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러시아 문화 토포스 비교 사전 상세보기
카페
범주명 자연과 공간
토포스명(한글) 카페
토포스명(프랑스) café
토포스명(러시아) кафе
정의 1. 새로운 이야기는 카페에서 시작된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카페는 카흐베하네 Kahvehane를 어원으로 볼 수 있다. 터키어로 커피를 의미하는 카흐베 kahve와 캐러밴을 위한 여관이나 선술집을 의미하는 하네 hane의 결합어인 카흐베하네는 카페 산업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커피의 어원인 카흐와 quhwa 또는 카와 khawah가 자극과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의미인 것처럼 공간으로서의 카페는 커피를 마심으로써 형성된 활발한 사교의 장을 가리킨다. 카페의 이런 사교적 기능은 커피가 본래 비사교적이었던 수피들의 종교의식을 위한 신성한 각성제의 기능을 하던 것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사교를 위해 마시는 음료가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중이 카페의 이런 분위기에 폭발적으로 호응함에 따라 사교적 공간으로서의 카페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사교의 장으로서의 카페 문화의 최초 발상지는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에서는 1554년 하큼과 샴스라는 시리아인이 두 군데의 커피의 집을 지으면서 카페가 처음 등장하였으며, 10여년 후에는 이스탄불에서 카페의 수가 600여 개 이를 정도로 카페는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카흐베하네라는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카페의 전신은 주로 포도주를 취급하는 선술집이었지만 카페가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자 재력을 갖춘 거상들이 실내인테리어를 화려하게 꾸미면서 손님을 불러 들였으며, 이것은 당시 공중목욕탕을 대신하여 사교의 장을 제공하게 되었다. 
  유럽 최초의 카페는 17세기 중엽인 1650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한 중동 유대인이 카페를 열면서부터 생겨났다. 1652년에는 런던에서 파스콰 로제가 처음 카페를 열었으며, 1700년까지 영국에서는 2,000개를 넘어서는 커피점이 생겨나 ‘여론의 대장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카페는 1666년 암스테르담에, 1672년에는 파리에, 1683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본거지이자 당시 서양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던 빈까지 진격하였으며, 1694년 라이프치히에 카페가 들어섰다. 
  프랑스에서는 1686년에 생긴 카페 르 프로코프를 프랑스 카페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선술집이 고급스러운 카페로 변신하여 공중목욕탕과 같은 사교의 장을 제공한 것처럼 공중목욕탕을 개조한 카페 르 프로코프는 스타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급스러운 파리 카페의 원형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파리에서는 1716년에 300여 곳, 1788년에 1800여 곳의 카페가 성업 중이었다고 한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에서 카페는 정치토론의 장이자 혁명 정신의 온상지의 역할을 하였다. 대혁명의 시기가 지난 19세기부터 카페는 시인, 예술가, 철학자들에게 문학, 연애, 취미, 철학 등에 관한 담론의 장을 제공하였으며, 20세기에는 19세기의 이러한 전통이 세계 카페의 수도라고 일컫는 생 제르맹 데 프레의 ‘레 두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까지 이어진다. 1960년에는 파리에 소규모 카페까지 약 25만 2천 곳에 이르렀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오늘날 커피, 술, 간단한 식사 거리를 판매하는 소규모 레스토랑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카페 кафе’는 프랑스어 ‘카페 саfé’를 차용한 것이다. 프랑스어 ‘카페’는 원래 포도주의 일종을 의미하는 아랍어 ‘카흐와 qahwa’에서 유래되었으며, ‘카흐와’는 이디오피아의 커피나무 생산지인 ‘카파’지역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원래 프랑스어로 ‘카페’는 ‘커피 coffee’를 의미하며, 이것이 발전되어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집, 커피를 파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 커피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표트르 1세 때 영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어 ‘커피 coffee’를 차용하여 러시아어로 커피를 ‘코페 кофе’라고 불렀으며 커피를 파는 장소를 ‘커피의 집’이라는 뜻의 ‘코페이느이 돔 кофейный дом’ 으로 불렀다. 유럽 문물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에 러시아 사회에서 커피는 매우 인기가 있었고, 특히 예카테리나 여제는 커피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카페가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문을 열기 전, 이미 ‘콘디테르스카야 кондитерская’로 불리는 유사한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과자, 사탕, 단것’등을 의미하는 ‘콘디테르 кондитер’ (‘만들다, 준비하다’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독일어 ‘konditer’를 18세기에 차용한 말이다)에서 파생된 ‘콘디테르스카야’는 주로 과자, 사탕, 빵, 음료 등을 판매하는 장소였다. 
  러시아 최초의 콘디테르스카야는 1791년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점되었는데, 두 명의 프랑스인 제과 제빵업자인 바로와 베랑줴가 네프스키 18번지에 유럽식 과자, 빵, 초콜릿, 차등을 판매하면서 당대 러시아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특히 이곳은 19세기에 많은 문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그것은 콘디테르스카야에 항상 많은 양의 신문들과 잡지들을 무료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바로가 죽고 난 뒤 그의 아들인 볼프가 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이 가게는 ‘볼프와 베랑줴의 콘디테르스카야’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카페와 유사한 기능으로 번성하였다. 
  현재 ‘볼프와 베랑줴의 콘디테르스카야’는 이층으로 자리를 옮겨 레스토랑으로 바뀌었고, 원래의 자리에는 1983년부터 ‘문학 카페’라는 이름의 카페가 들어서있다. ‘볼프와 베랑줴의 콘디테르스카야’가 ‘문학 카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푸시킨, 도스토예프스키, 페트루쉐프스키, 체르니체프스키, 차이코프스키, 샬랴핀 등 당대 유명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이곳을 매우 애용했기 때문이다. 
  푸시킨은 자신의 집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이 콘디테르스카야를 자주 찾았으며, 1837년 1월 27일 결투 입회인 단자스와 함께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러 레모네이드 한 잔을 마시고 결투 장소로 가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또한 푸시킨이 죽고 난 며칠 뒤, 젊은 레르몬토프는 이곳에서 푸시킨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시인의 죽음』을 낭독하기도 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16세기 이스탄불의 카페는 종교적 뿌리에서 벗어나 잡담을 즐기는 장소였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종교적 황홀경에 빠지는 척 하는 대신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홀짝이거나, 시낭송회를 열었고, 여자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거나 인형극을 선보였다. 수피교의 커피의식이 우스갯소리와 허풍으로 바뀌었다. 이 당시 이스탄불의 카페에는 “교수, 위선적 신비주의자(수피교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자들로 북적여 앉을 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탄불의 카페는 단골손님을 더욱 즐겁게 하기 위해 일곱 가지 마약과 향료를 섞은 ‘파르아브스’를 넣은 ‘특별’ 커피나 이슬람식 환각제를 제공하는 등 타락의 공간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환각제는 삶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 (중독된) 사람들은 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매음굴 역할까지 했던 카페의 으뜸가는 특별 서비스는 섹스였다. 어여쁜 사내아이를 접대부로 고용하고 손님을 끌고 있는 카페에 대해 오스만 제국 도덕주의자들은 “추악한 작태가 판치는 소굴이며, 젊은이를 데려다 놓고 욕정을 채우는 곳”이라고 비난했다.
  사교적인 공간의 성격을 지닌 카페가 유럽에 등장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당시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을 여행하거나 교역하러 온 당시 유럽 각국 여행자들은 ‘이슬람의 와인’이라고 부르는 커피를 고향사람들에게 전했다. 처음에 커피는 아랍인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라는 이유로 ‘악마의 음료’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을 이교도에게만 허용하는 것은 유감이라고 선언하면서 커피에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유럽에 상륙한 커피는 '깨어있는 도취감‘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이 술 취한 유럽을 깨우기 시작했고, 카페는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연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인들은 카페에서 유럽의 근대시민사회가 꼭 필요로 하는 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카페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열어간 정치적 음모의 공간의 역할을 한 것은 유럽에서 최초로 계몽주의의 싹이 튼 영국에서부터였다. 영국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 존 로크도 커피 하우스의 단골이었다. 아베프레보는 “정부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자유를 위한 의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커피 하우스는 영국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차가 커피를 밀어내게 됨에 따라 카페의 왕국이 된 곳은 프랑스였다. 파리에서 커피의 소비가 본격화된 것은 1669년 술탄 메흐메드의 대사인 솔리만 아가가 파리에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값진 터키 카펫이 걸린 자신의 화려한 아파트에 파리의 명사들을 초대하고, 커피를 마시기 전에 장미향이 나는 물에 손을 씻고, 멋들어진 의상을 차려입은 아프리카 카베지바치가 나와 원두를 볶아서 빻은 뒤에 신비한 ‘흑포도주’를 끓였고, 무릎을 꿇은 채 최고급 모카를 내놓았다. 몰리에르가 『서민귀족』(1670)에서 그 지나친 풍조를 비꼴 정도로 파리의 웬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을 터키식으로 꾸며놓고 아랍 옷을 걸친 누비아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모카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파리 최초의 카페는 1672년에 아르메니아 사람 파스칼이 파리의 생제르맹 근처에 연 카페였다. 그러나 겉치레가 거의 없는 단순하고 정직한 이 카페는 스타일에 집착하는 프랑스 사람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곧 문을 닫았다. 1686에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교가 있는 라틴구에 문을 열었던 ‘프로코프’는 이러한 스타일의 파리 카페의 원형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페이다. 파스칼의 제자였던 프랑시스코 프로코피오 델 코스텔리라는 이탈리아계 주인은 프랑스인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음료로서의 커피가 아니라 ‘유행으로서의 커피’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카페를 대리석 탁자와 거울과 샹들리에로 장식하여 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흑백 스타일 복장에 흰색 가발을 하고, 팔에는 백색 헝겊을 걸친 채 한 손에 은색의 티포트를 쥐고 있는 이 카페의 가르송은 바로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이러한 스타일의 카페에 “버터처럼 녹아들었다.”는 표현은 프랑스 카페의 특성을 잘 요약한다. 17세기의 프로코프에는 맞은편에 있었던 코메디 프랑세즈의 남녀배우들과 그 관객이 연극과 오페라에 대한 평을 하면서 수다를 떨기 위해 단골로 드나들었다. 이때 프로코프와 같은 카페는 격렬한 문학 토론의 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프랑스의 고급사교계 문화를 이끌어갔다. 파리뿐 아니라 마르세유, 또는 리용과 같은 대도시의 대로변이나 대로가 서로 만나는 네거리 광장 주변에서 생긴 초창기 카페에서도 이와 같은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의 출현과 더불어 파리에서 카페의 역할이 한층 두드러졌다. 과거의 철학자들이 고매한 성찰을 위해 고독을 찾았다면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사회에 유용한 생각을 즐겁게 교환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일과로 삼았다. 카페는 “생각의 교환을 통해 이성을 벼리고, 사교를 통해 교류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세련된 감성을 갖추어” 나가기 위해 가장 즐겨 찾던 공간이었다. 쥘 미슐레의 지적처럼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카페와 호텔은 파리를 하나의 거대한 카페로 만들었다.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페르시아인 위즈베크의 입을 빌려 카페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지성을 부여하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17세기에는 문학카페였던 프로코프에는 하루에 커피를 열두 잔이나 마실 정도로 커피 애호가였던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 계몽주의자들이 모여들어 이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면서 정부와 교회 등 기존 권력을 자유롭게 비판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로 프로코프는 ‘혁명의 대학’ 또는 ‘파리의 진정한 신문’이라고 일컬어졌을 정도로 혁명카페가 되면서 정치적 담론의 터전이 되었다. 프로코프에는 자코뱅 당원들의 자유의 상징인 르 보네 프리지앙(붉은 모자)이 처음 등장하였으며 가르송은 백과사전 노릇까지 했다. 이들은 볼테르가 최근에 발표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들어두었다가 카페에서 논쟁이 벌어지면 확실하게 해결하곤 했다. 1740년대에 들어와 예전에 프로코프에서 만나던 디드로, 루소 등 계몽주의자들은 ‘밤에 천 개의 호롱불로 조명을 하여 현란한 분위기’를 만들었던 카페 드 라 레장스에 드나들었다. 이 카페는 디드로가 『라모의 조카』에서 철학자와 라모의 조카가 만나는 장소로 설정한 곳이었다. 특히 1789년을 전후해서 카페는 혁명의 주역들이 은밀히 모여 혁명을 준비하고, 시시각각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치적 사태에 대비했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카페와 비교해볼 때 프랑스 카페에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다. 영국 카페가 엄숙하고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파리 카페에서 정치 개혁은 극적인 연출로 승화했다. ‘카페 데 아뵈글’에서는 귀머거리 가수가 이끄는 눈먼 악단이 나와 무능한 왕정을 비꼬는 패러디를 연출했고, ‘카페 베르’에서는 귀족을 비난하는 뜻으로 원숭이를 훈련시켜 손님의 목으로 달려들도록 했다. 경박하면서도 통렬하고 풍자적인, 지극히 파리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1780년대가 되면서부터는 파리에서도 더욱 진지한 접근이 시작되어 팔레루아얄에 있는 커피점들은 대단한 볼거리를 선사했고, 즉석연설을 들으려는 관중으로 커피점 안팎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현 정부에 반대하는 과격한 발언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1789년 혁명의 서막이었던 7월 14일의 바스티유 진격사건은 팔레 루아얄에 위치한 카페 드 푸아에서 시작되었다. 그날 밤 이 카페의 뜰에서 인민재판이 진행되었고, 파리 시장 플레셀이 민중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18세기에 카페는 1716년에 300여 곳, 1788년에 1800여 곳의 카페가 파리에서 성업 중이었으며, 대혁명직전까지는 파리에 카페의 숫자가 2,000개에 달했으며, 18세기 후반 무렵 카페는 도시의 변두리나 지방 소도시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1700년대에 카페의 수가 증가한 데는 오베르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파리 카페의 아버지라고 여겨지는 오베르냐는 파리에서 남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악지대인 오베르뉴에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예나 지금이나 엄격한 자립정신으로 유명하다. 1700년대에 가난에 찌들고 침체된 오베르뉴에 살던 농부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의 마을에서 캔 석탄을 파리에서 “샤르보니에”라는 이름으로 팔았고, 이어서 물과 레모네이드를, 다음에는 자신들이 파는 석탄으로 끓인 뜨거운 물을 팔았다. 이후 커피가 유행하면서부터는 커피를 끓여 사람들의 집 앞까지 배달해주었는데, 오베르냐들이 갖가지 도구를 끌고 질퍽한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는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해 한사람씩 장소를 정해 가게를 차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파리 카페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오베르냐들은 차츰 그들은 손수레 주위로 벽을 올리고, 밖에는 의자도 한두 개 내다놓았다. 그릇을 닦아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1800년대 후반까지 오베르냐 약 50만 명이 파리로 이주했는데 그러더니 ‘되 마고’, ‘카페 플로르’, ‘리프’를 비롯해 유명한 카페들이 속속 등장했다는 지적은 바로 파리 카페에 대한 오베르냐들의 영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토론의 장이자 혁명정신의 온상지였던 카페는 19세기에 카페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814년 11월 18일에는 “인구 5천 이하의 마을에서는 미사 시간 동안 카페의 문을 닫을 것.”이라는 하나의 법안이 공포되었지만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인들은 성당보다는 카페를 찾았다. 프로코프는 스탕달, 오스카 와일드 등 문학가들이 드나드는 문학카페로 돌아갔다. 1857년에 커피메이커라는 기계는 파리 보뱅가에 있는 카페 제넹에서 프랑스 최초로 도입된 이후 웬만한 카페에는 다 갖추고 있으면서 1분에 수백 잔씩 커피를 쏟아냈다. 이처럼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은 카페는 19세기에 파리 서부와 중심부의 부르주아 카페와 북동부의 민중카페로 분화되는 데 이것은 나폴레옹 3세의 지원 아래 1853년부터 18년간 추진된 오스만의 파리 근대화에 기인한다. 이때 이루어진 도시계획에 의해 저소득층은 파리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교외에 공장이 들어서는 한편, 파리 중심부에는 대로가 아름답게 정비되고 곳곳에 화려한 카페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세기에는 파리의 간선도로에 집만큼 카페가 많았던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19세기 파리의 유명한 그랑 카페 파리지엥은 호화로운 실내 장식의 극치였다. 부르주아 카페의 또 다른 예로서 에밀 졸라가 루공 마카르에서 “샹들리에의 빛이 차도까지 환히 밝혀”준다고 묘사했던 카페 리슈는 실제 이탈리엥가에 있던 카페로 파리의 대로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던 사교계의 카페에 비해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중 「XXVI. 빈자들의 눈」에서 등장하는 행인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마치 살롱을 이어 받은 것 같은 호화로운 카페를 가난한 어린 소년은 “가난한 자들의 황금을 모조리 벽에 발라놓은 것 같구나.”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 집은 가난한 자들과는 다른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공간이다.
  


  이에 반해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카페는 노동자 계급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세기 말부터 생겨나 ‘서민들이 드나드는 곳’의 의미를 지닌 카페의 다른 이름인 카바레와 간이식당을 포함해 커피와 술, 음식을 파는 다양한 형태의 카페는 19세기 중반 무렵 4천여 개였지만 1885년에는 4만 2천여 개로 증가했다. 노동자들은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대신 대부분의 여가시간을 카페에서 보냈다. 부르주아의 “행복한 집”과는 달리 비좁은 거주 공간에서 살아야 했던 노동자 계급은 언제나 같은 곳에서 방문객을 반겨주는 카페 주인, 거주지의 이웃인 단골손님들, 답답한 집보다 숨통이 트이는 카페 공간에서 상호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친숙함과 편안함으로 인해 카페는 노동자에게 자연스럽게 친목과 휴식의 공간이자 근대적 여가를 향유할 수 있는 장소였다. 노동자들은 적은 수입을 카페에서 다 써버린다는 우려의 시선을 받기도 했으며, “도덕적 타락과 무절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카페는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발견하는 공간이 되었다. 화가, 조각가, 시인, 소설가, 음악가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며 새로운 영감을 찾아 카페로 모여들었다. 보들레르는 『인공낙원』(1860)에서 카페 데 자르에 모여 취한 예술가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커피 상인이자 하레르의 시인이었던 랭보는 그는 데카당의 상징이었던 폴 베를렌과 ‘카페 라 모르’에 곧잘 나가곤 했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손을 탁자에 얹으라고 하고는 이 남자의 허리를 베었고, 베를렌은 랭보를 총으로 쏘아 이에 화답한다. 랭보는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고가의 신종 독주였던 압쌩뜨를 즐기곤 했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카페는 시골 술집 형태인 비스트로로 변형되었다. 모파상의 『저녁』이나 졸라의 『파리의 중심』에서 볼 수 있듯이 당구대가 등장한 카페는 도박, 음담패설 등 타락과 범죄와 온갖 악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카페는 ‘만젱그’, ‘아소무와르(목로주점)’ 등으로 불렸고, 간판에는 ‘오 트라바이외르’ 등으로 쓰여 있었다. 
  


  19세기 말이 가까워 오자 예술가들은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빠띠뇰가의 카페 게르부와를,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은 라 누벨 아텐느를 자주 찾았다. 카페 리베르에서는 공모전에서 낙선한 화가들의 그림이 카페벽에 처음으로 전시되기도 했다.
  20세기 초엽의 파리의 카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일으킨 추문의 발생지였다. 카페는 ‘분류할 수 없는 생각들과 한결같은 반항심’을 가진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낭만적인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들은 카페 세르타, 파사주 드 오페라에 있는 르 프티 그리용, 또는 브르통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플라세 블랑슈의 시라노에서 만났다. 시라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국외자나 괴벽스러운 인간들과 섞일 수 있는 사회 주변부로서 매력적인 장소였다. 몽파르나스 대로에 있는 카페인 클로즈리 데 릴라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최초의 추문을 일으켰던 현장이다. 1925년 7월 2일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가 시인 생 폴 루를 위해 문학 축하연을 열었던 이 카페에서 초현실주의자들은 격한 슬로건을 외쳤고, 주먹이 오갔으며, 창문이 깨지는 등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사건 다음날, 문인협회의 위원회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수치스러운 생동’을 비난했고, 비평가들은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주의’로 끝나는 운동의 이름을 쓰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부르주아의 기성질서에 대한 공격으로, 무정부주의적이며, 점잔빼는 사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숭배하는 모든 것을 훼손하고자 함이었다. 
  1920년대 이후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 언덕을 내려와 현대화된 도시의 세련됨을 풍기는 몽파르나스 구역의 카페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미국 출신 화가들의 카페인 ‘라 쿠폴’은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문인과 지성, 대학생들이 붐비는 생 제르맹 데 프레 구역의 카페 되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는 좋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수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곳이다. 1885년에 연 카페 되 마고와 1881년에 연 카페 플로르에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초현실주의 작가들, 발레리, 릴케, 꼭또, 오스카 와일드, 막스 에른스트, 피카소, 브라크, 지드, 생텍쥐페리, 헤밍웨이, 카뮈, 말로, 바르트 등 많은 문인과 화가, 철학가들에게 담론의 장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 이 두 카페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등 당대의 문인과 철학자들이 모여 세계를 뒤흔든 실존주의 철학을 꽃피웠던 세계 지성의 산실이다. 카페 플로르의 주인인 폴 부랄에 따르면 위대한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는 “엑스프레소 한 잔을 놓고 잔을 채우는 법 없이 아침부터 밤중까지 앉아 열두 시간을 버티는 놀라운 괴력을 보여주는 가장 지독한 손님”이었다. 이런 사람들 탓에 전 세계 카페의 수도인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카페는 앉아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곳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곳이 되었다. 이와 같은 파리의 카페는 1968년의 5월 학생운동을 거치면서 여전히 위력을 나타내었다. 짧은 바지를 입고 미키마우스 모자를 쓴 관광객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로코프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프랑스에서 카페는 17세기에 처음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카페는 오아시스'라는 에드가 모랭의 말처럼 프랑스인이 일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공간이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찾아 소통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공간이며, 각 시대마다 그들의 집단 정서를 프랑스의 힘으로 결집시킨 혁명의 공간이며, 그 결과 오늘날 프랑스인의 자부심의 문화를 설명해주는 공간이다. 비록 맥도날드와 패스트푸드점이 인기를 끌면서 예전에 자주 들르던 카페를 찾아가보면 문을 닫았기가 일쑤이지만 아주 적은 양의 독한 로켓 연료 같은 커피를 앞에 놓고 종업원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단지 취조실에나 어울릴 법한 장난감처럼 작은 탁자와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을 여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카페에는 프랑스인들의 오랜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카페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코페이느이 돔’이나 ‘콘디테르스카야’가 러시아에 도입되고 성행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초였다. 당시에 이 장소들은 귀족들이 커피, 과자, 캔디등과 같은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는 기호 식품들을 맛보며 담화를 나눌 수 있는 여가 공간이자 교류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카페는 귀족의 전유물에서 문인과 예술가, 중류층이 애호하는 장소로 서서히 변하게 되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당대 문화의 주된 소비 계층이었던 귀족들에겐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카페와 유사한 기능을 한 살롱과 무도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페’라는 이름이 러시아에 최초로 쓰인 것은 19세기 중반, 정확하게는 1841년 최초의 카페가 페테르부르크에 문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콘디테르스카야에서도 커피를 판매하기도 했지만 콘디테르스카야의 주된 상품은 과자와 캔디, 빵 종류였다. 커피와 음료는 단지 과자 등을 먹기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당대의 사전에 쓰인 ‘카페’의 정의는 오늘날의 의미와 유사하게 ‘커피, 음료, 술, 가벼운 안주거리를 파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러시아 최초의 카페는 1841년 5월에 문을 연 현재 네프스키 거리 24번지 루터 교회에 위치한 ‘도미니크’라는 카페였다. 스웨덴의 과자 공장 명인인 도미니크 리츠아포르타의 이름을 따서 개장된 이 카페는 당대 지식인과 문인이 즐겨 찾던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도미니크는 앞서 언급한 콘디테르스카야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신문과 잡지 등이 배치되어 있어 정보를 얻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체스나 장기 등을 두는 여가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특히 도미니크 카페에는 앞서 언급한대로, 귀족들 보다는 대학생들, 저널리스트들, 그리 부유하지 않은 관리들이나 기술자들이 자주 모여 들어 성시를 이루었는데, 당대에 그들을 카페 이름과 유사한 중남미 국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비유하여 ‘도미니칸’이라고 부르기고 하였다.
  19세기 중엽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잡계급의 등장으로 러시아 사회에서는 귀족들의 여가와 소통 공간이었던 살롱과 무도회 대신에 중간 계층과 지식인들, 더 넓게는 일반 대중의 여가와 소통을 위한 비교적 저렴한 레스토랑, 카페, 찻집, 바, 선술집 등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화, 자본화가 더욱 본격화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가속화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카페-카바레’라는 새로운 형태의 카페들이 등장하였다. ‘서민들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프랑스어 ‘카바레’를 합성하여 만든 ‘카페-카바레’는 대중적인 문화 소통 교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이 당시의 ‘카페-카바레’는 19세기 귀족들의 살롱처럼 카페의 주인이 손님들 간의 교류와 여가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당대의 예술가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카페-카바레’중 가장 유명했던 카페는 1912년 페테르부르크의 미하일로프스키 광장의 반지하 건물에 문을 연 ‘방랑하는 개들’이라는 곳이었다.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에 있던 카페-카바레 ‘르 샤 누아르’(불어로 ‘검은 고양이’를 의미함)를 본떠 만든 이 카페에는 연극연출가 메이예르홀드, 화가 사푸노프, 수제이킨을 비롯하여 프로닌, 예브레니노프, 알렉세이 톨스토이 등과 같은 작가들이 즐겨 찾았다. 프랑스의 ‘르 샤 누아르’ 카페가 아방가르드 문화의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카페 ‘방랑하는 개들’에도 안나 아흐마토바, 콘스탄틴 발몬트, 니콜라이 구밀료프 등과 같은 작가들이 모여 러시아 아방가르드 문화를 주도했으며, 은세기 러시아 문학의 중심지가 된 일종의 ‘예술 카페’의 토포스를 발현하였다. 카페의 이름인 ‘방랑하는 개들’이란 표현은 오갈 데 없는 당시 예술가들의 형상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고, 또한 이곳에서 벌어진 그들의 정기적인 모임은 ‘개들의 회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카페는 예술을 빙자한 떠들썩한 주연과 퇴폐적인 분위기로 인해 적지 않은 비판에 시달리다가 당시 주류 판매법 위반으로 1915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카페 ‘방랑하는 개들’의 분위기에 대해 아흐마토바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그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요, 난 그들의 떠들썩한 밤 모임을 사랑했어요.
나지막한 작은 탁자 위에는 얼음 가득한 술잔들,
검은 커피 위로는 푸르스름한 김들,
붉은 난로에서는 무거운 겨울의 열기들,
오고가는 문학적 농담 속에는 즐거움들이....” 
(아흐마토바, 『그래요, 난 그들의 떠들썩한 밤 모임을 사랑했어요』, 1916) 

  예술가들의 주된 모임 장소이자 상호 교류와 교제 역할을 한 카페로 페테르부르크의 ‘돔 아다미니’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탈리아 건축가 아다미니가 19세기 중반에 건축한 이 건물의 반지하에 1916년에 ‘희극인들의 지하실(러시아어로 ‘프리발 코메디안토프’)이라는 카페가 개장되었다. 연출가 메이예르홀드의 주도로 개설된 이 카페 역시 문인과 예술가의 회합 장소로 유명하였는데, 이곳에서 직접 그들의 시, 그림, 음악, 연극들을 발표하고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아흐마토마, 블록, 구밀료프, 고리키, 브류소프, 마야코프스키 등이 그 대표적인 작가들이었다. 
  카페가 단순한 여가와 휴식의 기능을 넘어 당대 문화의 주도적이며 중심적인 공간의 토포스를 발현한 것은 1917년 혁명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었다. 특히, 혁명 후 러시아 문학은 이른바 ‘카페 문학의 시기’라는 독특한 현상을 잉태하였다. 이는 혁명, 내전 등으로 피폐해진 국내 경제 상황으로 종이 공급과 인쇄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카페에서 직접 낭독하여 대중들에게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작품들은 시(詩)가 주를 이루었는데, 시인들은 대중들 앞에서 직접 시를 낭송하면서 오히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비에트 최고 인기 시인인 세르게이 예세닌이 탄생하게 되었다.
  특히 예세닌이 자주 찾던 카페이자 자신의 많은 시들을 발표한 장소였던 ‘스토일로 페가수스’ (‘페가수스의 둥지’라는 의미)는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애용하던 장소였다. 모스크바의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위치한 이 카페에는 예세닌을 비롯하여 둔칸, 클류예프, 타이로프등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러시아 이마쥐즘 운동을 주도해나가기도 하였다.

비교문화적 설명   커피에서 유래가 되어 주로 ‘커피를 마시는 집’을 의미하는 ‘카페’는 근대 유럽 문화권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매우 의미 토포스를 발현한 공간이다. 초기에는 귀족 중심에서 19세기 이후 중류층에까지 그 문호가 개방된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장소를 넘어 정치, 사회적 문제의 토론의 장이자 문학 예술인들의 활동 장소의 역할을 하였다. 
  카페의 이러한 토포스는 프랑스와 러시아 양국에서 유사하게 진행된다. 17세기 이후 프랑스에서 커피가 사교를 위해 마시는 음료로 대중화되면서 커피를 마시기 위한 ‘카페’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술을 먹지 않고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공간으로서 카페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치토론의 장이자 혁명 정신의 온상지의 역할을 하였다. 대혁명의 시기가 지난 19세기부터 카페는 시인, 예술가, 철학자들에게 문학, 연애, 취미, 철학 등에 관한 담론의 장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20세기에는 아방가르드 문화 예술가들의 주된 창작 공간이 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이후 프랑스의 카페는 시골 술집 형태인 비스트로로 변형되면서 도박, 음담패설 등이 난무하게 되었고, 타락과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이후 유럽 문물 수입에 열광적이었던 러시아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커피와 카페에 귀족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러시아의 카페도 프랑스와 유사하게 정치적 문화적 담소를 나누는 귀족들의 여가 공간으로 애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 러시아의 카페는 귀족들보다 중류층이나 문인들의 공간으로 대중화되면서 정치, 문화에 관한 토론의 장소로서 큰 기능을 하였다. 특히, 프랑스와 매우 유사하게 러시아의 카페 역시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나 때로는 작품을 발표하는 예술 공간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연관 토포스 무도회; 살롱; 술; 축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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