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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즘
범주명 정치와 역사
토포스명(한글) 테러리즘
토포스명(프랑스) terrorisme
토포스명(러시아) террор, терроризм
정의 1. 공포심을 더 자극할수록 테러의 효과는 더욱 커진다.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프랑스)   프랑스어 ‘테뢰르 terreur[tεʀœːʀ]’는 두려움이나 공포가 극대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어휘로 라틴어 terror(두려움, 공포)를 어원으로 갖는다. 테러리즘은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생겨난 용어로, 1793년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급진 자코뱅 당이 정책적으로 채택한 정치적 폭력, ‘라 테뢰르’(la Terreur, 대공포정치)에서 파생되었다. 
  생존과 관련된 원초적인 공포의 감정과 달리, 공포를 야기하는 요인들이 사회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며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집단적 공포는 대개 폭력적인 양상을 보인다. 공포의 개념이 사회현상을 넘어 본격적으로 정치적 함의를 갖게 되는 것은 “라 테뢰르(La Terreur)”라는 표현을 통해서이다. “민중의 저항을 분쇄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중에게 의도적으로 조장한 집단적 공포”의 의미로 사용된 용어 ‘라 테뢰르’는 1789년에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1794년에는 ‘테러리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이는 1798년 프랑스 아카데미가 편찬한 사전의 부록에 처음으로, 파생어 ‘테로리제’(terroriser, 공포정치를 하다)(1796), ‘테로리스트’(terroriste, 공포정치가)(1794)와 함께 대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현상을 지시하는 용어로 등재되었다( http://www.cnrtl.fr 참조).
  이전에도 정치에서 공포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은 있다. 멀리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에서 군주가 국가창건이라는 결과를 실현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력, 즉 공포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언급이 있었고, 18세기에는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1748)에서 “전제정치의 통치 원리는 공포에 있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공포’는 마키아벨리가 통치 수단으로 인정한 공포 개념의 연장선에서,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한 불굴의 정의와 다른 것이 아니다. (……) 공포는 조국의 긴박한 요구에 따른,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의 결과이다.”(로베스피에르, <의회연설>, 1793)라는 주장을 통해 하나의 정당한 정치체제가 된 것이다(알랭 레이, 『프랑스어 문화사전』 참조). 
토포스의 기원과 형성(러시아)   러시아어로 테러, 테러리즘을 뜻하는 단어들은 모두 프랑스어로부터 유입된 것들로서, 러시아어 ‘테로르 террор[terror]’는 ‘두려움, 공포’를 뜻하는 라틴어 terror로부터 프랑스어 ‘테뢰르’를 거쳐 러시아어로 들어오게 된다. 그 유입 경로가 말해주듯 러시아에서 테러리즘의 개념이 널리 확산되는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라 테뢰르’ 시대 곧 공포정치 시대를 거치면서이다. 러시아어 ‘테로르’는 일차적으로 1793~1794년 자코뱅파가 반혁명 세력에 가한 강력한 제재와 극단적 조치들 혹은 그 시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이후에 정치적 전략으로서의 폭력을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된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ㆍ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표준국어대사전>)로 정의되는 테러리즘의 개념 안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성의 테러 개념이 혼재해 있다. 정권을 거머쥔 지배집단이 권력 유지를 위해 피지배집단에 행하는 위로부터의 테러와 반대로 피지배집단이 통치자의 암살과 같은 행위로 지배 권력에 가하는 아래로부터의 테러도 존재한다. 일견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테러라는 하나의 용어로 통칭되는 이유는 그 동일한 작동 원리 때문일 것이다. 테러는 인간의 근본적이고도 보편적인 감정인 공포감을 조성하여 사회를 통치, 지배하거나 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러시아에서 테러라는 용어가 일상화되고 널리 확대되는 것은 프랑스의 공포정치 시대 이후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위로부터의 테러 곧 차르들이 자행한 공포정치로서의 테러 개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공화정의 통치 원리는 ‘미덕’이고, 군주제의 원칙은 ‘명예’이며, 전제정치의 통치 원리는 ‘공포’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 제정러시아 시대 절대 권력자 차르들은 공포의 정치적 기능을 십분 활용하였다.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프랑스)   공포정치의 상징은 단두대이다. 혁명 발발 이후 공포정치 기간 동안 수감된 사람은 10만~30만 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은 3만5천~4만 명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공포정치는 1792년 9월 2일∼6일 동안 파리에서 수많은 죄수들이 학살된 사건이다. 이 학살은 1792년 8월 10일 왕정이 전복된 뒤 드러난, 혁명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표시로 해석된다. 당시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반혁명 음모에 가담하기 위해 봉기를 계획한다는 소문을 듣고 파리 시민들이 무장한 채 아바예 감옥으로 이송되던 그들을 공격, 살해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그 후 나흘에 걸쳐 파리의 여러 교도소로 학살은 번져나갔고, 모두 1200여 명의 죄수들이 즉결재판도 받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두 번째 공포정치는 1793년 6월 자코뱅 당이 국민공회에서 지롱드 당 의원들을 추방하고 권력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당통, 마라와 더불어 산악파의 거두인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자코뱅 당은 그해 9월 반혁명 용의자에 대한 법령을 제정하고 공안위원회에 의한 군사 지배체제를 확립시켰다. 10월에는 국민공회가 임시정부를 ‘혁명정부’로 개칭하고 공포정치를 승인함으로써 이때부터 본격적인 공포체제가 시작되었다. 혁명정부는 혁명의 여파를 두려워한 유럽제국들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명분 아래 최고가격제와 물자 통제, 배급제를 실시하며 권한을 더욱 강화했고, 이에 반발하거나 법령을 위반하는 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지롱드 당 의원들을 비롯하여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으며, 차후에는 자코뱅 당 내에서도 공포정치를 반대하는 당통 등 동지들이 처형당했다. 

“공포가 독재정부의 원동력이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부도 독재체제와 닮았는가? 그렇다. 자유를 쟁취한 영웅들의 손에서 반짝이는 검이 독재자의 위성국들 손에 들린 검과 닮았듯이. 독재자가 멍청한 신하들을 공포로 다스릴 때, 독재자로서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의 적들을 공포로 제압하라. 공화국의 설립자로서 여러분들도 옳은 일을 하고 있다. 혁명 정부는 독재자에 대항하는 자유의 전제군주이다. 힘이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만들진 것인가? 벼락 맞을 오만한 사람들을 내려치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로베스피에르, <의회연설>, 1794)

  공포정치는 ‘테르미도르(혁명력 11월, 1794년 7월)의 반동’이 일어나면서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가 실각, 처형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피의 공포정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은 19세기 초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공화국에 대한 관심을 퇴색시키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공포정치’에서 나타난 공포의 정치적 함의는 혁명 이후 제3공화국이 들어서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출현한 테뢰르 블랑슈(terreur blanche, 백색 공포정치)라는 표현에서 지속된다. 백색공포는 1795년 전반기에 프랑스 남서지방에서 왕정주의자들이 반 자코뱅을 기치로 당을 결성하고 실시했던 공포체제, 1815년 여름 보나파르트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왕당파들이 자행한 보복, 또한 1871년 독일에 대한 항쟁을 늦추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파리코뮌이 실패한 뒤 코뮌 가담자들에게 행한 정부의 대량학살을 모두 가리킨다. 잇따른 혁명과 봉기의 시대 19세기를 요약하는 공쿠르의 다음 구절은 혁명과 공포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세 가지 공포, 적색 공포, 백색 공포, 삼색 공포가 한 달 사이에 연달아 이어졌다면, 똑같은 재판소가 설치되어 심판하고 처벌을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래 끄는 사건들이 있다면, 바로 그 재판소가 백색 공포 하에서는 적색 공포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이고 삼색 공포 하에서는 백색 공포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이다.” (공쿠르, 『일기』, 1861)

  이처럼 사적인 이해관계에 의한 살인이나 폭력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공포 개념은 오늘날에도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라는 표현에 그대로 남아있다. 백색테러는 정치적으로 극우 또는 우익에 의한 테러를, 적색테러는 좌익에 의한 테러를 각기 가리킨다. 
  혁명 시대 정치체제나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공포 개념이 반영되었던 테러리즘은 20세기 이후로는 함의가 달라진 듯하다. 테러리즘이란 표현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집권세력이 극단의 조치와 집단적 공포를 동원하여 저항 세력을 제압하는 정치적 수단의 의미보다는, 폭력의 체계적 사용이라는 의미에 더 강조점이 두어진다. 이는 테러리즘이 전쟁 상황이나 정치적, 종교적 분쟁지역에서 소수자 내지 약자가 항거를 위해 은밀하게 사용하는 폭력적 수단의 의미로 더 자주 사용되는 데서 확인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친 나치주의를 표방한 비시정부와 나치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1793년 자코뱅 당의 공포정치가 주장한 정치적 정당성은 차츰차츰 ‘테러리즘’의 의미에서 배제되어왔다. 공포정치에 대한 루이 블랑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이미 19세기에 공포정치의 정치적 정당성은 부인되었음이 확인된다. 

“공포정치는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위험에서 생겨난 거대한 불행이고, (……)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절박한 임시방편이었지, 결코 통치 이념은 아니었다. (루이 블랑, 『불가능한 공포정치』, 1878) 

  오늘날 테러리즘은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사이버 공간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더욱 복잡하고 무차별적인 양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내리기 불가능하다는 점이 테러리즘 정의의 핵심이라고 말할 만큼 명확하게 윤리적, 사회적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다만 테러리즘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과 희생을 초래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유럽위원회는 2001년 테러리즘을 명백한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테러리즘은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 시민 또는 시민의 일부를 위협하거나 압박할 목적으로 인명이나 재산에 힘과 폭력을 불법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다.” (존 브라운, <테러리즘을 정의하기 위한 위험한 시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
토포스의 전개와 사례(러시아)   제정 러시아 시대 그 어떤 차르들보다 집단적인 공포심을 조장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인물은 단연 이반 4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공포정치의 상징 이반 4세는 무서운 황제, 잔혹한 황제, 곧 ‘이반 뇌제’라고도 불리는데 ‘이반 뇌제’라는 이름에서 그의 성정과 정치 스타일, 그리고 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감이 묻어난다. 이반 뇌제의 공포정치의 밑바탕에는 ‘오프리치니나’가 있었다. ‘오프리치니나’는 고대러시아어 опричь(‘특별한, 예외적인’)로부터 온 것으로, 황실과 그에 복무하는 자들을 위해 구분된 특수 영지를 가리킨다. 또한 그 수행원을 지칭하는 ‘오프리치니키’는 이반 뇌제의 임무를 비밀스럽게 수행하던 일종의 친위대와 같은 것이었다. 이반 뇌제는 오프리치니나라는 독특한 공포정치 체제를 통해 권력에 위험이 될 만한 대귀족들과 반대자들을 박해하고 제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위로부터의 테러는 권력자가 권좌의 위협을 느낄 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 수단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잔혹한 공포정치를 할 만큼의 정치적 정적이나 위협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오데스키&펠드만, 『테러의 시학』 참조).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독재자의 심리적 측면이다. 테러가 정치적 수단을 넘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나타나는 ‘테러의 과잉성’은 독재자의 독특한 심리 체계, 그 안에 권력과 박해라는 두 가지 마력이 병적으로 공존함으로써 발생한다는 분석이 대두된다(스툐피나, <새철학백과사전> 참조). 
  


  위로부터의 테러 곧 공포정치는 대중을 공포로 떨게 만들었지만 위에서 군림하던 차르들도 테러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수많은 차르들이 테러의 위협을 받았으며 실제로 파벨 1세(1801), 알렉산드르 2세(1881), 니콜라이 2세(1918)와 같이 테러로 암살 혹은 처형된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 중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테러 중 하나로 기억된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를 철폐(1861)하는 등 일련의 자유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러시아 내 급진 세력의 성장과 혁명 운동의 조짐이 확산되자 점차 억압적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여기에 1863년 폴란드의 반란과 1866년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은 그를 보수주의자로 돌아서게 만든 결정타가 되었다. 1860년대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 팽배했던 허무주의 사상은 전통적 권위에 대한 투쟁을 가속화시켰고 급진 세력들에 의한 테러가 러시아 곳곳에서 일어났다. 여러 테러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던 알렉산드르 2세는 마침내 1881년 인민주의 과격파들이 결성한 ‘인민의지 당’의 테러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원, 볼셰비키 등 다양한 급진 세력들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은, 그 지향하는 목표는 다소 상이하였을지라도 차르 체제와의 투쟁과 반대파의 제거에 테러의 전술을 기꺼이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특히 세계 테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볼셰비키 테러는 ‘적색테러’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적색테러와 백색테러는 프랑스를 통해 러시아로 유입된 개념들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적색테러는 혁명파가 왕정복귀를 꾀하던 반혁명파에 가하던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가리키며 그와 반대로 반혁명파의 보복 행위를 백색테러라 지칭하였다. 러시아에서 이들 용어가 일반화된 것은 1905년 혁명 이후 내전 기간(1918~1922)을 거치면서이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테러는 좌파 진영뿐만 아니라 우파 진영에서도 적극적으로 취한 전략이었다. 러시아에서 적색테러는 볼셰비키 정권이 반혁명파에 가한 극단적 조치들을 가리키고, 백색테러는 내전 기간 중 백위군들이 감행한 보복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레닌은 적색테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테러의 진짜 죄인들은 핀란드와 헝가리, 인도, 아일랜드 등에서 백색테러를 감행하였고 또 여전히 감행하고 있는 영국의 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조력자들이다. [...] 우리의 적색테러는 착취자들에 대항해 노동자 계급을 보호하고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것이다.” (레닌, <영국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서한>, 1920)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위로부터의 테러는 스탈린의 것으로 간주된다. 스탈린은 정권을 장악한 후 테러를 정책적으로 채택하였다. 그는 테러를 인민의 적, 계급의 적으로부터 사회주의 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국가의 불가피하고도 필수적인 대응으로 천명하고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피의 숙청을 감행하였다. 소위 ‘스탈린 테러’라 불리는 피의 숙청은 1934년 12월 레닌그라드 공산당 당수였던 키로프 암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다. 키로프가 암살된 날 체포된 사람들 중 백 여 명 이상이 일주일 안에 처형되었다. “인민의 적을 일소한다”라는 구실로 실시된 숙청의 바람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휘몰아쳤으며 1936~1938년, 이른바 ‘대테러’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강제수용소를 뜻하는 굴라크(ГУЛАГ)는, 프랑스 공포정치의 상징인 단두대처럼, 소비에트 시대 잔혹한 국가 테러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 숙청의 절정기였던 1936년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몇 년 동안 굴라크에 수용된 사람들이 대략 천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스탈린 테러와 굴라크의 실상은 솔제니친에게 사형선고와 강제추방을 안겨다준 『수용소 군도』(1976)와 2004년 퓰리처상 논픽션 수상작인 앤 애플바움의 『GULAG』(2003)에서 상세히 다루어진 바 있다.
  사회변혁이라는 목표를 위해 폭력, 암살, 학살 등, 그 어떤 방식도 서슴지 않았던 테러리스트들이지만 테러를 감행하는 그들의 심리세계가 어떠하였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실제 테러리스트였던 사빈코프(필명 롭신)의 소설들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했던 사빈코프는 플레베 장관의 암살(1904)과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암살(1905)을 주도했던 전설적인 테러리스트이다. 사빈코프는 테러리스트로서의 실제 경험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적 갈등, 실생활의 모습을 『창백한 말』(1913), 『없었던 것』(1918), 『검은 말』(1923)과 같은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자전적 소설로 읽히는 사빈코프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빈코프 자신처럼 자기 확신에 가득차고 열정적인 테러리스트들이다. 사빈코프는 죽음을 각오한 테러리스트에게 테러가 죄인지를 묻는 것이 무의미함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다. 내게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 삶이 없는 곳에는 법도 없다. 죽음이란 곧 법이 없음을 의미하니까” (롭신, 『없었던 것』, 1918)

  그러나 주인공의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테러의 정당성, 그 도덕적 근거에 대한 회의와 싸워야했다. 테러리스트로서 사빈코프는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찾았을지 모르겠으나 작가로서 사빈코프는 여전히 이것의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세계의 주요 문제였던 ‘살인이 허용되는 것인가’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은 사빈코프의 또 다른 자아였던 그의 작중인물들을 괴롭혔으며 당의 동지들은 그의 이러한 내면적 혼란을 ‘도스토옙시나’(достоевщина, 도스토옙스키 작중인물들의 심리적 갈등, 혼란을 지칭하는 말)라 부르며 비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테러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로 괴로워했던 이가 비단 사빈코프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교문화적 설명   프랑스어로 두려움이나 공포가 극대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 ‘테뢰르’는 라틴어 terror로부터 기원하며 러시아어로 테러, 테러리즘을 뜻하는 단어들 역시 라틴어로부터 프랑스어를 거쳐 유입된 것들이다. 그 어원에서도 드러나듯이 테러리즘은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공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여 사회를 통치, 지배하거나 이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을 가리킨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중의 집단적 공포감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이용하는 ‘공포정치’ 이른바 ‘라 테뢰르’, ‘테러리즘’, ‘테러리스트’는 모두 프랑스 대혁명(1789)을 거치면서 생겨난 용어들로서 이후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러시아에도 이들 용어가 유입되어 널리 확산되는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절대 권력자 차르의 ‘공포정치’로서 테러리즘은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러시아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이반 4세에서부터 적색테러의 온상 볼셰비키 테러에 이르기까지 공포와 정치의 독특한 결합, 테러리즘은 러시아 역사를 관통하는 토포스였다. 
  적색테러와 백색테러라는 개념도 프랑스를 통해 러시아로 유입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파가 왕정복귀를 도모한 반혁명파에게 실시한 극단적 공포정치 즉 적색테러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정권이 반혁명파에 가한 극단적 조치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1795년 왕정주의자들이 반 자코뱅을 기치로 당을 결성하고 실시했던 공포체제, 1815년 왕정복고기에 왕당파들이 자행한 보복 행위를 가리키던 백색테러는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백위군들이 감행한 보복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시차가 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는 모두 대규모의 격렬한 혁명을 겪은 나라들로 국가 차원에서 위로부터의 테러를 실시한 공통된 경험을 갖고 있다. 그 경험의 유사성 때문에 프랑스어 테러리즘과 거기서 파생된 어휘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러시아에 바로 유입되어 동일한 역사적 사건들을 개념화하는 용어로 적극 사용되었던 듯하다.
  20세기 이후 테러리즘은 폭력의 체계적 사용이라는 의미에 강조점이 이동하면서 정치, 종교적 분쟁 지역에서 소수자 내지 약자가 항거를 위해 은밀하게 사용하는 폭력적 수단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백색테러는 정치적으로 극우 또는 우익에 의한 테러를, 적색테러는 좌익에 의한 테러를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분명한 것은 테러리즘이 그것의 폭력적 양상 때문에 명백히 불법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공포정치의 상징 단두대도 소비에트 시대 잔혹한 국가 테러의 상징 굴라크도 권력의 집단적 폭력 행사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테러가 갖는 반인류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연관 토포스 공포; 이데올로기; 전쟁; 정의; 죽음; 허무주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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