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축제
범주명 세태와 풍속
토포스명(한글) 축제
토포스명(프랑스) fête
토포스명(러시아) праздник
정의 1. 일상에서 벗어날수록 축제는 더 즐겁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축제를 가리키는 프랑스 어휘로 ‘페트 fête[fεt]’와 ‘페스티발 festival[fεstival]’이 대표적이다. 페스티발이 일정한 장소에서 주기적으로 거행되는 특정 장르의 예술제를 가리킨다면, 페트는 “중요한 사건이나 사물 또는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조직한 종교적 혹은 시민적 성격의 성대한 의식”(http://www.cnrtl.fr/definition/fête)을 의미한다. 페트, 페스티발은 축제의 날을 의미하는 라틴어 ‘페스타festa’가 어원이며 festa는 ‘신의 휴식’을 의미하는 ‘파스fas’에서 파생되었다. 
  축제는 일반적으로 ‘부의 재분배’,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 ‘지역 구성원들의 공동참여를 통한 정체성 형성’을 위해 계기를 마련하는 행사로서, 인간의 삶에서 축제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제에는 종교적 기념일, 태어나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르는 관혼상제 의례와 축하연,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농사력에 따라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세시풍속, 역사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시민 축전이 포함된다(송영규, 『프랑스의 세시풍속』, 니콜 벨몽, 『고대 프랑스의 신화와 신앙』 참조). 
  에밀 뒤르켕(1858~1917)은 축제를 ‘사회통합을 위한 종교적 형식’(에밀 뒤르켕, 『종교의 기본 형식들』, 1912)으로 정의했는데, 이러한 관점은 플라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률』에서 플라톤(기원전 427~기원전 347)은 축제의 기능을 감성교육을 통한 국가질서의 유지와 조화의 형성에서 찾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축제는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인간을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신들이 마련한 것”이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주도 하에 뮤즈들이 참가하는 축제에서, 일상에 매몰되어 고단하게 살아가던 인간들은 다시 한 번 삶이 지향해야 할 길을 되새기고 질서를 회복한다. 현실에서 신의 뜻을 대변하는 것은 국가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축제의 주체는 국가였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벌어진 거대한 디오니소스 축제는 주민들 대다수가 참여하는 일종의 회합이었다(전동열, <축제와 일상> 참조 및 재인용). 디오니소스 축제는 겨울이 시작되는 연초에 열렸는데, 동맹국들이 세금을 보내는 이 시기에 축제를 거행함으로써 아테네는 축제를 국가 권력을 과시하는 기회로도 활용했다. 축제는 주민들의 화합과 국가 의식을 거행하기에 적합한 원형 극장에서 열렸다. 
  축제의 복합적인 성격은 축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비극 공연에서 잘 나타났다. 국가 권력을 찬양하고 힘을 과시하는 축제에서 비극은 신화를 주제로 삼아 인간의 나약함과 슬픔을 묘사하고 인간의 오만을 경고했다. 또한 비극은 과도한 욕망이 불러오는 파멸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일상에서 깨어진 심리적 균형을 회복시키는 카타르시스 기능도 수행했다(전동열, <축제와 일상> 참조). 이처럼 계층의 차이를 초월하여 통합을 꾀하고 신과 군주의 권위를 강조하여 기존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축제는 다른 한편, 휴식과 이완의 기회를 제공하고 일상을 벗어나게 함으로써 경직된 사회와 고단한 일상이 가하는 압박을 해소하는 합법적인 배출구의 기능을 했다(진인혜, <축제와 혁명> 참조). 이러한 축제의 일탈성에 주목하여 프로이트는 축제를 “금기의 파괴이자 난장트기”(프로이트, 『토템과 터부』)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편 서유럽의 전통적인 축제와 기독교의 연관성은 축제의 어원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는 창세기 신화에 의거하여 일요일과 휴일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종교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가톨릭이 종교적 휴일을 중시한 것은 속의 시간에서 성의 시간으로 회귀하는 일요일 의례를 통해 각성의 기회, 삶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한편, 기독교의 의미가 부여된 휴일 의례를 통해 미신과 토속신앙에 사로잡힌 신도들의 종교생활을 제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축제는 초자연적인 힘의 표출로서 신성함의 범주에 상응하는 동시에 세속적인 삶의 불확실성과 대조된다.” (로제 카유와, 『인간과 성스러운 것』) 

  로마 교황청의 후원 하에 국교를 가톨릭으로 삼은 프랑스는 중세 내내 교회가 미신으로 판단한 토속신앙이나 민속의례를 근절시키는 정책을 펼치고 그것들을 기독교와 결합하여 성 미셀 축일, 세례요한 축일, 성탄절 주기, 부활절 주기 축제로, 토속신의 이름을 그 지방 출신 성자의 이름으로, 숭배 대상에 얽힌 전설은 기적을 행한 성직자 이야기로 대체했다. 
  가령 만성절(11월1일)은 골 지방의 켈트족이 사맹(여름의 끝)이라 부르던 대축제에서 유래되었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골 지방의 켈트인들은 씨를 뿌리는 11월 1일을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성대한 축제를 치렀다. 특히 이 날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만나는 날로 여겨 죽은 이들이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무덤을 열어두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죽은 혼령들을 달랬다고 한다. 835년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로 황제가 된 루이는 이교의 의례를 차단하기 위해 이 축제를 만성절로 정하고 죽은 이들의 영혼 대신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기독교 축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날 망자들을 추모하는 의식이 계속되자 998년 11월 2일을 망인일로 정하고 모든 망자를 위해 미사를 올리도록 제도화했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사람들은 11월 2일에 공동묘지를 방문하고 국화꽃을 조상께 바친다(송영규, 『프랑스의 세시풍속』 참조). 
  이처럼 성과 속이 융화되는 흔적은 17세기에 성직자 보쉬에(1627~1704)가 쓴 『교리문답』에서도 확인된다. 보쉬에는 성 요한 축일(6월 24일)에 모닥불을 피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직자가 성 요한 축일에 불을 피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사람들이 믿고 있는 미신들을 이 불과 함께 몰아내기 위해서지요.
그러면 미신이란 무엇입니까?
- 미신이란 불을 피워놓고 그 주변에서 춤을 추는 일, 놀면서 축제를 벌이는 일, 상스런 노래를 부르는 일, 불 속에 풀을 던지는 일, 식전에 약초를 뜯는 일, 약초를 몸에 걸치는 일, 약초를 일 년간 집에 보관하는 일, 타고 남은 숯을 보관하는 일 등이지요.” (보쉬에, 『‘모’의 교리문답』, 니콜 벨몽, 『고대 프랑스의 신화와 신앙』에서 재인용)

  성 요한 축제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축제들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행사로서 프랑스 전역에서 행해진다. 하지 무렵에 행해지는 이 축제는 수확의 수호성인인 성 요한을 기리는 것으로 193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공직자와 성직자 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였다. 물과 불의 의례로 일컬어지는 이 축제의 주된 행사는 광장에 소나무 한 그루를 세우거나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모아온 장작더미를 쌓아두고 공직자와 성직자 들이 행렬을 이루어 그 주변을 도는 것이다. 관공서의 장이나 사제가 불을 피우고 이어서 장작불 주위를 세 번 돌면 모든 참여자들이 그 뒤를 따른다. 불길이 타오르면 종이 울리고 화약을 담은 상자가 폭발하면서 불꽃이 여기저기서 군중들 머리 위로 솟아올라 터진다. 행렬이 모두 돌아오면 원무를 추면서 무도회가 시작된다. 지방에 따라 속설들도 많아 뜨거운 재 속에 마늘쪽을 던졌다가 다음 날 다시 꺼내 먹으면 열병을 앓지 않는다고도 하고, 불을 세 번 뛰어넘으면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도 한다. 
  1789년 혁명 이전 구체제 하의 프랑스에는 수많은 축제들이 있었다. 전통적인 종교 축제나 민속 축제뿐만 아니라 국왕과 귀족이 주관하던 사치스런 궁정 축제, 도시의 극장이나 오페라에서 상연되는 공연을 중심으로 한 사교계의 축제가 벌어졌다. 축제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기원을 갖지만,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축제의 종류와 성격이 다양해지면서 종교적 성격은 점점 약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혁명 이후 도시화,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축제는 전통적인 의미보다 정치나 상업 논리에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축제를 뜻하는 대표어로 종교 축일, 세시풍속에 따른 전통 축제, 정치 사회적 사건의 기념일 등을 모두 아우르는 ‘프라즈니크 праздник[praznik]’를 들 수 있다. ‘프라즈니크’는 ‘텅 빈’, ‘일로부터 해방된’을 뜻하던 고대 슬라브어 형용사로부터 기원한 단어이다. 러시아어로 축제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단어 ‘페스티발 фестиваль’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어 ‘페스티발 festival’로부터 차용되었다. 오늘날 이것은 대중적인 축제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영화 페스티발, 연극 페스티발 등 주로 문화 공연이나 예술제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한국어의 ‘축제’라는 용어가 잘 보여주듯 ‘축제’에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잔치, 놀이로서의 ‘축’과 신성하고 엄숙한 의례로서의 ‘제’가 합쳐져 있다. 축제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이미 고대 시기부터 드러나고 있다. 고대의 축제는 자연의 순환, 계절의 변화를 기념하고 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고대 러시아의 축제도 순환적인 시간관에 따라 계절의 변화와 농사의 절기들을 민간 신앙에 따라 기념하는 것이었다. 주술적인 종교의식, 조상의 영혼에 바치는 제례, 풍작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례, 악령으로부터의 정화 의례 등 신성한 의식들이 축제에 수반되었다. 이러한 의례와 의식들은 놀이, 노래, 춤을 동반하고 평상시와는 달리 풍성한 먹거리와 음주가 허용됨으로써 점차 일상으로부터의 단절, 반(反) 일상성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렇듯 축제의 근본적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신성함’과 ‘반 일상성’은 시대에 따라 무게감을 달리 하면서 축제의 시대적 특성을 마련해준다.
  제의에서 시작된 고대의 축제가 신성함을 근본 특성으로 한다면, 축제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중세는 ‘반 일상성’이 전면으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축제에 대한 프로이트 식의 해석이 가장 잘 적용되는 시대가 바로 중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축제는 통합과 질서의 유지라기보다는 “금기의 파괴이자 난장트기”(프로이트,『토템과 터부』)이며 즉흥성, 디오니소스적 부정, 인간본능에 대한 억압의 극복, 해방을 향한 문화로서의 특성이 두드러졌다.
  중세엔 축제가 사회생활에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대두되었다. 종교의 시대 중세에 당연히 교회 축제들도 성행하였지만 이와는 별도로 프로이트 식의 축제도 상당히 활성화되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성스러운 패러디’가 각광받았다. 즉 기독교적 의례, 교회의 구조, 신성한 관례들을 패러디하는 축제들인 ‘바보들의 축제’, ‘당나귀 축제’ 등이 성행했는데 이들 축제는 주로 12월에 열린다는 점에서 ‘12월의 자유’라 불리기도 하였다. 축제에 대한 프로이트 식의 해석을 민중문화와의 연관성 속에 계승 발전시킨 바흐친이 축제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들고 있는 사육제 역시 중세의 역작이다. 사육제는 사순절(부활절 전 40일간의 절제와 금욕 기간) 이전에 마지막으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유희와 오락을 마음껏 즐기고자 했던 놀이 문화이다. 일견 기독교적 기원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나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내려오던 겨울 축제를 기독교 내로 흡수하여 제도화한 축제라 할 수 있다. 사육제는 중세의 단층적이고 엄숙한 공식적인 축제들, 현존하는 질서와 가치를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고 웃음의 원리가 낯선 지배계층의 축제와는 대조적이다. 사육제에서는 기존 제도로부터의 일시적 해방, 계층 간 위계관계의 파기, 가치체계의 전복이 일어나며 사육제 광장은 계급, 재산, 연령 등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사라짐으로써 진정한 소통과 교감이 가능한 공간이 된다. 사육제 공간은 기존의 엄숙함과 성스러움이 패러디되고 뒤집혀짐으로써 유쾌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러한 사육제적 웃음 속에서 중세인들은 죽음, 최후의 심판, 내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참조).
  성스러운 것을 패러디하고 현실의 격식과 관례를 뒤집어 놓는 축제 요소들은 고대 러시아 문화에서도 널리 나타난다. 고대 러시아의 웃음은 진실을 폭로하고 ‘벗겨내는’ 웃음, 관찰자의 입장에서 타자를 조소하고 비웃는 일방향적인 웃음이 아니라 스스로가 웃음의 대상이 되는 재귀적 웃음이다. 사육제 유형의 축제들이 관객과 연기자의 구분이 없듯, 사육제의 웃음 또한 “관객은 없고 오로지 참가자만 있는” 웃음이다(리하초프, <고대 러시아의 웃음세계> 참조). 러시아 축제 때 종종 등장하는 옷 뒤집어 입기, 모자의 앞뒤 바꿔 쓰기, 진짜 재료 대신 ‘가짜 재료’(가령, 진짜 옷 대신 자작나무 껍질)의 사용과 같은 이른바 ‘뒤집기’ 관행이 고대 러시아의 웃음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는 러시아 웃음의 원동력이 되는 뒤집힌 세상을 표시하는 것들이었다(리하초프, <고대 러시아의 웃음 세계> 참조). 이러한 웃음의 코드는 러시아 민중 축제들, 예컨대 러시아판 사육제라 할 수 있는 마슬레니차 축제나 성탄 축제인 스뱌트키, 민간 신앙적 잔재들이 강하게 남아있는 이반 쿠팔라 축제 등에서 그 위력을 드러냈다.
  러시아 축제의 토포스는 기독교 수용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정교를 수용한 러시아에서는 정교와 고대 러시아의 민간 신앙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접목된 독특한 이중 신앙 체계가 형성되었다. 러시아에서 축제의 토포스는 이중 신앙 체계와의 강력한 상관관계 속에서 발전하게 되며 이러한 상관성을 잘 반영해주는 것으로서의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정교를 수용한 것은 10세기 말이지만 정교가 민중의 생활 깊숙이까지 침투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으며 여기서 러시아의 기독교화, 특히 민중의 기독교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축제였다. 정교회는 민중들의 삶과 밀접히 관련되던 민간 신앙적 축제를 말살하지 않고 그중 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여 정교축일과 결합시켰으며 이는 민중들 사이에 정교가 거부감 없이 뿌리내리는 데 일조하였다. 이렇듯 러시아 축제의 토포스는 민간 신앙에 기원을 둔 축제 요소들과 정교 축일의 독특한 결합을 근간으로 하여 변화 발전해 나가게 된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인간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여겨지는 것과 만나게 함으로써 신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축제에서는 기본적으로 일상생활과의 단절이 이루어졌다. 특히 기독교에서 연원하지만 민중 축제의 성격이 강해진 사육제에서 일상과의 단절은 핵심 요소였다. 이 점을 주목하여 바흐친은 사육제를 엄숙함을 요구하는 교회의 축일이나, 오락과 놀이가 중심이 되는 귀족들의 축제와 달리 모든 공적인 질서와 제약을 일시적으로 파기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세계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웃음을 가진 민중의 대표적인 저항 문화’(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로 규정하기도 했다. 
  사육제는 11월 1일 만성절에서 사순절 직전까지 벌어지는 민중 축제이다. 본래 이교적인 축제였지만 기독교화 되면서 그리스도의 고행과 부활을 기리는 축제로 바뀌었다. 사육제를 뜻하는 프랑스어 카르나발(carnaval)은 라틴어 카르네 발레carne vale(고기여, 안녕)에 연원하는 것으로, 부활절 40일 전 그리스도가 황야에서 단식한 것을 기려 고기를 금하는 사순절 이전에, 마음껏 고기를 먹고 즐겁게 노는 의식이다. 사육제는 앞으로 다가올 엄숙한 사순절 기간의 시련에 앞서 마지막으로 베푸는 향연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니스 사육제의 전통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1294년 프로방스 지방 앙주 백작 샤를 2세가 사육제를 즐기기 위해 니스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사육제는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부르주아 중심의 도시가 발달하면서 공식적인 가치체계에 저항하는 성격을 보이기 시작한다. 사육제를 ‘뒤집힌 왕국’, ‘광인 축제’라 부르기도 했는데, 교회에서 성직자 대신 광인이 설교하고 춤을 추며 찬송가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고 ‘역할 바꾸기’에 의해 성직자가 음탕한 여자로 변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육제는 이러한 교회 행사뿐만 아니라 해학적인 거리 행렬, 광장에서의 연극 공연 등을 통해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였다(파브르, 『사육제 또는 뒤집힌 축제』, 알랭 레, 『프랑스어 문화사전』 재인용 및 참조). 15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파리의 노트르담』(빅토르 위고, 1831)에는 다음과 같이 광인 축제를 묘사하는 구절이 나오며, 이 축제에서 성당의 종지기인 꼽추 콰지모도가 바보들의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축제 전날 사거리에서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보라색의 값비싼 모직으로 된 아름다운 웃옷을 걸치고 가슴에는 커다란 흰 십자가를 단 지체 높은 신부 나리들께서 소리를 질러댔다.” (『파리의 노트르담』, 1831) 

  바보들의 사육제에 참가하는 사람은 대개 중 ․ 하위 성직자, 학생, 동업조합원 들이었는데 대부분 젊은 층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들은 축제 기간에 대표를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의장행렬, 가장행렬, 인형화형식, 모금운동, 샤리바리(charivari)라 불린 임시 사법권의 행사, 무력시위, 무도회 등의 행사를 주관했다. 특히 마을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집단적,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샤리바리의 대상은 주로 어린 신부를 얻은 늙은이 같이 ‘불균형한 결합’을 한 부부, 매 맞는 남편 등이었다. 청년단은 그들에게 돈과 음식을 요구하거나 결혼 당일 밤에 마스크를 쓰고 신혼부부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집단구타를 하고 당나귀에 거꾸로 매달아 끌고 다니기도 했다. 그들의 죄목은 생산을 하지 못하는 ‘불임의 결합’이었는데, 이는 다산과 풍요를 중시하는 농촌 사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샤리바리는 간혹 피고로 지목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야유와 구박으로 인해 집단패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처럼 해학성과 폭력성을 강하게 내포한 사육제는 그것이 정치적 반란으로 번질 위험 때문에 12세기에 이미 가톨릭교회의 정화작업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민속 축제뿐만 아니라 성인 축일도 제한하고 이교적이고 미신적인 축제를 순수하게 종교적인 축제와 분리했다. 교회가 종교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신도들을 통제하기 위해 꾸준히 이러한 작업을 이어온 것과 별도로, 18세기에 이르면 계몽주의자들 또한 사육제를 ‘판도라의 상자’라 부르며 온갖 방탕과 무질서의 온상이라고 비판했고, 1789년 혁명이후 혁명정부 또한 민중 축제의 위험성을 견제하며 사육제를 강하게 비난했다(진인혜, 『축제와 혁명』 참조). 
  바흐친은 ‘사육제적 표현 양식’으로 웃음과 익살, 엽기적 사실주의를 지적했다. 바흐친에 따르면, 웃음과 익살은 자연적, 신화적 공포만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권력에 대한 공포까지 극복하게 해주는 민중의 보편적이며 긍정적인 세계관이다.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과장된 말과 행동, 변장이 필요했고, 파격적인 노출과 기괴한 행위가 동원되었으며, 무한한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프랑수아 라블레(1483?~1553)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1532~1564)은 이러한 사육제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갓 태어난 것들의 머리는 양쪽이 약간 평평하게 눌린 사람 머리 모양처럼 생기지 않고 공처럼 사면이 모두 둥글었다. 그들의 귀는 당나귀처럼 거대하게 머리 위로 솟구쳐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눈썹이 없었다. […] 그 이후로 반 자연은 경건한 체하는 위선자, 고집스런 신도와 맹신자 교황을 낳았으며 그 뒤로도 멍청한 광신도, 제네바 출신 칼뱅교 신자인 사기꾼, 광인 푸테르베우스, 위선자, 식인종, 제 배만 채우는 온간 종류의 수도사들 및 그 밖에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기형의 괴물들을 계속 나았으며 그렇게 해서 자연에 앙갚음을 하려 했다.”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4권 32장) 

  이성과 과학을 신봉한 18세기 계몽 사상가들은 외설스런 언행이 난무하고 술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사육제를 미신, 광신이라고 비판했다. 몽테스키외는 지나치게 많은 축제가 경제적인 손실을 초래한다고 지적했고, 축제를 줄여 더 많은 노동 시간을 확보한 신교 국가가 상품경쟁력에서 가톨릭 국가보다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루소는 문명에 의해 타락한 축제를 비판하고 자연의 순수성을 살린 전원적 축제를 새로운 이상적 축제의 모델로 제시했다. 

“행복한 민중이여. 당신의 축제가 열릴 곳은 그런 장소가 아니다! 축제는 야외에서 벌어진다. 여러분이 모여야 할 곳, 여러분이 감미로운 행복감에 빠져들 곳은 하늘이 보이는 장소여야 한다. 여러분의 즐거움은 약해져서도 안 되고 돈을 목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 또한 제약과 이득을 생각하는 누군가가 축제를 타락하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여러분과 하나가 된 축제는 자유롭고 관대해야 한다. 여러분의 순수한 공연에는 태양이 가득 비쳐야 한다. 여러분 스스로가 태양이 한가득 비치는 그런 공연을 하나 만들어보라.” (장 자크 루소,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 1758)

  한편 1789년 혁명의 경험으로 프랑스인들의 축제에는 더욱 정치적인 색채가 부여된다. 민중이 자발적이고 전면적으로 참여했던 거리의 봉기는 대체로 여흥으로 마무리되면서 민중에게 곧 기쁨이자 희망, 해방을 의미하는 민중 축제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자율적이고 비공식적인 민중 축제는 정부가 계획적이고 공식적으로 축제를 조직하면서 이른바 ‘엘리트 축제’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자유의 순교자를 위한 예배’는 비 기독교화 운동을 배경으로, 당시 자유의 순교자로 여겨졌던 마라, 르펠르티에, 샬리에를 숭배하는 민중 축제로서 혁명 정부를 비판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이 축제에서는 환상적 기술이나 해학적인 표현, 야유와 같은 과거 사육제에서 사용되던 자극적인 표현 양식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성의 축제’ 역시 비 기독교화 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자유, 공화국, 자연, 도덕을 기치로 내걸고 각 지방에서 다양하게 개최되었다. 이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반이성적인 광신의 상징들을 불태움으로써 광신에 대해 이성이 승리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화형식이었다. 민중 축제였던 이 축제는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제안하고 화가 다비드가 연출한 ‘최고 존재의 축제’로 대체되면서 즉흥성과 자율성, 해학적이고 사육제의 표현 양식이 거의 없어지고 평화롭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엘리트 축제로 바뀌었다. 
  정부가 주도한 ‘엘리트 축제’인 ‘연맹제’도 애초에는 지방에서 대공포로 위협을 느낀 농민들이 자치적으로 이웃 마을과 연합하고 연맹조약들을 발표하며 민중 축제의 형식을 띠었다. 지방의 연맹군들이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여 중앙정부에 방위조약과 선서를 요구하기 위해 파리로 모여들어 준비한 샹 드 마르스 ‘연맹제’의 축제 분위기를 장 뒤비뇨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날 밤부터 생마르탱 가나 생토노레 가에서 아가씨들과 포도주와 형제애를 마음껏 나누며 연맹제를 기다렸던 연맹군은 샤요 언덕 앞에 세워진 개선문 아래를 지나 센 강을 향해 전진했다. […] 그곳에서 축제가 벌어졌다. […] 연맹군은 서로를 보면서도 짐짓 티를 내지 않고 합창하듯 열정적으로 소리쳐 노래하는 관중들 가운데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놀랍게도 샹 드 마르스에 제일 먼저 도착한 국가 방위군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 뒤비뇨, 『축제와 문명』, 류정아 역)

  그러나 1790년 7월 14일 개최된 연맹제는 바스티유 함락을 기념하는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기억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화합과 안정,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는 측면을 더 부각시켰다. 더 이상 혼란을 허용하지 않고 혁명의 성과만 보존하려 한 엘리트 축제는 차츰 상투화, 형식화됨으로써 축제의 본래 요소인 민중의 자율성을 말살시켰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민중은 차츰 정부 주도의 엘리트 축제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1799년 정부는 혁명 기념일을 제외하고 모든 엘리트 축제를 폐지했다. 19세기 프랑스의 통치자들은 민중축제의 분위기를 띤 혁명과 봉기의 중심에 있는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민중을 비판하고 경멸했다. 

“민중에게는 소란스런 축제가 필요하다. 바보들이 소음을 좋아하고 대중은 바보들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769~1821)

  민중축제의 성격을 띤 혁명은 1968년 5월 파리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났다. 장 뒤비뇨가 ‘말과 사랑의 축제’(『축제와 문명』)라 명명한 68혁명은 당시 소르본 대학의 벽을 장식한 수많은 문구와 낙서들, 모두가 참여하는 공개토론을 통해 혁명이 자유와 해방을 위한 일종의 축제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혁명은 축제다.[…] 나는 여기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이들과 이야기를 한다.” 
“혁명은 위기 속에서 실현되기 전에 인간들 사이에서 행해져야 한다.”
“내가 혁명을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진인혜, <축제와 혁명>에서 재인용) 

  산업혁명과 도시화가 급진전되는 19세기 말에 많은 전통적인 축제들은 사라지거나 의미와 형식이 축소되었다. 이 시기 현대사회에서 가능한 축제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 것은 세계만국박람회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공산품을 전시하고 구매계약이 이루어지는 만국박람회는 자본주의적 경쟁의 장이었지만, 이 행사를 유치하고 세계의 주목을 끌기 위해 각국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건축물과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다분히 축제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1855년부터 1900년까지 5차례에 걸쳐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산업화된 도시에서 축제는 상업적 논리에 따라 문화산업, 관광산업의 일환으로 개발, 관리되며 ‘페트’에서 ‘페스티발’로 옮겨갔다.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플로베르, 1856)에서 용빌이라는 조용한 지방 도시에서 관의 주도 하에 개최되는 농사공진회를 통해 이 시대의 이른바 새로운 형태의 축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문제의 농사공진회가 마침내 열렸다. 식이 있는 날 아침부터 주민들은 모두 문간에 나와 공진회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면사무소 정면은 담쟁이덩굴로 장식되었고, 목초지 한 곳에는 연회 때 사용할 천막이 세워졌다. 〔…〕 이처럼 화려하게 펼쳐지는 축제는 일찍이 없었다. 〔…〕 면사무소의 네 개의 기둥에 기대어 세워놓은 네 개의 장대 같은 것에는 제각기 녹색 바탕에 금색 글씨를 쓴 작은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상업 만세’, 다음은 ‘농업 만세’, 세 번째는 ‘공업 만세’, 네 번째는 ‘예술 만세’라고 쓰여 있었다.’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1856) 

  또한 20세기 들어 노동과 휴식이 삶의 두 축으로 형성되고 가족이 사회의 핵심적인 기본 단위로 정착되면서 축제는 개인적 행사로 축소되는 성격을 보여준다. 가령 성탄절은 신앙과 무관하게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고 물질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기약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1890년 말 이후 등장한 크리스마스트리는 그것을 준비하고 꾸미고 선물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아버지에게 부과함으로써 가부장적 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 축제의 새로운 요소이다. 그밖에도 성탄절은 가난한 이웃이나 가정부에게 호의를 베풂으로써 가정의 차원에서 부와 덕성을 과시하는 기능도 가졌다.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절 직전 화요일(사육제 마지막 날)을 가리키는 ‘기름진 화요일(mardi gras)’ 또한 그날의 종교적 의미는 거의 퇴색하고 마음껏 고기를 먹는 어느 하루 정도로 여겨진다. 
  전통적인 축제의 형식과 의미는 오늘날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만, 뒤비뇨는 삶이 황폐해지고 파편화될수록 진정한 삶을 위한 하나의 출구라는 축제의 본질적 기능은 더 유효해진다고 말한다. 

“일시적인 축제가 때로는 역사의 흐름을 깨트린다. 아무리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축제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욕망과 생각의 씨앗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주 더 오래 살아남는다.” (장 뒤비뇨)

  프랑스의 속담은 일상과 축제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할 줄 아는 오랜 지혜를 일깨워준다. 

“축제가 끝나면 빚과 더러운 속옷이 남는다.” 
“축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을 쉬고 축제를 벌여서는 안 된다.” (프랑스 속담)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러시아 축제의 토포스가 민간신앙적 축제와 정교 축일이 독특하게 결합된 양상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때 러시아의 주요 전통 축제들은 이를 잘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서 의의가 깊다. 러시아 전통 축제는 정교 축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교회 달력에 따른다. 교회 달력은 율리우스력 혹은 구력이라고도 불리며 그레고리력 혹은 신력에 대비된다. 신력은 1918년 2월 14일을 2월 1일로 개정한 달력 개혁령에 따라 러시아의 공식 달력이 되었지만 교회에서는 여전히 구력을 사용하며 교회의 축일들과 주요 민중 축제들도 구력을 따르고 있다. 
  러시아판 사육제인 ‘마슬레니차’는 사육제와 마찬가지로 금욕과 절제의 기간인 사순절을 앞두고 풍요로운 음식과 놀이를 즐기는 민중 축제이다. 사육제와는 다르게 육식이 금지되지만 그 대신 버터, 치즈, 달걀 등은 허용된다. 마슬레니차란 단어도 ‘버터’를 뜻하는 ‘마슬로’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마슬레니차는 정교회에 의해 사순절 전으로 이동하여 부활절 8주전에 시작하는 등 서유럽의 사육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화 되었지만 그 기원은 기독교 수용 이전의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러시아에서 마슬레니차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봄맞이 축제이자 묵은해를 털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신년 축제였다. 14세기까지 고대 러시아에서는 봄을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해 음력 3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는데 이 축제를 통해 한 해 동안 쌓인 안 좋았던 감정들, 나쁜 기억들을 털어내고 가볍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러시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축제였다고 하는 마슬레니차는 일주일 동안 계속된다. 마슬레니차가 시작되면 러시아인들은 이 축제의 상징적 음식인 블린을 굽기 시작한다. 러시아 전통 음식 블린은 기나긴 겨울동안 모두가 애타게 그리워한 태양을 상징한다. 러시아어에 마슬레니차와 블린 관련 속담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러시아인의 삶과 문화에서 이것이 가지는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다. 

“블린 없는 축제는 마슬레니차가 아니다.” 
“블린은 아무리 먹어도 괜찮다.” 
“보통의 삶이 아니라 마슬레니차다(더 없이 유복한 삶).” 
“블린과 키스는 세는 것을 싫어한다.” (러시아 속담) 

  마슬레니차 축제가 절정에 달하는 목요일엔 폭음과 폭식, 음주와 가무가 끊이지 않는 그야말로 난장트기의 하루가 이어진다. 축제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 이른바 ‘용서의 날’은 한 해 동안 저지른 잘못에 대해 서로의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주는 날이다. 마슬레니차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장례하는 예식이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 장례 의식은 중세 패러디의 진수를 보여준다. 수의를 입은 허수아비가 러시아 전통 장례 의식에 따라 썰매에 태워지면 사제복 대신 나무껍질 옷(‘가짜 재료’)을 입은 가짜 사제가 장송곡을 부르고 그 뒤를 장례 행렬이 뒤따른다. 마지막으로 허수아비를 화장함으로써 장례의식이 마무리되는데 교회 장례의식을 패러디하는 허수아비 장례식 내내 떠들썩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슬레니차를 보내는 풍습은 오스트롭스키의 희곡 <백설공주>(1873)와 이를 각색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동명의 오페라(1881)를 통해 재현된 바 있다.

“정직한 마슬레니차! 너를 맞이하는 것은 유쾌하나 너를 보내는 것은 너무도 힘들구나.
[...] 정직한 마슬레니차, 안녕. 살아있는 한 다시 만나게 되겠지. 비록 일 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마슬레니차는 다시 올 테니까.” (오스트롭스키, 『백설공주』, 1873)

  러시아어에 “마슬레니차 다음에 대재(大齋)가, 고난주간을 뒤따라 부활절이 온다.”라는 속담이 있다. 실제 축제들의 순서를 나열하고 있는 이 말은 ‘인생이란 행복과 불행의 반복이다’를 뜻한다. 이 속담에는 이들 축제를 바라보는 민중의 시각이 드러난다. 즉 마슬레니차와 부활절이 주는 행복과 기쁨, 그에 반해 대재와 고난주간을 견뎌내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다. 마슬레니차 축제 뒤에는 길고도 힘든 대재기간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 축제를 잘 즐기는 것은 이후의 대재를 잘 보내기 위한 준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슬레니차와 대재에 대한 민중의 시각은 유명한 러시아 속담 “늘 마슬레니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재도 있기 마련이다.)”에도 반영되어 있다. 오스트롭스키의 희곡 제목으로 더욱 유명해진 이 속담이 ‘(인생이란) 항상 좋은 때만 있는 것은 아니다’를 뜻하게 된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부활절 전의 금욕과 금식, 절제의 기간인 사순절은 러시아어로 ‘벨리키 포스트’라 하며 가장 길고 힘든 대재(大齋) 기간을 가리킨다. 러시아의 주요 정교축일은 재계(齋戒) 기간을 수반한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에서 재계 기간은 일 년에 총 4회, 즉 대재 외에도 성모승천절 재계, 성 베드로축일 재계, 성탄절 재계가 있으며 정교회에서 금식과 금욕의 기간으로 정한 날이 거의 200여일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모든 재계가 엄격히 지켜졌던 것은 아니지만 19세기까지 부활절 이전의 대재와 성탄절 재계만큼은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지켰다고 한다. 특히 제정 러시아 시대 재계 기간의 준수는 국가에서 강요하는 의무 중 하나였다.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는 성직자들에게 재계를 지키는 사람의 수를 셀 것을 요구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스몰랸스키, 『러시아 정교와 음식문화』 참조). “대재가 모두를 애먹인다”, “재계로는 죽지 않지만 과식으로는 죽는다” 등 재계 관련 속담이 다수 존재함은 재계가 민중의 일상생활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과거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재계 풍습은 재계용 요리의 발전으로 이어져 풍성하고 다양한 절제용 음식 문화의 발달을 낳기도 하였다.
  가장 길고도 중요한 대재는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 같은 엄격성은 없을지라도 현대 러시아 교인들도 대재만큼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마슬레니차 축제를 끝내고 맞이하게 되는 첫날이 바로 대재가 시작되는 월요일이다. 이 날은 ‘정결한 월요일’이라 불린다. 부닌의 단편 소설 『정결한 월요일』(1944)의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적 배경이 바로 이 날이다. 이때는 공연 등과 같은 대중적 오락거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결혼도 금지되었다. 대재 기간의 마지막 한 주는 ‘고난 주간’이라 불리며 각각의 요일 앞에 고난을 뜻하는 ‘스트라스니’ 혹은 ‘대(大), 위대한’을 뜻하는 ‘벨리키’를 붙인다.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위대한 목요일’, ‘고난의 금요일’ 등의 명칭은 바로 이 주간을 뜻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고난의 금요일’도 대재기간의 마지막 금요일, 곧 부활절 바로 전의 금요일을 가리킨다.

“이 모든 일은 고난의 금요일에 일어났다” (도스토옙스키, 『상처받은 사람들』, 1861)

  재계가 러시아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예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일 년에 두 번 금식하였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성모승천절 재계 기간이었다. 그래서 집안의 그 누구도 이 기간에 금식하려는 내 계획에 놀라지 않았다.” (톨스토이, 『가정의 행복』, 1859)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일 년에 4번 재계를 지켰으며 이는 푸시킨 시대에는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예브게니 오네긴』의 라린 부부가 일 년에 두 번 금식했다는 것은 이들이 재계를 엄격히 지키는 독실한 신자는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반면에 톨스토이 작품의 여주인공이 성모승천절 재계까지 지키려고 하는 상황은 여주인공의 내면적 고통과 신앙심을 드러내주는 것이다(페도슈크, 『19세기 러시아 일상생활 백과사전』 참조). 이처럼 재계가 러시아 작가들에 의해 등장인물들의 신앙심과 내면 상태를 드러내주는 코드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당시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재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대재와 성탄절 재계는 많은 사람들이 지켰다고 한다면 나머지 두 개의 재계를 지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민중들 사이에서 성 베드로 축일은 베드로 재계기간보다는 풀 베는 시기로서 더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아래의 예는 『안나 카레니나』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레빈의 풀베기 장면 바로 앞 상황이다.

“ -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나, 포미치, 풀을 베야 할까 아니면 기다릴까?
-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식으로 하자면 성 베드로 축일까지 기다려야죠. 그런데 나리는 늘 그보다 먼저 풀을 베시더군요.”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877)

  힘들었던 대재 기간이 마침내 지나가고 부활절이 시작된다. 부활절은 가장 중요한 정교 축일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민중 축제 중 하나이다. 러시아어로 부활절을 뜻하는 ‘파스하’는 ‘이동, 전환’을 뜻하는 고대 히브리어 ‘페사흐’에서 온 단어로,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을 기리는 유월절 명칭에서 기원한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후 첫 보름달 후의 일요일로 지내며 그 시기가 매년 유동적이다. 교회 축일들 중 많은 것들이 부활절을 기준으로 계산되는 까닭에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해마다 부활절을 중심으로 한 교회달력을 배포한다. 러시아 민중들은 부활절 주간을 ‘성스러운 주일’을 뜻하는 ‘스뱌타야 니델랴’ 혹은 ‘스뱌타야’라 부른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말하는 스뱌타야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부활절 주간이다.

“재계 기간의 마지막 주 내내, 그리고 스뱌타야를 병원에서 보냈다.”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866)

  부활절 전에 긴 금욕과 금식의 기간인 대재를 지켰던 러시아인들은 풍요로운 식탁으로 부활절을 맞이한다. 부활절 축제는 또한 부활절을 뒤따르는 주간, 민중식으로 말하자면 ‘크라스나야 고르카(아름다운 언덕)’ 주간으로도 유명하다. 이 기간은 대재기간 동안 금지되었던 결혼식을 올리는 기간이다. ‘크라스나야 고르카’는 원래 기독교 수용 이전부터 있었던 민중축제로서 본격적인 농사일에 앞서 마을사람들이 모여 주연을 벌이던 축제이자 분주한 농번기에 앞서 결혼식이 활발히 거행되던 시기를 가리켰다. 이것이 부활절 축제와 결합되어 부활절의 또 다른 의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들면 유명한 여름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구력 6월 24일(신력 7월 7일)에 행해지는 이반 쿠팔라 축제가 그것이다. 정교회에서는 이 날을 세례 요한의 날로 기념하지만 이 축제의 기원은 기독교 이전의 슬라브 축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팔라’라는 명칭은 ‘목욕하다’를 뜻하는 러시아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이 축제는 물로 정화하는 의식과 관련된다. 물, 불, 약초가 악한 영을 쫓아내고 사람을 정화시켜준다고 믿은 고대 슬라브인들의 민간 신앙과 관련된 축제지만 정교회에서 세례 요한의 탄생일과 겹치는 이 날에 요한의 러시아식 이름인 이반을 앞에 붙임으로써 이반 쿠팔라가 된 것이다. 예로부터 러시아인들은 이반 쿠팔라 축제 전에 신성한 효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약초를 캐기 위해 숲을 헤매고 다니고, 쿠팔라 축제날 아침에 물로 깨끗이 몸을 씻은 후 저녁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위를 뛰어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정교회는 이 축제가 주술적 성격이 강하고 이교도적이라 하여 금지하기도 하였다 
  여름 축제와 겨울 축제 사이에 트로이차 주간이 있다. 트로이차 축일은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한 뒤 50일째 되는 날 사도들에게 성령을 강림하게 한 날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절 혹은 오순절을 뜻하는 정교축일이다. 그러나 트로이차 축일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식물을 숭배하는 민간 신앙의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 트로이차 예배 때 향초를 놓고 그 위에 눈물을 흘려 정화하는 의식도 민간 신앙과 관련되며 또한 고대 러시아에서부터 이어져온 민중축제인 ‘세믹’이 트로이차 주간 안에 들어있다는 점도 그러하다. 세믹 축제(부활절 이후 일곱 번째 목요일)는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표상으로 간주되는 자작나무 숭배 축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축제 때 민중들은 자작나무 가지와 꽃으로 집과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자작나무로 화관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이 자작나무를 중심으로 호로보드를 춘다. 러시아 민중의 관습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고골은 작가 수첩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트로이차 날과 세믹에 3일 동안 일을 하지 않는다. 화관을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강에 화관을 던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 호로보드 축제이다.” (고골, 『작가 수첩』, 1841~1844)

  고골의 메모에도 나타나는 호로보드는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추는 러시아의 전통 춤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추는 호로보드를 통해 동질감과 공동체 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러시아 축제 때 호로보드를 포함하여 집단적 산책 행사인 굴랴니예, 집단 패싸움 등 대규모의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함께 즐기는 놀이들이 발달했으며 이러한 놀이들은 일체감과 소속감을 드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기나 긴 러시아 겨울 축제의 백미는 성탄주간인 ‘스뱌트키’라 할 수 있다. 스뱌트키는 ‘성스러움, 신성함’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성함’이라는 축제의 근본적 특성을 그 어원에 담고 있다. 성탄주간인 스뱌트키는 성탄절(구력 12월 25일, 신력 1월 7일)에서 주현절(구력 1월 6일/신력 1월 19일)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농촌의 일손이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으로 러시아인들은 이 축제동안 풍성한 식탁과 흥미로운 놀이들을 마음껏 즐겼다. 성탄축제인 스뱌트키는 기독교 축제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민간 신앙적 요소들이 대거 잔재한다. 가령 성탄절 전야에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부르던 노래인 ‘콜랴다’는 민간 신앙의 동지 축제에서 기원한다. 
  특히 성탄주간에 민중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던 점을 보는 풍습은 명백히 기독교적 시각에 반하는 것이었다. 

“스뱌트키가 되었다. 얼마나 기쁜가!
아쉬워할 것도 없고 먼 훗날의 인생이 끝없이 찬란하게 펼쳐진
경박한 젊은이들이 점을 친다.
모든 걸 돌이킬 수 없이 잃어버리고 무덤 앞에까지 온 노인들도
안경 너머로 점을 친다.”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1831)

  『예브게니 오네긴』에는 여주인공 타티야나가 달을 향해 거울을 비추는가 하면 옆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나자 그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래의 신랑을 점치는 행위이다. 처녀가 달밤에 거울을 비추면 미래의 신랑 모습이 나타나고 또 그때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이름과 똑같은 사람이 남편이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접시에 물을 받아 놓고 거기에 반지를 빠뜨려 운명을 알아보는 점도 유행했으며 이때 부르던 노래는 ‘접시의 노래’라 불렸다. 스뱌트키에 점을 보는 풍습은 주콥스키의 <스베틀라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언젠가 예수세례일 전야에
아가씨들은 점을 쳤다네.
신발 한 짝을 벗어 문 너머로 던지곤 했지.” (주콥스키, <스베틀라나>, 1813)

  1918년까지 구력을 사용했던 러시아에서 스뱌트키(구력 12월 25일~1월 6일)는 새해 축제까지 포함했다. 러시아에서 새해를 1월 1일로 기념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의 달력 개혁령에 의해서이다. 고대 러시아에서는 음력 3월 1일을 새해로 기념하다가 이반 3세 재위기간(1462~1505)에 9월 1일을 새해로 규정하는 칙령이 반포됨에 따라 가을에 새해를 기념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달력 개혁령은 천지창조로부터 연도를 세던 연도 계산을 그리스도 탄생을 기준으로 하고(당시 7208년이 기원 후 1700년이 됨) 1월 1일을 새해로 받아들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와 함께 표트르 대제는 새해를 화려하게 경축할 것을 지시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트리장식, 폭죽, 불꽃놀이 등 유럽식 새해맞이 풍습을 대거 유입시켰다. 이렇듯 스뱌트키에는 민간신앙적 요소, 정교 축일, 서양의 새해맞이 풍습까지 다양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마슬레니차부터 스뱌트키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주요 전통 축제들은 민간 신앙적 요소와 정교축일의 요소가 독특하게 혼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기독교 수용 이전에 자연의 순환에 따라 절기를 기념했던 축제들이 기독교 수용 이후 기독교 축제가 된 것이다. 춘분 축제였던 마슬레차는 부활절과 사순절을 준비하는 축제로 변모하고, 하지 축제인 쿠팔라 축제는 세례 요한의 축일과 결합되면서 이반 쿠팔라 축제가 되었다. 정교 축일인 트로이차 주간 안에 민간 신앙 기원의 세믹이 포함되고 동지 축제인 콜랴다는 크리스마스 주간인 스뱌트키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렇듯 민간 신앙과 강한 연관관계를 지니는 러시아 전통 축제들은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고 정교회의 묵인 혹은 (민중의 일상생활 속에 정교를 뿌리내리게 하려는) 의도적 노력 하에 기독교 축일들과 결합되면서 이중 신앙의 표상으로서의 독특한 러시아적 축제의 토포스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축제 역사에서 큰 줄기를 이루는 것은 민중 축제이지만 제정 러시아 시대는 민중 축제 외에 국가의 공식적인 축제들로도 명성을 떨쳤다. 국가의 공식 축제로는 ‘황제의 날’이라고도 불리는 황실의 주요 행사들(대관식, 명명일, 결혼, 후계자의 탄생 등)과 국가적 의의를 지니는 주요 기념일을 경축하는 행사들이 있었다. 이러한 축제는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했으며 그 목적에 걸맞게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엄격한 규례에 따라 진행되었다. 물론 제정 러시아 시대도 러시아 정교회가 일 년의 1/3 이상을 종교축일로 제정하는 등 명실상부한 종교 축제의 시대였지만 이 시대의 종교 축제를 순수하게 종교적 의미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교회의 주요 축제는 국가의 공식적인 축제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군대 퍼레이드와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황제와 그의 가족이 위치하였다. 황제가 군대 퍼레이드를 직접 지휘하는가 하면 대주교는 황제와 군대에 성수를 뿌리는 등 국가의 의례와 교회의 의례가 혼합되는 방식으로 축제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처럼 황제의 위엄과 권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축제라는 측면에서 제정 러시아 시대의 공식적 축제들에서도 축제의 정치성이 드러나지만 축제의 정치적 기능이 보다 직접적으로 이용되던 시기는 소비에트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 축제는 공산주의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으로 각광받았다. 소비에트 정권은 러시아인의 집단주의적 민족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국민화합과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한 효율적인 수단으로서 축제의 역할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러시아 겨울의 날’, ‘자작나무의 날’ 등의 인위적인 축제들이 제정되었으며 이들 축제는 종교의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가급적 세속적인 방법의 축제를 모색한 결과의 산물이었다(황영삼, <러시아 축제문화 속에 나타난 러시아인의 특징> 참조). 마슬레니차는 ‘러시아 겨울의 날’로, 트로이차 주간의 세믹 축제는 ‘러시아 자작나무의 날’로 둔갑하였지만 이러한 인위적 축제들은 민중들의 자발적 축제로 변모하지는 못하였다. 
  소비에트 시기 종교 탄압이 심화되면서 종교축일과 관련된 대다수의 축제들이 불법화되고 이에 따라 수많은 전통이 사라지거나 약화되어갔다. 그러나 민중들의 축제를 근본적으로 말살하지는 못하였는데 가령 소비에트 시기에도 부활절과 같은 종교축일은 여전히 민중들의 신앙과 유리되지 않았으며 주요 정치 지도자들조차 부활절 미사에 참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황영삼, <러시아 축제문화 속에 나타난 러시아인의 특징> 참조).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축제는 그 형태적인 측면에 있어서나 의미 기능적 측면에 있어서 과거의 축제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전통 축제 중 많은 것이 사라졌거나 대폭 축소된 형태로만 보존되고 있다. 이는 비단 러시아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개인화와 개별화가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축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규모 군중 동원력, 자발성, 통합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점차 과거의 위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주’와 ‘객’, 참여자와 관람자의 구분을 몰랐던 중세의 축제와 달리 현대의 축제에서는 이 구분이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대규모 군중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의 의미 기능은 상당 부분 사라졌으며 현대적 인식에서 축제는 ‘참여하는’ 축제에서 ‘관람하는’ 축제로 변모하고 있다. 종교적 기원을 지녔던 축제에서 ‘제’의 의미는 점차 사그러들고 ‘축’의 의미가 전면에 대두되면서 현대의 축제는 종교적 신성성보다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그러나 중세와 같은 강력하고 집단적인 일탈이 아니라 보다 개인화된 일탈의 의미가 두드러지는 듯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프라즈니크’라고 한다면 ‘축제, 축일’의 의미보다 단순히 ‘휴일’의 의미가 더욱 부각되는 듯하다. ‘프라즈니크’는 휴일이, ‘페스티발’은 문화공연이 되면서 “금기의 파괴”이자 “집단적 난장 트기”였던 과거 축제의 의미 기능은 상당 부분 변화 혹은 축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에는 ‘축제’ 개념을 표현하는 두 개의 대표어가 있다. 프랑스어 ‘페트’와 러시아어 ‘프라즈니크’는 종교 축일, 세시풍속, 사회 정치적 사건을 기념하는 시민 축전 등을 가리키며, 프랑스어 ‘페스티발’과 이로부터 차용된 러시아어 ‘페스티발’은 특정 장르의 예술 축제나 문화 공연 등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인간이 노래와 춤, 놀이를 즐기는 ‘유희의 인간’, ‘축제의 인간’인 까닭에 축제는 인간의 삶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세계 각국은 자신의 문화와 기후, 계절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축제를 발전시켜 왔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도 다양하고 풍성한 축제를 향유한다. 이들 축제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듯 상이한 역할과 기능을 하면서 변천해 왔다. 두 나라의 전통 축제는 모두 계절의 변화, 농사와 관련된 절기들을 기념하는 것들이며 또한 종교 축일이 축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탄절, 부활절 등과 같은 종교 축일은 기독교 문명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종교의 수용과 정착 과정이 상이한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종교 축제는 여러 차이점을 지닌다.
  로마 교황청의 후원 하에 국교를 가톨릭으로 삼은 프랑스는 중세 내내 교회가 미신으로 판단하는 세속 신, 즉 토속신앙이나 민속의례를 근절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교회는 지나치게 많은 축제의 수를 줄이고 토속적 의례를 기독교화거나 이교적, 미신적 축제를 순수하게 종교적인 축제와 분리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미신과 토속신앙에 사로잡힌 신도들의 종교 생활을 제도적으로 관리해 나간 것이다. 반면 10세기 말 비잔틴으로부터 정교를 수용한 러시아에서는 민중의 생활 깊숙이까지 민간 신앙이 침투해 있었던 까닭에 민중의 기독교화가 훨씬 더디고 힘들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교회는 민중들의 삶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민간 신앙적 축제를 말살하지 않고 많은 요소를 수용하여 정교축일과 결합시켰으며 축제는 민중의 기독교화에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로써 민간 신앙에 기원을 둔 축제의 요소들과 정교 축일의 독특한 결합이 러시아 전통 축제의 밑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에서는 점차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민중 축제와 공식적이고 엄격한 규례에 따라 행해지는 국가 축제가 분리되었다. 특히 이러한 분리는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제정 러시아 시대와 소비에트 시대에 두드러졌다. 민중 축제에서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일상과의 단절’이다. 프랑스의 사육제나 사육제의 러시아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슬레니차 축제와 같은 민중 축제들에서는 기존의 가치체계가 전복되고 엄숙함, 성스러움은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일상의 노고, 가난, 위계 관계로부터 일탈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국가의 공식적 축제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고 엄격한 규례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축제들에서는 축제의 정치적 기능이 전면으로 대두된다. 제정 러시아 시대 축제는 황제의 위엄과 권력을 드러내주는 기호로 작용하였고, 프랑스 혁명기와 소비에트 시기의 축제는 사회의 단합과 정부기관의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복무하였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진전되는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와 러시아 사회에서 많은 전통 축제들은 사라지거나 의미와 형식이 축소되었다. 국가의 공식 축제들 또한 그 정치 사회적 기능이 과거와 같은 강력한 효과를 띠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축제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자발성, 통합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점차 개인화, 탈종교화 되는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가족적 유희적 차원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다. 축제의 전통성은 사라져가고 경제성이 주목을 받으면서 축제의 대표성이 예전처럼 ‘페트’와 ‘프라즈니크’의 독점적 권리로 머물지 않고 ‘페스티벌’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관 토포스 가톨릭; 광장; 민중; 부르주아; 산책; 술; 신앙; 음식; 이데올로기; 자유; 정교; 혁명
참고자료(프랑스) Bakhtine, M. L'oeuvre de François Rabelais et la culture populaire au Moyen Age et sous la Renaissance Gallimard, 1982.
Belmont, N. Mythes et croyances dans l'ancienne France, Flammarion, 1973.
Caillois, R. Les Jeux et les hommes : le masque et le vertige (1958), folio, 1992.
Cox, H. La fête des fous : essai théologique sur les notions de fête et de fantaisie, Seuil, 1971.
Durkheim, E. Les Formes élémentaires de la vie religieuse (1912),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UF, 2013.
Duvignaud, J. Fête et civilisations, Actes Sud, 1991.
Eliade, M. Le mythe de l'éternel retour Editions Gallimard, 1969.
Fabre, D. Carnaval ou la fete à l’envers Gallimard, 1992.
Ozouf, M. La Fête révolutionnaire 1789-1799, Gallimard, 1976.
Wunenburger, J.-J. La fête, le jeu et le sacré, Edition Universitaires, 1977.
송영규, 『프랑스의 세시풍속』, 만남, 2001.
유럽사회문화연구소, 『축제와 문화적 본질』, 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장 뒤비뇨, 『축제와 문명』, 류정아 역, 한길사, 1998.
프로이트, 『토템과 터부』, 강영계 역, 지만지, 2009.
참고자료(러시아) Конечный А. А. и другие, Быт пушкинского Петербурга:Опыт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ого словаря, СПб.:Изд-во Ивана Лимбаха, 2011.
Лучицкая С. И. <Праздник>, Словарь средневековой культуры, М.: «Российская политиче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2003.
Топоров В. Н. <Праздник>, Мифы народов мира: Энциклопедия в 2-х томах, Т.1, М.:Сове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1992
Фасмер М. Р. Этимолог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русского языка, М., 1987.
Федосюк Ю.А. Что непонятного у классиков, или Энциклопедия русского быта XIX века, М.: Флинта, Наука, 2006.
류정아, 『축제의 인류학』, 살림, 2003.
리하초프, <고대 러시아의 웃음세계>, 『러시아 기호학의 이해』, 이인영 엮음, 민음사, 1993.
바흐친,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이덕형, 최건영 옮김, 아카넷, 2001.
스몰랸스키, 『러시아 정교와 음식 문화』, 정막래 옮김, 명지출판사, 2000.
임영상, <종교축일과 민속명절에 나타난 러시아적 삶의 특징>, 슬라브 연구 13, 1997.
황영삼, <러시아 축제문화 속에 나타나 러시아인의 특징>, 슬라브 연구 17, 2001.
추천자료(프랑스) 미하일 바흐친,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전승희 외 공역, 창작과 비평사, 1988.
장 뒤비뇨, 『축제와 문명』, 류정아 역, 한길사, 1998.
장 자크 루소, 『신 엘로이즈』, 서익원 역, 한길사, 2008.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유석호 역, 문학과 지성사, 2004.
프로이트, 『토템과 터부』, 강영계 역, 지만지, 2009.
추천자료(러시아)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박형규 옮김, 누멘, 2010.
____________, 『상처받은 사람들』, 윤우섭 옮김, 열린책들, 2007.
부닌, 『정결한 월요일』, 러시아 단편소설 걸작선, 양장선 옮김, 행복한책읽기, 2010.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윤새라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
________, 『가정의 행복』, 톨스토이 중단편선 1, 김성일 옮김, 작가정신, 2010.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 시로 쓴 소설』, 김진영 옮김, 을유세계문학전집,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