이 도호드니이 돔은 소비에트 시절 공동 주택인 ‘코무날카’의 원형이 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지역과 환경적 요인 외에 집의 개념이 보여주는 가장 큰 차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기인한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도 르코르뷔지에가 사회정의의 원칙에 따라 생활의 편의를 우선하며 아파트라는 공동주택 개념을 창안한 바 있지만, 이와 달리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에 새로 도입된 주거 형태는 훨씬 더 집단적이고 획일적이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으로 대표되는 무산계급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레닌이 ‘무산자들의 주택 부족을 위한 유산자들의 주택 몰수’ 법안을 집행하면서 도입되었다. 이 법안에 따라 제정러시아 시대의 귀족과 상인들의 저택이 국유화되고 노동자, 농민들에게 거의 무상으로 주택이 공급되었다. 여러 세대가 생활을 같이 한 노동자들의 이 공동주거 형태가 소비에트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보편적인 주택, ‘코무날카’(공동 주택, 공동 아파트)로 발전된다. 코무날카는 당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1920년대 말 스탈린 독재 시대로 접어들면서 주민들을 감시, 통제하기에 매우 유효한 체계가 되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연관 토포스 귀족; 도시; 별장; 시골;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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